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성실하고 깨끗하기를…

며칠 전 모처럼 만난 지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한국에서 새로 임명된 장관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새로 임명된 그 장관과 지인은 동향이었으며, 장관이 한때 미국에서 지낼 때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지인이 내게 했던 말이다.

“나는 그 친구를 아주 성실하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공직자으로써 자기 일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기도 했고요. 내가 뭐 한국 떠나온지 40여년인데 그쪽 뉴스 어디 그렇게 잘 보나요? 낯익은 이름이 뉴스에 나오길래 좀 눈여겨 보았지요. 처음엔 참 잘됬다 싶었어요. 그만한 사람이면 장관 한번 할만하지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허 근데…. 그거 아니더구먼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었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니면 사람이 많이 바뀐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였고요. 아무튼 그 친구에 대한 뉴스들을 주욱 보면서 한국사회 이른바 엘리트계층이 참 많이 상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사는 동네 한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 특히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화제가 그쪽으로 달려가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경험상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이나 호남 출신들이 주를 이루는 모임에서 한국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그날 하루 기분을 잡치는 일이 되고 만다. 출신지역 뿐만 아니라, 언제쯤 이민을 왔는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들어보나마나 그들이 하려는 말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여 가깝게 지낼수록 한국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 좋고 착하며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다.

여기 살다보면 한국에서 연수나 연구차 또는 파견근무 등등으로 일이년 정도 단기 거주를 하거나 수년 동안 장기거주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 가운데 회사원들도 있지만 주로 공무원들이나 교수들이 많다.

내 기억 속에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많은 얼굴들이 있다. 생각해 떠올릴수록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착하고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종종 한국 뉴스에 오르내리던 인물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며칠전 지인이 이야기했던 신임장관과 같은 인물의 모습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던 것이었다. 그 때마다 나 역시 지인처럼 혀를 차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인이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대변한다고는 결코 생각치 않는다. 그들보다 많은 이들이, 아니 그들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며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공직이나 교직에서 땀흘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차여행 – 12

Reno의 밤

해가 떨어지자 도시 Reno는 불야성이 되었다.

네바다주가 본래부터 도박을 허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861년 네바다주 초대의회는 모든 도박을 금지하고, 도박을 할 경우 벌금형과 징역형 모두를 선고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단다. 이후  1869년에 면허제도를 도입하면서  도박행위를 합법화하는 대신에 고액의 면허료를 납부토록 하거나 청소년 입장을 제한하는 등의 규정을 두었다고 한다.

1877년에는 채무가 있는 사람, 아내나 미성년자를 동반한 성인남자를 경범죄로 벌하는 규정도 두었고,  1909년에는 다시 도박을 금지하면서 중벌로 다스렸으나 1931년에 완전히 합법화하면서 도박으로 유명한 주가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박으로 유명한 네바다주에서 복권은 금지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재미를 더하는데,  약자인 시민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행위인 복권판매가 정부를 부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도박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도박은 신성한 인간을 좀 먹고 인류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정치인들은 도박사업이야말로 네 가지 E 정책 곧  education(교육), environment(환경), elderly(노인복지),  economic development(경제발전) 정책을 제대로 이루는데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아주 적합하다고 주장하곤한다. 심지어 도박사업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애국적인 행위라고 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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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떨어진 후 우리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스시바가 그럴듯하여 자리를 차지하였다. 셰프는 자못 거만하였다. 일식요리엔 자신한다는 얼굴이었다. 어찌하리! 하나아빠가 천하의 미식가인 것을. 사케 한잔에 이미 만사 오케이가 된 나와 달리, 하나아빠는 연신 뭔가 부족하다는 웃음을 날렸던 것이다. 셰프는 내심 그런 하나아빠가 걸렸던 듯하다. 마침내 그를 폭발시킨 것은 하나아빠가 던진 이 말 한마디였다. “당신이 제일 자신있게 잘하는 것을 맛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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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 나이의 셰프는 우리들의 입과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하나아빠를 만족시키기에는 수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하나아빠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들 앞으로 건넨 계산서에는 우리들이 예상했던 밥값의 반 정도가 청구되어 있었고, 사람좋은 웃음을 끊이지 않던 하나아빠는 호기롭운 팁을 셰프에게 건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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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증명사진 몇 장을 찍고, 피할 수 없는 도박장의 유혹을 그냥 피하고 지나가기에 미안한 마음에 하나아빠는 호기롭게 주사위게임을, 하나엄마와 아내는 슬럿 머신에 잠시 ‘여기 왔었다’는 표식을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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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우리는 요세미티를 향하기 전에 든든한 아침으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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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그리고 좌파

