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슬퍼지는 까닭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며 목청꺽어 노래한 사람은 나훈아요,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 떨리는 고음으로 호소한 이는 남궁옥분이었다. 어디 유행가 뿐이겠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래와 무용, 미술과 건축, 문학 나아가 종교까지 ‘사랑’을 뺀다면  아마 인류사는 적막했을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은 이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거나 아무리 사랑이 이것이다고 가르쳐 주어도 모르는 사람이다’ – 기독교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다. 사랑에 대해 이보다 뛰어난 해석이 있을까? 사랑이란 말이 머리 속 또는 가슴 속에 있는 바로 그 순간이 사랑일 것이므로. 

그 사랑을 주제로 이 땅을 열심히 살다가 서른 셋의 나이로 육()의 삶을 끝낸 이는 바로 예수다. 그는 ‘나’와 ‘당신’ 그리고 ‘나와 당신’을 묶는 ‘우리’에 대응하는 ‘그들’까지 모두 사랑으로 묶고자 서른 세해를 살다 살다 ‘사는 것’으로 아니되자 자기가 죽음으로 그 본 보이고자 하였다. 

어디 죽음으로 사랑을 이야기한 이들이 예수 뿐이겠나? 서로 사랑하다 하다 미칠 것 같이 사랑하다 끝내 죽은 연인들의 이야기는 부지기수요, 조금 넓게는 제가 사는 마을을 사랑하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널려 있고. 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린 이들의 이야기도 숱하다.  

그들과 예수의 이야기는 무엇이 다를까? 예수는 스스로 신이었고. 그의 사랑은 신의 사랑임을 확신하고 선포한 것이 다르달까? 그러나 어디 스스로 신()임을 자처한 이가 또 예수뿐이겠나? 오늘 이 순간에도 스스로 신이라 칭하는 미치광이들이 널려있거늘. 

예수는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쉬운 말을 썼다. 비록 깊은 비유로 숨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가 사용한 말들은 당시 하루 먹고 살기 바빳던 사람들의 일상적 언어였다. 소위 갈릴리 말, 아람어였다.  일테면 요새말로 어려운 신학적 용어,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나와 당신들이 폼 잡지 않고 쓰는 말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사랑’을 전했다는 이야기다.    

사랑그가 쉬운 말로 전했던 사랑이야기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대한 신의 절대적 사랑과, 서로 사랑하라는 인간 사이의 상대적 사랑을 말했다고 믿는다.  

어려운 말 하지말고 쉽게 쓰자.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상대적이란 말이다. 모든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백 퍼센트 전폭적으로 나는 사랑을 베푼 사람이고 너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오직 신 뿐이란 이야기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사람 사이의 사랑이야기다. 

행여 “나는 너와 너희를 위해 절대적 사랑을 베풀었건만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하였는가?”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직업이 어떤 것이든 이미 그는 예수의 사랑과는 동떨어져 있다.  

살며 ‘나는 주기만 했고, 너는 받기만 했다.’며 우기는 얼굴들을 보면 왜 이리 슬퍼지는지.

 

집으로

오늘로 열흘째 어머님께서 지내시는 곳은 노인병동입니다. 2 1실인데 그 사이 어머님 옆 침대는 세 분이 들어왔다가 나가셨습니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신 백인 할머님은 연세가89이셨는데 참 곱게 늙으셨답니다. 다만 치매기가 좀 있으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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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오후에 병실에 들렸을 때 할머님이 저를 보자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지요. “Hey baby! I’ll go home tomorrow!” 정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얼굴이셨답니다.

잠시 후, “내가 집으로 가기 전에 이거 다 부셔버리고 갈거다갑자기 화난 얼굴로 할머님께서 소리치셨답니다.(소리라고 해보았자 모기소리지만….) 환자들이 모두 노인들이다보니 행여 의자나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질까보아 환자가 움직여 침대나 의자바닥과 몸이 밀착되지 않으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방석을 가르키며 하신 말씀이었지요.

