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만나는 자리에 당신을…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온지도 벌써 여러날 되었습니다. 이렇게 올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이번 주간엔 한해에 대한 감사(thanks)를 드리는(giving) 날인 Thanksgiving Day를 맞습니다. 한해의 감사를 드려야만 할 대상들을 꼽아보는 일도 제법 뜻이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아침입니다.

제 자신과 가족들이 드려야할 감사의 내용들과 드려야할 대상들을 헤아려봅니다. 꼽자하니 꼬리를 잇습니다.

그러다 올 한해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질 때마다 붙잡아 주었던 옛 선생님의 말씀 하나 떠올려봅니다.

올 한해 동안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져 일상을 벗어났던 까닭은 “내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일테면 그것은 제 신앙적 물음이었습니다.

이즈음에 이르러 오만하거나 무지한 자들에 의해 거의 “빨갱이들의 언어”로 규정지어지는 듯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중”입니다. 이 “민중”이란 말은 어찌보면 제가 살아오면서 (비록 가까이 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그 범주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애써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겠지만) 꼭 붙잡고 싶었던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제가 이해하고 믿는 성서의 가르침 탓인데, 올 한해 그 이해와 믿음이 자꾸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추스리고 깨우쳐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바로 “민중과 함께 했던 예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안병무목사님은(1922-1996) “민중이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할것없이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민중이란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때 그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객관화시켜 절대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바로 2015년 오늘,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민중들이고, 그 소외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이 민중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2015년의 제 삶이 민중적인 것이 아니고, 민중과 함께하는 삶도 아니였지만,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흉내라도 낸 까닭은 바로 안목사님의 가르침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감사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이해와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성서를 손에 들고 질문하게 했던 신앙에 대한 감사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나그네나 이방인으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 모두 2015년 감사절에 위하여 기도해야만 할 민중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30년 넘는 세월동안 흔들림없이 민중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외길 걸어온 벗을 소개 드립니다. 저도 30여년만에 이 친구를 처음 만납니다. 헤어져 만난지 30년이 넘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한결같이 첫 마음 그대로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과 함께 하고 있는 김규복목사입니다. 그는 오늘도 함께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산다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내일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을 초대합니다. 뜻깊은 2015년Thanksgiving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김규복목사 초청 온라인

제목 : 한국내 이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일시  : 2015 11 24() 오후 9오후11(미국 동부시간 기준)

장소 : 온라인 모임방https://zoom.us/j/6998016922  ) – 당일(11/24) 오후 8시 50분부터 입장 가능합니다. 녹색 글씨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필라 세사모에서 당신을 온라인 강의에 초대합니다.

Join from PC, Mac, Linux, iOS or Android: https://zoom.us/j/6998016922

Or join by phone:

+1 646 558 8656 (US Toll) or +1 408 638 0968 (US Toll)

Meeting ID: 699 801 6922

참조 : http://conta.cc/1Lrc3ug

김규복목사 약력보기 (http://www.seomna.or.kr/page/m1s2.html )

12241254_977219285709042_8276212679729901126_n

<대전 이주민과 함께하는 모임> 사진첩에서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제밤 이후 제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제가 그 생각을 무어라 불러야는지 딱히 이름지어 부를 수가 없었답니다. 제 머리속과 가슴을 꽉채운 어떤 생각이 있기는 한데 “그건 바로 이거다”라고 이름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월요일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어떤 생각’이 그냥 느낌으로만 뱅뱅 돌 뿐이지, 생각이 영글어 표현에 이르는 지경에는 닿지 못했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난 이 밤, 옛 선생님의 가르침 하나 문득 떠올리면서 그 생각을 무어라 이름 지어야 하는지를 찾아내었답니다. 바로 “아름다움”이랍니다.

저는 어제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이라는 온라인 화상 모임에 함께 했었답니다.

cats

그 모임에는 한국에 계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의 19개 도시에서 참가하신 약 백여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함께 했답니다.

비록 컴퓨터나 휴대폰 화상을 통해 얼굴을 맞댄 것이지만, 마치 실제 한 공간에서 만나고 느끼는 것 같은 시간을 함께 했답니다.