노동절 휴일도 저물었다.

어제 농사짓는 벗이 땡볕에서 땀 흘려 키운 열무 몇 단을 보내왔다. 그의 노동을 생각하며 열무김치를 담갔다. 실히 병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농사짓는 친구 덕에 이젠 김치도 곧잘 담게 되었다.

얼마전에 만두 먹으러 중국인촌에 갔다가 사서, 다듬어 얼려놓은 오리고기를 꺼내어 주물럭구이를 만들었다. 기름기가 노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고기만 저며 했더니 양이 참 적었다.

이즈음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드신 아버지는 “이게 다 6,25 때 박힌 수류탄 파편 탓”이라며 혀를 차신다. 내일 MRI 찍기 위해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암기운이 다 가신  듯  가신 듯 하면서도, 잊힐만 하면 문제가 있다는 의사 소견에 움찔하시는 장모도 내일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양쪽 노인들 몫으로 조금씩 떼어 놓고보니 우리 부부 양념에 비벼 한끼 식사로 딱 적합하였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저녁나절 묵자(墨子)를 읽는다. 묵자를 읽는다기 보다는 문익환과 신영복을 읽는다가 맞겠다. 그 분들이 읽은 묵자를 내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나 예수나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눈으로 비추어 보면, 아니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극단에 서 있는 좌파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묵자의 가르침은 예수에 닿아 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선언은 이미 혁명일 것이다. 입으로 말고 몸으로 서로가 실천하는 세상은 혁명 이후에나 가능할 것 아닐까? 극좌에 있는.

휴일 뉴스들은 나를 좌파로 몬다. 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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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1

Tahoe – 그 푸르름

기차에서 맞는 마지막 식사시간에 아내는 서빙하는 승무원 한사람에게 “이 사진, 당신이지요?”  라고 물었었다. 아내는 어느 한글 블로그에서 California Zepher 기차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단다. 거기에는 식당칸에서 일하는 승무원 사진이 있었는데, 아내는 스마트폰으로 그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속 인물이 당신 아니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 젊은 친구가 그렇게 좋아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자기가 유명인사가 되었노라며 박장대소하던 젊은이는 동료 승무원들에게 자랑을 했고, 승무원들이 다투어 그 사진을 보자고 우리 테이블을 오갔다. 그 중 젊은 친구가 자기도 한장 찍어 널리 알려 달라며 우스개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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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열차 종착지가 아닌 네바다 Reno에서 내렸다. 타호(Tahoe) 호수와 요세미티((Yosemite) 공원을 보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골드러쉬의 주무대였던 네바다주는 라스베가스와 리노로 대표되는 도박으로 유명한 곳이다.

20세기 초까지 금광을 따라 이루워졌던 도시들 대부분이 유령도시가 되었고,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라스베가스와 리노 그리고 곳곳에 들어선 카지노에서 황금빛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으로 바뀌었지만, 네바다주는 사우스 아프리카와 호주에 이어서 여전히 세계에서 세번 째로 큰 금 생산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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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o는 해발 4,505 ft (1,373 m)에 위치한 도박장으로 유명하고, 인근해 있는 타호 호수와 요세미티 공원 진입도시로써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예약한 호텔은 기차역에서 두 블록 거리 아주 가까이 있었다. 아내들은 방에 짐을 풀고, 하나아빠와 나는 예약해 놓은 렌트카를 픽업하러 나섰다.

wedding거리로 나선 우리에게 다가온 낯선 풍경들 가운데 하나는 속전속결로 끝내주고 주 7일 자정까지, 더하여 차를 탄채로 속성으로 치루어준다는 결혼식장이었다. 결혼과 이혼 수속이 자유롭다는 네바다의 풍경이었다.