집에 돌아가셔보았자 특별히 하실 일도 없을 것이고, 간호할 누군가가 옆에 붙어있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이시고, 차라리 병원에계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상태이셨지만 집으로 가시는 것이 그리 소원이셨던 모양입니다.

오늘, 어머님의 옆침대에는 말씀조차 못하는 거구의 백인 할머님이 새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지요.“얘야, 집에 가고 싶다.”

바로 일상이지요. 일상에 대한 감사오늘 어머님이 제게 주신 가르침이랍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벌써 사년 전 일입니다만 당시 USA TODAY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이 날로 힘들어 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For immigrants, living the dream is getting tougher)

많은 이민자들이 스물비지네스를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최근 불어닥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하며, 이들의 삶이 이민초기의 무일푼의 상태로 되돌아 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스몰비지네스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내 약 150만명의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비이민자에 비해 이민자들의 스몰비지네스 창업율이30%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About 1.5 million immigrants own U.S. businesses, according to a study for the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by Rob Fairlie, an economics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Santa Cruz. He found that immigrants are 30% more likely to start a business than non-immigrants.).

미국내 스몰비지네스의 12.5%가 이민자들 소유이며 멕시칸 이민자의 스몰비지네스 소유가 2.22%로 가장 많고 다음이 한인으로 전체의 0.78%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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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남미,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이민을 와서 옷가게, 식당, 세탁소, 그로서리등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내 피와 땀과 눈물을 이 땅에 쏟았습니다. (오늘의 고통은) 실로 슬픔입니다.” (I put my blood, sweat and tears in this place. It’s a sad story.)

한인 이민자들인 우리들의 삶은 어떨까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신문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들의 착각과 편견을 벗어 내 버리면 말입니다.

다른 통계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안계 대다수가 평균적인 중산층 수입 이하의 소득수준을 보이고, 1가구당 수입이 다른 인종(백인, 흑인, 히스패닉)에 비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5가구중 1가구가 빈곤선 이하) 게다가 아시안계 가정의 54%가 영어 미숙자로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80-20 initiative)

저는 착각과 편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한국 이민자들은 아시안계에 속하기를 거부합니다. 특히나 남미나 흑인계 이민들과 비교되는 것들도 꺼립니다. “한국인”을 이야기 하고 높은 학력과 아시아의 유태인으로 견주기를 즐겨합니다. 이 땅의 타 민족 이민자들 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는 자부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이젠 솔직해 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에 통계나 USA TODAY의 기사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실상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부”는 지녀야 할 덕목이지만 그 보다 먼저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USA TODAY 기사는 1970년대 중반에 그리스에서 이민을 와서 세탁소(Four Seasons Cleaners)를 경영하고 있는Panayiota Koskiniotis 씨의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이다.”라고.

저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합니다.

비록 경기침체의 끝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스몰 비지네스로 생계를 꾸려가지 힘들만큼 현실의 여건은 어렵더라도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 등등 현실을 헤쳐 나갈 도구들도 충분치 않지만 여전히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이 “이 땅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비록 어려운 경제환경과 우리들이 지닌 핸디캡들(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에도 불구하고 세탁소를 비롯한 스몰 비지네스로 성공 이민의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내 비지네스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삶의 정치 – 그리고 인생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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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와 좌파의 논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없는 까닭은 그들이 삷의 정치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Anthony Giddens이 그의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에서 갈파한 말이다.

그는 급진과 보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정치모델이 필요하고 이는 이미 이행되어 가고 있다고 주창한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모든 부문에 걸쳐 세계 도처에서 좌파와 우파는 대립과 투쟁과 갈등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솔직히 좌로 조금 기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적인 틀(일테면 미국과 세계, 한반도의 남북 또는 남쪽의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좌로 좀 더 기울 것이다. 수년동안 내가 고뇌하고 있는 이민신학(移民神學)은 기실 정치, 해방, 민중신학과 십 수년래 미국에서 풍미한 예수세미나 회원들의 고뇌의 성과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른바 거룩한 보수정통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이해란 예수쟁이와는 거리가 꽤 먼 것으로 비췰 수 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는 케리그마, 말씀의 선포 곧 설교자들의 설교도 토론이 병행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 바 이런 생각들은 좌의 끝자리쯤일 것이다. 

