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부르는 작은 음악회’에 왕복 세시간 운전을 하며 다녀왔다. 정말 조촐하게 작은 음악회였지만,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내가 누린 소망은 밝았고, 희열은 매우 컸다.
노래 부르는 이들을 쫓아 따라 입을 떼며 옛 생각들이 마구 스쳐 지나 갔었다. ‘검푸른 바닷가에….’ 그 친구를 따라 부르며 내 스무살 언저리 친구들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고, ‘금관의 예수’를 따라 부르며 종로 오가 기독교회관를 드나들던 내 청년 시절 한 때의 벗들을 떠올렸으며, 노래극 ‘공장의 불빛’ 가운데 ‘이 세상 어딘가에…’를 읊조리면서는 동일방직과 YH공장 사십 수년 전 당시 내 또래 누이들의 고통스럽던 모습들을 떠올렸었다.
‘철망 앞에서’와 ‘천리길’을 이젠 잘 나오지 않는 목청을 뽑아 따라 부르면서는 이 이민의 땅에서 조국 통일과 평화를 위해 삶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다 떠나신 필라 우리 친구들의 어른 장광선선생도 떠올렸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즈음도 우리 내외가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곧잘 함께 흥얼거리는 노래여서 정말 좋았다.
언제나 흥에 넘치는 아내도 한 곡을 택해 불렀다. ‘그 사이’였다. 김민기선생이 1972년도 만든 노래이니 내가 대학 입학을 했던 해이며, 유신 계엄이 일어난 때였다.
그 사이 – 1972년에서 2024년, 자그마치 52년 이라는 세월의 간격 사이엔 숱한 사건들과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979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꿈을 찾다가 스러지며 그래도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싸우’자던 동일방직 YH 그 누이들 뒤를 이어 일어난 부마항쟁 끝에 박정희 유신독재는 끝이 났었다. 그 때 누이들의 참담했던 기록들을 아현동 굴레방다리 아주 작고 초라했던 내 출판사에 작은 책자로 펴낸 기억도 떠올랐다.
그리고 1987년 그 뜨거웠던 여름, ‘아침이슬’로 뒤덮여진 신촌에서 시청앞까지 뚜벅뚜벅 걸었던 날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솔직한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1979년 그때처럼 전두환 독재가 그리 무너질 지는 몰랐었다.
그랬다. 8.15 광복, 4.19 며칠 후 이승만의 몰락, 박정희의 비참한 죽음, 전두환 그 비굴한 끝을 당시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었다. 언제나 그랬듯 몰락의 징후들은 차고 넘쳤지만, 세상을 덮고 있는 권력과 비굴한 아부꾼들과 무지한 맹종자들과 하루 입에 풀칠하기 바쁜 사람들이거나 제 살 길에 바쁜 사람들에겐 그 날이 그리 빨리 올지는 몰랐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정말 많은 것들이 좋아지고 밝아졌다만, 권력에 이르면 그 어떤 분야의 권력이든 이승만이래 문재인정권까지 모든 정권에서 보아왔던 비겁, 비열, 무지, 무능, 사악 나아가 반통일, 반평화, 친일을 넘어 숭일 매국 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놈들의 세상처럼 다가오곤 한다. 한국 뉴스들이.
허나 역사의 반동들이 기세를 마음껏 부리는 세상을 바라보니 그 끝과 몰락이 눈에 보인다. 숱한 징후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하여 그 사이 – 별거 크게 변한 것 없다. 사람 같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곧 올게다.
김민기선생이 꿈꾸던 내일의 아이들을 위한 꿈에 무대가 펼쳐지는 세상이 말이다. 그래서 희망이다.
오늘 그 작은 음악회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준 필라의 아름다운 친구들에게 감사를 보내며.
이른 아침 가게로 들어선 Rose씨는 아내 Anita가 떠났다고 했습니다. Rose씨 내외는 서른 해 넘는 우리 가게 오랜 단골입니다. 유태계 은퇴 의사인 Rose씨는 최근 몇 년 사이 걸음걸이가 영 불편합니다. 걷는 모습이 그저 아슬아슬하답니다. 그의 아내 Anita가 그보다는 훨씬 건강했답니다. 한 두해 전부터 이런 저런 병치레로 병원 나들이가 잦던 Anita가 그만 먼저 떠났답니다.
