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라는 이름에게

Daylight saving time 해제로 시간이 바뀐 뒤, 밤이 제법 길어졌다. 잠시 눈을 붙였다 떳더니 어느새 밤이다. 바깥 날씨가 쌀쌀한지 이따금 돌아가는 히터소리 외엔 조용하니 집안이 적막하다.

서울서 온 큰처남과 함께 장모를 모시고 병원에 간 아내에게선 아직 전화가 없다. 신혼여행 떠난 아들내외나 오라비 결혼식에 함께하고 제 일터로 다시 돌아간 딸이나 내게 전화 줄 일은 만무할 터, 적막함 속에서 기다리는 것은 장모의 입원소식이다.

어제 일이다. 결혼 피로연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와 전화를 드렸을 때만 하여도 목소리만은 또랑하셨다. “많이 섭섭하고, 많이 미안하고… 내가 결혼식엘 못가리라곤 정말 생각 못했는데….”

아들녀석은 태어나 걸을 때까지 거의 장모 손에서 컸고, 큰 외삼촌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다. 어제 오늘, 큰 처남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암과 씨름하며 잘 버텨오시던 장모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요 며칠 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어제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식장은 지은지 오래된 교회 건물이었다. 식장에 들어선 장인과 어머니, 아버지는 거의 동시에 화장실을 찾으셨었다. 정말 오래된 건물이었다. 화장실은 가파른 계단을 두번 꺽고 올라가야만 하는 이층에 놓여 있었다. 나는 순서대로 한분씩 부축하여 그 계단을 올랐다. 어머니, 장인, 아버지 순서였다. 그 순서대로 다시 부축하여 계단을 내려왔다.

지팡이에 의지하시는 장인과 아버지를 부축하여 오르내릴 때보다 어머니는 한결 수월하였다. 내 염려는 어머니가 가장 컸었는데 의외로 어머니는 아무 말씀없이 내 팔과 손을 잡고 꼿꼿하게 그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셨다.

어제 밤 모든 잔치를 끝내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었다. “세 분을 부축하며 계단을 오르내리고 나니, 그래도 어머니가 아직 제일 나으신 것 같아.” 아내가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며 내게 해 준 말이다.

“아니, 내 생각은 달라. 어머님는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난 아직 이만큼 건강하니까 나에 대한 염려랑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그러셨던거야. 어머님이 화장실 다녀오셔서 내게 뭐라셨는지 알아? ‘아이고 얘야, 두 다리와 두 팔이 다  떨리는구나!’ 하셨다니까.”

그 아내의 말을 생각하며, 다시 큰 처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무렴 아들이 곁에 있는데…

또 다시 어제의 결혼식장 이야기 하나.

분명 엊그제 있었던 결혼식 예행연습 때는 없었던 순서였다. 결혼 예식 거의 마지막에 있었던 목사님의 기도 순서였다. 분명 예행연습 때는 목사님의 기도 순서 였을 뿐이였다.

그 순서에서 Manuel Ortiz목사님은 신랑 신부인 두 아이들을, 아이들이 켜놓은 촛불 제단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는, 예식에 함께했던 네 분 목사님들과 함께 손들을 두 아이들에게 얹어 기도를 시작하라고 하셨다.

나는 당연히 아이들에게 손을 얹은 목사님들께서 돌아가며 기도를 하시려니 생각했었지만 Ortiz목사님은 신랑 신부에게 기도를 하라고 명하셨다.  아들녀석과 이젠 내 며늘아이가 된 Rondaya가 드린 기도는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  그리고 이어진 배성호목사님의 기도 “아이들이 드린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예식이 끝난 후, 나는 아내와 내기를 하였다. ‘아이들의 기도는 우리가 몰랐을 뿐 짜여진 것이였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고, ‘Ortiz목사님의 생각으로 즉석에서 하나님께 드린 아이들의 기도였다’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었다.

결과는 나의 완패였다.

무릇 아들은 허당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기도를 시킨 Ortiz목사님도, 아이들의 기도를 하늘과 이어 준 배성호 목사님도 모두 아들들인 것을…

나와 내 아들 역시.

무릇 아들이라는 이름은 어머니들을 위해 있는 것일 수도.

사랑한다

집안 잔치로 두루 번잡한 아침입니다. 늘 그렇듯 집안 일의 분주함은 대개 아내 몫입니다.

이른 아침에 이메일함에 들어온 메일 하나를 다시 읽습니다.

