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

지난 해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일찌감치 은퇴생활을 즐기는 줄 알았던 벗이 보낸 봄소식을 받았습니다. 두릅, 부추, 취나물 등 그가 키워 거둔 봄나물들이었습니다.

봄나물

한국에서 오랜기간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온 이 벗에게 이민생활 초기는 그리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다 십 수년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집 뒤뜰 텃밭 농사를 제법 규모있게 지었답니다.

펜실베니아 시골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휴대폰도 잘 안터진답니다. 그 뒤뜰에 제법 훌륭한 비닐하우스를 짓고 각종 푸성귀 농사를 지었답니다. 덕분에 해마다 봄이면 봄맛을 보곤 했었답니다.

그의 손길로 이룬 기름진 텃밭에서 자란 푸성귀들로 식탁이 풍성해지는만큼 벗의 이민생활도 웃음 가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아들 하나 잘 키워 예쁜 며느리도 들인 후, 미련없이 사업체를 딱 정리한 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도 듣곤 하였지만 직접 연락은 두절한 상태로 지냈답니다.

한 두어 주전에 어느 식사자리에서 제법 도인(道人)이 된 그를 만났답니다. 머리를 길러 꽁지머리를 묶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농사짓고, 도기(陶器) 굽고, 분재(盆栽)를 키우며 살고파하던 그의 꿈들을 이루며 사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봄나물을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주일 아침입니다. 농사짓는 벗 덕분에 어머니와 장모에게 봄소식 선물을 드릴 수 있어 참 좋은 아침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면 두 어머니에게 봄나물 드리는 일이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가자! 광장(廣場)으로

광장을 찾아 헤매다 끝내 바다에 투신하여 죽는 이명준.

단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를 드나들던 명준은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 버린” 남쪽에 구토를 느끼며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오직 “복창만 강요하는 구호”만 있을 뿐 북에도 광장은 없었다.

명준은 ‘광장’이 없는 조국 한반도를 등지고 중립국 인도로 향해 가던 배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린다.

1961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그렇게 죽는다.

우리에게 축제의 광장은 없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1960년 4월(당시에는 4월에 학기를 시작했었다), 나는 왼쪽 가슴에 커다란 손수건을 달고(이즈음 아이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당시엔 아이들이 코를 줄줄 흘리고 다녔으므로 손수건을 가슴에 달게 하였다) “서둘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한 채 오후반 등교길에 나섰다. (당시 전후-戰後:한국전쟁- 첫 세대인 우리에게 교실은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통상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때로는 삼부제 수업을 하곤 하였다.)

그날은 두어 주간 동안 운동장에서 있었던 유희와 이즈음으로 말하면 집단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는 첫 날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채근은 대단하였다. 서둘러 나선 등교길, 신촌 노타리를 가로 지르는 길목에서 나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집 앞에서부터 들었던 함성이 이제 바로 내 앞에서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걸이를 한 대학생들은 “문(門)안으로, 문안으로(당시 우리는 광화문이나 시청을 문안이라고 불렀었다. 사대문안이라는 뜻으로.)” 노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시청과 광화문 ‘광장’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경무대(청와대)로 향했던 1960년 4월 19일이었다.

그 저녁, “총소리… 피…. 죽음…” 등등의 어른들 말사이로 이웃집 형이 끝내 돌어오지 않았다는 흉흉한 소리를 들으며 우리 코흘리개들은 여느 날처럼 “다방구와 술래잡기”놀이로 그 밤을 보냈다.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우리도 시청앞으로 광화문으로 내달리곤 했다. 그 광장을 향해 달리다 더러는 징역을 살았고, 더러는 군대에 끌려 갔으며, 더러는 목로주점에서 얻은 취기로 골방에서 악을 쓰고는 하였다.

