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를 위한 아버지들의 기도

세탁소 – 1

돌이켜볼수록, 내 삶은 우연 위에 서 있었다.

아내가 차 씨 아저씨라고 부르는 차 선생은 장인어른의 오랜 후배이자 벗이었다. 장인은 열여덟 나이에 카투사(KATUSA)라고 부르는 미군 배속 한국군 제1기로 인천상륙작전 전투를 치른 참전용사다. 전쟁 후 평생 미군부대와 특히 공항 소방대에서 일을 하셨다. 차 씨 아저씨는 미군부대 하우스보이였다. 그렇게 만나 전쟁 후부터 1960대 월남 공항 소방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일을 했다. 그 후 차 씨 아저씨는 미국으로 건너와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해 볼티모어에서 세탁소를 하며 두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장인은 그즈음 사우디 아라비아 공항 소방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장인이 휴가차 장모와 함께 우리 사는 데를 방문하여 차 씨 아저씨 내외와 저녁을 함께 한 자리에서였다.

“미스터 김, 뭘 고민해! 그냥 세탁소 해. 애들 둘 잘 키울 수 있어요. 그냥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 없으니 세탁소 하나 차리라고…”

암만 생각해 보아도 터무니없이 무모했던 일이었다.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세탁소를 하나 차렸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내 삶이 매사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한데, 그땐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정말 막무가내로 벌린 일이었다. 대학 근처에 있는 가장 큰 쇼핑센터 빈자리를 얻어, 잠시 막일했던 경험을 살려 뚜닥뚜닥 카운터 구색을 갖추고, 철물점에서 파이프 뚝뚝 끊어다가 옷걸이를 이어 만들고 세탁소 간판을 걸었다.

드롭 스토어라고 손님들의 옷을 받아다가 세탁 공장으로 보내 세탁과 다림질 공정을 다 마친 후 손님에게 내어주는 이를테면 중간상이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작은 동네 빤히 아는 한인들끼리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다. 오픈한 내 가게 주변에 있는 이가 내 세탁을 처리해 주겠다고 했던 세탁공장을 하는 이에게 만류를 했었던가 보았다. 잠시 참 난감했었다.

그때 나타났던 이가 내 친구 ‘뵤’다. 수대에 걸쳐 델라웨어주 뉴왁(Newark) 토박이인 뵤는 나와 동갑으로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했던 이다. 그의 아내 미시즈 민은 한국에서 근무할 때 그를 만났다. 미시즈 민은 그를 ‘뵤’라고 불렀는데 그의 이름은 Bill이였다. ‘뵤’ 내외는 정말 작은 규모의 세탁소를 하고 있었는데 내외는 내 부탁을 정말 흔쾌히 들어주어 정해진 날짜에 ‘K&L Cleaners’ 영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K&L’이냐고? 그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다. 세상사 우연처럼 큰 뜻 없다고. 그냥 내 성씨 김과 아내 성씨 이의 조합일 뿐이라고. 미시즈 민은 세상 뜬 지 오래되었고, ‘뵤’는 가을이면 미시즈 민과 함께 심은 감나무에서 딴 감 한 바구니를 들고와 늘 같은 소리를 한다. ‘어쩜 우리 손녀가 민을 닮았는지…’

그렇게 세탁소 문을 열던 날,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말이다.

“얘야! 동네 이름이 Newark이구나. 이제부터 여기가 너의 새 방주(方舟 New Ark)다. 평안한 마음으로 네 일을 즐기며 살아라.”

재봉틀에 앉아 첫 바느질 일감을 받아 바느질을 하는 아내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건넸던 말이었다. ‘혹시 이거 손님이 찾아가자마자 뜯어져서 다시 가지고 오는 거 아닐까?’ 아내의 대답이었다.

‘나 학교 때 가사 시간에 칭찬받은 사람이야! 나 한국 사람이라고!’

1과 99 – 그 사이

방황- 3

언제나 문제의 진원지에는 내가 서 있었다. “얘, 너두 참 힘들겠다! 어떻게 저런 녀석이랑 사니?”, “글쎄 말이에요…” 신기했다. 어머니와 아내는 종종 그렇게 뜻이 맞곤 했다.

나는 일남 삼녀 중 둘째, 아내는 일녀 이남 중 맏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제친 집안의 왕이셨다. 부모님과 세명의 누이들과 우리 내외는 차로 십 분이면 서로 다 닿을 수 있는 한 동네에서 살았다. 조금 늦게 오신 처부모님도 그 정도 거리에 떨어져 살았다.

그랬다. 언제나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나였다.


만 이년 사 개월 만에 서울에서 헤어졌던 아내와 아들을 델라웨어에서 만났다. 그때의 거리와 시간만큼 우리 사이도 벌어져 있었다. 그 간격이 다시 좁혀지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그 간격을 조율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조율 자체를 즐기고 있는지도.