어제밤, 거의 두시간을 넘긴 만남속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마치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이어진 모습으로 하나가 되었었답니다.

그 순간들의 느낌들을 하나로 엮는 생각이란  바로 “아름다움”이었답니다.

사실 어제밤 함께했던 이들이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아픔이었답니다.

그리고 어제밤 모임은 그 아픔이 ‘너’만의 것이 아닌 ‘나’와 ‘우리’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던 동시에 그 아픔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저들을” 향하여  “끝내 너희들도 우리가 되리라”고 함께 외쳐보자고 만든 자리였답니다.

그렇게 아파하는 자들의 모임이었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 모두는 웃음을 잃을 수 없답니다.

바로 어제밤, 아파하는 우리들이 함께했던 그 웃음에 대한 생각을 “아름다움이다”라고 말씀하신 이는 함석헌선생님이시랍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도리어 강한 대조에 있지 않느냐? 푸른 잎에 붉은 꽃, 시커먼 구름에 반짝이는 샛별 모양으로. 감격을 하지. 비극이 무엇이냐? 극단의 대조 아니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을 맞대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비극이다.우리 마음은 하나됨을 얻는 때에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때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바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세월호에 맺힌 한이 이미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한 “잊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걸음들을 이어갈 것입니다.

초대합니다.

우리들이 필라세사모의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하던 무렵, 어느 분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답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게다가 민주주의를 그렇게 빨리 정착시킨 나라도 없다는 그런 자부심을 준 모국이었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뭐랄까요, 부끄러움이랄까요, 안타까움이랄까요, 그냥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그래 모국을 위해 뭔가라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모국이란 말이 너무 크다면 그 말은 접어 두더라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무언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물음으로 함께 생각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가고 2016이라는 숫자가 코앞에 놓였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손내미면 잡힐듯한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이들에겐 고려적보다 먼 옛날 일이 되었고, 아픔을 호소하는 가족들의 소리는 변함없건만 들으려는 귀 있는 자들도 점점 더 줄어만 갑니다. 오히려 “아직도냐?”, “이젠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정상인듯한, 정말 비정상적인 현실입니다.

BN-CL246_skferr_E_20140419002744자! 이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60년 5월에 한양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해 드립니다. 일년 조금 지난 일을 고려적 이야기로 생각하는 세상이니,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조 철종임금 11년차에 일어난 일이지만 한 공간에서 일어난 일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소개드립니다.

포도대장을 지낸 신명순의 집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스며듭니다. 여인의 이름은 주례, 당시 나이 쉰 네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때 열 세살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신명순의 집을 침입합니다. 가슴에는 단도(短刀)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신명순은 큰 사랑방에서 아우와 함께 담소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명순의 나이는 예순 둘. 주례라는 여인이 단도를 꺼내들고 신명순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명순 형제의 힘에 맥없이 저지당했습니다. 열 세살 어린 아이도 그냥 얼어버렸고요.

아우성 소리에 신명순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여인과 아이를 포박하고 포도청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 공초한 내용은 이렇답니다.

“지난해 오월에 제(주례) 맏아들이 병들어 죽고 작은 아들 회종이 지난해 팔월에 무슨 일인지 우포도청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몇 달 동안 마음이 저리고 뼈가 삭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하거나 천한거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달은 제 맏아들이 죽은 달이요, 둘째 아들의 생일이 낀 달입니다. 도대체 제 작은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정신이 나가 포도대장 집을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여인 주례는 이 일로 하여 목을 잘리는 형벌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열 세살 막내는 귀양길에 올랐고요.

그리고 155년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동안 아낙 주례같은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오는 일요일은 11월 15일(한국 시간 11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580일이 되는 날입니다.

“도대체 우리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외치는 300이 넘는 아낙 주례들의 소리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55년전 아낙 주례의  한맺힌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2015년 오늘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들을 들을 귀는 있답니다.  바로 우리들이 말입니다. 더하여 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를 더 크게 전파하는 울림통이 될 수도 있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

일시 : 2015년 11월 15일(일) 오후 9시 (미국 동부시간 기준)

함께 하시렵니까? [email protected] 으로 문의해 주십시요.

