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날들

“강둑 위를 눈부시게 비추는 햇볕의 따뜻함을 느낄 때, 노란 모래 밑에 숨어 있는 검붉은 흙을 바라보고, 마른 잎의 살랑거리는 소리와 강가에서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영원성은 나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봄이면 봄마다 나는 얼마나 많이 이런 경험을 했던가! 나는 점점 자신이 생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영속성과 회복성이 바로 나 자신에게서 느껴지기 때문에.”<쏘로우가 1856년 3월 23일에 쓴 글>

쏘로우의 글을 처음 만난 것이 벌써 사십여년 전 일이다. 우스운 기억이지만 그의 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은 당시 한국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판금도서였다. 알음알음으로 그 복사판을 구해 만났던 쏘로우에 대한 나의 기억은 사회운동가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순(耳順)에 이르는 나이에 다시 만난 그는 명상가이자 시인 나아가 노장(老莊)에 가까운 자연주의 사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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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 매사추세스주 콩코드에서 태어난 쏘로우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졸업 후 고향 콩코드로 돌아와 교사로 취직하지만 며칠 후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거부하고 사직한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연필공장에서 잠시 일하던 그는 28살 되던 1845년 초봄 월든 호숫가로 들어간다.

그 곳에 한 칸짜리 통나무 집을 짓고, 단 하나의 침대와 세 개의 의자를 놓고 홀로 문명을 등진 숲속에서 외롭게 살다, 마흔 다섯의 이른 나이에 간 기인(奇人)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간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의자에 앉아 깊이 사색하면서 매일 글을 썼다. 비록 그의 생전에 그가 쓴 글들이 주목받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성공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제 그의 책 <월든>은 19세기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 E. B. White는 “만약 우리 대학들이 현명하다면 졸업장 대신 <월든>을 한 권 씩 주어 내보낼 일이다”라고 극찬하였다.

1846년 멕시코전쟁이 일어나자 그 전쟁과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 납부를 거부하던 쏘로우는 감옥에 수감된다. 이 때 쓴 연설문이 바로 ‘시민불복종’이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나는 쏘로우에게서 한 분의 스승을 발견했으며 ‘시민불복종’에서 내가 추진하는 운동의 이름을 땃다.”고 한 글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 신이였던 예수말고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까? 말의 아름다움이여! 자연과 함께했던 그 아름다운 날들의 쏘로우가 오늘 여기에 살아있음 아닌가!

이른 봄날 늦저녁, 노을에 반달 걸리고 이름모를 새들 지저귀는 이 아름다운 날들의 소중함이여.

비록 미룬 일 태산이고 내일이면 또 다시 아둥바둥 땀 흘릴 이민일지라도…

신이 내게 허락한 세상과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 아름다운 날들이여!

개에게 길을 묻다

당(唐)나라 고승(高僧) 조주선사(趙州禪師: AD:778-897)의 일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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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승(學僧) 하나가 선사에게 물었답니다.

“개(犬)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개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선사 왈.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제자가 와서 똑같이 물었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번엔 선사 왈. “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답니다.

“아니 그럼 부처는 그만 두고 사람이 되지 왜 개로 그냥 있습니까?”

조주선사 호통을 치시며 “얌마! 그건 개한테 가서 물어 봐!”

뭐 당나라 때 뿐이겠습니까?

제 맘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제 안에 있는 부처 하나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남이 무얼 하건, 개새끼가 무얼하건 그게 도(道)닦는 것과는 뭔 상관이냐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오늘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지죠.

순례자든 방랑자든 아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이든

진리가 뭐 별거 있겠어요.

때론 화살이 되기도 하고 과녁이 되기도 하고

그게 삶이지요.

눈 뜨면 일어나 세탁소로 나가 보일러를 켜고, 일하며 배고프면 먹고,

집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가요무대 보며 세월도 한탄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자고…

그 일상적인 바로 나의 삶에 도(道)가 있는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심심하면 제가 글질하는 이 짓도 다 저를 위한 것이고요.

