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황구(黃狗)

세탁소 – 4

내가 황구(黃狗)라는 별칭을 건네어준 벗이 있었다. 우리 어렸을 때 흔했던 강아지 이름 누렁이다. 그는 사내 중에 사내였다. 투박하게 간단한 말 툭 던지고 한 걸음에 직진하는 그런 사내로 알았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두 살 위였던 그와 나는 스물 초중반의 나이였고, 신문로 새문안 다방에서였다. 나는 휴가를 나온 졸병이었고, 그는 내일모레면 곧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청년이었다. 이민을 간 내 누나와 함께 일하는 후배하고 결혼한 그가 이제 아내를 만나 이민생활을 시작하려는 길이었다. 어머니의 부탁이었는지 누나의 부탁이었는지 아님 누나의 후배 부탁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만 무언가를 전하고 받으려고 그를 만났었다. 황 씨였던 그에 대한 내 첫인상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를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세상 모두가 그의 손아귀에 놓인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나 다시 만난 곳은 델라웨어였다. 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진짜 그는 이미 다 가진 듯했다. 그 씩씩함이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민 후에 비록 한 교회를 다녔지만 그저 멀찍이 그런 느낌으로만 인사를 하며 지냈다. 나는 세탁소를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민 초기라고 생각할 때였고, 그는 이른 결혼으로 아이들도 컸고 삶도 안정적인 기반에 놓인, 우리들의 첫 만남이 있었을 때의 그의 꿈을 이룬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마 2000년이 다다른 그 어간이었을 것이다. 세탁소 문을 막 연 이른 아침이었다. 그가 내 세탁소에 들어서며 편지 한 통을 건네며 하던 말이었다. “김형, 내가 오늘 어디 좀 갔다가 오려는데…  김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알잖수… 나 말 짧은 거… 그냥 내 이야기 몇 자 적어봤수.”

나이 오십을 코 앞에 두고 앞 머리가 휑해진 그의 편지를 뜯어본 것은 그가 떠난 직후였다. 제법 긴 편지글이었다. 그의 이민 이후에 대한 삶의 기록이었는데 그 시간에 비해서는 글은 정말 짧았지만 그의 생각은 다 담긴 글이었다. 그 편지 글의 시작이었다. “김형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어쩌면 나는 워싱톤 거리를 달리고 있을 겁니다…”

그랬다, 그는 마라톤 첫 완주에 도전하러 가는 길이었다. 편지는 왜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왜 꼭 완주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자신의 지난날들과 현실 그리고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 그는 완주를 했다. 그리고 그 뒤에도 보스턴 등 네 번의 마라톤 대회 완주를 이어갔다. 나는 답장을 썼었다. 내 편지의 제목이었다 “달려라 황구!”

그가 내게 건넸던 편지에 담긴 이야기의 깊은 속 이야기는 외로움이었다. 이민생활의 외로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차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하늘나라로 향해 달려간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다.

내 속에 헛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가 달리기를 시작했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내 안에서는 무엇인가가 막 달리기 시작했을 무렵에 그의 달리기는 멈추었었다.


새로운 천년이 곧 시작된다고 세상이 시끄러울 때였다. 세탁소에 대한 정부 규제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세탁할 때 쓰던 솔벤트용제가 환경과 인체를 해하는 오염제라는 판단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각종 규제 법안들이 새로 생기고 그 법규를 준수해야 할 여러 규칙들이 생겨났다. 그 무렵 동네에는 약 60여 명의 한인 세탁인들이 있었다. 이런 규제들이 마구 밀려올 때 처음으로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의견들이 자구책으로 세탁협회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첫 깃발을 들게 된 것이 나였다. 그 역시 우연이었다. 이민 후 내 헛바람의 시작이었고, 알지 못했던 숱한 외로움들을 만나게 된 첫걸음이었다. 모두 아내와 어머니의 핀잔을 부른 시작이었지만, 훗날 여행의 동무가 된 벗을 만나게 된 내게는 축복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그때도 혀를 차셨었다. ‘이 눔이 또 도졌구나…  그예 못 버리는구나… 그 눔에 먼 산 바라보기를… 쯔쯔쯔쯔……”