그 시간들을 통해 내가 세운 개똥철학이다.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 간에 100% 딱 맞아떨어질 수 없다. 절대 없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건 어느 한쪽이 힘을 100% 틀어쥐고 있는 경우뿐이다. 하여 그것은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복종일 뿐이다. 그건 건강한 사람 관계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100% 순종을 하는 경우인데 그건 병이다. 그 역시 건강하지 않다.  0과 100의 자리는 신의 자리다. 사람 관계는 나누어 갖는 관계다. 1과 99 이든, 50과 50이든 그 사이를 오가는 관계라야 사람살이 관계이다. 부부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그게 사는 재미 아닐까? 한마디로 열린 관계면 족하다. 이 또한 또 다른 문제의 중심에 설 개똥인지도 모를 일이다만.


종종 읊조리곤 하는 시들이 몇 편 있는데 그중 하나,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이다.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한 가지 말을 때론 엉뚱하게 서로 제 입맛에 맞게 이해하며 거기에 덧붙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이어 가곤 하지만, 웃음을 끊지 않고 여기까지 함께, 그리고 또 남은 길을 손 잡고 걸을 수 있음은 바로 그 가족이라는 관점을 붙들고 살아온 때문이 아닐는지.


이민의 땅을 밟은 아내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손님은 병이었다. 갑상선에 문제가 생겼다. 치료 중에 의사에게 들은 말이었다. “이제 아이는 기대하지 마시라.”라고. 살며 과학을 믿고 의지하는 편이다만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앙 또는 세상의 법칙만큼은 아니다. 의사의 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들과 여섯 살 터울로 딸이 태어났다. 아들은 여렸고 딸은 야무졌다.

다급해진 것은 또다시 나였다.

신나게 욕부터 배우다

방황 – 2

이즈음이야 ‘뭐 그깟 일’ 정도로 치부될 일이겠다만, 1970년대 중반에 나이 스물 몇 살의 처자가 홀로 미국 취업 이민을 떠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떠난 누나의 길을 어머니, 아버지, 막내동생, 나와 아내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아래 동생내외가 쫓아왔다.

한 동안 부모님과 네 남매 가족들 그리고 처부모님 모두 한 동네에서 살았다. 지금, 부모님들은 모두 떠나셔 집 근처 “모든 성인들의 묘지, all saints cemetery”에 함께 계신다. 이젠 멀리 떨어져 사는 아랫 동생네 부부 이외는 모두 언젠가는 부모님 곁에 누울 것이다. 아들 딸 조카들 모두들 가정을 이루어 손주들이 열셋이고, 곧 하나가 더해질 것이다. 하여 누님은 어머니 아버지 태에서 난 우리 집안의 시조다.

언젠가 “도대체 그때 왜 떠났오?’라는 내 물음에 누나가 했던 대답이었다. ‘글쎄… 첫째는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고…. 둘째는 감사였을 텐데…. 나는 그리 넉넉지도 않은 우리 형편에 나를 대학까지 보내준 부모님께 대한 감사가 컸어. 지금 사람들 기억 못 할 거야. 그때만 해도 여자들이 대학 가는 거 쉽지 않았어. 좀 사는 애들만 갔지. 아무튼 그 감사에 대한 보답을 하는 방편으로 그렇게 선택했던 거 같은데…’

70대 중반을 꺾어 넘긴 누나는 이즈음 아내와 함께 그림공부에 빠져 지낸다. 지난 수난절 기간에 누나가 그린 예수상을 보다가 어릴 적에 누나가 치던 피아노가 생각났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누나는 두꺼운 마분지를 잘라 이어놓은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실물처럼 그려 놓고서는 피아노를 쳤었다. 건반의 음들은 가슴속에서 울렸을 것이다.

<신나게 욕부터 배우다>

뉴욕에서 이민 초기 어려움을 겪어낸 누나네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한적한 시골인 델라웨어에 터를 잡았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와 젖먹이 아들을 두고서 혼자 먼저 온 나도 한 동안 누나네 덤이자 짐이 되었다.

처음에 뉴욕도 둘러보고 델라웨어도 둘러보면서 많이 망설였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얘야! 천천히 시작하자, 천천히’하시며 그저 좋아하셨던 부모님과 달리 나는 조급했고, 새로운 시간에 대한 불안을 놓치지 못했다.

‘일단 영주권을 얻을 때까지…’라는 다짐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커뮤니티 컬리지 영어반 등록서류를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 동네 우체통 앞에서였다. 사다리들과 알 수 없는 기둥들을 잔뜩 실은 빨간 픽업트럭 하나가 서더니만, 창문을 열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혹시 한국분 아니세요?’, ‘예, 그런데요. 어떻게?’ 그렇게 이어진 질문과 응답이었다. ‘이 동네 사세요?’, ‘예, 온 지 얼마 안 돼서 누나네에…’, ‘아이고 반갑습니다. 저희 집이 바로 저기인데… 시간 있으시면 차나 한잔 하시지요?’