그게 때로는 누군가에겐 화살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따듯한 모포 한 장이 될 수도 있고…

과녁이 된 그가 하지 말란다고 아니 할 수도 없고

모포 한 장 더 달란다고 줄 여유도 없고

나도 때론 과녁이 되고

내미는 손도 되고…

그렇지 아니한가요?

무릇 도(道)라는 놈이….

그러다 다투기도 하고 표표히 떠나기도 하는.

다시

화살이 되고

과녁이 되는.

죽 한 그릇

조선조 말기 사람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일명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홍경래가 일으킨 난리가 나자 당시 선천부사로 있던 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홍경래에게 항복한다. 이 죄로 김익순은 죽고 그 후손들은 벼슬 길이 막히는 폐족(廢族)을 당한다.

벼슬길도 막히고 심한 차별을 느낀 김병연은 스무 살 무렵부터 큰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그가 방랑생활을 하며 읊었던 시(詩)들을 모은 ‘김립시집(金立詩集)’ 한 권을 남긴 채 쉰 여섯 나이에 그답게 객사(客死)하고 만다. 민중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권력자들을 풍자하며 조롱하는 그의 시들로 인해 오늘날 그를 조선시대 민중시인이라 부른다.

예의 그 방랑길의 김삿갓,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여러 날 산길을 걸어 기진한 삿갓의 눈에 외딴 오두막집이 들어온다.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오두막 집에 다다른 김삿갓이 끼니 구걸을 해 보지만 그 집 주인 역시 이 떠돌이 삿갓만큼이나 찢어지게 궁기든 사람인지라 변변히 나그네를 대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리 뻗을 오두막집이라도 가진 이 집 주인은 나그네를 대접할 요량으로 소반 위에 멀건 죽 그릇을 내밀고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말이 죽이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비칠 지경이니 낟알 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는 맹물같은 죽이었다.

이 맹물죽 한 그릇 대접받은 김삿갓 그냥 있을 수 없어 시 한 수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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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반 위엔 머얼건 죽이 한 그릇/ 뜬구름 그림자가 함께 오가네/ 주인은 미안해서 쩔쩔매나니/ 나야 본시 풍류객 상관이 있오> <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이름하여 ‘죽 한그릇(粥一器)’이라는 시이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정경인가? 이 얼마나 사는 맛 나는 장면인가? 내 입 풀칠하기도 바쁜 형편에 지친 나그네 그냥 보낼 수 없어 낟알 몇 알 두고 끓인 멀건 죽 한 그릇 내 놓고 미안해 쩔쩔매는 주인의 훈훈한 마음, 그 죽사발을 하늘로 받고 감사하며 또 다시 하늘을 담아 주인에게 바치는 김삿갓의 시 한 수.

풍류하면 제 밥벌이 걱정없이 펑펑 돈 깨나 뿌리며 주지육림에 빠져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것으로나 아는 사람들에겐 이런 풍류의 맛이 시원치 않겠다만 이것이 진짜 세상 살아가는 풍류이다.

주린 배 참다 참다 기진한 채 오두막 등불 하나 만나길 고대하며 발길 옮기는 사람들이 어디 김삿갓 뿐이겠나? 결코 수월치 않은 삶의 길목들, 더하여 때론 산길을 헤매는 듯한 이민(移民)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그 지친 삿갓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디 경제의 궁핍뿐이랴! 겨우 몸과 마음의 다리 뻗을 오두막 한 채 가졌으나 여전히 궁기에 빠져 있는 모습 또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이런 모습들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주인과 나그네가 멀건 죽 한 그릇 사이에 두고 하늘을 나누어 갖는 정겨운 모습에서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듯 오늘 여기 우리 한인 이민 사회가 서로의 하늘을 나누어 갖는 맛과 멋이 어우러진 사회가 되길 꿈꾸어 본다.

그것이 비록 멀건 ‘죽 한그릇’일지라도…

*** 오늘의 사족

나는 오늘도 죽 한그릇은 나누었다. 좋다.

