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 신촌연가-1

함께 공유하는 기억들이 오늘 서로의 삶에 즐거운 버팀목이 된다면 축복이다.

아내가 손녀를 처음 안았던 날 깜짝 놀란 소리로 외쳤었다. “어머나! 얘 좀 봐! 어쩜 내 손금과 똑같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그냥 웃었을 뿐, 오늘까지 아이와 아내의 손금을 비교한 적은 없다. 그 소리를 들은 서울 처남이 보냈던 카톡이었다. “조만간 아이가 춤추고 노래하겠고만….”

아내에 대한 내 첫 기억은 고등학교 이학년 때이다. 아내는 중학교 일 학년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쏠춤을 신나게 추던 아내를 보며 내가 중얼거렸던 말이다. ‘저 아이는 커서 무엇이 될까?’ 그랬던 아내가 대학을 나보다 먼저 졸업을 하여 선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저 룸펜이 되어 떠돌았었다. 그 무렵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한 동네, 한 교회에서 유년에서 청년까지를 함께 보낸 우리들은 이민와 함께 일하는 세탁소에서도 옛 기억들을 되살리곤 한다.

2016년은 우리 내외가 어둡고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그 해 여름 기차여행은 우리 내외가 이민 이후 부모나 아이들 없이 단 둘이 해 본 첫 여행이었다. 그 해 봄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내기를 걸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기억력 테스트였는데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에게 유리한 게임이었다. 아내는 이내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내었다만 나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또 영영 감감 이었지만…

<신촌연가 – 1>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다. 아내가 다녔던 창서국민학교는 내가 국민하교 3학년 때 개교하였다.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었다. 제이한강교가 놓이고 강 건너 영등포와 사통팔달로 연결된 일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전쟁 후 쏟아진 친구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다. 신촌은 토박이와 피난민 그리고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 판잣집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 놈들은 그걸로 공차기를 하곤 했었다.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때기를 대문 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고 누구네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을 가로지를 수 없다는 지방토호들도 있었다. 어디 살건 누구네 자식이던 아이들은 다들 동무였다.

“창천의 푸른 물은…” 이름만 창천이었을 뿐,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 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던 탁한 개울물이었다.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향했다. 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떠다닌 곳이라고 송장내라고 부르던 개울에서 깨끗이 빨래를 하고 이고 오시던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 그게 하루길이었다.

내게는 아련한 추억과 기억들이 아름답게 남아있는 신촌이지만, 내 부모님들에겐 그곳은 네 남매를 키워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내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다. 안양유원지였다. 그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다. 그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셔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받은 후,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에 앉아 사셨다. 말이 점포였지 이동식 나무 상자 안은 도장 파는 기구들과 아버지가 앉으면 그만 꽉 차고 말았던 이동식 나무 상자였다.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이내 나무상자에서 빠져나오셔서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 간판을 올리셨다.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 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엄청 부지런하셨다.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였던 아버지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다.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다.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 까닭을 말씀하셨다.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명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다.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는데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는데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다. 그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다. 주인 마나님 눈치 보시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다. 내 어머니. 그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다.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다. 우선 내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내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부터 문(門) 안 출입은 내 차지였다.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 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하나를 그려 주시며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다. 내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다. 그 문안 나들이는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사춘기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국민학교 졸업 직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

신촌역에서 연세대 앞 철다리까지 철길부근은 어릴 적 놀이터였다. 산딸기, 뱀딸기, 까마중, 도토리 등 먹을거리와 강아지풀, 채송화 등의 놀이기구, 계집아이들 손톱 물들이던 봉숭아 같은 화장품까지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촌역 –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침을 잘 발라놓은 뒤 기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못은 기차가 지나간 뒤면 납작하고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어 땅따먹기나 못 치기 놀이 도구가 되었다. 연세대 앞 철다리는 사내아이들의 간크기를 재는 시합장이었다. 기차가 오기 직전에 누가 먼저 철다리를 건너냐는 시합에 나는 늘 그저 구경꾼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신촌역에서 수색이나 능곡역까지 몰래 기차를 훔쳐 타서 오가는 것이 놀이가 되던 때도 있었다. 신촌역에서 기차표를 끊어 교외선을 타고 송추, 일영, 벽제 등지로 하루길 소풍을 오가던 때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의 일이다.

신촌역에서 이대 쪽으로 들어선 막걸리 작부집들이 눈에 들어올 무렵엔 나는 이미 스물이 넘어있었다. 신촌역 앞에 인력시장이 서고, 그곳에서 하루 몸팔이에 실패하고 빈속에 막걸리 기운으로 고함 한번 지르다가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잡혀온 사내와 함께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후 신촌역과 철길은 내게서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제법 먼 여행길에 나섰던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청량리에서 동해안 북평까지 열 시간 넘게 걸렸던 중앙선 기차여행이었다. 그해 초가을 심한 폐렴으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때 병실에서 듣던 기차소리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홀로 집을 나서 경부선을 탔었다.

