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의 여유

지금은 뉴욕에 계시는 문동환목사님께  기독교교육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벌써 35년 전 일입니다. 어느날 강의실에 들어 서신 목사님께서는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내방송이 나옵니다. ‘비행기가 심각한 이상이 생겨 추락하고 있습니다. 약 10분 후 이 비행기는 태평양상에 떨어 질 것 같습니다.’ 자 ! 여러분에게 10분의 시간을 주겠습니다. 내가 나누어 드린 종이 위에 글이든 그림이든 이 상황에서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적어 보십시요.” 

 

그리고 10분 후 목사님께서 다시 말씀 하셨습니다.

62p

 

“최근에 승객이 모두 죽은 비행기 사고가 있었습니다. 시신조차 찾기 힘든 사고이었지요. 그런데 사고현장에서 어느 일본인이 남긴 짧은 기록을 발견하였답니다. 거긴 이렇게 쓰여있었답니다. ‘내게 10분의 여유가 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감사한다. 사랑한다.’라고요. 자! 이제 여러분들이 남긴 것들을 공개해 볼까요.”

 

그렇게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던 우리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유서들을 공개했었지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 때 제가 무어라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네요.

 

지금의 내가 “10분의 여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내가 그 짧은 시간 사랑과 감사를 고백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무려 삼십 팔년간을 쫓겨 다니며 사셨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님 이야기지요.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선생님이시지만 늘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하지요.

 

어느날 멍석을 짜고 계신 해월선생님께 어느 도인(道人)이 물었답니다.

선생님 내일이면 또 떠날 길인데 멍석은 무어라 짜십니까?”

해월선생님 왈,

“내 몸이야 떠나지만 여기 멍석이 있으면 훗날 누구라도 이 곳에 와서 쉬지 않겠는가?”

 

늘 마지막인 순간에도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참 도인(道人)이겠지요.

쪼금 아는 체 하는 것 용서해 주시기 바라고요.

이러한 삶들을 일컬어 ‘종말론적(終末論的) 삶’이라고 하지요.

 

종말론적 삶에는 무엇보다 치열함이 있지요.

그 치열함 속엔 여유와 넉넉함과 사랑과 감사 그리고 나눔이 있게 마련이고요..

 

무엇보다 종말론적 삶에는 끝없는 희망이 살아 숨쉬는 것이지요.

 

내래 뭘 알겠노?

글 한 줄 쓰자하고  앉으면 나오느니 육두문자 뿐입니다. 그래 차마 글 한 줄 못쓰고 한 주가 지나갑니다. 

“내래 뭐 알겠노.”하시며 평생 소주잔에 몸과 맘을 담고 사시다 가신 피양도 피난민 처고모부가  아마 이즈음 제 심정으로 세상을 사셧을 겝니다. 

떠나온지가 한 세대에 이르러서인지 도대체 “내래 뭐 알겠노”의 연속입니다. 그냥 모르고 안보면 되는 일인데 세상사는일이 어째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딱 그 나이의 딸아이를 키우는 아비로서  늘 아이에게 하는 말이 있었답니다. 건강한 미국시민으로 살되 한국인임을 잊고 살지 말라는… 

51754466_1-51743968_2

처음 윤모라는 자의 뉴스를 접했을 때는 “참 철따구니 없는 놈일세”하며 끌끌 혀차고 말았답니다.  이즘 세상에 미친 놈들이 한 둘도 아니고, 그 놈도 그 중 하나겠거니 했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폼새가 그게 영 아닙니다. 

윤모라는 놈은 바로 지금 오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라는  게 이즈음 제 생각이랍니다. 

거기까지 이르니 이제 제가 정신병자가 됩니다. 

하여,  제 정신건강을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내래 뭘 알겠노?”

봄, 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함을 느끼는 오월은 처음인 듯합니다. 생각의 한계인 줄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쩜 늙어가는 탓인 줄도 모를 일이고요.  저 뿐 아니라 지구도 함께 말입니다.

꽃과_등

중순으로 접어드는 오월, 여전히 꽃잎들이 날리는 봄이랍니다. 

꽃은 떨어지며 열매를 품습니다.