골프와 장치기(杖球)

지나간 십 수년  동안 이 곳 지방 신문인 The News Journal지에 한국관계 기사나 한국인을 다룬 기사가 1면이나 2면을 장식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기억하기로는 전두환, 노태우씨의 구속기사, V자로 꺽였던 성수대교 붕괴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기사,  “정부 수립 후 첫 정권 교체”라는 제목을 단 김대중대통령 당선 기사와 그의 노벨상 소식 그리고 이 곳 DuPont Country Club에서 있은 맥도날드 컵 대회에서 우승한 박세리선수에 대한 기사가 전부이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판 스포츠면에 박세리의 사진과 함께 그녀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골프채를 잡아 보기는 커녕 “골프는 이민(移民)을 망치게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내가 골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다. 이젠 많이 숙련되어 어떤 모임이건 의례 나오는 골프 화제에 입 꼭 다물고 들을 수 있게까지 되었지만 한 때는 어떤 모임이건 화제가 골프로 옮겨지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하였다.  어쨋거나 남한(the South Korean)의 박세리”로 소개 되었지만 그녀로 하여 가게 손님들과의 화제거리가 되니 반가운 일이다.

기록에 의하면 골프는 15세기 무렵에 네델란드에서 시작되어 스코들란드로 전래되어 퍼졌다고 한다. 경기의 규칙이 성문화되기는 1754년의 일이고, 오늘날과 같은 기구와 규칙이 적용되기는 19세기 중엽부터라고 한다.

오늘날의 골프와 아주 흡사한 경기가  한국에 있었다. 조선조(朝鮮朝) 초기 역사기록인 <태종실록: 13년(서기 141년)>, <세종실록 : 3년(서기 1421년)>, 세조실록: 1년(서기 1455년)>등에는 뚜렷한 경기법칙 아래 행해졌던 장구(杖球)경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장구는 몇 사람이 좌우 두 편으로 갈라서서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공을 치는 막대기는 숟가락과 같으며, 공을 치는 끝은 손바닥처럼 넓적한데 이것은 물소의 가죽으로 만든다. 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솟아 오르고, 가죽이 두터우면 공은 멀리 가지 않는다. 또한 곤봉(袞俸)도 사용하는데 공같이 둥그런 것이 달려있는 이 곤봉으로 공을 치면 공이 뱅글뱅글 돌면서 뛰어 오르지 않고 자리만 이동한다. 이 모두 두텁고 얇은 정도와 크고 작은 모양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한다.

공은 나무로 만들거나 차돌을 사용했고 그 크기는 계란만 했다 한다. 땅을 파서 주발 모양같은 구멍을 만드는데 이것을 와아(窩兒)라 불렀다. 이 와아는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파 놓기도 하고, 층층대 위에 파 놓기도 하며 또는 평평한 땅에 얼마만큼 동떨어지게 파 놓아 공이 들어 갈 자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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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쳐서 구멍에 들어 가면 2점을 얻는다. 한 번 쳐서 들어가지 못했으면 공이 멈춘 곳에서 다시 쳐 들어가면 1점을 얻는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된다. 세종 때와 세조 때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엇비슷한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주로 궁궐 안에서 임금과 종친들이 즐기던 것이었다. 일반 서민층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기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얼레공치기라 하였다.

이 얼레공치기는 최근세까지 전래되어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그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1931년 2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장구 얼레공 대회 개최”라는 제하의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다. 그 장구경기, 얼레공치기의 기술이 살아나 박세리, 김미현등의 별들이 한국의 이름을 빛내는 것은 아닐런지.

***오늘의 사족

당시의 박세리는 오늘날 김연아였다.

아니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오늘의 김연아 이상이었다.

한반도나 한인들의 긍정적 뉴스를 듣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날은 참 기분 좋다. 이민 이후 줄곧….