초대 – 강도맞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환갑 진갑 다 지났어도 웬만한 모임에 나가면 말석차지랍니다. 하여 자리 펴고 자리 접는 뒷일과 막일들이 제 몫이거니하며 개의치 않는답니다. 물론 말석차지가 좋은 점도 있답니다. 그런 자리에선 이 나이가 아직 청춘이라는 생각도 할수 있거니와 조금 헝클어진다 하여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이로 따져 저보다 어린사람들이 많은 모임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아무래도 더욱 신중해지고 가급적 뒷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려고 애쓰는 편이랍니다. 허나 타고난 성격 때문에 불쑥불쑥 튀는 통에 모임이 끝나고나면 ‘아차!’하는 때가 종종 있답니다.

그렇게 종종 ‘아차!’하면서도 이즈음 제가 즐겨하는 모임이 있답니다. 모임의 이름도 있답니다. 바로 “필라 세사모”입니다. 정식 명칭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이랍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제 거주지가 필라델피아는 아니지만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도 범 필라델피아 지역 변방에 위치함으로 끼워 주신 것이랍니다. 가급적 박수나 치며 앞서가는 이들을 쫓아나 가자고 얼굴 내민 일인데, 종종 버리지 못한 못된 습관으로 ‘아차!’하면서도 모임을 즐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모임에 대해 열성적이며 나이살에 비해 ‘아차!’하는 빈도수가 높은 저를 잘 이해해주는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넉넉한 까닭입니다.

이 모임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랍니다. 이 행사를 위해 어제 저녁에 약 한 시간에 걸쳐 시험적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았답니다.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 몇 분들을 비롯하여 호주,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 동부의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필라델피아, 중부의 시카고와 테네시, 서부의 켈리포니아 등 여러 곳에 계신 분들이 함께 했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일요일(11월 15일) 저녁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는 첫번째 행사를 갖는답니다.

자, 이쯤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려합니다. 제가 바라보고 느끼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의 모습입니다.

제가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 가운데 서남동목사님이 계시답니다. 목사님께서 세상 뜨신지 벌써 서른 해가 넘었답니다.  그 어르신께서 즐겨 인용하시던 예수의 비유가 있답니다. 잘 아시거나 한번쯤은 들어보셨음직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 29-37

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예수믿는 이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해석은 익히 아는 교회의 전통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서남동목사님은 이 비유를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의 역할은?” 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서목사님은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2015년 현재, 제가 이해하고 느끼고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이랍니다. 바로 이들이 제가 섬겨야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길을 가다 강도만났던 일에 대해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받았고, 이미 다 치유되고도 남을 대접을 받았다고 여긴답니다. 더하여 그렇게 강도 맞는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유달리 특별나게 군다고 혀를 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시작은 “영생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 바로 영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대한 답변입니다.

서남동선생님은 그 성서적 물음과 답변을 제게 이렇게 해석해 주신답니다. 오늘 네가 보고 있는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인 줄로 알라고 말입니다. 바로 제가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일은 이런 제 생각을 넉넉히 이해해주는 필라세사모의 구성원들이랍니다.

혹시라도 오는 11월 15일 저녁에 있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의 온라인 만남” 행사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페친이 계시다면(단, 재외동포 페친들만) 제게 연락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답니다. 이메일([email protected] 으로)을 주시면 함께 하실 수 있는 안내를 보내 드릴 것입니다.

