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 정청래 그리고 정명(正名)

어제 미니 슈퍼 화요일 경선을 고비로 미국 대통령선거 레이스도 종반으로 접어드는 모습입니다. 공화당의 트럼프와 민주당의 클린턴으로 각당의 후보가 압축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오늘자 US Today는 아직 게임이 끝난게 아니라는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은 숫자 계산 때문에, 민주당은 공약 때문에 이 레이스는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이다. This is going to take a while — for Republicans because of math and for Democrats because of message.” 라는 분석보도는 사뭇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비록 어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하이오 주에서 이 지역 주지사인 존 케이식 후보에게 패배한 트럼프는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과반숫자인 매직넘버 1237명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크게 문제 될 것 없을 듯 한데, 그를 반기지 않는 공화당 주류들이나 반대론자들은 오는 7월 Cleveland에서 열리는 공화당 중재전당대회로 이어지기를 희망하는 듯합니다.

민주당은 힐러리로 굳혀져가는 모양새이지만 버니 샌더스의 지지층들이 워낙 강고한 결속력을 보이고 있어 이 둘 사이에 각종 정책현안들에 대한 이견을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 있다는 분석입니다. 공화당과는 달리 슈퍼 대의원제도가 있거니와 그 슈퍼 대의원 숫자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샌더스가 후보 지명권을 획득하기엔 아무래도 무리일 듯합니다만 결속력 강한 샌더스의 지지자들을 끌어들일만한 정책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샌더스의 모험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미국을 위해 좋겠다는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에서 샌더스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클린턴이 안정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적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면에 있어서 현재 양당을 통틀어 모든 후보자들 가운데 가장 적임자가 아닐까하는 측면에서도 클린턴 지지를 하고 있답니다.

Donald-Trump클린턴 지지에 앞서 절대 되어서는 안되겠다싶은 인물이 트럼프입니다. 샌더스보다 더욱 호불호가 강한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민 일세로 이 땅을 살아가는 저같은 사람에게는 기피대상 일호입니다. 특히 그가 종교를 앞세워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증오대상을 적시하여 표적화하고 시민들의 현실 불만과 채워지지 못한 욕구가 마치 그가 만들어 놓은  증오대상들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호도하는 정치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론적인 이유에 앞서 자칫 그가 증오대상으로 쳐놓은 그물에는 내 아이들과 후대들이 걸려들 가능성도 있겠다는 염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힐러리의 후보 지명과 당선 보다는 트럼프의 대권 꿈을 막아내는 것이 유권자로서 제 몫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는 이즈음이랍니다.

한국 역시 총선을 코앞에 둔 선거정국입니다. 이민 온후 인터넷으로 세상이 연결되기 전,  십 수년 동안 한국내 뉴스들 특히 정치뉴스는 접할 기회가 없어 거의 잊고 지냈지만, 이젠 안 보려고 하여도 눈앞에 펼쳐지는 게 그 곳 뉴스들입니다.

그러나 떠나온지도 워낙 오래전 일이거니와 선거권 조차 없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듯하여 비록 생각이 있다하여도 말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요 며칠 사이 뉴스에 자주 오른 두 인물 곧 이해찬과 정청래 기사를 보며 한마디 해보고 싶어 몇 자 적어 본답니다.

제가 한국 뉴스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무렵 낯설게 다가왔던 직업군들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정치 평론가”라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몇 번 듣다가 “아! 저러고도 먹고 살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해 본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러 평론가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처음 몇번 듣다가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 인물들 가운데 고성국과 이철희가 있습니다. 사실 이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제가 들어 본) 평론가들의 논점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논리입니다.

이네들은 (특히 진보연하는 이들) 우선 논평의 대상을 양비(兩非)의 잣대로 재단해서 올려 놓습니다. 그리곤 이기는 놈이 옳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어찌보면 이런 재단과 주장은 정치평론가들만의 것만이 아니라 이즈음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모든 영역의 이른바 식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도구가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 폭이 넓어지고 길이가 길어지기 전에 이해찬과 정청래로 마치려고 합니다. 두 인물 모두 소속된 정당 공천에서 배제되었고, 이해찬은 해당 정당을 나와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서고, 정청래는 당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백의종군하겠다는 뉴스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결정을 보며 “둘 다 모두 옳은 판단을 하였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답니다. 이 둘은 모두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팽배한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암묵적 시대정신에 “아니오”라고 반기를 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소속한(했던) 정당의 대표인 김종인은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논리로 이들을 배제 시켰습니다.

이해찬은 이러한 배제논리를 절차와 명분을 무시하고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고 우기는 “불의”라고 규정하고 평생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불의와 싸우겠다고 언명하였습니다.

정청래반면 정청래는 “비록 당 지도부가 자신을 버렸지만 자신은 당을 버릴 수 없다”며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논리로 자기 이익에 따라 소속당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태에 일침을 가하며, 지는 것 같지만 이길 수도 있다는 새로운 도전을 하였습니다.

이해찬이 규정한 불의와 맞서 이길런지, 정청래의 새로운 도전이 성공할런지 그 결과는 모를 일입니다.