필라 연대집회 시간 : 11월 12일 4:00 pm 챌튼햄 H-Mart 앞 사거리 (인원 집중을 위해 집회를 오후 4시로 통일했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늦은 공지와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25명이 넘는 필라인들이 모여 동포간담회를 빛내주었습니다.

무당에 의해 헌법이 유린되고 온갖 부정과 탐욕으로 점철된 현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고자 굳은 결의를 다졌습니다.

지금 현재 광화문 광장에는 100만의 인파가 모여 외치고 있습니다.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진 박근혜 정권의 타도를 넘어서 약자가 억압받고 더욱 열악한 경쟁 속으로 내몰리는 이 부조리한 현실을 성토하고 깨부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 중략 –

우리는 현재 반드시 해야할 하나의 과업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권력에 맞서 당당하게 정의와 진리를 쟁취해가는 그 영광스런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 민중총궐기 연대집회는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기본적인 피켓은 준비되어 있으나 개인적으로 피켓을 만들어오셔도 됩니다.

필라 세사모는 시국성명 및 11월 12일 민중총궐대회와 함께 하겠습니다.

엊저녁에 있었던 필라동포 간담회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새겨봅니다.

그리고 나는 왜 오늘 아침 광화문 소식에만 꽂혀있는지? 떠나온지 30년, 아이들은 이미 미국인이 되어 트럼프만 어이없어 하는데…

그러다 손에 쥔 시 한 편. 정호승님의 <사랑한다>입니다.

그래, 끝내 잊지 못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해야만 하는  내 부모와 아이들처럼…

<사랑한다>

  •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주일아침, 맹자이제(孟子二題)

인(仁)에 대하여

孟子曰:三代之得天下也以仁, 其失天下也以不仁. 國之所以廢興存亡者亦然. 天子不仁, 不保四海; 諸侯不仁, 不保社稷; 卿大夫不仁, 不保宗廟; 士庶人不仁, 不保四體. 今惡死亡而樂不仁, 是猶惡醉而強酒.

<맹자왈 : 삼대지득천하야이인, 기실천하야이불인, 국지소이폐흥존망자역연, 천자불인, 불보사해; 제후불인, 불보사직; 경대부불인, 불보종묘; 사서인불인, 불보사체. 금악사망이락불인, 시유악취이강주. >

맹자가 말했다. :  3대(옛날에 있었던 하夏 은殷 주周 세나라)가 천하를 얻은 것은 인(仁 : 어짐)이 있었기  때문이요,  삼대가 천하를 잃은 것은 인(仁)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폐하고 흉하고 지탱하고 망하는 것도 다 그와 마찬가지 이치이다.

임금이 어질지 못하면  사람사는 세상을 이룰 수 없고, 권력을 쥔 자들이 어질지 아니하면 나라를 보존할 수가 없고, 관리들이 어질지 아니하면 정부를 보존할 수 없으며, 지식인들과 서민들이 어질지 아니하면 몸(사람)을 보존할 수 없는 법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죽기를 싫어하면서도 인하지 않음을 즐기는(이리 독하게 사는 까닭은)것은 마치 취하기를 싫어하면서 독주를 입에 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앙<얼(孼)>에 대하여

有孺子歌曰:”滄浪之水清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孔子曰:”小子聽之! 清斯濯纓, 濁斯濯足矣, 自取之也.” 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家必自毀,而後人毀之; 國必自伐, 而後人伐之. <太甲>曰:”天作孽, 猶可違; 自作孽,不可活.”此之謂也.

유유자가왈 :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아영: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아족.” 공자왈 : “소자청지! 청사탁영, 탁사탁족의, 자취지야.” 부인필자모, 연후인모지; 가필자훼, 이후인훼지; 국필자벌, 이후인벌지, <태갑>왈 : “천작얼, 유가위: 자작얼, 불가활.”차지위야.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휴에 다른 나라를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 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신영복선생님 번역에서)

가을, 주일아침 그리고 생명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 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 – 성서 마가복음 3장 1 – 6절, 공동번역

지난 20일 노스 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에서 일어났던 경찰관에 의한 용의자 피살사건 현장 녹화영상이 공개되었다. 경찰관들이 착용하고 있었던 몸부착 카메라(officer’s body camera)에 찍힌 영상이다. 영상으로 흑인 용의자가 총을 손에 들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경찰관들이 쏜 총소리임에 분명한 네발의 총성과 마치 토끼몰이하듯  포위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측은 용의자의 차량에서 용의자의 지문과 DNA를 확인할 수 있는 권총과 마리화나를 증거로 용의자가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가 경찰관에 의해 피살 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위대들을 무마시키기에는 어림없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선생이 끝내 숨졌다는 소식이다.