서로 말이 달라 문제가 아니고…

세탁소 – 3

1980대 후반부터 2000년도에 이르기까지 십 수년 동안의 한국에 대한 내 기억 공간은 거의 하얀 백지다. 우선 가까이 신문과 방송이 없었다. 한국 소식을 만나기 위해 이웃 도시인 필라델피아나 볼티모어, 멀리는 뉴욕이나 워싱톤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보다 내가 이민(移民)이라는 말에 매달려 살았던 까닭이 더 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세탁소 일에 취해 살았었다. 세탁소가 하나에서 둘로, 셋, 넷으로 수가 늘어갔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내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며 도와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흑황홍백(黑黃紅白), 미국,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중국, 베트남, 라오스, 인도, 몽고 그리고 한국 등 여러 나라 출신들과 함께 해오며 여기까지 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얼굴이 하나 있다. 중국 상해 출신으로 거의 십 년 동안 함께 했던 왕 선생 내외다. 우리 아이들이 왕 씨 아저씨라고 불렀던 왕성충(王成忠) 선생은 나보다 열 살이 많았는데, 이곳으로 유학 온 아들내외 뒤바라지를 하러 왔다가 오랜 시간 함께 하게 되었다. 진시황과 모택동을 위대한 위인으로 내세우는 그는 동시대의 전형적인 중국인이었다. 왕 선생 내외는 말 그대로 열과 성을 다해 내 가게 일을 도와주었다.

다만 한 가지, 처음 만날 때부터 헤어지는 날까지 영어 한마디를 하지 못하였는데,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초 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그 고집이 그대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우리 사이의 대화는 알량한 내 한자능력에 의지한 필담으로 나누었는데, 다행이었던 것은 왕 선생의 눈치가 워낙 빨라서 내가 쓴 엉성한 한자 몇 개로 내 의중을 정확히 꿰곤 하였다.

왕 선생 아들이 박사학위를 마치고 직장을 얻어 코네티컷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아들을 안 따라가고, 계속 내 세탁소에서 일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난감했던 일도 있었다. 결국 코네티컷으로 떠나기 전에 왕 선생은 이사 가면 그 동네에 있는 한국인 세탁소들을 찾아가 일을 구하겠노라며 내게 한글 추천서를 써 달라고 했다. 일자리를 구했다는 연락과 함께 왕 선생 가족의 초대로 코네티컷 풍광 좋은 그들 가족 집에서 우리 가족들이 하루 밤을 지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상해에 일자리가 생겨 귀국한다며 온 가족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년 후, 생각지도 못한 왕 선생 아들이 내 세탁소를 찾아와 아내와 내 사진을 찍어갔다. 상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왕 선생 아들이 미국에 출장을 오게 되자 왕 선생이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더란다. 아무리 바빠도 꼭 델라웨어 세탁소에 들려 내 소식을 듣고 오라고 말이다.

그때 그 아들이 내게 건넸던 물음이다. “제 아버지가 엄청 고집 세신 분이고, 김 선생도 비할 수 없이 만만찮은 분인데… 어떻게 그 긴 시간 잘들 지내셨는지…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글쎄…. 그저 서로 어려웠던 비슷한 시대를 살아와서가 아닐는지….”라는 대답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아니요, 아니오.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두 분이 서로 완전히 통하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많이 생각해 본 거랍니다. 두 분이 말이 잘 통했다면 아마 그렇게까진 오래 못 갔을 거고요. 오늘 제가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를 했고 내게는 큰 가르침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엔 멕시코계 다음으로 한국인들이 많았었는데 거의 다 껄끄러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특히 말이 정말 잘 통해야 마땅할 기독교인들과 관계가 그랬던 것도 같다. 그 가운데 두 분이 목사님들이 되셨고 대개가 신실한 교인들이었다.

그랬다. 무릇 사람관계는 언어가 문제가 아니었다.  

돌이킬수록 세탁소에서 나를 도와준 모든 이들이 내 삶의 선생들이었다. 아내는 교회생활과 주말학교인 한국학교 선생일에 매우 열심이었다. 특히 교회 주일학교 선생과 성가대원, 한때는 성가대 지휘자와 아동 성가대 지휘자로 교회생활이 삶의 즐거움이었다. 올해로 서른일곱 해째 이어지고 있는 아내의 한국학교 선생 일은 어쩌면 아내의 이민생활을 지탱케 해 준 버팀목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헛바람 들기 전 그 시절에 내 우주는 오직 세탁소였다.

아빤 아직도 아빠집에 있어?

세탁소 – 2

다른 곳들은 모르겠다만, 이즈음 내가 사는 동네에서 세탁소를 비롯한 구멍가게를 하는 한국계들은 드물다. 한 때는 세탁소와 함께 생필품들을 파는 코너 스토어, 야채, 과일, 운동화, 잡화, 과일상, 튀김가게, 아침 식당 등등 동네 구멍가게들 상당수가 한인들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즈음 그네들 누구라도 한두 번 겪였음직한 일들이다.