이민 생활 사십 년 동안 참 많은 이들을 만났다만, 이제껏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이는 매형 한분 빼고는 유일한 조용하형을 그렇게 만났다. 자신을 소개할 때 늘 ‘조용합니다’라고 하는 그는 진짜 조용한 사람이다. 그 조용한 사람이 길 가던 내게 대뜸 말을 건넨 것도 참 드문 일이었다고 했다. 내 외가인 한남동과 가까운 용산 사람이어서 친근감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주택의 외벽 마감재인 사이딩 공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날 그가 내게 건넨 말이다. “지금 특별히 하시는 일 없으면 저하고 함께 일 한번 해 보지 않으실래요? 한 번 보시고 해도 좋고 안 하셔도 좋고요.’ 그렇게 그를 따라나선 길에서 두 해가 지나갔다.

난생처음 해보는 노동이었는데 나는 그 일을 매우 좋아했다. 일로 몸에 피로를 느끼고, 쉬며 안도를 느낄 수 있던 맛이 참 즐거웠다. 조용한 조용하 형과 일하는 게 좋았고, 거의 많은 시간을 말없이 홀로 일할 수 있는 시간들을 즐겼다.

그즈음 막 시작되었던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연구 소식을 접한 것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신학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저작들에 빠져 지냈던 것은 비록 그 후의 일이었지만, 그때 잡념 없이 방황을 즐기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사판에서 만나는 일꾼들의 언어는 욕이 태반이었다. 욕 한마디가 들어가지 않은 문장을 만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한 문장 전체가 욕으로 이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싸우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 언어였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배우기 전에 그렇게 공사판에서 먼저 욕설로 이루어지는 영어를 먼저 배웠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의 언어, 사랑의 언어보다 먼저 삶의 언어를 배웠다.

듣기는 많이 들었으나 입으로 뱉어 본 적 없는 이 욕들을 훗날 하늘을 향해 마구 쏟아낼 줄은 그땐 정말 몰랐었다.

‘만일…’ – 그 허망함에

방황 – 1

2024년 12월, 채 일 년 반도 지나지 않았건만 햇수로는 벌써 삼 년전이다.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들린 교보문고에서 뽑아 들고 온 책 <나이듦에 대하여> 78쪽엔 이런 말이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러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상당수가 노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난 인류의 총수를 1천82억 명이라고 한다. 대략 수백억 명이 노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1천82억 명 가운데 하나이자, 영광스럽게도 노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수백억 명중 하나가 되었다. 이젠.

서울 지하철에서 난생처음으로 자리 양보를 받았을 때엔 그야말로 난감했었다. 주춤거리며 제법 큰소리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말했었다. “아니요! 아니요!” 끝내 나는 자리를 양보받았고 그날 이후 나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자신있게 앉아 다녔다. 그리고 생각난 내 고모님이었다. 아흔 두해 사시고 세상 떠나신 하나밖에 없는 고모님께서 얼추 내 나이 적에 크게 웃으시며 했던 말씀이었다. “얘야! 버스를 탔더니 젊은 아이가 자리를 양보하지 뭐냐? 넌 아직 모를 거야, 그때 내 심정 말이지. 화가 나더라니까….” 어느새 나도 그때 그 시절 고모님 나이에 이르렀고, 그 고모님은 이젠 한국 가서도 뵐 수 없다.

본전을 뽑고 싶었다. 한국에서 낳고 살았던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7년이 더 길어졌다. 여기도 평생 외국이고, 한국도 이제 내겐 외국이다. 가는 비행시간 쉬지 않고 15시간 반이고, 집에서부터 서울 숙소까지 이르는데 꼬박 22시간이 걸린 여행길이었다.

글쎄, 언제 또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여 본전을 뽑고 또 뽑고 싶어 걸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때론 아내를 앞세우거나 아내보다 한 걸음 앞서거나 또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 내외 고향인 신촌과 소년, 소녀기와 청춘을 보낸 신문로 광화문 효자동 안국동 인사동 종로 을지로 남대문 명동 마포 공덕 등지의 서울 거리와 강남 강동을 비롯해 일산, 철원, 전곡, 양평 등지의 경기도와 경상도 영주 부석사를 비롯하여 충북과 경북이 만나는 죽령고개, 그리고 잊지 못할 봉화에서의 하루 밤, 오랜 벗 내외가 평생 일구어 온 이야기를 만난 대전 대화동을 거쳐 이제야 이난영의 소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전남 목포거리와 유달산, 그리고 새해맞이 해돋이를 보며 아내손을 잡고 걸은 강원도 속초 해변 모랫길.

그렇게 걷고 또 걸었었다.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 우리들의 삶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끈, 바로 사랑이었다. 이 여행에서 만난 옛 벗들, 이제 거의 노인이 되었다.

