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4

4. 외로운 외길

    평생 외길 걸어온 친구가 하나 있다. 이번 한국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은 바로 그 친구의 평생걸음이 녹아 있는 교회였다.

    친구 이름은 김규복, 이젠 은퇴한 목사이다. 글쎄? 은퇴의 일반적인 뜻이 ‘하던 일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을 그만두어 한가히 지낸다’라는 정도라면 그는 아직 은퇴가 아닌 현역목사다.

    그와는 대학에서 만났다. 비록 곤고하였으나 아름다웠던 내 스물 무렵 1970년대를 함께 보낸 친구다. 그리고 1980년대 내가 이민 보따리를 꾸릴 무렵 그는 목사가 되어 대전 대화동에서 그야말로 맨땅에 머리 박듯 노동자와 빈민들을 위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물론 간간히 서로 살아있다는 소식과 어찌 지내는 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기는 하였으나 다시 그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은 사십 년이 흐른 2023년 가을 신촌 독수리 다방에서 였다. 아주 짧게 만난 시간이었는데, 만나고 헤어질 때 굳게 두 손을 마주 잡고 다시 꼭 끼어 안았었다. 젊었던 시절 아픈 경험으로 인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그는 병 때문에 눈믈이 흐른다고 했고, 나는 가슴이 저며 속울음을 울었었다.

    그 만남이 너무 짧아 아쉬웠고 미안했다. 하여 올라탄 대전행 KTX였다. 2024년 마지막 주일예배를 내 친구 김규복목사와 그의 평생 사랑이자 신앙의 동지인 황선업사모가 일구어 온 삶의 이야기들이 담긴 대전 대화동 빈들교회에서 드리려는 생각으로.

    거의 오십 년만에 다시 가보는 대전은 이미 서울이었다. 그렇게 놀랍게 변한 도시에서 다시 만난 내 친구 김규복은 여전히 1970년대 청춘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 내외를 반겨 주었다.

    그렇게 그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다문화 가정을 위한 사역과 돌봄과 나눔 일들을 도맡아 하던 그의 아내 황선업 사모도 이제 은퇴를 한단다. 친구 내외의 은퇴 이후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제 다시 그들이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어질 무렵 친구는 책 두 권을 주며 말했었다. ‘하나는 우리 공동체 역사고, 하나는 한국교회 갱신과 우리 한국사회 변화에 대한 신앙인들, 교회의 역할에 대한 내 생각이야…. 친구 이야기를 듣고 싶네….’

    그는 그렇게 만나기 며칠 전 넘어져 갈비뼈에 금이 가 통증을 호소하곤 했다. 내가 집에 돌아와 들은 이야기다만 결국 병원 신세를 지고 나서야 완쾌되었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 응답할 만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그처럼 외길을 걷지도 못했거니와 그 외길 속에서 겪어냈을 외로움을 이해할 만큼 넉넉치도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내 손에 쥐어 준 책에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담겨 있어 옮겨 적는다.

    2023년 겨울, 목민 고영근목사님을 기리는 목민상 세번 째 수상자로 선정된 김규복목사를 축하하며 남긴 시인 서덕석 목사의 기록이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내 친구의 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서덕석 시인의 시 <바닥을 기어서 하늘까지> 일부이다.


    <전략->

    가정해체로 버림받은 아이들/ 삶의 벼랑 끝에서 몸을 내던진 장애인들/  해고와 탄압, 실업의 고통에 신음하는/ 노동자 곁을 지켰다./ 낯선 땅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이주민들과/ 정든 집 헐려 쫓겨난 철거민들의 눈물과 함께/ 독재의 폭압과 권위주의에 찌든 한숨 소리/ 분단의 아픔과 뭇 생명들의 단말마…/ 작은 가슴으로 품어야 할/ 상처와 고통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왔다