이런 내가 아주 꼴통보수우익으로 수성(守城)코자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찬송가 부르기다. 내 주는 방패되시니’, ‘죄짐맡은 우리구주’, ‘뜻없이 무릎꿇는’같은 고전적인 찬송에는 함께 하다가도 이즈음 유행하는 복음성가에는 도대체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다. 특히 이즈음엔 생업(生業)으로 하는 복음성가 가수들도 있어서 어쩌다 그 이들의 노래를 들을라 치면 왠지 노래하는 기교와 가락이 배어 있는 듯하여 내가 좋아하는 노래꾼 김민기보다도 덜 종교적이란 생각이 들곤하는 것이다. 

거의 드문 일이지만 어쩌다 참석한 집회에 찬양과 경배 그런 순서가 있어서 박수치고 율동하고 그러면 참으로 나는 좌불안석이 되곤 한다. 게다가 찬양 인도자가 ‘박수치세요’, ‘율동하세요’, ‘!자 함께 은혜 받아요’ 하기라도 하면 왜 집을 떠났던고, 성경 한 줄 읽고 고민할 걸 가히 후회막급이라! 이 아니 꼴통보수 아니랴! 그러나 교회사에는 피아노도 경망스럽다하여 금기했던 세월도 있었으니 원조보수는 아닌 셈이다. 

그런 나도 이따금 흥얼거리는 복음성가가 하나 있다. 이것 역시 고전이다만,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열고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하는 노래이다. 산다는 것이 다 그렇지 좌편 끝 길을 걸을 때도 있고 우편 끝 모서리에서 뒤뚱거릴 때도 있으며 높은 언덕 꼭대기에 서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세상 내 손 안에 쥘 때도 있고 시궁창에 빠져 숨조차 내쉬기 힘든 때도 있기 마련이지 어찌 바른 길로만 올곧게 걸을 수 있겠는가? 돌아볼수록 부끄러운 걸음이지, 오직 떳떳함 뿐이로다할 사람 몇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하늘문 열고 말한다지 않는가? 예수가 여기 인도했노라고 그게 믿음이지, 당당한 믿음이지. 

여기까지 온 것도 예수 인도하신 까닭이요, 피안(彼岸) 저 편에 다달아 예수가 인도하였다는 고백을 하려면 지금 오늘을 예수 안에서 살아야 되는데 거기 무슨 우파와 좌파가 있으랴! 뛰어 넘어야지. 어찌 삶의 정치뿐이겠나? 하여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인생 여정 끝내어를 노래하는 한 진정 좌파와 우파의 자리는 없다. 

그래, 봄으로 찾아오는 이 사순절 그렇게 살자. 내 인생 여정 끝내어…

스스로 벗는 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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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힐링전성시대라지요. “힐링상품들이 넘쳐나기도 한다지요. 늘 그렇듯 넘쳐나는 곳엔 가짜도 덩달아 판을 치는 법이고요.

 

“나 XX때문에 상처 받았어!”라는 말들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으니 “힐링”이 필요하겠지요.

 

살다보면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아플 때도 있고, 상처가 나서 피를볼 때도 있고, 뼈가 부러지거나 탈골이 생기는 경우도 있거니와 이러저런 각종 크고 작은 몸의 이상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저절로 낫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는 대부분 스스로 낫게 되거나 아주 작은 약물치료나 운동을 통해 평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지요.

 

마음의 상처, 삶의 상처와 아픔도 마찬가지일 겝니다. 스스로 저절로 치유되거나 치유 할 수 있는 것들이 태반인 것이지요. 누군가가 꼭 도와주거나 치료해 주어야만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힐링”이라는 말과 유행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다보니 마치 “스스로”라는 기능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답니다.

