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황구(黃狗)

세탁소 – 4

내가 황구(黃狗)라는 별칭을 건네어준 벗이 있었다. 우리 어렸을 때 흔했던 강아지 이름 누렁이다. 그는 사내 중에 사내였다. 투박하게 간단한 말 툭 던지고 한 걸음에 직진하는 그런 사내로 알았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두 살 위였던 그와 나는 스물 초중반의 나이였고, 신문로 새문안 다방에서였다. 나는 휴가를 나온 졸병이었고, 그는 내일모레면 곧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청년이었다. 이민을 간 내 누나와 함께 일하는 후배하고 결혼한 그가 이제 아내를 만나 이민생활을 시작하려는 길이었다. 어머니의 부탁이었는지 누나의 부탁이었는지 아님 누나의 후배 부탁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만 무언가를 전하고 받으려고 그를 만났었다. 황 씨였던 그에 대한 내 첫인상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를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세상 모두가 그의 손아귀에 놓인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나 다시 만난 곳은 델라웨어였다. 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진짜 그는 이미 다 가진 듯했다. 그 씩씩함이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민 후에 비록 한 교회를 다녔지만 그저 멀찍이 그런 느낌으로만 인사를 하며 지냈다. 나는 세탁소를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민 초기라고 생각할 때였고, 그는 이른 결혼으로 아이들도 컸고 삶도 안정적인 기반에 놓인, 우리들의 첫 만남이 있었을 때의 그의 꿈을 이룬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마 2000년이 다다른 그 어간이었을 것이다. 세탁소 문을 막 연 이른 아침이었다. 그가 내 세탁소에 들어서며 편지 한 통을 건네며 하던 말이었다. “김형, 내가 오늘 어디 좀 갔다가 오려는데…  김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알잖수… 나 말 짧은 거… 그냥 내 이야기 몇 자 적어봤수.”

나이 오십을 코 앞에 두고 앞 머리가 휑해진 그의 편지를 뜯어본 것은 그가 떠난 직후였다. 제법 긴 편지글이었다. 그의 이민 이후에 대한 삶의 기록이었는데 그 시간에 비해서는 글은 정말 짧았지만 그의 생각은 다 담긴 글이었다. 그 편지 글의 시작이었다. “김형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어쩌면 나는 워싱톤 거리를 달리고 있을 겁니다…”

그랬다, 그는 마라톤 첫 완주에 도전하러 가는 길이었다. 편지는 왜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왜 꼭 완주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자신의 지난날들과 현실 그리고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 그는 완주를 했다. 그리고 그 뒤에도 보스턴 등 네 번의 마라톤 대회 완주를 이어갔다. 나는 답장을 썼었다. 내 편지의 제목이었다 “달려라 황구!”

그가 내게 건넸던 편지에 담긴 이야기의 깊은 속 이야기는 외로움이었다. 이민생활의 외로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차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하늘나라로 향해 달려간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다.

내 속에 헛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가 달리기를 시작했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내 안에서는 무엇인가가 막 달리기 시작했을 무렵에 그의 달리기는 멈추었었다.


새로운 천년이 곧 시작된다고 세상이 시끄러울 때였다. 세탁소에 대한 정부 규제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세탁할 때 쓰던 솔벤트용제가 환경과 인체를 해하는 오염제라는 판단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각종 규제 법안들이 새로 생기고 그 법규를 준수해야 할 여러 규칙들이 생겨났다. 그 무렵 동네에는 약 60여 명의 한인 세탁인들이 있었다. 이런 규제들이 마구 밀려올 때 처음으로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의견들이 자구책으로 세탁협회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첫 깃발을 들게 된 것이 나였다. 그 역시 우연이었다. 이민 후 내 헛바람의 시작이었고, 알지 못했던 숱한 외로움들을 만나게 된 첫걸음이었다. 모두 아내와 어머니의 핀잔을 부른 시작이었지만, 훗날 여행의 동무가 된 벗을 만나게 된 내게는 축복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그때도 혀를 차셨었다. ‘이 눔이 또 도졌구나…  그예 못 버리는구나… 그 눔에 먼 산 바라보기를… 쯔쯔쯔쯔……”