    가난한 빈들공동체에 달마다/ 월세일과 일꾼들의 월급날이 닥쳐오면/ 바닥을 치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손을 맞잡아 따스하게 끌어 안았다/ 현장에서 만난 선한 친구들의 십시일반에/ 하나님도 감동하여 기적으로 응답하니/ 믿음으로 만들어 낸 이웃 사랑이었다

    <중략>

    빈들공동체의 목회사역은/ 바닥에 엎드려 기어가는 오체투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올려보는 대신/ 낮아지고 넘어져 신음하는 하나님/ 민중들 가운데 게신 주님을 향한다/ 가진 것 많고 넉넉해서 나누어 줌이 아니라/ 도시락을 꺼내어 주님 앞에 내놓아/ 오천 명이 배부를 수 있게 한 소년처럼/ 자기를 온전히 드리는 순종이었다.

    사십 년을 대전시 대화동 공단마을에서/ 한 눈 팔지 않고 민중선교 외길로만 걸어 온/ 김규복, 황선업 부부의 섬김은/ 소외당하고 아파하는 민중들을 교인으로/ 발 닿고 눈길 가는 모든 곳을 교회로 삼았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 두루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께 올리는 기도이며/ 민중과 함께하는 시위와 집회와 축제는/ 해방공동체를 경축하는 하늘 백성들의 잔치였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앞에서/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두를 가진 듯이/ 가난한 삶이어도 더없이 풍요롭게 산/김규복, 황선업부부에게는 주변 모든 이들이/ 스승이요, 어버이요, 친구요 자녀였다/ 조지송과 정진동의 산업선교를 이어받아/ 배우고 익힌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곧이곧대로 실천하여/ 노동자, 농민, 빈민을 형제 삼아 더불어 사니/ 바닥에서 하늘에 가 닿은 참된 예배였다.

    <후략>


    내 친구 김규복목사와 그의 아내 황선업 사모, 두 내외 은퇴 후에도 꿈꾸는 세상 역시 바로 바닥을 기어 하늘에 닿는 예배 같은 삶이었다.

    그 외로운 외길 평생 마다치 않는 내 친구 내외에게 내 온몸과 온 맘으로 보내는 박수와 응원을, 더하여 내가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음에 감사를!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3

    <편안 또는 평안함에>

      2025라는 숫자가 아직 낯설건만 어느새 일월이 저물고 있다. 설날이라지만 내 삶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별 감흥은 없다. 이젠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제법 넉넉한 흉내를 내보곤 한다.

      2024년과 2025년 사이에 걸쳐 있는 이번 겨울은 앞으로 내 기억이 제대로 일하는 한, 제법 오래 그리고 깊게 간직하고 싶은 계절이다.

      농사 짓는 친구들 셋이 있다. 지금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정무훈의 농장은 내 집에서 20분 거리 펜실베니아에 있다. 그의 집은 그 농장 한 가운데 있다. 한국에서 제법 길게 선생 생활을 하다가 이민 와서 누구나 그렇듯 열심히 살다가 늙막 초입에 농장을 일군 그였다. 벌써 십 수년 전일이다. 그의 부친은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다. 그는 교인은 아니지만 그에게선 도인의 품을 느끼곤 한다. 가까이 살아도 이젠 일년에 한 두차례 얼굴 보고 지낸다.

      경기도 벽제에서 농사를 짓는 병덕이는 내 불알친구다. 대기업에서 오를 때까지 다 올라갔다가 그만 둔 후 농사 짓기 시작한 지 거의 스무 몇 해가 지났을게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그의 농사 일도 다 그 운동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헤어져 근 반 백 년 사이에 서너 차례 얼굴 보았으니 십년에 한 번도 채 안 되는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모습으로 성실하고 크게 나서지도 그렇다고 결코 숨지도 않는 예수쟁이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농사짓고 사는 서암 오시환은 조금 독특한 만남을 이어온 친구다. 대학 같은 과 후배인 그와는 1975년 봄에 담쟁이 넝쿨 덮힌 대학건물 앞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십 수년이 지난 2002년 어느 날, 책 몇 권 산다고 기차 타고 나들이에 나섰던 뉴욕 맨하턴의 어느 한식당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기차를 타고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나 하루 밤을 묶었다. 그리곤 또 끝이었다. 그후 잘 나가던 대기업 홍보 카피라이터였던 그가 경상북도 봉화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잘 아는 기독교계 중, 고등, 대학교를 나온 그는 독실한 불교도이다. 내가 교인이라는 말보다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좋아하 듯, 그 역시 불교도보다는 불자가 더 어울릴 듯하다.