기억 용량이 그리 크지 않은 제 작은 머리속에도 수많은 꽃들이 떨어지며 품었던 열매들의 꿈들이 남아있답니다. 끝내 이루지못한 꿈들, 아직도 맺지못한 열매들이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오월- 그렇게 떨어진 꽃잎들이 품었으나 맺지 못한 열매들을 추억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밤입니다. 하루의 시작인 시간입니다. 구태여 유태인들의 시간관념을 빌어오는 까닭은 지금의 쉼이 곧 시작이고 싶은 꿈 탓입니다. 

봄 그리고  밤.

바로 봄밤이기에

비록 아쉬움 많아도 서두르지 않는답니다.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한계(限界)

노인이 하우에게 말했다.

“태양이 하나라는 건 알고 있지?”

“태양이 하나라는 건 알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은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고 하우에게 내밀었다.

“자, 보게. 사진이라네.”

하우는 사진을 건네받았다. 두 장이었다.

언뜻 보기엔 꼭 같아 보이는 두 장의 사진. 수평선 너머에 있는 태양을 찍은 것들이었다.

sunset

“둘 중에 어떤 게 일출 사진이고 일몰 사진인지 분간할 수 있겠나?”

하우는 사진을 이리저리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딱히 일출과 일몰을 구분할 만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둘 다 일출 사진이라고 해도, 둘 다 일몰 사진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았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만, 얼핏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르신, 분간하기가 어려운데요.”

 sun

노인은 손가락으로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일출 사진이라네. 당연히 다른 사진은 일몰 사진이고.”

그 말을 듣고 사진을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노인은 말했다. “일출이건 일몰이건 똑 같은 태양이지. 어떤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야. 한계도 마찬가지지. 그걸 일몰이라고 보면 일몰인 거고 일출이라고 보면 일출인 거라네. 한계는 말이지, 꽉막힌 벽이 아니라 허들 같은 거라네. 뛰어넘으면 그만이지. 최선을 다해 뛰어넘어 보게. 힘들면 가끔 숨도 돌리면서 말이야.” 하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김현태 『향유고래이야기』중에서 – 

주일 오후에 읽은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한계는 뛰어 넘으면 그만이랍니다. 최선을 다해…

힘들면 가끔 숨도 돌리면서…

아주 큰 행복

예년에 비해 달포는 늦은듯한 봄이 천지에 가득합니다. 뒤뜰에 등나무가 연보라빛 연등을 켠 것을 보면 올해는 봄과 여름이 함께 하려나 봅니다. 

4550550등나무6_n460330

오월 초하루, 느긋함으로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An early-morning walk is a blessing for the whole day.”라는 말처럼 봄이 가득한 이 아침을 마시며 하루가 아닌 한해의 축복을 느껴봅니다.

언젠가  미국인들의 <행복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는 것 곧 소유와 소비가 행복의 척도였는데 이젠 <마음의 행복>이라는 잣대를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가 내다 본 세상은 작은 것이 아름다운(Small Is Beautiful) 세상입니다. 

“경제학이란 보다 적은 소비로 보다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 바로 슈마허의 말입니다.

<부자나라에서 좋은 것이 가난한 나라에도 좋은 것이라는 가정은 옳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 적용될 뿐 대부분의 틀린 것이다> 역시 슈마허의 말입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지나치게 <비교행복>에 빠져들다 보면 불행을 낳을 뿐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봄날 아침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지금 제가 누리는 아주 큰 행복입니다.

36계 줄행랑

오늘 온라인 잡지 American Drycleaner에 실린 세탁인들의 말이랍니다. 올 3월과 지난 해 삼월의 매상 비교를 하는 서베이에 커멘트한 말들입니다. 

동네 다섯군데 있던 세탁소 중 나만 살아 남았답니다.([There were] five dry cleaners in town, now I’m the only one.)”

지난 육 주간 조금씩 나아지는 추세랍니다.(It’s [been] getting better for [the] last six weeks)”

동네 시장 환경은 아주 조금씩 꾸준히 나아지고 있는 듯 한데…(market conditions in our area are somewhere between static and slight improvement.)”

해마다 시간이 갈수록 형편이 나빠진다는…(Year over year, the conditions are getting worse)”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대꾸들이랍니다. 좋아진다는 사람도 있고, 갈수록 어렵다는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서베이 응답을 보면 서부 지역을 빼 놓고는 미 전역에서 매출이 지난 해보다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아주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탁인들의 이야기도 있답니다. 

