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표 운동화 그리고 탈 신촌(脫新村)

신촌연가 -3

신작로(新作路), 문(門) 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이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대문(四大門) 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다마치기라고 했다만),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다. 그즈음에 내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 도서관에 가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내게서 멀어졌다. 내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수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내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립문 부근에 사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나는 방과 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이었다. 그날 이후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다.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황순원,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 하였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등등 내 즐거움이었다.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했고,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이다.

운동화. 그즈음 내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나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나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나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다. 대학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곤 했다.

그 시절에 내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다. “고난 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워낙 열정적이셔서 그와 가까이 있으면 침세례를 받곤 했었고, 훗날 내가 머리 굵어져 제법 신학적 고뇌 흉내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신 분이시었다. 그리고 또 박대위교수님과 이열모교수님을 잊지 못한다. 한 분은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넣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른 한 분은 당신 댁 서재에서 절두산이 내려다 보이는 한강 풍경을 내려다보며 “아 내가 이 시대에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곤 한다는 말씀으로 우리들을 깨우곤 하셨다. 또 한 분 “너희들은 지금이야말로 황금시대(Golden Age)를 누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라”라고 시간의 중요함을 깨쳐 주셨던 최창한 장로님이 계셨다. 내가 특별히 이 어르신께 감사드리는 까닭은 친구 하나 없었던 내 아버지에게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와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이다. 상업고등하교를 다니던 나는 공부를 지지리 못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쑤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다.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다. 영어선생님이시던 김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나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다.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내 길을 선택해 주셨다. 그 김 선생님 훗날 내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내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다. 하여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다.

아!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굣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 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곳곳에 내걸리기 시작했다.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과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주었던 술집 이름들 기억은 여전하다. 꽉 찬 10년, 내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다.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 적 없는 학교생활이었다.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내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이디.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다. 학교도 잘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이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내게 신촌은 이미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몇 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는 각서라고 쓰여 있었고 거기에 내 지장을 찍은 후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 눔아! 책 같은 겔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막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다.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

신촌연가 2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 턱없이 비좁았다. 한 학급에 70명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다.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 위한 교실이었다. 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을만큼 교실이 모자랐다.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 쪽 아이들은 창서 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었다. 아내가 다니던 학교다.

국민학교때 나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다.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내 놀이터이었다.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고 배달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다. 물론 조수인 나도 따라 나섰다.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 도장포가 세워졌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보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다. 나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다. 우리 가족이 셋방시대를 벗어난 때는 그 일이 있고 나서였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 씩이나 있고 대문가에는 우물과 앵두나무도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내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내 방을 갖게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린 시간은 잠시 뿐이었다.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는 할아버지와 동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촌에서 보낸 내 사춘기의 일기에서 할아버지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이다. 아버지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대노(大怒)하실 일이시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머슴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셨던 평생 머슴이셨다.

1901년생이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어느 날 억세게 힘이 좋은 고주망태로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셨다. 그렇게 겨울철 서너달 나하고 한 방에서 계시다가 어디론가 사라지지고는 다시 찬바람 일면 다시 내 방을 나누어 쓰시곤 하셨다. 들며 나실 때마다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내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한 십년 동안 겨울이면 한 방에서 동거하셨던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의 세 아드님 중 막내이셨다.

“어째 너희들은 외탁을 해서… 쯧쯧쯧” 내 아버지과 나를 향해 늘 하시던 말씀이셨다. 아버지와 나는 작고 여린 체구인데 비해 할아버지는 이른바 통뼈이셨다. 힘이 엄청 좋으셔서 젊은 시절 한 때 평택, 용인 씨름판 황소 차지하셨던 분이셨다.

나이 스물에 용인 유실마을 문씨 문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다. 일에는 이골이 나서 누구 못지 않은 최고의 머슴이셨다. 사단은 그 힘과 술이었다. 씨름판 황소 끌고 와 그 날로 술판으로 끝내 버리셨던 분이셨다. 내 아버지가 채 열 살이 되기 전 약수동 고모님 두 살 때, 내 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셨다.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와 고모님은 용인 유실마을 두 남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다.

