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 땡땡이에 대한 추억>
헐렁한 검정 무명제복 걸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코 앞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일은 썩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대앞에서 신문로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효자동까지 전차를 갈아타야 하는 아침의 새로운 일상은 제겐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버스 타는 일은 전쟁이었습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몰려 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이란 작은 체구의 제겐 진짜 진을 빼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막판에 간신히 버스 차문 한 쪽 끝을 잡고 한 다리를 올려 놓으려는 순간 억센 차장 아가씨가 머리에서 빙빙 도는 헐거운 모자를 홱 낚아 채서는 버스 밖으로 날려 버릴 때의 그 참담함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그래 그 전쟁 피하자고 제가 생각해 낸 꾀가 새벽밥 먹고 일찍 집에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피해자는 제 어머니와 누나였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누나와 나는 이른 아침으로 배를 단단히 채우고 집을 나섰지요.
오호! 버스는 텅텅.
앉아 갈 빈 자리도 늘 있게 마련이었답니다.
이게 습관이 되어 결석은 꽤 있어으되 지각이라는 말은 제 사전에 없던 중,고등학교 6년 세월을 보냈답니다. 때론 학교 문이 아직 열려 있지를 않아 담 넘어 학교로 스며든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찍 새벽에 서두르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제 첫 번째 땡땡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야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는 일에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후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답니다. 전차를 갈아타려 거의 뛰다싶이 했건만 효자동에 내렸을 때는 이미 등교시간을 넘긴 지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들어 가기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지각”이라는 게 무슨 붉은 딱지 이마에 붙이는 것 같은 낙인같았습니다.
그래 다시 전차 종점으로 돌아갔지요.
그 날 하루 효자동에서 마포 종점을 몇 번이고 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파할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만드는 전차 승차 패스포드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이었으니까요.
아주 어렸던 시절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까닭이지요.
그런데 그 경험은 제게 일석이조의 득이 되었답니다.
어느 날 전차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도 다시 버스를 타야하게 된 것입니다. 전차는 한 달치씩 돈을 내고 패스포드를 끊었지만 버스비는 그날 그날 어머니에게 타서 썼었지요.
하루에 왕복 네 번 타는 버스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문로에서 내려 청운동까지 걷기 시작했지요. 방과 후에도 똑 같기 걸었지요. 버스비 삥땅을 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 용돈 만들기였습니다.
그 때의 전차 풍경
중학교 일학년 때 제2한강교가 개통이 되었지요.
신촌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촌(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