그가 예의 그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가게문을 나서면서 울먹이며 제 아내에게 던진 말이랍니다. “Anita가 여기와서 당신하고 얘기하는 걸 참 좋아하고 즐겼었는데….”
한 오륙 년 되었나 봅니다. 해마다 오랜 단골 분들 가운데 몇 몇은 꼭 떠나십니다. 허긴 한 자리에서 한 세대 훌쩍 넘긴 세월을 보냈으니 아주 당연한 일일겝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이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남편을 잃은 할머니들은 대개 덤덤하게 그 일을 전하시는데 비해, 아내를 잃은 할아버지들은 맥없이 슬픈 얼굴이 되곤 한답니다.
혼자되신 할머니들은 제법 오랜 동안 뵐 수도 있거니와 밝은 편인데 비해, 혼자되신 할아버지들은 더는 그리 오래 볼 수 없을 뿐더러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남기곤 한답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랍니다.
하여 혼자 읊조려보곤 한답니다. ‘언젠가 그때가 되면….내가 먼저….. 아무래도 그게 맞는 일인데…. ‘
둘
해마다 이 맘 때이면 삼 십 수 년 동안 똑같이 겪는 일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입학과 개학 시즌이 되면 교복을 입어야만 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엄마나 할머니와 함께 가게를 찾는 답니다. 교복을 제 몸에 맞게 고치려고 오는 것이지요.
해마다 꼭 겪게 되는 일이란 바로 엄마와 딸 또는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와서는 교복 치마 길이를 줄일 때 벌어지는 다툼이랍니다.
딸이나 손녀는 할 수 있는 한, 짧게 줄여 달라고 주문을 하고 엄마나 할머니는 될수록 길게 해달라고 요구를 한답니다. 언제나 무릎이 경계이지요. 아이들은 무릎 위 한 뼘쯤 위로 요구를 하고, 어른들은 무릎을 덮을 정도로 주문을 하지요.
그럴 때면 참 여러 서로 다른 다툼들을 보게 되곤 한답니다. 딸과 어머니나 할머니와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볼 때도 있고, 아이들 입이 쉬지 않고 불만을 토해내도 전혀 들은 체하지 않는 어머니를 보기도 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어쩌겠수’하는 할머니도 만나게 된답니다.
그런데 또 이런 경우도 있답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서는 저희에게 전화를 주는 어른도 있답니다. ‘그래요. 제가 책임질 거고요. 아까 제 아이가 원했던 길이보다 몇 인치 길게 해 주세요.’라고 당부하는 것이지요.
해마다 이 맘 때 겪는 변치 않는 풍경이랍니다.
삼 수 년 전 그 때의 딸이 지금은 엄마 아니 할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는 답니다.
셋
해마다 ‘덥다 더워’, ‘춥다, 추워’를 후렴처럼 중얼거리고 사는데, 꽃들은 저마다 때 맞추어 봉우리를 맺고, 피고, 지곤 하지요. 아무 말없이.
연 사흘 비가 쏟아졌다. 지난 밤에는 홍수와 강풍과 회오리 등에 대한 주의 메세지들이 경고음과 함께 이어졌다. 오늘 동네 신문 온라인판엔 엊저녁과 오늘 사이 비바람의 피해를 입은 사진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허리케인에서 열대성 폭풍으로 바뀐 Debby가 올라오면서 그 기세가 많이 꺾인 채로 우리 동네를 지나갔는데 크고 작은 피해들이 잇달았단다. 아직도 비는 오락가락 이어지고 간간히 부는 강풍으로 나뭇잎들과 잔가지들이 뒹군다.
한 사흘 내 일터가 한가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 마침 주문 일정에 맞추어 내 손에 이른 카를로 레비의 소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에 빠져 보냈다.
때마침 멀리 호주에 계신 홍길복 목사님께서 이번 주일에 행하실 설교문을 보내 주셨는데, 기후변화에 대한 인사로 시작되는 설교문이 소설과 함께 내 머리 속에 교차되어 깊게 남게 되었다. 소설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오늘은 홍목사님의 설교문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My Final Message)> 를 여기에 올린다.
