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must go on

하루 일을 마치고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봅니다. 눈에 딱 들어오는 기사말고는 그저 제목이나 축약기사 몇 문장 읽다 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저 입맛에 맞는 뉴스들을 척척 꺼내 읽을 수 있는 참 좋은 세상(?)입니다. 그게 정말 좋은 세상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

끝난 한국의 보궐선거 이야기와 뒷이야기들 그리고 향후 전망에 대한 기사들도 차고 넘칩니다.

저야  뭐 이미 그쪽 사람도 아니거니와, 공화당과 신민당이 다투던 시절 정치에 익숙한 사람인지라 고물도 이만한 고물이 있을까 싶은 사람인데 감히  2014년 문명의 한국정치를 이야기하는 일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일 겝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대한민국 군대 삼년을 복무했던 한때 “민족 중흥의 역사적사명을 띄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정치판 훈수 한자락 정도는 가당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몇자 적어봅니다.

대부분의 기사에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래, 뭐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지.”하며 넘어가는 것이지만 도대체 몇가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래 그 이야기 몇자 적어 보려는 것입니다.

우선 여 11석, 야 4석에 대한 결과입니다. 압승과 참패라는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뭐 그렇다고 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결과에 대한 수많은 해설과 논평, 전망 가운데 딱히 동의할 만한 것이 없었답니다.

열 다섯 곳에서 실시된 보궐선거 가운데 제 관심을 끌어던 곳들은 서울 동작, 전남 순천.곡성, 울산 남구을 등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곳들은 지난 몇개월 동안 뉴스를 제대로 훑어 본 이들이라면 가히 짐작 가능한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관심을 주었던 세 곳의 결과를 보면서 제 머리속에 든 생각들이랍니다.

아주 간략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은 진보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사람들의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때문입니다. 바로 표심입니다.

그 표심이란 넘쳐나는 뉴스와 평론과 논설들이 분석하고 서로 제 잘난 말장난 하듯 뭐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배 부르고, 내 등 따스면 그만”이라는 표심의 밑바탕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 유권자 또는 주권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곳의 유권자나 주권자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유권자들의 생각이  명하게 드러난  것아 바로 동작구와 전남 순천.곡성의 결과입니다.

“내 배 부르게, 내 등 따습게”에 표를 던진 이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순천,곡성을 두고 지역주의 타파라고 거품무는 말들은 모두 가짜라는 생각입니다. 그 곳은 다만 “자기 동네사람이라는 혈연, 지역, 계파로 뭉뚱그려져 거기에 우리끼리 걸지게 먹고 마시고…”라는 생각들이 뭉쳐진 결과일 뿐입니다.

동작구는 왈 “강남 4구”가 먹힌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유권자들의 표심이 결코 나쁜게 아니라는 지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이런 유권자들의 생각 곧 민(民)의 생각의 흐름을 잘 읽고 뒷생각이나  아무런 책임감 없이 감언이설로 거친 말로 하자면 유권자 상대로 사기에 능한 세력들이 이겼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뭉뚱그려 여권에 속한 정당 및 사회 제반 세력들이라고 한다면 반대 쪽은 정말 초라하답니다.

어찌보면 11대 4도 정말 선전한 것이란 생각도 든답니다.

상대는 민(民)을 알고 민(民)을 속이는 방법에 통달하고 있는데, 이쪽은 자기들이 민(民)을 아직도 가르친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답니다. 단지 한편일 수도 있는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친다고 다툼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비단 야(野)라고 불리우는 정당 뿐이 아닙니다. 이른바 언론, 대안매체, 스스로 진보연 하는 제반 단체들 아니 개인들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생각을 해봅니다.

이 글을 쓰다가 “안철수 1기…”운운하는 기사 제목을 보면서 기사가 아닌 사기는 이 바닥에서 언젠가일지 모르는 그날까지 show must go on 일 것 같습니다.

세월호

“세월호 집단 생수장(生水葬) 학살사건”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세력만 있다면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 나아가 한글을 쓰는 모든 이들의 떳떳한 미래가 열린다는 생각으로….