9715_15361_4058


“이번일로 정말 잔인하고 몹쓸 세상도 경험했지만, 사회를 지탱해 주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어요. – 중략- 아, 소수라도 이렇게 힘써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덜 억울하구나, 내가 덜 바보구나, 내가 덜 외롭구나 싶어요. – 중략- 그런걸 보면 외면만 받는 세상속에 있는건 아니네요.” – 세월호희생자 길채원학생의 어머니 허영무씨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략-  어쨌든 내가 할수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길 가다보면 또 다른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난 뒤에 다른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사람들이 거기에서 출발하면 되니까….” – 세월호희생자 이창현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

누군가의 외로움을 덜어줄 소수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갈 좋은사람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누군가 앞서가다 지친 이들의 곁에서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않으시렵니까?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송곳

페친 한분이 웹툰(미국에서는 Webtoon보다는  Webcomic 이라 합니다만) ‘송곳’ 이야기를 꾸준히 올리실 때만 하여도 제 눈길은 거기 가닿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드라마 ‘송곳’ 이야기가 연이어지면서 티저 영상을 올리셨고, 제가 그걸 보게된 것이지요.

ART151014122407

그 길로 드라마 ‘송곳’을 찾아 보기 시작했고, 5회까지 보았답니다. 매회 드라마가 시작될 때 똑 같은 자막이 되풀이 됩니다. “이 드라마는 2003년 6월 어느날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라는 자막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제 머리속엔 2003이 아니라 1970년대와 2015년 오늘의 모습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답니다.

조지송, 조화순, 김경락(이 양반은 1980년대 미국와서 만났지만)목사님들의 모습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인천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이들을 이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내 중반(제가 이민온 이후는 모른답니다)까지 이른바 노동운동에 삶을 바친 이들의 얼굴들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분, 어제 송곳 5회를 보다가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이가 있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기억속에 있는 1970년대에 비하면 2015년 지금의 대한민국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단 대한민국 뿐만 아닙니다. 이곳 미국내 동포사회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의 변화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제가 이민온 1980대 중반만 하더라도 개밥통조림 사다먹은 이야기가 그냥 우스개소리만은 아닌 때였습니다.

아무리 못입고, 못먹고, 열악한 잠자리라 하더라도 그 때에 비하면 오늘날은 가히 천국에 가깝다고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나, 2003년이나, 2015년 오늘에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줄세워 평가하고, 가르고, 나누어 차별하는 일입니다. 어찌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차별이 더욱 더 심화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쯤,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분 이야기입니다. 조지송, 조화순목사 이상으로 유명세를 탓던 이입니다. 이즈음에도 종종 뉴스에 이름이 오르락하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 결혼식 때 축복기도를 해주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올초에 그 이에 대한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분에게서 전해들은 것이지요. 꽤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그 이에게 물었답니다. “(목사로서) 이거 좀 과하지 않은가?”라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고요.

저는 목사가 최고 고가의 차를 타고 다닌다고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 차를 어떤 생각으로 타고 다니고, 그 차를 이용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따져 보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무엇보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은 2015년 한국인들 특히 60대 이후 세대들의 굳어진 생각을 대변해 주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을 고민없이(내가 느끼기에) 뱉어내셨을 이 어른이 두 분 조목사님들과 어깨 나란히 노동현장을 누비고 다니셨던 1970년대에는 분명 성서에 뜻을 두고 예언자적 사명을 다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성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예언자적 소명을 다할 때만 기록으로 남겨졌고, 그 소명을 다했을 땐 소리없이 사라졌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은 여전히 ‘송곳’같은 예언자들이 요구되는 시대랍니다. 어쩌면 1970년대나 2003년 보다 더욱 절실하게 말이지요.

내가 말하는 까닭

일주일에 한번씩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앓고 있는 아픔이 이어지는 한, 우리라도 그들을 잊지말고 그 아픔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나누어 보자고 만나는 친구들입니다.

모일 때마다 작은 주제를 정해놓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곤 합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왜 이민와 살면서 떠나온 모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미국에 온 햇수도 다르고 이제껏 살아온 경험들도 서로 다르거니와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고, 가정주부로 자녀교육에 열심인 친구도 있으니 저마다 다른 생각들이 있었답니다.

그날 모임은 일테면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들이 왜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전파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늘 그렇듯 모임이 끝나면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새롭게 눈뜨는 것들로해서 이 나이에 과한 즐거움을 얻는답니다.

photo_2015-09-27_17-42-22

그리고 지난 주말과 주초에 제가 경험한 일 때문에 이 글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SNS라는 신종 대화 도구들이 있습니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카톡, 텔레그램 등등이 그것들이지요. 저는 제 또래 남못지않게  이런 신종 도구들을 먼저 사용해보는 왈 얼리어답터에 속하는 편입니다. 모든지 처음 나왔다하면 찝적거려보기는 하는 편이랍니다. 그런데 즐기는 쪽으로 접어들면 완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쪽이랍니다.