 

 

(2001. 4. 26)

부자 대물림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몰락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죽음으로 숨가쁘게 한국의 개발경제시대를 이끌어 온 한 세대가 끝났다. 정주영 –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일세를 풍미한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늙으막 소떼와 막걸리통을 싣고 북행하였던 그의 모습에서 고향에 대한 강한 귀소본능을 엿보았듯, 수 많은 조문객들과 검소를 강조한  그의 마지막 길 떠난 모습에서 현대차가 이 땅 미국에 이리도 많이 굴러다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부자 삼대 없다”는 속담은 대물려 부를 유지하기가 썩 수월치 않음을 말한다. 정주영회장이 이룩한 현대왕국도 오늘날 한국경제가 짊어진  짐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아 그 앞날이 썩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화신백화점을 비롯한 해방 이후 부자 첫세대들은 당대에 깃발을 내렸고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에 부를 이루었던 부자들도 대부분은 당대에, 더러는 다음대에 부의 명성을 잃었으며 어쩌다 삼대 째 내리 그 부를 누리는 집안도 있지만 선대에 비하면 초라한 듯하다. 왜 부자 삼대가 그리 힘들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당겨주소 톱질이야” 흥부와 그의 아내가 신나게 톱질을 한다.

첫째 박을 타서 나온 쌀로 밥을 지어 남산만큼 쌓아 놓고 아들 스물 다섯을 불러낸다.(째지게 가난했어도 엄청나게 새끼 욕심은 많았나보다) 궁기에 찌들었던 놈들은 총알처럼 밥더미를 파고들어 아그적 아그적 그 많은 밥을 먹어 치운다.

여기까지는 좋다. 착한 성정의 흥부 일가네가 일차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큰 축복은 그 착함에 따른 당연한 응보일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박을 타면서 시작된다. 없는 것이 없게 다 나오는 둘째 박에 이어 셋째 박을 타면서 흥부는 졸부가 된다. 치부(致富)한 흥부는 넓고 큰 누각과 창문만도 천 개가 되는 거대한 호화 주택을 짓고 별당엔 천하절색 양귀비를 첩으로 들여 앉힌다. 겉치장으로 부를 한껏 과시한 흥부는 일자무식인 자신과는 격에 맞지않게 큰 책방을 짓고 시경, 서경, 사서삼경에 고문진보등 책으로 그 방을 꽉 채운다. 무식을 감추려는 허세를 부려 본 것이다.

졸부가 된 이후의 흥부의 놀아나는 꼴로 보아 스물 다섯이나 되는 아들들에게  부를 물리기는커녕 당대에 거덜이 났을 듯 싶다.

겉으로 부를 과시하고 치장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 한국에 대물린 부자가 드문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십년이 넘도록 도처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시절, 보릿고개가 해 마다 찾아 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세월,  인천항에 구호미가 산더미처럼 입항했다는 기사가 신문의 머릿기사이던 그 60년대를 지나 “잘 살아 보자”는 깃발 아래 모여 허리띠 조이고 땀 흘린 댓가로 70년대을 넘어서며 절대 빈곤이라는 일차적 가난을 이겨 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 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을 갖고 마침내 더 좋은 외제 차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겉보기에 높아지려는 사회적 분위기는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그 뿐인가? 바탕이나 기초도 없이 인격적인 치장을 하자니 온통 허세 뿐이지 않았나? 이 다리 허전하게 바탕없는 외형 치장 성향이 부가 붕괴되는 사회현상, 부자가 삼대 못가는 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은 아닐런지.

잘 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분수에 맞게 살고 그 남은 부나 재물을 사회에 되돌리는 풍토가 정착된 사회에선 부의 대물림이 몇 대인들 내려 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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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길게 부를 대물림 했던 가문은 경주 최진사댁이라고 한다. 최진사댁은 해마다 1만 석 이상의 남는 재물을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가통(가통)이 있었다.  그 가통 때문에 십대 만석꾼, 십대 진사의 유례없는 부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정주영회장의 남은 후대들 뿐만 아니라 오늘 부를 누리고 사는 모든 집안들이 그 부를 대물림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진정 밝을 것이다.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9일의 일기였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오늘.

최진사댁이 세운 대학을 가로챘다는 의심을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께서 권력을 대물림하였다.

