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계 줄행랑

오늘 온라인 잡지 American Drycleaner에 실린 세탁인들의 말이랍니다. 올 3월과 지난 해 삼월의 매상 비교를 하는 서베이에 커멘트한 말들입니다. 

동네 다섯군데 있던 세탁소 중 나만 살아 남았답니다.([There were] five dry cleaners in town, now I’m the only one.)”

지난 육 주간 조금씩 나아지는 추세랍니다.(It’s [been] getting better for [the] last six weeks)”

동네 시장 환경은 아주 조금씩 꾸준히 나아지고 있는 듯 한데…(market conditions in our area are somewhere between static and slight improvement.)”

해마다 시간이 갈수록 형편이 나빠진다는…(Year over year, the conditions are getting worse)”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대꾸들이랍니다. 좋아진다는 사람도 있고, 갈수록 어렵다는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서베이 응답을 보면 서부 지역을 빼 놓고는 미 전역에서 매출이 지난 해보다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아주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탁인들의 이야기도 있답니다. 

어제 어느 세탁인에게서 받은 전화 내용도 바로 이런 헷갈리는 환경 탓에서 오는 고민이었을 겝니다. 내용인즉은 지난 해 대비 올 1/4분기에 매상이 떨어졌는데 가격을 올릴까 말까하는 물음이었답니다. 

저라고 뭐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뾰족하게 신통방통한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마다 처한 입장에 따라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일들을 시도하고 되풀이 해 보는 것이지요. 

그 방법들 가운데 한가지랍니다.  얼핏36계 줄행랑과 맞닿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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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불분명 할 때 사람들의 심리도 흥미롭다. 이스라엘 학자 바 엘리는 축구에서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와 골키퍼를 관찰했다. 차는 방향을 보니 왼쪽 1/3, 오른쪽 1/3, 가운데가 각각 1/3이었다. 근데 볼을 막는 골키퍼의 반은 왼쪽으로, 나머지 반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었다. 볼의 1/3은 가운데로 오는데 왜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을까? 왜 그들은 가만히 있지 못할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편향이다(action bias).> – Rolf Dobelli의 책 “스마트한 생각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들이지요. 뭔가 불안하고, 앞날이 확실치 않을 때면 무슨 일이던 뭔가 해야만 될 것같은 초조감이 일곤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초조함으로 벌인 일들로 인해 상황은 더 꼬이기도 하곤 하지요. 

하여 때론 조용히 하던 일을 묵묵히 하면서 기본적인 일들에 충실해 보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무릇 36계 줄행랑이란 도망그 자체에 뜻을 두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세태(世態) 이제(二題)

세월이 하수상하니 별별 일을 다 보게 된답니다.

우선 한가지.

어제 커테티컷 Darien에 있는 Sandra’s Cleaners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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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쯤이었다고 하니 정말 눈 깜작할 사이 코를 베인 형국이랄 수 있겠습니다. 시티 워터 (수도물)을 쓰지 않는다면 세탁소에  필수 장비 가운데 하나인chiller를 뜯어다가 팔아 먹으려던 도둑 두 명이 잡혔다는 뉴스랍니다. 

세탁소에서 일어난 강절도 사건 뉴스는 종종 듣는 것이지만, 세탁소가 한참 일하는 시간에 통상 건물 밖에  놓이게 마련인 장비를 뜯어가는 일은 처음 듣는 일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명의 도둑들의 나이에 또 한번 놀랐답니다. 쉰 둘, 쉰 셋이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오늘 오후에 뉴저지의 어느 세탁인이 전화를 주셨답니다. 어눌하지만 절실한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한 그 이의 문의였답니다.

“오늘, 맡긴 지 오년이 지난 웨딩 가운을 찾으러 온 손님이 있었는데요. 분명 맡긴 영수증을 들고 오긴 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안나고…. 물건도 없고해서…. ‘없다고 했더니…. 화를 내며 돈을 안주면 법정으로 간다며…. 이럴 땐 어떻하면 좋을지요?” 

처음에 제 대답이었답니다.

“뭘 걱정하십니까? 통산 관례법이라는 게 있는데, 5년이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는 감사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지만 제가 오히려 찜찜했답니다. 그래 자료를 찾아 보았답니다.

대부분의 주마다 왈 관례에 따라 적용되는 것 같고요. 실제 판례에 나타난 세탁물 보관에 따른 소송 결과들은 이렇답니다. 

Massachusetts Law에 따르면 90일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고요. New York Law는 6개월이고요. Ohio Law는 120일로 규정하고 있답니다. 

이런 시비에 말리지 않으려면 넉넉잡고 한 일년 정도는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무튼 세월이 녹녹치 않아서 일어나는 일인듯 합니다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인류사 수천년 이래 늘 일어났던 일이겠지요. 

