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늘 무모했다. 역사앞에서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많은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꼴보수 매체에서부터 극좌빨 매체에 이르기까지, 매체 영향력의 크기를 떠나 심지어 저 같은 골방 샌님까지 입가진 자들이 던지는 소리들이 넘쳐납니다.

그 숱한 소리들을 가로지르는 큰줄기가 하나 있는 듯합니다. 바로 이념논쟁입니다. 친일, 종북논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명백한 허구입니다. 지금 왈 논쟁중인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볼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성과도 그렇거니와, 2015년을 살아가는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에게 ‘한국사’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싯점은 바로 1970년대였습니다. 이른바 유신시대였습니다. 지금 여왕놀이에 빠져있는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꼴보수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사관’이니 ‘민중사관’이니 하며 ‘종북사관’으로 연결지어 매도하는 역사학적 연구들이나 그 결과물들이 대중전파하게된 까닭은 바로 박정희 탓입니다.

왜냐하면 정통성이 매우 취약한 반민주적 정권이었던 탓이었습니다. 그 토양에서 ‘올바른 사관’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의 ‘역사 바로보기’가 시작되었던 것인데, 김영삼의 군불때기를 시발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그 문제적 ‘사관’이 일반화된 시각이 될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공포수준에 이른 세력들이 일대 반격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의 교과서 국정화 문제라는 것은 일개 샌님인 제 발상입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에 이르러 향수에 젖어 옛노래를 부르는 세력들이 기승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 유신의 시대를 돌아가신 리영희선생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리영희선생이 말한 세가지 부류의 지식인들 가운데 지난 40년 동안만 끊어서 본다면 아직도 제일부류들의 전성시대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허나 역사의 발전은 분명 제3부류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힘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답니다.

book리영희선생이 <우리의 상황과 실존적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누군가 말해야 한다.(삼민신서, 1984년)”의 서문중 일부입니다.

<1970년대의 이 나라는 이른바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의한 통치시대였다. 명분이야 무엇이었던간에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변칙적’형태였고, 따라서 그 시대는 이 나라 지식인에게 특수한 마음가짐(사상)과 행동(실천)을 요구했던 상황조건이었다.

돌이켜볼 때, 그 한 시기를 살은 지식인에게는 세 가지의 태도가 있었다.(일반 대중의 경우는 굳이 여기서 문제시하지 않는다.)

첫째는 상황에 순응 내지는 적극 호응하는 자세였다. 둘째는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태도였고,  셋째는 그 상황을 과제로 인식하여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상과 태도였다.>

1970년대의 끝무렵였던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이 그렇게 다가오리라고는 이들, 제일, 제이 부류의 사람들은 차마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1930, 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1945년 8월을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즈음 ‘역사논쟁’을 보면서, 이건 단지 1970년대 ‘공주놀음’하던 박근혜가 ‘여왕놀음’하는 2015년 버전이요, 그 주변에서 제 밥그릇 하나 챙기기에 혈안이 된 도적놈들의 날뜀, 그리고 눈먼 백성들의 완장놀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이런 놀음과 완장에 취한 이들 역시 도둑처럼 올 내일이 자기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취해있을 터이지요.

무모하게 역사 앞에서.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2015년 9월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지난 두어 달여 좀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인적인 삶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이어졌답니다.

엊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 허전함이란 어떤 간극(間隙)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어느 쪽에도 가까이 못하고 하루해를 보내고 난 뒤끝에 만난 느낌 같은 것었습니다.

일테면 지난 주간에 미국을 방문해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내 또는 한인들 사이에 뉴스가 되었던 인물들이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들입니다.

그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전함과 제 일상의 허전함 사이에는 별반 큰 거리나 간격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엊저녁 그런 생각의 끈을 잡게된 까닭은 화장실에 앉아 펴든 천상병 시인의 시 탓이었습니다. ‘새’라는 부제가 붙은 ‘그날은’이라는 시였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SAM_4693천상 시인이었던 천상병이 1967년에 있었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라는 관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 날들을 되살려 쓴 시입니다. 그가 떠난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그에게 ‘다리미(아이론)에 눌린 와이셔츠’같은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유엔에서 ‘새마을 운동’ 마케팅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허전함 – 그런 느낌들이 지난 두어달 간 저를 누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 모습에 연연해 뉴스들을 양산해 내는 이른바 언론과 종교에서 오는 허전함도 비슷한 것들이었고요.