딸아이가 유치원,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오 학년 때의 일이다. 작은 규모의 사립학교인 크리스천 스쿨이었다. 동양계로는 우리 아이들뿐이었다. 세탁소에서 한창 일할 시간이었는데 학교에서 ‘너희 아이들을 당장 데려가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학생들 건강검사를 하던 중 딸아이 머릿속에 이가 있더란다. 오빠도 한 집에서 사니 둘 다 당장 데려가라는 독촉이었다. 아내는 기겁을 했다. “얘들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 길로 학교로 간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그런지 아쇼! 얘네들이 이하고 살갗 비듬하고 구별을 못해요.” 그렇게 한참이 시간이 흐른 후 아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세탁소로 들어섰다. “애들은?” 묻는 내게 던진 아내의 대답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지”

두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아들은 동생의 유치원생 낮잠용 이불을 품은 채 학교 건물 입구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단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딸아이의 머릿속 살비듬을 이라고 우기는 간호선생에게 ‘곧 다녀오마’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의사에게로 달려갔던 아내는, 이가 아니라 살비듬이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들고 담임선생들과 간호선생을 향해 말했단다. ‘사과하시라’고. 그들은 이내 사과를 했는데, 아내가 다시 재촉했단다. 그런 사과 말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반에 들어가서 학생들 앞에서 사과를 하라”라고. 초등학교를 공립학교로 옮긴 딸아이는 내내 매우 우수하였다.

어느 해던가 폴란드계 사람들의 축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음식을 먹으며 그네들이 추는 춤을 즐기고 있는데,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사내 하나가 우리들 쪽으로 다가와 고함을 질렀다. “꺼져 이 중국 놈들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내를 제지하며 말렸지만 사내의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머릿속에 욕이 맴돌았지만 입으로는 튀어나오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발딱 일어서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After you!. “너 꺼진 다음에!’ 아내의 완승이었다.

어느 날인가에는 열려있는 세탁소 뒷문으로 유리병들이 날아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꺼져라! 중국 놈들아!”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달려가보니 십 대 아이들 둘이 자전거를 타고 뺑소니를 쳤다. 순간 분을 못 이겨 경찰서로 신고를 했더니 경찰차 두대가 정말 쏜살같이 달려왔다. 자초자종과 아이들 인상착의를 묻고서는 이내 사라졌던 경찰들이 아이들에게 수갑을 채워 경찰차 뒷좌석에 싣고 와서 내게 물었다. ‘아이들 부모를 불러서 훈계 후 훈방하려 한다. 혹시 처벌을 원하느냐”라고. ‘내게 사과를 하라고 하고 놓아주기를 바란다.’는 내 말에 아이들은 넙죽 잘못을 빌었다.

가게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온 도둑이 컴퓨터와 돈통을 통째로 들고 간 일과, 우리 부부가 당한 일은 아니지만 두 번의 권총 강도, 세탁소 안으로 밀고 들어온 자동차 등 모두 내 세탁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 시절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었다.

내 세탁소는 빠르게 변해갔다.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 파이프 옷걸이 대신 컨베이어를 들여놓았고, 또다시 반년이 흐른 뒤엔 있어야 할 모든 세탁장비들을 들여놓은 구색 갖춘 명실상부한 세탁공장이 되었다.

그즈음 이런저런 세탁기술 세미나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동네에서 세탁기술이 제일 뛰어나다고 소문난 이선생을 찾아가 옷에 묻은 각종 얼룩 제거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젠 돌아가신 지도 제법 되었지만 당시 이선생은 오십 대 초반이었다. 이선생의 특징은 목에 걸고 지내는 돋보기를 연신 썼다 벗었다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나는 돋보기 쓰는 나이까지 세탁소 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내가 돋보기를 처음 썼던 게 벌써 이십 년도 넘었다.

그즈음에 나는 세탁소에서 살았다. 아침 5시에 나가 밤 8-9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 했다.

그때 아이들이 내게 전화를 하여 묻곤 했던 말이다. “아빤 아직도 아빠집에 있어?”

그날, 나를 위한 아버지들의 기도

세탁소 – 1

돌이켜볼수록, 내 삶은 우연 위에 서 있었다.

