모처럼 문화생활 – 신에게 가까이

<4월 16일 이전에도 세상은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지옥이었고, 우리는 세월호 탑승객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비로소 끔찍하게도 잔인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떴다. 생명과 안전보다 돈과 이윤이 우선하는 세상을 보았다. 부패한 정치권력의 무능과 무책임을 보았다. 왜곡과 오보를 남발하는 언론의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국가가 실종되었음을 보았다. 우리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어떻게 철저히 묻어버리고 은폐하며 억압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우리는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이다.>

‘4.16연대’라는 단체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자 선포한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 규약>에 있는 글의 일부이다. 자신들을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라고 규정한 이들이 6편의 독립영화들을 제작했단다. 이름하여 <망각과 기억2 : 돌아 봄>이라는 주제로 만든 영화들이란다.

나는 어제 필라델피아에 올라가 그 여섯 편 가운데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첫번 째 상영된 영화 <승선>은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생존자’라고 분류되어진 한 사내의 이야기였다. 그랬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후, 그는 분류되어 버린 인간이 되었다. ‘일반인’ 그리고 ‘생존자’라는 딱지가 그것이었다. 물론 세상 사람 누구도 그에게 그런 딱지를 붙었다는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어찌하리! 그는 분명 그 딱지를 붙이고 살았던 것을. 영화는 그가 그 딱지들을 떼어내는 과정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공감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이들을.

두번 째 영화 <잠수사>는 세월호를 만나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잠수사 김관홍과 그 주변 인물들을 기록한 영화였다. ‘김관홍’ – 그는 참 사내였고 참 사람이었다. 영화는 이 간단한 명제를 증명한다. 그는 타고난 그의 재능과 일에 충실하였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그의 재능이자 일이었다. 그런 그가 아파했다. 어느 순간 그가 하는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 대신 ‘죽은 자를 건져내는 일’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는 끝내 절망에 이르렀다. 그나마 ‘죽은 자를 기다리는 얼굴들을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 자신을 바라본 까닭이다. 영화는 잠수사 김관홍의 잃은 아내와 아이들을 쫓아간다. “공감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이들을.

세번 째 영화 <세월 오적(五賊)>은 세월호 참사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다섯 권력 기관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바로 박근혜, 김기춘, 우병우 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청와대, 해수부, 해경으로 대변되는 행정부권력, 남재준이라는 이름으로 우스개가 된 정보기관 국정원, 조중동, 한경오, KBS, MBC 등등의 언론, 그리고 국해가 되어버린 국회, 이 다섯 권력의 축들의 그 때 그 모습들을 기록한 영화이다. 그들을 고발하는 카메라의 눈 역시 “공감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나는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들이 만든 세 편의 다큐멘타리 영화를 보면서 안도와 희망과 섭리를 보았다.

안도(安堵) – 지난 달 한국의 정권이 바뀐데서 온 안도였다. 영화를 보며 지난 달 정권이 바뀌고 난 후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잠수사 김관홍 가족들이 느꼈을 안도가 내가 다가오던 것이었는데, 나는 그 순간 이 안도의 시간들이 오래 이어지기를 기도하였다.

희망 – 희망보다는 소망이 낫겠다. <세월 오적(五賊)>으로 명시된 이른바 권력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지경을 넘어, 권력의 이름으로 무참히 짓밟혔으나 하소연은 커녕 숨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스러져 간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이제야 마련되었다는 생각에서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들이 만들어낸 세상이다. 멀리는 제주 4.3 항쟁에서 가까이는 광주 항쟁까지. 이제는 목격자들과 증언자들이 큰 숨으로 제 소리를 낼 세상이 되어야한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더는 오적(五賊)으로 불리우는 권력들을 용납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소망과 희망으로.

그리고 섭리 – 예수쟁이인 나는 결국 성서로 돌아간다. 지금 여기에서 아프고 한맺힌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한 법전인 신명기법전을 이야기하는 성서로 돌아간다. 모세에서 예수까지, 아니 지금 우리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모든 법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사는 삶을.

