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뉴저지나 뉴욕시 쪽 나들이를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이 다리를 만나면 ‘집에 다 왔다’하는 생각이 든다. Delaware Memorial Bridge이다.

필요와 의미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북쪽에서 델라웨어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반드시 필요한 다리였기에 세웠을 터인데 누군가를 기념한다는 뜻이 있단다.

이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걸프 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이 바로 그 누군가들이다. 델라웨어주 쪽 다리 부근에 그들을 기리는 탑이 서있다.

내가 이 다리를 오고 가는 길에 오늘처럼 꽉 막힌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저 생각없이 빠르게 다리를 건너 뉴욕 쪽으로 페달을 밟거나, 내려오는 길엔 ‘옛날엔 75전이었는데 4불씩이나!!!’ 걷는 통행료에 혀차며 이내 잊고 마는 아주 짧은 시간에 건너는 다리이다.

오늘 그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다리가 까닭없이 주차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벌써 20년? 그렇구나! 저쪽 전쟁 기념탑에서 주지사와 주 의원 몇몇, 한국전쟁 참전자들 그리고 십 수 명 한인들이 모여 한국전을 기렸던 일이 있었다. 그랬던 일이 있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누굴 탓하랴. 돌아보면 아픈 구석이 어디 한둘일까?

Memorial!

3분이면 건넜을 다리에서 반시간을 보냈던 오늘. 내가 기억해야 마땅한 것들을 돌아보며.

물음과 답

내 가게 손님들에게서 한반도에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곤혹스럽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이따금 한반도 관련 뉴스들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지만 수많은 손님들 중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뿐이다. 대부분 무관심이다.

그런데 지난 주간엔 전쟁과 한반도에 대해 묻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넘쳐나는 뉴스들 탓일게다. 이런 상황은 솔직히 좀 난감하다. 무엇보다 내 앎의 한계 탓일 터이지만, 물음을 던지는 상대의 의중을 모르니 더욱 그러하다.

하여 쉬는 날 아침,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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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손님 몇 분들이 제게 이런 질문들을 하셨답니다. ‘북한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너 북한에 가본 적이 있느냐?’, ‘이러다 북한과 전쟁하지는 않겠냐?’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뭘 안다고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게 질문을 던지신 분들도 제게 무슨 정답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서로 대결 구도를 이어온 지가 70년입니다. 그러니 남북이 한 나라였던 시절의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나이 많은 이들 뿐이랍니다. 당연히 저 같은 남한 출신들은 북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답니다. 다만 북한이나 남북한 관계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일 테면 지난 주간 북한과 미국간의 첨예한 갈등 국면을 소개하면서 남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행태를 소개한 LA Times 기사 같은 것입니다. 기사 제목이 “South Koreans are surprisingly blase about civil defense. Why?”입니다.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생활하는 남한사람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 있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들 남한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북이 갈라진 지 70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면서부터 남한과 북한 사이에 곧 전쟁을 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답니다. 해마다 적어도 한 두차례 씩은 전쟁이 곧 날 것 같다는 뉴스를 보며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전쟁이 곧 날 것 같다’라는 말을 남한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태도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곧 전쟁이 일어 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지만 평생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본 적이 없다면 그 태도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상황이나 태도는 슬픈 것이지요. 더구나 전쟁이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슬픈 일이겠고요.

바라기는 세탁기에서 나온 옷들이 먼지와 때를 벗고 깨끗해 지듯, 이 여름을 지나며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 또는 그 어느 나라이건 전쟁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Last week, some customers asked me questions like these: “Why is North Korea acting like this?”; “Have you been to North Korea?”; and “At this rate, won’t war with North Korea break out?” But, how can I answer these questions, as I don’t have any expert knowledge? Surely, they should not expect to get the right answers from me.

South and North Korea were divided and have kept a mode of confrontation for about seventy years. So, only old people have an experience of the time of one unified Korea. Most of the people from South Korea like me don’t know much about North Korea. However, I have my opinion about the South Korean people’s thoughts about North Korea and the relation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An example may be the LA Times article which introduced seemingly incomprehensible attitudes and behaviors of the South Koreans, while covering the acute tension between America and North Korea. Its title was “South Koreans are surprisingly blase about civil defense. Why?”.

It reported that people in South Korea are living and acting calmly as if everything is fine, under the situation in which a war may break out soon. I think that I can understand that. That’s because I myself have the same experience as those people in South Korea.