딱하다.

여유(餘裕)

입춘도 지나고 내일 모레면 대동강물도 녹는다는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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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겨울이 이렇게 지나간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여라. 주(週)단위의 이 곳 생활이 시간의 빠름을 더욱 재촉한다. 엊그제가 일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한 주일이 지났다. 그 빠른 시간에 쫓기며 살다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엄벙덤벙 생활의 켜만 늘어간다. 한참 일할 나이에 삶의 여유 운운은 자못 사치일 수도 있지만 때론 조금은 쉬었다 갔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업종에 따라 생활양식과 시간 씀씀이가 다르겠지만 영세 소규모 업종이 주를 이루는 많은 동포들의 삶은 큰 차이없이 엇비슷 할 것이다. 세탁소 10년은 초등학교 시절 생활계획표보다 더욱 단순하게 하루를 묶고 생활에 틈을 주지 않는다.

급한 성정(性情) 탓도 한 몫이지만 눈뜨기 무섭게 고양이 세수하고 가게로 나가 보일러를 켠다. 빨래를 하고 뒷 일 처리하다 이따금 아내가 자리를 비우면 손님들과 싱갱이도 하다가 옷배달 하다보면 어느덧 하루가 맥없이 끝나 버린다. 게다가 동네 일 한답시고 이렇게 저렇게 나선 일에 짬을 내다 보면 그야말로 하루 해가 눈 깜작할 사이다. 하여 이렇게 짬 내는 일조차 내겐 공연한 사치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는 것이다.

가까이 계시는 부모님들께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매일 전화 인사드리는 것으로 자위하고, 결혼 15주년 때 아내에게 약속한 여행계획은 20주년으로 미루었건만 눈 앞에 다가 온 20주년도  무망할 것이라는 예감이고, 아이들 내 품 떠나기 전 함께 해야 할 일들도 그냥 늘 계획일 뿐 하루 해, 일주일과 함께 또 내일로 미루어지기 일쑤이다.

수녀 이해인 시집을 들척이다가 두 아이들을 부른 것은 달포 전 주일 저녁이었다. 그녀의 영역시 몇 편을 골라 아이들에게 타자를 부탁하였다. 잠시 후 아들 녀석은 제 애비 부탁이라 마다치 못하고 억지로 건성건성 타자한 시편들을 건냈으며, 딸아이는 제법 맵시있는 활자체까지 선택하여 예쁘게 일을 마치었다.

딸아이와 마주 앉아 포스터용지에 시편들을 오려 붙이고 지난 가을 앞뜰에서 주어 온 잘 마른 낙엽 두어장과 아내가 벽단장한 마른 장미 두 가지를 가지런히 붙여 근사한 시화지를 만들어 이튿날 가게 카운터 옆 빈 벽에 딸아이와 함께 만든 작품(?)을 전시했던 것이다. 간혹 손님들이 ‘누가 쓴 시냐?’, ‘참 좋다’며 복사해 달라고 하며 관심을 보일 땐 내가 제법 대견한 생각을 하였군 하며 자족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토요일 아침, 아내는 한국학교 교사 일로 자리를 비우고 빨래하랴, 손님 맞으랴 반은 얼 빠져 일하는데 손님 한 분이 기다리는 사이 그 시편들을 읽다가 <내 혼에 불을 놓아/ Kindle my spirit>라는 시를 가르키며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어쩜 이렇게 맑은 영혼이 있을까? 이 시를 함께 나눌 수 있게 한 너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네가 누리는 여유가 부럽다.”고 한 마디하고 떠난 후 그 여유(餘裕)란 말이 머리 속에 오래 남아 떠나지 않는다.

늘 정신없이 어지럽게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내 삶 속에도 이웃이 보기에 ‘여유’가 있다는데야?

그렇다. 스스로 눈치 채지 못하였을 뿐 내가 얼마나 많은 여유를 누리며 사는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이 내게 주신 ‘여유의 은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 온 것이다.