훗날 나와 한 방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내게 들려주셨던 그 단순, 용감, 무지한 방랑의 한 평생은 어린 내가 듣기에도 측은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방랑끼는 나와 한 방을 쓰셨던 그 무렵에도 변치 않으셔서 아지랑이 이는 봄날이면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시며 잘 벼린 낫 한 자루 허리춤에 끼시고 “벌초 다녀오마” 그 한 말씀 남기신 후 어디론가 떠나셨었다. 그리곤 찬 바람 일고 김장철이 될 쯤이면 고주망태의 모습으로 돌아오시곤 하셨다.

어느 해던가, 아마 내가 대학 1학년이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돌아 오셔야 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으셨다. 아버지와 나는 용인 유실마을, 궤밀마을, 평택, 진천 등지로 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니가 재봉이 손자여”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 있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신촌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만취가 되어 내 방에 누어 계셨다. 그 할아버지의 여름, 겨울 한복의 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술 취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대야 물 받아 닦아 주셨던 이는 내 아버지셨다.

1976년 봄. 마지막으로 한 달. 신촌 노고산동 내 방에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다. 그렇게 한 달포 동안 오래 누우셨던 일은 당신 평생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우리 아버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찬송을 끊이지 않으셨다. “아부지, 제발 예수 믿고 돌아 가세요. 그래야 천당 가세요” 그 말씀 쉬지 않으셨다.

그 때 내 할아버지 하신 말씀.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이제 와서 뭘” 음치에 가까운 내 아버지의 그 찬송소리가 지겨우셨는지 아님 아버지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사흘 전 “그래 믿자” 그 한마디 할아버지 말씀에 목사님을 부르고 할아버지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비에 빨간 십자가 하나 그려 놓으셨다. 내 아버지께서.

그때 할아버지 마지막을 위해 기도해 주셨던 대현교회 김용진 목사님께서 우리 내외의 결혼 주례를 맡아 주셨다.

이제 나는 그때의 할아버지 나이에 가까워졌다.

그래서일까.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거나 몰랐던 삶들까지, 이제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기억에

  • 신촌연가-1

함께 공유하는 기억들이 오늘 서로의 삶에 즐거운 버팀목이 된다면 축복이다.

아내가 손녀를 처음 안았던 날 깜짝 놀란 소리로 외쳤었다. “어머나! 얘 좀 봐! 어쩜 내 손금과 똑같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그냥 웃었을 뿐, 오늘까지 아이와 아내의 손금을 비교한 적은 없다. 그 소리를 들은 서울 처남이 보냈던 카톡이었다. “조만간 아이가 춤추고 노래하겠고만….”

아내에 대한 내 첫 기억은 고등학교 이학년 때이다. 아내는 중학교 일 학년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쏠춤을 신나게 추던 아내를 보며 내가 중얼거렸던 말이다. ‘저 아이는 커서 무엇이 될까?’ 그랬던 아내가 대학을 나보다 먼저 졸업을 하여 선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저 룸펜이 되어 떠돌았었다. 그 무렵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한 동네, 한 교회에서 유년에서 청년까지를 함께 보낸 우리들은 이민와 함께 일하는 세탁소에서도 옛 기억들을 되살리곤 한다.

2016년은 우리 내외가 어둡고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그 해 여름 기차여행은 우리 내외가 이민 이후 부모나 아이들 없이 단 둘이 해 본 첫 여행이었다. 그 해 봄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내기를 걸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기억력 테스트였는데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에게 유리한 게임이었다. 아내는 이내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내었다만 나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또 영영 감감 이었지만…

<신촌연가 – 1>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다. 아내가 다녔던 창서국민학교는 내가 국민하교 3학년 때 개교하였다.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었다. 제이한강교가 놓이고 강 건너 영등포와 사통팔달로 연결된 일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전쟁 후 쏟아진 친구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다. 신촌은 토박이와 피난민 그리고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 판잣집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 놈들은 그걸로 공차기를 하곤 했었다.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때기를 대문 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고 누구네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을 가로지를 수 없다는 지방토호들도 있었다. 어디 살건 누구네 자식이던 아이들은 다들 동무였다.

