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연가 2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 턱없이 비좁았다. 한 학급에 70명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다.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 위한 교실이었다. 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을만큼 교실이 모자랐다.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 쪽 아이들은 창서 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었다. 아내가 다니던 학교다.
국민학교때 나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다.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내 놀이터이었다.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고 배달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다. 물론 조수인 나도 따라 나섰다.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 도장포가 세워졌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보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다. 나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다. 우리 가족이 셋방시대를 벗어난 때는 그 일이 있고 나서였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 씩이나 있고 대문가에는 우물과 앵두나무도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내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내 방을 갖게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린 시간은 잠시 뿐이었다.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는 할아버지와 동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촌에서 보낸 내 사춘기의 일기에서 할아버지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이다. 아버지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대노(大怒)하실 일이시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머슴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셨던 평생 머슴이셨다.
1901년생이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어느 날 억세게 힘이 좋은 고주망태로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셨다. 그렇게 겨울철 서너달 나하고 한 방에서 계시다가 어디론가 사라지지고는 다시 찬바람 일면 다시 내 방을 나누어 쓰시곤 하셨다. 들며 나실 때마다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내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한 십년 동안 겨울이면 한 방에서 동거하셨던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의 세 아드님 중 막내이셨다.
“어째 너희들은 외탁을 해서… 쯧쯧쯧” 내 아버지과 나를 향해 늘 하시던 말씀이셨다. 아버지와 나는 작고 여린 체구인데 비해 할아버지는 이른바 통뼈이셨다. 힘이 엄청 좋으셔서 젊은 시절 한 때 평택, 용인 씨름판 황소 차지하셨던 분이셨다.
나이 스물에 용인 유실마을 문씨 문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다. 일에는 이골이 나서 누구 못지 않은 최고의 머슴이셨다. 사단은 그 힘과 술이었다. 씨름판 황소 끌고 와 그 날로 술판으로 끝내 버리셨던 분이셨다. 내 아버지가 채 열 살이 되기 전 약수동 고모님 두 살 때, 내 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셨다.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와 고모님은 용인 유실마을 두 남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다.
훗날 나와 한 방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내게 들려주셨던 그 단순, 용감, 무지한 방랑의 한 평생은 어린 내가 듣기에도 측은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방랑끼는 나와 한 방을 쓰셨던 그 무렵에도 변치 않으셔서 아지랑이 이는 봄날이면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시며 잘 벼린 낫 한 자루 허리춤에 끼시고 “벌초 다녀오마” 그 한 말씀 남기신 후 어디론가 떠나셨었다. 그리곤 찬 바람 일고 김장철이 될 쯤이면 고주망태의 모습으로 돌아오시곤 하셨다.
어느 해던가, 아마 내가 대학 1학년이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돌아 오셔야 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으셨다. 아버지와 나는 용인 유실마을, 궤밀마을, 평택, 진천 등지로 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니가 재봉이 손자여”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 있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신촌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만취가 되어 내 방에 누어 계셨다. 그 할아버지의 여름, 겨울 한복의 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술 취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대야 물 받아 닦아 주셨던 이는 내 아버지셨다.
1976년 봄. 마지막으로 한 달. 신촌 노고산동 내 방에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다. 그렇게 한 달포 동안 오래 누우셨던 일은 당신 평생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우리 아버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찬송을 끊이지 않으셨다. “아부지, 제발 예수 믿고 돌아 가세요. 그래야 천당 가세요” 그 말씀 쉬지 않으셨다.
그 때 내 할아버지 하신 말씀.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이제 와서 뭘” 음치에 가까운 내 아버지의 그 찬송소리가 지겨우셨는지 아님 아버지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사흘 전 “그래 믿자” 그 한마디 할아버지 말씀에 목사님을 부르고 할아버지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비에 빨간 십자가 하나 그려 놓으셨다. 내 아버지께서.
그때 할아버지 마지막을 위해 기도해 주셨던 대현교회 김용진 목사님께서 우리 내외의 결혼 주례를 맡아 주셨다.
이제 나는 그때의 할아버지 나이에 가까워졌다.
그래서일까.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거나 몰랐던 삶들까지, 이제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