그런 내일을 준비하는 정치집단이 다음 권력의 주인이기를 빌며….”

거위의 꿈

엊그제 페북에 올라온 유튜브 영상 하나가 머리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머물고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인 고(故) 이보미양과 가수 김장훈씨가 부른 듀엣곡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입니다.

생전에 이보미양이 학교 행사를 준비하면서 녹음했던 노래에 가수 김장훈씨가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만든 작품이랍니다. 보고 들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냥 쓰리고 아팠습니다.

어제 오늘은 증인으로 법정에 선 생존  단원고 학생들의 증언들이 “거위의 꿈”으로 인한 아픔을 더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연관져서 떠오른 그림이 제 블로그 대문을 꾸미고 있는 피카소 그림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입니다. (연관 글 그림하나)

CCA≪¼O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10월부터 12월 7일 사이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주민 대학살 사건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당시 신천군민의  4분의 1인, 약 3만 5천 여명이 희생된 끔직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숱한 사람들을 죽인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확실치가 않답니다.

한반도 북쪽 정권은 그 학살자의 주범은 미군이라고 하고, 한반도 남쪽 정권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북의 노동당과 인민군에 대항한 우파 지하조직 및 신천군민의 저항이며 반공투쟁 사건이라는 당시 월남민(越南民)의 소리만을 부각시킨 채 그저 침묵일변입니다.

현재까지 드러난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보면 미군은 아닌 것 같고, 당시 극심한 좌우 대립과 신천군의 특징상 토지개혁으로 첨예화된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 아닐까하는 설이 우세하다고 합니다.

아무튼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한쪽은 무방비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완벽한 무장 상태입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生水葬) 학살 사건을 단순 교통사건로 치부하는 잡놈(들)도 있다는 뉴스도 보았답니다. 천걸음, 만걸음을 양보해 교통사고쯤으로 치부한다하여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보행자가 파란 불에 길을 건너다 완벽한 무장 상태로 질주하는 차량에 치어 죽었는데  정상적인 국가(기관)권력이라면 그 사고의 원인을 따져 묻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질주하던 차량의 운전사(이것조차 분명하지 않지만)가 죽었으니 이 사건은 없던 일과 똑같다는 투입니다.

약 65년 전에 수만 명이 누군가에 의해 죽었는데도 누가 죽였는지를 모르는 우리들의 역사랍니다.

25년 전, 광주 학살을 보고 당한 눈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학살자들은 시침 뚝 떼고 살아가고, 엄한 곳으로 핑계를 돌리는 역사가 연속인 오늘입니다.

거위의 꿈을 부르던 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아픔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은 여전히 그저 무방비 상태입니다.

무릇 국가란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삶을 편안히 누릴 수 있는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총과 포와 미사일로 완전 무장하여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을 죽여야만 학살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히 누려야 할 삶을 보장하지 못하고 죽음을 방치한 권력 역시 학살의 주범입니다.

아픔 가운데, 오늘 법정에서 검찰측 물음에 증언한 단원고 어느 학생의 말에서 희망을 봅니다.

문 : 먼저 탈출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을 탈출시키면서 남아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답 : 내가 안하면 (아이들이) 그냥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움직였다.

(거위의 꿈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게하는 해답일 겝니다.)

조선민국 7 – 백년

백년이라는 세월이 참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온 집안 식구가 모였던 자리였습니다. 오는 구월이면 유치원(kindergarten)에 들어가는 조카손주아이의 재롱을 즐기고 계신 왕할머니와 왕할아버지(조카손주 아이들이 제 부모님을 부르는 호칭들입니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를 왕할아버지와 왕할머니로 부른답니다.