I told you that the division of Korea into South and North happened seventy years ago. Thus, most of the Korean people have been living with the story that a war may break out soon since they were born. They have heard this news at least twice every year. But, a war has never broken out since the Korean War. Put in simple terms, people in South Korea have come not to believe the story because of their experience. When they have heard that a war may break out soon, but it has never happened for their life time, isn’t it understandable, whether such an attitude is right or wrong?

However, I think that it is sad to have to think about such a situation and attitude. Moreover, a war is so sad and terrible enough I hate even just to think about.

Hopefully, I wish that the word “war” will not be used in this world, whether in South and North Korea, America, or any other countries during this summer and after, as the clothes from the cleaning machine will become clean without dust and dirt.

From your cleaners.

우리 사이에

주일 오후, 방 정리를 하다가 눈에 뜨인 오래 전에 쓰던 공책 하나. 내 나이 마흔 중반 어간의 기록들이다. 거의 스무 해 전에 끄적였던 낙서 가운데 하나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선다. 아마 뉴스 탓일게다.


우리 사이에

그가 ‘우리 사이에’라 했지만
안경 너머 번득이는 동자엔
사이 뿐
우리는 없다
 
사이
그 틈으로 이미 회오리 일고
그 틈으로 어느새 깊은 강물 흘러
닿을 수 없다
 
그는 거푸 ‘우리 사이에’라 했다
 
눈물 쏟아 차라리
그 사이에 흐르는 강물 넘쳐
넘쳐 흘러
우리 잠기면 그 날
우리 될까
우리 사이에

삶이란?

연일 95도를 웃돌고 습기가 높은 날씨에 지친 몸이 만사가 귀찮다고 풀어질 즈음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오늘 내일은 최고 기온이 70도 어간에 머무른단다. 그렇다하여도 지친 몸이 쉽게 탄력을 되찾지 못한다. 나이 탓이려니.

몸 생각만 하다가 맘 생각이 들어 노자(老子)를 펼쳐 든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는데 나만은 늘 가난하다. 내 마음은 바보의 마음, 그저 멍청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활발한데, 나만은 흐리멍덩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상세하고 분명한데, 나만은 우물쭈물 결단을 못 내린다. 바다처럼 흔들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정처 없다. 사람들은 다 유능한데, 나만은 우둔하고 촌스럽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0장의 한 부분이다. ‘그랬구나, 노자 어르신도 그 맘 아셨구나’ 그 맘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찌 노자 뿐이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
예수는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한 모습을 고백하기도 했거늘.

노자와 함께 생각이 뒹구는데 튕기는 아내의 소프라노 소리.

“와요!”
저녁밥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엉덩이 드는 순간, 이어졌던 아내의 웃음소리.
“미안, 미안! 밥솥을 안 눌렀었네….”

하여, 삶이란 무릇 살만한 것이려니.

삶이란!

귀한 선물

엊그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우체통을 여니 귀하고 고맙고 반가운 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출판사 여울목에서 펴낸 <홍목사의 잡기장>이라는 책인데, 멀리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 목사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매우 독특한 책입니다.

일테면 ‘목사의 이중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은 남들에게 힘과 용기도 많이 주지만, 남들에게 상처도 많이 입히는 직업이다.”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제목이 붙은 글들이 아주 많답니다.

‘관점’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려 한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독특하다’는 생각은 점점 제 나이에 마땅히 느껴야만 할 어떤 울림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테면 이런 제법 긴 문장의 글들 때문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모든 것은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다.>

<나에게는 당신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인격과 모순이 있다. 진실과 거짓, 사랑과 증오, 믿음과 불신, 희망과 좌절, 아름다움과 추함, 왜 나에게는 이런 조화될 수 없고, 조화되어서도 안 되는 상극된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것일까? 우선 나는 정직하게 인정한다. 나에게는 분명히 이런 이중 인격적 요소가 뒤섞여 있어 나를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다음 나는 이에 대하여 변명한다. 그래도 뒤죽박죽 내 인격은 끊임없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려고, 그 어느 한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속에 있는 모순은 내 속에 있는 선한 노력이다. 이는 내가 나와 싸우는 전투이며 그 전쟁을 숨기지 않고 표출시킨 나의 고뇌에 찬 눈물이다.

나는 단지 회의주의자나 허무주의자로 전락되지만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신앙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 모든 할렐루야 승리의 합창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거친 후 허무와 회의 갈등을 통과한 다음에만 불러야 한다.>

책 표지 다음 면에 홍목사님께서 손수 저희 내외에게 써 주신 글에는 “가끔 한 두줄 읽고 커피 한 잔 드시고 또 가끔 다시 한 두줄 읽으시고 하늘 한번 쳐다 보시”라고 했지만, 280쪽 책장을 그예 다 넘기고 말았답니다.