열여덟을 넘기던 그해 여름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쌀과 모포 한 장으로 꾸린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곤 하였다. 경부, 호남, 전라, 장항, 중앙선을 타고 산과 강과 바다를 쏘다녔다.

기차와 배를 타고 몇 차례 제주행을 하고 열 시간 넘게 배를 타고 울릉도를 다녀온 뒤로 나는 기차소리를 잊었다. 이미 서른이 넘어 일상에 매인 나이가 되었으므로

벌써 몇 해 전이 되었는지 – 먼 옛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새록새록 떠오르건만 가까운 최근의 일들 일수록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 한국에서 경부선 KTX를 타 본 일이 있다. 그날 일은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한국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미국도 아닌 어느 외국에서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 인터넷을 모르던 때에 뉴욕을 오가던 하루길 기차여행은 내 이민생활에 누리던 호사였다. 고작 맥주 두어 캔 즐기는 사이 도착하는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맨해튼 서점에서 만나는 한글 신간서적들을 만나고, 입에 맞는 설렁탕이나 해장국 한 그릇의 호사를 즐기고 돌아오던 날이면 그냥 여기가 신촌이었던 것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로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잊은 지도 제법 되었다. 오가는 기차값과 한 끼 식사 값이면 내 방에 앉아서도 책 대여섯 권은 족히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가는 길이 번거로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이랄까? 뉴욕에 사는 딸아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이따금 기차여행은 이어지고 있다.

5년 주기 계약을 여덟 차례 이어 온 내 가게 뒤편으로는 미국 동북부를 잇는 Amtrek 철도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그 길을 오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늘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언젠간 기차를 타고 미국 대륙여행을 해 보아야지”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비록 절반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첫걸음으로 나는 기차여행길에 올랐었다.

“더 늙기 전에…” 기차 안에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인사차 들린 내게 구순 어머니께서 던진 말씀이다. “아무렴, 아직 젊을 때 다녀야지!”

2016년 여름 기차여행 끝에, 나는 아직 “더 늙기 전에”와 “아직 젊을 때” 그 사이에 서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늘 빠르거나 더디다.

친구들

멕시코계 이민자인 예세니아는 제 가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소중한 사람이랍니다. 늘 쾌활하게 묵묵히 자기 맡은 일에 온 열정을 다하는 예세니아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딸이 있답니다. 수줍음이 많은 건장한 그녀의 남편은 성실한 목수랍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일을 하다가 아주 슬픈 얼굴로 그녀가 말했답니다. “어저께 아주 친한 친구랑 헤어졌네요. 얼굴도 못 보고 그냥 친구의 목소리만 들었답니다. 멕시코로 추방되었어요. 참 열심히 살던 친구인데…. “, “우리 멕시코인들이 가장 많이 당하는 거 같아요…”

이른바 불법 이민자 추방 열풍이 작은 소도시인 우리 마을에도 불기 시작했나 봅니다. 예세니아 가족이나 우리 가족이나 합법 이민자들이지만, 합법과 불법의 경계란 때론 모호한 세상이 되기도 했던 역사적 경험들을 겪어낸 이 땅이고 보면, 그녀 친구의 일이 마냥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비슷한 때에 필라델피아 <우리센터>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센터>에서 받은 전화 내용이랍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이민자 추방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 권리보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약화시킬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민자 가족들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이 시기, 여러 도움과 지원이 절실합니다. 이민자 지키기 기금에 기부해, 우리센터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 네트워크의 단체들이 이민자 커뮤니티를 지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민자 커뮤니티를 지원합니다.

한국어 및 영어 상담이 제공되는 24/7 핫라인 운영/ 여러 언어로 제공되는 이민자권리교육 및 앱 배포/ 이민정책 관련 워크샵 진행/ 신뢰할 수 있는 이민 변호사의 법적 방어 서비스 지원/ 커뮤니티 주민들을 위한 정신건강 서비스 연결/ 이민자 커뮤니티 조직 및 이민자 권리옹호 캠페인 등입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필라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제가 감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참 좋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필라민주동포 모임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기원하며 지난 일월부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빛의 혁명 불을 밝히고 있는 모국의 민초들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푸드트럭을 보내 응원하고 있답니다.

또 다른 친구들입니다. 정말 오랜 연대의 끈을 놓치 않고 이어가는 친구들입니다. ‘결코 잊지 않고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는 필라델피아 모임’ <필라세사모> 친구들입니다.

저마다, 모임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주된 관심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두루 떠올려 본 까닭은 책 한권 때문입니다.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로, 오 게강 공저인 ‘내전, 대중혐오, 법치’라는 조금은 끙끙거리며 읽어 낸 책이랍니다.