      지지난해인 2023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 했을 때 그를 꼭 다시 보고 싶었었다. ‘가마!’하고 약속을 했었건만 짧은 일정에 쫓기다 보니 미처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미안하다’는 내 말에 그가 보냈던 답글이었다. ‘우리 살 날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하여 이번 여행,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바로 몸 실은 기차가 영주행 KTX였다. 내 또래 서울내기들은 기억할 것이다. 옛날 옛날에….그러니까  1960년도 어간에…..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가려면 청량리에서 떠나는 중앙선을 타고 경북 영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강원도 쪽으로 올라가는 자그마치 열 몇 시간을 야간열차에서 지냈던 시절말이다. 헌데 2024년 12월, KTX는 영주까지  고작 두 시간 조금 넘는 시간에 나와 아내를 데려다 주었다.

      친구는 역 앞에서 반갑게 우리 내외를 맞아 주었다. 그리곤 일박 이일, 그는 정성을 다해 영주와 봉화 일대의 관광지들을 안내해 주었다. 무섬마을, 소수서원, 죽령 등등 내 장인의 본래 고향인 경북이지만 아내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인 소백산 줄기줄기들을 두루 돌아보는 호사를 누렸었다.

      그리고 봉화 외딴 마을 그의 농장과 집은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농부인 동시에 예술가였고 봉사자였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꿈꾸며 실천하는 활동가였다.

      그의 목공예와 아내의 도공예, 가죽공예와 캄보디아 오지에 마을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예술을 심고, 경상북도 봉화 그 외진 마을에 봉잼(봉화에서 잼나게 사는 사람들)마을을 세우는 그 끝없는 열정이 솟아나는 곳, 바로 우주의 중심 서암 오시환이 사는 그 농장이었다. 그 곳에서 하루 밤을 묶은 우리 내외는 참 복 받은 삶이다.

      그의 삶, 한 단 편인 캄보디아 열정을 담은 책이 나왔다해서 예매를 해두었다.

      이쯤 농사를 짓고 사는 내 세 친구들의 공통점이다. 비록 모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 나이에 그들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참 편안하고 평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참 좋다 정말 좋다.

      친구 시환이가 안내했던 2024년 12월 마지막 즈음  황혼이 내리던 영주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 줄기의 그 아름다움에 잠시 내 지난 삶속에서 누렸던 신의 은총을 되새겼던 그 순간을 선사한….

      이런 친구들을 내 살며 친구로 삼을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 참 큰 복이다. 그래 감사다!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2

      2. 약상자

        올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이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체감온도가 -5도(섭씨 영하 20도)에 이르니 노약자들은 바깥출입을 삼가란다. 이런 추위가 사나흘 이어진단다. 예보의 호들갑 아니어도 바깥출입을 마다한 게 벌써 일주일이 넘어 열흘에 가까워온다. 느닷없이 만난 아주 독한 감기 몸살 탓이다. 약먹고 눕고를 거의 일주간 이어오다 자리 털고 일어난 게 엊그제이다. 약하고는 그리 친하게 지내오지 않았던 터라 거의 일주일동안 시간 맞추어 약을 먹는 일은 내겐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러다 생각난 철이의 거대한 약상자였다.

        가히 19인치 노트북 크기만한 거대한(?) 철이의 약상자를 본 것은 중미산 자연 휴양림 산장에서였다.