무릇 세월이 하수상하다는 말은 느끼기 나름일게고요.

자!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는 게 사람사는 세상이겠지요.

그렇다하더라도 이즘 세태를 감안하여 chiller도 틈틈이 확인하고, 세탁물과 손님들 확인하며 산다고 손해 볼 일은 아닐 듯하답니다.

 

두려움에

어제  일어난 보스톤 마라톤 대회 현장에서의 참사 보도를 보며 떠오른 것은 9.11 당시의 두려움입니다.

 

당시 실시간 중계되는 TV 모니터를 보면서 웬지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쌓였던 기억이 있답니다.

그날 이후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겪여낸 일들을 돌아보노라면 그 두려움이 까닭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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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각 현재 아직 사건의 배후나 범죄 소행자들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일들에 대해 두려움이 입니다.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한가지.

 

한글로 된 뉴스를 보는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인데요.  추측성 기사에 대한 것이랍니다.  이 점 긴 말씀드리고 싶지 않답니다.

 

두려움 곧  fear요 공포입니다. 무릇 대개의 두려움은 알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바로 “나에게만 다가온 두려움”이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 또는 ‘나’와 ‘두려움‘이라는 놈은 아마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일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하여 딱 지금 “비정상적인 불확실성”앞에 놓인 미국민들만의 것도 아닌 것 같고요.

 

뭐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서에 수많은 신의 명령들이 나오지요. 일테면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무수한 신의 명령들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신의 명령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이랍니다. 뭐 약 360번 정도가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360번 – 바로 일년 365일에 대응하는 숫자랍니다. 사람이란 매일 매일 두려움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고나 할까요.

 

이런 말이 있답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을 꼭 껴안아라.>라는.

 

진정 큰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라는 말인데요, 그걸 껴안을 수 있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만들 우둔한 사람이나 세력은 없겠지요.

 

내 아이들이 살아갈 땅, 미국을 위해 기도하며….

 

필요와 욕망

언젠가 어느 스님의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얻은 한 깨달음입니다. “필요와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삶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제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 욕망으로 끌고 가는 삶일까? 

불가에서는 “내려 놓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비움”을 말씀합니다. 욕망을 비우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렇게 비우다 더는 비울 수 없는 것이 “필요”이겠지요. 

나는 어디까지 비울 수 있을까요?

출가(出家)한 사람이 아니니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들과 또 그렇게 얽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우선 확보해 두어야겠지요. 그렇게 우선 확보해둔 기본적인 필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꼽아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필요”부터 따져보니 버려야 할 “욕망”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그래 이번엔 거꾸로 버릴 것을 먼저 버려 보는 것이지요. “욕망”을 벗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컴퓨터 옆에 있는 종이 한 장 버리는 일에서부터 “망설임”이 먼저 인답니다. 필요를 꼽을 땐 별 시간이 걸리지 않던 것이 욕망을 꼽자니 그 놈의 “집착”이라는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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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버리고, 부모조차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나를 따르라>했던 것은 예수이지요. 

이 쪽으로나 저 쪽으로나 참다운 출가를 하기 전엔  “욕망”의 끈을 놓긴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필요와 욕망을 흰 빨래와 검정 빨래 가리듯 가리울 수만 있다면 참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시간에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이민 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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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노동력이 곧 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인 이민들은 노동집약적인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세탁업에 이르면 그야말로 노동이 곧 돈인 비지네스입니다. 하여 “이민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는 말은 진실인 동시에 사실입니다.  

돈 곧 자본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임으로 일괄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이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용하는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시간에 대한 생각들을 몇 자 적어 봅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워라”라는 책에서는 일곱개의 시간 낭비 요소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갑자기 불쑥 걸려오는 전화, 예기치 못한 방문객, 회의, 긴급상황, 연기, 사교활동과 잡담, 우유부단함과 미룸’  하지만 필자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가장 큰 시간 낭비 요소는 위의 낭비 요소를 허락하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누가 전화를 받는가?  누가 방문객을 맞이하는가? 누가 회의에 참석하는가? 누가 긴급 상황을 만들고, 누가 연기를 하는가? 누가 사교 활동에 참가하고 잡담하며 우유부단하게 미루는가?  

바로 자신이다.>  – 양정훈지음 , <9 to6 혁명>에서-

 

시간 씀씀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라. 옳은 일에 시간을 쓰고 있는가?” – Randy Paush 라는 교수가 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골프, 한국비디오(이즈음엔 컴퓨터에 앉아 즐기시는 분들도 제법 많은 듯), 무슨 무슨 각종 회합들… 거기에 얹어 자신의 게으름까지…. 시간에 대해서만은 전적으로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똑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요. 바로 올바른 정보를 갖고, 바르게 활용한다면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남보다 좀 더 앞서 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오만 잡생각

오만 잡생각”

이런 저런 걱정거리나 머리가 복잡할 때 종종 쓰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오만 잡생각”이라는 말엔 아주 과학적인 근거가 있더군요. 아주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National Science Foundation(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연구 결과랍니다.