그렇다.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인 그들로 하여 세상은 조금은 더 성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게다.

산에 언덕에

새 정권이 들어선 한국에서 전해오는 소식들을 보고 느끼는 감정들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기대와 설렘으로 소식들을 마주합니다만, 어떤 이들은 염려와 불안의 시선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무릇 모든 ‘역사는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진보’라고 선언했던 어느 역사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이들에겐, 정권의 뒤바뀜이나 세상 변화는 모두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나아가 ‘역사란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에겐 믿음입니다.

그 모든 과정 또는 믿음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살과 뼈를 저미는 아픔과 슬픔으로 곰삭은 한(恨)을 안고 이고 살아내어 역사의 맥을 이어온 사람들입니다.

반세기 전인 1963년에 시인 신동엽은 한반도 남쪽 들녘에 핀 꽃들을 보며 그 역사의 맥을 이어온 사람들을 노래했습니다.

산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2017년 6월 4일 오후 4시 여기 필라델피아에서 우리들이 모여 <승선>, <세월오적>, <잠수사> 등 짧은 영화들을 함께 보려는 까닭은 세월호 참사로 아파하는 이들이 이어가는 역사를 확인하고자 함입니다.

꽃을 보며 ‘울고 간’ 영혼들을 떠올린 시인은 되지 못할지언정, 영화라도 보며 ‘다시 피어나고’, ‘다시 살아가는’ 역사의 맥을 잇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코자하는 작은 몸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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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차마 말 한마디,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맘 졸이며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였다. 떠나와 사는 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 뿐이었다. 무릇 기도란 이미 이루워진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였다. 마침내 들려오는 소식들에 기뻐하였다.

내가 때때로 떨쳐내지 못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신(神)이지만 그는 늘 신실하였다.

아직도 악한 마음으로 거짓된 입을 열어 사람들을 속이고 미워하고 저주하는 말들을 쏟아내는 이른바 언론과 명망가들의 소리가 높을지라도 언제나 신(神)은 신실할지니.

오늘, 아파하고 슬퍼하거나 궁핍하고 상하여 시름하는 이들 나아가 그들과 공감하려 기도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믿나니.

단지 시늉일 뿐이라도 이러한 신(神)의 정의(正義)와 함께 하려는 권력을 축복할지니.

하여 성서에 기록된 이 혹독한 저주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할지니.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 시편 109편 1-20

기억에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점을 제외하고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를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로 만든 건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유태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전범으로 교수형을 받고 처형된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끝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런 아이히만에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죄를 묻고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를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순전한 무사유’에 빠진 이들이 아닌, ‘악의적 사유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만이라도 ‘사유’ 곧 생각하며 사는 일을 의무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다짐할 일이다.

잊지않고 기억하는 일이 소중한 까닭이다.

2017년 4월 16일 부활주일, 필라델피아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뜻을 새겨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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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속이면…

오늘 아침에 눈을 떠 서성이다가 책장 속 평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던 곳에 꽂혀있는 책 하나 눈에 뜨였다. 오래 전 도서출판 청사(靑史)에서 펴낸 ‘칠십년대 한국일지’라는 책이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 동안 남한(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실록을 엮듯 날자 별로 정리해 놓은 책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때로부터 대학생활, 군생활, 실업자생활, 사회생활, 다소 엉뚱했던 신학생생활을 이어갔던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남한(대한민국) 실록이다.

후루룩 넘기는 책갈피에 숨겨진 세월의 거짓들을 읽는다.

2017년 이 봄에 내가 까닭없이 슬퍼지는 이유가 짚을 듯 하다.

이어 시집을 꺼내든다.