길을 건너려 사거리 신호등에 서서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오토바이를 탄 젊은 백인청년 하나가  우리들을 향해 팔을 내밀어 손가락질을 하며 달려왔다. 가죽조끼 하나 걸친 그의 양 팔뚝은 문신으로 가득 채운 도화지였다. 그는 우리 앞을 지나며 손가락으로 총잡은 흉내를 내며, 입으로는 총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것이었다. 장난질로 치부하긴엔 씁쓸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빌린 차를 타고 타호 호수로 향했다. 운전대만 잡으면 날아다니는 하나아빠 덕에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곳들을 보고 다닐 수 있었다. 더하여 말수 적은 하나아빠와 서로가 지내왔던 어리고 젊은 시절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시간들은 이번 여행이 내게 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차는 지그재그로 언덕길을 올라가며 산꼭대기에 드리워진 하얀 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오르다 눈앞에 놓인 팻말을 보고서야 그 하얀 천이 눈이었음을 믿게되었다. 팻말에는 고도 해발 10,000ft(약 3,000m)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가 넘고 있었던 산이름은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장미 산(Mount Rose)’이었는데 최고 높이가 10,785 ft (3,287 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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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내리막길을 한참 달려간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타호 호수. 그 푸르름에 내게서 나온 소리, 그저 탄성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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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와 네바다 경계선상 해발 6,225 ft (1,897 m)에 있는 타호호수의 물속 깊이는 자그마치 1,645 ft (501 m)라고 한다.(백두산 천지의 깊이 384m) 그런데 마치 그 속이 다 드려다 보일듯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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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버거 맛이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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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중이던 하나가 제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단다. “타호에 가면 맑은 물에서 수영 한번 하라”고. 우리는 호수에 몸을 담구는 대신 호수를 가로질러 오가는 보트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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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0

유타 – 신앙의 힘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기차는 몰몬교인들의 땅 유타로 들어섰다. 나는 몰몬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 없지만 잘 아는 몰몬교인은 있다. 매우 근검화순 (勤儉和順)하고 독실한 사람이다. 이민온지 거의 40여년이 된 그는 아직도 첫번 째 기도제목을 “모국통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사람 사랑”이 바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때 나는 퀘이커 모임에 들락거렸던 적이 있었다. 집에서 오분 거리도 안되는 곳에 그들의 모임장소가 있다. 그들의 예배의식은 나를 매료시켰었다. 친교방식도 부담이 없어 좋았다. 그들과 함께한 주일아침 명상기도를 통해, 한동안 나는 1시간을 5분 정도의 시간으로 느낄만큼 명상을 즐기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결국 핑계이지만, 아내와 아이들 생각때문에 퀘이커교도가 되지는 아니하였다.

아무튼 몰몬이나 퀘이커나 장로교나 감리교나 침례교나 다 한묶음이요, 불교도나 유교도나 이슬람교도나 천주교인이나 개신교인이나 무종교인이나 다원주의 신봉자나 모두 함께 살 수 있다는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나라가 미국이라는 모범을 보여준 땅이 유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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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교도들이 유타주에 정착한 과정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겪었던 40년 광야 이야기나 2만 5천리 길을 걸어서 피신했던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이다.