저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끌어들인 숱한 낯선 학자들 이름들과 지난 80년간 회자되었거나 현재도 진행 중인 숱한 ‘주의(主義)’들에 대한 일별(一瞥)들 그리고 실제 각 국가 현장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 및 현재 상황들 – 일테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칠레, 브라질 등등- 을 친절(?)하게 학문적 서술로 이어 가는데, 나는 겨우 본문 350쪽 짜리 책을 일주일에 걸쳐 읽어 일독하였답니다. 일독 후 솔직히 내 이해도의 크기란 고작 50% 정도일겝니다.

그래도 내가 사는 미국과 모국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척도로써는 대만족인 책이었습니다.  내 수준으론 최소 삼독은 필요할 듯하답니다. 책의 몇 구절입니다.

<반동적 우파를 사로잡은 이 포퓰리즘 색채를 뛴 민족주의적 열정은 기독교적 서구, 그것도 백인에 한정된 자유의 이상화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중략- 국민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작업이 모두 함께 진행된다. 이러한 작업은 보통 새롭게 적을 지목하고 낙인찍음으로써 이루어진다. 트럼프에게는 멕시코인이, 이탈이아와 헝가리에서는 이민자가,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적이 된다.>

<국가를 찬양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국가 폭력은 국가의 역사 그 자체다.>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통치하려면 분할하라’라는 카트린 드 메디치의 유명한 격언보다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이제 오직 하나의 전략이 있을 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모든 요구를 결집하는 것이다. 가령 권리의 평등, 사회경제적 조건의 평등, 평등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 및 공공 사안에 대한 평등한 참여 보장 등을 들 수 있다. 한편에 경제적 투쟁이 있고 다른 한편에 문화적 투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등을 위한 사회적 투쟁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크고 작은 공동의 운명을 함께 인지하고 책임지는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관계의 일반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민주주의 사회는 완벽하게 조화롭지도, ‘합의적’이지도 않다. 갈등은 바람직하지 않은 찌꺼기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 중략 – 만주주의에서 갈등은 그 자체가 공동의 토의 및 결정의 산물인 규칙으로 운영되는 제도적 틀 속에서 해결된다.>

사람다운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끝없는 연대와 그야말로 긴 싸움을 이어가야만 이루어지는 것일겝니다.

그 긴 시간 속, 어느 짧은 한 순간을 살다 갈지언정 그 대열 언저리에서 서성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한恨과 흥興’에

어제 가까운 뉴저지 남쪽 마을에 있는 Rowan 대학교 Concert Hall에 열린 <한인의 얼(2025 Sprit of Korea)>이라는 공연을 보고 왔답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와 ‘뉴욕 취타대’ 그리고 한국의 ‘재외동포청’에서 공동 주최한 행사였답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는 제가 알고 있는 한, 미국내 한국학교 가운데 아주 독특한 자신만의 역사경험을 이루어낸 학교랍니다. 제가 이젠 일선에서 몇 발 물러선 처지라 이즈음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한때 한인 동포사회에서 회자되던 말들 가운데 하나랍니다. “한인들 이백 여 몀이 모여 살면 그곳에 어김없이 교회 하나가 생기고, 그 숫자만큼 한국학교 수도 늘어난다. 인구수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교회와 한국학교들의 숫자는 늘게 마련이고, 종종 문닫는 곳이 생길지언정 그들이 서로 합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는 그 일반적이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통합을 이루어 낸 보기 드문 자기 역사를 이룬 그야말로 ‘통합’학교로 제가 알고 있답니다.

<한인의 얼> 공연은 그 이름에 걸맞은 아주 멋진 무대였답니다. 꽉찬 두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은 일, 이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일부 한시간여는 한국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꾸민 무대였고, 나머지 한시간여 이부공연은 한국에서 온 소리꾼 박애리님과 그의 남편인 춤꾼 팝핀현준 그리고 중앙대학교 연주단들이 보여준 아주 멋진 연기 무대였습니다.

공연 제목 <한국의 얼>을 새기며 즐긴 후 맴돈 생각은 ‘한 恨’과 ‘흥 興’이었습니다. 우리네 음악과 춤을 듣고 보노라면 절로 떠오르게 되는 말들입니다. 엊저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연의 마지막 즈음 팝핀현준, 박애리님 부부가 보여준 열연으로 맞본 ‘한’과 ‘흥’이었습니다.

부부의 노래와 춤을 듣고 보면서 절로 흘러 나온 눈물과  저도 모르게 마구 치던 박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과  ‘흥’에 대한 제 나름의 증빙이었습니다.

딱히 ‘한’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살며 아픔, 아림, 슬픔 등을 겪거나 안고 살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을 ‘흥’으로 풀어내는 독특함, 바로 그것이 ‘한인들의 얼’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박애리와 팝핀현준님 부부가 부르고 보여준 마지막 노래들은 ‘고맙소’와 ‘아리랑’이었는데, 제겐 ‘한’을 풀어내는 ‘흥’으로 살아가라는 응원가로 들렸답니다. 제 삶뿐만 아니라 세상 일 바라보는 눈높이도 말입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답니다.

