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의 뜻

is점점 그 잔인함이 도를 더해갑니다. 수니파 원리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행태가 그렇습니다. 그동안 연이어온 참수(斬首)라는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살인행위를 거듭해 오더니만 이번엔 산채로 사람을 불태우고 그대로 매장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답니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요르단 조종사 마즈 알카사스베(Mouath al-Kasaesbeh)중위의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답니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물음이 적합한 것이라는 데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뉴스가 있습니다. 지난해 이래 툭하면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이 한국내에서 또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번엔 이명박장로의 좌장이라고 일컫는 이재오의 입에서 나온 소리랍니다.

개신교계 보수단체인 한국미래포럼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예배와 국가안보 특강, 자유평화통일 결의대회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었답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국가발전 방안으로 종북 척결과 게임, 폭력, 동성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이날 축사에 나선 이재오는 대한민국 수립과 6.25 전쟁 정전, 남북통일 등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발언들이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전쟁은 사람이 일으켰습니만 결국 이것을 종전시키고 휴전을 맺고 대한민국을 복원시킨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습니다. 통일에 대한 노력은 사람들이 합니다. 인간들이 통일에 대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만, 결국 통일을 어느날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금방 경제가 파탄될 거 같고 그래도 오늘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내외의 경제를 유지하고 나라가 유지돼 온 것은 결국 한국 기독교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참석자들 – 아멘~) 우리나라에 만약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주일마다 성도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또 교회를 이끌어 주시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나라가 온전했겠느냐.”

하나님의 뜻, 곧 신의 뜻은 과연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 곧 신은 어떤 하나님이고 어떤 신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은 과연 신은 있는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예수쟁이라는 확신으로 사는 사람이지만 이 물음은 여전히 제게도 유효합니다.

“자살 폭파범도, ‘9·11’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보스니아 대량 학살도, 명예 살인도,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 입고 TV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는 세상”은 바로 “종교없는 세상”이라고 선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입니다.

그는 그의 책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 또는 현혹)”을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고 다만 종교란 인류 진화에 따른 부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신이 없어도 인간은 행복하고 도덕적일 수 있으며, 종교는 이 세상에 불행을 가져올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언론인이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신의 존재 여부는 가설이고 논증의 대상일 뿐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는 ‘이야기’>라고 단정합니다.

그는 그의 책 <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신 없는 인간의 삶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대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편이 훨씬 낫다. 인류가 누려야 할 평화와 행복을 위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고 강변합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가 목청을 높였던 때는 9.11사건 이후인 2005년 전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오늘, IS의 무자비한 행태를 보면서, 그리고 엿가락처럼 제 맘대로 늘였다 줄였다 제 입 맛에 맞게 내세우는 신의 뜻에 대한 주장들을 들으면서 이른바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져본다면 IS의 잔혹함보다 수십, 수백배 더한 집단들과 국가들이 존재했던 역사가 있고, 신의 뜻을 내세운 사기꾼들은 언제나 넘쳐났던 것이 사람 살아온 모습입니다.

약 2800여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의 호머가 던진 “모든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All men need the gods.)”는 명제는 바로 숱한 무신론자들의 믿음을 넘어선 곳에 신에 대한 신앙이 존재한다는 선언일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평과 기쁨과 감사”를 실천하고 나누는 일이 바로 신을 증거하고 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일겝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

학생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개의 금요일에 관한 기록이다.>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 이하 작가기록단)이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12월까지 단원고 희생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열세명을 인터뷰하여 펴낸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대한 출판사 서평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라는 말이 절규로 들리기도 하고, 사명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딱히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뉴스를 훑은 것이 아니건만 생각은 자꾸 그리로 몰려갑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박종철 사건’ 은폐 검사… 당시 고문치사 수사 축소·은폐> – 오늘자(2/2) 온라인 경향신문 머릿기사 제목입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사건이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인 셈입니다. 그 사건의 한가운데서 진실을 은폐하여 자신의 직무를 유기했던 자가 세월이 흘러 대법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뉴스를 보며 도대체 우리들에게 30여년의 세월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자 오마이뉴스에는 <10월 10일 10시에 태어난 아이가 ‘종북’의 증거라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머리기사들 가운데 하나로 올라와 있습니다.