너나없이,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기뻐하고 위로 받고 서로 격려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My Final Message)
본문 : 고린도후서 13장 11-13절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과 기쁨이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기후변화Climate Change로 인한 지구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이 추운 겨울 모두들 몸은 강건하시고 마음엔 평강이 더해 지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저희 시드니에서 은퇴한 목사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또한 시드니교회는 금년도 저희 은퇴목사들의 예배와 친교를 위하여 적지 않은 예산을 세워서 지원해 주셨는데 이런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다 보낸 몇 차례의 편지들을 모두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형제들아,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할 때는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죽음을 앞에 두고 남기는 유언의 말씀이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공통된 마지막 말이 될 것입니다. 혹은 형사재판에서 판사가 판결을 하기 전 피고에게 자신을 변론하도록 기회를 주는 <최후진술>도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란 어떤 글이나 연설을 마무리하는 일종의 Epilogue로써, 이는 대부분의 편지나 논문, 작품이나 연설의 맺는 말이요, 결론이요,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의 요약이며 강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 중 아테네 다음으로 고린도에 가서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후 그곳을 떠난 바울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고린도교회 교우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지금은 많은 편지들이 소실되고 오직 고린도 전서와 후서만 남아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린도전서 5장 9절 이하에서 <내가 전에 너희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이라는 귀절만 보아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이전에 벌써 또 다른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 확실합니다. <고린도 전서 이전에 이미 다른 고린도 전서가 있었다. 지금의 고린도 전서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고린도 중서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신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를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구를 중심하여 추론해 보건데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편지들이 서로 교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썼던 모든 편지, 즉 고린도전서나 중서나 후서를 막론하고 자신이 공개적, 혹은 개별적으로 썼던 편지나 아니면 직접 대면하여 전했던 모든 설교 말씀들의 총 결론이요, 요약이요, 맺는 말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어라, 위로를 받으라, 마음을 같이 하라, 평안할지어다>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끝으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고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공동번역도 비슷합니다. <형제 여러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 권고를 귀담아 들어주십시오. 뜻을 같이하며 평화롭게 사십시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도 읽어드립니다. <친구 여러분, 이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기쁘게 사십시오. 조화롭게 생각하십시오. 모두에게 상냥하게 대하십시오> 이렇듯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끝으로 말합니다. 이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등등 여러가지 형태로 번역된 우리말을 King James version이나 RSV나 NIV나 Good News Bible 등에서는 거의가 다 Finally라고 쓰고 있습니다.
지위의 고하나, 인물의 유명, 무명을 떠나서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나 글> <Final writing이나 Final speech>는 그의 생각이나 말이나 일생을 요약하고 매듭 짓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저는 1980년 호주에 와서 이민목회를 시작한 후 2012년 은퇴하기까지 주일 낮 예배에서만 공개적으로 설교한 것이 약 1500번쯤 됩니다. A4 용지로 약 7500장 정도가 되는데 그 설교문들은 지금도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은퇴 후 시드니교회의 초청을 받고 이 강단에서 말씀 전한 것은 제직수련회를 포함하여 모두 6번이었습니다. 저는 1974년 5월, 서른 살 되던 해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서울 서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금년에 꼭 50년이 되었습니다. 또 올해 저는 7학년을 졸업하고 마침내 8학년에 입학했습니다. 많이 살았고 이젠 남은 날도 그리 길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읽으며 저 또한 생각해 봅니다. <그 동안 시드니 제일교회, 시드니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이민교회들과 호주와 한국 등 이곳 저곳 여러 곳에서 참 많은 설교와 강의, 강연, 그리고 글쓰기를 해 왔는데 나도 이제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제는 점점 끝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한데 <마지막으로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나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닥쳐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렇게 때문에 더더군다나 모든 일은 마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이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 하나쯤은 미리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언제나 오늘 내가 하는 이 설교가 나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생각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다음 주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설교하십시오> 저도 그리하지는 못하면서도 저는 자주 이곳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할 때마다 이 <설교학의 교과서적 이야기>를 힘주어 가며 말했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 최후로 남기는 글, 나의 final word, final writing, final speech, final conversations는 사실 미리 준비하기도 쉽지 않고 정말 무슨 말로 나의 인생과 신앙과 생각을 요약해서 말해야 할지 결코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옛말에 <鳥之葬事에 基鳴也悲하고 人之葬事에 基言也善이라 했습니다. 새는 죽을 때가 되면 그 소리가 구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선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명인사들이 남긴 마지막 말들은 참 아름답습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하신 가상 7언 중 제일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말은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였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주님, 사랑해요. Lord, I Love You!>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이태석신부는 <모든 게 다 좋았어요. Everything is Good>이라고 말한 후 운명했다고 합니다. 