지난달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이후 시진핑의 방미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외교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수꼴인Donald Trump 와  종북 좌빨인Bernie Sanders에 대한 갈채만큼이나 어지럽고 현란함에서 오는 허전함이랄 수도 있겠고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나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고민을 하거나 궁극으로는 허전함을 털고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모두의 꿈일 것이므로, 일테면 그것을 예수쟁이인 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삶의 허전함과 혼돈스러움을 느끼지 않거나 최소한 극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그리고 9월의 마지막 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생각을 꺼내 읽어 보는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국어판(2000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을 통해 세계 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식민지 총독의 통치 아래서 부자들과 대지주들은 토지 매입과 임대, 대부업을 통해 전례 없는 재물을 축적하는 마당에, 성전의 제사장들과 학자들은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 질병을 외면한 채, 그 원인이 개인적 죄에있다고 가르치며, 브로커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가 물었던 질문은 “유태인들의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한 질문이며,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 종교문화적 소외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실적합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2015년 오늘을 사는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브로커들이 판 치는 세상”에서 “그 브로커들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싸우다” 마침내 “브로커 없는 나라를 꿈꾸며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든 이”가 예수라는 증언을 입증하노라 애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의미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때, 예수가 ‘전적으로 하나님’(wholly God)이며 ‘전적으로 인간’(wholly man)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중보자 없이 임재하신 분(unmediated presence of the divine to the human)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절절히 간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산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저는 “아니”라는 말인 동시에, 제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다(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기에 따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날에….

털며……

2015년 추석 – 이야기 셋(秋夕三題)

1.

이민생활에서 한국명절은 그저 추억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대도시는 그래도 명절 기분을 좀 맛보는 곳들도 있겠습니다만, 딱히 작정하고 만나지 않으면 한인들과 맞부딛히고 살지 않는 시골에서는 ‘오늘이 추석?’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랍니다.

다행히 친,처가 노부모님들이 모두 가까이 사시는 덕에 한국 명절이면 인사는 드리고 산답니다. 더더군다나 오늘처럼 일요일이나 여기 휴일이 명절과 겹치는 날이면 당연히 가족들이 모여 밥상을 나누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이런 저런 일들로 그저 ‘오늘이 추석이라네요.’라는 인사로 그냥 지나간답니다.

못내 송구스런 생각에 최근 수년래 제 취미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요리에 나서보았답니다. 엊저녁에 손질해 둔 쇠갈비와 사골들로 갈비찜과 사골국을 만들어 보았답니다.

오후에 아버지 어머니와 장인 장모를 찾아 갈비찜과 사골국으로 우리 내외 재롱 잠시 떨다가 돌아왔지요.

제 아무리 백세 시대가 눈 앞이라 하여도 제가 이미 환갑을 지나고보니 부모님들을 뵙고 돌아오는 길,  ‘내년 추석도…’라는 기도는 제법 절실한 것이랍니다.

2.

지난 일년 사이에 만난 벗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알던 친구들도 있지만 지난 일년 사이에 새롭게 만난 벗들과 함께 새로움을 느낀답니다.

딱히 단체라고 이름 지을 수는 없지만 그저 우리끼리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 사람들’, 약칭으로는 ‘필라 세사모’라고 부르는 모임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랍니다.

일테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공명’하려고 애쓰는 이들의 모습 – 바로 제가 배우는 점들이랍니다.

지난 주간 전세계에 으뜸 뉴스들로 퍼진 것들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미 소식입니다. 교황의 방미 일정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가정 대회’였습니다.

교황의 필라 방문 일정에 맞추어 오래 전부터 이들이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답니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베풀던 교황의 행렬을 되새기며, 2015년 오늘도 ‘여전히 아플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소리를 대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백만에 가까운 인파들 속에서 ‘SEWOL’이라는 피켓을 든 채 열명도 안되는 ‘필라 세사모’ 회원들의 기도와 외침은 교황의 행렬 속에서 모기소리보다도 작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몸짓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쯤, 제 믿음이랍니다.