Mormon Trail (entire route)

<지도자 브링햄 영(Bringham Young)은 박해받는 신도들을 사막지대로 인도했다. 당시 1만 5천명의 몰몬교도가 3천대의 포장마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온갖 고난 끝에 브링햄 영은 눈 쌓인 봉우리로 이뤄진 산맥에 둘려싸여 햇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호수, 즉 소금호수를 발견했다. 그곳이야말로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할 땅이라고 믿은 그는 그 사해로 들어오는 강을 요르단 강이라고 명명하고 Salt Lake시를 건설했다. –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에서>

이 몰몬교도들은  고난의 장정과 정착과정을 통해 인디언들과 미리 정착해 있던 이민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어두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흑역사는 비단 몰몬교도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디언(원주민이라는 말이 맞겠지만)들과 멕시코인들의 땅을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점령해 나갔던 대륙의 개척자들 모두에게 드려진 흑역사일 뿐이다.

몰몬교도의 유타주 정착은 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어떤 신앙이든 신앙공동체는 때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 공동체 안 구성원들이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어떤 절박함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터지는 힘으로.

어두움 속을 달려 유타주를 건너며 저절로 입밖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미국, 정말 크다!” 약 200만명이 산다는 유타주의 넓이는 거의 한반도 크기와 맘먹는단다.

새벽녘에 눈을 떠 차창밖을 보니 무수한 별들이 떠있었다. 기차는 네바다 사막을 달리고 있었고 열차안에서 시간은 두번째로 바뀌어졌다. Central Time Zone에서 Mountain Time Zone으로, 그리고 다시 Pacific Time Zon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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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미한 어둠속에서 첫번 째 만난 네바다주 아주 작은 마을에서 본 첫번 째 간판은 Casino였다. 먼동이 트자 이어지는 것은 광야였다. 네바다는 사막이라기 보다는 척박한 광야였다.

상식(Common Sense)이 혁명으로

한 두어 주 전에 Jury duty(배심 의무) 로 법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날 배심원으로 소집된 사람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 다섯 가지를 명심하십시요. 첫째 공정해야 합니다. 둘째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셋째 배심 사건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언론과 접촉 해서는 안됩니다. 다섯째 상식적으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날 교육자는 마지막 항목인 상식적으로 판단하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법정은 배심원 여러분들에게 전문적인 법률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요구되는 판단 기준은 바로 상식입니다.”

상식이란 것이 어느 곳, 어느 때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상식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 판단이란 비단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살아가는 모든 일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식이란 자기 자신 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함께 생각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걸어다니는 혁명가”로도 불리우는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은 그의 별명과는 다르게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만일 그의 저서 “상식”이 없었다면 역사상 미국독립은 없었거나 늦어졌거나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임으로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말했던 상식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바로 민주공화국이 옳다는 것이다. 그 시대 그가 말한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백인 남성으로 국한된 지극히 편협한 상식일지라도 그것은 혁명이었다. 민(民)이 주인되는 세상이 상식이라고 선언한 까닭이다.

그가 “상식”에서 말하는 말하는 사회(society)와 정부(government)를 곱씹다보면 민이 해야할 일들이 저절로 들어난다. 하여 상식이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회를 만든 것은 우리의 필요이고, 정부를 만든 것은 우리의 악함이다. 사회는 우리의 관심을 통합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정부는 우리의 악함을 억제함으로써 소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킨다. 전자는 소통을 촉진하고, 후자는 구분을 만들어낸다. 전자는 후원하고, 후자는 징벌한다.

사회는 어떤 것이라도 축복이지만, 정부는 최고의 것이라도 필요악일 따름이다. 최악은 참을 수 없는 정부다. 정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통을 겪을 경우 우리는 차라리 정부가 없는 나라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수단을 우리 자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불행은 더욱 커진다.

Society is produced by our wants, and government by our wickedness; the former promotes our happiness positively by uniting our affections, the latter negatively by restraining our vices. The one encourages intercourse, the other creates distinctions. The first a patron, the last a punisher.