“‘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이 기사를 싣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편집자의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편, 피의자는 2005. 10. 10.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해 임신 중인 자식을 북한에서 출산할 목적으로 ‘아리랑 축전’ 관람을 빙자, 방북하여 북한 평양산원에서 자녀를 출산 후 소위 통일둥이 ‘윤겨레’라 이름 짓고, 같은 해 10. 25.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종북인사들로부터 ‘통일전사’란 칭송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으로 황선씨를 구속기소한 검찰측 기록입니다. 사실 제가 이 기사를 클릭했던 까닭은 10월 10일 10시라는 숫자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제 딸아이가 태어난 월 일 시(月日時)이기 때문입니다.

구속된 황선이라는 이는 10월 10일 10시에(시간은 오전인지 오후인지를 명확히 기록치 않아 모르지만 글의 흐름상 저녁시간인 듯) 한반도 북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했던 10여년 전 바로 그 시간쯤 바로 그곳 평양에서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엔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정부가 여행허가를 내주어 약 4천여명 가량이 그 가을에 북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황선씨는 그 중 한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제 아내는 그보다 십오여년 전 10월 10일 오전 10시쯤 이곳 미국 델라웨어에서 딸아이를 낳았답니다.

제 아내가 그 때나 지금이나 10월 10일은 제 딸아이의 생일일 뿐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줄은 모르듯이, 아마 황선씨도 10월 10일은 그녀의 딸 생일일 뿐일 것입니다.

저나 제 아내가 그해 10월 10일에 제 딸아이가 이곳 델라웨어에서 세상에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니듯이, 황선씨 역시 그 때 그 시간 평양에서 자신의 딸을 낳으려고 계획하고 그렇게 실행했다는 말 자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1987년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를 진실로 만들려는 검사가 2015년 대한민국의 대법관이 되려는 현실로 본다면, 아마 황선씨도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그 때 거기에서 출산할 수 있는 능력보유자가 될 수있다는 것이 그리 낯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검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사실을 명확히 정리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 유명한(?) <김대중컬럼>입니다. 제목이 <‘對北’에 올인하는 ‘박근혜 외교’>라는 글입니다.

그는 이글을 통해 미, 중 일 등 강대국들과의 적절한 외교가 우선인데 그를 도외시하고 박근혜정부가 통일에 매달려 대북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속내는 바로 <종북장사>를 하는 조선일보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랍니다.

바로 이 대목들입니다.

<대통령이 철도·도로·특구(特區) 개발 등 대북 사업을 계속 언급하고 남북 대화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면 내각과 장관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것이 최근 박 대통령의 외교 현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명제에 이끌려 자신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혀 보이려는 감상(感想)이 작용한 ‘통일’이라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가는 경험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광장(廣場)과 밀실(密室)

최인훈 광장오늘자(2월 1일) 연합뉴스는 다시 태어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는 ‘광장’ 출간 55주년을 맞아 소설이 처음 발표됐을 때의 삽화 6점을 다시 추가한 개정판을 1일 내놨다는 것입니다.

작가 최인훈에 따르면 1960년 잡지 ‘새벽’ 11월호에 <광장>을 발표한 이후 오늘날까지 모두 열차례 정도 고치고 수정해 왔다고 합니다.

6ㆍ25 전쟁포로인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북, 좌우를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을 택해 가던 수송선 위에서 바다로 자신의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합니다.

작가 최인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소설 광장이 발표되었던 때로 부터 55년이 흐른 2015년 현재 <광장>이 계속해 다시 쓰여졌다는 소식은 서글픔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상황이 전혀 변한 것이 아니라 더욱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1960년 소설 발표 당시 작가 최인훈이 썻던 서문(序文)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공산주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2015년 오늘은 저 빛나던 1960년 4월에 비하면 ‘광장(廣場)과 밀실(密室)’ 모두 한반도 남북에서는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등 무엇이라 부르던간에)의 소유가 아닌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최인훈이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대중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고 썻던 바로 그 ‘광장과 밀실’ 말입니다.

다만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했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바다에 투신하는 죽음을 택했지만, 2015년 오늘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하는 현실의 주인공들은 황선처럼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신은미처럼 강제추방을 당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도피보다는 살아 감옥에 가고 추방당하더라도 ‘광장과 밀실’을 누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야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반도 남북 그 어디서건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모두가 ‘광장과 밀실’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황선이 되고 신은미가 되어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노력할 일입니다.

당신 탓

내 나이 스물 다섯에 헤어져

서른 다섯해 만에 만난

열살 위 선생님께서

던지신 첫 말씀.