 

사람은 보통 한 시간당 천 개가 넘는 생각을 한답니다. 물론 생각의 편린 곧 생각의 조각들(fragments)의 숫자이지요.  지금 저처럼 어떤 글을 쓰고 있는 상태에서는 시간당 약 2천 5백가지가 넘는 생각들을 한다고 하네요.  보통사람들은 하루에  일만 이천개 정도의 생각을 하며 살고요. 생각을 좀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약 5만개의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하지요.

 

참 우리 선조들은 연구하지 않아도  다 아시고  “오만 잡생각”이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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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5만에서 6만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고요. 그런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그 오만 잡생각 가운데 15% 정도는 긍정적인 생각들이고 나머지 85%가 부정적인 생각들이랍니다. 일테면 걱정, 근심, 불안 등등과 연관된 생각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지요. 

 

이게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당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젠가 고 김대중대통령의 마지막 일기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를 죽 읽다가 저를 사로잡은 것은 2월 7일에 쓰신 단 두 문장으로 된 일기였답니다.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제가 감히 거기에 무슨 사족을 달겠습니까? 그냥 가슴이 싸하게 다가 온 말씀이었지요.

 

그 분도,  아니 그 분은 저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많은 생각을 하시며 사신 분이지요. 어쩌면 하루에 5만, 6만이 아니라 10만, 20만 아니 그 이상의 생각들을 하시며 사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그 날의 일기에 달랑 저렇게 두 문장으로 정리해 놓으신 것을 보면 누리셨던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일기를 다 읽고 제 마음에 든 생각 하나. “참으로 그 분은 긍정의 힘으로 사신 분이구나” 이거였답니다.

 

장사 – 역시 긍정의 힘이 이끌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하루 하루를 15%의 긍정적 생각들이 이끌고 가게해야 합니다. 긍정적 생각들이란 지푸라기라도 잡는 어떤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는 그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생각들을 참 그 방향으로 나가게 하려면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 분이 살아 온 길이 바로 그렇게 “준비”하고 “실천”하는 삶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큰  사람만이 그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작은 구멍가게 하나 잘 꾸려 나가는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장사 안 되어서 걱정”, “이거 진짜 큰일”, “아이고 어쩌지” 그 부정적 생각들을 머리 흔들어 떨쳐 버리고, “이건 내게 좋은 기회야”, “그래, 이거 하나 바꾸어 보자”, “이렇게 다시 시작해 볼까” 긍정적 생각들로 아주 작은 것부터 준비하고 행동으로 옮겨 보는 일.

 

어떠세요?

한 번들 함께 해 보시지 않으시려는지요?

 

 

실행하는 사람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행한다. 한 시대가 그 전 시대로, 또는 그 전의 문제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뜻이다포도주 병의 코르크 마개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역사도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듯 하지만 사실은 수준이 점점 올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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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또는 비지네스맨의 영원한 멘토라고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의 말입니다. 어떤 하나의 현상을 보면 마치 역사가 뒷걸음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발전한다는 것이지요.

인생을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의 개인사나, 조직의 역동성을 굳게 믿는 단체나 크거나 작은 기업사, 민족의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가진 민족사 나아가 인류 보편의 자유를 신봉하며 나아가는 세계사는 발전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겠지요.

<실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 물론 자신이 하는 일 전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모든 사람은 아주 많은 일상적인 일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매일 3시간씩 연습을 한다. 아무도 그가 연습을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을지라도 40살 이후에도 실력을 향상 시키려면 그것을 즐겨야 한다나는 몇 년 전 한 피아니스트에게서 “나는 내 손가락에 생명이 있는 한 연습을 한다”는 훌륭한 말을 들었다.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연습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가 그의 책 ‘경영 바이블’에서 한 말입니다.

무릇 직업적인 일이란 대부분 아주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길수 있어야합니다. 그 삶이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발전을 위해서 말이지요.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이른 아침

버섯공장 거름냄새

앞뜰

파랗게 물오른 버드나무 아래

차마

견뎌내지 못하고 떨어진 잔가지들

뒤뜰

흐드러진 개나리 사이

겨우내

숨 져 마른 관목

아래

볼품없이 누워있는

내 머리만한

돌멩이 하나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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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예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듯 부활도 끝이 아닙니다. 문제는 부활이후(以後)입니다. 탐스런 목련, 뒷뜰에  흐드러진 서울 개나리, 하얀 배꽃, 날렵한 더그우드 꽃잎들… 봄 꽃으로 꽉찬 세상만이 봄이 아닙니다.