아내가 차 씨 아저씨라고 부르는 차 선생은 장인어른의 오랜 후배이자 벗이었다. 장인은 열여덟 나이에 카투사(KATUSA)라고 부르는 미군 배속 한국군 제1기로 인천상륙작전 전투를 치른 참전용사다. 전쟁 후 평생 미군부대와 특히 공항 소방대에서 일을 하셨다. 차 씨 아저씨는 미군부대 하우스보이였다. 그렇게 만나 전쟁 후부터 1960대 월남 공항 소방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일을 했다. 그 후 차 씨 아저씨는 미국으로 건너와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해 볼티모어에서 세탁소를 하며 두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장인은 그즈음 사우디 아라비아 공항 소방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장인이 휴가차 장모와 함께 우리 사는 데를 방문하여 차 씨 아저씨 내외와 저녁을 함께 한 자리에서였다.

“미스터 김, 뭘 고민해! 그냥 세탁소 해. 애들 둘 잘 키울 수 있어요. 그냥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 없으니 세탁소 하나 차리라고…”

암만 생각해 보아도 터무니없이 무모했던 일이었다.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세탁소를 하나 차렸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내 삶이 매사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한데, 그땐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정말 막무가내로 벌린 일이었다. 대학 근처에 있는 가장 큰 쇼핑센터 빈자리를 얻어, 잠시 막일했던 경험을 살려 뚜닥뚜닥 카운터 구색을 갖추고, 철물점에서 파이프 뚝뚝 끊어다가 옷걸이를 이어 만들고 세탁소 간판을 걸었다.

드롭 스토어라고 손님들의 옷을 받아다가 세탁 공장으로 보내 세탁과 다림질 공정을 다 마친 후 손님에게 내어주는 이를테면 중간상이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작은 동네 빤히 아는 한인들끼리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다. 오픈한 내 가게 주변에 있는 이가 내 세탁을 처리해 주겠다고 했던 세탁공장을 하는 이에게 만류를 했었던가 보았다. 잠시 참 난감했었다.

그때 나타났던 이가 내 친구 ‘뵤’다. 수대에 걸쳐 델라웨어주 뉴왁(Newark) 토박이인 뵤는 나와 동갑으로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했던 이다. 그의 아내 미시즈 민은 한국에서 근무할 때 그를 만났다. 미시즈 민은 그를 ‘뵤’라고 불렀는데 그의 이름은 Bill이였다. ‘뵤’ 내외는 정말 작은 규모의 세탁소를 하고 있었는데 내외는 내 부탁을 정말 흔쾌히 들어주어 정해진 날짜에 ‘K&L Cleaners’ 영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K&L’이냐고? 그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다. 세상사 우연처럼 큰 뜻 없다고. 그냥 내 성씨 김과 아내 성씨 이의 조합일 뿐이라고. 미시즈 민은 세상 뜬 지 오래되었고, ‘뵤’는 가을이면 미시즈 민과 함께 심은 감나무에서 딴 감 한 바구니를 들고와 늘 같은 소리를 한다. ‘어쩜 우리 손녀가 민을 닮았는지…’

그렇게 세탁소 문을 열던 날,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말이다.

“얘야! 동네 이름이 Newark이구나. 이제부터 여기가 너의 새 방주(方舟 New Ark)다. 평안한 마음으로 네 일을 즐기며 살아라.”

재봉틀에 앉아 첫 바느질 일감을 받아 바느질을 하는 아내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건넸던 말이었다. ‘혹시 이거 손님이 찾아가자마자 뜯어져서 다시 가지고 오는 거 아닐까?’ 아내의 대답이었다.

‘나 학교 때 가사 시간에 칭찬받은 사람이야! 나 한국 사람이라고!’

1과 99 – 그 사이

방황- 3

언제나 문제의 진원지에는 내가 서 있었다. “얘, 너두 참 힘들겠다! 어떻게 저런 녀석이랑 사니?”, “글쎄 말이에요…” 신기했다. 어머니와 아내는 종종 그렇게 뜻이 맞곤 했다.

나는 일남 삼녀 중 둘째, 아내는 일녀 이남 중 맏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제친 집안의 왕이셨다. 부모님과 세명의 누이들과 우리 내외는 차로 십 분이면 서로 다 닿을 수 있는 한 동네에서 살았다. 조금 늦게 오신 처부모님도 그 정도 거리에 떨어져 살았다.

그랬다. 언제나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나였다.


만 이년 사 개월 만에 서울에서 헤어졌던 아내와 아들을 델라웨어에서 만났다. 그때의 거리와 시간만큼 우리 사이도 벌어져 있었다. 그 간격이 다시 좁혀지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그 간격을 조율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조율 자체를 즐기고 있는지도.