그것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 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다/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남에게 犧牲(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殺人(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四十(사십)명가량의 醉客(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이 캄캄한 犯行(범행)의 現場(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내 아버지 세대의 사람 시인 김수영의 시편들, 곧 “성(性), 罪(죄)와 罰(벌), 김일성 만세”이다.

아마 2017년을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미친 놈>일 뿐. 김수영의 삶에 대한 솔직함은 끼어들 틈 조차 없이.

허나, 나는 2017년 4월에 김수영이 노래하는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에 꽂힌다.

세상이 온통 제 스스로에게 지독하게 속고 있는 듯한 2017년 서울이 아직도 이루지 못한 1960대 김수영의 솔직함이 통하는 세상으로 바뀌기를 꿈꾸며.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리디아의 왕을 섬기던 목동 기게스(Gyges)는 어느 날 지진으로 갈라진 땅 틈에서 발견한 반지를 끼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에는 남의 눈을 의식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유혹해 간통하고, 왕을 죽인 뒤 자신이 왕에 올랐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 나오는 가공의 마법 반지, 바로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이야기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글라우콘은 이 이야기를 하며 스승에게 물었다. “이런 반지가 두 개 있어서 하나는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승에게 이 질문을 던졌던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제 욕심만으로 가득찬 삶을 살 것이라는 예단이 있었다.

2017년 내가 뉴스로 접하는 세상들은 마치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자기 욕망으로만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듯 하다. 글라우콘의 의심이 결코 예단이 아니라 이른바 진실이 아닐까하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신에 대한 나의 믿음조차 흔들리는 순간, ‘그게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뱃사람들을 위해  예수선교를 하는 Philadelphia 에 있는 Seamen’s Church의 David Reid 목사도 그 중 하나이다.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가 이끄는 유혹에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바로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이다. 어쩜 그것은 진실로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일게다.

David Reid목사가 ‘세월호 참사 3주기’를 함께 기억하자며 세상을 향해 던지는 초대 글이다.


David Reid가 초대합니다.

4월 16일 일요일에, 필라델피아 소재 Seamen 교회 예배당(Seamen’s Church Institute Chapel)에서, 3년전 대한민국 페리 “세월호”가 연안에 침몰하여 목숨을 잃은 304명을 위한 추도 예배를 제가 주도할 예정입니다. 그날 아침 270명의 고등학생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수학여행길이었습니다. 저는 한인회와  ‘세월호 유가족과 연대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 (Philadelphia SESAMO)’과 협력하여, Seamen 교회 예배당에서 부활주일 오후에 개최될 예배 절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주 포트리에서 오는 세 명의 한국인 고등학생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북을 연주하는 특별 음악 공연 순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음 유튜브에 링크하시면, 그들의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m-utvfhZEg&feature=youtu.be.

우리는 또한 다음 유튜브 링크를 사용하여, 한국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EX9x5VUqQ4

예배 마지막에는,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로 구성된 ‘416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영상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RAjZsVNh2U

다음은 그 노래의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약속해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너희가 우리 아들이다/ 너희가 우리의 딸이다/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너희 모두가 아들 딸이다

그 누가 덮으려 하는가/ 416 그 날의 진실을/ 그 누가 막으려 하는가/v애끓는 분노의 외침을/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우리 모두 행동할거야/ 이 마저 또 침묵한다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어/ 끝까지 다 밝혀낼거야/ 끝까지 다 처벌할거야/ 세상을 바꾸어 낼거야/ 약속해 반드시 약속해

*** 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재난이었으며, 대한민국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으며, 완전한 조사 요구에 대해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MIT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국학생 권이석이 행한 독립적 분석에 따르면, 2000년 James Reason이 발표한 “스위스 치즈 파라다임(Swiss Cheese paradigm)”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안전장벽이 구조적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 David Reid는 Seamen 교회의 자원 사제이며, Claremont Lincoln University에서 범종교 활동 전공 석사 과정을 밟고 있고, 펜실베니아주 사제사회 회원입니다.