책 <나이듦에 대해서>를 펼쳐 들면 첫 쪽에서 만나는 말이다. <우리는 투쟁하도록 승리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슬픔과 멜랑콜리여 안녕. 우리에게 끝이란 없어요. 끝은 바로 이 순간이고, 매 순간 끝은 확장되니까요. 우리를 지배하는 강렬한 정신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에요. – 피에르 고베티>

이제 노인이다. 그래서 축복이다. 하여 감사다. 매 순간 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나이임으로.

동해 바닷가에 떠오른 해처럼. 해를 향해 달려 날아가는 새떼들처럼.

그렇게 오늘을 걷다가, 나는 다시 먼 어제로 돌아간다.

<‘만일…’ – 그 허망함에>

따지고 보니 방황의 연속이었다. 신촌을 떠날 무렵과 이민 후 첫 몇 해 동안 내 삶이 그랬다.

지난 일에 “만일….”이라는 상상은 허전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이 한 두해만 늦추어졌거나 그만큼만 빨랐다면 다른 건 다 모를 일이지만 내 인생은 조금 다른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그저 늘그막에 꿈같은 그림을 그려본다. 비록 허망할지라도.

나이 이십 중반일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호사스러운 때였다. 1975년에 다니던 대학에서 제적을 당하고, 징집되어 군생활 마치고 제대한 것이 1977년 성탄절 날이었다. 그런데 할 일이 없었다. 학교로 되돌아갈 길도 없었고 말 그대로 백수였던 젊은 날이었다.

그러다 이듬해 봄부터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다. 한국신학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선교교육원이라는 평생교육기관이 당시 서대문 충정로에 있었고, 그곳에서 나처럼 본의 아니게 백수가 된 젊은이들을 위한 신학공부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다. 선생님들도 역시 본의 아니게 당시에 백수가 되신 분들이셨다.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김용복, 송건호, 이문영, 박현채 선생님 등등 그야말로 당시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분들에게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함께 배우던 친구들이 약 이십여 명쯤이었는데 나보다 한참이나 앞선 친구들이라 쫓아가느냐고 엄청 애쓰던 때였다.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 평생 신앙의 사표이자 선생, 그리고 삶의 길잡이이자 이젠 스스로 내 길동무를 자처한 호주에 사시는 홍길복목사님 덕이였다.

만일 박정희대통령이 궁정동에서 그렇게 가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시간은 좀 더 길어질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아무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으로 인해 나는 다니던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십 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진짜 목사의 길을 가보자 하고 내 신앙의 본고장인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 신학교인 장신 이른바 광나루 신대원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내게 맞지를 않았다. 그래 하나님께 기도와 서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나이가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한 오십까지 살다가 인생을 좀 알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그리고 이제 그 오십도 가물가물한 노인이 되어 그 서원은 짐으로 지고 간다. 그러나 그때의 내 결정에 대해 얼마나 크게 감사하며 사는지, 그 또한 내가 누린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하며 산다. 그 시절 내가 배운 것은 삶을 고백하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출판사를 잠시 했던 일이다. 그때만해도 참 엉뚱한 일이었다. 신문모음집을 만들어 출판을 했었다. 당시에는 “신문의 행간을 읽는다”는 말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사건에 담긴 진실을 행간에 숨겨 놓아야만 신문을 발간할 수 있던 암울한 시대의 한 단면이었다.

바로 행간에 숨어있는 진실을 한데 모아 독자들에게 전해보겠다는 뜻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도가 있는 일종의 뉴스 포탈 같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끝은 뻔했다. 망했다.

이 두가지 경험은 내 이민생활의 명(明)과 암(暗)을 잇는 그 굴곡진 시간들의 빌미가 되었다.

그렇게 내 젊은 시절의 방황은 신촌을 떠나 이민생활로 이어졌다.

말표 운동화 그리고 탈 신촌(脫新村)

신촌연가 -3

신작로(新作路), 문(門) 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이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대문(四大門) 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다마치기라고 했다만),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다. 그즈음에 내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 도서관에 가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내게서 멀어졌다. 내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수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내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립문 부근에 사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나는 방과 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이었다. 그날 이후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다.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황순원,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 하였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등등 내 즐거움이었다.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했고,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이다.

운동화. 그즈음 내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나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나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나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다. 대학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곤 했다.

그 시절에 내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다. “고난 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워낙 열정적이셔서 그와 가까이 있으면 침세례를 받곤 했었고, 훗날 내가 머리 굵어져 제법 신학적 고뇌 흉내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신 분이시었다. 그리고 또 박대위교수님과 이열모교수님을 잊지 못한다. 한 분은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넣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른 한 분은 당신 댁 서재에서 절두산이 내려다 보이는 한강 풍경을 내려다보며 “아 내가 이 시대에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곤 한다는 말씀으로 우리들을 깨우곤 하셨다. 또 한 분 “너희들은 지금이야말로 황금시대(Golden Age)를 누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라”라고 시간의 중요함을 깨쳐 주셨던 최창한 장로님이 계셨다. 내가 특별히 이 어르신께 감사드리는 까닭은 친구 하나 없었던 내 아버지에게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와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이다. 상업고등하교를 다니던 나는 공부를 지지리 못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쑤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다.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다. 영어선생님이시던 김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나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다.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내 길을 선택해 주셨다. 그 김 선생님 훗날 내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내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다. 하여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다.