아이들의 왕할아버지와 왕할머니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시고, 백세시대로 접어드는 때에 조카손주들이 백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거의 이백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만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입니다. 그리 생각해보니 백년이라는 세월이 참 별거 아니구나하는 데까지 이르던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사람살이가 이즈음 우리들이 사는 모습으로 얼추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끽해야 삼백년이 채 안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사람살이의 변화 또는 인류역사의 변화란  어찌보면 짧은 한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가히 망상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살이의 변화를 역사발전이라고 말하던, 신의 섭리라고 말하던 돌이켜보면 인류는 똑같지는 않지만 어떤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살아 온 듯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그 삶의 맥을 이어왔더라도 말입니다.

일테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문화라는 문화의 발전과정이나 비단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발전 과정을 보노라면 지구상 어떤 민족이나 종족들의 살아온 과정들은 거의 엇비슷한 보폭으로 여기까지 온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살이의 변화를 역사발전 또는 신의 섭리라고 말했을 때 이미 그 말 안에는 그 변화가 나아지는 쪽으로 이른바 진보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갖게 된 것이 고작 삼백 년이 채 안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잡설이 이렇게 길게 되었답니다.

한 삼백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은 사람살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아주 먼 옛날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답니다. 기독교 영향 아래에서 생각의 틀이 짜여져 내려온 서구에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살이가 나아가는 것으로 여겼고, 중국적 생각의 틀을 가쳐 살았던 동양에서는 요순(堯舜)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살이 궁극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의 틀이 깨어진 것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와 19세기를 넘어오던 그 때에 일입니다.

자본주의를 일으켜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영국이 식민지 아메리카를 잃고, 공산주의를 잉태하게 된 때가 그 무렵이고,  신생 미국이 독립한 것 때가 바로 그 때였으며, 서구 유럽을 바닥부터 뒤엎고 새로운 질서의 근간을 세운 프랑스 대혁명이 그즈음에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심심치않게 입에 오르내리곤 하는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하는 말들이 생긴 때이기도 합니다.

서구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이내 동양으로 건너와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나아가는 원인이 되었고, 중국 청나라의 급격한 몰락의 시발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 무렵 한반도는 조선의 마지막 유교적 제왕이라는 모습과 실패한 개혁적 이미지를 동시에 갖추었던 이산(李祘) 정조(正祖) 임금의 시대를 지나 몰락의 길에 들어서던 시기였습니다.

1800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0년 사이의 백년은 인류사는 물론이거니와 동서양  많은 주요국가들이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게되는 신시대로 접어 들던 때였습니다.

renan“예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했던 르낭이 교수직을 박탈당한 때가 프랑스 2월혁명 후인 1862년의 일이었으니, 오랜 중세적 종교 사고가 바뀌던 때도 바로 그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냐에 따라 오늘 우리들의 시대를 판가름하는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창극류의 역사적 사고가 단지 한 개인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한인들에게 깊히 각인되어 드러나지만 않을 뿐인 생각으로 굳어진 까닭은 바로 이 시대를 옳게 곱씹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한반도에서는 정조 이후로, 세계사로는 프랑스혁명전후로 부터 대충 한번 훑어 보고자 합니다.

조선민국 6 – 출발

“사람이 소송사건에 있어서 불실한 증언을 하려고 출정하여 그가 한 말을 확증하지 못하면, 그 소송이 생명에 관한 소송일 경우 그를 죽인다.”

지금은 세계 최고(最古)의 자리를 빼앗겼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법전으로 알려졌던 함무라비 법전 제3조의 내용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0여년 전에 바벨론의 왕 함무라비가 반포했다는 바로 그 법전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십계명에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인, 남에 것에 대한 욕심 등입니다.

또한 팔조지교(八條之敎), 팔조법금(八條法禁) 등으로 알려진 한반도 최고(最古)의 법전인 고조선의 여덟가지 법률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살인, 도둑질, 간음 및 강간, 각종 상해에서부터 거짓 증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범죄행위들은 인류 역사와 함께 사람사는 세상이면 어디에건 끊임없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 어느 사회건 이런 범죄행위들은 공동체를 위해 다스려져야하고 그에 대응하는 벌칙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다는 말처럼 이 경우에도 예외는 늘 있어왔습니다. 누가 범죄를 저지르는냐에 제재 대상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영웅적 행위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저지른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이라도 말입니다.