서로 말이 달라 문제가 아니고…

세탁소 – 3

1980대 후반부터 2000년도에 이르기까지 십 수년 동안의 한국에 대한 내 기억 공간은 거의 하얀 백지다. 우선 가까이 신문과 방송이 없었다. 한국 소식을 만나기 위해 이웃 도시인 필라델피아나 볼티모어, 멀리는 뉴욕이나 워싱톤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보다 내가 이민(移民)이라는 말에 매달려 살았던 까닭이 더 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세탁소 일에 취해 살았었다. 세탁소가 하나에서 둘로, 셋, 넷으로 수가 늘어갔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내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며 도와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흑황홍백(黑黃紅白), 미국,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중국, 베트남, 라오스, 인도, 몽고 그리고 한국 등 여러 나라 출신들과 함께 해오며 여기까지 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얼굴이 하나 있다. 중국 상해 출신으로 거의 십 년 동안 함께 했던 왕 선생 내외다. 우리 아이들이 왕 씨 아저씨라고 불렀던 왕성충(王成忠) 선생은 나보다 열 살이 많았는데, 이곳으로 유학 온 아들내외 뒤바라지를 하러 왔다가 오랜 시간 함께 하게 되었다. 진시황과 모택동을 위대한 위인으로 내세우는 그는 동시대의 전형적인 중국인이었다. 왕 선생 내외는 말 그대로 열과 성을 다해 내 가게 일을 도와주었다.

다만 한 가지, 처음 만날 때부터 헤어지는 날까지 영어 한마디를 하지 못하였는데,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초 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그 고집이 그대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우리 사이의 대화는 알량한 내 한자능력에 의지한 필담으로 나누었는데, 다행이었던 것은 왕 선생의 눈치가 워낙 빨라서 내가 쓴 엉성한 한자 몇 개로 내 의중을 정확히 꿰곤 하였다.

왕 선생 아들이 박사학위를 마치고 직장을 얻어 코네티컷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아들을 안 따라가고, 계속 내 세탁소에서 일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난감했던 일도 있었다. 결국 코네티컷으로 떠나기 전에 왕 선생은 이사 가면 그 동네에 있는 한국인 세탁소들을 찾아가 일을 구하겠노라며 내게 한글 추천서를 써 달라고 했다. 일자리를 구했다는 연락과 함께 왕 선생 가족의 초대로 코네티컷 풍광 좋은 그들 가족 집에서 우리 가족들이 하루 밤을 지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상해에 일자리가 생겨 귀국한다며 온 가족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년 후, 생각지도 못한 왕 선생 아들이 내 세탁소를 찾아와 아내와 내 사진을 찍어갔다. 상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왕 선생 아들이 미국에 출장을 오게 되자 왕 선생이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더란다. 아무리 바빠도 꼭 델라웨어 세탁소에 들려 내 소식을 듣고 오라고 말이다.

그때 그 아들이 내게 건넸던 물음이다. “제 아버지가 엄청 고집 세신 분이고, 김 선생도 비할 수 없이 만만찮은 분인데… 어떻게 그 긴 시간 잘들 지내셨는지…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글쎄…. 그저 서로 어려웠던 비슷한 시대를 살아와서가 아닐는지….”라는 대답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아니요, 아니오.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두 분이 서로 완전히 통하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많이 생각해 본 거랍니다. 두 분이 말이 잘 통했다면 아마 그렇게까진 오래 못 갔을 거고요. 오늘 제가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를 했고 내게는 큰 가르침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엔 멕시코계 다음으로 한국인들이 많았었는데 거의 다 껄끄러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특히 말이 정말 잘 통해야 마땅할 기독교인들과 관계가 그랬던 것도 같다. 그 가운데 두 분이 목사님들이 되셨고 대개가 신실한 교인들이었다.

그랬다. 무릇 사람관계는 언어가 문제가 아니었다.  

돌이킬수록 세탁소에서 나를 도와준 모든 이들이 내 삶의 선생들이었다. 아내는 교회생활과 주말학교인 한국학교 선생일에 매우 열심이었다. 특히 교회 주일학교 선생과 성가대원, 한때는 성가대 지휘자와 아동 성가대 지휘자로 교회생활이 삶의 즐거움이었다. 올해로 서른일곱 해째 이어지고 있는 아내의 한국학교 선생 일은 어쩌면 아내의 이민생활을 지탱케 해 준 버팀목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헛바람 들기 전 그 시절에 내 우주는 오직 세탁소였다.

아빤 아직도 아빠집에 있어?