아!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굣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 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곳곳에 내걸리기 시작했다.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과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주었던 술집 이름들 기억은 여전하다. 꽉 찬 10년, 내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다.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 적 없는 학교생활이었다.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내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이디.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다. 학교도 잘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이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내게 신촌은 이미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몇 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는 각서라고 쓰여 있었고 거기에 내 지장을 찍은 후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 눔아! 책 같은 겔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막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다.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

신촌연가 2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 턱없이 비좁았다. 한 학급에 70명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다.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 위한 교실이었다. 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을만큼 교실이 모자랐다.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 쪽 아이들은 창서 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었다. 아내가 다니던 학교다.

국민학교때 나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다.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내 놀이터이었다.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고 배달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다. 물론 조수인 나도 따라 나섰다.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 도장포가 세워졌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보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다. 나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다. 우리 가족이 셋방시대를 벗어난 때는 그 일이 있고 나서였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 씩이나 있고 대문가에는 우물과 앵두나무도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내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내 방을 갖게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린 시간은 잠시 뿐이었다.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는 할아버지와 동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촌에서 보낸 내 사춘기의 일기에서 할아버지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이다. 아버지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대노(大怒)하실 일이시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머슴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셨던 평생 머슴이셨다.

1901년생이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어느 날 억세게 힘이 좋은 고주망태로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셨다. 그렇게 겨울철 서너달 나하고 한 방에서 계시다가 어디론가 사라지지고는 다시 찬바람 일면 다시 내 방을 나누어 쓰시곤 하셨다. 들며 나실 때마다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내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한 십년 동안 겨울이면 한 방에서 동거하셨던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의 세 아드님 중 막내이셨다.

“어째 너희들은 외탁을 해서… 쯧쯧쯧” 내 아버지과 나를 향해 늘 하시던 말씀이셨다. 아버지와 나는 작고 여린 체구인데 비해 할아버지는 이른바 통뼈이셨다. 힘이 엄청 좋으셔서 젊은 시절 한 때 평택, 용인 씨름판 황소 차지하셨던 분이셨다.

나이 스물에 용인 유실마을 문씨 문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다. 일에는 이골이 나서 누구 못지 않은 최고의 머슴이셨다. 사단은 그 힘과 술이었다. 씨름판 황소 끌고 와 그 날로 술판으로 끝내 버리셨던 분이셨다. 내 아버지가 채 열 살이 되기 전 약수동 고모님 두 살 때, 내 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셨다.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와 고모님은 용인 유실마을 두 남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다.

훗날 나와 한 방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내게 들려주셨던 그 단순, 용감, 무지한 방랑의 한 평생은 어린 내가 듣기에도 측은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방랑끼는 나와 한 방을 쓰셨던 그 무렵에도 변치 않으셔서 아지랑이 이는 봄날이면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시며 잘 벼린 낫 한 자루 허리춤에 끼시고 “벌초 다녀오마” 그 한 말씀 남기신 후 어디론가 떠나셨었다. 그리곤 찬 바람 일고 김장철이 될 쯤이면 고주망태의 모습으로 돌아오시곤 하셨다.

어느 해던가, 아마 내가 대학 1학년이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돌아 오셔야 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으셨다. 아버지와 나는 용인 유실마을, 궤밀마을, 평택, 진천 등지로 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니가 재봉이 손자여”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 있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신촌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만취가 되어 내 방에 누어 계셨다. 그 할아버지의 여름, 겨울 한복의 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술 취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대야 물 받아 닦아 주셨던 이는 내 아버지셨다.

1976년 봄. 마지막으로 한 달. 신촌 노고산동 내 방에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다. 그렇게 한 달포 동안 오래 누우셨던 일은 당신 평생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우리 아버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찬송을 끊이지 않으셨다. “아부지, 제발 예수 믿고 돌아 가세요. 그래야 천당 가세요” 그 말씀 쉬지 않으셨다.

그 때 내 할아버지 하신 말씀.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이제 와서 뭘” 음치에 가까운 내 아버지의 그 찬송소리가 지겨우셨는지 아님 아버지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사흘 전 “그래 믿자” 그 한마디 할아버지 말씀에 목사님을 부르고 할아버지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비에 빨간 십자가 하나 그려 놓으셨다. 내 아버지께서.

그때 할아버지 마지막을 위해 기도해 주셨던 대현교회 김용진 목사님께서 우리 내외의 결혼 주례를 맡아 주셨다.

이제 나는 그때의 할아버지 나이에 가까워졌다.