 

“어째 키도 안 크고…”

 

그 말씀을 함께 들은

내 아내와 아들과 딸이

모두

선생님께 자랑스러웠던 까닭은

 

“어째 키도 안 크게…”

 

내 나이 환갑, 진갑이 되도록

뵙지 못했던

서른 다섯 해 동안

정신으로만

 

그렇게

“키보다는 정신이라고”

가르쳐 준

 

바로

당신 탓이라고.

그래도 희망은…

“식물도 새도 곤충도 아이들도 모두 즐거웠다. 그렇지만 사람들- 나이먹은 어른들-만은 여전히 자기 자신과 서로서로를 속이고 괴롭히는 일들을 그만두지 않았다.

신성하고 중요한 것은 이 봄날의 아침도 아니며 만물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신(神)이 만들어 준 세상의 아름다움 곧 평화와 일치와 사랑으로 마음을 이끄는 아름다움도 아니고, 단지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들만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16년전인 1899년에 발표된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들만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부터 소설 ‘부활’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로부터 116년 후인 2015년 1월, 뉴스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들만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찹니다.

어제가 된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현재 시각 오전 11시 30분, 파리 19구에 위치한 전문 주간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건물에 두 괴한이 습격해 AK47 자동소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 시각 현재 12명이 죽고, 11명이 중상인 상태이며, 그 가운데 4명은 목숨을 잃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사건을 기록한 동영상들이 이미 많이 유포되어 있는데 찾아보니 “저게 과연 사람일까?”하는 의문이 들만큼 그냥 잔인한 영화속 장면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살인마들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Allah akbar”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게 “알라는 위대하다”는 뜻이랍니다.

죽은 12명 가운데 <샤를리 엡도>의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Stéphane Charbonner)라는 이도 있습니다. 그가 지난 2012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그 때도 이 주간지는 이슬람세력에게 살해 협박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가 한 말이랍니다.

“나는 보복이 두렵지 않다. 나는 아이도, 아내도 차도, 신용도 없다. 약간의 허세를 보태자면, 나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선 채로 죽겠다.”

그가 선 채로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랍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 역시 스스로 “알라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이었는지 역시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자 CNN 온라인판에는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전세계 만평가들이 그림 삽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이고 더 보시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링크를 걸어드립니다.

Charlie Hebdo

그리고 또다른 뉴스 하나.

대한민국 검찰이 재미동포 신은미씨를 강제출국 조치 해달라고 8일 오후 법무부에 요청했다고 합니다. 또 그녀와 함께 토크쇼를 했던 황선 희망정치포럼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검찰이 발표한 내용이 참 가관입니다.

“북한에서 치밀하게 사전 연출된 사실에 기초하거나 신씨의 지역적 또는 다년간의 경험에 기초한 걸 일방적으로 왜곡해 마치 그것이 북한 전체의 실상인양 오도함으로써 결국 북한 세습정권과 독재체제를 미화 내지 이롭게 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북한에 다섯 번 가서 ‘남한이 참 잘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행사를 따라가 좋은 곳만을 보며 쓰거나 말하는 여행 이야기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되고, 세계 어느나라에 가든 ‘대한민국은 참 잘 산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상은 아마 톨스토이도 짐작치 못한 일일 것 같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2015년, 이리 저리 검색창을 두드리다가 그래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던 사진 한 장이랍니다.

12-6600

“12명이 죽고 6천6백만 명이 다쳤다.”

프랑스의 희망이요, 사람사는 세상이 희망이 되는 사진이랍니다.

선진화를 외치는 대한민국에도 이런 희망이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temp_1419220667962.2078561173“천국에 다녀온 소년(Heaven Is for Real)”이라는 영화를 함께 모여 보았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인 아주 작은 공동체 식구들이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모임이었답니다.

오늘의 삶에 대한 고민과 내일의 걱정으로 살며 언젠가 만나게 될 구원의 때를 그리며 사는 모든 신앙인들, 또는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지니고 사는 이들에게 권해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특별히 오늘 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늘나라를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답니다.

Heaven_Is_for_Real_(Burpo_book)_cover빤하게 보이는 서로의 아픔과 모자람 아니 미움까지 모두 껴안을 수 있는 세상이 바로 천국이라는 새로운 세상이며, 저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생각에 따라 누릴 수가 있다는 이야기랍니다.

영화를 보고난 후 정말로 그렇게 모인 서로들을 마음으로 껴안으며 신나게 놀고 온 밤입니다.