이제, 제가 이따금 하늘 쳐다보며 꺼내 읽는 책들인 성서와 Walden 노장자 곁에 꽂아두고 한 두줄씩 새기며 호주와 제가 사는 여기의 거리를 좁히려 합니다.

시래기

한여름에 시래기를 삶았다. 삶은 때론 엉뚱하다. 다행히 집안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덥지 않아 좋았다. 시래기 삶기 좋은 여름날이었다 할까?

이른 아침 습관으로 일어나 커피 한잔 하면서 무언가를 찾노라고 골방을 찾은 게 일의 시작이었다. 올봄에 농사짓는 친구가 보내준 잘 말린 시래기 한 보따리가 눈에 뜨인 것이다. 우연찮은 충동으로 시작한 일은 만만치 않았다. 시래기 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전 내내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에어컨이 돌지 않는 날씨에 감사하며 시래기를 삶고 우렸다.

이따금 엉뚱한 일을 벌리곤 하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는 언제나처럼 담담하다. ‘많기도 하다. 누구랑 나눠 먹지?’

이따금 나가는 교회인데, 오늘은 교회 창립기념일 이라 예배시간이 좀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모처럼 만나 눙치며 반가운 사람들….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웃을 수 있는 사람들… 따져보니 모두 일흔 이쪽 저쪽이다.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돌아와 집문을 여니 오호 집안에 밴 시래기 냄새!

냄새를 탓할 아이들도 없고, 아내는 시래기를 볶아 무치겠단다.

시퍼런 무우청이나 시래기나 다 뜻이 있지? 한여름이나 겨울이나, 아무렴!

복 그리고 꿈

이 나이에 누리는 복이 하나 있다.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복이다. 몇 사람 되지도 않거니와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일이니,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그걸 복이라고… 쯧쯧…” 혀차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만 내겐 참 소중한 복이다.

이름하여 ‘필라세사모 온라인 모임’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와 아픈 사람들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모인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이들의 모임이다.

만나서 뭐 그리 큰 일 하지도 못하거니와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원을 풀어 나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나누어 왔고, 최근 정권이 바뀐 이후엔 새 정권이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내고, 한국 및 한인 사회가 보다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대부분은 우리들의 이야기로만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가는 고사하고 작은 지역 사회 아니 우리들 각자가 속한 아주 작은 공동체 하나 바꿀만한 특별한 여력들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겐 분명하고 소중한 복이다. 때론 한주간 겪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들의 이야기 바탕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일 테면 이번 주 모임에서 한 젊은 학자가 던진 이야기로 인해 나는 사람살이에 대해 다시 생각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여 복이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연구하는 친구인데, 그가 최근 연구했던 주제에 대해 말한 아주 짧은 요약이다.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실을 얻는 정보 매체가 어떤 것인가? 를 묻고, 사람마다 사실을 인식하는 차이와 정보 매체와의 연관관계를 따져 보았다. 이즈음 판을 친다는 가짜 뉴스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연구도 해보았다.>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들 중에 짧게 언급했던 그의 말이기에 깊은 그의 연구 내용은 모르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런데 그날 그의 짧은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가 자꾸 생각이 났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 이가 생각났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청암(靑巖) 송건호 선생님이다.

송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다.

“일선 기자로서 오랜 체험을 가진 언론인이라면 결코 없는 사실을 허위 보도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입장을 달리하고 시각을 달리하는 취재와 보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는 중대한 정치, 경제 사실들을 얼마든지 사실과 사건의 이미지를 참된 진실과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독자들의 머리 속에 심어 넣을 수가 있다.>

내가 청암 선생님을 따랐던 때가 1970년대 말이니 거의 40여년이 지난 일이다. 이제 젊은 학자를 만나 진일보한 청암 선생님의 소리를 듣는 듯 하여 누리는 내 복이 크다.

필라세사모 이름으로 내가 누리는 복을 이야기하듯,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안전한 사회에서 누리는 복을 이야기하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꿈꾸며….

벗과 멋 그리고 삶과 오늘

두어 주 전 일이다. 동네 벗에게 전화를 받았다. 나이 들어가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나비 넥타이가 썩 잘 어울리는 친구다. 나이에 어울리게 외모나 내면으로 제 멋을 풍기는 친구들을 보면 참 좋다. 나 또한 흉내라도 내는 시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 넥타이야 애초 나와는 무관한 액서사리이어서 온전히 그의 멋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의 색스폰 연주에 이르면 부러움이 인다. 나이 들어 불기 시작한 모양인데 그 소리가 제법이다. 게으른 나는 차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그만의 멋이다.