그래서일까.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거나 몰랐던 삶들까지, 이제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기억에

  • 신촌연가-1

함께 공유하는 기억들이 오늘 서로의 삶에 즐거운 버팀목이 된다면 축복이다.

아내가 손녀를 처음 안았던 날 깜짝 놀란 소리로 외쳤었다. “어머나! 얘 좀 봐! 어쩜 내 손금과 똑같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그냥 웃었을 뿐, 오늘까지 아이와 아내의 손금을 비교한 적은 없다. 그 소리를 들은 서울 처남이 보냈던 카톡이었다. “조만간 아이가 춤추고 노래하겠고만….”

아내에 대한 내 첫 기억은 고등학교 이학년 때이다. 아내는 중학교 일 학년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쏠춤을 신나게 추던 아내를 보며 내가 중얼거렸던 말이다. ‘저 아이는 커서 무엇이 될까?’ 그랬던 아내가 대학을 나보다 먼저 졸업을 하여 선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저 룸펜이 되어 떠돌았었다. 그 무렵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한 동네, 한 교회에서 유년에서 청년까지를 함께 보낸 우리들은 이민와 함께 일하는 세탁소에서도 옛 기억들을 되살리곤 한다.

2016년은 우리 내외가 어둡고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그 해 여름 기차여행은 우리 내외가 이민 이후 부모나 아이들 없이 단 둘이 해 본 첫 여행이었다. 그 해 봄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내기를 걸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기억력 테스트였는데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에게 유리한 게임이었다. 아내는 이내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내었다만 나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또 영영 감감 이었지만…

<신촌연가 – 1>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다. 아내가 다녔던 창서국민학교는 내가 국민하교 3학년 때 개교하였다.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었다. 제이한강교가 놓이고 강 건너 영등포와 사통팔달로 연결된 일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전쟁 후 쏟아진 친구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다. 신촌은 토박이와 피난민 그리고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 판잣집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 놈들은 그걸로 공차기를 하곤 했었다.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때기를 대문 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고 누구네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을 가로지를 수 없다는 지방토호들도 있었다. 어디 살건 누구네 자식이던 아이들은 다들 동무였다.

“창천의 푸른 물은…” 이름만 창천이었을 뿐,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 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던 탁한 개울물이었다.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향했다. 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떠다닌 곳이라고 송장내라고 부르던 개울에서 깨끗이 빨래를 하고 이고 오시던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 그게 하루길이었다.

내게는 아련한 추억과 기억들이 아름답게 남아있는 신촌이지만, 내 부모님들에겐 그곳은 네 남매를 키워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내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다. 안양유원지였다. 그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다. 그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셔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받은 후,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에 앉아 사셨다. 말이 점포였지 이동식 나무 상자 안은 도장 파는 기구들과 아버지가 앉으면 그만 꽉 차고 말았던 이동식 나무 상자였다.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이내 나무상자에서 빠져나오셔서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 간판을 올리셨다.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 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엄청 부지런하셨다.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였던 아버지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다.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다.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 까닭을 말씀하셨다.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명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다.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는데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는데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다. 그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다. 주인 마나님 눈치 보시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다. 내 어머니. 그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다.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다. 우선 내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내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부터 문(門) 안 출입은 내 차지였다.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 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하나를 그려 주시며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다. 내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다. 그 문안 나들이는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사춘기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국민학교 졸업 직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

신촌역에서 연세대 앞 철다리까지 철길부근은 어릴 적 놀이터였다. 산딸기, 뱀딸기, 까마중, 도토리 등 먹을거리와 강아지풀, 채송화 등의 놀이기구, 계집아이들 손톱 물들이던 봉숭아 같은 화장품까지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촌역 –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침을 잘 발라놓은 뒤 기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못은 기차가 지나간 뒤면 납작하고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어 땅따먹기나 못 치기 놀이 도구가 되었다. 연세대 앞 철다리는 사내아이들의 간크기를 재는 시합장이었다. 기차가 오기 직전에 누가 먼저 철다리를 건너냐는 시합에 나는 늘 그저 구경꾼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신촌역에서 수색이나 능곡역까지 몰래 기차를 훔쳐 타서 오가는 것이 놀이가 되던 때도 있었다. 신촌역에서 기차표를 끊어 교외선을 타고 송추, 일영, 벽제 등지로 하루길 소풍을 오가던 때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의 일이다.

신촌역에서 이대 쪽으로 들어선 막걸리 작부집들이 눈에 들어올 무렵엔 나는 이미 스물이 넘어있었다. 신촌역 앞에 인력시장이 서고, 그곳에서 하루 몸팔이에 실패하고 빈속에 막걸리 기운으로 고함 한번 지르다가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잡혀온 사내와 함께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후 신촌역과 철길은 내게서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제법 먼 여행길에 나섰던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청량리에서 동해안 북평까지 열 시간 넘게 걸렸던 중앙선 기차여행이었다. 그해 초가을 심한 폐렴으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때 병실에서 듣던 기차소리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홀로 집을 나서 경부선을 탔었다.