철학자 칸트의 마지막 말도 비슷합니다. <Es ist Gut, 참 좋다> 스티브 잡스는 <당신의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Please love your family>라고 말한 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시드니교회 초대목사이신 최정복목사님은 최근 그분의 책 <한 낯선 자의 노래>에서 호주 원주민 가수 Roger Knox의 노래 한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은 일평생을 거쳐 한국이든, 동남아이든, 호주이든 그 어느 곳에서 살아왔던 간에, 이 땅에서의 모든 인생살이란 <하나의 낯선 자, 하나의 stranger>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면서, 결국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우리를 가르쳐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런 나그네와 행인 같은 낯선 인간이요, stranger인 우리를 향하여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최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하고 싶었던 말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든지 마지막 말은 쉽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람이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자신의 마지막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한 것처럼>, 마지막을 준비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마지막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내 신앙과 내 인생을 가다듬는 의미에서 숙제 겸 부탁의 말씀을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주무시기 전에 <내 인생의 마지막 말>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직접 내놓고 이게 내 마지막 말이라고 말씀하시지는 못해도, 어딘가에 써서 기록으로 남겨 놓으시길 바랍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도 꼭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마지막으로 해야만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경우, 거의 끝에 와서는 사회자가 꼭 묻습니다. <이제 끝으로, 마지막으로 꼭 하실 말씀 있으시면 짧게 한마디 하시고 마무리를 지으시지요>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첫째, 짧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는 분명하게, clear하게, 해석의 여지가 별로 없이 해야 합니다. 셋째는, 마음을 담아 진솔하게 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짧게, 분명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 이 세가지를 잊지 마시고 오늘 저녁 <내 인생의 마지막 말들>을 꼭 남겨 보시길 신신 당부합니다.
자, 그건 그렇고 이제는 처음 시작했던 성경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의고린도교회 교우들과, 오늘 2천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어라. 위로를 받으라. 마음을 같이 하여라. 그리고 평안할지어다> 몇가지 다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는 바울 사도의 이 <마지막 말>는 언어학적으로는 동어반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바라는 것,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인데 각기 다른 표현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자신의 생각과 부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약간은 길게, 또 약간은 동어반복적으로 한 이 마지막 말씀을 저는 한마디로, 짧게, 이렇게 요약해 봅니다. <여러분, 제가 제일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이것입니다.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사십시오>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교리논쟁과 윤리 도덕적 설전이 있었습니까? 교회내에서의 파벌문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갈등 문제, 교우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송과 재판문제, 결혼, 이혼, 독신생활, 음행 문제를 비롯하여 우상과 우상의 제물문제, 사도권의 문제,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성찬식을 비롯하여 예배의식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 등등 참 많은 문제들을 놓고, 어떤 때는 설전을 벌리고, 어떤 때는 화를 내고, 심지어는 다시 보지도 않을 것처럼 무섭고 매정하게 말해왔던 바울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지난날의 대립과 다툼, 타이름과 설명설득을 모두 끝내면서 의외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 한 분 한 분,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오> 이런 마무리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약간 당황했습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라면 <예수 잘 믿으십시오> <예수 똑바로 믿으십시오> <끝까지 신앙생활 잘 하십시오> <끝까지 예수님만 붙들고 가십시오> 같은 말씀이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아니한 것입니다.
물론 AD 1세기, 키케로를 비롯한 고대 로마의 서신들과 공문서들의 기본적 틀은 Prologue에서는 문안과 감사인사로 시작하여 본론을 거친 후, 마지막 Epilogue 에서는 주로 축복으로 끝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서신들 역시도 대부분 그런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사도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들과 비슷하게 문제도 많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여러 개 의 편지를 모두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하루 하루를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오>라고 말씀한 것에 대해서는, 단순한 충격의 정도를 넘어서서 여기에 스며 있는 또 다른 깊은 의미와 뜻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마지막 말씀, –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사십시오 – 라는 이 최후의 권면에는 인간과 신앙공동체, 믿음과 도덕의 핵심과 본질이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만이 참되고 영원한 기쁨이며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략된 말씀, 아니면 숨겨진 말씀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기쁨의 삶, 행복하게 사는 인생 – 그 밑바탕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본질은 <구원 얻은 자들의기쁨이요, 영생을 확신하는 자들의 행복>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이나 오늘 여기 시드니교회 성도들이나, 우리가 주어진 인생길, 비록 힘들고, 지치고, 고단하고, 절망스런 일들이 이어지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하루 하루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또 행복하게 살수 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그 이유, 그 뿌리, 그 근본 바탕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우리는 오늘 저녁 죽더라도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생과 복락을 누린다>는 그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웃을 수 있고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 두십시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것은 절대로, 정말 절대로 돈이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성공과 성취가 아닙니다! 건강, 건강 하는데, 건강이 아닙니다!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변치 아니하는 믿음입니다!