“창천의 푸른 물은…” 이름만 창천이었을 뿐,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 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던 탁한 개울물이었다.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향했다. 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떠다닌 곳이라고 송장내라고 부르던 개울에서 깨끗이 빨래를 하고 이고 오시던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 그게 하루길이었다.

내게는 아련한 추억과 기억들이 아름답게 남아있는 신촌이지만, 내 부모님들에겐 그곳은 네 남매를 키워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내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다. 안양유원지였다. 그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다. 그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셔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받은 후,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에 앉아 사셨다. 말이 점포였지 이동식 나무 상자 안은 도장 파는 기구들과 아버지가 앉으면 그만 꽉 차고 말았던 이동식 나무 상자였다.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이내 나무상자에서 빠져나오셔서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 간판을 올리셨다.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 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엄청 부지런하셨다.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였던 아버지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다.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다.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 까닭을 말씀하셨다.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명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다.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는데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는데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다. 그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다. 주인 마나님 눈치 보시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다. 내 어머니. 그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다.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다. 우선 내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내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부터 문(門) 안 출입은 내 차지였다.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 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하나를 그려 주시며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다. 내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다. 그 문안 나들이는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사춘기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국민학교 졸업 직전의 일이었다.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6

6. 세대(世代)에

    유년시절에 주로 듣던 사투리는 강원, 충청이나 전라, 경상도 말이 아니었다. 평안, 함경도 바로 이북 사투리였다. 이번 한국여행 마지막 이틀 저녁 시간을 각기 함께 했던 박성규와 김종석은 모두 이북 사투리를 쓰던 친구들이다.

    박성규는 제법 나이 들어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그래서리, 저래서리’하는 함경도 말투를 지니고 살았다. 내가 이번 한국여행 계획을 처음 상의했던 친구는 바로 박성규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참 착함을 너머 선한 친구이다.

    아직 열심히 일에 열중하는 건실한 기업인이다. ‘가기 전에 밥 한끼는 함께 해야하지 않느냐’며 그의 바쁜 시간을 쪼개 우리 내외에게 내어 주었다.

    어린 시절 추억에서부터 같은 대학을 다녔던 터라 그 시절의 이야기, 그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겪어낸 어려움들과 이젠 잘 가꾸어 온 사업에서 어떻게 멋지게 떠나야 할까 하는 그의 기도까지 이젠 여유롭고 조곤조곤한 서울 말투로 이어진 그이 이야기를 듣던 그날 저녁은 마치 우리 세대의 활동사진들을 보는 듯 했다.

    헤어지며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우리 또 언제 보겠수…. 건강합시다.’ 한 해 아래라고 아직도 내게 형 소리를 놓치지 않는 참 좋은 친구에게 깊은 감사를.

    바람산 언덕배미 초입 종석이네 집에는 온통 피양도 사투리 뿐이었다. 꼬부랑 할머니부터 손가락 휜 아버지, 늘 부지런하신 어머니 정순덕권사님 모두 모두 이북 사투리였다. 우리들의 유년과 소년과 청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기억들을 내가 품고 있는 친구 김종석이 시건방지게 지니고 있던 호(號)가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고향 이름인 신촌(新村)이다.

    여행 마지막 저녁시간을 그와 단둘이 보냈다. ‘뭘 먹고 싶수? 내가 세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 하나 골라보슈!’ 그렇게해서 내가 고른 곳이 연탄구이 돼지갈비집이었다. 그렇게 그 저녁 우리들은 우리들의 스물 언저리 비록 가진 것 없이 꿈만 있었던 B급 청춘시절부터 칠십줄에 놓인 우리들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곤고했던 그의 마포, 인천 시절의 청춘 이야기에서부터 발 딛게 된 대학 사무처 일,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는 결코 한눈 파는 법 없이 오르고 오르던 그의 지난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그의 첫 시집 ‘고물시계’를 자꾸 떠올렸었다.

