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빤 아직도 아빠집에 있어?

세탁소 – 2

다른 곳들은 모르겠다만, 이즈음 내가 사는 동네에서 세탁소를 비롯한 구멍가게를 하는 한국계들은 드물다. 한 때는 세탁소와 함께 생필품들을 파는 코너 스토어, 야채, 과일, 운동화, 잡화, 과일상, 튀김가게, 아침 식당 등등 동네 구멍가게들 상당수가 한인들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즈음 그네들 누구라도 한두 번 겪였음직한 일들이다.

딸아이가 유치원,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오 학년 때의 일이다. 작은 규모의 사립학교인 크리스천 스쿨이었다. 동양계로는 우리 아이들뿐이었다. 세탁소에서 한창 일할 시간이었는데 학교에서 ‘너희 아이들을 당장 데려가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학생들 건강검사를 하던 중 딸아이 머릿속에 이가 있더란다. 오빠도 한 집에서 사니 둘 다 당장 데려가라는 독촉이었다. 아내는 기겁을 했다. “얘들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 길로 학교로 간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그런지 아쇼! 얘네들이 이하고 살갗 비듬하고 구별을 못해요.” 그렇게 한참이 시간이 흐른 후 아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세탁소로 들어섰다. “애들은?” 묻는 내게 던진 아내의 대답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지”

두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아들은 동생의 유치원생 낮잠용 이불을 품은 채 학교 건물 입구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단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딸아이의 머릿속 살비듬을 이라고 우기는 간호선생에게 ‘곧 다녀오마’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의사에게로 달려갔던 아내는, 이가 아니라 살비듬이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들고 담임선생들과 간호선생을 향해 말했단다. ‘사과하시라’고. 그들은 이내 사과를 했는데, 아내가 다시 재촉했단다. 그런 사과 말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반에 들어가서 학생들 앞에서 사과를 하라”라고. 초등학교를 공립학교로 옮긴 딸아이는 내내 매우 우수하였다.

어느 해던가 폴란드계 사람들의 축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음식을 먹으며 그네들이 추는 춤을 즐기고 있는데,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사내 하나가 우리들 쪽으로 다가와 고함을 질렀다. “꺼져 이 중국 놈들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내를 제지하며 말렸지만 사내의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머릿속에 욕이 맴돌았지만 입으로는 튀어나오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발딱 일어서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After you!. “너 꺼진 다음에!’ 아내의 완승이었다.

어느 날인가에는 열려있는 세탁소 뒷문으로 유리병들이 날아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꺼져라! 중국 놈들아!”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달려가보니 십 대 아이들 둘이 자전거를 타고 뺑소니를 쳤다. 순간 분을 못 이겨 경찰서로 신고를 했더니 경찰차 두대가 정말 쏜살같이 달려왔다. 자초자종과 아이들 인상착의를 묻고서는 이내 사라졌던 경찰들이 아이들에게 수갑을 채워 경찰차 뒷좌석에 싣고 와서 내게 물었다. ‘아이들 부모를 불러서 훈계 후 훈방하려 한다. 혹시 처벌을 원하느냐”라고. ‘내게 사과를 하라고 하고 놓아주기를 바란다.’는 내 말에 아이들은 넙죽 잘못을 빌었다.

가게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온 도둑이 컴퓨터와 돈통을 통째로 들고 간 일과, 우리 부부가 당한 일은 아니지만 두 번의 권총 강도, 세탁소 안으로 밀고 들어온 자동차 등 모두 내 세탁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 시절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었다.

내 세탁소는 빠르게 변해갔다.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 파이프 옷걸이 대신 컨베이어를 들여놓았고, 또다시 반년이 흐른 뒤엔 있어야 할 모든 세탁장비들을 들여놓은 구색 갖춘 명실상부한 세탁공장이 되었다.

그즈음 이런저런 세탁기술 세미나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동네에서 세탁기술이 제일 뛰어나다고 소문난 이선생을 찾아가 옷에 묻은 각종 얼룩 제거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젠 돌아가신 지도 제법 되었지만 당시 이선생은 오십 대 초반이었다. 이선생의 특징은 목에 걸고 지내는 돋보기를 연신 썼다 벗었다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나는 돋보기 쓰는 나이까지 세탁소 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내가 돋보기를 처음 썼던 게 벌써 이십 년도 넘었다.

그즈음에 나는 세탁소에서 살았다. 아침 5시에 나가 밤 8-9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 했다.

그때 아이들이 내게 전화를 하여 묻곤 했던 말이다. “아빤 아직도 아빠집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