그 시간들을 통해 내가 세운 개똥철학이다.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 간에 100% 딱 맞아떨어질 수 없다. 절대 없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건 어느 한쪽이 힘을 100% 틀어쥐고 있는 경우뿐이다. 하여 그것은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복종일 뿐이다. 그건 건강한 사람 관계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100% 순종을 하는 경우인데 그건 병이다. 그 역시 건강하지 않다.  0과 100의 자리는 신의 자리다. 사람 관계는 나누어 갖는 관계다. 1과 99 이든, 50과 50이든 그 사이를 오가는 관계라야 사람살이 관계이다. 부부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그게 사는 재미 아닐까? 한마디로 열린 관계면 족하다. 이 또한 또 다른 문제의 중심에 설 개똥인지도 모를 일이다만.


종종 읊조리곤 하는 시들이 몇 편 있는데 그중 하나,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이다.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한 가지 말을 때론 엉뚱하게 서로 제 입맛에 맞게 이해하며 거기에 덧붙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이어 가곤 하지만, 웃음을 끊지 않고 여기까지 함께, 그리고 또 남은 길을 손 잡고 걸을 수 있음은 바로 그 가족이라는 관점을 붙들고 살아온 때문이 아닐는지.


이민의 땅을 밟은 아내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손님은 병이었다. 갑상선에 문제가 생겼다. 치료 중에 의사에게 들은 말이었다. “이제 아이는 기대하지 마시라.”라고. 살며 과학을 믿고 의지하는 편이다만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앙 또는 세상의 법칙만큼은 아니다. 의사의 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들과 여섯 살 터울로 딸이 태어났다. 아들은 여렸고 딸은 야무졌다.

다급해진 것은 또다시 나였다.

신나게 욕부터 배우다

방황 – 2

이즈음이야 ‘뭐 그깟 일’ 정도로 치부될 일이겠다만, 1970년대 중반에 나이 스물 몇 살의 처자가 홀로 미국 취업 이민을 떠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떠난 누나의 길을 어머니, 아버지, 막내동생, 나와 아내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아래 동생내외가 쫓아왔다.

한 동안 부모님과 네 남매 가족들 그리고 처부모님 모두 한 동네에서 살았다. 지금, 부모님들은 모두 떠나셔 집 근처 “모든 성인들의 묘지, all saints cemetery”에 함께 계신다. 이젠 멀리 떨어져 사는 아랫 동생네 부부 이외는 모두 언젠가는 부모님 곁에 누울 것이다. 아들 딸 조카들 모두들 가정을 이루어 손주들이 열셋이고, 곧 하나가 더해질 것이다. 하여 누님은 어머니 아버지 태에서 난 우리 집안의 시조다.

언젠가 “도대체 그때 왜 떠났오?’라는 내 물음에 누나가 했던 대답이었다. ‘글쎄… 첫째는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고…. 둘째는 감사였을 텐데…. 나는 그리 넉넉지도 않은 우리 형편에 나를 대학까지 보내준 부모님께 대한 감사가 컸어. 지금 사람들 기억 못 할 거야. 그때만 해도 여자들이 대학 가는 거 쉽지 않았어. 좀 사는 애들만 갔지. 아무튼 그 감사에 대한 보답을 하는 방편으로 그렇게 선택했던 거 같은데…’

70대 중반을 꺾어 넘긴 누나는 이즈음 아내와 함께 그림공부에 빠져 지낸다. 지난 수난절 기간에 누나가 그린 예수상을 보다가 어릴 적에 누나가 치던 피아노가 생각났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누나는 두꺼운 마분지를 잘라 이어놓은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실물처럼 그려 놓고서는 피아노를 쳤었다. 건반의 음들은 가슴속에서 울렸을 것이다.

<신나게 욕부터 배우다>

뉴욕에서 이민 초기 어려움을 겪어낸 누나네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한적한 시골인 델라웨어에 터를 잡았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와 젖먹이 아들을 두고서 혼자 먼저 온 나도 한 동안 누나네 덤이자 짐이 되었다.

처음에 뉴욕도 둘러보고 델라웨어도 둘러보면서 많이 망설였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얘야! 천천히 시작하자, 천천히’하시며 그저 좋아하셨던 부모님과 달리 나는 조급했고, 새로운 시간에 대한 불안을 놓치지 못했다.

‘일단 영주권을 얻을 때까지…’라는 다짐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커뮤니티 컬리지 영어반 등록서류를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 동네 우체통 앞에서였다. 사다리들과 알 수 없는 기둥들을 잔뜩 실은 빨간 픽업트럭 하나가 서더니만, 창문을 열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혹시 한국분 아니세요?’, ‘예, 그런데요. 어떻게?’ 그렇게 이어진 질문과 응답이었다. ‘이 동네 사세요?’, ‘예, 온 지 얼마 안 돼서 누나네에…’, ‘아이고 반갑습니다. 저희 집이 바로 저기인데… 시간 있으시면 차나 한잔 하시지요?’