결과야 어떻든, 두 사람의 선택을 보며 공자선생께서 말씀하신 정명(正名)을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정치인이 정치인다운 모습 말입니다.

그 보다 더 모를 일들은 넘쳐납니다. 제가 트럼프 치하의 미국에서 살 수도 있을 터이고, 이해찬과 정청래가 실패한 사회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인들이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트럼프를 구원자와 구세주로 여기며 오늘도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 것처럼, 정치술사들과 식자들의 놀음에 빠져 오늘도 지역타령으로 날을 지새며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한국인들의 숫자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족>

수 년전에 사십년 가까이 벗 삼아오던 담배와 헤어진 이후, 사십년 넘게 소주 – 하드리커 – 와인으로 변하며 제 곁에서 함께 했던 술과도 최근에 헤어졌답니다. 반주 삼아 마시던 와인조차 끊어 버렸답니다. 헤어진 몇 가지 이유들이 있는데 그 중 으뜸은 ‘가는 날 깨끗하게 떠나는’ 준비를 해야 할 나이에 들어섰다는 생각이었답니다.

우리 또래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올곧게 정명(正名)의 길을 걸어 온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이해찬의 새로운 도전이 성공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올들어 금주로 절약한 돈이나마 후원하려고 합니다.

이제 정치인다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는 정청래를 후원하는 날을 기다리며….

기도를…

넋두리 – 쓰기 싫었고 쓰기 힘들었던 글입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으면서 지역 동포사회 교회들이 함께 기도할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그런 소망을 교회에 전달해 보자는 의견이 필라세사모 모임에서 나왔었습니다. 그런 뜻을 교회에 전달하는 편지작성이 어찌어찌 몫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어서 힘들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신다는 믿음과 한사람, 단  한 교회만이라도 함께 주었으면 하는 기도로 것입니다.


 

기도 부탁 드립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수난과 고난을 되새기는 기간에 귀 교회와 목사님께 기도해 주십사는 부탁의 말씀을 올립니다.

무엇보다 먼저, 수난과 고난을 딛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첫 징표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하나님의 은총이 목사님과 교회위에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는 필라델피아 인근에 살면서 두해 전 이맘 때 한국에서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그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끊이지 않고 있는 필라세사모(‘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약칭입니다.)에 속한 기독교인들입니다.

photo_2016-03-12_20-18-42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에 대한 서로 다른 수많은 소문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2년이라는 세월은 늘 오늘의 문제로 바쁜 사람들에게 잊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아직도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나는 전능하신 분께 말씀드리고 싶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다.>고 한 욥의 고백처럼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저희들처럼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해 전 4월 16일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고로 자식과 가족을 잃기 전까지 말입니다. 물론 사건과 사고로 인해 자식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지난 두해 동안 유가족들이 지내온 모습들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했던 여느 사람들과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네들은 그들이 겪은 비극적 상황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주먹을 쳐들며 항거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어져가는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체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어지는 아픔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희망은 믿는 우리들에게 성서적 언어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사야 11:3-5>

<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계시록 21: 3-4>

바로 그들이 희망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목사님과 교회가 드리는 기도와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업들이 많고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저희들이 드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두해 째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튿날은 주일입니다.

원컨대 바로 그 주일(4/17)에 자식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어가지만,  하늘을 향한 원망이나 항거, 또는 삶의 체념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하여 귀 교회가 함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 –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필라세사모 기독인들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세월호 사건 및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원하시면 전화 000-000-0000, 또는 이메일 [email protected] 주시면 자료들을 보내 드립니다.

거한 생일상

냉이무침, 가지무침, 가지튀김, 사골 도가니탕, 녹두빈대떡, 아구찜, 마파두부, 깐풍기, 깐쇼새우, 유산슬, 난자완스 – 지난 주말에 제가 만들었던 요리들입니다. 요리의 완성도나 맛에 대한 평가는 접어 두고, 제 손으로 만든 음식들로 누군가를 대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 좋은 주말이었답니다.

이따금 음식 만드는 일에 빠져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한 오륙 년 전부터 입니다. 누가 시켜서는 아니고, 그저 제 스스로 내켜서 시작한 일이랍니다.

지난 주말에 식탁에 둘러 앉은 이들에게 한 오륙년 전에 제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연유를 설명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며 웃음을 끊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제 두아이들 이었답니다. 아들과 딸아이는 아마도 애비가 자기들을 위해서, 아니면 엄마를 위해서 음식을 시작한 일이거니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깊은 뜻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고, 입이 짧은 제 식성 때문이었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내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식투정이나 부리는 사내는 아니었답니다.

아마 그 무렵의 일이었을텐데 어머님께서 이따금 만들어 보내주시는 음식들에서 제가 어릴 적 느꼇던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지 못하곤 하였답니다. 어머니께서 늙으신 탓도 있겠지만 제 입맛이 그만큼 변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내의 손맛에 만족하기에는 제 입맛은 늘 까탈스러웠답니다.

그러다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 스스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 본것이 오늘에 이르른 것이랍니다.