그런 그가 전화를 통해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친구와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 창립 예배 순서에 자신이 색스폰을 연주하는데 시 한 수 읊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은 여러모로 가당치 않은 것이어서 애초 나는 저어했다. 하여 그냥 웃고 넘기려 했었다.

그러다, 오늘 그의 섹스폰 연주에 맞추어 소리내어 시 한 수 읊어본다. 연습으로.

피조물, 죄인, 참 사람 이해를 위한 구원, 구원의 확장, 삶과 죽음, 감사 그리고 오늘 등등을 곱씹어 보면서….

자기 멋 맘껏 누리며 나이 들어가는 벗에게 고마움을.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한 처음 하늘 문 열어
사람 하나 세우셨다.
이름 지어 아담 곧 사람
이내 사람을 부르는 소리
–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사람은 떨며 대답했다.
–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날 이후
여호와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신 일
사람 사랑
가죽옷 입혀 놓은
사람을 향한 사랑

(에케 호모(Ecce homo)
–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가리켜 보이며 “보라! 이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강퍅하였다.
수천 년 부끄럽고 두려운 세월
여호와, 참다 참다 참다 참 사람 하나 내린다. 이 땅에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모가지 뻣뻣한 사람들이 그를 향해 쏘아 날리는
멸시와 퇴박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던 사람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던 사람
참 사람
예수

온 몸 온 맘
삶으로
죽음으로
마침내 다시 사심으로
여호와를 알게 한 사람
사람 사랑을 고백케 한 참 사람

삶과 앎
바로 사람
그 사람들이 모인 곳

1979년 여름 어느 날
이 사람을 보라!
그 소리에 끌려 모인 사람들
이름하여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

여호와는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셨다.
한 처음을
한 사람을
서른 여덟 해에 담긴 태초와 오늘까지의 세월을

2017년 이 곳은 새 하늘과 새 땅
사람들이 부르기 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는 세상

세우는 자
세움을 받는 자
마음 문 열어 박수 치는 자
모두 사람이 되어
참 사람이 되어

감사하므로 살아있는 오늘을 느끼는
나 너
우리
마침내
참 사람

쉼 그리고 즐거움

사흘 연휴, 아이들과 함께 산길을 걸으며 시간을 함께 하기로 계획한 것은 달포 전이다. 아이들은 흔쾌히 내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운전하기에 피곤치 않을 적당한 거리 쯤에 놓여있는 곳들을 물색하다가 결정한 곳은 뉴욕 주 중심에 있는 Ithaca였다.  Cornell 대학교로 유명한 곳이지만, 곳곳에 이 땅의 원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인 Cayuga 부족의 흔적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Wikipedia의 설명에 혹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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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내내 아내와 아들 내외 그리고 딸아이 모두 흡족해 내가 마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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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녀석이 지금보다 조금 나은 조건의 직장으로 옮기련다는 계획과 며늘아이가 새 학기에 맡게 될 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지혜로운 인디언 아버지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딸아이와 어깨를 닿게 걸으며 아이의 직장 이야기와 설계 중인 결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세대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확인해야 했다. 우리 내외의 건강과 은퇴 계획 등을 묻는 딸아이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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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여행 내내 아내는 우리 가족의 윤활유였다.DSC02743

함께 모여 먹고 마시는 즐거움 역시 멋진 쉼 이었다. 우리 내외와 아이들이 적당히 타협할 만한 생음악이 연주되는 여행지의 저녁상도 넉넉했다.

무엇보다 어제와 내일 그리고 오늘을 잇는 내 쉼이 참 좋았다.20170703_121911

어느 인디언이 ‘당신’인 내게 남긴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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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당신이 가진 생명과 힘에 대해 당신이 먹는 음식, 생활의 즐거움에 대해 감사하라.
만일 당신이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잘못이다.

