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3

언제나 문제의 진원지에는 내가 서 있었다. “얘, 너두 참 힘들겠다! 어떻게 저런 녀석이랑 사니?”, “글쎄 말이에요…” 신기했다. 어머니와 아내는 종종 그렇게 뜻이 맞곤 했다.
나는 일남 삼녀 중 둘째, 아내는 일녀 이남 중 맏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제친 집안의 왕이셨다. 부모님과 세명의 누이들과 우리 내외는 차로 십 분이면 서로 다 닿을 수 있는 한 동네에서 살았다. 조금 늦게 오신 처부모님도 그 정도 거리에 떨어져 살았다.
그랬다. 언제나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나였다.
만 이년 사 개월 만에 서울에서 헤어졌던 아내와 아들을 델라웨어에서 만났다. 그때의 거리와 시간만큼 우리 사이도 벌어져 있었다. 그 간격이 다시 좁혀지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그 간격을 조율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조율 자체를 즐기고 있는지도.
그 시간들을 통해 내가 세운 개똥철학이다.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 간에 100% 딱 맞아떨어질 수 없다. 절대 없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건 어느 한쪽이 힘을 100% 틀어쥐고 있는 경우뿐이다. 하여 그것은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복종일 뿐이다. 그건 건강한 사람 관계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100% 순종을 하는 경우인데 그건 병이다. 그 역시 건강하지 않다. 0과 100의 자리는 신의 자리다. 사람 관계는 나누어 갖는 관계다. 1과 99 이든, 50과 50이든 그 사이를 오가는 관계라야 사람살이 관계이다. 부부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그게 사는 재미 아닐까? 한마디로 열린 관계면 족하다. 이 또한 또 다른 문제의 중심에 설 개똥인지도 모를 일이다만.
종종 읊조리곤 하는 시들이 몇 편 있는데 그중 하나,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이다.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한 가지 말을 때론 엉뚱하게 서로 제 입맛에 맞게 이해하며 거기에 덧붙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이어 가곤 하지만, 웃음을 끊지 않고 여기까지 함께, 그리고 또 남은 길을 손 잡고 걸을 수 있음은 바로 그 가족이라는 관점을 붙들고 살아온 때문이 아닐는지.
이민의 땅을 밟은 아내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손님은 병이었다. 갑상선에 문제가 생겼다. 치료 중에 의사에게 들은 말이었다. “이제 아이는 기대하지 마시라.”라고. 살며 과학을 믿고 의지하는 편이다만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앙 또는 세상의 법칙만큼은 아니다. 의사의 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들과 여섯 살 터울로 딸이 태어났다. 아들은 여렸고 딸은 야무졌다.
다급해진 것은 또다시 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