Invitation From:  David Reid

On Sunday April 16th, at the Seamen’s Church Institute Chapel in Philadelphia, I will be leading a service of remembrance for the 304 people who lost their lives three years ago when the Korean ferry “Sewol-Ho ” sank off the coast of Korea. 270 high school students died that morning, they were on a school field trip. I am working with the Korean-American community and the Philadelphia People in Solidarity with the Families of Sewol Ferry (Philadelphia SESAMO) group on the order of service that will be held on Easter Sunday afternoon at the Seamen’s church chapel. We will have a special music presentation by three Korean high school students from Fort Lee, New Jersey, who play traditional Korean drums. You can listen to their music on the following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m-utvfhZEg&feature=youtu.be .  We will also be saying the Lord’s Prayer in Korean using the following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EX9x5VUqQ4

At the end of the service we will show the following video of the song sung by the 416 Choir, whose members are the parents of the victims: https://www.youtube.com/watch?v=PRAjZsVNh2U

 

Here are the inspiring words of that song in English:

We are your mothers, we are your fathers,/ we all are your mother and fathers who buried you in our hearts./ You are my sons, you are my daughters,/  you all are our sons and daughters who will live in our hearts. / Who are those trying to cover up the truth of the April 16, / Who are those trying to block up these desperate, furious cries

We won’t stay put/ We all will stand up/ If we still keep silent, there will be no more future/ We will search for the truth to the end,/ We will bring those accountable to justice/ We will change this world/       We promise you, promise you on our conscience.

*** This was the worst maritime disaster that South Korea has ever experienced and it sent shock waves through the nation, there is now a worldwide community of support calling for a full inquiry. Independent analysis done by a Korean graduate student Yisug Kwon at MIT has already shown that there was a systemic failure of safety barriers, the classic “Swiss Cheese paradigm”  that James Reason wrote about in 2000.

**** David Reid : Volunteer Chaplain – Seamen’s Church Institute, Graduate Student – M.A. In Interfaith Action, Claremont Lincoln University, Member – PA Society of Chaplains


 

눈(雪)과 봄(春)

시간이 바뀌며 낮시간이 제법 길어졌다. 주중 일터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일요일 한낮의 길이가  생각보다 많이 길다. 교회를 다녀온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선다. 화창한 봄날인 줄 알고 노란 꽃잎 내민 개나리가 서 있는 곳은 눈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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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밭을 뚫고 잔디들은 이미 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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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가게 일을 도와주는 미얀마 출신  Lou가 알래스카에 사는 동생이 보내주었다며 선사한 양념된 훈제 연어를 들고 부모님을 찾았다. 가려움증으로 오래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새로 처방받은 약이 잘 듣는다며 모처럼 화사하게 웃으신다. 아버지는 ‘마침 잘 왔다’며 나를 컴퓨터 앞으로 끄신다. 컴퓨터에 이상이 있다는 말씀이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지 아버지가 다룰 줄 몰랐을 뿐.

이 겨울이 시작할 무렵에  병원에 들어가셨던 장모가 세상 뜨신 지도 벌써 백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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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 계신 곳에서 가까이 눈에 닿는 거리에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누울 곳이  마련되어 있다. 이 곳은 이미 완연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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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내외 먹을 거리 장을 보고 돌와왔건만 아직도 한낮이다.

오늘 아침에 손님들에게 보낸 장자 이야기에 대한 응답들을 보며 저녁을 맞는다.


오늘은 동양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당신은 두 사람의 생각 중 어느 쪽이 맞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옛날 시인 한사람은 이런 시귀를 남겼답니다.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

이제 봄이 다가옵니다.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재미있고 즐거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Today, I would like to share a story from “Zhuangzi,” one of the old Oriental classics:

Zhuangzi and Huizi were strolling along the bridge over the Hao River. Zhuangzi said, “The minnows swim about so freely, following the openings wherever they take them. Such is the happiness of fish.”