        철이, 그렇다. 그의 이름은 김철이다. 몸크기가 나보다 족히 두배는 될 건장한 청년 철이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그가 ROTC제복을 입고 있었던 대학생 때였다. 그리곤 지난 12월에 다시 만났으니 그 사이 사십 오룩 년은 족히 지났을게다.  비록 한 해 후배였지만 친구처럼 지냈던  철이의 맏형 김추를 보는 듯했다.

        터무니없이 세상을 일찍 떠난 김추네와는 한골목에서 제법 오래 살았었다. 터울이 지는 철이와는 크게 함께 한 시간은 없었어도 수십년 만에 만난 얼굴이어도 옛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이번 한국여행의 첫번째 이유는 내 고향 신촌친구들과 어릴 적 함께 고백했던 신앙의 뿌리를 새겨보며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사를 되뇌어 보자는 것이었다. 하여 그 시절 친구들 얼굴을 많이 보았다. 그 중에 철이는 막내격이었다.

        그런 그가 자원해서 준비했던,  중미산 자연 휴양림 산장에서 하룻밤 머무며 수십년 만에 만난 벗들이 이야기 한 자락 맘껏 늘어 놓는 자리였다.

        덜렁덜렁 쫓아갔던 나는 미처 몰랐었다. 휴양림 산장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난 이튿날, 철이가 준비해 왔던 짐을 다시 꾸리기까지 그가 그 날을 위해 얼마나 애썼던지를. 그의 차를 한가득 족히 메운 각종 짐들은 그 산장에서 함께 했던 우리 친구들이 한 순간이라도 불편함과 부족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그의 애씀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방 한 구석에 꽂혀 있는 그의 거대한(?) 약상자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오랜 투병생활의 마지막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 그의 완쾌 소식이다.

        이번 여행 중에 만난 몇몇 벗들 역시 병과 씨름하고 있었다.

        살며 몸과 맘에 병 없이 사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만, 바라기는 몸의 약이던 맘의 약이던 오늘 살아 숨쉬고 있음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기를 내 스스로에게 빌며.

        다시 새겨보는 막내 철이에 대한 깊은 감사로. (환조 목사님과 친구 병덕이에 대한 감사는 덤으로 하고)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 1

        1. 걸으며…

        기억의 오류 탓일까? 아님 이제 나이 든 때문일까? 기억컨대 길든 짧든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일을 앞에 두고 주춤거렸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만, 이번엔 영 아니었다. 자그마치 꼬박 나흘을 헤매였다. 밤이면 잠이 달아나고 낮엔 눈이 게슴츠레 감긴 채 지냈다. 그러다 간밤에 내 잠시간을 온전히 되찾았다.

        아직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만 정말 아니가보다. 이젠.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들린 교보문고에서 뽑아 들고 온 책 <나이듦에 대하여> 78쪽엔 이런 말이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러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상당수가 노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난 인류의 총수를 1천 82억명이라고 한다. 대략 수백억 명이 노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1천 82억명 가운데 하나이자, 영광스럽게도 노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수백억 명중 하나가 되었다. 이젠.

        사실 이번에 서울 지하철에서 난생 처음으로 자리 양보를 받았을 때엔 그야말로 난감했었다. 주춤거리며 제법 큰소리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말했었다. “아니요! 아니요!” 끝내 나는 자리를 양보 받았고 그날 이후 나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자신있게 앉아 다녔다. 그리고 생각난 내 고모님이었다. 햇수로는 벌써 삼년이 지났다만 시간으로 따지자면  만 일 년 조금 전에 아흔 두해 사시고 세상 떠나신 하나 밖에 없는 내 고모님께서 얼추 내 나이 적에 크게 웃으시며 했던 말씀이었다. “얘야! 버스를 탔더니 젊은 아이가 자리를 양보하지 뭐냐? 넌 아직 모를거야, 그 때 내 심정 말이지. 화가 나더라니까….” 어느새 나도 그 때 그 시절 고모님 나이에 이르렀고, 그 고모님은 이젠 한국 가서도 뵐 수 없었다.