    그 역시 성실했고 착했고 선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월을 지나왔을지라도, 어쩜 지금도 그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지하철 역에서 헤어지며 우린 한참을 꼭 껴안으며 서로에게 말했다. ‘건강하자!’, ‘건강합시다!’ 그 역시 내게 ‘형’ 소리를 놓지 않는 신촌, 그래 신촌친구다.

    나는 이번 한국여행에서 철원과 제2 땅굴과 평화전망대를 두루 돌아볼 수 있었다.  선배 차용철형과 친구 안병덕과 후배 김종민과 김환조목사 등의 배려 덕이었다. 내가 두루 돌아 걸어 본 그 길들은 거의 이십 여년 전 내 아버지가 여든 무렵에 마지막으로 한국여행을 가셨을 때 걸으셨던 길이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로 알려진 그 고지 한군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이 되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찾았었던 곳에 내가 서서 아버지와 내 세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그 부상으로 인해 대구 육군병원에 후송되었다가 그곳에서 욕과 원망과 아픔을 호소하는 다른 병사와 달리 부상 중에도 밝고 매사 긍정적인 이웃 병상 동료에 매료되어 예수쟁이가 되었었다.

    그런 아버지 덕에 아직 기역 니은도 모르던 나이에 다니던 곳이 신촌 대현교회였다. 그 추억을 찾아 떠났던 이번 한국여행이었다. 우리들의 세대도 저무는 즈음에.

    믿음에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는 온라인 모임인 zoom meeting의 일대 유행이다.

    나는 온라인 모임 프로그램을 십 수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 이즈음 유행인 zoom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프로그램을 이용했었는데 사용료는 월 120불 정도의 고액이었다.  미주 전역의 세탁인들과 정보를 나누고 대화를 잇는 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내가 세탁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지식도 일천하지만, 그저 세탁업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어제보다는 나은 세탁소를 운영해 가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던 지난 세월 이야기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는 생각에 하나 둘 일을 정리하면서 그 일도 접었다.

    그래도 온라인 미팅은 이어와 이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젠 나도 zoom을 사용하고 있고,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는 세탁인들이 아니라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인다. 나는 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산다.

    팬데믹 이후 아내가 나보다 zoom meeting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학교 수업 및 교사회의, 이사회, 한인회 등등 이즈음 아내는 가히 유행 따라 산다.

    아내가 참석하는 온라인 모임 가운데 옛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모이는 이 모임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 시절에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족히 사십 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화상으로 얼굴 맞대고 만나는 모임이다.

    카톡 등으로 간간히 서로 간의 소식을 주고 받던 친구들 가운데 한 친구가  중한 병을 얻었단다. 그 친구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자고 시작한 온라인 모임이란다. 그렇게 한 주간 한 차례 씩 모여  함께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며 사십 여년 만나지 못하고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도 나누곤 한단다.

    그 친구들 몇몇은 나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한 교회를 다녔고 내게는 사 년 후배가 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 해 후배인 종석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난 말이유,  어릴 때 주일학교라도 다녔기에 요만큼이라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우.’ 그를 본 지도 어느새 십년이 흘렀다. 그가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노부모들이 연이어 병상 생활을 하시다 한 분 두 분 떠나시며, 먼 여행길은 한 해 두 해 미루어져 왔다. 이즈음엔 한 분 홀로 남으신 아버지 얼굴 한 번 들여다 보는 일이 일과이다. 더더우기 지루하게 이어지는 팬데믹 까지 한국 여행은 이젠 계획에서 멀어졌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옛 벗들을 생각한다.

    어찌 보냈건 흘러간 세월들에 감사를, 어떤 연으로 잇던 오늘의 소식들에서 서로 간에 위로를, 지나간 세월에 비해 턱없이 짧을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나누는 만남들이 되기를 빌며.

    믿음이란 딱히 극적일 까닭도 없고 절벽 끝에 서야만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 부부가 다니던 교회 이름은 대현大峴교회. 큰고개(大峴)에서 함께 뛰놀던 옛 벗들을 생각하며.