Huizi said, “You are not a fish, so whence do you know the happiness of fish?”

Zhuangzi said, “You are not I, so whence do you know I don’t know the happiness of fish?”

Huizi said, “I am not you, to be sure, so I don’t know what it is to be you. But by the same token, since you are certainly not a fish, my point about your inability to know the happiness of fish stands intact.”

Which one do you think is right?

Having heard this story, an old poet left the following line of a poem: “As I regard nature very beautiful when I see it, nature must feel the same about me when it sees me!”

Now, spring is just around the corner.

I wish that all that you see and feel will be beautiful, joyful and amusing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역사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중략 –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들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소설속에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호르헤)이 드러나자, 범인  호르세는 모든 살인 사건들의  비밀이 담겨 있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도서관과 함께 재로 변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윌리엄 수사가 그의 제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아드소에게 건네는 말이다.

중세 교회시대에 신학적 교리와 교회의 권위라는 권력은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진리와 진실을 가리는 단순한 잣대는 선과 악이었다. 그리고 권력은 늘 선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는 1327년 11월,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이다.

2017년 3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는 말에 떠올린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20세기 이래, 일본 식민 지배를 근대화로 위장하고, 남북 분단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무리들이 내세운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깃발 아래서 그 무리들 대신에 먼저 간 이들을 생각해본다.

‘진실’ 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헛된 꿈을 이어가는 이가 어찌 박근혜  하나 뿐일가? 이제 ‘진실 또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지배해 왔던 거짓 권력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장미의 이름으로.

세월호 1000일 – 어떤 설법

이 나이들어 특별한 종교에 혹 할 까닭은 없다만, 종종 귀에 들어오는 설교나 설법을 들을 때면 그 종교의 경전을 찾아 읽곤 한다. 일테면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내 주위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인들부터 몰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조계종에서 원불교까지, 천도교에서 무종교까지 다양한 지인들이 있다.

이따금 그 사람이 믿는 종교와 그 사람의 이미지가 일치할 때 느끼는 깊은 울림이 있다. 내가 그 종교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말이다.

딱 한 주 전의 일이다. 세월호 1,000일을 되새기고자 모인 필라 세사모 행사에서 말씀을 전한 원불교 강신오 교무님의 소리(이런 걸 ‘소리’라 해야 마땅할 터)를 들으며 누린 울림은 아주 컷다.

하여 그 울림을 함께 나눈다.

1000

반갑습니다. 원불교 강신오 교무입니다.

심해(深海)는 얼마나 추울까요.. 세월호 1000일인 오늘, 마치 아직 9명이 남아있는 깊은 바다와 같이 추운 것 같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월호 참사 1000일 범종교 추모식’을 준비해주신 필라 세사모 여러분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 아픔을 함께 느끼고 나눌줄 아시기에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과 혹 사정이 있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셨지만 마음으로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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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원불교 경산 종법사님께서는 ‘성자가 되는 길’이라는 신년법문으로 세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먼저 짧게 나누는 시간 갖겠습니다.

하나, 마음에 공을 들입시다.

모든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전쟁과 평화가 결국은 한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그 때 그 곳에 알맞게 마음을 낼 수 있도록, 마음 사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둘, 일에 공을 들입시다.

우리의 삶은 소소한 일에서부터 국가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까지 끊임없는 일의 연속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도덕적으로 조화롭게 성공시켜

내 마음과 내가 속한 곳에서부터 멀리까지 일이 잘 되도록 공을 들여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 만나는 사람마다 공을 들입시다.

우리는 무수한 인연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인연들이 인연을 따라 나를 부처로, 성인으로 만들어주고, 일을 성공시켜주고, 목적을 이루게 해주는 동지이며 협력자 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은혜가 되고 발전이 되도록 공을 들여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과 세상의 모든 분들께서, 자기 마음을 알아 마음에 공을 들여 마음의 자유를 얻으시고,일마다 조화롭게 성공시켜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성공하시고,만나는 인연마다 서로 은혜가 되고 발전이 되어모두 함께 성인이 되시고 함께 평화하시기를 염원드립니다.