이민 생활 사십 년 동안 참 많은 이들을 만났다만, 이제껏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이는 매형 한분 빼고는 유일한 조용하형을 그렇게 만났다. 자신을 소개할 때 늘 ‘조용합니다’라고 하는 그는 진짜 조용한 사람이다. 그 조용한 사람이 길 가던 내게 대뜸 말을 건넨 것도 참 드문 일이었다고 했다. 내 외가인 한남동과 가까운 용산 사람이어서 친근감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주택의 외벽 마감재인 사이딩 공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날 그가 내게 건넨 말이다. “지금 특별히 하시는 일 없으면 저하고 함께 일 한번 해 보지 않으실래요? 한 번 보시고 해도 좋고 안 하셔도 좋고요.’ 그렇게 그를 따라나선 길에서 두 해가 지나갔다.

난생처음 해보는 노동이었는데 나는 그 일을 매우 좋아했다. 일로 몸에 피로를 느끼고, 쉬며 안도를 느낄 수 있던 맛이 참 즐거웠다. 조용한 조용하 형과 일하는 게 좋았고, 거의 많은 시간을 말없이 홀로 일할 수 있는 시간들을 즐겼다.

그즈음 막 시작되었던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연구 소식을 접한 것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신학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저작들에 빠져 지냈던 것은 비록 그 후의 일이었지만, 그때 잡념 없이 방황을 즐기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사판에서 만나는 일꾼들의 언어는 욕이 태반이었다. 욕 한마디가 들어가지 않은 문장을 만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한 문장 전체가 욕으로 이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싸우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 언어였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배우기 전에 그렇게 공사판에서 먼저 욕설로 이루어지는 영어를 먼저 배웠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의 언어, 사랑의 언어보다 먼저 삶의 언어를 배웠다.

듣기는 많이 들었으나 입으로 뱉어 본 적 없는 이 욕들을 훗날 하늘을 향해 마구 쏟아낼 줄은 그땐 정말 몰랐었다.

‘만일…’ – 그 허망함에

방황 – 1

2024년 12월, 채 일 년 반도 지나지 않았건만 햇수로는 벌써 삼 년전이다.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들린 교보문고에서 뽑아 들고 온 책 <나이듦에 대하여> 78쪽엔 이런 말이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러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상당수가 노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난 인류의 총수를 1천82억 명이라고 한다. 대략 수백억 명이 노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1천82억 명 가운데 하나이자, 영광스럽게도 노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수백억 명중 하나가 되었다. 이젠.

서울 지하철에서 난생처음으로 자리 양보를 받았을 때엔 그야말로 난감했었다. 주춤거리며 제법 큰소리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말했었다. “아니요! 아니요!” 끝내 나는 자리를 양보받았고 그날 이후 나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자신있게 앉아 다녔다. 그리고 생각난 내 고모님이었다. 아흔 두해 사시고 세상 떠나신 하나밖에 없는 고모님께서 얼추 내 나이 적에 크게 웃으시며 했던 말씀이었다. “얘야! 버스를 탔더니 젊은 아이가 자리를 양보하지 뭐냐? 넌 아직 모를 거야, 그때 내 심정 말이지. 화가 나더라니까….” 어느새 나도 그때 그 시절 고모님 나이에 이르렀고, 그 고모님은 이젠 한국 가서도 뵐 수 없다.

본전을 뽑고 싶었다. 한국에서 낳고 살았던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7년이 더 길어졌다. 여기도 평생 외국이고, 한국도 이제 내겐 외국이다. 가는 비행시간 쉬지 않고 15시간 반이고, 집에서부터 서울 숙소까지 이르는데 꼬박 22시간이 걸린 여행길이었다.

글쎄, 언제 또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여 본전을 뽑고 또 뽑고 싶어 걸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때론 아내를 앞세우거나 아내보다 한 걸음 앞서거나 또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 내외 고향인 신촌과 소년, 소녀기와 청춘을 보낸 신문로 광화문 효자동 안국동 인사동 종로 을지로 남대문 명동 마포 공덕 등지의 서울 거리와 강남 강동을 비롯해 일산, 철원, 전곡, 양평 등지의 경기도와 경상도 영주 부석사를 비롯하여 충북과 경북이 만나는 죽령고개, 그리고 잊지 못할 봉화에서의 하루 밤, 오랜 벗 내외가 평생 일구어 온 이야기를 만난 대전 대화동을 거쳐 이제야 이난영의 소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전남 목포거리와 유달산, 그리고 새해맞이 해돋이를 보며 아내손을 잡고 걸은 강원도 속초 해변 모랫길.