    (십년 전, 딸아이와 함께 찾았던  옛 시간은 지금도 소중하다.)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하여 고향생각에 젖어 보낸 한주간 생각을 내 가게 손님들과 함께 나누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모님의 피난지였던 부산이지만 그 곳에 대한 기억은 없다. 유년의 첫 기억부터 청년의 끝물까지 아련한 세월을 묻어 둔 곳은 신촌이다.

    문득 따져보니 신촌 (새마을 , New Village)에서 보낸 세월보다 이 곳 델라웨어 Newark(새 방주, New 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지낸 시간들이 더 길어졌다. 그 생각 끝에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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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가게 손님 몇 분들이 한국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셨답니다. 그 영화가 올해 4개의 오스카상을 탔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는 그 수상 소식이 매우 큰 뉴스였답니다.

    영화나 아카데미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제가 영화나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그 영화 감독인 봉준호라는 이름 때문에 떠올린 제 고향 이야기를 드리려 한답니다.

    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곳은 대한민국 서울시 신촌이라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제가 살 때만 하여도 서울 중심부에서 서쪽 외곽에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신촌이라는 동네 이름의 뜻이 새마을이랍니다. 새로 생겨 도시와 시골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진 동네였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제 블로그에  ‘신촌연가’(신촌을 그리워 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벌써 십 수년이 지난 오래 전 일이랍니다.

    연재의 마지막 글에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댓글이 달렸었답니다. “글을 인상깊게 잘 읽었다. 신촌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다. 당신이 살았던 때의 거리의 풍경, 많이 보던 나무들 등등….”이라는 글과 함께 그의 이메일 주소가 남겨 있었답니다.

    저는 그 댓글을 남긴 봉준호라는 이가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제가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 이름이 유명한 영화감독 이름인지도 몰랐거니와 알았다한들 역시 응답은 하지 않았을겝니다.

    그렇게 지난 주 봉준호라는 이름을 들으며 다시 떠올리게 된 제 고향이랍니다.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내 고향 신촌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가 봐야겠다는 생각 위로 한 해 한 해 세월의 숫자만 쌓여가고 있답니다.

    따지고 보니 제가 신촌에서 산 세월보다 New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보낸 시간들이 더 길답니다. 세탁소는 현재 진행형이고, 언젠간 은퇴할 것이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낼 계획이니 또 다른 고향이 Newark인 셈입니다.

    신촌(새마을 , New Village)에서 Newark(새 방주, New Ark)까지의 내 삶을 추억하게 한 지난 주 다시 만난 봉준호라는 이름에 감사하며.

    지난 일요일 아침 Newark 저수지 방죽길에서 찍은 내 제2의 고향 Newark 사진 몇 장 함께 나눕니다.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로 하여 새 힘이 솟는 시간들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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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week, some customers talked to me about the Korean movie, “Parasite.” That was because it won four Oscars this year. Of course, it was very big news to Korean people.

    I don’t have much knowledge about movies and Academy Awards, and I’m not trying to talk about them.

    The name of the director, Bong Joon-ho, reminded me of my hometown, and I’m going to talk about it.

    The place where I spent my childhood and youth was Shinchon in Seoul, South Korea. Now it has become a part of the heart of the Seoul Metropolitan area, but when I lived there, it was like a village distant from the downtown of Seoul. The meaning of “Shinchon” is “new village.” As it was a newly developed village, it had the urban atmosphere alongside the countryside feeling.

    If anyone starts to reel off a story about the hometown where he/she grew up, it would be endless. Like anybody else, I have lots of stories and memories about my hometown. I had posted a series of them at my blog site with the title, “Shinchon Yeon-ga (a song for missing Shinchon).” It was more than a decade ago.

    At the last post of the series, a comment was written under the name of “Bong Joon-ho.” It said, “I read the series of your posts and was impressed. I’d like to hear more about Shinchon, such as scenes of trees, streets and so on when you lived there…” He also left his e-mail address.

