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

엊그제가 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가을도 저물고 아침이면 두꺼운 옷을 찾는 계절이 되었다. 이것 저것 한 해를 마무리 해야만 하는 일들과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할 일들로 이렇게 저렇게 머리 속 생각들이 많다. 너무 빨리 지나간 시간들 속에 쌓인 후회와 부끄러움도 많고, 다가 올 시간에 대한 염려와 걱정 또한 함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한 주간은 할 수 있는 한 넉넉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최대로 넉넉하고 단순하고 더하여 여유롭게 보내려 한다. 추수감사절이 끼인 한 주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바쁘게 곱씹어 보고 싶은 것들은  감사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찾아내야 할 감사들과 오늘 내가 누리면서 모르고 있는 감사들 그리고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감사까지 누려 볼 생각이다. 감사는 누구에게 주는 것 이전에 내가 누리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감사절을 앞두고 무겁게 쳐진 가지들로 버거워 하는 옆 뜰 전나무들 무게도 덜어 주고, 겁 없이 하늘 높이 재려는 양 치솟는 뒤뜰 언덕배기 나무들을 맘 먹고 몽땅 베어 내었다.

무릇 감사란 누리고 있던 것들을 베어 내고 난 자리에서 더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닐까?

다시 봄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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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

올해 잔디 깍기는 마지막이 아닐까? 기온이 가파르게 떨어지며 가을이 깊어 간다. 잔디를 깍으며 스쳐 지나가는 지난 생각들 위에 넘치는 감사를 맛보다.

“한 이태만에 아범이 돌아왔는데 거지도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단다.”  외할머니가 큰외삼촌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시며 손주들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셨던 말씀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끌려 가셨다 두어 달 만에 피골이 상접한 채로 집으로 돌아오셨던 내 큰외삼촌에 대한 외할머니의 기억은 돌아가실 때 까지 이어졌다. 두 어른 모두 떠나신 지 오래된 이야기다만.

“이눔아! 넌 내 덕에 사는게야!” 어머니가 내 젊은 시절을 기억하시며 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셨던 말씀이다. 1980년 오월,  늦깍이 복학생이었던 나는 특별하게 무슨 한 일도 없었건만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었다. 그해 오월과 유월은 아직도 내 기억속에 아픔으로 남아있는 세월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잊을 만하면 어머니가 되뇌이셨던  “아눔아! 넌 내 덕에…”하실 때면 나는 그저 웃었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내 웃음을 아주 못마땅해 하셨었다. 그 어머니 떠나신 지도 어느 새 두 해가 가까워 온다.

그리고 어제 정말 모처럼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짧은 저녁 시간을 함께 했었다. 필라 세사모(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 벗들이다. 다들 먹고 사는 방법들(직업)도 다르고 주관심사도 다르지만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들을 공유하며 하나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참 좋은 이웃들이다.

이민자들의 권익, 소수민족들 사이의 연대, 도시빈민들에 대한 관심, 열악한 노동조건들에 대항하며 싸운 노동조합, 미국내 만연한 총기사고에 대한 안전 방안, 한반도 통일에 대한 염원 등등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보자고 애쓰는 이들이다.

“왜? 그 어린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만인이 보는 순간에 손 하나 제대로 쓰는 노력을 볼 수 없었는가?” 그 기억을 잊지 말고 그 까닭을 밝혀보자는 뜻에 지치지 않는 참 좋은 친구들이다.

이미 서늘해진 날씨건만 잔디를 깍다 보니 등에 땀이 배었다. 그렇게 내 맘속에 배어 나는 감사였다.

이 나이에 만나 즐거운 참 좋은 벗들이 있음은 내 삶이 누리는 정말 큰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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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껍(식겁食怯)

그야말로 씨껍(식겁食怯) 했던 저녁 한 순간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우체통에 메일을 집어 들고 집안에 들어와 보니 세무서(IRS)에서 보낸 편지가 있었다. ‘웬 IRS?’하며 뜯어본 봉투 속엔  내겐 어마 무시한 금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서류였다.

