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연가 -3
신작로(新作路), 문(門) 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이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대문(四大門) 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다마치기라고 했다만),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다. 그즈음에 내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 도서관에 가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내게서 멀어졌다. 내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수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내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립문 부근에 사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나는 방과 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이었다. 그날 이후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다.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황순원,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 하였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등등 내 즐거움이었다.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했고,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이다.
운동화. 그즈음 내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나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나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나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다. 대학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곤 했다.
그 시절에 내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다. “고난 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워낙 열정적이셔서 그와 가까이 있으면 침세례를 받곤 했었고, 훗날 내가 머리 굵어져 제법 신학적 고뇌 흉내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신 분이시었다. 그리고 또 박대위교수님과 이열모교수님을 잊지 못한다. 한 분은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넣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른 한 분은 당신 댁 서재에서 절두산이 내려다 보이는 한강 풍경을 내려다보며 “아 내가 이 시대에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곤 한다는 말씀으로 우리들을 깨우곤 하셨다. 또 한 분 “너희들은 지금이야말로 황금시대(Golden Age)를 누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라”라고 시간의 중요함을 깨쳐 주셨던 최창한 장로님이 계셨다. 내가 특별히 이 어르신께 감사드리는 까닭은 친구 하나 없었던 내 아버지에게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와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이다. 상업고등하교를 다니던 나는 공부를 지지리 못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쑤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다.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다. 영어선생님이시던 김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나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다.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내 길을 선택해 주셨다. 그 김 선생님 훗날 내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내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다. 하여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다.
아!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굣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 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곳곳에 내걸리기 시작했다.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과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주었던 술집 이름들 기억은 여전하다. 꽉 찬 10년, 내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다.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 적 없는 학교생활이었다.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내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이디.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다. 학교도 잘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이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내게 신촌은 이미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몇 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는 각서라고 쓰여 있었고 거기에 내 지장을 찍은 후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 눔아! 책 같은 겔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막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