‘남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에 감사 드리며.

사랑에 – <자비를 나르는 수레-오지에서 끌다>를 읽고

온종일 비바람이 소리 내어 이어지는 날, 친구 서암 오시환과 한국의 수레꾼들이 걸어온 15년 이야기를 읽으며 보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알고 계획했던 일이 아닌데 브라이언 해어와 버네사 우즈의 공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연이어 손에 든 오서암의 <자비를 나르는 수레-오지에서 끌다>였는데  책 두권이 마치 연작처럼 이어져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마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조금은 허망한 듯한 끝을 이어주는 책이 바로 오서암의 <자비를 나르는 수레-오지에서 끌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는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삽화 “인류 진화도”를 소개하며 매우 의미심장한 명령을 던집니다. “인류 진화도”에서 시간의 흐름을 빼고 뜻을 새겨보라는 지시입니다. 수만년 전 기어 다니던 생물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직립형으로 진화되며 도구를 사용하게 되고 마침내 사람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같은 시간에 삽화 속 생명체들이 함께 사는 세상을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비인간화가 판치는 오늘 세상에 대한 경고를 이렇게 말한답니다.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매카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비인간화 경향은 오히려 가파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편견을 표출하던 덩치 큰 집단들이 보복성 비인간화 행태에 동참하며 순식간에 서로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보복적으로 비인간화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226쪽에서)”

이제 오시환이 쓴 <자비를 나르는 수레-오지에서 끌다> 이야기랍니다.

<참삶 배움의 집>은 금호동 언덕배기 달동네 판자촌 마을에 있었던 야학교 이름이랍니다. 책 지은이 오시환보다 13살 위인 단 하나뿐인 누나는 1960년대 이 학교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거지들 바로 가난하고 못사는 아이들을 가르쳤답니다. 1970년대 대학생이 된 오시환도 누나의 길을 따라 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캄보디아 오지 가운데서도 오지였던 황무지, 이름도 처음 듣고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 학교를 세우는 일에 오시환이 발을 내딛게 된 것은 모두 인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작고 작은 불자들의 모임인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의 초대 사무국장이 된 이후 그와 수레꾼 회원들이 캄보디아 뽀디봉 마을에서 이루어 낸 15년 동안의 이야기들 담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발상은 기특했지만 간밤에 꾸었던 꿈처럼 막연하고 흐릿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꿈을 멈추는 순간, 삶에 주어진 의미도 함께 멈춰버리기 때문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꿈을 쫓아 수레를 끌고 이어 온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앙드레 말로> 의 말처럼 그들의 삶이 <캄보디아 오지 마을 뽀디봉에서 한국의 수레꾼이 끌고 밀고 사랑의 인연이 꽃으로 피고 열매를 맺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책입니다.

황무지에 우물을 파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세우고, 전기를 끌어와 환한 마을로 바꾸어 놓은 수레꾼들은 열 다섯 해가 되던 해에 ‘수레꾼 뽀디봉 공예학교’를 열었습니다. 목공예와 봉제를 가르치며 공예품들을 제작할 수 있는 학교입니다.

지난 겨울 오시환부부의 꿈의 산실인 경북 봉화 농장에서 뽀디봉 봉제반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자랑하던 그의 모습이 선합니다.

<참삶 실천의 길>을 수레를 끌고 부단히 걸어온 수레꾼 대표 오서암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레꾼은 끝으로 말합니다. “씨앗이 있다고 무조건 싹이 트는 것이 아닙니다. 인(因, 씨앗)은 반드시 연(緣연, 자비의 수레)을 제대로 만나야 비로소 아름다운 꽃이 피고 맛있는 열매를 맺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저자는 비인간화로 황폐해 가는 세상을 이겨내고 더불어 함께 오래 살아가는 열쇠로 ‘사랑’을 말합니다. 오서암과 수레꾼들이 손에 들고 사는 열쇠입니다.

<사랑이 길이란다/ 사랑이 힘이란다/ 사랑이 전부란다 – 박노해의 사랑은 불이어라 중에서>

*** <일흔 노구에 대견한 할배였습니다. 오토바이에 매달려 4시간을(그 황무지 길을) 달리다니….책 297쪽에서> 친구 할배 오시환에게 물개박수를 보내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제 주먹구구식 통계랍니다. 저희 세탁소를 찾아 주시는 손님들 피부색깔 분포도입니다. 그냥 쉽게 색깔별로 가렵니다. 백인 60%, 흑인 20%, 홍 또는 황인 20%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제 느낌이랍니다. 백인 흑인 구별은 빤한 것이고 홍, 황인이란 일테면 남미, 중동 및 아시안을 통털은 구별입니다. 아시안으로는 대충 인도, 중국, 베트남, 한국인들일 겝니다.