구걸할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데 신이 주신 이런저런 작은 여유들을 찾아 감사해 보는 일도 바쁘고 바쁜 이민 생활을 이겨내는 삶의 한 지혜일 듯 싶다.

*** 오늘의 사족

내가 윗글을 쓴 것은 2001년 2월 15일이었다. 그로부터 만 12년 일개월이 흘렀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변함없는 세탁소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 두 아이들은 이미 장성하였고, 연로하신 부모님들은 병원출입이 잦으시다.

아내는 토요일이면 여전히 한국학교를 나가고… 교장을 맡고 있는데 이제 임기만료가 다 되어간다.

나는 여전히 손님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를 보낸다. 마치 삶의 여유가 있는듯이…

진달래와 개나리

“꽃샘추위” – 추위까지 사람인양 새암을 부려 꽃피는 것을 시샘한다는 생각에서 만든 이 말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에 대응하는 영어라야 “March Wind”(삼월바람, 삼월에 부는 찬 바람) 정도랄까? 자연을 관리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과 자연과 사람이 하나인 동양사상 또는 도교사상을 깨놓고 비교할 수 있는 듯하다.

‘겨울 다 갔지!’하였더니 눈이 제법 내려 이틀 장사 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옷 배달 길, 그 잔설(殘雪)입은 나무가지에 봄눈 튀운 것 보았다. ‘꽃샘추위였군’ 혼잣말하며 이미 봄이 왔음을 느낀다. 이 눈 녹으면 우리집 앞뜰 관상수(?) 개나리 노오랗게 활짝 피고 뒷뜰 진달래 붉게 물들리라. 더하여 빨래감 잔뜩 쌓이는 세탁소 제 철 만나리라 꿈이라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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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 70년대 이후 한국 대학가에서 소위 데모노래로 유행했던 ‘진달래’의 가사이다.

‘가시는 걸음 걸음’ 뿌렸던 소월의 님에 대한 한이 젊음의 한, 민족의 한으로 나아가는 소재로 쓰인 진달래꽃이다.

70년대 한 때는 진달래를 노래하는 것조차 불온시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내 고향 서울 신촌 안산에 조차 흐드러지던 그 진달래를…

산철쭉, 참꽃나무, 두견화(杜鵑花), 영산홍(迎山紅) 등으로 불리는 진달래는 한반도 및 만주지방 산간 양지 바른 곳에 잘 자라 이른 봄 정취를 한껏 드러내는 꽃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진달래 꽃으로 기름을 짜기도 하고 탕을 만들어 먹거나 화전(花煎)을 부치거나 나물을 무쳐 먹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삼월 삼짓날 음식은 이 진달래꽃 음식이 주를 이루었다. 진달래로 만든 음식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진달래꽃과 뿌리를 섞어 빚은 두견주(杜鵑酒)를 들 수 있겠는데 이 술은 약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진달래는 약용으로도 쓰여 민간 및 한방에서 강장, 이뇨, 건위 등에 다른 약재들과 함께 처방하여 쓰기도 한단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달래는 봄이면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이는 ‘더불어 정신’ 곧 함께 뽐내는 자태에서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모진 추위와 가뭄에도 거뜬히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그 멋을 더해 준다 하겠다.

‘나리 나리 개나리’- 여기서 나리는 홀로 피는 서양꽃이요, 개나리는 무리지어 피는 우리 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인지 개나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이 개나리야말로 한국이 원산(김태정이 쓴 책 ‘우리꽃 백가지’에서)인 식물로 한민족이 자랑할 수 있는 한국 고유의 특산물이다.

봄이면 어디서건 노오란 꽃잎 내밀어 제 있음을 자랑하는 개나리는 생명력이 대단히 강해 가지가 땅에 닿기만 하여도 곧 뿌리가 내리고 가지를 잘라 놓으면 그 마디에서 뿌리가 나온다. 개나리 또한 한방이나 민간에서 약재로 써 종창, 임질, 이뇨, 치질, 부스럼, 해독 등에 다른 약재와 함께 처방하여 쓴다. 이 또한 내 고향 신촌에 흐드러졌었다.