세탁소 – 2

다른 곳들은 모르겠다만, 이즈음 내가 사는 동네에서 세탁소를 비롯한 구멍가게를 하는 한국계들은 드물다. 한 때는 세탁소와 함께 생필품들을 파는 코너 스토어, 야채, 과일, 운동화, 잡화, 과일상, 튀김가게, 아침 식당 등등 동네 구멍가게들 상당수가 한인들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즈음 그네들 누구라도 한두 번 겪였음직한 일들이다.

딸아이가 유치원,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오 학년 때의 일이다. 작은 규모의 사립학교인 크리스천 스쿨이었다. 동양계로는 우리 아이들뿐이었다. 세탁소에서 한창 일할 시간이었는데 학교에서 ‘너희 아이들을 당장 데려가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학생들 건강검사를 하던 중 딸아이 머릿속에 이가 있더란다. 오빠도 한 집에서 사니 둘 다 당장 데려가라는 독촉이었다. 아내는 기겁을 했다. “얘들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 길로 학교로 간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그런지 아쇼! 얘네들이 이하고 살갗 비듬하고 구별을 못해요.” 그렇게 한참이 시간이 흐른 후 아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세탁소로 들어섰다. “애들은?” 묻는 내게 던진 아내의 대답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지”

두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아들은 동생의 유치원생 낮잠용 이불을 품은 채 학교 건물 입구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단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딸아이의 머릿속 살비듬을 이라고 우기는 간호선생에게 ‘곧 다녀오마’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의사에게로 달려갔던 아내는, 이가 아니라 살비듬이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들고 담임선생들과 간호선생을 향해 말했단다. ‘사과하시라’고. 그들은 이내 사과를 했는데, 아내가 다시 재촉했단다. 그런 사과 말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반에 들어가서 학생들 앞에서 사과를 하라”라고. 초등학교를 공립학교로 옮긴 딸아이는 내내 매우 우수하였다.

어느 해던가 폴란드계 사람들의 축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음식을 먹으며 그네들이 추는 춤을 즐기고 있는데,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사내 하나가 우리들 쪽으로 다가와 고함을 질렀다. “꺼져 이 중국 놈들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내를 제지하며 말렸지만 사내의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머릿속에 욕이 맴돌았지만 입으로는 튀어나오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발딱 일어서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After you!. “너 꺼진 다음에!’ 아내의 완승이었다.

어느 날인가에는 열려있는 세탁소 뒷문으로 유리병들이 날아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꺼져라! 중국 놈들아!”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달려가보니 십 대 아이들 둘이 자전거를 타고 뺑소니를 쳤다. 순간 분을 못 이겨 경찰서로 신고를 했더니 경찰차 두대가 정말 쏜살같이 달려왔다. 자초자종과 아이들 인상착의를 묻고서는 이내 사라졌던 경찰들이 아이들에게 수갑을 채워 경찰차 뒷좌석에 싣고 와서 내게 물었다. ‘아이들 부모를 불러서 훈계 후 훈방하려 한다. 혹시 처벌을 원하느냐”라고. ‘내게 사과를 하라고 하고 놓아주기를 바란다.’는 내 말에 아이들은 넙죽 잘못을 빌었다.

가게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온 도둑이 컴퓨터와 돈통을 통째로 들고 간 일과, 우리 부부가 당한 일은 아니지만 두 번의 권총 강도, 세탁소 안으로 밀고 들어온 자동차 등 모두 내 세탁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 시절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었다.

내 세탁소는 빠르게 변해갔다.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 파이프 옷걸이 대신 컨베이어를 들여놓았고, 또다시 반년이 흐른 뒤엔 있어야 할 모든 세탁장비들을 들여놓은 구색 갖춘 명실상부한 세탁공장이 되었다.

그즈음 이런저런 세탁기술 세미나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동네에서 세탁기술이 제일 뛰어나다고 소문난 이선생을 찾아가 옷에 묻은 각종 얼룩 제거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젠 돌아가신 지도 제법 되었지만 당시 이선생은 오십 대 초반이었다. 이선생의 특징은 목에 걸고 지내는 돋보기를 연신 썼다 벗었다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나는 돋보기 쓰는 나이까지 세탁소 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내가 돋보기를 처음 썼던 게 벌써 이십 년도 넘었다.

그즈음에 나는 세탁소에서 살았다. 아침 5시에 나가 밤 8-9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 했다.

그때 아이들이 내게 전화를 하여 묻곤 했던 말이다. “아빤 아직도 아빠집에 있어?”

그날, 나를 위한 아버지들의 기도

세탁소 – 1

돌이켜볼수록, 내 삶은 우연 위에 서 있었다.