제 가게 카운터 앞 한 쪽 벽면엔 제가 찍은 사진들과 시 몇 편들이 걸려있답니다. 그 중엔 제 가족 사진들이 있는데, 그 가족 사진들을 보고 반응하는 손님들의 태도가 피부 색깔별로 사뭇 다르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입니다.

일단은 저희 가족 사진을 보고 건네는 ‘멋진 가족’, ‘아름다운 가족’이라는 인사치레는 똑같습니다만, 흑인들의 경우는 그 친밀도가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아름답다’를 연발하며 까만 얼굴의 제 며느리와 곱슬머리 제 손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백인들의 경우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답니다. ‘멋진 가족’이라는 그 인사치레가 끝나면 많은 경우 사진 속 제 사위와 딸이 키우는 하얀색 수키 바로 사진 속 개에 대해 묻곤 한답니다. ‘무슨 종이니?’, ‘몇 살이니?’ 라는 물음으로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지요.

황, 홍인의 경우는 ‘참 예쁘다’히는 정도의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인사치레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기도 하고요.

이런 차이에 대해 평소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냥 사람 나름이겠거니 하며 살았답니다. 그러다 읽은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그런 차이에 대한 답을 주었답니다. 참 재미있는책인 동시에 가슴 한 쪽이 아려 오거나 저희 세대의 삶에 대해 감사가 절로 이는 책이었습니다.

진화인류학자인 저자들은 약 10만년에 걸친 인간과 보노보와 침팬치 그리고 사람들이 기르는 개의의 진화 과정을 정말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제가 워낙 과학이나 의학이나 생물학 등에 문맹에 가까운 처지라, 이따금 몇 번을 해제를 읽고 알아챈 언어들을 한 페이지 넘기자마자 잃어버려 조금 시간을 낭비했지만 정말 재미있게 풀어낸 이야기입니다.

전체가 아홉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7장을 읽을 때까지 아무 부담없이 사람살이가 얼마나 좋은 쪽으로 진화되어 왔는지 편하게 읽을 수 있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가장 편하게 쉬는 모습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치닫는 7장(불쾌한 골짜기)와 8장(지고한 자유)를 만나면 아주 많이 불편하답니다. 일테면 미국에서 트럼프를 극혐하는 사람들과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마주치는 현장, 아님 한국에서 이지음 마치 20세기 중반 친탁, 반탁처럼 신탁통치 대신 탄핵을 놓고 대치하는 둣한 황당한 역사적 반동의 현장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조금은 불편하답니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저자들의 희망적 메시지를 만나게 되는데….자못 허무하답니다.

책장을 덮고 잠시 눈을 감고 보니 저자가 말하는 자못 허무한 듯한 희망적 메시지는 어쩜 진정한 인류 미래의 해답일런지도 모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책 마지막 장, 마지막 페이지에 저자가 남긴 말들입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만한 충분한 공통기반을 찾아냈다. 다리가 둘이건 넷이건, 검건 하얗건, 그들리 우리를 사랑하는데는 그런 차이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바뀌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다.”

** 꽃피는 봄에 내 손녀가 유아세례식에 입을 옷을 빨고 다리다. 남대문 시장에서 아내와 함께 고른 옷이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설날 내게 입혔던 설빔처럼, 장인, 장모가 아내에게 입혔을 추석빔 처럼. 아주 작은 기도와 함께.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살아가길…’

책과 꿈

소복히 눈이 쌓인 날, 주문했던 책들이 왔습니다. 한국을 다녀온 후 읽고 싶었던 책들입니다.

친구 오시환이 지은 <자비를 나르는 수레 -오지에서 끌다>는 그가 지난 16년 동안 캄보디아 국경마을 ‘뽀디봉’에서 자비를 나르는 수레를 이끈 길을 따라가 보자는 마음으로 손에 넣은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잠재한 최선의 본성을 살리기 위한 열쇠’를 이야기한다는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입니다. ‘사방천지에 안 좋은 소식뿐이다. 전 세계를 휩쓴 감염병에서 간신히 살아남는가 했더니 온갖 해묵은 문제들이 다시 불거진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군사 쿠데타며, 재앙의 벼랑 끝에 놓인 기후변화며’ 저자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한국어판 서문 머리글입니다. 답답한 세상 소식을 들으면서도 어제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는 소망을 놓치 않으려는 생각으로 손에 잡은 책입니다.

<내전, 대중혐오, 법치>는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이나 제 모국 대한민국의 오늘날 모습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주문해 본 책이랍니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작품들입니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희랍어 시간>입니다. 그 동안 읽기를 미루며 그의 작품에 대한 글들이나 평, 뉴스까지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까닭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제가 참 편한 시간에 그의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은 주말에 또 내린다고 합니다. 부지런한 농부인 친구 병덕이는 봄 모종을 이미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눈밭 속에서 움을 틔우고 있는 봄이 곧 다가올 모양입니다.