인류사의 발전이란 바로 이런 예외의 적용율이 낮추어지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제 어디서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잣대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즈음 제재받는 않는 국제적 무법자 행세를 하는 이스라엘의 행태나 집단 생수장(生水葬) 사건인 세월호 사건 이후의 대한민국을 보노라면 이러한 역사 발전의 거대한 반동이 일어나고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길게 놓고 따져보면 그 또한 발전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문창극류의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와 정신사가 그렇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 및 이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바로 대한민국, 한반도 나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종의 오늘날 솔직한 자기 모습입니다.

함무라비법전과 십계명과 고조선 팔조법금 아래 사는 모습입니다.

특히 사건 이후 정홍원총리 책임 사임에서 도로 정홍원에 이르는 사이에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 일테면 안대희, 문창극, 김명수, 정성근 등등의 이름들과 뉴스들을 보면서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 시대 한인사회 엘리트들의 모습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비단 그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참으로 저렴한 가치관이 사회 엘리트 행세를 하는데 필수 요소가 된 현실을 벌거벗겨 드러내 놓은 격입니다.

삼백년 전 박지원이 쓴 양반전에는 비슷한 가치관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삼백년 전에 양반행세를 하던 이들이 오늘날의 신양반계급으로 변하는 과정을 돌아보는 일은 바로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삼백년 전인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는 싯점은 바로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거의 동일한 선상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던 싯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창극류의 저렴한 사관(史觀)으로는 볼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랍니다.

조선민국 6 – 출발

“사람이 소송사건에 있어서 불실한 증언을 하려고 출정하여 그가 한 말을 확증하지 못하면, 그 소송이 생명에 관한 소송일 경우 그를 죽인다.” OLYMPUS DIGITAL CAMERA

지금은 세계 최고(最古)의 자리를 빼앗겼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법전으로 알려졌던 함무라비 법전 제3조의 내용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0여년 전에 바벨론의 왕 함무라비가 반포했다는 바로 그 법전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십계명에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인, 남에 것에 대한 욕심 등입니다.

또한 팔조지교(八條之敎), 팔조법금(八條法禁) 등으로 알려진 한반도 최고(最古)의 법전인 고조선의 여덟가지 법률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살인, 도둑질, 간음 및 강간, 각종 상해에서부터 거짓 증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범죄행위들은 인류 역사와 함께 사람사는 세상이면 어디에건 끊임없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 어느 사회건 이런 범죄행위들은 공동체를 위해 다스려져야하고 그에 대응하는 벌칙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다는 말처럼 이 경우에도 예외는 늘 있어왔습니다. 누가 범죄를 저지르는냐에 제재 대상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영웅적 행위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저지른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이라도 말입니다.

인류사의 발전이란 바로 이런 예외의 적용율이 낮추어지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제 어디서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잣대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즈음 제재받는 않는 국제적 무법자 행세를 하는 이스라엘의 행태나 집단 생수장(生水葬) 사건인 세월호 사건 이후의 대한민국을 보노라면 이러한 역사 발전의 거대한 반동이 일어나고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길게 놓고 따져보면 그 또한 발전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문창극류의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와 정신사가 그렇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 및 이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바로 대한민국, 한반도 나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종의 오늘날 솔직한 자기 모습입니다.

함무라비법전과 십계명과 고조선 팔조법금 아래 사는 모습입니다.

특히 사건 이후 정홍원총리 책임 사임에서 도로 정홍원에 이르는 사이에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 일테면 안대희, 문창극, 김명수, 정성근 등등의 이름들과 뉴스들을 보면서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 시대 한인사회 엘리트들의 모습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비단 그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참으로 저렴한 가치관이 사회 엘리트 행세를 하는데 필수 요소가 된 현실을 벌거벗겨 드러내 놓은 격입니다.