열여덟을 넘기던 그해 여름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쌀과 모포 한 장으로 꾸린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곤 하였다. 경부, 호남, 전라, 장항, 중앙선을 타고 산과 강과 바다를 쏘다녔다.

기차와 배를 타고 몇 차례 제주행을 하고 열 시간 넘게 배를 타고 울릉도를 다녀온 뒤로 나는 기차소리를 잊었다. 이미 서른이 넘어 일상에 매인 나이가 되었으므로

벌써 몇 해 전이 되었는지 – 먼 옛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새록새록 떠오르건만 가까운 최근의 일들 일수록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 한국에서 경부선 KTX를 타 본 일이 있다. 그날 일은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한국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미국도 아닌 어느 외국에서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 인터넷을 모르던 때에 뉴욕을 오가던 하루길 기차여행은 내 이민생활에 누리던 호사였다. 고작 맥주 두어 캔 즐기는 사이 도착하는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맨해튼 서점에서 만나는 한글 신간서적들을 만나고, 입에 맞는 설렁탕이나 해장국 한 그릇의 호사를 즐기고 돌아오던 날이면 그냥 여기가 신촌이었던 것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로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잊은 지도 제법 되었다. 오가는 기차값과 한 끼 식사 값이면 내 방에 앉아서도 책 대여섯 권은 족히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가는 길이 번거로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이랄까? 뉴욕에 사는 딸아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이따금 기차여행은 이어지고 있다.

5년 주기 계약을 여덟 차례 이어 온 내 가게 뒤편으로는 미국 동북부를 잇는 Amtrek 철도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그 길을 오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늘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언젠간 기차를 타고 미국 대륙여행을 해 보아야지”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비록 절반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첫걸음으로 나는 기차여행길에 올랐었다.

“더 늙기 전에…” 기차 안에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인사차 들린 내게 구순 어머니께서 던진 말씀이다. “아무렴, 아직 젊을 때 다녀야지!”

2016년 여름 기차여행 끝에, 나는 아직 “더 늙기 전에”와 “아직 젊을 때” 그 사이에 서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늘 빠르거나 더디다.

친구들

멕시코계 이민자인 예세니아는 제 가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소중한 사람이랍니다. 늘 쾌활하게 묵묵히 자기 맡은 일에 온 열정을 다하는 예세니아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딸이 있답니다. 수줍음이 많은 건장한 그녀의 남편은 성실한 목수랍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일을 하다가 아주 슬픈 얼굴로 그녀가 말했답니다. “어저께 아주 친한 친구랑 헤어졌네요. 얼굴도 못 보고 그냥 친구의 목소리만 들었답니다. 멕시코로 추방되었어요. 참 열심히 살던 친구인데…. “, “우리 멕시코인들이 가장 많이 당하는 거 같아요…”

이른바 불법 이민자 추방 열풍이 작은 소도시인 우리 마을에도 불기 시작했나 봅니다. 예세니아 가족이나 우리 가족이나 합법 이민자들이지만, 합법과 불법의 경계란 때론 모호한 세상이 되기도 했던 역사적 경험들을 겪어낸 이 땅이고 보면, 그녀 친구의 일이 마냥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비슷한 때에 필라델피아 <우리센터>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센터>에서 받은 전화 내용이랍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이민자 추방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 권리보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약화시킬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민자 가족들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이 시기, 여러 도움과 지원이 절실합니다. 이민자 지키기 기금에 기부해, 우리센터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 네트워크의 단체들이 이민자 커뮤니티를 지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민자 커뮤니티를 지원합니다.

한국어 및 영어 상담이 제공되는 24/7 핫라인 운영/ 여러 언어로 제공되는 이민자권리교육 및 앱 배포/ 이민정책 관련 워크샵 진행/ 신뢰할 수 있는 이민 변호사의 법적 방어 서비스 지원/ 커뮤니티 주민들을 위한 정신건강 서비스 연결/ 이민자 커뮤니티 조직 및 이민자 권리옹호 캠페인 등입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필라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제가 감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참 좋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필라민주동포 모임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기원하며 지난 일월부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빛의 혁명 불을 밝히고 있는 모국의 민초들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푸드트럭을 보내 응원하고 있답니다.

또 다른 친구들입니다. 정말 오랜 연대의 끈을 놓치 않고 이어가는 친구들입니다. ‘결코 잊지 않고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는 필라델피아 모임’ <필라세사모> 친구들입니다.

저마다, 모임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주된 관심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두루 떠올려 본 까닭은 책 한권 때문입니다.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로, 오 게강 공저인 ‘내전, 대중혐오, 법치’라는 조금은 끙끙거리며 읽어 낸 책이랍니다.