눈과 함께 도착한 책장들을 넘기며 더불어 함께 사는 봄의 세상을 꿈꾸어 보려고 합니다.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 7

7.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마치며

    모두 아버지 덕이었다. 내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몹시 우울했다. 가난, 못 배움, 징용, 상이군인- 스물 푸르러야 마땅할 나이에 내 아버지를 짓누르던 말들이었다. 그러다 만난 예수였다. 피난지 부산에서 예수를 찾아 헤매던 시절 그 때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는 몹시 절실했었다고 했다. 피난지에는 각종 종교집회들이 곳곳에서 무시로 이어졌단다.

    어머니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와 신촌에 삶에 터를 잡게 된 것은 내 외할아버지 덕이었다. 아버지는 도장파는 기술을 배우러 다니는 길에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며 나를 업거나 걸리며 데리고 다니셨다. 아버지의 이동식 도장포가 굴레방다리 아현시장 입구에 세워진 때는 내가 아직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바람산 언덕배미에 있는 신촌 대현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일을 지난 해 여름 백수(白壽)를 누리고 떠나시는 날까지 오래도록 감사하셨다. 그리고 그 감사는 오늘 내게로 이어진다.

    아버지를 따라 아무 생각없이 다니던 그 대현교회에서 내 머리가 굵어지고, 자라며 때론 질척이며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아주 멀쩡하게 제법 얼추 바른 정신 세운 양 흉내 내 보기도 하는 사이에 코흘리개였던 내가 이제 노인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초, 중, 고, 대학을 거쳐 나이 서른 즈음에 그 교회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 후 대현교회를 떠났었다. 그렇게 사십 년 넘은 시간이 흐른 후, 지난 해 성탄 무렵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어찌어찌 두 해 연속으로 한국여행을 하게 되어 더러는 일년만에 다시 보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거의 오십 년 또는 사십 년 만에 만난 친구들도 많았다.

    지금 대현교회 목사님과 당회 그리고 아직도 그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 그 모임을 열심히 준비한 선후배들, 내 신앙의 선생 홍길복목사님 등 여러 사람들 덕에 누린 참 좋은  여행이었다만, 우리들의 신앙고백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누린 참 귀하고 감사가 이어져야 마땅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종종 우스개 소리로 하는 성경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른바 ‘간음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잘 알려진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성서 요한복음 8장 1-11절은 공동번역 개정판에서 옮겨 적은 것이다.

    신학적으로 학자들 간에 다툼도 많고, 설교자라면 몇 번 쯤은 되뇌였을  성서본문이기도 하였을 터이고, 교회 근처에 발 한번 디뎌 본적 없는 이들도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법하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기도 하고, 패러디가 유행하는 세태에서 별별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이 낳게 한 성서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떄마다 ‘그 때 사람들은 정말 착했구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나를 또는 너를 또는 그들 누군가를 내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었던 1950년대부터 오늘 2025년에 이르기 까지 그 어떤 시점이던 그 이야기의 주인공 또는 주변 인물들로 대입시켜 보면 언제나 잃지 않고 들었던 내 생각이다.

    일테면 내가 이 이야기 속 간음한 여인이어도, 예수 곁에 모인 군중속 한 사람이어도, 율법학자이어도, 바리새인이어도, 아니 내가 예수라도, 내가 살아왔던 1950년대와 2020년대 시점이라면 똑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 때 사람들은 정말 착했구나!”

    그러나 때때로 그 때 똑 같은 상황이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일어나는 경험을 맛 볼 때가 있다.

    2024년 성탄 즈음, 서울 신촌 대현교회에서 사, 오십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을 향해 사십 수년 만에 겨울 성탄절을 맞는 호주 이민 목회자 홍길복 목사가 사십 수 년 전과 똑같이 성탄은 “사랑, 사랑, 사랑이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외치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돌이킬수록 신 앞에서 부끄러운 B급 아니 C급 사람살이 걸음걸이 이어왔을지라도, 오늘의 삶을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신촌 바람산 언덕배미에 사철 푸른 담쟁이 넝쿨로 덮힌 대현교회에서 만난 예수와 선생님들과 친구들 덕이었다.

    그저 감사함으로.

    * 아내의 동기들, 아내를 늘 각별히 챙겨주는 영숙, 경희 아내의 언니들, 경자, 병덕 그리고 함께 못해 아쉬웠던 경애 내 동기들…. 특별히 누이를 극진히 챙겨준 큰 처남에게 인사하며.

    ** 예수님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사랑하며 함께 사는 이야기들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을 믿으며… 이 생각 하나 제대로 가르쳐 주신 선생 홍목사님께.

    *** 아름다운 나라에서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과 나누었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시간들을 간직하며.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6

    6. 세대(世代)에

      유년시절에 주로 듣던 사투리는 강원, 충청이나 전라, 경상도 말이 아니었다. 평안, 함경도 바로 이북 사투리였다. 이번 한국여행 마지막 이틀 저녁 시간을 각기 함께 했던 박성규와 김종석은 모두 이북 사투리를 쓰던 친구들이다.