어제 어느 세탁인에게서 받은 전화 내용도 바로 이런 헷갈리는 환경 탓에서 오는 고민이었을 겝니다. 내용인즉은 지난 해 대비 올 1/4분기에 매상이 떨어졌는데 가격을 올릴까 말까하는 물음이었답니다. 

저라고 뭐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뾰족하게 신통방통한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마다 처한 입장에 따라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일들을 시도하고 되풀이 해 보는 것이지요. 

그 방법들 가운데 한가지랍니다.  얼핏36계 줄행랑과 맞닿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images-7

<상황이 불분명 할 때 사람들의 심리도 흥미롭다. 이스라엘 학자 바 엘리는 축구에서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와 골키퍼를 관찰했다. 차는 방향을 보니 왼쪽 1/3, 오른쪽 1/3, 가운데가 각각 1/3이었다. 근데 볼을 막는 골키퍼의 반은 왼쪽으로, 나머지 반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었다. 볼의 1/3은 가운데로 오는데 왜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을까? 왜 그들은 가만히 있지 못할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편향이다(action bias).> – Rolf Dobelli의 책 “스마트한 생각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들이지요. 뭔가 불안하고, 앞날이 확실치 않을 때면 무슨 일이던 뭔가 해야만 될 것같은 초조감이 일곤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초조함으로 벌인 일들로 인해 상황은 더 꼬이기도 하곤 하지요. 

하여 때론 조용히 하던 일을 묵묵히 하면서 기본적인 일들에 충실해 보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무릇 36계 줄행랑이란 도망그 자체에 뜻을 두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세태(世態) 이제(二題)

세월이 하수상하니 별별 일을 다 보게 된답니다.

우선 한가지.

어제 커테티컷 Darien에 있는 Sandra’s Cleaners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chillerforbakery

아침 10시쯤이었다고 하니 정말 눈 깜작할 사이 코를 베인 형국이랄 수 있겠습니다. 시티 워터 (수도물)을 쓰지 않는다면 세탁소에  필수 장비 가운데 하나인chiller를 뜯어다가 팔아 먹으려던 도둑 두 명이 잡혔다는 뉴스랍니다. 

세탁소에서 일어난 강절도 사건 뉴스는 종종 듣는 것이지만, 세탁소가 한참 일하는 시간에 통상 건물 밖에  놓이게 마련인 장비를 뜯어가는 일은 처음 듣는 일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명의 도둑들의 나이에 또 한번 놀랐답니다. 쉰 둘, 쉰 셋이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오늘 오후에 뉴저지의 어느 세탁인이 전화를 주셨답니다. 어눌하지만 절실한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한 그 이의 문의였답니다.

“오늘, 맡긴 지 오년이 지난 웨딩 가운을 찾으러 온 손님이 있었는데요. 분명 맡긴 영수증을 들고 오긴 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안나고…. 물건도 없고해서…. ‘없다고 했더니…. 화를 내며 돈을 안주면 법정으로 간다며…. 이럴 땐 어떻하면 좋을지요?” 

처음에 제 대답이었답니다.

“뭘 걱정하십니까? 통산 관례법이라는 게 있는데, 5년이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는 감사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지만 제가 오히려 찜찜했답니다. 그래 자료를 찾아 보았답니다.

대부분의 주마다 왈 관례에 따라 적용되는 것 같고요. 실제 판례에 나타난 세탁물 보관에 따른 소송 결과들은 이렇답니다. 

Massachusetts Law에 따르면 90일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고요. New York Law는 6개월이고요. Ohio Law는 120일로 규정하고 있답니다. 

이런 시비에 말리지 않으려면 넉넉잡고 한 일년 정도는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무튼 세월이 녹녹치 않아서 일어나는 일인듯 합니다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인류사 수천년 이래 늘 일어났던 일이겠지요. 

무릇 세월이 하수상하다는 말은 느끼기 나름일게고요.

자!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는 게 사람사는 세상이겠지요.

그렇다하더라도 이즘 세태를 감안하여 chiller도 틈틈이 확인하고, 세탁물과 손님들 확인하며 산다고 손해 볼 일은 아닐 듯하답니다.

 

두려움에

어제  일어난 보스톤 마라톤 대회 현장에서의 참사 보도를 보며 떠오른 것은 9.11 당시의 두려움입니다.

 

당시 실시간 중계되는 TV 모니터를 보면서 웬지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쌓였던 기억이 있답니다.