삼백년 전 박지원이 쓴 양반전에는 비슷한 가치관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삼백년 전에 양반행세를 하던 이들이 오늘날의 신양반계급으로 변하는 과정을 돌아보는 일은 바로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삼백년 전인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는 싯점은 바로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거의 동일한 선상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던 싯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창극류의 저렴한 사관(史觀)으로는 볼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랍니다.

조선민국 5- 인두겁

덴마크 사람 Allan Sørensen 이라는 이가 트위터에 올린 사진 한장과 짧은 트윗 글이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올린 트윗글입니다. 

“(여기는)Sderot 극장.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황을 보기 위해 이스라엘인들이 Sderot 언덕에 의자를 깔고 앉아있습니다. (이들은) 폭음이 들리면 박수를 칩니다.”(Sderot cinema. Israelis bringing chairs 2 hilltop in sderot 2 watch latest from Gaza. Clapping when blasts are heard.) 

사진속에는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는 이스라엘 여성의 얼굴이 눈에 띕니다. 

Allan Sorenson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인해 벌써 이백명이 웃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 이들 중 대부분이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들 –  목숨을 잃었습니다. 

역사, 종교, 인종, 문화, 영토 등등 팔레스타인의 모든 문제들을 다 접어 놓고 “사람 – 곧 신 앞에 선 피조물”이라는 눈높이로만 따져보자면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말이 짐승들에게 미안할 정도입니다. 

인두겁을 쓰고는 차마 하지 못할 짓들을 Sderot 언덕에서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행세하는 년놈들이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生水葬) 사건이 일어난지 어느새 석달이 꽉 찼습니다. 지난 석달 동안 바로 인두겁을 쓰고 사람 행세하는 년놈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단 한국(남한 또는 대한민국)에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남북한을 비롯한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한인사회에 이미 차고 넘치는 현상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행세하는 년놈들의 으뜸되는 뚜렷한 특징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염치지심(廉恥之心)을 상실한데 있습니다. 

지난 석달동안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린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말과 행태를 일일이 곱씹을 필요도 없이 모든 분야에서  – 정치, 행정, 문화, 언론, 종교, 학문 등등 –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두겁을 쓴 자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제반 분야에서 누리고 사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정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저와같은 이름도 없이 장삼이사(張三李四)로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너무도 흔히 부딪혀 만날 수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약 삼백년 전 박지원이 양반전을 쓸 때만 하여도 조선반도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그래도 넘쳐났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제 세월호 백일을 앞두고 다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조선민국 –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그리며.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

주일 아침, YAHOO 대문에 걸린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와 소개드립니다.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딱히 6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도 아닐터이고,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닐겝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늘 가치 있는 것이거니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가능 또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메세지로 읽어 봅니다. 

소개 드립니다. 

at 60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

60세 이상의 인구는 1980년 이래 두배로 되었고, 2050년도 까지 전세계 80세 이상인구는 3억 9천 5백만 명에 달할 것이다.

하지만 장수한다는 것이 단지 숫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를 훨씬 넘어, 창조력과 야망으로 자신들의 삶을 부러움을 살 만하게 영위한 놀라운 10인을 살펴본다.

Frank McCourt, 문학

66세에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1996년에 발간된 책, “Angela’s Ashes”은 5백만 부가가 팔렸으며, 이 작품으로 McCourt는 퓰리처 상, ‘National Book Critics Award,’ ‘ABBY Award,’ LA 타임즈 ‘Book Award’를 수상했다.

A.C. Bhaktivedanta Swami Srila Prabhupada, 종교

69세에 ‘International Krishna Conciousness (ISKCON)을 창립했다.

Prabhupada는 1966년 7월 11일 ISKCON 조직을 뉴욕에서 등록했다. 그로 부터 11년 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세계를 14번 여행했다. 그 후 그의 저술은 76개국어로 번역되었다.

Mary Delaney, 예술

72세에 종이 콜라주(Paper Collage)를 발명했다.