      박성규는 제법 나이 들어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그래서리, 저래서리’하는 함경도 말투를 지니고 살았다. 내가 이번 한국여행 계획을 처음 상의했던 친구는 바로 박성규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참 착함을 너머 선한 친구이다.

      아직 열심히 일에 열중하는 건실한 기업인이다. ‘가기 전에 밥 한끼는 함께 해야하지 않느냐’며 그의 바쁜 시간을 쪼개 우리 내외에게 내어 주었다.

      어린 시절 추억에서부터 같은 대학을 다녔던 터라 그 시절의 이야기, 그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겪어낸 어려움들과 이젠 잘 가꾸어 온 사업에서 어떻게 멋지게 떠나야 할까 하는 그의 기도까지 이젠 여유롭고 조곤조곤한 서울 말투로 이어진 그이 이야기를 듣던 그날 저녁은 마치 우리 세대의 활동사진들을 보는 듯 했다.

      헤어지며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우리 또 언제 보겠수…. 건강합시다.’ 한 해 아래라고 아직도 내게 형 소리를 놓치지 않는 참 좋은 친구에게 깊은 감사를.

      바람산 언덕배미 초입 종석이네 집에는 온통 피양도 사투리 뿐이었다. 꼬부랑 할머니부터 손가락 휜 아버지, 늘 부지런하신 어머니 정순덕권사님 모두 모두 이북 사투리였다. 우리들의 유년과 소년과 청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기억들을 내가 품고 있는 친구 김종석이 시건방지게 지니고 있던 호(號)가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고향 이름인 신촌(新村)이다.

      여행 마지막 저녁시간을 그와 단둘이 보냈다. ‘뭘 먹고 싶수? 내가 세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 하나 골라보슈!’ 그렇게해서 내가 고른 곳이 연탄구이 돼지갈비집이었다. 그렇게 그 저녁 우리들은 우리들의 스물 언저리 비록 가진 것 없이 꿈만 있었던 B급 청춘시절부터 칠십줄에 놓인 우리들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곤고했던 그의 마포, 인천 시절의 청춘 이야기에서부터 발 딛게 된 대학 사무처 일,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는 결코 한눈 파는 법 없이 오르고 오르던 그의 지난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그의 첫 시집 ‘고물시계’를 자꾸 떠올렸었다.

      그 역시 성실했고 착했고 선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월을 지나왔을지라도, 어쩜 지금도 그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지하철 역에서 헤어지며 우린 한참을 꼭 껴안으며 서로에게 말했다. ‘건강하자!’, ‘건강합시다!’ 그 역시 내게 ‘형’ 소리를 놓지 않는 신촌, 그래 신촌친구다.

      나는 이번 한국여행에서 철원과 제2 땅굴과 평화전망대를 두루 돌아볼 수 있었다.  선배 차용철형과 친구 안병덕과 후배 김종민과 김환조목사 등의 배려 덕이었다. 내가 두루 돌아 걸어 본 그 길들은 거의 이십 여년 전 내 아버지가 여든 무렵에 마지막으로 한국여행을 가셨을 때 걸으셨던 길이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로 알려진 그 고지 한군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이 되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찾았었던 곳에 내가 서서 아버지와 내 세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그 부상으로 인해 대구 육군병원에 후송되었다가 그곳에서 욕과 원망과 아픔을 호소하는 다른 병사와 달리 부상 중에도 밝고 매사 긍정적인 이웃 병상 동료에 매료되어 예수쟁이가 되었었다.

      그런 아버지 덕에 아직 기역 니은도 모르던 나이에 다니던 곳이 신촌 대현교회였다. 그 추억을 찾아 떠났던 이번 한국여행이었다. 우리들의 세대도 저무는 즈음에.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5

      5. 동기동창 그리고 목포

        어린시절 중,고등, 대학에서 함께 지낸 동기동창 두 명이 있었다. ‘있다’가 아닌 ‘있었다’가 된 까닭은 한 친구가 아주 일찍 세상 떴기 때문이다. 참 독특한 친구였다. 용산 철도고등학교 앞에 살았던 박해용은 중학교 때부터 사진찍기와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중학교 때 이미 사진인화를 위한 자기만의 암실을 갖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을 담은 꽤 많은 양의 릴테이프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진과 음악을 좋아했던 상고 출신 박해용이 선택한 학과는 물리학과였다. 대학 교정에서 그의 얼굴을 보긴 참 힘들었다. 당시 연극 배경음악 작곡에 빠져 있던 그는 거의 학교에 나오지를 않았었다. 그 도가 지나쳐 유급 판정을 받고 급기야 제적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위기를 벗어나기에는 그는 너무 멀리 나가 있었다.

        그는 학교 교문에다 시원하게 오줌 큰 줄기 쏟아내곤 다른 대학교 물리학과로 옮겼다. 그 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학위를 다 끝내고 그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갓 마흔 언저리에서 세상을 놓았다.