아내가 차 씨 아저씨라고 부르는 차 선생은 장인어른의 오랜 후배이자 벗이었다. 장인은 열여덟 나이에 카투사(KATUSA)라고 부르는 미군 배속 한국군 제1기로 인천상륙작전 전투를 치른 참전용사다. 전쟁 후 평생 미군부대와 특히 공항 소방대에서 일을 하셨다. 차 씨 아저씨는 미군부대 하우스보이였다. 그렇게 만나 전쟁 후부터 1960대 월남 공항 소방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일을 했다. 그 후 차 씨 아저씨는 미국으로 건너와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해 볼티모어에서 세탁소를 하며 두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장인은 그즈음 사우디 아라비아 공항 소방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장인이 휴가차 장모와 함께 우리 사는 데를 방문하여 차 씨 아저씨 내외와 저녁을 함께 한 자리에서였다.

“미스터 김, 뭘 고민해! 그냥 세탁소 해. 애들 둘 잘 키울 수 있어요. 그냥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 없으니 세탁소 하나 차리라고…”

암만 생각해 보아도 터무니없이 무모했던 일이었다.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세탁소를 하나 차렸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내 삶이 매사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한데, 그땐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정말 막무가내로 벌린 일이었다. 대학 근처에 있는 가장 큰 쇼핑센터 빈자리를 얻어, 잠시 막일했던 경험을 살려 뚜닥뚜닥 카운터 구색을 갖추고, 철물점에서 파이프 뚝뚝 끊어다가 옷걸이를 이어 만들고 세탁소 간판을 걸었다.

드롭 스토어라고 손님들의 옷을 받아다가 세탁 공장으로 보내 세탁과 다림질 공정을 다 마친 후 손님에게 내어주는 이를테면 중간상이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작은 동네 빤히 아는 한인들끼리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다. 오픈한 내 가게 주변에 있는 이가 내 세탁을 처리해 주겠다고 했던 세탁공장을 하는 이에게 만류를 했었던가 보았다. 잠시 참 난감했었다.

그때 나타났던 이가 내 친구 ‘뵤’다. 수대에 걸쳐 델라웨어주 뉴왁(Newark) 토박이인 뵤는 나와 동갑으로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했던 이다. 그의 아내 미시즈 민은 한국에서 근무할 때 그를 만났다. 미시즈 민은 그를 ‘뵤’라고 불렀는데 그의 이름은 Bill이였다. ‘뵤’ 내외는 정말 작은 규모의 세탁소를 하고 있었는데 내외는 내 부탁을 정말 흔쾌히 들어주어 정해진 날짜에 ‘K&L Cleaners’ 영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K&L’이냐고? 그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다. 세상사 우연처럼 큰 뜻 없다고. 그냥 내 성씨 김과 아내 성씨 이의 조합일 뿐이라고. 미시즈 민은 세상 뜬 지 오래되었고, ‘뵤’는 가을이면 미시즈 민과 함께 심은 감나무에서 딴 감 한 바구니를 들고와 늘 같은 소리를 한다. ‘어쩜 우리 손녀가 민을 닮았는지…’

그렇게 세탁소 문을 열던 날,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말이다.

“얘야! 동네 이름이 Newark이구나. 이제부터 여기가 너의 새 방주(方舟 New Ark)다. 평안한 마음으로 네 일을 즐기며 살아라.”

재봉틀에 앉아 첫 바느질 일감을 받아 바느질을 하는 아내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건넸던 말이었다. ‘혹시 이거 손님이 찾아가자마자 뜯어져서 다시 가지고 오는 거 아닐까?’ 아내의 대답이었다.

‘나 학교 때 가사 시간에 칭찬받은 사람이야! 나 한국 사람이라고!’

생업(生業)에

엊그제 손님 한 분이 신문 한 장을 전해 주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이었다. 그가 읽어 보라고 준 기사의 제목은 “고전하는 세탁소 가격인상 마땅(Struggling Dry Cleaners Are Forced to Lift Prices)”이었다.

기사가 전하는 내용들은 내게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익히 경험으로 아는 사실들이기 때문이었다.  세탁소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물품들 – 일테면 행어, 폴리백 등-의 가격과 개스 전기료 등이 턱없이 뛰어오른 현실은 비단 세탁소에만 국한 된 일은 아니지만 최근 그 인상 폭은 전에 경험에 보지 못한 정도이다.