제가 음식 만드는 일을 크게 고무시키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도전을 겁내지 않게 해 준 이들은 다름아닌 제 아내와 아이들이랍니다. 식구들이 던지는 “맛있다”는 한마디에  설거질도 당연한 일이 되곤 하였답니다.

그리고 한 달포 전 일이랍니다.

부모, 처부모를 비롯하여 누님댁, 여동생네, 조카들 등등 대가족이 가까이 모여 살고 있는 덕에 가족 대소사가 끊이지 않는 집안이랍니다. 이런 연유도 있거니와 제 별난 성격 탓도 한 몫하여 이제껏 제 생일상은 차려 본 적이 없답니다. 해마다 아내가 던지는 “어떻게?”하는 물음에 “그냥 넘어가!”하는게 제 대답이었답니다. 비록 환갑, 진갑 다 넘긴 나이지만 “아직 애인데… 무슨 생일상을…”하며 넘어가곤 했답니다.

그러다 달포 전에 제가 아내에게 던진 소리랍니다.

“생각해 봤는데….이번 내 생일은 내가 상차려서 부모님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어.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나이로 모두 구순을 넘기셨고, 장인도 그만 하시고, 장모도 병 잘 이겨 내시고 있고…. 나도 이즈음엔 늙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고….. 모두들 아직 건강할 때…. 내가 만든 음식으로 상 한번 차려서 보내는 것도 뜻이 있겠다 싶어서….”

IMG_4889a아내는 스스로에게 모험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건만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답니다.

그래 토요일에는 처부모님과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 내외분을 모시고 제 생일상을, 이튿날인 일요일에는 부모님들과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들 내외분들을 모시고 제 생일상을, 그 다음날엔 형제들과 함께…. 그렇게 거한 생일을 보냈답니다.

이런 저런 뒷일들을 도와준 아들딸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평소 교회도 잘 나가지 않는 저를 보시지 아니하시고 저희 가족들을 위해 귀한 시간 내주신 목사님들 내외분께 감사를…무엇보다 진짜 모처럼의 효도를 흡족하게 즐겨주신 부모님들께 감사를…

한 삼주 동안 독감으로 고생을 했었는데, 때 맞추어 감기도 떨어져 계획대로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해 주신 제가 믿는 신(神)에게도 감사를…

(딸아이가 일주일이 지나서야 보내준 사진들을 들여다보니, 부모님들이 아니라 제가 좋았나봅니다.)

영화 “나쁜 나라”-그 제목이 주는 불편함

이즈음 어린 아이들도 이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세대들이 초등학교에(당시는 국민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입에 달고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1.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2.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3. 새나라의 어린이는 몸이 튼튼합니다/ 무럭무럭 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의 ‘새 나라의 어린이’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1945년 해방된 이후 처음 발간된 <어린이 신문> 첫면에 발표된 것입니다. 해방된 새 나라에 대한 소망은 바로 좋은 나라였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불렀을 어린아이들은 이제 여든 나이에 접어 들었고, 60년대 초반 이 노래를 불렀던 제 또래들도 어느새 육십대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세대들에게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이어야만 했습니다. 저라고 별반 다르지 않아서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늘 앞서 있습니다.

제게 ‘우리나라’는 두개입니다. 하나는 내가 태어난 곳이자 제 인생의 절반을 보낸 나라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뼈를 묻을 곳이자 인생의 또 다른 절반을 보내고 있는 ‘미국’입니다.

저는 이 두개의 ‘우리나라’가 모두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거니와, 비록 부족한 부분들이 많더라도 ‘더 좋은 나라’가 되기를 소망하며 삽니다.

윤석중선생은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는 덕목들로 <나라의 구성원들이 ‘자기 일에 충실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 이익에만 눈멀지 않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하는 것들>을 꼽고 있습니다. 보통 시민들이 지키며 살고자하는 평범한 덕목들입니다.

제가 보고 느끼기로는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이러한 평범한 덕목들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시민들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나라’가 될 개연은 매우 높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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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으로 사는 제게 제목이 <나쁜 나라>인 영화 포스터는 매우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뭔가 잘못된 제목 같아서 입니다.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보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사건 이후 지내온 1년 6개월의 세월을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합니다.

저는 세월호 유가족 육성 기록집인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가슴에 묻은 열 세명의 유가족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입니다.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몸과 정신에 새겨진 깊은 상처들, 자식을 잃은 깊은 상처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넘은 지독한 그리움, 배신과 분노, 절망, 모욕, 또 다른 한편 도움을 준 사람들 그리고 깊은 깨달음> 등을 토해낸 기록입니다.

문제는 그들 대부분 유가족들이 저처럼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건 이후 그들은 <더 이상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외면했던,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실은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진실을 통렬히 깨달>았고, <평범한 자신들의 삶을 성찰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을 읽으며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은 여전히 ‘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자식을 가슴에 묻고 <평범한 자신들의 삶을 성찰 할 수>있는 유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다만 ‘좋은 나라’이고, ‘더 좋은 나라’이어야만 하는 대한민국이나 미국에 차고 넘쳐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권력’, ‘나쁜 정권’, ‘나쁜 언론’, ‘나쁜 종교’, ‘나쁜 자본’들입니다.