일테면 저는 제 소유의 셀폰(핸드폰, 스마트폰 무어라고 부르던간에)이 없습니다. 그저 PC와tablet을 가지고 놀 뿐입니다. 전혀 불편함을 모르고 삽니다. 폰을 손이나 핸드백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사는 아내를 보면 이따금  “왜 저럴까?”하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저더러 “촌스럼의 극치로 산다”고 말한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랍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잉한다든가 페북에서 친구맺기를 신청한다든가, 댓글을 단다든가 하는 일에는 거의 쑥맥에 가까운 촌스러움이 있답니다. 그저 수줍게 제 이야기를 올리고 그것으로 족한 편이지요. 당연히 팔로윙이니 팔로워니, 친구숫자니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편이랍니다.

그러니 말이 사회관계망서비스 이용을 할 뿐이지 골방에서 제 이야기를 혼자 떠드는 수준에 불과한 진짜 촌스러움의 극치랍니다.

그런 제게 지난 주말과 주초에 댓글로 충고들을 남긴 이들이 있답니다. 한 친구는 지금이라도 만나면 “야~ 쨔샤!”하며 반길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또 다른 이는 전혀 모르는 어찌 하다보니 페북에서 만난 분입니다.

제 어릴 적 친구는 현재 한국에 살고, 페북에서 만난 분은 미국에 사시는 이입니다.

먼저 헤어져 만나지 거의 40년이 넘는 제 어릴적 친구의 충고는 “떠났으면 지금 사는 곳의 삶에 충실하길 바란다. 여긴 사는 우리들이 꾸려나갈 것이므로…”하는 것이였는데, 그 충고를 남긴 시간과 그 친구가 누리고 있었던 형편으로 미루어 오랜 옛 벗인 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와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사는 페북에서 알게된 이의 충고는 “차라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사뭇 성난 투의 말이었답니다.

두 사람 다 제가 페북에 올린 한국관련 이야기들에 대한 반응들이었지요.

그래 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랍니다.

먼저 최근에 제가 받은 이메일 몇 개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You’re welcome.  I’m glad you are here, and doing what you do, too. Very interesting article — research which reinforced my observations / perceptions in a few of the listed occupations. >

<Mr. Kim,

Thanks for your note. It reminded me of the African-American slaves, when the children and spouses were sold and they knew, chances were, they would not see each other again.  My Dad told me of stories where slaves who were able to escape to the north, who spent the rest of their days trying to find out where their kin lived and to reconnect.  Some stories ended right and others ended very sad.  To this day I cannot trace my family back to the slavery days.  However, my wife Mae can trace her descendants back to Nova Scotia, Canada and the slave ship that brought the family to Halifax from Jamestown, VA.

I always enjoy your notes: they make us think!>

<Mr. Kim,

I really like your note. I hope you are right about the move to the “HANGRY” Generation .  I see the “me first” in our national politics. Maybe that will change as the younger generation influences.>

<Dear Young Kim,

Thank you for another delightful letter from My Cleaners.  I agree the world is full of very diverse people with lots of differing attitudes and beliefs.  Your reminder to be open to others comes at a perfect time.  Well, any day would be the perfect time, wouldn’t it?

What transpires at your counter, everyday, is a wonderful example of openness and willingness to come into relationship.  One of my teachers would say that we move through a progression in knowing people.  We start as Strangers, move to Acquaintances, then to Rapport and finally into Relationship.

Strangers — we know nothing about each other

Acquaintances — we know some facts (name, address, phone number) about each other.

Rapport — we share similar feelings, are harmonious, we can get along

Relationship — we share and understand what to expect from each other, we share mutual expectations.

In my business (dental practice) we used to say, “Never treat a stranger.”