그렇게 걷고 또 걸었었다.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 우리들의 삶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끈, 바로 사랑이었다. 이 여행에서 만난 옛 벗들, 이제 거의 노인이 되었다.

책 <나이듦에 대해서>를 펼쳐 들면 첫 쪽에서 만나는 말이다. <우리는 투쟁하도록 승리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슬픔과 멜랑콜리여 안녕. 우리에게 끝이란 없어요. 끝은 바로 이 순간이고, 매 순간 끝은 확장되니까요. 우리를 지배하는 강렬한 정신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에요. – 피에르 고베티>

이제 노인이다. 그래서 축복이다. 하여 감사다. 매 순간 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나이임으로.

동해 바닷가에 떠오른 해처럼. 해를 향해 달려 날아가는 새떼들처럼.

그렇게 오늘을 걷다가, 나는 다시 먼 어제로 돌아간다.

<‘만일…’ – 그 허망함에>

따지고 보니 방황의 연속이었다. 신촌을 떠날 무렵과 이민 후 첫 몇 해 동안 내 삶이 그랬다.

지난 일에 “만일….”이라는 상상은 허전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이 한 두해만 늦추어졌거나 그만큼만 빨랐다면 다른 건 다 모를 일이지만 내 인생은 조금 다른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그저 늘그막에 꿈같은 그림을 그려본다. 비록 허망할지라도.

나이 이십 중반일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호사스러운 때였다. 1975년에 다니던 대학에서 제적을 당하고, 징집되어 군생활 마치고 제대한 것이 1977년 성탄절 날이었다. 그런데 할 일이 없었다. 학교로 되돌아갈 길도 없었고 말 그대로 백수였던 젊은 날이었다.

그러다 이듬해 봄부터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다. 한국신학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선교교육원이라는 평생교육기관이 당시 서대문 충정로에 있었고, 그곳에서 나처럼 본의 아니게 백수가 된 젊은이들을 위한 신학공부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다. 선생님들도 역시 본의 아니게 당시에 백수가 되신 분들이셨다.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김용복, 송건호, 이문영, 박현채 선생님 등등 그야말로 당시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분들에게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함께 배우던 친구들이 약 이십여 명쯤이었는데 나보다 한참이나 앞선 친구들이라 쫓아가느냐고 엄청 애쓰던 때였다.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 평생 신앙의 사표이자 선생, 그리고 삶의 길잡이이자 이젠 스스로 내 길동무를 자처한 호주에 사시는 홍길복목사님 덕이였다.

만일 박정희대통령이 궁정동에서 그렇게 가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시간은 좀 더 길어질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아무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으로 인해 나는 다니던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십 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진짜 목사의 길을 가보자 하고 내 신앙의 본고장인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 신학교인 장신 이른바 광나루 신대원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내게 맞지를 않았다. 그래 하나님께 기도와 서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나이가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한 오십까지 살다가 인생을 좀 알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그리고 이제 그 오십도 가물가물한 노인이 되어 그 서원은 짐으로 지고 간다. 그러나 그때의 내 결정에 대해 얼마나 크게 감사하며 사는지, 그 또한 내가 누린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하며 산다. 그 시절 내가 배운 것은 삶을 고백하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출판사를 잠시 했던 일이다. 그때만해도 참 엉뚱한 일이었다. 신문모음집을 만들어 출판을 했었다. 당시에는 “신문의 행간을 읽는다”는 말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사건에 담긴 진실을 행간에 숨겨 놓아야만 신문을 발간할 수 있던 암울한 시대의 한 단면이었다.

바로 행간에 숨어있는 진실을 한데 모아 독자들에게 전해보겠다는 뜻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도가 있는 일종의 뉴스 포탈 같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끝은 뻔했다. 망했다.

이 두가지 경험은 내 이민생활의 명(明)과 암(暗)을 잇는 그 굴곡진 시간들의 빌미가 되었다.

그렇게 내 젊은 시절의 방황은 신촌을 떠나 이민생활로 이어졌다.

무더위에

세탁소의 스팀 열기와 연일 백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축 처졌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이거 한 번 들어 보셔!’하며 읽어 준 대목이다.