Society in every state is a blessing, but government even in its best state is but a necessary evil; in its worst state an intolerable one; for when we suffer, or are exposed to the same miseries by a government, which we might expect in a country without government, our calamity is heightened by reflecting that we furnish the means by which we suffer.>

그리고 2016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정부를 향해 제발 “상식을 지켜 달라”며 단식으로 곡기를 끊은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할 수 있는 건 정말로 다 해봤어요. 이제 진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남지 않아 단식을 합니다. 오늘도 피가 마르고, 빼가 녹는 유가족들이 더는 거리에 나서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아들 재욱 군을 잃은 홍영미씨가 단식농성을 시작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이날 홍영미씨는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도입 등을 요구하며 지난달 17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간 유경근 집행위원장과 장훈 진상규명분과장과 함께 동조 릴레이 단식농성에 나선 것이었다.

“아직도 제대로 울어보지 못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유가족들을 응원하며 함께 합니다.”

단식이 상식이 되어버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필라델피아에서 동조 릴레이 단식을 시작하며 누군가 던진 말이다. 그렇게 하루씩 이어가며 필라델피아에서도 단식이 이어지고 있다.

김태형“살아생전 처음으로 단식을 해 보았습니다. 밥 먹는걸 지상 최대의 행복으로 알고 지금도 모든 소득을 먹는 것에 투자하는 저에게 단식은 가장 힘겨운 과제였는지도 모릅니다. – 중략 – 2년이 넘게 이런 고통에 힘겨워 하시는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생각해 봅니다. 가족과의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도 모자라 여전히 진실보다는 온갖 말도 안되는 비난과 거짓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부디 하루라도 빨리 진실규명이 이루어져 세월호 유가족 모두가 이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길 희망합니다. 그 날이 올때까지 응원과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권오달

“지금의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은 세상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힘을 솟아나게 하고 있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은 달라져야 하고 바꿔져야 한다. 유가족들의 사생결단의 의지가 있고, 지지, 동조, 연대하는시민과 사회 단체들과 해외동포들도 적지 않다. 비록 하루이며 작은 힘이지만 동조, 지지, 연대하면서 커다란 물결로 변화 발전해 나간다면 안전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어디서나 만들어 갈 것이다.”

이종국

상식이 혁명이 되어, 언제 어디서건 얼굴색깔 구분없이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별없이 모든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와 정부를 선택해 만들고 세우는 세상을 꿈꾸며.

기차여행 – 9

꿈을 꾸다

대평원을 달려온 기차는 덴버에서 긴 시간을 쉬었다. 이제 로키산맥과 시에라 네바다 사막과 산맥을 넘기 위해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역무원들은 열차에 새로운 공급물자들을 나르기에 바빳다.

덴버는 고도 해발 1마일(5,280ft, 1,610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단다.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높은 곳인지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열차는 최고 높이 14,440 feet (4,401 m)에 이르는 로키 산맥을 넘어간다. 열차를 타고가며 산꼭대기에 흰천처럼 덮어있는 것이 만년설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게된 것은 로키가 아닌 시에라 네바다의 요세미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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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로키의 풍경들이 한라산, 백두산보다 높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에서 노는 곰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콜로라도 강변에서 유유자적하며 우리가 탄 기차를 쳐다보고 있는 곰을 넋나간 채로 쳐다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을 잊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콜로라도 강에는 rafting 놀이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기차를 보고 이들이 보내는 인사가 재미있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맨 엉덩이를 드러내서 손을 흔들듯 엉덩이를 흔드는 것이었는데 사내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젊는 처자들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곰과는 다르게 차마 카메라를 손에 들수 없었다.

나는 로키를 넘어가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라고 해도 좋고, 인간과 인간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 산을 넘으며 꿈을 하나 키웠다. “언젠가 겨울에 이 산을 다시 넘으리라”고.

동영상 편집을 좀 할까하다가 말았다. 그저 자연과 인간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기차여행 – 8

해 아래

선잠이 들다 깨다 새벽을 맞았다. 아내는 한밤중이다. 깰세라 조용히 방을 나와 lounge 칸으로 갔다. 동트는 지평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lounge에는 불은 꺼져 있었고 여기저기 장의자와 바닥에 누워 잠을 자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반 좌석 손님들이 누워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 책을 한권도 가져 가질 않았다. 공연히 짐만 될듯도 하였고, 테블릿 하나면 충분할 듯해서였다. 열차 안내 광고에도 와이파이가 연결된다고 하였고, 뉴욕을 오가는 기차처럼 당연히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차 전구간에 걸쳐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다.