 

육체가 건강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치유되거나 치유하는 기능이 잘 이루어지듯이, 영혼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자신의 심성을 다스릴 수 있을겝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이 있습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피해 갈 생명체는  없습니다.

 

힐링이라는 말로 티낼 필요도 없거니와 힐링이라는 말에 의지할 까닭도 없습니다.

특히나 이즈음 호들갑스러운 종교에 이르면 더욱 그렇습니다.

 

스스로의 소리와 움직임을 잘 보고 들을 수 있다면 힐링의 세상은 늘 열려있는 것일 겝니다.

제 스스로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주제에 남을 힐링한다고 깝칠 일는 더더우기 아닙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뱀발(蛇足) :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기능과 힘을 절대자가 은혜로 주었다고 고백하고 감사한다면 그게 바로 종교 아닐까요? 강요하거나 중간개입자를 상정하는 일 말고 말입니다.

 

일분만 시간을…

오늘 엉뚱한 일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였답니다. 그걸 허비라고 할런지 좋은 경험이라고 할런지는 아직 판단할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예상치 않은 일로 하루 해가 저물었답니다.

 

사건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 평소처럼 이메일함을 체크하면서 일어난 듯합니다. 평소와 달리 아침 출근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건성으로 메일함을 쭉 훑다가 낯익은 이름과 주소에서 보낸 메일이라 무심코  열었는데 아마 그게 화근이었던 거 같습니다.

 

상대방 메일 주소를 이용한 스팸메일이었습니다.  평소같았으면 열어보지 않고 그냥 스팸처리를 했을 것인데… 아뿔사….

 

일을 나가서 이런 저런 일들을 처리하고는 컴앞에 앉았더니만 글쎄 제 메일 계정 중 스팸 메일을 열었던 계정에서 누군가가 마구 스팸메일을 뿌린 것이었습니다. 단지 서너시간 사이에 거의 천 여통의 스팸 메일이 제 이름으로 뿌려진 것입니다.

 

부랴부랴 그 회사에 신고를 하고 패스워드를 비롯한 정보를 바꾸었답니다. 해놓고보니 찜찜한 구석이 있어 제가 쓰는 모든 온라인상 계정의 정보들을 다 바꾸었답니다. 엉뚱하게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보내고나니 머리속이 멍하였답니다.

 

그리고 저녁 무렵 National Clothesline 2월호  편집자의 글을 읽게 되었답니다. 마침 제목이 “Got a minute?”이었답니다.

 

1분이 그렇게 아깝고 많은 일을 아니 결정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인데, 단지 급한 마음으로 1초를 잘못써서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서 소비한 시간들이 생각난 것이지요.

 

아무튼 편집인의 글을 소개 드립니다.

 

 

1분만 시간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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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기대할 뿐 아니라, 좀 더 빠르게 아니면 즉석에서 그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우리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보통 컴퓨터는 초당 100 million(1억), 다르게 말하면 분당 6 billion(60억)의 명령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매 1분 동안에,  570개 이상의 웹싸이트가 새로 만들어지고, 약 47,000회의 애플 ‘app’의 다운로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트위터 사용자들은 100,000개 이상의 트윗을 보내고 있다. 또한 매 1분 동안에, 구글에 2백만 이상의 서치 요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684,000개 이상의 콘텐트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메일 이용자들은 204 million 이상의 메세지를 전송하고, 소비자들은 온라인 쇼핑으로 $272,000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단지 1분 동안에.

 

인터넷에서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60초 라는 시간은 다른 유형의 세계에서도 차이를 나을 수 있다. 매 1분 동안, 미국인들은 총 21,000개의 피자를 먹고 있어서, 곳곳의 피자집 주인들을 수입을 올려 기쁘게 만든다. 물론, 당신도 피자로 끼니를 때울 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당신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60초 동안의 복근 운동 ‘abs’를 다운받을 수 있다. 정말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통증 해소, 빨리 마르는 네일 폴리시, 스프레이 선탠, 밥과 달걀 식사 등을 치과의사가 통상 식사후 양치질 하라는 시간 2분의 절반의 시간으로 할 수 있다.