<케이시는 평생 집, 세탁소, 교회만 오가는 부모님의 삶이 한심했다. 이민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어는 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십대에 머리가 하얗게 된 엄마 리아는 일주일 내내 “더러운 셔츠를 분류하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10대 고객에게 미스, 미스터 존칭을 붙여 불러가면서 값비싼 디자이너 청바지 단을 줄였다. >

아내가 이즈음 읽은 소설 <파친코 Pachinko>의 저자 이민진이 쓴 자전적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소개하는 글 가운데 한 대목이란다.

나는 그날도 미스, 미스터 뿐만 아니라 써, 맴을 입에 달고 지냈었다. 비록 이십 대 아이들일지언정. 뿐이랴! 캔이나 윌은 거의 쓰지 않는다. 큐드와 우드를 입에 달고 산다.

그날 밤, 내 아이들에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 잔 찐하게 했다.

호칭에

아버지가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우선 나를 부르는 호칭이 평소와 달랐다. 통상 즐겨 쓰시는 ‘아범’, ‘애비’도 아니고, 기분 좋으실 때 부르는 ‘어이 김영근!’도 아니었다. 오늘 아버지는 ‘영근아!’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이어진 아버지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웃고 말았다. 세상 둘도 없는 말씀을 하실 듯이 나를 부르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또 미안해서 웃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보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은 ‘영근아!’라는 호칭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를 부를 때 ‘영근아!’라고 하는 이들이란 지금은 아버지 어머니 딱 두 분 뿐이다. 물론 가게 손님들이나 여기서 살며 알게 된 이들이 ‘Young’이라고 나를 부르지만  ‘영근아!’와는 사뭇 다르다.

나를 ‘영근아!’라고 부르는 친구들과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을 찾아가지 않는 한, 더는 나를 ‘영근아!’라고 부를 이를 만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내가 보낸 시간들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을 다 지우지 못한 채 난민과 이민에 대한 책장을 넘기다  눈에 밟힌 글귀 하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어디든 옮겨 다닐 수 있고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다. 누구든 살던 곳에서 자유롭게 ‘떠날’ 권리,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새 삶터에서 ‘정착할’ 권리, 그리고 살던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 올’ 권리가 있다. 또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여러 협약으로 인정하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도 있다. 오늘날 이런 권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원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쓴 이의 주장에 시간을 하나 덧붙인다면 우리는 영원히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를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영근아! 이 짜샤!…’ 그 흘러간 저쪽 세월에 잠시 빠져버린 밤에.

기차여행 -17

금문(金門, Golden Gate)

금문교(金門橋, Golden Gate Bridge)로 향했다. 아무렴, 샌프란시스코인데 금문교 배경으로 얼굴 사진 하나 정도는 찍고 가야 마땅한 일이었다.

가는 길에서 만난 단독주택들은 작고 마당은 없지만 아주 예뻣다. 특히 집 색깔들이 동부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어서 자꾸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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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중에 주로 수다(?) 담당이었던 아내가 느닷없이 샌디에고에 있는 어느 목사에게 전화를 한다.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고는 같은 캘리포니아라도 약 500마일(800km) 떨어진 곳이건만 아내는 San Diego와  San Francisco에서 San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나아빠처럼 1.5세 이민인 그이는 속한 교단에서 차세대 목회자로 손꼽혔던 사람이다. 내 나이 또래인데 벌써 준은퇴상태이며, 손주가 다섯이란다. 내외 모두 건강 문제로 꿈의 크기를 줄였나보다. 이즈음엔 책을 쓰고 있단다.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가 모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 왔었다. 강변을 걸으며 그는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를 웅얼거렸었다. 난 그런 그이를 아내못지 않게 좋아했다.

안개속을 달리다보니 이미 금문교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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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금문교는 이런 멋진 모습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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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렇게 안개 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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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으며 금문교에게 너무나 미안하게도 나는 제2한강교와 절두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 세계최고, 최초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었던 금문교에게 정말 미안하리만치 내겐 큰 감흥이 없었다. 셋 중 하나였으리라. 내가 이미 늙었거나, 넘쳐나는 세계 최초와 최고들로 인하여 둔해졌거나, 아니면 안개 때문이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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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대낮이었건만 안개는 거치지 않았고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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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로 내려가서야 감탄이 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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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옆 Sausalito 마을을 들리지 않았다면 그나마 금문교에 대한 정취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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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salito는 우리를 매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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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는 우리들의 눈과 입맛과 배를 완전하게 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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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중이던 하나는 제 아빠가 Sausalito에 있다는 문자를 보내자, ‘거기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보라’고 했단다.  아이들은 아직 우리들의 나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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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전거 대신 해변에서 앉아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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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salito에서 금문(金門,Golden Gate)을 지나 누리고 있는 내 이민의 여유를 보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