Of course, always started out as Strangers.  We easily became Acquaintances with a written intake form which shared the needed data.

Coming into Rapport was more time consuming, requiring some questions and answers, sharing of information, thoughts, feelings, opinions, experiences.

Relationship required a more complete discussion of what we each expected from each other.

Although not everyone wants to be in Relationship with every other person, or even with their healthcare providers, (or cleaners).  We all can easily move toward Rapport, starting with just a SMILE.  A welcoming, open attitude begins there and moves ahead with words and gestures.

Your “Letter From Your Cleaner” constantly reminds us what we can expect from you.  This is an open door for relationship building.  What you can expect from me, is to be paid for your service.  I also may provide a pleasant attitude, timely retrieval of my clothes, a sincere referral of a friend to your business.  Thus, we move into Relationship as we each fulfill our mutual expectations.  This is the basis of a trusting, respectful Relationship.

My wardrobe is improved by your cleaning service, and my life is improved by your letter and my spirit is lifted by our relationship.

Yours for a better world,>

제가 이 이민의 땅에서 이곳 사람들에게 받은 이런 종류의 메일은 책으로 엮는다면 족히 몇권 분량은 된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제가 이 미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의 모습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춰진 일면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저는 “괜찮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알려지고 싶은 욕망도 있거니와 저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들의 좋은 점들이 드러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민의 삶을 이제껏 가꾸어 나왔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제게 늘 자랑스러워야 할  대한민국이 손가락질 받고 우스개 노릇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정말 아니랍니다. 그래 한국과 한반도에 대해 제가 관심을 끊지 못하거니와 적극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 제가 종북이니 반국가적(반정부라는  말은 그래도 들을만 하답니다.)이니 하는 말을 듣게되면 솔직히 분노가 치민답니다.

사르트르는 <유대인>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혐오집단”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증오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이어갑니다 <만약 유럽의 부르조아들은 그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남겼던 때로부터 70년이 흘렀습니다.

중동에서는 유대인들이 옛날 유럽인 행세를 하고 있듯이, 같은 한인들끼리 한반도 안에서 그리고 이곳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혐오집단”과 “증오의 대상”을 찾는 못된 관습은 사라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이 땅에서 더욱더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를 끊을 수 없는 까닭이랍니다.

그들은 늘 무모했다. 역사앞에서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많은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꼴보수 매체에서부터 극좌빨 매체에 이르기까지, 매체 영향력의 크기를 떠나 심지어 저 같은 골방 샌님까지 입가진 자들이 던지는 소리들이 넘쳐납니다.

그 숱한 소리들을 가로지르는 큰줄기가 하나 있는 듯합니다. 바로 이념논쟁입니다. 친일, 종북논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명백한 허구입니다. 지금 왈 논쟁중인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볼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성과도 그렇거니와, 2015년을 살아가는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에게 ‘한국사’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싯점은 바로 1970년대였습니다. 이른바 유신시대였습니다. 지금 여왕놀이에 빠져있는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꼴보수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사관’이니 ‘민중사관’이니 하며 ‘종북사관’으로 연결지어 매도하는 역사학적 연구들이나 그 결과물들이 대중전파하게된 까닭은 바로 박정희 탓입니다.

왜냐하면 정통성이 매우 취약한 반민주적 정권이었던 탓이었습니다. 그 토양에서 ‘올바른 사관’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의 ‘역사 바로보기’가 시작되었던 것인데, 김영삼의 군불때기를 시발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그 문제적 ‘사관’이 일반화된 시각이 될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공포수준에 이른 세력들이 일대 반격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의 교과서 국정화 문제라는 것은 일개 샌님인 제 발상입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에 이르러 향수에 젖어 옛노래를 부르는 세력들이 기승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 유신의 시대를 돌아가신 리영희선생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리영희선생이 말한 세가지 부류의 지식인들 가운데 지난 40년 동안만 끊어서 본다면 아직도 제일부류들의 전성시대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허나 역사의 발전은 분명 제3부류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힘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답니다.

book리영희선생이 <우리의 상황과 실존적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누군가 말해야 한다.(삼민신서, 1984년)”의 서문중 일부입니다.

