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 그 허망함에

방황 – 1

2024년 12월, 채 일 년 반도 지나지 않았건만 햇수로는 벌써 삼 년전이다.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들린 교보문고에서 뽑아 들고 온 책 <나이듦에 대하여> 78쪽엔 이런 말이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러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상당수가 노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난 인류의 총수를 1천82억 명이라고 한다. 대략 수백억 명이 노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1천82억 명 가운데 하나이자, 영광스럽게도 노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수백억 명중 하나가 되었다. 이젠.

서울 지하철에서 난생처음으로 자리 양보를 받았을 때엔 그야말로 난감했었다. 주춤거리며 제법 큰소리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말했었다. “아니요! 아니요!” 끝내 나는 자리를 양보받았고 그날 이후 나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자신있게 앉아 다녔다. 그리고 생각난 내 고모님이었다. 아흔 두해 사시고 세상 떠나신 하나밖에 없는 고모님께서 얼추 내 나이 적에 크게 웃으시며 했던 말씀이었다. “얘야! 버스를 탔더니 젊은 아이가 자리를 양보하지 뭐냐? 넌 아직 모를 거야, 그때 내 심정 말이지. 화가 나더라니까….” 어느새 나도 그때 그 시절 고모님 나이에 이르렀고, 그 고모님은 이젠 한국 가서도 뵐 수 없다.

본전을 뽑고 싶었다. 한국에서 낳고 살았던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7년이 더 길어졌다. 여기도 평생 외국이고, 한국도 이제 내겐 외국이다. 가는 비행시간 쉬지 않고 15시간 반이고, 집에서부터 서울 숙소까지 이르는데 꼬박 22시간이 걸린 여행길이었다.

글쎄, 언제 또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여 본전을 뽑고 또 뽑고 싶어 걸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때론 아내를 앞세우거나 아내보다 한 걸음 앞서거나 또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 내외 고향인 신촌과 소년, 소녀기와 청춘을 보낸 신문로 광화문 효자동 안국동 인사동 종로 을지로 남대문 명동 마포 공덕 등지의 서울 거리와 강남 강동을 비롯해 일산, 철원, 전곡, 양평 등지의 경기도와 경상도 영주 부석사를 비롯하여 충북과 경북이 만나는 죽령고개, 그리고 잊지 못할 봉화에서의 하루 밤, 오랜 벗 내외가 평생 일구어 온 이야기를 만난 대전 대화동을 거쳐 이제야 이난영의 소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전남 목포거리와 유달산, 그리고 새해맞이 해돋이를 보며 아내손을 잡고 걸은 강원도 속초 해변 모랫길.

그렇게 걷고 또 걸었었다.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 우리들의 삶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끈, 바로 사랑이었다. 이 여행에서 만난 옛 벗들, 이제 거의 노인이 되었다.

책 <나이듦에 대해서>를 펼쳐 들면 첫 쪽에서 만나는 말이다. <우리는 투쟁하도록 승리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슬픔과 멜랑콜리여 안녕. 우리에게 끝이란 없어요. 끝은 바로 이 순간이고, 매 순간 끝은 확장되니까요. 우리를 지배하는 강렬한 정신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에요. – 피에르 고베티>

이제 노인이다. 그래서 축복이다. 하여 감사다. 매 순간 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나이임으로.

동해 바닷가에 떠오른 해처럼. 해를 향해 달려 날아가는 새떼들처럼.

그렇게 오늘을 걷다가, 나는 다시 먼 어제로 돌아간다.

<‘만일…’ – 그 허망함에>

따지고 보니 방황의 연속이었다. 신촌을 떠날 무렵과 이민 후 첫 몇 해 동안 내 삶이 그랬다.

지난 일에 “만일….”이라는 상상은 허전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이 한 두해만 늦추어졌거나 그만큼만 빨랐다면 다른 건 다 모를 일이지만 내 인생은 조금 다른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그저 늘그막에 꿈같은 그림을 그려본다. 비록 허망할지라도.

나이 이십 중반일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호사스러운 때였다. 1975년에 다니던 대학에서 제적을 당하고, 징집되어 군생활 마치고 제대한 것이 1977년 성탄절 날이었다. 그런데 할 일이 없었다. 학교로 되돌아갈 길도 없었고 말 그대로 백수였던 젊은 날이었다.

그러다 이듬해 봄부터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다. 한국신학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선교교육원이라는 평생교육기관이 당시 서대문 충정로에 있었고, 그곳에서 나처럼 본의 아니게 백수가 된 젊은이들을 위한 신학공부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다. 선생님들도 역시 본의 아니게 당시에 백수가 되신 분들이셨다.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김용복, 송건호, 이문영, 박현채 선생님 등등 그야말로 당시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분들에게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함께 배우던 친구들이 약 이십여 명쯤이었는데 나보다 한참이나 앞선 친구들이라 쫓아가느냐고 엄청 애쓰던 때였다.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 평생 신앙의 사표이자 선생, 그리고 삶의 길잡이이자 이젠 스스로 내 길동무를 자처한 호주에 사시는 홍길복목사님 덕이였다.

만일 박정희대통령이 궁정동에서 그렇게 가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시간은 좀 더 길어질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아무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으로 인해 나는 다니던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십 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진짜 목사의 길을 가보자 하고 내 신앙의 본고장인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 신학교인 장신 이른바 광나루 신대원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내게 맞지를 않았다. 그래 하나님께 기도와 서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나이가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한 오십까지 살다가 인생을 좀 알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그리고 이제 그 오십도 가물가물한 노인이 되어 그 서원은 짐으로 지고 간다. 그러나 그때의 내 결정에 대해 얼마나 크게 감사하며 사는지, 그 또한 내가 누린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하며 산다. 그 시절 내가 배운 것은 삶을 고백하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출판사를 잠시 했던 일이다. 그때만해도 참 엉뚱한 일이었다. 신문모음집을 만들어 출판을 했었다. 당시에는 “신문의 행간을 읽는다”는 말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사건에 담긴 진실을 행간에 숨겨 놓아야만 신문을 발간할 수 있던 암울한 시대의 한 단면이었다.

바로 행간에 숨어있는 진실을 한데 모아 독자들에게 전해보겠다는 뜻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도가 있는 일종의 뉴스 포탈 같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끝은 뻔했다. 망했다.

이 두가지 경험은 내 이민생활의 명(明)과 암(暗)을 잇는 그 굴곡진 시간들의 빌미가 되었다.

그렇게 내 젊은 시절의 방황은 신촌을 떠나 이민생활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