대평원과 높은 산악지대를 오가는 기차안에서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것은 이해를 할 수는있겠으나 열차광고에 제공되는 서비스에서 이는 삭제해야 마땅할 듯하였다.

그러나 책 한권 없이, 인터넷이 연결안되는 상황은 오히려 내게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나는 어둑한 lounge에 앉아 테블릿에 여행 메모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새벽 4시 30분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떠오르는 해를 보기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넘게 걸렸던 듯하다. 지평선 저쪽 동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인 후 태양은 제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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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던 시간에 지나친 네브라스카 Hastings는 꼭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 중 한 곳이었다. 백 여년 전에 여기 네브라스카 평원에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조국 광복을 무장투쟁으로 이루고자 꿈꾸었던 사내들이 살았던 곳을 언젠가는 밟아보고 싶었다. 우성 박용만과 소년병학교 생도들이다. (오래전에 박용만선생에 대해 썻던 글 :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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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나 한듯이 하나네와 아내는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lounge로 왔다. 우리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며 이른 아침을 탄성으로 맞이하였다.

열차내 아침식사도 우리를 든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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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열차는 네브라스카를 달리고 있었다. 콜로라도주로 넘어서기 직전 넓은 평원에 세워진 공화당 후보 Trump 선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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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럼프 선전 간판을 보며 이 땅에서 내몰렸던 인디언들과 맥없이 땅을 빼앗겼던 멕시칸들을 생각했다.

“텍사스와 멕시코의 광대하고 비옥한 지역은 테네시, 미시시피, 루이지애나의 개척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 중략 – 멕시코는 미국인 Stephen Austin에게 거주지에 정착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다. 성문화된 이 조건은 토지 소유자는 카톨릭교도여야 한다는 것과 멕시코의 법률을 지키며 자치를 시행한다는 것 뿐이었다. 사실 영국계 미국인 중에는 카톨릭교도가 거의 없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던 이주자들은 필요한 증명서를 얻는데 드는 10분 동안만 카톨릭교도 행세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렇게 우물쭈물 넘어갔다.” –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에서

그때가 1821년 즈음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1834년 멕시코는 그곳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멕시코 법률을 심히 위반하므로 그 땅에서 내쫓고자 하였으나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고, 그렇게 맥없이 텍사스를 빼았기고 만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 곧 인디언들에 대한 약탈과 살육의 참혹함에 이르면, 이 땅을 일군 초기 개척자들의 후손들은 아직 씻어야할 손에 대한 생각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열차는 콜로라도 덴버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여행 – 7

하늘 그리고 한울

열차는 어둠이 덮힌 네브라스카 대평원을 달린다. 스쳐 지나가는 역마다 안내를 해주던 안내방송도 끊겼다. 어둠속을 달리는 기차안에서 승객들이 편안한 잠을 잘수 있도록하기 위한 배려이다.

나는 Omaha시를 지난 후에야 잠을 청했다. Omaha는 내 아들녀석이 4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모두가 내 욕심 탓이었다. 욕심은 아이 이름을 너무 버겁게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한울이라는 이름이 너무 무거웠는지 아이는 좀 늦되게 컷다. 제 자식 착하다하지 않을 애비가 어디 있겠느냐만 아이는 정말 착했다. 아니 지금도 착하다.

