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말이 달라 문제가 아니고…

세탁소 – 3

1980대 후반부터 2000년도에 이르기까지 십 수년 동안의 한국에 대한 내 기억 공간은 거의 하얀 백지다. 우선 가까이 신문과 방송이 없었다. 한국 소식을 만나기 위해 이웃 도시인 필라델피아나 볼티모어, 멀리는 뉴욕이나 워싱톤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보다 내가 이민(移民)이라는 말에 매달려 살았던 까닭이 더 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세탁소 일에 취해 살았었다. 세탁소가 하나에서 둘로, 셋, 넷으로 수가 늘어갔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내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며 도와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흑황홍백(黑黃紅白), 미국,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중국, 베트남, 라오스, 인도, 몽고 그리고 한국 등 여러 나라 출신들과 함께 해오며 여기까지 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얼굴이 하나 있다. 중국 상해 출신으로 거의 십 년 동안 함께 했던 왕 선생 내외다. 우리 아이들이 왕 씨 아저씨라고 불렀던 왕성충(王成忠) 선생은 나보다 열 살이 많았는데, 이곳으로 유학 온 아들내외 뒤바라지를 하러 왔다가 오랜 시간 함께 하게 되었다. 진시황과 모택동을 위대한 위인으로 내세우는 그는 동시대의 전형적인 중국인이었다. 왕 선생 내외는 말 그대로 열과 성을 다해 내 가게 일을 도와주었다.

다만 한 가지, 처음 만날 때부터 헤어지는 날까지 영어 한마디를 하지 못하였는데,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초 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그 고집이 그대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우리 사이의 대화는 알량한 내 한자능력에 의지한 필담으로 나누었는데, 다행이었던 것은 왕 선생의 눈치가 워낙 빨라서 내가 쓴 엉성한 한자 몇 개로 내 의중을 정확히 꿰곤 하였다.

왕 선생 아들이 박사학위를 마치고 직장을 얻어 코네티컷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아들을 안 따라가고, 계속 내 세탁소에서 일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난감했던 일도 있었다. 결국 코네티컷으로 떠나기 전에 왕 선생은 이사 가면 그 동네에 있는 한국인 세탁소들을 찾아가 일을 구하겠노라며 내게 한글 추천서를 써 달라고 했다. 일자리를 구했다는 연락과 함께 왕 선생 가족의 초대로 코네티컷 풍광 좋은 그들 가족 집에서 우리 가족들이 하루 밤을 지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상해에 일자리가 생겨 귀국한다며 온 가족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년 후, 생각지도 못한 왕 선생 아들이 내 세탁소를 찾아와 아내와 내 사진을 찍어갔다. 상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왕 선생 아들이 미국에 출장을 오게 되자 왕 선생이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더란다. 아무리 바빠도 꼭 델라웨어 세탁소에 들려 내 소식을 듣고 오라고 말이다.

그때 그 아들이 내게 건넸던 물음이다. “제 아버지가 엄청 고집 세신 분이고, 김 선생도 비할 수 없이 만만찮은 분인데… 어떻게 그 긴 시간 잘들 지내셨는지…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글쎄…. 그저 서로 어려웠던 비슷한 시대를 살아와서가 아닐는지….”라는 대답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아니요, 아니오.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두 분이 서로 완전히 통하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많이 생각해 본 거랍니다. 두 분이 말이 잘 통했다면 아마 그렇게까진 오래 못 갔을 거고요. 오늘 제가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를 했고 내게는 큰 가르침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엔 멕시코계 다음으로 한국인들이 많았었는데 거의 다 껄끄러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특히 말이 정말 잘 통해야 마땅할 기독교인들과 관계가 그랬던 것도 같다. 그 가운데 두 분이 목사님들이 되셨고 대개가 신실한 교인들이었다.

그랬다. 무릇 사람관계는 언어가 문제가 아니었다.  

돌이킬수록 세탁소에서 나를 도와준 모든 이들이 내 삶의 선생들이었다. 아내는 교회생활과 주말학교인 한국학교 선생일에 매우 열심이었다. 특히 교회 주일학교 선생과 성가대원, 한때는 성가대 지휘자와 아동 성가대 지휘자로 교회생활이 삶의 즐거움이었다. 올해로 서른일곱 해째 이어지고 있는 아내의 한국학교 선생 일은 어쩌면 아내의 이민생활을 지탱케 해 준 버팀목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헛바람 들기 전 그 시절에 내 우주는 오직 세탁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