        그리고 이제 하나 남은 박상열은 몇 십년을 떨어져 있다가도 목소리 들으면 “얌마! 새꺄!’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거의 유일한 친구다. 목소리는 이따금 들었다만 얼굴 본지는 거의 스무해가 지났을게다. 서울 숙소에 짐을 풀고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나 왔다!”, “그래 너 지금 어디야?”, “강서구 쪽 숙소에…”, “얌마, 그냥 우리 집으로 와! 그냥 짐 싸 갖고 와!”

        며칠 후 만난 그는 “너 뭐 먹고 싶냐? 먹고 싶은 거 있을 거 아냐?”, “야! 너 가고 싶은덴 없냐? 말해 봐! 가고 싶은데….” 연신 다그쳐 물었었다.

        그렇게 상열이 내외 덕에 우리 내외는 눈과 입의 호사를 많이도 누렸다. 서울에 있는 동안 거의 지하철만 타고 다녀 바깥 구경은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옛 서울 사대문안 토박이인 그의 아내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내 기억 속 거리와 사뭇 다른 풍경들을 즐길 수 있었다. 특별히 마포와 신촌, 굴레방다리, 아현, 서소문, 서대문, 독립문, 사직동, 통인동, 효자동, 익선동 등 우리 내외의 어린 시절 추억들이 남아 있는 거리들을 두루 돌아보아 참 좋았다.

        통인시장 삼계탕집에서 만난 톱밥난로는 아주 어린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가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어렸던 시절 다니던 신촌 대현교회에는 겨울이면 톱밥난로가 달아오르곤 했다. 톱밥난로 곁에 앉아 이따금 날아올라 반딧불처럼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재를 바라보며 목사님이나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나른하게 졸음에 빠져들던 내 유년을 만났던 것이다.  

        종로 3가 익선동은 내겐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동네가 이렇게 변하다니 그저 놀라움 뿐이었다. 나는 아내와 상열이 내외에게 이젠 돌아가신 정석기목사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스물 어간에 신촌 대현교회서 만나고, 거의 삼십년 만에 뉴욕에서 만났었던 정석기목사님의 종로 삼가에 얽힌 아주 슬프고 아린 이야기들을.

        우린 익선동 거리거리들을 둘러 보았고, 어느 찻집에 들어가 정말 오랜만에 방석을 깔고 앉아 느긋하게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들과 세상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대학 졸업 무렵이었던가? 상열이는 몸이 안좋아서 병원출입이 잦았었다. 그는 유학의 꿈을 접고 모교에서 학위를 다 끝낸 후 평생 학교에서 연구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은퇴하고 이젠 명예교수인데, 뭐 그런 거 보다 이런 표현이 맞나 모르겠다만, 두 내외가 참 예쁘게 살아 보기 참 좋았다.

        평생 법학자로 살아온 그에게서 들은 한국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은 내게 많은 깨침을 주었다.

        그리고 목포. 이번 한국 여행에서 우리 내외 단 둘이 일박 이일 먼 여행을 다녀 온 곳이 목포인데, 이게 다 상열이 덕이었다. 그가 물었었다 “야! 어디가고 싶으냐?”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목포였다. 뭐 큰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북 봉화도 가보고, 충남 대전도 가 보았으니 호남 쪽으로 가 볼 만한 데가 없을가 생각하다가 떠오른 목포였다. 아내나 나나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열이는 마침 잘 되었다며 목포가 좋아 내려간 지인이 있는데 잘 안내해 줄 것이라며 바로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함께 목포를 가려고 했었다만 문제가 생겼다. 올해 백 그리고 넷이 되시는 상열이 어머님 간병시설과 간병인의 스케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짧은 여행시간 역시 문제였다.

        그렇게 우리 내외는 단 둘이 목포 일박 이일 여행을 다녀왔다. 숱하게 들었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던 여행이었다. 나이들어도 결코 흥이 멈추지 않는 아내는 목포의 눈물 녹음 테이프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유달산 이난영의 노래비 앞에 서자, ‘여기서 목포의 눈물은 함께 불러 주어야지!”하며 한 자락을 뽑았었다. 등산객을 관중으로 두고서.  그리고 참 모를 일이었다. 정말 평화로운 모습의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앉아 까닭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훌쩍거리던 내 모습이. 일박 이일 목포 이야기는 조금 더 되새겨야 마땅하다.

        헤어지던 날, 상열이가 말했다. “언제 또 오냐?”, “글쎄…. 모르지 뭐…. 니가 함 오던가….”. “애들은…”, “글쎄 아들 며느리는 모르겠고, 딸 사위는 자주 오가는 편이지..”, “야! 그럼 애들 나올 때 우리 집에 있으라고 해, 편하게 해줄게.”

        그저 감사하고 고마웠다. 내 유일한 중, 고, 대학 동기동창 박상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