게다가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자가 급증하고, 캐쥬얼 의상을 주로 입는 사회적 변화는 세탁소가 고전하는 치명적 요인들이 되었다. 더하여 일할 사람들 구하기가 어려워 올라 간 종업원 임금도 세탁소 하기 힘든 한 요인이 되었다.

기사의 내용들이었는데 모두 내가 이미 겪고 있는 일들이다.

또 기사에 따르면 펜데믹 이후 미국내 세탁소들의 약 30%가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내 주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기사를 마무리하는 미주리주 한 세탁소 여주인의 말이다. “세탁료 인상? 내가 어쩌겠어요. 세상이 그렇게 변하는 걸요.”

힘든 게 어디 세탁소 뿐이겠나? 미주리나 내가 사는 델라웨어나 크게 다를 바 없듯, 세상 어디나 이즈음 거의 한 흐름으로 돌아가는 형편이니 그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들은 거의 엇비슷 할 터.

그나마 내 걱정 해주며 ‘너도 가격 올려서 버텨 보라!’고 신문 한 장 건네 주는 손님 한 분 있어  한 주간 일의 피로를 덜 수 있는 기쁨에.

삶에…… 감사에!

무더위에

세탁소의 스팀 열기와 연일 백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축 처졌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이거 한 번 들어 보셔!’하며 읽어 준 대목이다.

<케이시는 평생 집, 세탁소, 교회만 오가는 부모님의 삶이 한심했다. 이민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어는 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십대에 머리가 하얗게 된 엄마 리아는 일주일 내내 “더러운 셔츠를 분류하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10대 고객에게 미스, 미스터 존칭을 붙여 불러가면서 값비싼 디자이너 청바지 단을 줄였다. >

아내가 이즈음 읽은 소설 <파친코 Pachinko>의 저자 이민진이 쓴 자전적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소개하는 글 가운데 한 대목이란다.

나는 그날도 미스, 미스터 뿐만 아니라 써, 맴을 입에 달고 지냈었다. 비록 이십 대 아이들일지언정. 뿐이랴! 캔이나 윌은 거의 쓰지 않는다. 큐드와 우드를 입에 달고 산다.

그날 밤, 내 아이들에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 잔 찐하게 했다.

외로움에 대하여

좀체 더위가 가시지 않는다. 어제는 습도가 높지 않아 그런대로 견딜만 했는데 오늘은 그냥 찜통이다. 그래도 해뜨는 시각은 하루에 1분씩 늦어지고 있고, 해지는 시각은 1분씩 빨라진다고하니 찬바람 건듯 불어올 날이 머지 않았다.

오늘, 손님이 보잔다고하여 카운터 앞으로 나가기를 몇차례 하였다. 그들에게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들은 이야기들이다.

“시가 너무 좋았다.”, “외로움이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걸 새롭게 느꼈다.”, “내가 외로웠던 때를 생각하며, 네가 말한 그 손님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다”…

솔직히 부담스러운 인사들이었다. 나는 그저 편지 한장을 띄웠을 뿐이고, 시 하나 소개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외로움에 대하여.

8-14

세탁소에 오시는 손님들을 보면 서로 다른 모습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로 남편 또는 아버지가 가족들의 옷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내 또는 엄마가 그 역할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렇게 혼자서 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오실 때 마다 딸이나 아들과 함께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더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주 손녀를 앞세우고 들어 오시는 경우도 있고요.

그리 흔치는 않지만 늘 부부가 함께 제 가게를 찾으시는 분들도 있답니다. 그 중에는 아주 젊은 부부도 있고, 은퇴하신 노부부도 있습니다. 그렇게 늘 부부가 함께 오시다가 어느날부터인가 혼자 오시는 분이 계셔 “오늘은 왜 혼자냐?”라고 물으면 “혼자가 되었다”는 대답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그렇게 된 연유는 알수 없지만 참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그런 분이 계셨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분에 대해 아는바가 전혀 없답니다. 어떤 처지인지, 어떤 환경인지, 다만 그날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 손님이 옷을 맡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른 시가 하나 있답니다. 시 전체를 외우지는 못하고 제목만 생각났던 것이지요.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 시를 찾아 읽었답니다. 그 시는 그 손님을 위한 시라기 보다는 제 자신을 위한 시처럼 여겨졌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날의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 오늘은 그 시를 하나 소개드립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I see customers coming to the cleaners in various ways.

In some cases, usually husbands or fathers bring the family’s clothes. In some cases, on the contrary, mainly wives or mothers play the same role. Just like that, some customers come to the cleaners alone. Some others almost always come with their daughter or son. Sometimes, grandfathers or grandmothers come with their grandchildren.

