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촌연가-1
함께 공유하는 기억들이 오늘 서로의 삶에 즐거운 버팀목이 된다면 축복이다.
아내가 손녀를 처음 안았던 날 깜짝 놀란 소리로 외쳤었다. “어머나! 얘 좀 봐! 어쩜 내 손금과 똑같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그냥 웃었을 뿐, 오늘까지 아이와 아내의 손금을 비교한 적은 없다. 그 소리를 들은 서울 처남이 보냈던 카톡이었다. “조만간 아이가 춤추고 노래하겠고만….”
아내에 대한 내 첫 기억은 고등학교 이학년 때이다. 아내는 중학교 일 학년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쏠춤을 신나게 추던 아내를 보며 내가 중얼거렸던 말이다. ‘저 아이는 커서 무엇이 될까?’ 그랬던 아내가 대학을 나보다 먼저 졸업을 하여 선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저 룸펜이 되어 떠돌았었다. 그 무렵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한 동네, 한 교회에서 유년에서 청년까지를 함께 보낸 우리들은 이민와 함께 일하는 세탁소에서도 옛 기억들을 되살리곤 한다.
2016년은 우리 내외가 어둡고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그 해 여름 기차여행은 우리 내외가 이민 이후 부모나 아이들 없이 단 둘이 해 본 첫 여행이었다. 그 해 봄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내기를 걸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기억력 테스트였는데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에게 유리한 게임이었다. 아내는 이내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내었다만 나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또 영영 감감 이었지만…

<신촌연가 – 1>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다. 아내가 다녔던 창서국민학교는 내가 국민하교 3학년 때 개교하였다.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었다. 제이한강교가 놓이고 강 건너 영등포와 사통팔달로 연결된 일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전쟁 후 쏟아진 친구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다. 신촌은 토박이와 피난민 그리고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 판잣집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 놈들은 그걸로 공차기를 하곤 했었다.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때기를 대문 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고 누구네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을 가로지를 수 없다는 지방토호들도 있었다. 어디 살건 누구네 자식이던 아이들은 다들 동무였다.
“창천의 푸른 물은…” 이름만 창천이었을 뿐,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 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던 탁한 개울물이었다.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향했다. 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떠다닌 곳이라고 송장내라고 부르던 개울에서 깨끗이 빨래를 하고 이고 오시던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 그게 하루길이었다.
내게는 아련한 추억과 기억들이 아름답게 남아있는 신촌이지만, 내 부모님들에겐 그곳은 네 남매를 키워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내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다. 안양유원지였다. 그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다. 그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셔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받은 후,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에 앉아 사셨다. 말이 점포였지 이동식 나무 상자 안은 도장 파는 기구들과 아버지가 앉으면 그만 꽉 차고 말았던 이동식 나무 상자였다.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이내 나무상자에서 빠져나오셔서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 간판을 올리셨다.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 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엄청 부지런하셨다.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였던 아버지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다.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다.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 까닭을 말씀하셨다.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명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다.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는데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는데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다. 그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다. 주인 마나님 눈치 보시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다. 내 어머니. 그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다.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다. 우선 내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내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부터 문(門) 안 출입은 내 차지였다.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 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하나를 그려 주시며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다. 내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다. 그 문안 나들이는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사춘기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국민학교 졸업 직전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