영화 <나쁜 나라>는 분명 ‘좋은 나라’이어야만하는 대한민국을 지칭한다기 보다 바로 이런 ‘나쁜 권력’, ‘나쁜 정권’, ‘나쁜 언론’, ‘나쁜 종교’, ‘나쁜 자본’에 대한 기록일 것입니다.

‘나쁜 권력’, ‘나쁜 정권’, ‘나쁜 언론’, ‘나쁜 종교’, ‘나쁜 자본’이 지속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지배하는 사회는 아무리 <좋은 나라>를 지향한다하여도 종국에는 <나쁜 나라>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경고도 있을 터입니다.

그리고 ‘나쁜 권력’, ‘나쁜 정권’, ‘나쁜 언론’, ‘나쁜 종교’, ‘나쁜 자본’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국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외면하는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실은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하는,  <평범한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지 못하는 국민들일 것입니다.

진정 대한민국과 미국이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뉴저지와 필라델피아에서 상영되는 영화 <나쁜 나라> 관람 안내를 드립니다.


 

1) 뉴저지 체리힐 지역

  • 일시 : 2016년 3월 19일(토),  오후 7시 ~ 9시 30분
  • 장소 : 열방교회(All Nation’s Church, 61 Cooper Rd, Voorhees, NJ 08043)

2) 필라델피아 지역

  • 일시 : 2016년 3월 20일(일),  오후 5시 ~ 8시
  • 장소 : PMCA (Phil-Mont Christian Academy, 35 Hillcrest Ave, Glenside 19038)

*** 입장료는 무료랍니다.

신고식

<2016년 2월 호된 신고식을 치루다.>


한 두해전부터 받기 시작한 광고 메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와 올들어 그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은퇴자들을 위한 아파트와 콘도 광고들과 각종 은퇴 관련 상품 광고들입니다.

아직 은퇴라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거니와 제 계획에 따르자면 아직 먼 훗날 이야기이므로 그런 종류의 광고물들은 곧장 휴지통행이 되곤합니다.

지난달인가는 이제 원하면  Social Security 수혜 가능한 연령이 되었다는 안내 메일도 받았답니다.  기차 요금을 비롯한 각종 공공요금의 노인 할인혜택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관심이 없었답니다. 당연히 ‘은퇴 이후’라는 생각은 제 머리속엔 없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가능성은 늘 있는 법이므로 죽어 누울 땅 한조각은 준비해 두었답니다. 물론 먼먼 훗날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독한 감기에 걸린 일은 이달 둘째주 월요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만 삼주가 흘렀습니다만 여전히 약기운으로 지냅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일주일 이상 앓아본 일도 처음이거니와 약을 일주일 이상 먹어본 일도 처음입니다. 사흘 이상 전혀 먹지 못한 일도 처음이고,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일도 처음입니다.

급기야 저혈압 증상으로 일어서다가 맥없이 작대기처럼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어 본 일도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어, 어..”하는 생각은 분명 있었는데 생각과 몸이 전혀 따로 노는 일을 겪으며 속으로 꽤나 놀라는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쓰러지며 무릎에 생긴 퍼런 멍자국을 보며 “이게 신고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년으로 들어서는 신고식 말입니다.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이미 노년으로 들어선 자신을 바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2월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참 많았던 2016년 2월 한달도 저뭄니다.

마음 편한 글들을 찾아 읽다가 눈에 들어온 임어당(林語堂)선생의 가르침으로 신고식 역시 새로운 삶의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노자1<남을 아는 것은 지혜(智)라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明)이라 한다.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다고 하지만,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하다고 한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는 부자라 하고, 자기를 이기는 강함으로 행동하는 자를 뜻(志)을 얻었다고 한다. 근원의 바탕을 잃지 않는 자는 영속할 수 있으니, 설사 죽더라도 그 바탕만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장수하는 것이다.>

재미있게 살기 위하여

독감(毒感)이라더니 정말 독한 놈에게 걸려들었습니다.

약병은 커녕 바이타민 조차 곁에 두고 살지않던 제가 딱 두주째 약기운으로 지낸답니다. 초기 사나흘 앓고 하루 반짝해서 ‘감기가 그렇지 뭐’ 했었는데 웬걸, 그후 꼬박 나흘을 누워지냈었답니다. 그리고 또 하루 멀쩡해서 ‘어이구 독한 놈 만났었네’하고 이튿날이면 털고 일어날 줄 알았답니다. 헌데 정말 독한 놈을 만난 것입니다. 다시 눕고 사흘이 지났답니다.

가벼운 폐렴 증세까지 보이며 급기야 항생제를 넘기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한 수면과 휴식 뿐”이랍니다.

노인네들 한겨울 보내고 새 봄 되어 만나면 겨우내 폭싹 늙었더라는 말이 가히 남 이야기가 아닌 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비록 양은 평소 절반이라도 정상적인 식사를 즐길 수는 있게 되었으므로 하루 이틀 후면 독감과의 동거 이야기를 추억 삼을 수 있게 될 듯합니다.