다만 아이는 느렸다. 게다가 덩치는 애비의 두배나 되는 녀석이 마음이 너무 여렸다. 중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나무랄 수 없을 정도로 성적표를 받아오더니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여러 차례 아내와 나는 학교의 부름을 받곤 했다. 그렇다고 무슨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니었고 느려서 다른 아이들을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나마 대입학력고사인 SAT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아 맘먹고 찾아나서면 갈만한 대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또 다시 내 욕심이 발동하였다. 아이에게 군대를 권한 것이었다. “지금 네 상태로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를 다녀 오는게 어떠냐?” 내 권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내 핑계이지만, 아이가 좀 단단해 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착한 아들은 내 말에 순종했다. 아들녀석은 텍사스에서 훈련을 받고 네브라스카 오마하로 배속받아 4년을 근무하였다. 당시는 이라크 파병 숫자가 가장 많을 때여서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몇주 만에 훈련생활을 끝낸 아이를 텍사스에서 만났을 때 내 느낌은 “아이고, 내 욕심이었구나” 였다.

다행히도 아이는 4년 동안 오마하 군생활을 마치고 돌와왔다. 아이의 군 제대를 앞두고 내 욕심은 또 다시 발동했었다. “얘야! 그냥 군생활을 계속하는게 너에게 좋을 것 같은데….” 녀석은 그 때 처음으로 내 말을 끊었다. “아빠! 아빠는 군대가 얼마나 나쁜덴 줄 몰라! 난 제대할거야!”

그렇게 아들녀석이 자신의 황금시간을 보낸 곳 오마하를 지나며 난 잠이 들수가 없었다.

제대후 녀석은 대학을 마치고 일자리를 얻었다. 박봉이지만 자기처럼 늦된 아이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로 일을 재밌어 한다. 그런데 좀처럼 집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여섯 살 아래 제 동생이 하는 “오빤 나이 스물 넘은지가 언젠데…”하는 비웃음을 못들은체 하면서까지 좀체 나가서 살려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어느날 부터인가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 내외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기 시작하더니 대답과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녀석에게 여자가 생겼다. 어느날인가 얼굴 까만 여자 아이와 아들 녀석이 함께 있었고, 얼마 지나지않아 두 아이는 “우리 결혼해요!”라며 우리 부부에게 다가왔다.

나는 많이 아파했다. 처음엔 아이가 내게 만들어준 아픔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픔은 내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픔의 크기는 커져갔다.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아이들의 배우자를 얼굴 색깔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왈 진보연하며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아픔이었다.

얼굴 까만 여자아이는 내 아들녀석을 더 이상 한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Han 이다.

그렇게 오마하를 지나 기차는 달렸다.

나는 새벽녘에 지평선 넘어 떠오르는 해와 하늘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오마하를 지나 자정이 넘어서도 잠을 이루지를 못했다.

여행이 끝난 후 하나엄마는 하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 주었다. “여행중에 제가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요, 하늘을 그렇게 많이 찍었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 하늘을 많이 찍었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니까요, 평소에 바쁘다고 하늘 쳐다보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들이 매일 매일 내 앞에 있었을텐데요….”

언제가 나는 얼굴 까만아이에게 말할 것이다. Han이 아니라 한울이라고 부르라고. 비록 또 다시 내 욕심일지라도.

기차여행 – 6

행복이란

하나네는 열차 맨 앞칸, 우리는 끝에서 두번 째 차량에 있는 객실로 떨어졌다. 예약 이후 같은 차량에 있는 객실 두개로 바꾸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만석이어서 애초 배정받은 객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매 식사 때마다 만나 함께 식사한 후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방으로 헤어지곤 하였는데, 이 방배정은 긴 여행에서 오히려 잘된 선택 같았다.

객실 안에는 기차노선 안내 설명서가 꽂혀 있었는데 이는 여행에 아주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비록 서지는 않더라도 열차가 지나가는 모든 기차역들과 그 지역에 대한 안내를 견하고 있었으며, 시카고 기점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인지와 지나가는 시간들을 잘 안내해 주고 있었다.

안내서는 시카고를  “미국의 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미 전역으로 뻗어가는 기차노선 및 각급 교통망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시카고를 출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끝없는 옥수수밭이었는데, 일리노이주를 지나 아이오와주를 건널 때까지 이어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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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주로 들어서기 직전에 지나간 곳은 일리노이 Galesburg였는데 안내서에는 아주 낯익은 이름을 소개하고 있었다. 바로 그곳 출신인 시인 Carl Sandburg였다. 나는 그가 쓴 “행복”이라는 시를 아주 좋아해서 종종 내 가게 손님들에게 소개하곤 한다.