그 후 10년 동안, Delaney는 식물학적으로 정확한, 종이를 잘라 만든 꽃 985점을 창작했다. 그녀는 조지 3세와 샬롯 여왕과 친분을 맺었으며, 이들은 Delaney의 말년에 윈저 궁에 처소를 제공해주었다. Delaney의 작품들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Laura Ingalls Wilder, 문학

65세에 선풍적 인기를 끈 ‘Little House’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Wilder는 “Little House on the Prairie (1935),” “On the Banks of Plum Creek (1937),” “By the Shores of Silver Lake (1939)” 등의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책들은 원조 TV 시리즈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Estelle Getty, 연기

63세에 ‘The Golden Girls’에서 대대적인 명성을 성취했다.

그 때까지 연기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가, 쇼가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를 치면서, 7년 동안 방송되어 Getty는 일약 유명해졌다.

Fauja Singh, 체육인

89세에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을 달렸다.

Singh은 총 10번 마라톤 경주를 했으며, 100세때 토론토 마라톤에서 최고령 마라톤 완주자가 되었다. 2014년 나이가 102세 이지만, 그는 여전히 매일 7-8 킬로미터를 달리고 있다.

Clara Peller, 대중 문화

“Where’s the Beef?”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Wendy’의 얼굴이 되고, 대중 문화의 스타가 되었다.

1984년 81세의 나이에, 그녀는 ‘웬디’ 광고에 상징적 데뷰를 했다. 경쟁사의 빵은 크고 고기 덩이는 작은 것을 보며, 그녀는 큰 소리로 “Where’s the Beef?’ 라고 물었다. Clara와 그 캐치 프레이즈는 수지맞는 대중문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Grandma Moses, 예술

78세에 민속 예술가이며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1938년, 여행하던 한 예술품 수집가가 어떤 상점 창가에 있던 Moses의 그림에 주목했다. 그는 그 그림들을 뉴욕의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 전시했다. 그녀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녀의 그림은 연하장(greeting cards), 포스터, 자기 접시에 등장했다. TV 전기영화가 방송되었고, Grandma Moses는 1953년 타임지 표지 인물로 게재되었다. 101세로 타계했을 때, 그 소식은 미국과 유럽에서 전면 뉴스로 보도되었다.

Harry Bernstein, 문학

96세에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수십년 동안 출판사의 거절 통지를 받은 후, 그의 회고록, “The Invisible Wall: A Love Story that Broke Barrier”은 영국 북부지역의 한 가난한 공장지역에서 유태인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으로, 마침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Colonel Harland Sanders, 패스트 푸드

65세에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식당을 창업했다.

창업 9년이 지나 프랜차이즈가 600개에 달했을 때, 그는 KFC의 지분을 2백만 달러에 팔았다. 현재 그의 초상은 치킨 버켓과 전세계에 있는 KFC 상점 수천개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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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알렌이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불후의 명성을 성취하고 싶지 않다. 나는 죽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성취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예들이 보여주듯이, 적절한 나이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원문보기 

우리 시대의 역설(The paradox of our time)

우리 시대의 역설은…(The paradox of our time in history is that …)         – 제프 딕슨 (Jeff Di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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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높아졌지만 성정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We have taller buildings but shorter tempers, wider freeways, but narrower viewpoints 

소비는 늘고 소유는 줄었다. 더 많이 사지만 기쁨은 줄었다

We spend more, but have less. We buy more, but enjoy less.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줄었고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We have bigger houses and smaller families, more conveniences, but less time.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줄었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줄었고,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더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We have more degrees but less sense, more knowledge, but less judgment, more experts, yet more problems, more medicine, but less wellness. 

술은 더 많이 마시고, 담배는 더 피우고, 분별없이 지나치게 지출하고, 웃음은 너무 적고, 너무 빨리 운전하며, 성급히 화내고, 아주 늦게까지 자지 않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일어나며, 책은 거의 읽지 않고, 텔레비죤을 보는 길지만, 기도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We drink too much, smoke too much, spend too recklessly, laugh too little, drive too fast, get too angry, stay up too late, get up too tired, read too little, watch TV too much, and pray too seldom. 