누워 지내며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신영복선생님께서 남기신 “강의”와 의사 이근후선생님의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입니다.

이근후선생님의 책은 사실 암투병중인 장모님께 드리려고 구입한 것인데 제가 먼저 읽고 말았답니다.

신영복선생님의 고전강의인 “강의”를 읽으며 유영모, 함석헌, 김용옥, 강신주 등의 고전 강의와는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 배우고 깨닫고 행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므로 우선 건강하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 이근후선생님의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를 읽은 아주 짧은 느낌을 적어 제 가게 손님들에게 이메일 편지를 보냈었답니다. 그리고 제법 많은 분들께서 동감이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책 제목이 좋다고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볼일입니다. 무릇 “재미”란 주관적인 것임으로  각자 “스스로”들을 위하여.

(아래글은 손님들에게 보낸 편지)


이근후지난 주간에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입니다. 50년 동안 정신과 의사로 일해오다 은퇴한 올해 81살인 한인 의사 이근후라는 이가 쓴 책입니다. 누구나 읽기 쉽게 쉬운 말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며 느낀 점들을 기록한 책입니다.(아쉽게도 영문본은 없으니 제가 소개해 드립니다.)

저자 이근후씨 내외는 12여년 전부터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제일 어른이랍니다. 2남 2녀인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다들 각자 따로 살다가 12여년 전에 모두 함께 모여 살면 어떻겠냐?는 생각으로 한집안에 모두 모여 살게 되었답니다.

이 제안은 그의 장남 내외가 먼저 꺼냈고, 다른 자녀들이 동의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박사 내외는 끝까지 망설이다가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5 가정이 함께 사는 이 집의 구조는 매우 독특하답니다. 출입문이 각기 다를 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구조를 지녔다고 합니다.

이근후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족들은 내 인생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내 인생이다. 칙구, 제자, 동료, 환자들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나고, 산에서 만나고, 봉사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나의 인생이었다.”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누구라도 얼굴을 떠올리면 그가 가진 장점이나 좋은 기질 달란트를 기억해 낼 수 있다. 내 인생이기에…”

저는 그처럼 대가족을 이루고 살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삶을 흉내낼 처지도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내 가족 얼굴 하나 하나마다 내 세탁소 손님 한분 한분에게마다 그들을 떠올리 때면 내가 좋아지는 이미지나 의미를 새겨넣는 훈련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재미있는 하루 하루들은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Last week, I read a book, entitle “I Want to Live a Fun Life until I Die.” It was written by Keun-hoo Lee, MD, who is an eighty-one year old retired neuropsychiatrist and professor.

It is a book in which he recorded what he felt, looking back over his life, in plain terms to make it easy to read. (Unfortunately, as it has not been translated into English yet, I’ll introduce it to you.)

The author, Dr. Lee and his wife head a family of three generations. His two sons and two daughters got married and moved out. But about twelve years ago, he, his wife and his children talked about an idea that all of them would live together in one house and decided to do so.

His oldest son and his wife brought up the idea, and the other son, daughters and their spouses supported it. Initially, his wife and he hesitated to consent to it, but then decided to go along.

The house in which five families live together has a unique structure. The entrance for each family is separate and different and no one interferes in what the others do.

Dr. Lee said:

“My family is my life. Not just my family, but all the people who I have met in my life are my life. Friends, students, colleagues, patients, those who I have met in traveling, hiking, and volunteering ― all those countless encounters were my life.”

“I don’t remember all of their names, but if I recall any of their faces, I can recollect his/her virtue, good disposition, or talents. Because they are my life…”

I don’t think that I can afford to lead an extended family in a house like him or to imitate his extraordinary life.

Having said that, I think that I can train myself to carve in my mind the good perceptions and images which match every face of my family and every customer of mine.

I wish that you will have a fun life every da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뉴욕 나들이 후기

어제 딸아이 사는 모습 좀 보고 오느라고 뉴욕을 다녀왔답니다. 아이가 연휴면 종종 집에 오느터라 자주 가보지는 않는답니다.

뉴욕 맨하턴 나들이에서 제가 즐기는 몇가지가 있답니다. 주차비에 치이고, 맨하턴에서 차 사고를 한번 당한 이후에는 맨하턴 나들이는 언제나 기차 아니면 버스를 이용한답니다. 우선 그 교통 수단의 편안함입니다. 버스나 기차나 오고가는 시간에 누리는 편안함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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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턴 한인거리에 있는 서점 방문과 한식당에서 누리는 한끼 입맛의 호사와 곁들이는 소주 한잔의 즐거움 등이 나들이를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랍니다.

지난 가을에 뉴욕 나들이를 했을 때는 서점이 리모델링 공사중이라 문을 닫아 그 즐거움 가운데 하나를 놓쳤었답니다. 딸아이에게 서점이 공사를 끝내고 다시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내심 알라딘을 통해 구입하려던 책들을 이번 나들이 몫으로 미루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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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과 판매 서가에 꽂힌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책방과의 차이는 맛이 다름에 있지요. 같은 책을 구입해도 정말 맛이 다르답니다.