%eb%b0%b1%eb%82%a8%ea%b8%b0%ec%84%a0%ec%83%9d백선생을 치료해온 서울대병원은 돌아가신 백선생의 사인은 신장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는 증세인 급성신부전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경찰측은 오래전부터 백선생이 쓰러져 누우신 일과 물대포 살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지난 9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이른바 ‘백남기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사고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강신명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서 해야 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명백한 것은 두 사건 모두 법질서를 내세운 측이 힘(총과 물대포)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간 사건이다. 마흔 세살의 흑인 Keith Lamont Scott은 법질서를 집행하는 권력인 경찰이 판단하기에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져 목숨을 잃은 경우이고, 일흔살 농민 백남기선생은 “대통령의 공약인 쌀값 21만원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공공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권력의 최첨병인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숨진 것이다.

오래전에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죽이는 법질서를 파괴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예수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질서를 앞세운 이들에게 던졌던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예수의 물음은 ‘법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무릇 법이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다는 것이며, 법이 사람들의 삶을 보호할 때 그 존재 의미가 있는 일일 뿐 그것에 반하여 사람들을 상하게하고 죽게하는 법은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외형적이고 형식주의를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사회통념과는 별개로, 적어도 예수쟁이라면 성서를 삶의 지표로 삼는 신앙인이라면 “법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이 명제를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서 있었던 대정부질문 답변에 나선 황교안총리가 교언영색의 화술로 법질서를 앞세워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을 후비고 파며 또 다른 죽음을 안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황총리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포장되어 소개되는 오늘의 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뚝 떨어진 수은주 따라 성큼 다가선 가을날 주일 아침, 떨어진 낙엽에서 다시 솟아날 생명을 보았던 예수와 숱한 예수쟁이들을 그리고 생각하며…

다섯번째 필라 세사모 소식지

여름 휴가차 모국 방문을 했던 필라 세사모 회원들이 유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와 전하는 소식 등을 실은 다섯번째 필라 세사모 소식지.

[gview file=”http://www.for1950s.com/wp-content/uploads/2016/09/philasewol-vol.5.pdf”]

세월호 참사로 딸 예은이를 잃은 유경근씨의 노모 이세자씨는 감리교단의 장로를 맡고 있는데 세월호참사 직전에 교단을 대표해서 한국여장로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이세자씨 부부는 모두 장로를 맡아 온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세월호참사 이후 교인들과 소통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예은이 할머니 이세자씨가 교인들과 소통에서 겪는 어려움과 새롭게 열린 신앙의 눈을 이야기한 내용이다.

<유가족들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70~80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교회를 못 갑니다. 그 이유가 대개 목사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사님들이 유가족들에게 “아이들이 천국에 갔으니 정신 차리고 제 자리에 돌아와야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유가족들의 마음에는 비수가 꽂힙니다. 교인들은 또 “손주가 이제 천국 갔으니 좋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나도 아이들이 천국 가 있는 거 알아”라고 말은 합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그들이 치유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교회를 더 못 갔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더 아파야 하니까요. 그래서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렇게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냐고?”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소경의 죄도 아니라고 하시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데, 그 말은 정말 잘 사용해야 합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은 손주 얘기도 듣고, 남편 얘기도 듣고, 지나가는 학생들 말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솔로몬도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똑똑하게 말하는 게 지혜가 아닙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들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생각을 한 다음, 말은 한참 있다가 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게 해 준 예은이에게 고맙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꼴통 같았던 이 할머니의 눈을 열어준 걸 생각하면 그 아이에게 고맙기만 합니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저는 끝까지 제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가족

<시간의 향기> – 삶에 있어서 머무름, 기다림, 느긋함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생각이 담긴 책이름이다.

‘사색적인 삶이 풍요롭다.’라는 명제는 멋있다. 그러나  ‘사색적인 삶’이 시간에 늘 쫓겨 살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속물인 내겐 애초 가당치 않는 전제이므로 ‘풍요’ 역시 내가 누릴 몫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사색적인 삶’이란 진짜 가당치 않은 지적 사치일 뿐이다.