저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끌어들인 숱한 낯선 학자들 이름들과 지난 80년간 회자되었거나 현재도 진행 중인 숱한 ‘주의(主義)’들에 대한 일별(一瞥)들 그리고 실제 각 국가 현장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 및 현재 상황들 – 일테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칠레, 브라질 등등- 을 친절(?)하게 학문적 서술로 이어 가는데, 나는 겨우 본문 350쪽 짜리 책을 일주일에 걸쳐 읽어 일독하였답니다. 일독 후 솔직히 내 이해도의 크기란 고작 50% 정도일겝니다.

그래도 내가 사는 미국과 모국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척도로써는 대만족인 책이었습니다.  내 수준으론 최소 삼독은 필요할 듯하답니다. 책의 몇 구절입니다.

<반동적 우파를 사로잡은 이 포퓰리즘 색채를 뛴 민족주의적 열정은 기독교적 서구, 그것도 백인에 한정된 자유의 이상화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중략- 국민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작업이 모두 함께 진행된다. 이러한 작업은 보통 새롭게 적을 지목하고 낙인찍음으로써 이루어진다. 트럼프에게는 멕시코인이, 이탈이아와 헝가리에서는 이민자가,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적이 된다.>

<국가를 찬양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국가 폭력은 국가의 역사 그 자체다.>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통치하려면 분할하라’라는 카트린 드 메디치의 유명한 격언보다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이제 오직 하나의 전략이 있을 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모든 요구를 결집하는 것이다. 가령 권리의 평등, 사회경제적 조건의 평등, 평등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 및 공공 사안에 대한 평등한 참여 보장 등을 들 수 있다. 한편에 경제적 투쟁이 있고 다른 한편에 문화적 투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등을 위한 사회적 투쟁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크고 작은 공동의 운명을 함께 인지하고 책임지는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관계의 일반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민주주의 사회는 완벽하게 조화롭지도, ‘합의적’이지도 않다. 갈등은 바람직하지 않은 찌꺼기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 중략 – 만주주의에서 갈등은 그 자체가 공동의 토의 및 결정의 산물인 규칙으로 운영되는 제도적 틀 속에서 해결된다.>

사람다운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끝없는 연대와 그야말로 긴 싸움을 이어가야만 이루어지는 것일겝니다.

그 긴 시간 속, 어느 짧은 한 순간을 살다 갈지언정 그 대열 언저리에서 서성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한恨과 흥興’에

어제 가까운 뉴저지 남쪽 마을에 있는 Rowan 대학교 Concert Hall에 열린 <한인의 얼(2025 Sprit of Korea)>이라는 공연을 보고 왔답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와 ‘뉴욕 취타대’ 그리고 한국의 ‘재외동포청’에서 공동 주최한 행사였답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는 제가 알고 있는 한, 미국내 한국학교 가운데 아주 독특한 자신만의 역사경험을 이루어낸 학교랍니다. 제가 이젠 일선에서 몇 발 물러선 처지라 이즈음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한때 한인 동포사회에서 회자되던 말들 가운데 하나랍니다. “한인들 이백 여 몀이 모여 살면 그곳에 어김없이 교회 하나가 생기고, 그 숫자만큼 한국학교 수도 늘어난다. 인구수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교회와 한국학교들의 숫자는 늘게 마련이고, 종종 문닫는 곳이 생길지언정 그들이 서로 합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는 그 일반적이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통합을 이루어 낸 보기 드문 자기 역사를 이룬 그야말로 ‘통합’학교로 제가 알고 있답니다.

<한인의 얼> 공연은 그 이름에 걸맞은 아주 멋진 무대였답니다. 꽉찬 두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은 일, 이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일부 한시간여는 한국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꾸민 무대였고, 나머지 한시간여 이부공연은 한국에서 온 소리꾼 박애리님과 그의 남편인 춤꾼 팝핀현준 그리고 중앙대학교 연주단들이 보여준 아주 멋진 연기 무대였습니다.

공연 제목 <한국의 얼>을 새기며 즐긴 후 맴돈 생각은 ‘한 恨’과 ‘흥 興’이었습니다. 우리네 음악과 춤을 듣고 보노라면 절로 떠오르게 되는 말들입니다. 엊저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연의 마지막 즈음 팝핀현준, 박애리님 부부가 보여준 열연으로 맞본 ‘한’과 ‘흥’이었습니다.

부부의 노래와 춤을 듣고 보면서 절로 흘러 나온 눈물과  저도 모르게 마구 치던 박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과  ‘흥’에 대한 제 나름의 증빙이었습니다.

딱히 ‘한’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살며 아픔, 아림, 슬픔 등을 겪거나 안고 살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을 ‘흥’으로 풀어내는 독특함, 바로 그것이 ‘한인들의 얼’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박애리와 팝핀현준님 부부가 부르고 보여준 마지막 노래들은 ‘고맙소’와 ‘아리랑’이었는데, 제겐 ‘한’을 풀어내는 ‘흥’으로 살아가라는 응원가로 들렸답니다. 제 삶뿐만 아니라 세상 일 바라보는 눈높이도 말입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답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에 감사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