내용인즉은 2019년 그러니까 삼 년 전에 내가 보고한 세무보고가 실제와 달라 나름 지(IRS)들이 알아보니 내가 누락한 보고가 있어 추적해 본 결과 이에 대한 세금 7만 2천여불의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고된 일 마치고 돌아와 밀렸던 시장기가 싹 가시는 편지였다.

그들이 보낸 메일을 꼼꼼히 따져 볼 필요도 없이 훅 훑어보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도대체 공무원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쩌겠나? 나는 한 동안 내 정말 아까운 천금 같은 시간을 이 멍청한 공무원 시스템 또는 공무원들과 씨름할 밖에.

이건 싸움도 아니고.  아무튼 한동안 쓸데없는데 아까운 내 시간을 들여야만 할 듯.

내 아까운 시간을 뺏는 이 멍청한 놈들에게 몇 푼 안 되지만  내 세금이 쓰인다는 것 조차  불쾌한…

공연히 식겁했던 저녁에.

달(月)

아직 서리도 내리지 않았는데 오늘밤 최저 기온이 32도(0도)란다. 그러고보니 이른 아침 일터에서 만났던 달도 추워 보였다.

아무리 차고 기우는 것엔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하지만 그 수를 헤아리는 사람의 시간은 명확한 마침이 있어 서늘한 법.

달이 차고 기움을 느끼는 오늘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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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知足)에

눈길 닿는 곳마다 가을인 일요일 하루를 만끽하다. 쉬는 날 하루 계획에 온전히 들어맞게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맞는 저녁 시간에 맛보는 족함이 크고 또 크다.

애초 대단한 계획을 세운 일은 없다.

한 시간 늦게 아침을 맞는 일, 뜰에 낙엽 거두는 일, 아욱 상추 깻잎 쑥갓 무우 등속 가을 푸성귀 거두는 일, 누워 계시는 아버지 찾아 뵙고 점심 한끼 드시는 것 도와드리는 일, 돌아와 낮잠 한숨 즐기는 일, 아내와 함께 장보는 일, 푸성귀 다듬고 무우 김치 담그는 일, 이젠 길어진 밤시간 노장자(老莊子) 글귀 하나 곱씹어 보는 일.

그저 그렇고 그런 쉬는 날 하루 계획대로 보내고 맞이 한 왈 시월의 마지막 밤에 곱씹어 보는 말, 지족(知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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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일요일 하루 쉼이 큰 축복으로 여겨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참 좋다. 주중 일터에서 마주하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속마음에서 감사가 일곤 할 때는 부끄럼이 따라오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흔적에 비해 누리는 기쁨이 너무 큰 까닭이다.

어제 오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났던 무지개 뜬 하늘은 그야말로 경외(敬畏)였다.

무지개 – 성서 속 옛사람들의 고백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 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When I send clouds over the earth, and a rainbow appears in the sky, I will remember my promise to you and to all other living creatures. Never again will I let floodwaters destroy all life. – 창세 9:14-15>

노아의 홍수 이후 성서 속 옛사람들이 고백한 신의 음성이다. 기억은 사람이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잊지 않고 간직해 가는 것이라는 신앙고백, 바로 믿음이다. “내 계약을 기억하고…I will remember my promise…”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신이라는 바로 그 믿음.

모든 축복, 감사, 기쁨은 신의 기억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저 경외다.

무릇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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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에

다 늦은 나이에 시간에 쫓기며 산다. 아직 생업(生業)과 생활(生活)에 얽매어 있는 탓이다.

어느새 해 짧아진 일요일 저녁, 반주 한잔에 묵은 피로를 덜다 생각난 후배에게 전화를 넣었다. 못 본지 두 해는 족히 되었다. 후배라 하지만 이젠 다 같은 늙막에 맞먹어도 좋은 친구다.

“오, 정선생 살아 계셨나?” 내 인사에 돌아 온 후배의 답, “가실 때가 되셨나? 웬 선생? 아이 졸라… 씨…. 개밥 사러 나갔다가… 거의 쌀….”

나는 그의 다급한 소리에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걸려 온 그의 전화 목소리. “아따…하여간…. 그 새를 못 참고 전화를 끊다니… 내가 싸는 소리 좀 들으면 어때서!”