가진 것은 몇 배나 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하지만 미워하기는 자주한다.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살아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수명은 연장했지만, 세월 속 삶의 의미를 깨닫는 방법은 잃었다

We have multiplied our possessions, but reduced our values. We talk too much, love too seldom, and hate too often. We’ve learned how to make a living, but not a life. We’ve added years to life not life to years. 

저 멀리 달에 갔다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우주는 정복했지만 우리안의 정신세계는 다스리지조차 못한다. 대기는 정화시켰지만, 영혼은 오염시켰다. 원자는 정복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했다.

We’ve been all the way to the moon and back, but have trouble crossing the street to meet a new neighbor. We conquered outer space but not inner space. We’ve done larger things, but not better things. We’ve cleaned up the air, but polluted the soul. We’ve conquered the atom, but not our prejudice. 

글은 더 많이 쓰지만, 더 적게 배운다. 이루는 것은 적다. 돌진하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것은 배우지 않았다.

We write more, but learn less. We accomplish less. We’ve learned to rush, but not to wait.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수많은 사본을 생산하는 컴퓨터는 더 많이 만들었지만, 소통은 점점 더 줄인다.

We build more computers to hold more information, to produce more copies than ever, but we communicate less and less. 

인스턴트 음식과 더딘 소화, 큰 체격과 편협한 성품, 엄청난 수익과 피상적 관계의 시대, 그것이 바로 지금이다.

These are the times of fast foods and slow digestion, big men and small character, steep profits and shallow relationships. 

부부 둘이서 벌지만 이혼은 늘고, 멋진 집 그러나 결손 가정의 시대,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시대이다. 빠른 여행과, 일회용 기저귀, 일회용품 도덕성, 순간적 사랑, 비만, 기운 북돋우게 하는 것에서, 가라앉게 하고, 죽이는 것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하는 약품의 시대,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이다.

These are the days of two incomes but more divorce, fancier houses, but broken homes. These are days of quick trips, disposable diapers, throwaway morality, one night stands, overweight bodies, and pills that do everything from cheer, to quiet, to kill. 

전시실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저장실에는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이다. 테크놀로지가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달할 때, 이 식견을 공유하거나 혹은 ‘삭제’ 버튼을 누룰 지 선택할 시간이다.

It is a time when there is much in the showroom window and nothing in the stockroom. A time when technology can bring this letter to you, and a time when you can choose either to share this insight, or to just hit delete.

봄나물

지난 해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일찌감치 은퇴생활을 즐기는 줄 알았던 벗이 보낸 봄소식을 받았습니다. 두릅, 부추, 취나물 등 그가 키워 거둔 봄나물들이었습니다.

봄나물

한국에서 오랜기간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온 이 벗에게 이민생활 초기는 그리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다 십 수년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집 뒤뜰 텃밭 농사를 제법 규모있게 지었답니다.

펜실베니아 시골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휴대폰도 잘 안터진답니다. 그 뒤뜰에 제법 훌륭한 비닐하우스를 짓고 각종 푸성귀 농사를 지었답니다. 덕분에 해마다 봄이면 봄맛을 보곤 했었답니다.

그의 손길로 이룬 기름진 텃밭에서 자란 푸성귀들로 식탁이 풍성해지는만큼 벗의 이민생활도 웃음 가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아들 하나 잘 키워 예쁜 며느리도 들인 후, 미련없이 사업체를 딱 정리한 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도 듣곤 하였지만 직접 연락은 두절한 상태로 지냈답니다.

한 두어 주전에 어느 식사자리에서 제법 도인(道人)이 된 그를 만났답니다. 머리를 길러 꽁지머리를 묶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농사짓고, 도기(陶器) 굽고, 분재(盆栽)를 키우며 살고파하던 그의 꿈들을 이루며 사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봄나물을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주일 아침입니다. 농사짓는 벗 덕분에 어머니와 장모에게 봄소식 선물을 드릴 수 있어 참 좋은 아침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면 두 어머니에게 봄나물 드리는 일이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