딸아이가 모처럼 주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 기다리는 버스가 한시간 반여 늦게 도착하였다. 계획에 없이 딸아이와 함께 했던 한 시간 반 동안의 시간은 내게 자유를 일깨워 주었다. 아이의 직장생활과 향후 계획,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들을 묻고 들으며 버스가 늦어지는 시간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와 아내는 때론 아주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하다. 둘 사이에 도대체 닮은 게 무엇이 있을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니와 너무 똑같아 깜짝 놀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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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 frei, 평화- Friede, 친구- 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에서 하는 말이다.

내가 딸아이가 타고 갈 버스가 늦게 도착한 것을 감사하며 자유를 생각한 까닭이다.

아직도 성실하고 깨끗하기를…

며칠 전 모처럼 만난 지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한국에서 새로 임명된 장관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새로 임명된 그 장관과 지인은 동향이었으며, 장관이 한때 미국에서 지낼 때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지인이 내게 했던 말이다.

“나는 그 친구를 아주 성실하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공직자으로써 자기 일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기도 했고요. 내가 뭐 한국 떠나온지 40여년인데 그쪽 뉴스 어디 그렇게 잘 보나요? 낯익은 이름이 뉴스에 나오길래 좀 눈여겨 보았지요. 처음엔 참 잘됬다 싶었어요. 그만한 사람이면 장관 한번 할만하지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허 근데…. 그거 아니더구먼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었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니면 사람이 많이 바뀐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였고요. 아무튼 그 친구에 대한 뉴스들을 주욱 보면서 한국사회 이른바 엘리트계층이 참 많이 상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사는 동네 한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 특히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화제가 그쪽으로 달려가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경험상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이나 호남 출신들이 주를 이루는 모임에서 한국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그날 하루 기분을 잡치는 일이 되고 만다. 출신지역 뿐만 아니라, 언제쯤 이민을 왔는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들어보나마나 그들이 하려는 말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여 가깝게 지낼수록 한국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 좋고 착하며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다.

여기 살다보면 한국에서 연수나 연구차 또는 파견근무 등등으로 일이년 정도 단기 거주를 하거나 수년 동안 장기거주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 가운데 회사원들도 있지만 주로 공무원들이나 교수들이 많다.

내 기억 속에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많은 얼굴들이 있다. 생각해 떠올릴수록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착하고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종종 한국 뉴스에 오르내리던 인물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며칠전 지인이 이야기했던 신임장관과 같은 인물의 모습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던 것이었다. 그 때마다 나 역시 지인처럼 혀를 차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인이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대변한다고는 결코 생각치 않는다. 그들보다 많은 이들이, 아니 그들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며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공직이나 교직에서 땀흘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휴일 그리고 좌파

노동절 휴일도 저물었다.

어제 농사짓는 벗이 땡볕에서 땀 흘려 키운 열무 몇 단을 보내왔다. 그의 노동을 생각하며 열무김치를 담갔다. 실히 병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농사짓는 친구 덕에 이젠 김치도 곧잘 담게 되었다.

얼마전에 만두 먹으러 중국인촌에 갔다가 사서, 다듬어 얼려놓은 오리고기를 꺼내어 주물럭구이를 만들었다. 기름기가 노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고기만 저며 했더니 양이 참 적었다.

이즈음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드신 아버지는 “이게 다 6,25 때 박힌 수류탄 파편 탓”이라며 혀를 차신다. 내일 MRI 찍기 위해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암기운이 다 가신  듯  가신 듯 하면서도, 잊힐만 하면 문제가 있다는 의사 소견에 움찔하시는 장모도 내일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양쪽 노인들 몫으로 조금씩 떼어 놓고보니 우리 부부 양념에 비벼 한끼 식사로 딱 적합하였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저녁나절 묵자(墨子)를 읽는다. 묵자를 읽는다기 보다는 문익환과 신영복을 읽는다가 맞겠다. 그 분들이 읽은 묵자를 내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나 예수나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눈으로 비추어 보면, 아니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극단에 서 있는 좌파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묵자의 가르침은 예수에 닿아 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선언은 이미 혁명일 것이다. 입으로 말고 몸으로 서로가 실천하는 세상은 혁명 이후에나 가능할 것 아닐까? 극좌에 있는.