웃으며 던진 내 답. “얼마나 거룩한 일이냐? 누군가의 먹을거리를 위해 막장에 이른 배설의 아픔을 참는다는 일이… 마침내 그 아픔이 환희로 바뀌는 더할 나위 없는 그 거룩한 시간을 내가 차마 어찌 빼앗겠냐?”

그렇게 낄낄거리다 ‘해 바뀌기 전에 얼굴 함 보자’는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그 해가 언제인 줄은 서로가 모른 채.

곰곰 따지고 보니 무릇 모든 거룩함은 거룩한 곳에 있지 않는 듯도 하고…

하늘

종종 하늘에 홀리곤 하는 버릇은 나이 예순을 넘기고 나서 생겼다.

홀려 바라보는 하늘엔 사람살이가 그대로 그려져 있곤 한다.

이른 나이에 그 하늘 그림 깨달아 ‘바닥이 하늘이다’며 평생 외길 걸어온 벗 하나 있다.

<누구든지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땅은 바닥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입니다…… 하늘이 내려와서 또 하나의 하늘인 민중을 섬기고 있는 바닥이 하늘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늘이 아니라 바닥에 있습니다.>

하늘 쳐다보며 생각 난 오랜 벗이 부른 노래이자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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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딸아이 혼인 덕에 이박 삼일 도시 여행을 즐겼다.

도시의 해는 건물 사이를 비집으며 떠오르고, 달도 건물  뒤로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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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뉴욕은 아름답다. 하늘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물이 도시를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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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서른 여덟 해 전 일이 되었다. 아내와 내가 부부의 연을 맺을 즈음, 내 선배이자 우리 부부의 선생 그리고 이젠 삶의 동행자이며 길동무 더하여 신앙의 스승인 홍목사님이 던져 주셨던 말씀. “누군가의 말이라네. 결혼이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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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 년 전 아들과 며늘 아이에게 그 말을 전했고,  어제 밤엔 딸아이과 사위에게 우리 부부가 서른 여덟 해 전에 들은 이야기라는 말을 덧붙여 전했다.

모처럼 일상을 벗어났던 이박 삼일. 아들과 며느리와는 가족 사랑을 깊이 새기는 참 뜻깊은 경험을 함께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딸과 사위, 그들을 위한 내 기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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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으로 쌓인 인연으로 하여 서로 간 노년의 초입에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만난 캘리포니아 사돈 내외와 함께 바라본 허드슨 강의 아름다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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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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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Thanks to my daughter’s wedding, I enjoyed a city trip of two nights and three days.

The sun in the city rises pushing aside buildings, and the moon hides behind them. Nevertheless, New York City is still beautiful. That’s because the sky enwraps the city and the water curves around it.

Before I knew it, it was something that happened thirty-eight years ago. Around the time when my wife and I were about to tie the knot, Rev. Hong, who was my senior and a teacher of my wife and me at that time, and now a fellow traveler of my life journey and my teacher of faith, spoke the words: “Someone said this. People should marry not just because they love each other, but because they want to love each other.”

Four years ago, I passed it to my son and daughter-in-law. And again, I did so to my daughter and son-in-law last night, adding that it was what my wife and I were told thirty-eight years ago.

Two nights and three days out of my daily repetitive life after a long time! It was very meaningful, as I could think over about family love with my son and daughter-in-law. At the same time, it was a precious time of my prayers for my daughter and son-in-law.

The Hudson River was so beautiful, when I looked at it with my son-in-law’s parents with whom I made a relationship at the beginning of old age through mysterious fate.

Just gratitude, gratitude, gratitude.

 

꼰대

최씨氏였던 어머니와 장모가 김가家되고 이가가 되던 날이나,

이씨였던 아내가 김가가 되던 날에도

참 스마아트한 사내였다 나는.

‘암만, 여기 문화인것을.’

 

딸네미가 보내 준 결혼식날 일정표

예식 주례자가 하는 성혼 선포에

내 딸아이가 김씨 아닌 권가로 박혀있다.

 

참 순간이었다.

눈물 한 방울 뚝 그리고

치미는 화.

‘아니 이런 몹쓸…. 내 아이 성은 왜 바꿔?’

 

숨 한번 크게 다스린다.

‘후유, 아직 꼰대일 순 없지?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