제가 출가를 하고 나서 얼마 안지났을 때, 그 때는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라고누가 물어도 그렇게 대답하던 아주 오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그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허리도 안되는 그 얕은 물에 머리부터 빠져서, 오직 살겠다고 허우적 거리며 난리를 치던 기억은,그동안의 오만함에 대한 수치감과 함께, 살아있는 생명이 준비없이 강제로 죽음을 맞이할 때, 숨쉬고 싶을 때 입과 콧속으로 물밖에 들어오지 않을 때, 그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생명 그 자체로 참으로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천 일 전에 세월호에 있던 아이들과 승객들은, 어땠을까요…

지금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 두려움과 고통이 가슴에 밀려오는 듯 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자기 한 몸 만을 자기 인줄 알고 살다가 자연과 부모와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그 생명을 지켜주는 바른 법을 알고 함께 성장하는 것을 우리는 삶이라고 하고, 그러한 ‘존재 자체의 은혜’를 아는 삶, ‘그 삶을 사는 생명’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참으로 귀한 줄 알아서, 나 아닌 생명도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가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알기에, 나 아닌 생명이 아파할 때 참으로 함께 아파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 참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원망의 노예가 되고, 성의 노예가 되어, 도무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기가 집착한 것에 아귀같이 달라붙어서 인간으로서의 양심마저 버리고,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삶을 사는 것은 마음으로는 참으로 불쌍하다고 여기되, 그 행위에 대한 것들은 분명 단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미운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가진, 나와 한 생명인 그 삶을 함께 ‘사람의 삶을 살자’고 인도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하여 함께 사는 세상을 어제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달, 치료 차 한국에 갔었습니다.  처음 참가한 4차 집회에서 한 고등학생의 자유발언이 있었습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승만으로 부터 시작하는 뿌리깊은 민간인 학살의 한을, 그 아이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옮겨 붙는다고,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되고, 산불이 된다는 웅변에 모두가 뜨거운 가슴으로 환호하고 박수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가 이런 평화로운 집회를 하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내겠는가 하는 자부심과 긍지가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것을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이, 친일 세력들은 가진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폭력과 폭언으로 더러운 시위를 만들고자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10차가 넘고, 세월호 1000일 집회를 한 지금까지도 한 마음으로 그 평화로운 촛불혁명 이어가고 있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배를 일부러 걸려 넘어뜨리기위해 바다에 내렸던 닻 마저 몰래 잘려 아직까지도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있는 세월호는, 그러나 우리들을 하나로 이어 우리 안에 있던 참으로 아름다운 홍익인간의 정신과 양심을 끌어올렸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정치인의 도덕성을 보지 않고 만들어낸, 마치 우리 안의 탐욕을 거울같이 보여주었던 이명박근혜를 만들었던 그 욕심과 이기심이 아니라,  지금 이 마음과 이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들을 하나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이 결정된 이후, 사람들은 ‘이제 시작이라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온 국민과 국토가 만신창이가 된 오늘, 그들이 돈으로 던지는 미끼에 우리가 주인이 되는 기회를 또다시 잃을 수는 없습니다.

어둠은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빛이 있는 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함께 하고, 연대하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한, 생명과 민주주의를 향한 촛불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져 결코 꺼지지 않는 빛으로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동포님들과 한국에서 촛불을 드시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께 진리의 크신 은혜와 호렴이 늘 함께 하시어,

모두 마음마다 일마다 만나는 인연마다 공을 들이셔서, 대한민국과 이땅에 진리와 양심과 정의가 촛불같이 빛나고, 그 불이 번져 들불이 되고 산불이 되어 온세상에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늘, 매 순간이 다시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