        본전을 뽑고 싶었다. 한국에서 낳고 살았던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오년이 더 길어졌다. 여기도 평생 외국이고, 한국도 이제 내갠 외국이다. 가는 비행시간 쉬지 않고 15시간 반이고, 집에서부터 서울 숙소까지 이르는데 꼬박 22시간이 걸린 여행길이었다.

        글쎄, 언제 또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여 본전을 뽑고 또 뽑고 싶어 걸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때론 아내를 앞세우거나 아내보다 한 걸음 앞서거나 또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 내외 고향인 신촌과 소년, 소녀기와 청춘을 보낸 신문로 광화문 효자동 안국동 인사동 종로 을지로 남대문 명동 마포 공덕 등지의 서울 거리와 강남 강동을 비롯한 경기도 일산, 철원, 전곡, 양평등지의 경기도와 경상도 영주 부석사를 비롯하여 충북과 경북이 만나는 죽령고개, 그리고 잊지 못할 봉화에서의 하루 밤, 오랜 벗 내외가 평생 일구어 온 이야기를 만난 대전 대화동을 거쳐 이제야 이난영의 소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전남 목포거리와 유달산, 그리고 새해맞이 해돋이를 보며 아내손을 잡고 걸은 강원도 속초 해변 모랫길.

        그렇게 걷고 또 걸었었다.

        그렇게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 우리들의 삶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끈, 바로 사랑이었다.

        이 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이제  거의 노인이 되었다.

        책 <나이듦에 대해서>를 펼쳐 들면 첫 쪽에서 만나는 말이다. <우리는 투쟁하도록 승리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슬픔과 멜랑콜리여 안녕. 우리에게 끝이란 없어요. 끝은 바로 이 순간이고, 매 순간 끝은 확장되니까요. 우리를 지배하는 강렬한 정신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예요.  – 피에르 고베티>

        이제 노인이다. 그래서 축복이다. 하여 감사다. 매 순간 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나이임으로.

        동해 바닷가에 떠오른 해처럼. 해를 향해 달려 날아가는 새떼들처럼.

        2024-25년 겨울에, 걸으며 만난 모든 이들과 눈과 맘에 담은 숱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져 이어가니…

        깃발 그리고 축복

        *지난 화요일 밤이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비상계엄 사태가 온종일 내 눈과 귀를 사로잡던 밤이었다. 아들 녀석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녀석이 물었다. ‘도대체 한국 뉴스 뭐예요?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해요?’ 여기 언론들이 전하는 뉴스에 궁금증이 다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 엊그제 목요일 낮에 가게로 들어 온 손님 하나가 던진 말이다. “한국 뉴스 재밌더만! 여기보다 더 한 놈이 있더구먼. 한국사는 친구들에게 그런 놈은 빨리 없애라고 하쇼!”
          • 그리고 오늘 낮에 한국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아온 아내가 했던 말. “참 난감했네, 난감했어! 학생 하나가 묻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아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한국 드라마나 K-pop에 반해 한국학교를 다니는 완전 영어권 미국 성인들이다.

          한 주가 그렇게 저무는 시간, 한주간 급박하게 돌아갔던 한국 뉴스들을 찬찬히 훑어 보며 든 생각 몇 가지.

          김가,윤가 미친년놈들을 정점으로 한 패거리들의 난장에도 불구하고 애먼 사람들이 피 흘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그야말로 Dynamic Korea! 그 짧은 시간에 또 하나의 역사를 쓸 것 같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민주주의 진행의 역사 말이다.