<기쁘게 사십시오. 행복하게 사십시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요, 소망이요, 생명입니다> 모든 환경과 일체의 조건을 초월하여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다른 모든 신앙생활의 준칙처럼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 중에서 어떤 것은 선택적으로 프로그래밍하여 새벽기도, 특별기도, 금식기도를 하고, 또 감사주일을 만들과 감사헌금을 드리면서도 <기쁨의 주일> <행복한 주일>은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요? 기도와 감사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가요?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이 명령 역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장 4-7절>
우리가 70여년전 주일학교에서 배우고 불렀던 노래입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항상 기쁘다. / I’m so Happy. I’m so Happy. I’m so Happy. Happy all the day! / 와다시와 우레시. 와다시와 우레시. 와다시와 우레시. 이찌모 우레시! / 워창 꽈일라. 워창 꽈일라. 워창 꽈일라. 창창 꽈일라!>
6.25 후, 가난한 시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월사금을 내지 못해서 학교도 다니기 힘들었던 시절 – 그래도 그 때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기뻐해라. 즐거워해라> 하면서 해맑은 얼굴로 노래를 부르게 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주일 마다 교회에 나와 기도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며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지 아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이것은 구원받고 은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합시다. 주일 제대로 지키지 않고, 기도 생활, 신앙생활에 게으르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한 것 만이 죄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기쁘고 행복하게 살지 않는 것 역시 큰 죄입니다. 종교적 의식 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생활 속에서의 실천입니다. 모든 성화된 삶의 최고 모습은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영원한 낙관주의자들입니다. We are ultimate optimist! 펼치어지는 정치–경제적 환경이나, 가정적 고난이나, 개인적 건강이나 성공-성취와는 전혀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래서 오늘 바울사도가 전한 마지막 말씀이나, 저의 마지막 부탁은 모두 다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그저 하루 하루를 꼭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Dear Friends! This is my final Message. Rejoice Always! Be Happy in Christ! This is the Word of God. Amen>
지난 밤 거세게 불던 비바람이 더위를 좀 데리고 가주나 했건만 여전히 찌는 하루였다. 에이 이런 날은 게으름이 최고다. 하여 손에 든 책이다.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이 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 분배에 대한 인류학적 사유>다. 한글책 이름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이 원제인 < Presence and Social Obligation, 현존과 사회적 의무> 에 비해 내게 훨씬 가깝게 다가와서 손에 들었던 것인데, 부제인 <분배에 대한 인류학적 사유>보다 원래 부제인 < An Essay on the Share 분배에 대한 에세이>가 더 그럴 듯했다.
아무튼 내게 분배니 기본소득이니 인류학적 관점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아직 어렵다. 헌데 굉장히 재밌다. 게다가 짧다. 역자 이동구의 말과 추천사를 다 포함해도 고작 130쪽이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을 전해주는 뉴스들은 대개가 좀 삭막하다.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작은 시골 마을이나 한국이나 아님 세계 어디라도 거의 엇비슷하다. 일테면 불평등, 차별, 배제, 편가름 등등 답답함을 몰고오는 소식들이 넘쳐나는 일들이 하루라도 거름없이 이어진다. 나야 다 살아가는 인생길로 접어들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 아이들은 장차 어떤 세상에서 살까하는 염려가 떠나지 않는 뉴스와 풍문 속에서 산다고 할까?
책을 덮고 나니 잠시라도 그런 삭막함과 답답함, 불안과 염려들이 사라지는 맛을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사람살이에 대한 희망과 역사를 주관하는 신에 대한 내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책이었다.
저자는 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때로는 미국 이야기들과 이런 저런 내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학자들의 이름들과 그들의 이론들을 설명하면서, 노동, 일자리, 분배, 좌파, 우파, 국가, 사회, 공동체 등등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내 머리 속에는 내가 이미 모두 조금씩은 겪었던 일들이 마구 뒤섞여 떠오르던 것이었다.