새로 꾸민 서점의 모습에 실망이라기 보다는 안타까움이 밀려 왔습니다. 우선 규모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 들었답니다. 그렇게 줄인 나머지 공간은 화장품 매장과 의류 매장으로 꾸며져 있었답니다.

그렇게 줄어든 공간에서 느꼈던 안타까움을 증폭시킨 것은 서가에 진열된 책들이었습니다. 웬 요리책들이 그리 많이 꽂혀있던지요. 좁은 공간에 거의 한 섹션을 이루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맹목적인 기독교 서적들과 자기 개발서들이 주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서점 비즈니스의 현실을 들어내고 있었답니다. 저만해도 서점 나들이는 그저 이따금 누리는 재미일 뿐, 아마존이나 알라딘이 편한 것을요. 그나마 서점을 그렇게 유지하려는 주인장의 아픔을 느꼈다할까요.

서점 방문에 앞서 들렸던 macy 백화점에서의 느낌도 새로운 것이었답니다. 사실 저는 뉴욕 macy 백화점 안에 들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랍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샤핑을 할 때면 저는 늘 따로 놀곤 했었는데 이번엔 함께 했답니다. 늙어가는 징조일겝니다.

매장에 들어가서 제가 놀란 것은 매장 일층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치장들이었습니다. 중국의 춘절 곧 우리 설날을 중국풍으로 드러낸 장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 3, 4층으로 올라가면서도 똑 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바로 빨간색을 주조로 한 치장들이었습니다.

중국 소비자들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어제 서점에서 사온 책들을 훑어 보다가 눈에 들어온 대목입니다.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IMG_20150426_082042얼마전에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의 책 ‘강의’ 162-163쪽에 실려 있는 말입니다.

세상은 늘 변하고 시대의 대세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딱히 자본주의의 변화 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국 또는 한국 이라는 국가 단위 공동체도 부단히 변해갑니다.

점점 설자리 잃어가는 서점 주인과 쇠락해가는 macy 뿐만 아니라  동(同)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이 사회가  화(和)를 주창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이는 밤입니다.

어느 섣달 그믐

단지 몇 달 사이인데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뉴욕행 버스를 타노라고 차를 터미널 인근 주차장에 대었더니 평소와 달리 티켓 대신에 동전만한 플라스틱 칩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주의사항이 적혀 있는데 칩을 잃어버리면 거의 세배가 넘는 금액을 물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차를 대놓고 아내와 저는 작은 다툼을 벌렸답니다. 아내는 칩을 가지고 가자는 쪽이었고 저는 차에 두고 가자는 쪽이었답니다. 암튼… 늘 그렇듯…

외지인 뉴욕에 도착해서는 몇 달 사이 어리버리 노인네가 된 우리 부부는 살가워질 수 밖에 없었답니다.

모처럼 만난 딸아이는 우리 부부가 노인네라는 것을 직파한 모양입니다. 매사 집에 있을 때와 다르게 침착하고 꼼꼼히 애비 에비를 챙기는 모습이었답니다.

어느새 딸아이가 툭!

아내와 어머니보다 더 윗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섣달 그믐이었답니다.

돌어오는 길 우리 부부는 다 큰 딸아이 이야기로 “쎄쎄쎄…” 하다가…

다시 주차장에 이르러 그 놈의 칩 때문에… 다시 다툼을…

그렇게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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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지하철 매표소 한글 안내를 보며… )

*** 사족 : 차이나 타운에서 우리 세 식구가 정말 맛나게 먹고도 남은 만두와 국수 값에 비해 코리아 타운에서 먹은 순두부와 비빔밥은 거의 두배 반에 이르는값에 비해 서비스도 그에 역비례였다는…

나를 위로하는 시 하나

2016년 새해 달력을 건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장을 넘깁니다. ‘왜 이렇게 빠를까’라는 생각을 하며 시집 몇권을 들었던 것은 엊저녁의 일입니다.

선사(禪師)들이 던진 도(道) 통한 시편들인 임종게(臨終偈)와 이 세상 아픔조차 놀이로 읊었던 천상 시인 천상병의 시편들 그리고 오늘 제 가게 손님 한 분이 “Oh Boy!  Gee Whiz!  Wow!  Golly!  Outta’ sight!  Brilliant!”라며 찬사를 보낸 수녀 이해인님의 시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제 가게 손님들에게 보냈던 편지입니다.

2월을 맞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조금만 더 예쁜 삶을 살기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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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벌써  2월입니다.

일월 마지막 주일 아침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과 시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이미 이 편지를 통해 몇차례 그녀의 시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답니다.

시인의 이름은 이해인이고  1945년생인 그녀는 천주교 수녀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북으로 납치되었습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였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수녀의 길로 들어선 그녀는 그 때부터 많은 시를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후 공부도 계속해서 영문학과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생각들, 천주교와 다른 종교들의 생각들을 두루 익히며 시를 써왔답니다.