휴일 뉴스들은 나를 좌파로 몬다. 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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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Common Sense)이 혁명으로

한 두어 주 전에 Jury duty(배심 의무) 로 법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날 배심원으로 소집된 사람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 다섯 가지를 명심하십시요. 첫째 공정해야 합니다. 둘째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셋째 배심 사건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언론과 접촉 해서는 안됩니다. 다섯째 상식적으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날 교육자는 마지막 항목인 상식적으로 판단하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법정은 배심원 여러분들에게 전문적인 법률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요구되는 판단 기준은 바로 상식입니다.”

상식이란 것이 어느 곳, 어느 때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상식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 판단이란 비단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살아가는 모든 일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식이란 자기 자신 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함께 생각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걸어다니는 혁명가”로도 불리우는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은 그의 별명과는 다르게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만일 그의 저서 “상식”이 없었다면 역사상 미국독립은 없었거나 늦어졌거나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임으로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말했던 상식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바로 민주공화국이 옳다는 것이다. 그 시대 그가 말한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백인 남성으로 국한된 지극히 편협한 상식일지라도 그것은 혁명이었다. 민(民)이 주인되는 세상이 상식이라고 선언한 까닭이다.

그가 “상식”에서 말하는 말하는 사회(society)와 정부(government)를 곱씹다보면 민이 해야할 일들이 저절로 들어난다. 하여 상식이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회를 만든 것은 우리의 필요이고, 정부를 만든 것은 우리의 악함이다. 사회는 우리의 관심을 통합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정부는 우리의 악함을 억제함으로써 소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킨다. 전자는 소통을 촉진하고, 후자는 구분을 만들어낸다. 전자는 후원하고, 후자는 징벌한다.

사회는 어떤 것이라도 축복이지만, 정부는 최고의 것이라도 필요악일 따름이다. 최악은 참을 수 없는 정부다. 정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통을 겪을 경우 우리는 차라리 정부가 없는 나라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수단을 우리 자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불행은 더욱 커진다.

Society is produced by our wants, and government by our wickedness; the former promotes our happiness positively by uniting our affections, the latter negatively by restraining our vices. The one encourages intercourse, the other creates distinctions. The first a patron, the last a punisher.

Society in every state is a blessing, but government even in its best state is but a necessary evil; in its worst state an intolerable one; for when we suffer, or are exposed to the same miseries by a government, which we might expect in a country without government, our calamity is heightened by reflecting that we furnish the means by which we suffer.>

그리고 2016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정부를 향해 제발 “상식을 지켜 달라”며 단식으로 곡기를 끊은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할 수 있는 건 정말로 다 해봤어요. 이제 진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남지 않아 단식을 합니다. 오늘도 피가 마르고, 빼가 녹는 유가족들이 더는 거리에 나서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아들 재욱 군을 잃은 홍영미씨가 단식농성을 시작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이날 홍영미씨는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도입 등을 요구하며 지난달 17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간 유경근 집행위원장과 장훈 진상규명분과장과 함께 동조 릴레이 단식농성에 나선 것이었다.

“아직도 제대로 울어보지 못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유가족들을 응원하며 함께 합니다.”

단식이 상식이 되어버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필라델피아에서 동조 릴레이 단식을 시작하며 누군가 던진 말이다. 그렇게 하루씩 이어가며 필라델피아에서도 단식이 이어지고 있다.

김태형“살아생전 처음으로 단식을 해 보았습니다. 밥 먹는걸 지상 최대의 행복으로 알고 지금도 모든 소득을 먹는 것에 투자하는 저에게 단식은 가장 힘겨운 과제였는지도 모릅니다. – 중략 – 2년이 넘게 이런 고통에 힘겨워 하시는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생각해 봅니다. 가족과의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도 모자라 여전히 진실보다는 온갖 말도 안되는 비난과 거짓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부디 하루라도 빨리 진실규명이 이루어져 세월호 유가족 모두가 이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길 희망합니다. 그 날이 올때까지 응원과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권오달

“지금의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은 세상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힘을 솟아나게 하고 있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은 달라져야 하고 바꿔져야 한다. 유가족들의 사생결단의 의지가 있고, 지지, 동조, 연대하는시민과 사회 단체들과 해외동포들도 적지 않다. 비록 하루이며 작은 힘이지만 동조, 지지, 연대하면서 커다란 물결로 변화 발전해 나간다면 안전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어디서나 만들어 갈 것이다.”

이종국

상식이 혁명이 되어, 언제 어디서건 얼굴색깔 구분없이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별없이 모든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와 정부를 선택해 만들고 세우는 세상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