<1970년대의 이 나라는 이른바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의한 통치시대였다. 명분이야 무엇이었던간에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변칙적’형태였고, 따라서 그 시대는 이 나라 지식인에게 특수한 마음가짐(사상)과 행동(실천)을 요구했던 상황조건이었다.

돌이켜볼 때, 그 한 시기를 살은 지식인에게는 세 가지의 태도가 있었다.(일반 대중의 경우는 굳이 여기서 문제시하지 않는다.)

첫째는 상황에 순응 내지는 적극 호응하는 자세였다. 둘째는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태도였고,  셋째는 그 상황을 과제로 인식하여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상과 태도였다.>

1970년대의 끝무렵였던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이 그렇게 다가오리라고는 이들, 제일, 제이 부류의 사람들은 차마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1930, 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1945년 8월을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즈음 ‘역사논쟁’을 보면서, 이건 단지 1970년대 ‘공주놀음’하던 박근혜가 ‘여왕놀음’하는 2015년 버전이요, 그 주변에서 제 밥그릇 하나 챙기기에 혈안이 된 도적놈들의 날뜀, 그리고 눈먼 백성들의 완장놀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이런 놀음과 완장에 취한 이들 역시 도둑처럼 올 내일이 자기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취해있을 터이지요.

무모하게 역사 앞에서.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2015년 9월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지난 두어 달여 좀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인적인 삶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이어졌답니다.

엊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 허전함이란 어떤 간극(間隙)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어느 쪽에도 가까이 못하고 하루해를 보내고 난 뒤끝에 만난 느낌 같은 것었습니다.

일테면 지난 주간에 미국을 방문해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내 또는 한인들 사이에 뉴스가 되었던 인물들이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들입니다.

그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전함과 제 일상의 허전함 사이에는 별반 큰 거리나 간격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엊저녁 그런 생각의 끈을 잡게된 까닭은 화장실에 앉아 펴든 천상병 시인의 시 탓이었습니다. ‘새’라는 부제가 붙은 ‘그날은’이라는 시였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SAM_4693천상 시인이었던 천상병이 1967년에 있었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라는 관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 날들을 되살려 쓴 시입니다. 그가 떠난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그에게 ‘다리미(아이론)에 눌린 와이셔츠’같은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유엔에서 ‘새마을 운동’ 마케팅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허전함 – 그런 느낌들이 지난 두어달 간 저를 누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 모습에 연연해 뉴스들을 양산해 내는 이른바 언론과 종교에서 오는 허전함도 비슷한 것들이었고요.

지난달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이후 시진핑의 방미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외교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수꼴인Donald Trump 와  종북 좌빨인Bernie Sanders에 대한 갈채만큼이나 어지럽고 현란함에서 오는 허전함이랄 수도 있겠고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나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고민을 하거나 궁극으로는 허전함을 털고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모두의 꿈일 것이므로, 일테면 그것을 예수쟁이인 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삶의 허전함과 혼돈스러움을 느끼지 않거나 최소한 극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그리고 9월의 마지막 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생각을 꺼내 읽어 보는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국어판(2000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을 통해 세계 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식민지 총독의 통치 아래서 부자들과 대지주들은 토지 매입과 임대, 대부업을 통해 전례 없는 재물을 축적하는 마당에, 성전의 제사장들과 학자들은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 질병을 외면한 채, 그 원인이 개인적 죄에있다고 가르치며, 브로커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가 물었던 질문은 “유태인들의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한 질문이며,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 종교문화적 소외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실적합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2015년 오늘을 사는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브로커들이 판 치는 세상”에서 “그 브로커들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싸우다” 마침내 “브로커 없는 나라를 꿈꾸며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든 이”가 예수라는 증언을 입증하노라 애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의미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때, 예수가 ‘전적으로 하나님’(wholly God)이며 ‘전적으로 인간’(wholly man)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중보자 없이 임재하신 분(unmediated presence of the divine to the human)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절절히 간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산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저는 “아니”라는 말인 동시에, 제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다(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기에 따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날에….