Happiness

I ASKED the professors who teach the meaning of life to tell me what is happiness. / And I went to famous executives who boss the work of thousands of men. / They all shook their heads and gave me a smile as though I was trying to fool with them / And then one Sunday afternoon I wandered out along the Desplaines river / And I saw a crowd of Hungarians under the trees with their women and children and a keg of beer and an accordion.

행복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 수천명의 사람들을 지휘하는 유명한 사장들에게도 물어보았다. / 그들은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내가 장난이나 치고 있다는 듯 웃기만 했었다. /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데스플레니스 강에서 강을 따라가니 / 나무 아래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맥주통과 손풍금을 곁에 둔 한 무리의 헝가리인들을 보았다.

**** Desplaines river(데스플레니스강) – 일리노이주에 있는 강이름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유럽에서 몰려온 이민자들 대부분들이 그렇지만 특히 헝거리 이민자들은 가난을 피해 온 바닥 인생들이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이 땅에서도 고된  노동자였다. Carl Sandburg는 돈과 지식과 명예를 지닌 사람들에게서 찾지 못했던 행복을 잠시의 쉼을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헝가리 노동자들에게서 찾았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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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미시시피강을 건너며 아이오와로 들어섰다. 미시시피강은 탁하고 거칠게 다가왔다. 미국 중부지역을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고 있는 미시시피에는 미국내에서는 두번 째, 세계로는 네번 째로 긴 강이라고 한다. 인디언들이 ‘큰 강’, ‘위대한 강’이라는 뜻으로 불렀다는 미시시피강에는 아직 바다로 흘러가지 못한 인디언들과 흑인들과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강바닥에 묻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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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는 옥수수밭의 연속이었다. 아이오와 코커스로 유명한 아이오와 땅넓이는 한국보다 큰데 인구는 한국의 1/15 수준이란다. 아무튼 미주, 공화 양당의 대통령 경선이 제일 먼저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 경선에서 이기는 사람이 그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여 유명한 것인데, 공화당 경우는 그리 맞지 않는 말일 수도 있겠다. 이번 선거에서는 트럼프가 아닌 테드 크루즈가 이겼었으니.

침실객차 손님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무료가 아니라 기차값에 포함) 식사 시간은 저녁식사에 한해 세 차례 스케쥴 중 시간을 선택해야 했다. 우리는 마지막 서빙 시간을 택했다.

식사 하기 전에 지나친 역 이름이 Ottumwa 였는데 이 역에 대한 설명에 또 낯익은 이름이 하나있다. 우리 또래쯤 되는 사람들은 AFKN이라는 방송을 통해 익은 M*A*S*H라는 드라마 이름이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이동외과병원 부대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보고 욕 한번 안해본 한국 사람이 있을까? 돌이켜볼수록 이제 한국은 아주 다른 나라가 되었다. 아무튼 이 드라마 주인공 가운데 Radar” O’Reilly(드라마 주인공 이름이고, 실제 배우 이름은 Gary Burghoff) 의 고향이 이곳이라는 설명이다.

열차안에서의 첫 식사는 대단히 만족한 것이었다. 물론 전문 스테이크 하우스와 견줄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치는 넘어선 것이었고, 게와 새우 등을 넣은 해물요리도 즐길만하였다. 각종 음료와 맥주는 제공되지만 와인이나 liquor는 제외(물론 돈주고 사먹으면 된다).

식사후 라운지에서 바라본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끝을 볼수 없는 목축장 그리고 천하태평으로 노니는 검은소들, 그리고 이내 지평선 넘어로 숨는 해를 보며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기차 아래층에 있는 샤워룸은 아주 깔끔하였다. 샤워를 마치고 객실로 돌아오니 기차는 미조리강을 건너 네브라스카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