    I’m not sure whether the comment writer, “Bong Joon-ho,” and the director of the movie “Parasite” is the same person. That’s because I didn’t respond to the comment. At that time, I didn’t know that it was a famous director’s name. Even if I had known it, I would not have responded.

    Like that, when I heard the name, “Bong Joon-ho,” last week, I recalled my hometown. Occasionally, really occasionally, I have missed faces sweeping across my memory along with my hometown. On the thought that I’d visit there sometime, the number of years has been heaping one by one.

    After calculation, I realized that the years which I have spent in Newark running a cleaners are longer than ones which I spent in my hometown, “Shinchon.” Furthermore, I’m running a cleaners now, and I’ll retire sometime in the near future and spend the rest of my life here. So, Newark is definitely my second hometown.

    Thanking the name, “Bong Joon-ho,” for prompting me to go on a trip down my memory lane from “Shinchon (New Village)” to “Newark (New Ark).”

    I’m sharing with you some pictures of my second hometown, Newark, which I took at the causeway of the Newark Reservoir last Sunday morning.

    I wish that you will be reinvigorated with thoughts of everything and everyone that you are missing.

    From your cleaners.

    과정(過程)

    국민학교 몇 학년 때 였던가? 아마도 여름방학을 앞 둔 이 맘 때 쯤이었을게다. 신촌 신영극장 뒷길을 걷다 바라 본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들이 포근한 솜처럼 피어 있었다. 입 헤벌리고 그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데 벌이 내 눈가를 쏘았었다. 그야말로 눈탱이가 밤탱이 되었던 그 여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제 오후 가게 밖 하늘 풍경은 딱 그 때였다. 1960년대 어느 여름 신촌 그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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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게 문 닫고 돌아오는 길, Curtis Mill Park 숲길을 걷다. 새소리 물소리, 길가 강아지풀에 담긴 옛 생각들을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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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아 주어야 할 것이 어찌 잡은 물고기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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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하루 치매끼가 더해 가시는 노인들과 이제 막 신혼을 꾸미고 인사차 들린 처조카 내외를 보며  든 생각 하나.

    무릇 삶은 놓아 주어야 할 과정의 연속.

    첫 눈 그리고 고향

    카리브해에 있는 아루바(Aruba)가 자기 고향이라고 하는 가게 손님이 있다. 아일랜드계 이민으로 뉴욕에서 낳고 학교를 다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초등학교 초기까지의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을 다녀 올 때면 늘 작은 선물을 잊지 않아 우린 늘 미안하다. 그런 그녀가 가지 않는 곳, 바로 그녀의 고향 아루바다. 이따금 뉴스들 속에서 만나는 아루바를 보면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고향과 너무나 다르단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새겨진 고향 아루바를 찾는 순간 평생 간직해 온 고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 잃어 버릴 것 같아 결코 그 곳을 찾는 일은 없을게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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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런 그녀를 백번 이해한다. 나는 이미 수 년 전 내 고향 신촌을 찾았을 때  그녀의 염려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매 주 한차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훑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제로 1960년 4월 혁명 전후 시절까지 이어져 왔다. 1960년 어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내 고향 생각에 빠졌었다.