우리집 앞뜰 관상수라 했다.

이 땅에도 어디서건 볼 수 있지만 내 뜰 개나리는 신촌 안산의 개나리다. 뒷뜰 흐드러질 진달래는 소월의 진달래요, 그 묏등마다 스러져갔던 내 젊음의 이야기들이다.  더하여  그 끈질긴 생면과 이웃에게 베풀 약용, ‘더불어 함께 해야만’ 아름다움은 우리 다음세대에게 넘길 꽃의 아름다움이다.

아직 오지 않은 봄, 우리 세대 아니면 다음 세대 아니 그 다음 세대라도 무리지어 필 진달래, 개나리꽃을 기다리며.

(2001. 3. 1.)

*** 오늘의 사족

이 땅, 이 이민의 땅을 살아가는 모오든 내 피붙이들이 힘들고 어려워도 개나리, 진달래처럼 생명력 강한 삶들을 이어 가길…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하루 저녁 술값으로 수백만, 수천만을 쓴단다. 천만 단위의 옷을 심심풀이로 산단다. 값비싼 외제를 제 때 손에 못 넣으면 비행기 타고 가서 사 온단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단다.

“IMF가 한 번 더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있는 놈, 없는 놈 구별이 확실할 테니까”

wild

2001년 서울 강남을 활개치고 다니는 그들을 일컬어 ‘황금족;이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어쩌다 제 놈 배부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 등가죽 붙는 꼴 보고 싶은 생각 들었을까? 분 삭히고 곰곰 생각하면 여기 사는 우리라서 자유로울까?

예수 살아 생전에 제일 미워하던 이들은 바리새인이었다. 오죽 미워했으면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 하였을까? 그들이 누구였나? 율법학자라고? 아니다. 이른바 소시민 계층으로 율법을 헌신적으로 따른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왜 그들을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했을까?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율법 특히 안식일법, 십일조법은 밥깨나 먹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누렸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교만하였다. 그들보다 못한 자들에 대한 비정함과 교만이 예수의 미움을 샀다. 제 잘난 맛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보다 뒤쳐진 이웃을 뭉개려고 하는 그 맘보가 예수 보기에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하라’한 것 아니겠는가?

그 보다 먼저 들사람 세례요한이 있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광야에서 외친 그 소리가 어디 그 곳으로 몰려든 지치고 찌든 인생들에게 한 소리였겠는가? 예의 그 바리새, 귀족, 제사장들 그 때 있고 누린다는 자들에게 한 소리였지. 그리고 그의 목이 날아갔다. 여우라 불렸던 헤롯이 그 광야의 소리 막고자 요한의 목을 친 것이다.

유대 역사의 기록자인 요세푸스는 AD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2000년간 유대인들이 나라없이 떠 돌게 된 원인(遠因)은 바로 이 들사람 요한의 처형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들사람 소리, 들사람 정신 죽이자 나라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역사 이래 930여 차례의 외침과 전쟁을 치루면서도 한반도에 한민족이 꿋꿋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들사람의 얼 곧 야인정신, 예언자정신과 함께 했던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해방 후 백범이 있었고, 죽산이 있었다. 장준하가 뒤를 이었고 늦봄 문익환이 그 길을 갔다.

그들이 외쳤던 소리는 “더불어 함께 가야만 하는 민족”이었으며, “사람이 사람됨 찾자”는 정신운동이었다. 그 소리 누가 없앴는가? 그 정신 누가 죽였는가? 그 얼 누가 땅에 묻었는가?

“오직 잘 살아 보자”는 구호와 “하면 된다”는 그 군대정신에 눈 먼 우리 모두가 죽였다. 무엇보다 본래 도둑심보인 정권이 죽였다. ‘때려잡자 공산당’과 ‘까부수자 미제 괴뢰’의 그 얼 빠진 구호에 혹했던 남북 우리 모두가 죽였다.  권력이 다 무엇인가? 허가낸 도둑 아니겠나? 오죽하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라 세우지 말라 일렀겠나? 그러면 백성(인민)들이 알아 차려야 할 일이다.