주일아침, 희년(禧年)을 꿈꾸며

주일아침에 성서 레위기 한 장을 읽는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 레위기 25장 1-12절, (개역개정본 성서에서)

이즈음 사회보장이나 복지정책에 대한 뉴스나 의견, 주장들을 많이 볼 수 있다만, 솔직히 나는 이 분야에 대해 밝지 않다. 내가 살았던 시대의 한국사회에선 ‘사회보장이나 복지’라는 말은 불온하였다. Social security라는 말에 내가 친숙하게 된 것은 이민 후 세금을 납부하면서 내기 시작한 social security tax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뿐, 사회보장이니 복지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근래에 내 집에 많이 배달되는 광고물로는 은퇴연금이나 은퇴 후 자산관리에 대한 것이 으뜸이다. 아마 내 나이 탓일게다. 그러나 그도 그 뿐, 내 개인적인 일로 받아드릴 뿐이지, 사회적 문제로 생각이 나아간 적은 거의 없다. 한마디로 사회보장이나 복지 문제에 대해 무지하다.

이렇게 무지, 무식한 내 식견으로도 성서에서 말하는 안식년과 희년의 선포는 가히 혁명적이다. 혁명이란 이루어 질 수도 있는 일이므로, 혁명이라기보다는 부질없는 망상에 가깝다고 하는 게 나을 듯 하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으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예수의 말을 실천한 사내가 없듯이, 희년법이란 사람사는 세상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헛된 꿈일 수도 있겠다.

레위기를 기록했던 시대에 이미 희년법은 기억과 신앙속에 남아있었을 뿐, 이스라엘 역사나 그 이후 인류사에서 실천되었던 적도 없다. 물론 이즈음 교회 또는 대학, 공무원 사회에서 안식년이니 안식 휴가니 하는 말과 휴가제도를 시행하고는 하지만, 엄밀한 뜻에서 성서에서 선포하는 안식법과는 거리가 멀다. 희년에 이르면 여전히 성서속에만 남아있는 사어(死語)에 불과하다.

이쯤 머리 속에 남아있던 신문기사 한 토막을 떠올린다. 한국 문재인 정부가 소액, 장기연체 채무 를 탕감하겠다는 기사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탕감 대상 채권은 1000만원 미만의 10년 이상 연체된 채권이다. 사실상 소멸시효가 완성된 회수 불능 채권으로 볼 수 있다. 그 규모는 약 11조원으로 추산된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내각이 구성된 이후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회수 불능 채권 1조9000억원을 소각하기로 했다. 대상자는 43만7000여명이며 1인당 435만원 정도의 부채가 사라지게 된다.>

지난 달 조선일보 기사 일부이다. 이 기사에는 <선진국 사례에서도 정부가 나서서 일반 서민들의 부채를 일괄적으로 탕감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는 전문가 의견도 달려 있다.  ‘국가가 나서서 빚을 없애주면 혜택받는 이들은 좋겠지만, 그럼 그 동안 열심히 빚을 갚아 온 사람들은 바보냐?’,  ‘그럼 이제 누가 빚을 갚으려 하겠느냐?’며 사회 전반에 퍼질 도덕적 해이를 염려하는 이들의 의견들도 있다.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철저한 쉼, 모든 빚의 원상회복, 이자없는 대부, 되무를 수 있는 법” 등등을 선언하고 있는 성서의 희년법은 아주 깊은 전제를 달고 있다. 바로 참회와 자유 정신이다.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희년을 선포하는 첫날에 해야 할 일은 바로 희년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참회하며 뿔나팔을 부는 것이다. 희년(禧年) 곧 기쁨의 해는 히브리말로는 ‘쥬빌리(Jubilee)의 해’이다. 쥬빌리란 ‘수양의 뿔’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희년을 선포할 때 수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분데서 유래한다.

개인이나 사회 공동체가 옛 빚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출발을 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들이 바로 참회와 속죄,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는 기쁨과 자유의 나팔이다.

하여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라 할 수도 있겠다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의 선포이며, 이를 믿는 이들에게는 역사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나아가 현실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일이 된다.

현실에서 희년이 선포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 뜻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천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못가진 자,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의 참회와 가진 자, 빚의 탕감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자들의 의지가 함께 힘을 모아 희년 곧 쥬빌리의 뿔나팔을 불어 제낄 때 희년은 유토피아가 아닌 오늘의 일로 다가설 수도 있다고 믿는다.

사회보장과 복지 정책의 문외한인 내가 살았고 살고 있는 한국과 미국은 이 분야에선 후진국이라 하겠다. 아마 나 같은 문외한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나마 퇴임 이후에도 많은 신뢰를 얻고 있는 오바마나 이제 막 시험대 위에 오른 문재인처럼 ‘사회 정의’에 대한 고뇌 깊은 권력자들과 참회와 속죄를 전제로 서로를 용납하는 시민들이 함께 불어 제끼는 뿔나팔 소리로 세상은 조금씩 희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