제게 배움을 주는 이들의 몸짓이 비록 교황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제가 믿는 신 곧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미 들었다는 믿음이랍니다.

이 믿음이 가족을 잃고 두번 째 맞는 추석을 보내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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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일입니다. 예수쟁이이므로 성서를 펼쳐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을 웅변해 주는 성경책은 단연 창세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고백했던 신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6장과 21장에는 비주류였던 하갈의 소리를 듣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든간에(유태, 이슬람, 카톨릭, 개신교)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외치는 모든 아픈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시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추석 – 우리들이 조상을 찾는 까닭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기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 무릇 역사란  ‘그 들음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는 일일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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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 1181- 1226. 10. 3.)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명으로 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중입니다.

그의 방미 일정이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로 이어지는 까닭에 제가 사는 곳 델라웨어에도 교황에 대한 뉴스가 연일 이어지고 있답니다.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정말 인간적인 성인이었듯, 그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가 내딛는 곳, 어디서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이가 제가 사는 곳에서 인근에 있는 필라델피아에 오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주 적은 수의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한인들이 그이의 필라 방문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된 관심인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함께 기억한다는 외침으로 그 이를 맞이하자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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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었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인 세월호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의 신음이 2015년 9월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쳐보자는 것이랍니다. 이들의 외침에는 다른 아무 까닭이 없답니다. 

단지 약 천년전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썻다는 기도문을 이루고자하는 바램뿐이랍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족

Francis교황이 오늘 워싱톤 앤두류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밟는 미국 땅에도 그가 꾸어온 평생의 꿈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상 뉴스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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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맞이하는 공항 모습에서 “왜 교황이 미국 땅을 밟았는가?”하는 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전적 응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두 딸들,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가족들이 교황을 맞는 모습은 교황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에 참석하는 뜻을 극대화 시킨performance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듯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해 여름, 한국에서 보였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던 교황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잇달은 생각입니다.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와 교황(Pope)이라는 말들에 들어있는 몇 개의 명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계, 대회, 가족, 교황들 가운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천상병님의 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감상

  • 천상병

청명한 연휴의 오후

가난한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딸의 손목을 잡고

싱싱한 가로수 맡을 거닌다.

 

사람들은 모두 교외로 나가고

거리는 몹시도 한산한데

가끔 야외복차림의 가족을 태운

차가 질주한다.

 

갑자기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너 아이스크림 사주련?”

“괜찮아,아버지”

조그마한 딸의 손이

아버지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린다.

아, 행복이 있다면

행복을 손에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이 뭉클한 작은 손과 같을 것이다.

영화 “다이빙 벨”을 권하며

기독교 신학에 있어 미국의 위치는 그리 내세울 정도가 못됩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명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가운데 몇몇 명함을 내놓을만한 분들 가운데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 1892. 6. 21.- 1971. 6. 1.)가 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서 “교만(pride)”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답니다.

<사람의 교만(pride)에는 네가지 측면이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 둘째는 지적인 교만, 셋째는 도덕적 교만, 넷째는 종교적 교만>이라고 한 것이랍니다.

이즈음 제가 느끼는 사회적 현상은 바로 이런 교만들이 극에 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특히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드러내는 교만 가운데 하나이지요. 자신이 알고 있는 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하여 남의 의견이나 남의 생각은 듣지 않으려하는 태도야말로 니버가 말한 교만의 집합체가 아닐까 한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 교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가지 사건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일테면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을 보도하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 오마이 때로는 일베와 고발뉴스 등을두루 살핀 뒤에 제 생각을 가름한답니다.

이 땅의 뉴스도 마찬가지랍니다. Fox 와 Washington Post와 함께 NewYork Times와 CNN과 동네 뉴스를 보고 나서야  생각을 가름하곤 하는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아직도?”라고 묻는 분들을 위하여, 니버목사가 적시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영상 하나 소개 드립니다.