비록 2014년을 마무리하는 생각으로 모여 함께했던 대여섯 시간의 짧은 잔치자리였지만 바로 천국이었답니다.

 

세월호, 차라리 남기지 않았다면…

지난 일요일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이 주최한 걷기대회에 다녀왔답니다. 그리고 그날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답니다. 오늘 그 영상들을 함께 참석했던 이들에게 보내자는 생각으로 조금 편집을 해 보았답니다.

그러노라고 세월호 생수장 사건과 관련한 동영상들을 두루 찾아 보았답니다.

그러다 든 생각입니다.

DSC01844첫째는 과연 “문명(文明)”이란 무엇일까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뭐 거창한 질문을 하자는 뜻이 아니고, 보통사람들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배안에서 동영상을 남겨 여러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된 것은 채 십년도 안된 일입니다. 엄청난 문명의 발전이지요. 그런데 그 문명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아픔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았답니다.

차라리 남기지 않았다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마음을 이토록 추스리지 못할 정도로 뒤짚어 놓지는 못하지 않았을까하는 물음이었답니다.

두번째로는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뻔뻔해 질 수 있을까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천개의 사실도 하나의 진리(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틀로써의 진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현실에 대한 물음이랍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러므로 더욱 해야할 일들이 많은 세상에 대한 감사입니다. 바로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저 제가 살고 있는 이 땅끝에서, 작은 몸짓 하나라도 아픈 이들, 더불어 함께 살려고 애쓰는 이들과 함께 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음에 대한 감사랍니다.

 

 

세월호 – 난 더욱 예수쟁이어야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이 일어난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일심 재판도 끝났습니다. 끝내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아홉 영혼(추정하는 숫자일지도 모를 일이지만)들의 가족들에게 깊은 한을 남기며, 시신 수색작업도 끝냈다고 합니다.

노란리본실로 어이없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거대한 여객선이 육지가 빤히 바라보이는 연안에서 기울어져 바닷속으로 잠겼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사고 이후 단 한사람도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아직 인생을 꽃피우기도 전인 아이들이었습니다.

육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사고가 일어났는지, 왜 그 많은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바다속에서 죽어가야 했는지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오늘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정말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 터트릴 수 밖에 없는 기사를 보았답니다. 달탐사를 위한 엄청난 예산을 쪽지예산으로 들이밀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도대체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라는 물음이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에서 – 그것을 국가라 부르든, 사회라 부르든, 교회라 부르든, 당파라고 부르든 간에 –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람이건만 어디에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오로지 “돈”입니다. “권력”은 돈을 그러 모으기 위한 일차적 수단이고요. 그렇다면 돈과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조차 없습니다. 물론 거기 모습으로만 사람이 있으되 이미 사람이 아닌 악귀들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부끄러움”을 상실한 악귀들만이 공동체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랍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 이래로 정말 조용한 공동체가 한 곳 있습니다. 바로 개신교회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제가 평생 개신교도인 까닭입니다. 이 나이에 개종(改宗)을 하거나 무종교자가 되는 일은 없겠기에 제겐 그저 아픔입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세월호 생수장 사건으로 인해 불거진 인사파동에서 드러났던 문창극이나 김성주 류의 사람들이 읊어댔던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사람을 철저히 배제한” 것입니다. 오직 “돈과 연계된 악귀들 만을 위한”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문창극이나 김성주 류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믿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와 한인교회에 여전히 차고 넘치는 주류라는 것입니다.

뭐 멀리 가서 찾을 이유가 없답니다. 그저 주변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신교도임을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고, 예수와 교회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믿기 때문입니다.

긴 역사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임을 믿는 까닭이 첫째요, 누구나 짧은 인생을 통해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신을 향해 응답하는 몸부림이야말로 참 신앙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은 죽은 이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현재 진행형으로 신앞에서 묻고 응답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제가 살며 사랑하는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이신 홍길복목사님께서 그의 글 <디아스포라 코리안의 역사와 삶>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기독교신학에서 고난은 제3의 성례전이라 일컬어진다. 고난은 예수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그의 구속사역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고난의 신학이다. 고난이 없이는 구원도, 부활도 없다. 고난은 인간존재의 가장 명확한 존재방식이다. 고난은 디아스포라의 존재방식이다. 고난은 모든 디아스포라의 삶과 이야기의 키 워드(key word) 이다.