그러던 그녀가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은 것은 2008년이고, 오늘까지 병과 싸우며 계속 시를 쓰고 있답니다.

제가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 것은 이런 그녀의 삶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시들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깨끗해지면서 새로운 힘이 솟기 때문입니다.

2016년 두번째 달력을 넘기면서 읽는 그녀의 시랍니다.

2016년 1월의 마지막 주일 아침에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어 소개해 드린답니다.

나를 위로하는 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나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맞는 2월의 하루 하루가 멋진 시간들이 되시기 빌며…


Tomorrow, it will be February already.

For this last Sunday morning of January, I would like to introduce my favorite poet and a poem of hers. I have introduced some of her poems before through this weekly letter.

The poet’s name is Hae-in Lee. She was born in 1945 and she is a Catholic nun.

During the Korea War, her father was kidnapped and taken to North Korea. When she was a freshman in high school, she decided to become a nun. Since she followed her dream to become a nun after graduating from high school, she has been writing poems.

She also continued studying, and majored in English literature in college and the science of religion in graduate school. She kept writing poems while learning and studying Eastern and Western thoughts and Catholic and other religions.

Then, she was diagnosed with colorectal cancer in 2008. Since then, she has been fighting against the cancer, but she keeps writing poems even now.

The reason why I like her poems very much is not because of her life. It is because her poems always set my mind at ease, and I feel both calm and reinvigorated.

It is her poem which I’m reading while tearing off the first page of the 2016 calendar.

I would like to share it with you in this last Sunday morning of January, 2016.

A Day When I Comfort Myself

Occasionally, really occasionally/ I need to comfort myself.

Though not a big thing,/ As if the world had ended,/ When I taste death,

Though undiscovered by others yet,/ When my flaws and weaknesses/ Make me stay awake,

Because of shame/ Not to show my face to anyone,/ When I want to hide behind the door.

That’s OK. That’s OK./ Cheer up./ You can do better from now on.

Though a little embarrassed,/ While I’m comforting myself,/ Quietly/ There are times to stand in front of a mirror.

In which I become to myself/A little bit warmer and more generous/ A full mind,/ A broadly smiling mind.

Before giving to others,/ Which I give to myself first,/ It is a gift of comfort.

I wish that you’ll have a royal time every day in February which you’ll greet with a mind to comfort yourself.

인생행로 (人生行路)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20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셋째 이야기    세월여류 (歲月如流)

인생행로 (人生行路)

사람은 누구나 제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環境)과 여건 속에서 나름 대로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을 세월(歲月)이라고도 하고,  세월의 흐름이 빠르다는 뜻으로 세월여류(歲月如流)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내가 태어났고 여남은 살 때까지 살던 곳인 경기도 용인 땅, <유실> 이라는 마을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내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서 이날까지 지내온 것을 생각해보니, 그러한 느낌이 더욱 새롭다.

<세월여류>라는 말에 공감(共感)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여류)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한다.


아주 간단하고 쉽게 말하자면, 인생(人生)이란 목숨을 가진 사람의 존재(存在), 또는 그 사람의 목숨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기간도 인생이라고 한다.

가수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다.  우선, 그 노래의 가사부터 적고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 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 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위에 적은 가사처럼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간다는 것은 <나그네 길> 같은 것이고, <빈 손으로 태어났다가> <빈손으로 돌아 간다>라는 것을 부정 (否定)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가?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을 떠날 때, 이삿짐 나르듯이 무엇을 가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살다가 언제 가든 간에, 태어날 때 공수래(空手來)한 것 처럼, 떠날 때에도 공수거(空手去)한 다는 뜻 아니던가?

그러한 것을 부정(否定)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에서 적었듯이 인생(人生)이란 목숨을 가진 사람의 존재(存在), 또는 그 사람의 목숨이고,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기간이다. 한편,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인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앞에 적은 <하숙생> 가사처럼 <인생은 나그네 길>과 같은 것 이고, <인생이 고달프다>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리면서 장수(長壽)한다고 하더라도, 늙고 병들어 저 세상으로 갈 때에는 너나없이 누구나 빈손으로 가지않던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이렇다할만한 이름을 남기고 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거나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짓은  하지 않으면서 살다 가는, 그러한 인생길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누구 앞에서라도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한 세상 살다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것 보다 더 보람있는 [삶]은 없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다.

‘구순(九旬)’하면 나도 남의 일처럼 살아왔건만 어느덧 올해(2016년) 만 90살이 되었다.

오늘날의 내 생활 주변(周邊)을 살펴본다.

내 삶의 종착점(終着點)이 시시각각 (時時刻刻)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끼니 때마다 주는 밥 먹고 우두커니 허송세월(虛送歲月)만 하면서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한 뜻에서, 오늘도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면서 내 나름대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스물 다섯 살, 한창나이에 사지(四肢)가 멀쩡하던 사람이 삽시간에 자유롭게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것이 내 운명(運命)인 것을 ……

젊디젊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어야 걸어다닐 수 있는 처지가 되다니 …

이방원(李芳遠, 조선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하여가(何如歌)’라는 시조(時調)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렇게 산들 어떻고 저렇게 산들 어떠한가”라고.