보시기 전과 후의 생각에 차이가 없어도, 아니 본래 생각하셨던 “그래서 왜 아직도인데?” 하셔도, 저는 절대 그게 교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니버목사가 말한 교만의 가장 큰 문제이자 죄란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자신에게 갇힌 상태를 말한답니다. 그래 한번 보시라는 뜻으로 권해 드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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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다룬 <다이빙 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 보시고 난 후, “좌파들이 꾸며 만든 이야기”라고 하셔도 저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할 것이랍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어제 필라델피에 있는 작은 교회당 Ambler Mennonite Church에서는 서른여명의 한인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약 세시간여에 걸쳐 도란도란 서로의 가슴에 쌓였던 말들을 풀어 내었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필라 인근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뉴욕, 뉴저지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답니다. 그렇게 둘러앉아 이어진 이야기들은 정해진 시간만 아니었다면 밤조차 새울만한 분위기였답니다.

그 가운데 한분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번 주초에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TV 생방송중에 일어난 총기사건은 이 땅에 사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방송국이 커버하는 지역의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그 사건의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모든 미국인들이 그 사건 현장의 영상을 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것도 여러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500일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 충격적인 모습의 잔상은 제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엊저녁에 필라세사모가 주최한 모임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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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8월의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멀리 500일을 돌아볼 것도 없이 8월 한달 동안의 뉴스 타임라인들을 되돌려 훑어봅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현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하루 한시도 건너 뛰지 않고 어김없이 이어진 한달이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인격과 존엄을 “나” 또는 “우리”라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짓밟고 망가트리고, 온갖 수모를 가하는 현장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내는 2015년 8월 한달 내내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세상을 꿈꾸며 애를 끓이고 도전하며 기도하는 무엇보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 일을 위해 실천하며 살고자하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은 넘쳐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런 평범한 모든 이들에게 온몸으로 드리는 박수와 함께 드리는 글입니다.


 

8-30

팔월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하루 남은 팔월의 달력을 보면서 이름이 팔월(August)인 소년 이야기를 드립니다.

이미 읽어서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R.J. Palacio가 쓴  동화소설  Wonder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이미 뉴욕 타임즈 선정 베스트셀러였고 2015년 마크 트웨인 상을 비롯한 여러 수상도 한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답니다.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10살짜리 August는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 이름은August고요, 제 생김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답니다. 제 생김새에 대해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시든 그보다 추한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선천적 안면기형으로 태어난  August는 열살이 되기까지 스물 일곱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누구나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면 악몽을 꿀만큼 기이한 얼굴을 지닌 소년이랍니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10살짜리 아이랍니다.

이 소설은  열살짜리 August가 보통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처음으로 들어가서 일년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지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August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학교아이들의 끈질긴 괴롭힘들을 불굴의 의지와 가족의 사랑, 친절을 베푸는 친구의 우정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랍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르러 August는 이런 독백을 한답니다. “누구나 다 기립박수를 받을만 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세상을 헤쳐나가며 극복하기 때문에…”

팔월을 보내면서 이 달에도 여전히 듣고 볼 수밖에 없었던 슬프고, 아프고, 안타까운 세상소식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아름답고 희망찬 9월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보내는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It is the morning of the last Sunday in August. Looking at the calendar of August which has just one more day,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a story about a boy named August.

As many of you may know well, it is the name of the main character in the children’s novel, “Wonder,” written by R. J. Palacio. It was a number one book on the New York Times Best Seller List and it won several awards, including the 2015 Mark Twain Award. It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with a title, “아름다운 아이 (A Beautiful Child)” in Korea. It was loved by many people in Korea, too.

August, the main character and ten-year-old boy, introduces himself like this:

“My name is August. I won’t describe what I look like. Whatever you’re thinking, it’s probably worse.”

August was born with a rare medical facial deformity. Even after twenty-seven surgical operations, his face still looks strange enough to make those who see his face have a nightmare. However, except for his appearance, he is normal like any other ten-year-old kid in every respect.

This novel describes what August, who had been homeschooled until then, experienced during the first year at a prep school.

It is a story about how August overcomes the prejudice and distress due only to his facial deformity with his own unyielding will, love and support from his family, and warm friendship.

Almost at the end, August said to himself, “Everyone deserves a standing ovation because we all overcometh the world.”

I wish that all of us will give a standing ovation to ourselves as we enter September with a cheerful and bright mind, even though we could not avoid many sad, agonizing and deplorable incidents and news around us and in the world in August.

from Young Kim

아니, 아직도?