    그리고 첫 눈 치고는 제법 눈이 많이 내린 오늘, 손님 발길이 뚝 끊긴 가게에서 내 고향 신촌 생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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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 나는 왼쪽 가슴에 크고 하얀 무명 손수건을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 아버지가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듯 나 역시 국민학교가 맞다. 소학교나 국민학교나 일본식이라고 하여도 우린 그때 그렇게 불렀으므로. 물론 내 이야기가 아닌 한 초등학교라고 부르려 애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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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몇 안되는 내 유년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이 1960년 4월 19일일 것이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많고 학교수는 적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었어도 한반에 7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울타리 안에 국민학교와 뒤늦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공민학교가 함께 였다. 아무튼 당시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어 막 입학한 나는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같은 유희 반 질서 교육 반의 교육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아 책 걸상에 처음 앉아 보는 날이었다.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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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반이었던 나는 ‘이놈아, 늦겠다! 어여 빨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신촌 노타리 앞 큰 행길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내가 그 행길 앞에 섰을 즈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시위 행렬이었다. 연대생들이 문안(우린 그 때 사대문四大門안이라는 뜻으로 서울시내를 그렇게 불렀었다.)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이었다. 나는 그 행렬을 구경하노라고 뒤늦게 텅빈 학교를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날 밤이든가 이튿날 저녁이든가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형 하나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로 골목이 흉흉하였던 기억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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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항쟁, 3선 반대 시위, 교련반대 시위, 그리고 유신 후 여러 시위들과 1980년 봄 그날의 시위까지 나는 그 거리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유, 소년과 청년 시절 30여년을 보냈다. 때론 구경꾼으로 때론 그 시위대의 한 가운데서.

    올들어 몇 권의 역사책들을 읽었다. 몇 권의 프랑스 혁명사와 미국사 및 미국 민중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와 일본 현대사들이 그것들인데  2018년 올 한 해가 내게 참 소중히 기억될 연유이다. 더하여 가르쳐 주는 선생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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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읽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이제껏 내가 살아오며 생각해 온 세상보는 눈(觀點) 이랄까, 믿음(信仰)이랄까, 그게 거창하다면 그저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안도를 느꼈다.

    그것은 또한 사람 살아온 세상, 지금 사는 세상,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란 결국 어제보다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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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내 믿음의 바탕은 바로 내 고향 신촌 그 거리 거리에서 만났던 내 고향 사람들일 터이다.

    그렇다. 고향은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는 곳이다. 생각날 때면 언제나 첫눈 같은 설램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곳.

    아루바 또는 신촌.

    • 첫눈 오는 날 가게 앞에서 담은 사진들

    옛 생각

    이민 보따리를 꾸리며 처분했던 물건 가운데 주소와 전화번호들을 빼곡히 기록해 놓은 공책과 명함첩들이 있다. 벌써 서른 해를 넘어선 저쪽 일이다. 그것은 내 유소년 그리고 청년과의 결별이었다. 이 땅에 건너와 살면서 인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회를 한 두어 번 기웃거린 적은 있다만 모두 이민 초기의 일일 뿐, 이제껏 무관하게 살았다.

    인터넷 세상이 열린 후 간간히 이름깨나 팔리게 된 옛 벗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Social Media가 판치는 스마트한 세상이 되자 늙지 않으려는, 아니 젊게 살려는 옛 동무들의 모습들과 느닷없이 마주치곤 한다. 이럴 때면 이따금 오래 전에 버린 주소록과 명함첩들이 생각나곤 한다. 비록 이미 다 변해 버렸을 주소와 전화번호일 터이지만.

    이달 초 마광수 형의 부음으로 하여 나는 오래 전 신촌 시절을 더듬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후배 페북에 올려진 옛 동무 딸아이 결혼식 사진은 나를 며칠 동안이나 1970년대 신촌 거리로 내몰았다.

    딸아이 혼례를 치른 옛 동무는 함께 마셔 댄 신촌 시장 주막집 막걸리 동이가 제법 되는 진짜 어깨 동무 개 동무였다. 그와 마지막 술 잔을 나누었던 곳은 그의 단칸 신혼방 이었는데 동네는 어디였는지 가물 가물하다.

    문득 그 시절 동무들이 그립다.

    마광수 형은 그 때도 그랬다. 음담패설을 이용한 우스개는 단연 뛰어났다. 나는 그의 학문이나 문학에 대해 논할 만한 지식이 전무하다. 다만 70년대 청년 마광수에 대한 인상은 아직도 또렷하다. 신촌 목로주점 아니면 북한산을 오르던 길이었을게다. 그는 말했었다.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그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백일장에 응모해 시 부분에서 장원을 했던 일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던 끝에 뱉은 말이었다.