고난을 넘어서는 길은 그냥 고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좌절을 극복하는 것은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난은 미화되서도 않되고 찬양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고난의 한 가운데는 고난의 주인이신 우주와 역사의 창조주가 계시다.

기쁨은 고난의 반대편에 있는것이 아니라 고난의 역사가 진행되는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승리 역시 실패가 끝난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진행되는 한 가운데 다른 얼굴로 현존하여 있다.

“고난이 지난 후에는 승리가 온다”라고 믿고 기대하는 것은, 자칫 고난 자체가 주는 위대성과 값어치를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고난은 훗날 기쁨으로 바뀌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써 이미 엄청나게 위대한 축복이요, 승리이다.

수학에는 답을 얻는 과정이 있듯이, 인생에도 정답으로 가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마찬가지이다.

고난이 정답이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을 먼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제가 개신교도이어야 하고, 예수쟁이이어야만 하는 까닭입니다.

필라,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

오늘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이 모여 함께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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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시내 한 복판에 있는 Fairmount 공원 Schuylkill 강변길을 한시간 가량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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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를 뒤에는 “A Memorial Walking For Victims Of The Sewol Ferry Disaster In South Korea”라는 문구를 새겨놓은 노란색 셔츠들을 입고 함께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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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사람들이 가을 길을 걷는다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지만, 이렇게라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연대하는 작은 끈이 있다면, 아파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서로가 안고 가야하는 기억을 더욱 굳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걸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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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마치고 작별을 하기 전 우리들 옆에서 한 친구가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한을 푸는 춤사위를 펼쳐 보였답니다. 

그리고 Schuylkill 강에 비친 오후의 햇살을 가르며 가는 오리 한마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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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에…

기도빨(기도의 능력)도 없는 제게 기도부탁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미안하고 송구한 주일 아침입니다. 절실한 사람들에겐 오늘 아침처럼 뜰에 가득한 가을이 아픔으로 다가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게 손님들 가운데 친구들처럼 가깝게 지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저 일상의 소소함들을 나누는 것이지요.

Kathy의 남편 Fred는 작지만 아주 다부진 몸매를 지닌 진짜 사나이였습니다. 사냥이 취미인 그에겐 여러 종류의 총들이 있고, 사격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얼굴이 영화 007의 주인공이였던 Sean Connery를 닮은 정말 멋진 사내랍니다. 그러던 그가 이즈음 암으로 투병중이랍니다. 지난 주에는 폐렴까지 겹쳐 Kathy를 덜컥하게 만들었답니다.

John은 이제 나이들어 그저 모든 것 넉넉히 바라보며 즐길 수 있을만했는데, 이즈음 눈가에 그렁하게 맺히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답니다. 10살짜리 손녀가 암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기 때문이지요. John의 기도 부탁에는 응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답니다.

제가 사는 동네 한인교회 목사님 한분에게는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답니다. 그 분의 맏아들입니다.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하며, 주를 대표하는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violinist였고, 대학생활에서는 한번도 우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장차 의사가 꿈이었던 대학 4학년이었답니다. 그런 자랑스런 아들이 지난 달에 교통사고로 목사님 곁을 떠났답니다.

그렇게 떠난 아들을 묻고 온 날 오후에 목사님 댁 하늘 위에는 쌍무지개가 떳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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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 사내를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7년 만기형기를 마치고 지난해 미국으로 강제추방 당한 오십대 초반의 사내입니다. 그의 논리적이고 세련된 화법을 담은 소주잔에는 아직도 여전히 요한 모리츠처럼 25시를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의 무수한 얼굴들이 담겨있었습니다.

가을이 가득한 뜰을 바라보며 주일 아침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아프고, 외롭고, 괴롭고, 흔들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갈 길 꿋꿋하게 걸어가는 이들을 생각하며.

살아있기 때문에

–       이정하

 

흔들리고 아프고 외로운 것은

살아 있음의 특권이었네.

살아 있기 때문에 흔들리고,

살아 있기 때문에 아프고,

살아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

오늘 내가 괴로워하는 이 시간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에겐

간절히 소망했던 내일.

 

지금 내가 비록 힘겹고 쓸쓸해도

살아 있음은 무한한 축복.

살아 있으므로 그대를 만날 수 있다는

소망 또한 가질 수 있네.

만약 지금 당신이 흔들리고 아프고 외롭다면,

아아 아직까지 내가 살아 있구나 느껴라.

그 느낌에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