털며……

2015년 추석 – 이야기 셋(秋夕三題)

1.

이민생활에서 한국명절은 그저 추억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대도시는 그래도 명절 기분을 좀 맛보는 곳들도 있겠습니다만, 딱히 작정하고 만나지 않으면 한인들과 맞부딛히고 살지 않는 시골에서는 ‘오늘이 추석?’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랍니다.

다행히 친,처가 노부모님들이 모두 가까이 사시는 덕에 한국 명절이면 인사는 드리고 산답니다. 더더군다나 오늘처럼 일요일이나 여기 휴일이 명절과 겹치는 날이면 당연히 가족들이 모여 밥상을 나누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이런 저런 일들로 그저 ‘오늘이 추석이라네요.’라는 인사로 그냥 지나간답니다.

못내 송구스런 생각에 최근 수년래 제 취미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요리에 나서보았답니다. 엊저녁에 손질해 둔 쇠갈비와 사골들로 갈비찜과 사골국을 만들어 보았답니다.

오후에 아버지 어머니와 장인 장모를 찾아 갈비찜과 사골국으로 우리 내외 재롱 잠시 떨다가 돌아왔지요.

제 아무리 백세 시대가 눈 앞이라 하여도 제가 이미 환갑을 지나고보니 부모님들을 뵙고 돌아오는 길,  ‘내년 추석도…’라는 기도는 제법 절실한 것이랍니다.

2.

지난 일년 사이에 만난 벗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알던 친구들도 있지만 지난 일년 사이에 새롭게 만난 벗들과 함께 새로움을 느낀답니다.

딱히 단체라고 이름 지을 수는 없지만 그저 우리끼리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 사람들’, 약칭으로는 ‘필라 세사모’라고 부르는 모임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랍니다.

일테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공명’하려고 애쓰는 이들의 모습 – 바로 제가 배우는 점들이랍니다.

지난 주간 전세계에 으뜸 뉴스들로 퍼진 것들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미 소식입니다. 교황의 방미 일정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가정 대회’였습니다.

교황의 필라 방문 일정에 맞추어 오래 전부터 이들이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답니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베풀던 교황의 행렬을 되새기며, 2015년 오늘도 ‘여전히 아플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소리를 대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백만에 가까운 인파들 속에서 ‘SEWOL’이라는 피켓을 든 채 열명도 안되는 ‘필라 세사모’ 회원들의 기도와 외침은 교황의 행렬 속에서 모기소리보다도 작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몸짓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쯤, 제 믿음이랍니다.

제게 배움을 주는 이들의 몸짓이 비록 교황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제가 믿는 신 곧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미 들었다는 믿음이랍니다.

이 믿음이 가족을 잃고 두번 째 맞는 추석을 보내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photo_2015-09-27_17-41-53

3.

주일입니다. 예수쟁이이므로 성서를 펼쳐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을 웅변해 주는 성경책은 단연 창세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고백했던 신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6장과 21장에는 비주류였던 하갈의 소리를 듣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든간에(유태, 이슬람, 카톨릭, 개신교)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외치는 모든 아픈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시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추석 – 우리들이 조상을 찾는 까닭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기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 무릇 역사란  ‘그 들음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는 일일겝니다.

photo_2015-09-27_17-42-14

기도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 1181- 1226. 10. 3.)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명으로 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중입니다.

그의 방미 일정이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로 이어지는 까닭에 제가 사는 곳 델라웨어에도 교황에 대한 뉴스가 연일 이어지고 있답니다.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정말 인간적인 성인이었듯, 그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가 내딛는 곳, 어디서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이가 제가 사는 곳에서 인근에 있는 필라델피아에 오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주 적은 수의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한인들이 그이의 필라 방문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된 관심인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함께 기억한다는 외침으로 그 이를 맞이하자는 것이랍니다. 

untitled

지난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었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인 세월호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의 신음이 2015년 9월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쳐보자는 것이랍니다. 이들의 외침에는 다른 아무 까닭이 없답니다. 

단지 약 천년전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썻다는 기도문을 이루고자하는 바램뿐이랍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