    ‘그 시가 말이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남의 것들 베껴서 조합해 놓았단 말이야. 그게 장원이었다니까!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나는 당시 광수 형이 기성 체제에 대해 항거하거나 비틀어 조롱했다고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당시 이미 자유인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유인 청년 마광수로 삶을 접었다. 그리 살며 느껴야만 했던 외로움 역시 오롯이 그의 몫으로 품고 갔다.

    구글링을 통해 광수형의 길을 쫓다가 낯익은 이름들도 만났다. 대학에서 광수형과 척진 곳에 서있었다는 이들이다. 이미 다들 은퇴 이후이다.

    모두 1970년대 신촌거리에서 아주 멀리 왔다.

    먼저 떠난 이에게는 안식을, 아직 산 자들에게는 강녕을.

    이상동몽(異床同夢)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 수강 신청을 하며….

    해마다 이월은 내 생각을 좀 넓히는 때이다. 뭐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좀 한가하다는 말이다. 이맘 때면 춥고 눈도 많이 오곤 해서 내 가게가 좀 한가하다. 일요일 말고도 하루 이틀은 눈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쉬기도 하거니와 가게 영업시간을 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들어온다. 허나 시간은 좀 풍부해진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생각지 아니했거나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지는 나름 내가 좋아하는 이월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삼월 초이면 언제나 내 지갑은 가난하다. 삼월 초 내 생일을 해마다 늘 그렇게 맞는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르다. 눈도 전혀 오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 본 적이 없다. 가게는 내가 많은 짬낼 틈없이 바빳다.

    이 달초에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목사님께서 이메일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를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생각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생각과 돈 모두 풍족하게 삼월 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이달 초에 홍목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내용이다.

    참 오랜만 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벌써 해가 바뀐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한가닥 작은 희망에 대한 희망 조차도 사라져 가는 땅 입니다. – 중략 – 시드니에서 작은 ‘인문학 교실’을 열었습니다. 한 달에 두번 모입니다. 첫번 모임에 그래도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들 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 중략 –  옷은 새 것이 좋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좋네요.

    그랬다. 홍목사님과 헤어져 그는 호주로 나는 미국으로,  함께 했던 한국이라는 삶의 자리를 바꾸었던 시절에 그는 30대였고 나는 20대였다.

    이제 그이는 70대 중반의 은퇴목사이고, 나는 은퇴를 바라보는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래, 우린 서로 옛사람이었다. 다만  거기에 수식어 하나를 얹는다. <변하지 않은…>이라고.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가 첨부파일로 덧붙인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나는 홍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그 이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을 이 곳에 올린다. 더하여 내가 참 사랑하고 존경하는 필라 인근의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두번씩 이 강의록을 참조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쫓아가려 한다.

    자!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로  ‘들어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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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껏 살며 딱 두 교회에 적을 올렸다. 한국의 신촌 대현교회 – 그 곳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은 내 삶을 지배했다. 홍목사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내 아내 역시. 수 년전에 아내와 딸과 함께 그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이민와서 한 곳…. 나 역시 옛이 그립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

     교실문을 여는 글 1 – 왜 인문학인가? 

    일찌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계(契)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라 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세상을 걱정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선비들이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종의 풍류계(風流係)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시드니 인문학 계’를 통하여 인생의 시름과 아픔은 서로 위로하고 시대와 인간을 피차 보듬어 주면서 이 절망의 땅에서도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같이 먹고 자면서도 꿈과 생각은 서로 다른 동상이몽(同床異夢)가들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 합니다.

    지난 12월 이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과 기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듬어서 표현했습니다.

    (1) 동양과 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함께 공부해보자. – 클라스의 진행은 주로 준비된 강연, 토의, 책읽기와 나눔 등이 될 것이다.

    (2) 이를 통하여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 시키고 또 그 틀을 좀 더 넓혀 나가자. – 우리는 종교단체들 처럼 무엇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진솔하게 마주침으로’ 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해 나가려고 한다.

    (3) 이런 사유의 깊이는 인문학 교실에 참여하는 친구들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약간은 논리적으로 서술된 이런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을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좀 유연하게 풀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