‘세살버릇 여든간다.’, ‘천성은 못고친다.’는 말들은 사람의 성품이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표현한 예들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지녔던 못된 습관들과 성품들이 몸에 베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허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 나이들면서 변하고 바뀐 것들도 있다. 일테면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보다는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는 일’을 우선하는 버릇들은 나이들어 바뀐 아주 좋은 예이다.

젊어서는 사물이나 사건 또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에 두었다면(물론 그 판단대로 살지도 못했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그 판단기준을 ‘같고, 다름’에 두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의 긴장감에서 오는 맛을 느낄 수 있지만, 자칫 삶의 여유를 놓칠 수도 있다. 반면에 ‘같다, 다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이 품을 수있는 여유를 한껏 넓힐 수는 있지만, 자칫 삶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나이들어 ‘세상사 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사니 참 편하더라’는 말이다. 이런 늘늘한 내 삶의 여유를 깨트린 것은 바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내 성품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포스터를 보는 순간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필라 인근에 사는 한인들중 이 포스터를 보는 순간 “아니, 아직도 세월호?”하시는 이들이 태반을 넘어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싶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책임질 사람들 다 책임졌고… 보상금 다 주었고… 그만큼 국가가 애썻고… 더더군다나 놀러가다가 일어났던 사건인데… 그만큼 했으면…”이라는 말끝에 “이래저래 사는 일도 바쁜데… 아니, 아직도 세월호?” 라는 모습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헤드뉴스를 장식하는 기사들이 하루도 아닌 시간에 따라 바뀌는 세상에서 500일이나 지난 사건,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어둡고 아픈 사건을 구태여 자꾸 꺼집어내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므로 그 당연함에는 설득력도 더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만일, 만일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하나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국가가 배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고, 국가는 사고원인과 책임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사고의 원인은 물론 책임자를 가리는 일을 방해했고, 향후 유사한 사건사고를 대비하자는 목소리마저 외면했다면…”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고 반문해서는 안되는 바로 오늘의 문제가 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름 삶을 늘 성서에 묻고사는 예수쟁이라고 내세우며 살고 있는 처지이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던져지는 질문으로하여,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에 한번 기웃거려 보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의 삶은 원상회복되어야 마땅한 일임에도 그들의 신음소리가 외면받고, 그들의 삶이 소외받는 처지로 내몰리는 지경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거나 같을 수도 있거니와 처지와 환경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소외되었다고 아픔을 호소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일은 옳고 그름이나 같고 다름을 떠나 사람이기에 당연히 흉내라도 내보아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나아가 소외되는 현장에 사람이 있는 한 “아니, 아직도?”라는 물음 보다는 “아니 어떻게?”라는 물음이 우선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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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들에게는 천국이 없다?

제가 사는 곳에서 남쪽으로 약 90마일 떨어진 곳에  Rehoboth Beach라는 델라웨어주에서는 유명한 해변 도시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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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All Saints Episcopal Church라는 성공회 교회당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 뉴스화 되었답니다.

사건인즉은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세워둔 차량들에 혐오 광고물들이 꽂혀 있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예배 참석자들의 차량에 꽂아놓은 세쪽 짜리 광고물은 이런 제목으로 시작되었답니다. “동성애자들을 위한 천국은 없다.( No heaven for homos)”라고 말입니다.

이 사건 수사에 나선 경찰의 공식적인 입장은 혐오범죄는 아니고 불법 부착 광고물 유포 혐의로 벌금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당 교회 입장은 이것과 판이합니다.

이 교회 교구목사인 Max J. Wolf목사는 “비록 경찰이 그렇게 이야기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는 우리 교인들을 향한 명백한 혐오 범죄이고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된 까닭은 이 성공회당은 레스비안,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모두에게 신은 평등하다며 교회문을 활짝열었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 레스비안,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라고 하면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따금 제 가게 손님들 가운데 노골적으로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분들도 있고, 그렇게 보이는 분들도 더러 있답니다.

그네들을 바라보는 제 시각은 “참 다르다.”, “왜 저렇게 되었을까?”하는 것일 뿐 그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더우기나 성서적인 신이 그들을 차별한다는 발상은 제도화된 교회의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제가 아직은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 교회를 존중하는 예수쟁이로 남아있는 까닭은 All Saints Episcopal Church같은 교회가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 그 씁쓸함

세월호의 아픔을 잊지 않고, 여전히 아파하는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오늘 여기에서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빌어 보자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꾸준히 의견을 나누는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뜻맞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그 모임의 이름을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약칭, 필라 세사모)이라고 부른답니다.

