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욕부터 배우다

방황 – 2

이즈음이야 ‘뭐 그깟 일’ 정도로 치부될 일이겠다만, 1970년대 중반에 나이 스물 몇 살의 처자가 홀로 미국 취업 이민을 떠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떠난 누나의 길을 어머니, 아버지, 막내동생, 나와 아내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아래 동생내외가 쫓아왔다.

한 동안 부모님과 네 남매 가족들 그리고 처부모님 모두 한 동네에서 살았다. 지금, 부모님들은 모두 떠나셔 집 근처 “모든 성인들의 묘지, all saints cemetery”에 함께 계신다. 이젠 멀리 떨어져 사는 아랫 동생네 부부 이외는 모두 언젠가는 부모님 곁에 누울 것이다. 아들 딸 조카들 모두들 가정을 이루어 손주들이 열셋이고, 곧 하나가 더해질 것이다. 하여 누님은 어머니 아버지 태에서 난 우리 집안의 시조다.

언젠가 “도대체 그때 왜 떠났오?’라는 내 물음에 누나가 했던 대답이었다. ‘글쎄… 첫째는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고…. 둘째는 감사였을 텐데…. 나는 그리 넉넉지도 않은 우리 형편에 나를 대학까지 보내준 부모님께 대한 감사가 컸어. 지금 사람들 기억 못 할 거야. 그때만 해도 여자들이 대학 가는 거 쉽지 않았어. 좀 사는 애들만 갔지. 아무튼 그 감사에 대한 보답을 하는 방편으로 그렇게 선택했던 거 같은데…’

70대 중반을 꺾어 넘긴 누나는 이즈음 아내와 함께 그림공부에 빠져 지낸다. 지난 수난절 기간에 누나가 그린 예수상을 보다가 어릴 적에 누나가 치던 피아노가 생각났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누나는 두꺼운 마분지를 잘라 이어놓은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실물처럼 그려 놓고서는 피아노를 쳤었다. 건반의 음들은 가슴속에서 울렸을 것이다.

<신나게 욕부터 배우다>

뉴욕에서 이민 초기 어려움을 겪어낸 누나네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한적한 시골인 델라웨어에 터를 잡았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와 젖먹이 아들을 두고서 혼자 먼저 온 나도 한 동안 누나네 덤이자 짐이 되었다.

처음에 뉴욕도 둘러보고 델라웨어도 둘러보면서 많이 망설였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얘야! 천천히 시작하자, 천천히’하시며 그저 좋아하셨던 부모님과 달리 나는 조급했고, 새로운 시간에 대한 불안을 놓치지 못했다.

‘일단 영주권을 얻을 때까지…’라는 다짐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커뮤니티 컬리지 영어반 등록서류를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 동네 우체통 앞에서였다. 사다리들과 알 수 없는 기둥들을 잔뜩 실은 빨간 픽업트럭 하나가 서더니만, 창문을 열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혹시 한국분 아니세요?’, ‘예, 그런데요. 어떻게?’ 그렇게 이어진 질문과 응답이었다. ‘이 동네 사세요?’, ‘예, 온 지 얼마 안 돼서 누나네에…’, ‘아이고 반갑습니다. 저희 집이 바로 저기인데… 시간 있으시면 차나 한잔 하시지요?’

이민 생활 사십 년 동안 참 많은 이들을 만났다만, 이제껏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이는 매형 한분 빼고는 유일한 조용하형을 그렇게 만났다. 자신을 소개할 때 늘 ‘조용합니다’라고 하는 그는 진짜 조용한 사람이다. 그 조용한 사람이 길 가던 내게 대뜸 말을 건넨 것도 참 드문 일이었다고 했다. 내 외가인 한남동과 가까운 용산 사람이어서 친근감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주택의 외벽 마감재인 사이딩 공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날 그가 내게 건넨 말이다. “지금 특별히 하시는 일 없으면 저하고 함께 일 한번 해 보지 않으실래요? 한 번 보시고 해도 좋고 안 하셔도 좋고요.’ 그렇게 그를 따라나선 길에서 두 해가 지나갔다.

난생처음 해보는 노동이었는데 나는 그 일을 매우 좋아했다. 일로 몸에 피로를 느끼고, 쉬며 안도를 느낄 수 있던 맛이 참 즐거웠다. 조용한 조용하 형과 일하는 게 좋았고, 거의 많은 시간을 말없이 홀로 일할 수 있는 시간들을 즐겼다.

그즈음 막 시작되었던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연구 소식을 접한 것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신학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저작들에 빠져 지냈던 것은 비록 그 후의 일이었지만, 그때 잡념 없이 방황을 즐기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사판에서 만나는 일꾼들의 언어는 욕이 태반이었다. 욕 한마디가 들어가지 않은 문장을 만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한 문장 전체가 욕으로 이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싸우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 언어였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배우기 전에 그렇게 공사판에서 먼저 욕설로 이루어지는 영어를 먼저 배웠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의 언어, 사랑의 언어보다 먼저 삶의 언어를 배웠다.

듣기는 많이 들었으나 입으로 뱉어 본 적 없는 이 욕들을 훗날 하늘을 향해 마구 쏟아낼 줄은 그땐 정말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