          어찌어찌 살다보니 1960년 4.19, 1961년 5.16, 1964년 6.3, 1969년 3선개헌 반대, 1971년 위수령, 1972년 유신계엄, 이어진 70년대 긴급조치, 1979년 위수령 및 1980년 까지 이어지는 계엄령까지 두루 가까이서 보거나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왔다. 보면서 왜 그럴까하는 궁금증과 함께 아팠고, 겪으면서 아렸던 시간들이었다. 허나 돌이켜 그 시간들이 오늘의 한국 공동체의 큰 밑거름이었다.

          허나 짧은 시간 급속도로 변하다보니 사람들 모습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지었다. 함께 살려는 사람들과 나만 또는 내 편들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더는 닿지 못할 만큼 멀어진 것 같다. 비겁, 비굴, 염치없음, 뻔뻔함, 간사함 등등 미친년놈들이란 말도 분에 넘치는 사람같지 않은 모습들에 분노가 치밀 때가 많다.

          그렇다고 딱히 슬픈 것만은 아니다.

          Dynamic Korea! 훌쩍 진보의 큰 걸음 한 보 내딛을 것이다. 백성과 국민을 뛰어넘어 시민의 깃발을 들고 나서는 이들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어찌하다보니 마침 모국 방문이 코 앞이다. 나도 그 시민들 속에 어을려 깃발 날리는 축복을 누려볼련다.

          11월, 희망에

          지난 수요일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날이었습니다. 세탁물 배달을 하는 Devonte가 얼굴에 함박 웃음을 가득 담고 가게로 들어섰습니다. 나를 보자 그가 크게 외쳤던 말입니다. “새로운 미국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허나 삼십 대 젊은이의 싱글벙글 환한 웃음을 따라 웃지는 못했습니다. 아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입속으로 맴맴 도는 ‘쯔쯔. 이눔아! 뭐가 그리 좋은게냐?’라는 물음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칸 어메리칸인 Devonte는 프랑스계 이민 후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트럼프가 지난 대통령 재임시절 경호원으로 일을 했었답니다.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젊은 아이는 덩치는 산처럼 크지만 매우 여리고 착하답니다.

          그날 아침 눈을 뜨자 맞이했던 선거 결과에 대한 제 소감은 그저 안도였습니다. 한 쪽의 완승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훗날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는 알 수 없으나, 우선은 이 사회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안도였습니다. 물론 트럼프의 당선은 제 투표의사와는 다른 결과였지만, 그의 완승으로 여러 주의 예비군들이 비상사태에 돌입하여 경계까지 하게 된 여러 우려들을 겪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숱한 분석들과 평론 그리고 앞으로의 예견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제 눈길을 끈 것은 뉴욕 타임즈에 실린 German Lopez기자의 ‘인플레 선거(The inflation election)’라는 글이었습니다.

          지난 삼 사년 사이 물가는 그야말로 고공행진의 연속이었습니다. 계란 값이 삼년 전에 비해 세 배가 올랐다는 Lopez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저희 같은 사람들이 피부로 절감하는 것이 인플레이션 현상입니다. 계란 뿐만이 아니라 식료품, 생필품, 공산품 할 것 없이 거의 두 세배는 모두 뛰어 버린 변화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Lopez 기자는 재미있는 사실을 적시합니다. 2023년 바로 지난해부터 물가상승은 서서히 둔화추세를 보이고 있고, 임금도 상승했고, 일자리도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삼 사년 전과 비교해 오른 물가는 내려갈 줄 모른다는 사실 곧 유권자들의 머리 속에 각인된 물가상승이 유권자들을 분노케 하는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선거의 여러 주요 이슈들, 일테면 민주주의, 이민, 낙태, 외교, 군사 등등을 뛰어 넘는 첫번째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한 요인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였다는 것인데,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표심의 추세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쪽입니다.

          허나 그래서 트럼프다라는 결과에는 여전히 동의하지는 못한답니다. 트럼프의 재등장은 전통적인 미국 양당정치와  민주주의 사양현상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편입니다만, 그렇다고 미국의 몰락까지로 비약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답니다.