아직도 김씨정권, 노씨정권, 전씨정권 탓하는가? 이씨정권 아니 아무개정권이 들어선들 무에 달라지겠나? 거기 사는 백성(인민)들이 정신 차려야 할 일이다.

그 들사람, 그 얼, 그 정신 언론이 죽였다. 교묘한 언설로 무지한 백성들 눈 가리고 이리저리 우우 몰려 다니게 해 놓곤 제 몸둥이 키우기에 바빳던 언론이 죽였다. ‘민족이 하나여야 한다’는 들사람 소리를 ‘공산당과 하나 되잔다’고 나발불며 뻘건 칠해서 죽였다. ‘잘 사는 것 보다 옳게 사는 것이 먼저다’는 들사람 소리 뚝뚝 잘라 ‘잘 사는 게 나쁘단다’ 통단으로 뽑아 돌팔매 유도해 죽였다.

아니다. 그 소리 종교가 죽였다. ‘이 땅은 잠시 뿐’이라며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 가르켜 모두 얼 빠져 쳐다보는 사이 제 놈 첨탑만 높이고, 국보급 사찰 소유에 급급했던 종교가 죽였다. 이 땅 별 볼 일 없으면 제 놈이나 하늘나라 먼저 가지 않고 이 땅에 발 붙여 살아야 할 백성들 홀려 구름같은 하늘타령이나 한 종교가 죽였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가 죽였다. 우리 모두가 죽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사생결단식으로 ‘잘 살아 보자’고 달려 온 우리 모두가 죽였다.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어디 ‘황금족’이 서울 강남 땅에만 활개 치겠는가? 한반도 전체 세계 구석구석 들사람 죽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이 황금족 되지 말라는 법 있겠는가?

위만 바라고 아래를 짓밟는 사람들이 ‘바리새’라  하였다.

나를 추스리고 내 민족을 추스릴 소리, 들사람 소리 살려 내야 한다.

모가지 드리워 붉은 피 흘릴지라도 크게 외칠 들사람 소리가 그립다.

한반도에.

여기서 한반도로 사는 우리에게.

(2001. 2. 22)

*** 오늘의 사족

그랬다. 2001년 어느 날 한국신문을 읽다가 황금족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써 본 글이다.

오늘 2013년 어쩜 이 글이 아직도 유효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나는 한국이나 조선을 향해 무어라 할 처지와 입장이 아니다.

여기 이민의 땅에 뼈를 묻을 것이고, 이 이민의 땅이 내 나라인 사람이다.

어찌하리! 그럼에도 한민족인 것을.

여우 헤롯, 이천년 전에도 동물에 비교된 권력자가 있었고 그가 나라를 말아 먹었단다.

참 아프다. 때론.

포기하지 말자

DSC_0515_600w제 스스로에게 해보는 말입니다.

몇년 전 Daum에 블로그를 만들고 한 일년 반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하다보니 별로 재미가 없었답니다. 그래 그만 두고 그 뒤로는 주로 카페(http://cafe.daum.net/kimyoungkeun )와  종이잡지인  세탁정보에 글을 써왔답니다.

세탁인들을 상대로 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그 업에 종사하는 분들 위주로 글을 쓰거나 연을 맺고 살아 온 것이지요.

이제 좀 자유롭게 하루의 일기를 기록하듯 편한 제 공간을 이 곳에 엽니다.

우선 지난 글들을 이 곳에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하려합니다.

Don’t give up! 제가 Daum 블로그를 접으며 마지막 쓴 글의 제목이랍니다.

살다보면 자의건 타의건 하던 일을 접는 경우가 생기는 법이지요.

모든 상황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 그 조차 그 길 밖에 없다고 단정질 수 없거나 시간이 흐른 뒤 후회하는 일도 있지만 – 를 제외하고는 어쩌면 내 안의 마음이 먼저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요.

이제 다시 시작해 봅니다. 시작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