그 중 몇 사람들이 매주 한차례 온라인에서 만나 “인권”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기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인권문제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까닭을 찾아보고자 시작한 토론모임입니다.

매주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한 발제가 있은 후 자유토론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한시간 남짓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젠 2시간 30분 동안 이어지는 모임으로 뜨거워졌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인권이란 무엇인가?’, ‘왜 인권을 말하는가?’, ‘유럽 인권사’, ‘동양 인권사’, ‘미국 인권사’ 등을 두루 훑어 보았고 이제 ‘한국 인권사’로 넘어가고 있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제자들이 열성적으로 준비하고 있어서 새로 배우고 느끼는 것들이 참 많답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인권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상당 시간을 미국내 인권보호 증진에 크게 기여한 미 연방대법원의 중요한 인권판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그리고 이민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재미 한인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이야기들도 제법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미연방대법원이 때론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의도와 어긋나는 판결도 하고 (아이젠하위 대통령과 워렌 대법원장), 국민감정에 반대되는 판결도 소신 있게 내놓기(아히만 판결-성조기보호법 위헌 판결) 도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소수자 보호라는 큰 논리가 있었고, 그 논리를 지탱해 주는 기반에는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답니다.

최근에 있었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은 바로 이런  소수자 보호라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린 미 연방대법원 법관 가운데 한 사람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82)대법관이  이 주 초에 한국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녀의 방한 일정 중에는 한국내 1호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영화감독)·김승환(영화사 대표) 부부와 트렌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씨 그리고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 국내 대표적인 성 소수자들과 만찬 간담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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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성소수자들과 미국 연방대법관의 만남 방한중인 미국 연방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운데)가 4일 저녁 서울 용산미군기지에서 성소수자인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와 하리수,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을 만나 만찬을 했다. 만찬을 마친 김조광수 감독과 임태훈 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진과 만찬 내용을 공개했다. – 출처 오마이뉴스

이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82)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발끈한 곳은 한국 기독교계였다고 합니다.

<38개 교단 협의체인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양병희 목사)은 지난  5일 <미국 긴즈버그 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우려한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그가 한국에 와서까지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며 소송 중인 김조광수-김승환씨를 만나고 트랜스젠더를 초청해 격려하는 등의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법질서와 윤리가치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므로 삼가야 한다”고 비판했다.>고 오마이뉴스는 전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유만석 목사) 역시 이날 <미국은 한국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를 강요하는가?>라는 논평을 통해, ‘긴즈버그 미 대법관은 동성애 전도사인가?’라며 “노골적인 성소수자 지지활동과 법조인들에 대한 소수자 보호 인권운동 강연은 법관들의 성윤리 의식마저 왜곡시키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언론회는 “미국이 우리의 우방국가요, 혈맹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와 문화가 있고, 공유할 수 없는 문화와 가치도 있다”며, “긴즈버그 대법관에게 충고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이유로도 동성애 조장 확산과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강연을 중지해주기 바란다. 미국의 타락한 가치를 대한민국에 강요하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고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들의 주장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한국의 성소수자를 만난 것은 “한국의 법질서와 윤리가치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요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를 강요”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딱히 그들의 언사가 조목조목 따질 가치는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오늘날 한(인)국사회의 ‘ 법질서와 윤리’는 무엇인지?”,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가 만연한 곳은 과연 어디인지?”를 따져 묻는 일과, 한국교회가 과연 그러한 질문을 던질만한 수준에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법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고, 그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있었다”는 성서적 가르침과는 너무나 먼 곳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구약성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저 유명한 예수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 2: 27)”라는 선언은 바로 사람살이의 삶을 보호하는 가치가 최우선이라는외침입니다.

이때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삶이란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수자의 몫이라고 성서는 단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자명한 성서의 선언에 얼마나 부합된 모습으로 신앞에 서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발끈했다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응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비성서적 모습을 또 다시 확인한 듯하여  씁쓸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