          제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트럼프로 대변되는 또는 그를 따라 다니는 말들인 거짓, 변덕, 혐오, 증오, 갈등 등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실제 지난번 트럼프 임기 중에 일어났던 숱한 사회적 혐오, 증오, 갈등 등을 떠올려보면 그 염려들이 전혀 부질없는 일은 아니랍니다.

          미국이라는 큰 세상을 염려할 만큼 제 생각이 크지도 않거니와 그럴 능력도 없답니다. 다만 트럼프의 구호에 홀려 환하게 웃고 있는 Devonte나 그를 크게 믿지 못하는 저나 생각을 잘 모르는 제 아이들이나 모두 이 사회에서 말하는 혐오 증오 갈등의 요인과 그 풀이의 대상이 될만한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 내일의 희망을 봅니다. 선거 결과를 마주하자마자 일기 시작한 바로 생명, 환경, 더불어 함께 살기 등에 대한 공생, 공감, 연대의 소식들도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렴 11월인데요!

          비나리

          제 가게 뒤편 주차장은 언제나 텅 비워져 있습니다. 이따금 건물 입주자들이나 배달 또는 수리 차량들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늘 빈 공간입니다.

          헌데 지난 주는 예외였습니다. 아침 안개가 멀리 사라지기 전인 이른 시간부터 주차장은 꽉 메워져 있었습니다. 가게 건물 뒤편에 있는 시 보건시설 건물에 사전투표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보건시설 주차장이 이미 꽉 찬 탓에 차들이 이웃 주차공간들까지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었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가 사는 주의 투표결과는 너무나 뻔하거니와 당락에 끼치는 영향도 아주 미미하답니다. 선거인단 수가 고작 3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랍니다. 아무튼 이번 선거열기는 제법 뜨거운 듯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살 때 대통령 선거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았던 때엔 유신헌법과 이어진 전두환 시절이라 그랬답니다.

          이민 이후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시민권을 얻어 제 생에 첫 대통령 선거를 한 것이 2000년 공화당 아버지 부시와 민주당 엘 고어가 붙었던 때였답니다. 세어보니 올해 선거가 벌써 일곱 번 째입니다.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를 해 본다는 들뜸과 그 때만 하여도 나름 젊었던 탓에 정치참여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제법 열렬히 선거운동도 했답니다. 아시안계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과 한반도 통일 까지는 아니어도 평화에 대한 정책, 그리고 정부 지원을 받는 영세민 상태를 겨우 벗어나 의무는 다하되 아둥바둥 살아가는 중산의 최하층인 제가 속한 계급을 위한 정책 등에 가장 적합한 인물들을 위한 운동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선거 뿐이 아니었지요. 다 지나간 이야기입죠.

          이젠 그저 혼자 중얼거리며 비나리만 한답니다.

          ‘더는 갈라치기 말고…. 더는 싸우지 말고…. 있는 편들은 조금 덜며 살고…. 없는 쪽은 조금 더 치열하게… 피선거권자들이 아닌 선거권자들이 조금만 더 현명해지기를…’

          그냥 그저 그런 비나리입지요.

          여기나 저기나 거기나.

          희열에

          어제 아침 일입니다. 빨갛게 떠오르는 해도 서늘한 날씨에 놀랐는지 구름 속에 숨어 빛을 발하고 있었답니다. 늘 그렇듯 토요일 아침은 저도 좀 게으르답니다. 가게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바로 문 앞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누워 파르르 떨며 곧 넘어가려는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깃털도 몇 개 빠져 있었답니다.