그리고 1980년 봄,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 악을 쓰고 모였고, 효창운동장에 군부대가 집결했다는 소문이 돌던 밤, 우리들은 ‘밀실’에 갇혀 모진 매를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그 해 오월, 마침내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붉은 피, 총소리, 군화소리, 죽음 – 광주 전남도청앞 광장은 우리시대 ‘광장’의 극명한 모습이었다.

오누이 월남하여 홀로되신 장모와 함께 평안도 정주출신을 찾아 여의도 만남의 광장을 헤맨던 일을 몇 해 뒷 일이었다.

ggg최루탄에 맞아 한 젊은이가 죽고, 광장은 만장과 항쟁의 깃발을 든 시민들로 들끓었다. 1987년 6월 10일이었다. 나는 그 광장을 뒤로 하고 돌아온 밤, 이민 보따리를 꾸렸다.

그랬다. 우리에게 광장은 분노와 항거와 저항의 분수대였다. 그곳은 끝내 눈물이었고 패배의 아픔 뿐이었다. 그곳에서의 평화와 안정은 오직 관제(官製)이었다.

워싱톤 광장과 서너 블럭 뒤에 빈민 우범지대의 공존이 더는 낯설지 않은 이민(移民)의 세월을 보내며, 더러는 아슬아슬하지만 내가 살던 때보다는 나은 축제의 광장을 누리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오롯이 삼 사십년, 아니 최인훈의 광장 오십년을 넘어 백 이십여년 전 고부장터의 원성이 고스라니 다시 살아 울리는 소리 들리는데,  2014년 내 모국의 광장에는 다시 관제(官製)의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으니 어찌하리!

가자! 다시 광장으로!

환갑(還) 젊은 나이로 자유의 광장으로 나서나니, 젊은이들이여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도청앞으로 광장으로 나설진저.

더는 바다에 떠도는 그 숱한 이명준의 넋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니 이명준처럼 자기 길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다만 “가만 있으라”는 명령에 순종한 그 숱한 넋들을 위하여…

가자, 광장으로!

 

김수영과 만세

지난 주일 오후에 정말 잠시 한순간,  그야말로 채 3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얼핏 보았던 책의 표지와 목차들이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답니다. 

필라에서 아는 이들끼리 저녁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답니다.(이 모임은 제법  뜻이 있다는 생각이라 언젠가는 따로 소개드리려 한답니다.) 

아무튼 그 모임이 끝나고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다가 문득 제 눈길을 끈 책이었답니다. 모임의 멤버 가운데 인쇄업을 하는 벗이 만든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쓴 이는 필라 지역 사람들이라면 한두번 쯤은 그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을 만큼 제법 지역사회에서는 알려진 이름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순간 하품을 할만큼 딱하게 생각했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그 책이 “김수영 문학상”에 출품하기 위해 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김수영그  책을 쓴 이의 평소 글로 보아 도대체 김수영시인하고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공화당 티파티(Tea Party)에 속한 이가 오바마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격이랄까, 아니면 만년 새누리당 지지자가 진보당 이정희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그런 참 맞지 않는 그림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이가 과연 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쓴 사람인 줄은 알고 있는지,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 김수영시인이었다는 것은 알고나 있는 것인지 그런게 두루 궁금하더란 말이지요. 

세월따라 세상은 바뀌게 마련이지만, 1960년대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훨씬 뒷걸음친 모습으로 변한 한국사회(한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와 갈수록 점점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모습을 바로 비추어 보자는 생각으로 김수영시인의 글을 소개합니다. 

첫번째는1960년 9월 20일에 쓴 그의 일기이고, 두번 째는 그의 유고시 “김일성 만세”입니다. 

1.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2.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이런 가수도 있었군요

이승환이라는 가수라는데, 제 나이 탓인지 이름이 낯설답니다.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가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생각이랍니다.

필요와 욕망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닌데 그저 늘 바쁩니다. 제가 쉰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답니다. 그런데도 주어진 시간보다 해야할 일들이 늘 많은 삶을 살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느냐하면 그도 아니거니와, 결과도 늘 있는듯 없는듯 하답니다. 