그날 이후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겪여낸 일들을 돌아보노라면 그 두려움이 까닭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boston-marathon-010-b88c4f75e9626d3144e527bc1f85a8d9581ebe66-s6-c10

 

이 시각 현재 아직 사건의 배후나 범죄 소행자들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일들에 대해 두려움이 입니다.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한가지.

 

한글로 된 뉴스를 보는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인데요.  추측성 기사에 대한 것이랍니다.  이 점 긴 말씀드리고 싶지 않답니다.

 

두려움 곧  fear요 공포입니다. 무릇 대개의 두려움은 알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바로 “나에게만 다가온 두려움”이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 또는 ‘나’와 ‘두려움‘이라는 놈은 아마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일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하여 딱 지금 “비정상적인 불확실성”앞에 놓인 미국민들만의 것도 아닌 것 같고요.

 

뭐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서에 수많은 신의 명령들이 나오지요. 일테면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무수한 신의 명령들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신의 명령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이랍니다. 뭐 약 360번 정도가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360번 – 바로 일년 365일에 대응하는 숫자랍니다. 사람이란 매일 매일 두려움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고나 할까요.

 

이런 말이 있답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을 꼭 껴안아라.>라는.

 

진정 큰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라는 말인데요, 그걸 껴안을 수 있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만들 우둔한 사람이나 세력은 없겠지요.

 

내 아이들이 살아갈 땅, 미국을 위해 기도하며….

 

필요와 욕망

언젠가 어느 스님의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얻은 한 깨달음입니다. “필요와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삶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제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 욕망으로 끌고 가는 삶일까? 

불가에서는 “내려 놓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비움”을 말씀합니다. 욕망을 비우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렇게 비우다 더는 비울 수 없는 것이 “필요”이겠지요. 

나는 어디까지 비울 수 있을까요?

출가(出家)한 사람이 아니니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들과 또 그렇게 얽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우선 확보해 두어야겠지요. 그렇게 우선 확보해둔 기본적인 필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꼽아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필요”부터 따져보니 버려야 할 “욕망”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그래 이번엔 거꾸로 버릴 것을 먼저 버려 보는 것이지요. “욕망”을 벗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컴퓨터 옆에 있는 종이 한 장 버리는 일에서부터 “망설임”이 먼저 인답니다. 필요를 꼽을 땐 별 시간이 걸리지 않던 것이 욕망을 꼽자니 그 놈의 “집착”이라는 놈이….. 

31081934 (1)

<지갑을 버리고, 부모조차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나를 따르라>했던 것은 예수이지요. 

이 쪽으로나 저 쪽으로나 참다운 출가를 하기 전엔  “욕망”의 끈을 놓긴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필요와 욕망을 흰 빨래와 검정 빨래 가리듯 가리울 수만 있다면 참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시간에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이민 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고…

capture-20130410-222907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노동력이 곧 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인 이민들은 노동집약적인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세탁업에 이르면 그야말로 노동이 곧 돈인 비지네스입니다. 하여 “이민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는 말은 진실인 동시에 사실입니다.  

돈 곧 자본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임으로 일괄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이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용하는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시간에 대한 생각들을 몇 자 적어 봅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워라”라는 책에서는 일곱개의 시간 낭비 요소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갑자기 불쑥 걸려오는 전화, 예기치 못한 방문객, 회의, 긴급상황, 연기, 사교활동과 잡담, 우유부단함과 미룸’  하지만 필자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가장 큰 시간 낭비 요소는 위의 낭비 요소를 허락하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누가 전화를 받는가?  누가 방문객을 맞이하는가? 누가 회의에 참석하는가? 누가 긴급 상황을 만들고, 누가 연기를 하는가? 누가 사교 활동에 참가하고 잡담하며 우유부단하게 미루는가?  

바로 자신이다.>  – 양정훈지음 , <9 to6 혁명>에서-

 

시간 씀씀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라. 옳은 일에 시간을 쓰고 있는가?” – Randy Paush 라는 교수가 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골프, 한국비디오(이즈음엔 컴퓨터에 앉아 즐기시는 분들도 제법 많은 듯), 무슨 무슨 각종 회합들… 거기에 얹어 자신의 게으름까지…. 시간에 대해서만은 전적으로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똑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요. 바로 올바른 정보를 갖고, 바르게 활용한다면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남보다 좀 더 앞서 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