일테면 내가 어릴 적인 1960년대 당시만해도 변두리였던 신촌 언덕배기 동네에 수도관들이 이어지던 때 윗집과 아래집 사이 벌어졌던 아귀다툼이 생각났다던가, 1960년대 말 신문로 일대 판자촌들에 살던 이들이 쫓겨나간 응암동 천막촌 친구의 합판 마루방과 그 동네에 나뒹굴었던 순복음교회의 광고지들, 청계천 난민들이 쫓겨나간 경기도 성남의 그 아수라가 지나간 70년대 초 진흙창 거리들이 마구 내 머리속을 오갔던 것이다.
이제 거의 사십 년이 가까워 오는 이민 초기, 덩치는 나보다 크되 머리 피도 안마른 어린놈들이 눈 찢는 흉내를 내며 chink, chink를 함부로 외쳐댔던 떄도 생각나고, 아시안 아이들론 유일했던 내 아이들 학교로 말도 안되는 이유로 호출되었던 일도 생각나던 것이었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다원성, 곧 ‘모든 사람이 각자의 현실이 보장되는 세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기쁨’을 뛰어넘는 세계를 꿈꾸는 제임스 퍼거슨의 학자적 꿈 이야기다. 그는 학자로서 인류들이 걸어갈 희망적 세상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현존(Presence) – 국가, 사회, 공동체 등등의 이름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이 모든 분배의 유일한 조건이 되는 세상, 나아가 “지금, 여기’가 세상 이 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확장되어 이어지는 세상, 마침내 인류들의 오랜 어제의 꿈들이 오늘에 이어지는 세상, 뭐 그런 학자적 꿈!
장례예배와 하관예배 손님들 접대를 마치고 돌아와 맞는 저녁입니다. 왔던 아이들도 다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한 열흘 동안 먼 여행을 끝나고 돌아와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이젠 다 말라 없어진 줄 알았던 눈물이었는데, 얼핏 들리는듯한 아버지 목소리에 주르르 흘리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어제 밤 장례 예식에서 손님들에게 드린 제 인사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 감사입니다.
이 더위속에 저희 아버님께서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예식을 준비하여 주신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와 정범구목사님 그리고 교우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멀리 타 주, 타 도시에서 함께 해 주신 분들께 송구함과 함께 드릴 수 있는 말씀 그저 감사 뿐입니다.
부활의 믿음 위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먼저 떠나가신 이들의 삶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곤 합니다. 저희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제 아버님의 마지막 순간들을 고요하고 평안케 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드리고 싶은 말, 역시 그저 감사, 감사, 감사 뿐입니다.
아버님 연세 만 아흔 여덞이셨습니다. 옛 우리 나이로는 아흔 아홉입니다. 이걸 옛날 어르신들은 백수(白壽)라고 했습니다. 백살에 한 살 못 미치는 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즈음 백세시대라는 유행에 걸맞게 장수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타고나신 치아들을 거의 다 그대로 간직하고 떠나셨습니다. 떠나시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안경없이 웬만한 글들을 다 읽으셨습니다.
게다가 돌아가신 병명이 없으십니다. 앓고 계시던 병이 하나도 없으셨다는 말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나이를 다 사시고 아주 평온하신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하여 또 감사입니다.
이것 하나 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년 전 먼저 떠나신 제 어머님과는 일흔 세해, 자그마치 칠십 삼년을 함께 사셨답니다.
그 어머님께서 저 하늘에서 지금 아버님께 재촉하신답니다. “이 양반아! 끝났으면 빨리 오시지 뭘 그리 꾸물거리시나?” 그 어머니 말씀에 제 아버님 지금 마음이 매우 바쁘다십니다.
하여 제 이야기 짧게 끝내겠습니다.
아버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우하셨습니다. 열살에 어머니 곧 제 할머니를 여의고, 열 여덟에 일본 탄광 노동자로 끌려 갔었고, 스물 다섯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되어 전투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블구하고 제 아버님은 그저 감사함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했던 분이셨습니다.
아들인 제가 제 아버지를 기억하는 단 한가지를 꼽으라면 “정말 착하게 사셨다”는 말일겝니다.
그렇게 저희 일가를 이루셨습니다. 하여 또 감사입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기 전 그런 아버지를 제가 새길 수 있게 해준 여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제 어머님이십니다. 일찍 돌아가신 제 할머니의 빈 자리를 73년 그 긴 오랜 시간을 채우셨던 사람, 바로 제 어머님이셨습니다.