그나마 지나간 일들과 시간에 대해 그리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 성격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랍니다. 비록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 욕망에 따라 움직였던 일과 시간일지라도 말이지요.   

언젠가 어느 스님의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얻은 한 깨달음입니다.

“필요와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삶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제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 욕망으로 끌고 가는 삶일까?

- - -

불가에서는 “내려 놓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비움”을 말씀합니다. 욕망을 비우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렇게 비우다 더는 비울 수 없는 것이 “필요”이겠지요. 

나는 어디까지 비울 수 있을까요? 

출가(出家)한 사람이 아니니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들과 또 그렇게 얽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우선 확보해 두어야겠지요. 그렇게 우선 확보해둔 기본적인 필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꼽아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필요”부터 따져보니 버려야 할 “욕망”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그래 이번엔 거꾸로 버릴 것을 먼저 버려 보는 것이지요. “욕망”을 벗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컴퓨터 옆에 있는 종이 한 장 버리는 일에서부터 “망설임”이 먼저 인답니다. 필요를 꼽을 땐 별 시간이 걸리지 않던 것이 욕망을 꼽자니 그 놈의 “집착”이라는 놈이….. 

<지갑을 버리고, 부모조차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나를 따르라>했던 것은 예수이지요. 

이 쪽으로나 저 쪽으로나 참다운 출가를 하기 전엔  “욕망”의 끈을 놓긴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필요와 욕망을 흰 빨래와 검정 빨래 가리듯 가리울 수만 있다면 참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것

오늘 낮에 제 가게에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오셨답니다. 평소 제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이 아니셨답니다. 아직 걸음걸이는 건강해 보이셨지만 연세가 꽤 드신 어른이셨답니다. 머리에는 “Korean War Veteran”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모자를 쓰고 계셨습니다. 

저를 보자 그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이거 작은 건데 네게 선물로 주려고 한다. 받아주겠니? 우리 이웃집에 사는 아무개가 말하던데 네가 한국에서 왔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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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선물이라니요? 무슨….”하며 주저하는 제게 그 어르신이 내미신 것은  구리로 만든 동그란 작은 접시였습니다. 접시 안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었답니다. 

“아니, 이걸 왜 제게 주십니까?”라는 질문에 그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네. 한국에 대한 추억이 있다네. 보다시피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하나하나 정리하며 살고 있는데… 마침 당신이 한국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거는 당신에게 주고 싶어서…”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낯선 할아버님께 받은 구리접시를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오늘 낮에 제 아내는 한국학교 아이들과 함께 필라델피아 미술 박물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다녀왔답니다. 저는 다음 달에나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전시회랍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순회전회되는 전시회입니다. 이곳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해서 LA와 휴스톤에서 이어져 열리게 된답니다. 

“한국의 보물, 조선시대의 예술과 문화 1392 -1910 (Treasures from Korea: Arts and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랍니다. 약 150여점의 조선시대 예술품들이 전시되는 이 전시회를 엊그제 NewYork Times도 “극도로 절제된 우아함(minimalist elegance)”이라는 말로 소개했답니다. 

<“우리 것”을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 것”을 바라보는 “이웃들” >이라는 생각에 잠시 젖어보는 주말 저녁입니다.

모국(母國)을 위하여

이민이라는 게 살면 살수록 살던 곳이 그리워 지는 삶이랍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참된 이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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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이까지 들고보면 그 그리움의 크기는 더해가기만 한답니다. 

그리움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아마 저는 여기 뼈를 묻을 것입니다. 

제 자식들도 어디서 어떤 일을 하며 살더라도 이미 한국인은 아닙니다. 그저 한국계 미국인 뿐이지요. 

그렇다하더라도 오늘은 모국을 위한 정말 간절한 기도를 드려본답니다. 

저도 이젠 정치에서 무슨 도덕을 찾을 나이는 이미 지난 늙은이랍니다. 