 

또한 취직 면접에서 첫 60초 동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면, 그 직장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들 한다. 세탁소 손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손님이 옷을 찾아갈 때, 품질에 좋은 인상을 받고 만족하여 충성고객으로 될 지를 결정짓는 것은 종종 바로 대충 살피는 그 첫 번째 눈길이다. >

 

젊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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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talit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마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낯선 말일겝니다. 몇 년 전만해도 이런 말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널리 퍼진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타임즈의Catherine Mayer기자가 만들어 낸 말인데죽을 때까지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현상을일컫는 뜻이랍니다.

 

세상이 이미 나이를 잊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의학과 과학기술에 힘입어 장수시대가 열렸고, 나이의 경계없이 하려고만 하면 나이를 이겨내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자 trendwatching의 커버스토리에도 다룬 “Virgin Consumers”  곧 새 것을 바라고 소비하는 소비문화에도 나이는 이미 경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이아그라’로 대변되는 노인 성해방의 역사도 이런 흐름을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렇게 나이를 잊고 살게 된 세대들이 출현하므로 인해 전통적인 결혼, 가족, 사랑, 종교, 소비 등등의 개념들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Catherine Mayer는 <어모털리티는 우리의 삶을 저 깊숙한 곳까지 바꿔놓고 있다. 일, 여가, 가족, 사랑, 젊은 나이와 늙은 나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amortality현상에 동조하는 옥스포드 대학교 ‘인류 미래 연구소 (Future of Humanity Institute)’ 은 “중요한 것은 태어난지 몇년이 흘렀느냐가 아니라, 생의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다.( The important thing is not how many years have passed since you were born, but where you are in your life, how you think about yourself and what you are able and willing to do.)라고 말합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를 뛰어넘는 세상이 되었고 그것은 바로 당신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자! 이제 나이 6,70에 노인티 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amortality라는 신조어도 만들어 설명하며 세상이 엄청 바뀐듯한 글들과 주장을 들으며 든 제 머리속 생각이랍니다.

 

쯔쯔쯔, 서양인들의 사고의한계라니… 이미 이천 수백년 전에 장자(莊子) 선생이 이리 말씀하신 것을 알기나 하고들 하는 말들인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씀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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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망년망의진어무경(忘年忘義振於無竟)”  나이와 옳고 (그름)을 잊고 무한한 경지로 뻗어 나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바로 무위의 경지로 나아가면 그리된다는말입니다. 무위의 경지란 바로 제 맘에서 시작되는 것이고요.

 

나이란 바로 제 마음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살면 뭐 한번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나이를 넘어 젊게 삽시다.

 

신앙의 이름으로

어느 동네 양반이 전화로 전해준 소식을 듣고 혼자 혀를 끌끌 차다가, 문득 예전에 긁적여 놓은 글이 생각나 찾아보니 삼년 전 딱 오늘인 2010년 2월 4일에 낙서처럼 남긴 것이더군요. 그런데 그게 오늘도 딱 유효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안 바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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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의 넓이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스물 네해 째 살고 있는 곳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해 보았던 것입니다.

 

델라웨어주 New Castle County라는 곳입니다.

County 면적이 1,278 km²랍니다.

 

이게 어느 정도될까?

그래 서울시와 한번 비교해 보는 것이지요.

서울시 면적이 605.41㎢이라고 하니 약 두 배 정도입니다.

인구는 약 60만명정도이고요. 한적한 시골입지요.

한인인수는 고무줄 통계이지만 약 4천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요.

 

교회 수는 캐톨릭교회 한 곳을 포함하여 8곳이지요.

8곳의 등록교인 수 얼추 천 오백여명.