그 말을 응용하여 나도 한 마디 적어본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한가 나라의 부름 받고 맡은 제자리 지키다가  몸을 다치게 된 것을 …

그래도 나는 행운아(幸運兒)다. 그 난리 속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戰死者)들도 있고 나보다 더 심하게 몸을 다친 전상자(戰傷者)들도 있다.

한데, 이렇게라도 살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얼마나 다행(多幸)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함께 생각해볼 것이 있다.  그것은 고려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에 관한 긴 이야기를 하려고 끄집어 낸 것은 아니고, 내 고향인 용인에 정몽주선생의 묘가 있다는 것을 적기 위해 늘어놓은 이야기다.

정몽주 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정몽주선생묘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호인 그 묘가 있는 곳인 <모현면>은 내가 살던 곳인 <포곡면>과 인접(隣接)해 있는 곳이다.

<인생행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내 고향 땅에 있는 정몽주 선생묘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찌 되었건, 지금 이 글에 적고 있는 이야기 제목처럼 <인생행로>라는 말 말고도, <인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생파(人生派)라는 말도 있도, 무슨 인쟁관(人生觀)이니, 인생철학(人生哲學)이니 하면서 아주 거창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인생극장(人生劇場)>이라는 이야기 하나 적고, 인생행로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나 연극을 볼 수 있었다.  한데, 요즘에는 굳이 극장엘 가지 않아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텔레비전만 틀어놓으면, 어디에서든지 영화나 연속극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Soap-Opera (2)한국의 경우, 가정의 일상생활을 다룬 것을 안방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여 <안방극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편, 미국에서는 그런 연속극을 비누회사에서 그 회사의 제품을 선전 하는 광고와 함께 시청자들에게 제공한다고 해서 SOAP OPERA라고도 한다.

대개 가정주부들을 상대로 방영되는 것인데, 남녀간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것이 많다.

나는 전에 서울 서대문 네거리 근처에 있는 동양극장 앞을 지나다닌 적이 있었다. 주로 연극을 공연하고 있던 그 극장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그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제목과 공연기간이 적힌 간판이 극장 앞에 걸려 있는 것을 본 생각이 난다.

동양극장

그 간판에는 그 연극에 나오는 주연남녀배우를 비롯해 배우들의 이름과 몇 막(幕) 몇 장(場)짜리 연극이라는 것도 적혀있었다.

연극에는 관객을 웃기는 희극(喜劇), 음악으로 이루어지는 악극(樂劇), 종교를 주제로 하는 종교극(宗敎劇), 거의 난투장면을 주로 하여 꾸민 활극(活劇), 역사상 어떤 시대의 일을 가지고 만든 시대극(時代劇), 대사의 전부나 혹은 그 일부를 노래로 하는 가극(歌劇), 슬픈 이야기로 엮어져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비극(悲劇), 사회의 죄악이나 불합리한 점을 풍자하는 내용이 담긴 풍자극(諷刺劇)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연극이 극장무대 위에서 조명과 음악 등의 도음을 받아가며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

한데, 배우들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런 극장 말고, 인생극장(人生劇場) 이라는 것도 있다.

<인생극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을 하나의 <극장>이라고 가정(假定)하고, 세상에서 되어지는 모든 인생살이를 하나의 극(劇)으로 비유해서 한 말이다.

거기에는 인생의 불행과 비참한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여 파멸(破滅), 고통(苦痛), 죽음 등으로 인생의 끝을 맺는 비극도 있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며,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뜻을 다른 사람에게 깨우쳐 줄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막(幕)이 내려지기도 한다.

극장무대에서 하는 연극은 그 무대를 가리는 막(幕)이 몇 번이고 내려 가기도 하고, 올려지기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무대가 가려지기도 하고, 보이게도 되어 있다.   그러나, 인생극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생살이>는 <단막극(單幕劇)>과 같은 것이다.

일반 극장에서는 극을 관객들에게 모여주기 전에 리허설(rehearsal)이 라고도 하는 예행연습(豫行演習)을 배우들이 한다. 그러나, <인생극장>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한번 지나가면, 그 장면(場面)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런 만큼, <인생극장>에서의 연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상을 살 만큼 살아온 나이가 지긋한 사람, 한 집안을 이끌어가는 가장(家長), 연장자(年長者), 상급자(上級者), 크고 작은 갖가지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집단(集團)의 우두머리인 장(長) 등등의 경우, 그 연기는 더욱 힘들어지고, 훌륭한 연기를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야 될 것이다.

그러한 역(役)을 맡게 되었을 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나 ‘조롱거리’가 되는 수도 있고, 또는 남에게 해(害)를 끼치 게도 되며, 덕(德)이 되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

<인생극장> —— 우리네 인간(人間)들이 한세상 살아가는 것은 너나 없이 누구나 인생극장(人生劇場)이라고 하는 단막극(單幕劇)에 출연 (出演)하는 배우들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