둘째는 제 세 누이들과 제 아내입니다. 제 어머님 마지막 삼 년, 그리고 어머님 먼저 가시고 아버지 홀로 지내셨던 사 년 세월을 제 아버지가 ‘정말 착하게’ 지낼 수 있게 옴 몸과 맘을 다해 함께 했던 제 누이들에게 정말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특별히 제 누님의 노고가 정말 컸습니다. 막내 동생의 헌신은 늘 제 기대 이상이어서 그 고마운 마음의 크기가 참 큽니다. 아마 남편인 최준용 장로의 기도가 셌던 모양입니다. 멀리 살아서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했던 둘째에게도 똑같은 고마움을 보냅니다. 아내와 매형의 헌신과 기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고마움 목록들 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가르치고 남겨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분들과 함께 보내는 오늘, 바로 이 시간이 정말 감사합니다.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이만 감사의 말씀을 접으면서…. 마치 제 아버님께서 부르시는 노래 같은 시 하나 읊으렵니다.
귀천(歸天)
– 천상병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가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생각지도 않게 아버지의 삶을 기리는 공훈증서를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New Castle County Executive(카운티 행정관이니 군수라고 할까요)명의로 보내와 감사 목록을 하나 더했습니다.
** 오늘 하관예배 즈음에 100% 비가 그것도 폭우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가 제 감사의 크기를 한층 높게 쌓을 수 있었습니다.
*** 얼굴을 마주 대했거나, 목소리로 또는 글로, 이렇게 저렇게 얽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위로와 조의를 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의 날입니다. 아주 편하고 여유롭고 마음 넉넉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뜰일도 하고, 책도 좀 읽고 낮잠도 한숨 늘어지게 잤습니다. 사이사이에 아들 며느리의 안부 전화도 받고, 독일 출장 중인 딸과 사위의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지난 일기들을 뒤적이다가 육 년 전 오늘, 제 가게 손님들에게 보냈던 이메일 편지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제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습니다. 두 해 전에 결혼한 아들은 가까운 필라에 살고, 딸 아이는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는 일 년에 몇차례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그 때 일들이 가물가물 먼 옛 일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일 힘들었던 계절이 해마다 이 맘 때 였던 것 같습니다.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지만, 우리 부부는 그 시간을 세탁소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아이들을 데리고 세탁소에 나와 함께 있곤 했었지만, 세탁소 특유의 여름 더위를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곤욕이었답니다.
제가 무지했던 탓도 있었고, 게을렀던 요인도 있었지만 제 형편에 맞게 아이들을 보낼 summer camp나 여름방학 프로그램을 찾아 아이들을 보내는 일도 참 쉽지 않았답니다.
특별히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던 기억도 없거니와, 하다못해 영화관을 함께 찾았던 일도 거의 없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엇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이 참 고맙습니다.
Father’s Day 아침에 제 두 아이들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 보았답니다. 부끄러움으로 말입니다.
한가지 덧붙일 말이 있답니다. 제 부끄러움을 감싸는 감사함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아이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하루 하루를 즐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말이지요.
오늘, Father’s Day는 물론이거니와 한 주간 내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그 겨울, 일요일들 – − 로버트 헤이든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그 검푸른 추위 속에 옷을 입고는/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 하느라/ 갈라져 쑤시는 손으로 재속의 불을/ 다시 살려 놓았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음에도.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따뜻해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나는 그 집 구석구석에 배인/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옷을 입고는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기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건성으로 말을 건네곤 했다/ 내가 그때 무엇을, 무엇을 알았을까/ 사랑이라는 엄숙하고 외로운 사명을.
Those Winter Sunday – ROBERT HAYDEN
Sundays too my father got up early/ and put his clothes on in the blueblack cold,/ then with cracked hands that ached/ from labor in the weekday weather made/ banked fires blaze. No one ever thanked him.
I’d wake and hear the cold splintering, breaking./ When the rooms were warm, he’d call,/ and slowly I would rise and dress,/ fearing the chronic angers of that house,
Speaking indifferently to him,/ who had driven out the cold/ and polished my good shoes as well./ What did I know, what did I know/ of love’s austere and lonely offices?