 

재미있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싸우고 있다는 것…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신앙의 이름으로…

 

이 너른 이민의 땅에서…

오직 신앙의 이름으로…

 

오늘도…

봄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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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을 건강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만들어줄 묘약은 무엇일까? 나의 만병통치약은 아침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는 것. 아, 아침 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인 이 새벽에 아침 공기를 마시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침 공기를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하리라. 아침으로 가는 예매표를 잃어버린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을 위하여>

 

<어떤 대변혁이 아무리 세상을 들쑤셔놓을지라도, 황혼 무렵의 서쪽 하늘과 같이 그렇게 순수하고 고요한 것을 매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리라>

 

<아침과 봄에 얼마나 공명하는가에 따라 그대의 건강을 가늠해 보라. 자연의 깨어남을 보고도 그대 속에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을 해도 잠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가장 먼저 귓가를 두드리는 새의 노랫소리에도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깨달으라. 그대 인생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비록 맥박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천국은 우리 머리 위뿐만 아니라 우리 발 아래에도 있는 것을…>

 

<그대의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맞부딪혀 살아나가라. 회피하거나 욕하지 말라. 그대가 나쁜 사람이 아니듯 삶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그대가 가장 풍요로울 때에는 삶은 가장 초라하게만 보인다. 불평쟁이는 낙원에서도 불평만 늘어놓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가 비록 형편없이 가난한 집에 있다고 하여도 즐겁고 가슴 떨리게 멋진 시간들을 보낼 수 있으리라. 황혼의 빛은 부자집 창문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집 창문도 밝게 비춘다. 또한 초봄에는 가난한 자들의 집앞에 쌓인 눈도 녹는다. 그대가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거기서도 궁전에서처럼 즐겁고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메사츄세스 콩코드강변의 철인(哲人)이자 미국의 정신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살아생전 딱 두 권의 책을 내었지만 읽어주는 이들이 없었다. 첫 번째 책은 겨우 200여권이 팔렸을 뿐이고 두 번째 책인 <월든>이 그나마 이천부정도가 팔렸지만 그러기에는 5년이 걸렸다.

 

삶은 가난하였으나 그는 삶을 사랑하였다.

 

사람들이 성공적이라고 칭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삶은 단지 한 종류이다. 우리는 왜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고 한 가지만을 과대평가해야 하는가?” 살아있을 때 그가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죽은 뒤 그에게 돌아갔다. <소로우의 삶은 도덕적 영웅주의의 표본이자 정신적 차원의 삶을 끈질기게 추구한 표본으로서 미국인의 삶에 깊고 넓게 영향을 끼쳤다>는 평()으로.

 

일에 쫓기고 빌(bill)에 쫓기며 살아가는 이민(移民)들에게도 봄 햇살은 다습게 다가온다. 비록 쫓기며 살아가는 삶이 힘에 겨워도, 가난한 삶이 못내 버겁더라도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한 삶은 살만한 것이다.

 

탓과 덕분

tree탓과 덕분이라는 말이 제대로만 쓰이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아마 세상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네 탓>과 <내 덕분>뿐이 아니라 <내 탓>과 <네 덕분>이 먼저인 세상 말입니다.

그게 사람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탓과 덕분이라는 말이 제대로만 쓰이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Alice May Douglas의 시 한편을 되뇌이며…

 

 

Who Loves the Trees Best? 

  – Alice May Douglas

 

 Who loves the trees best? “I,” said the Spring.

 “Their leaves so beautiful to them I bring.”

 Who loves the trees best? “I,” Summer said.

 “I give them blossoms, white, yellow, red.”

 Who loves the trees best? “I,” said the Fall.

 “I give luscious fruits, bright tints to all.”

 Who loves the trees best? “I love them best,”

 Harsh Winter answered, “I give them rest.”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 봄이 말했다.

 예쁜 옷을 입혀 주는 것은 바로 나니까.”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 여름이 말했다.

 “나무에게 희고. 빨갛고 노란 꽃들을 주는 것은 바로 나니까”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 가을이 말했다.

 “맛있는 과일과 화사한 단풍은 내가 주는 걸…. .”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내 사랑이 제일 클 걸…”

 추운 겨울이 대답했다, “난 나무들에게 쉼을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