<광장>을 잃고서도 그를 느끼지 못한 <시대>는 아직도 불행한 역사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그 역사를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겠지요.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동시대에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지요. 

반세기 전에 작가 <최인훈>이 서있던 그 <광장>이 2014년 오늘 현재 내 모국에  아직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은 저를 기도하게 만든답니다. 

그냥 웬지 모를 슬픔이 밀려오는 밤에….

김어준과 변희재

주말이라 좀 쉬노라고 여기 저기 온라인 사이트를 뒤적이다가 든 생각 하나랍니다.

김어준과 변희재. 

썩 다른 듯 하지만 아주 똑같은 캐릭터를 보면서 이즈음의 한국 사회를 쉽게 조망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저야 뭐 세상사  성서적 시각으로 보자는 쪽이니까, 그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지요. 

김어준과 변희재같은 젊은이들이 뉴스가 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가 아닐까요? 

두 사람의 생각과 삶의 방식, 그들이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집단들을 보면 전혀 다르지요. 

그런데 살아가는 방식은 똑같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바로 “뻔뻔함”, “상대 무시하기”, “유아독존” , 나아가 “소설쓰기로 덮어 씌우기” 등등 

이즈음의 한국사회를 표현하는 정형같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시대정신까지 이런 예능인들에게 비추어보아야 하는 세상이 서글프답니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과 생각은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하고요, 그 다름을 서로 인정해 가며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겠지요. 

한국(한인)사회 전반에 만연된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 속에서 ‘김어준과 변희재’ 같은 류의 “뻔뻔함”이 뉴스가 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아무리 예능천국인 세상이라도, 예능화 시키지 말아야 하는 구석은 있는 것이겠지요.

(참과 거짓의 대척을 자꾸 예능화 시키는 이런 두 아이의 꼭두각시 놀음에 대해  “이 눔아!”하며 큰 소리칠 어른조차 없는 사회를 탄하며.)

아내와 샴푸

이제 제발 샴푸를 쓰라는 아내의 성화에 샴푸로 머리를 감았답니다. 물론 샴푸를 사용한 것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은 아니랍니다. 다만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말씀입지요. 

그냥 세수비누를 사용해 왔지요.  한 삼십년 된 듯 합니다.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은 세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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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는 빨래비누를 사용했었지요. 거의 서른 나이까지 제가 머리감을  때 즐겨쓰던 비누였답니다. 누런색 사각 덩어리 빨래 비누였답니다.  그 놈으로 머리를 감고 나면 머리속까지 시원했답니다. 

그 빨래비누를 구할 수 없어서 사용한 것이 세수비누랍니다. 

샴푸는 영 제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답니다. 아내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약간의 세치라고 할만한 흰머리카락은 있지만 아직 검고 윤기있는 머리털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나이 육십에 이제 샴푸로 머리를 감습니다. 

저는 이게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내의 말은 듣는 게 편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랍니다. 

누구는 새로 시작하는 나이라지만, 늙어가는 나이이기도 한 탓입니다.

합리적 의심 – 천안함 프로젝트

폭풍 전야라고 하던가요.

아주 조용한 주일 오후입니다. 오늘밤부터 시작된다는 겨울 눈폭풍의 이름은  Titan이라고 한답니다. 적게는 7인치에서 많게는 12인치까지 내린다고 합니다. 기온도 뚝 떨어진다고 하고요.

전기나 물이 끊길 우려도 있다는 뉴스에 만일을 위해  휴대용 부탄가스 버너와 장작 등도 준비해 놓았답니다.

그리고 즐긴 다큐멘타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입니다.

오늘 오전에 지인이 한번 꼭 보라는 메세지와 함께 보내준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합리적 의심”이 원천 봉쇄되거나 “무조건적 믿음”이 애국이나 신앙으로 치부되는 사회는  불안한 사회입니다. 왜냐하면 폭풍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유할 수 있는 영상임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LFB2IW8Zmg#t=4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