Though it’s not so common, there are the cases that couples always come to the cleaners together. Among them, some are young and some are old and retired. While one of those couples had come to the cleaners always together, from one day only one of the couple began to come. As I noticed it and asked the person why she/he came alone, sometimes the response was that “I am left alone.” Then, even though I didn’t know what had happened to them, I felt so bad.

Last week, I saw one customer who was under this situation. Frankly, I don’t know much about her, in what situation she had been. I got to know only one fact, that she is alone now. While I was seeing her leaving the cleaners after she had dropped off her clothes, one poem came to my head. I did not memorize the whole poem, but did remember its title.

In the evening, when I came back home after work, I located and read the poem. I felt that the poem was for myself, instead of the customer, even though I’m not alone.

As I cannot erase the feelings of that day, I would like to introduce the poem to you.

From your cleaners.
 

We Are Human, as We Are Lonely
– Ho-seung Chung

Don’t cry.
As we are lonely, we are human.
To live a life is to endure loneliness.

Don’t wait in vain for a call which will not come.
Walk on the snowy path if it snows, and
Walk in the rain if it rains.

A black-chest snipe in the reeds is looking at you.
Sometimes even God sheds tears of loneliness.

It is because of loneliness why birds are sitting on the tree branch, and
It is because of loneliness why you are sitting on the waterside.

Even the shadow of a mountain comes down to a village once a day because it is lonely.
The sound of a bell spreads in the air because it is lonely.
 

생업(生業)

길 건너에서 같은 업(業)을 하고 있는 6.25선생께서 손을 턴단다. 그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는 이따금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게 문을 닫아야 할 만큼 곤궁한 처지인지는 몰랐다.

그를 처음 본 지도 어느새 스무해 전 일이 되었다. 어느 한인들 모임에서였다. 한 사내가 남도 특유의 사투리로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에는 내 또래 사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는 6.25 전쟁 때 자신과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듯 하던 것이었다. 이런 첫 만남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를 적어도 1945년생 전후의 나이로 여기고 깍듯히 대하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그의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그를 6.25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나보다 18개월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만 보면 6.25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부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거니와, 아무리 용을 쓰고 어릴 적 기억을 되뇌어 본다한들 고작 1950년대 후반에 일어났던 일들 혹은 그 시절 풍경에 대한 것이 고작일 뿐이건만,  6.25 때 일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는 가히 내가 쫓아갈 수 없는 비범함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튼 말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하나 그는  썩 괜찮은 사내이다. 인물이 착하기도 하거니와 동네 한인들 대소사에 손이 필요할 때면 앞뒤 가리지않고 흔쾌히 나서서 평판도 나쁘지는 않다. 그저 한 마을에 살고있는 한인 가운데 한사람 사이 정도이던 그와 내가 얼굴을 자주 부딪히게 된 것은 한 십 수여년 전 쯤부터이다. 그가 내 가게 길건너에 있는 세탁소를 인수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그 이전 십 수년 해오던 세탁업에 지쳐 딴데 한눈을 팔고 있었거니와, 당시만 하여도 아직 세탁소 형편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때여서 그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다.

내가 세탁업을 시작했던 때만 하여도 ‘세탁소 간판만 붙이면 밥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떠돌 때이고, 적어도 2,000년도 전후만 하여도  그 말은 타당하지 않았는가 싶다. 처음 내가 세탁소를 시작할 때 가까운 주변 몇 마일 안에 세탁소 숫자라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었지만, 2,000년도 초반에는 이미 두손 열손가락으로는 모자라고 두발 열발가락을 다 동원해야 할만치 늘어나 있었다. 6.25선생께서 세탁업에 발을 들여놓던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6.25선생이 인수한 가게주인으로 그가 네번 째이다. 그 이전에 주인이었던 세사람 모두 내가 한자리에서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십여년 동안 세탁업은 세상이 변한 만큼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두 손 두 발 모든 가락수를 꼽아야 할만큼 많던 내 주변 세탁소들 숫자가 손만 동원해도 충분히 세고도 손가락이 남을 만큼 변했다.

변하는 세상풍경이 끝내 6.25선생을 비껴가지 않은 모양이다.

늘어가는 내 나이 숫자보다 줄어드는 세탁소 숫자가 자꾸 밟히는 까닭은 나 역시 변하는 풍경 한가운데 서있기 때문일게다.

쉬는 날, 내 업(業)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