그리고 오늘 읽은 책의 한 대목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버트야니(Alexander Ratthyany)가 쓴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현재에(서) 우리의 과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어떤 양상이 되는지는 현재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 중략 ——- 현재는 미래가 지닌 가능성처럼 활짝 열려 있으며, 우리는 오늘 그 가능성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양심과 싸우고 있다. ‘미래가 지닌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이상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특정한 운명적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여와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 중략 ——– (오늘, 여기에서)우리가 발산(행)하는 것 자체가 가능성이다.>
과거와 미래 모두 오늘의 나와 연관되어 있고, 오늘의 내 생각과 행동이 과거의 의미도 바꿀 수 있고, 미래의 가능성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나이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 아이들에게 대해 켜켜이 쌓여 있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까지도 오늘의 내 생각과 행함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세상과 연계된 모든 일도 그러하다는 말일 터이니 말입니다.
하루는 늘 길거나 짧다. 또는 매우 더디거나 너무 빠르다. 모두 하루의 길이나 속도를 재는 내 잣대가 변덕스러운 탓이다.
하여 이젠 제법 노회해진 나는 하루를 시간의 흐름으로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그저 늘 쳇바퀴 속을 도는 일상에서 아주 작고 순간적인 느낌으로나마 단 한가지라도 마음 속에 이는 감사함 하나 붙든 하루면 족하다는 생각인데, 그조차 참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같은 하루는 그저 감사가 넘치는 날이다.
아들 내외가 차려준 밥상으로 넉넉히 배 채우고, 맑은 눈빛만 마주쳐도 그저 좋은 손녀 안고 놀다 돌아오는 길, 아내와 둘이 마른 바람 그득한 초여름 공원 길 걸으며 보낸 하루 – 내 변덕이 끼어 들 틈이 없는 하루다.
걷다 땀 식히려 주문한 맥주 이름이 “Victory Summer Love”였다.
뒷뜰에 고추 모종 몇 개 심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고추가 달렸다. 나리와 다알리아가 꽃망울 품은 여름이다. 여름 사랑 품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랴!
*** 고작 120쪽에 불과한 책을 두 주 째 손에서 놓치 못하고 틈나면 곱씹고 있다. 게다가 저자는 에세이라고 했건만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곱씹어 읽을수록 이즈음 뉴스들을 보면 답답해지기 일쑤인 마음을 잘 다스려 준다.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이다.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위해>라는 부제가 달렸다.
저자는 모든 분야의 권력 앞에 복종해 온 인류 또는 개인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 복종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들은 항상 (권력에 대한) 복종으로 저질러졌”지만, 역사는 분명 사람들이 “복종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 간단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용기와 관심, 열린 생각이야말로 복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다.
거짓 앞에서(나 자신이 저지르는 거짓을 포함하여) 복종하지 않는 삶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멀리 홍목사님과 이어진 연대로 그 기도에 응답하려는 옛 벗들이 있어 나도 낙관주의에 빠져 보련다.
똑 같은 일을 삼 십 수년 동안 이어오다 보면 대충 이골이 나도 단단히 나게 마련일 터입니다만, 해마다 맞는 첫 더위는 제겐 여전히 낯설고 일터의 하루는 몹시 길답니다. 제 일터의 환경은 예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쾌적하기 그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만, 여전히 보일러 스팀 열기에 끈끈하게 습도 높은 첫더위의 후끈한 바깥 바람이 들어와 함께 노는 날의 세탁소 하루 일은 늘 그냥 처음 겪는 일인 듯 하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난 뒤 찾아 온 첫더위를 또 그렇게 맞았답니다.
이런 날이면 혼자 중얼거려보는 말이 있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어느새 아주 오래 전 일이 되었습니다. 이강백이라는 떠오르는 신예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는 그의 작품 제목입니다. 그 제목의 연극 구경을 했던 날의 기억을 아직도 담고 있답니다. 솔직히 연극의 내용은 이젠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동 세실극장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비닐 우산을 받쳐들었지만 겨우 머리나 적시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동에서 신촌까지 걸었었답니다. 제 곁에는 그 무렵 막 연애를 시작했던 아내가 있었답니다. 78년도였으니 그 사이 마흔 여섯 해가 흘러가 버렸습니다.
변덕스럽기가 날씨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들 하곤 합니다만, 따져 보면 그 보다 더 변덕스러웠던 게 제 삶의 걸음걸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뜰에 나와 앉아 오늘 하루와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는 저녁바람은 아직은 시원합니다. 첫더위 타고 장미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습니다.
날씨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허나 이젠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을 꼽고 쫓는 때에 이른 나이가 되었습니다. 신(神)에 대한 경외와 사랑, 사람 사랑,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이어지는 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