          ‘도대체 왜 여기서…’하는 생각은 이내 숨은 답에 이르렀습니다. 여린 아침 햇살이 드리운 하늘을 담은 가게 유리창을 창공으로 착각한 녀석이 들이받아 일어난 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녀석은 게으른 아침을 떨치고 일에 빠져야 할 나를 조금 허둥거리게 하였습니다. 우선 녀석을  햇살이 들지 않는 기둥 그늘로 옮겨 놓고는 가게 문 열 준비를 하였답니다. 신경이 온통 녀석에게 꽂혀 급히 가게 문을 열고는 작은 종지에 물을 담아 녀석 부리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녀석은 곧 스러질 듯 여린 숨을 할딱일 뿐 내 부산한 몸짓엔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한 시간이 가까이 지날 무렵까지 녀석은 그렇게 맥을 못 추고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고 손님들은 들락거리기 시작하여 녀석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바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반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녀석이 물을 쪼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녀석은 깡총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구름을 벗어날 즈음 녀석은 휑하니 날아갔답니다.

          일도 잠시 잊고 녀석을 쳐다보던 제게 일기 시작한 것은 작은 희열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깊어 가는 가을의 나른한 아름다움이 그 희열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떨어져 구르는 마른 나뭇잎들 마저 바람에 살아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아있음. 그 희열에, 감사에.

          24년 시월에.

          노래 하나

          해마다 이 맘 때면 나도 모르게 절로 흥얼거리곤 하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정태준이 시를 짓고 곡을 얹은 ‘가을이 오는 소리’ 또는 ‘추심(秋心’입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맘에서 오는 소리/ 아, 아 잎은 떨어 지는데 / 귀뚜라미 우는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가을이 오는 소리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맘에서 오는 소리/ 아 아 잎은 떨어 지는데 / 귀뚜라미 우는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지는 잎에 사연 적어 시냇물에 띄어볼까/ 행여나 내 님이 받아 보실까/ 아 아 기러기는 나는데 / 깊어가는 가을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족히 한 스무 해가 지나간 것 같습니다. 안산 시립 합창단이 필라델피아에 와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날 밤, 모처럼 짧게 누렸던 내 문화생활의 여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답니다. ‘내 맘의 강물’,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과 함께 ‘가을이 오는 소리’를 흥얼거리며 살고 있는 연유랍니다.

          올해도 어느덧 깊어져 가는 가을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갑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이 가는 소리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기러기 날개 짓 소리 보다 먼저 내 맘에서 들리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어디 계절이 오고 가는 소리 뿐이겠습니까? 세월이 흐르는 소리, 시대가 바뀌는 소리, 내 삶의 여정 그 마디 마디 이어가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게 바로 제 맘일 터이지요.

          그렇게 또 하나의 가을이 내 맘 속에서 깊어 갑니다.

          이 아름다운 날들에

          이젠 욕심으로 노동을 이어갈 나이는 지났나 봅니다. 몸이 영 맘을 쫓아가질 못합니다.

          노동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뉴스를 쫓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둔 여기 뉴스들도 쫓아가기 바쁘고, 한국 뉴스들에 이르면 그야말로 공부하지 않고 받기엔 정신이 사나울 지경입니다.

          새 소식을 전하는 각종 소식통들은 매사 호들갑에 장사속을 지나치게 드러내어 피곤케 합니다.

          아직 작가 한강의 소설 하나도 읽어 보지 못한 나는 차마 그의 세계에 가 닿기도 전에 그의 소식을 전하는 소식들로 하여 지치는 듯하답니다.

          다만, 상을 수여하는 이들의 선언이 ‘아픔으로 지쳐 한이 쌓인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만나 보라’는 소리로 들려 귀가 솔깃 열렸답니다.

          뉴스의 열풍이 잦아드는 날, 차분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우려 볼 요량이랍니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에 온 몸이 반응하는 시리게 아름다운 가을날입니다.

          이런 날에 모국어로 노벨 문학상 수여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은 그저 설렘입니다.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의 아픔을 부퉁켜 안고 기억하며 그 아픔의 짐을 함께 이고지고 가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는 맛이 아닐까 하답니다.

          비록 몸은 맘보다 느린 때에 이르렀지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이 도처에서 제 눈길을 기다립니다.

          참 아름다운 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