제 딸년이 코끝에 사래질 치는 버섯공장 거름냄새도 주워 내다 버려야 할 떨어진 버드나무 잔가지들도 앙상히 말라 톱질 기다리는 죽은 나무도 일 년 내내 그 자리에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어 본 적 없는 못생긴 돌덩어리도 봄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한 자리 꿈꾸었던 제자들…

부활이후에도 여전히 한자리 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여인이었다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베드로는 바울에게 밀려 났고, 야고보, 요한 역시 한 자리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은 뭐 크게 출세했나요. 발품 팔아 돌아 다니며 멍석 짜는 일에서 벗어 나지 못한 삶이었지요. 봄은 그렇게 오는 것이지요. 부활 이후 말입니다.

“위로자로서

화의 축원자로서

삶의 조언자로서…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자로서”

아리랑

여러 해 전에 필라에 사시는 지인께서선명회 합창단 공연입장권을 보내 주셔서 가까이 지내는 몇 가정 부부들과 함께 그 저녁 어린 천사들의 화음을 만끽하였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밤 동행들에게오랫만에 누린 문화 생활이라고 말하였었고.

천사들이 마지막으로 청중들에게 선사한 노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이었는데 그 곳에 모인 모든 동포들이 목청 높여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 밤 그 곳에 모인 모든 동포들이 한 목소리로 불렀던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 구전민요이다. 이 아리랑과 뗄 수 없는 말은 ‘한()’이다. 아리랑은 대개의 다른 민요와 더불어 두레노레 곧 ‘노동요(勞動謠: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이었다. 

 

아리랑

어느 누구든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잊혀지지 않는 한의 응어리는 갖고 살게 마련이다. 일테면 가난에서 오는 한, 까닭없이 빼앗긴 것에서 오는 한, 부모를 일찍 여윈 한, 자식을 앞세워 보낸 한, 성차별애서 오는 한, 고부간의 갈등에서 오는 한, 남녀간의 사랑에서 말미암은 응어리진 감정 등등 이런 것들이 집단화 되어 공동의 노래가 된 것 중 하나가 바로아리랑이다.

 

비록 개인적인 넋두리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집단화 되어 표현될 때 그것은 이미 직업 또는 사회공동체의 공통적 애환을 담아내는 노래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아리랑’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가락이기도 하였다.

 

아리랑이 언제 어느 때부터 불리워졌는지, 아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연구하는 학자마다 다 다른 소리를 하므로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에서 시작되었다는 아리랑(我離娘)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민중들이 괴로운 말만 듣게되어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한 말에서 나왔다는 아이농(我耳聾)설, 밀양 영남루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는 아랑전설(阿娘傳說), 신라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한 말에서 나왔다는 알영설(閼英說), 이밖에도 낙랑설, 아라리설, 아린설, 얄리얄리설등 연구하는 이마다 주장이 다르다.

 

그러나 이즈음은 노래의 조율성과 흥을 돋우기 위한 ‘무의미한 후렴소리’로 뜻이 모아지고 있으며, 노래의 기원은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다가 구한말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특히 1926년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 이후 급속도로 번져 민중의 민요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나는 이십여 년 전에 발표한 정호완의 “아리다, 쓰리다”설에 귀를 귀울인다. 밀양아리랑에서 나오는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은 고유한 우리 말 ‘아리다’와 ‘쓰리다’에서 나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해석을 터로 한다면 “아리랑 고개를 넘는 일’이야말로 ‘아리고 쓰린’ 오늘을 이겨내는 일이며, ‘아리고 쓰린’ 한()을 훌훌 털어 냄 아닌가?

 

저마다의 아픔과 시림의 고개, 이민(移民)의 시림과 아픔의 고개 나아가 민족의 아픔과 시림 곧 조국의 분단 – 그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아니 아주 넘어선 후 부르는 <새 아리랑>을 기다린다.

 

새 아리랑은 감상적이고 슬픈 계면조(界面調)가 아니라 평안하고 화평한 평조(平調)에 담아 낼 일이며, 한에 응어리진 소리가 아니라 해원상생(解怨相生:원과 한을 풀고 모두 더불어 함께 사는)의 소리여야 할 일이며, 알량한 주의(主義)나 종파(宗派)가 아니라 ‘시리고 아린’고개를 넘어선 민족의 큰 정신 담아내는 노래라야 할 것이다.

 

그 새 아리랑 소리 높여 부를 날을 꿈꾸며.

 

이즈음 아내는 아리랑을 이용한 생활무용을 통해 한국어와 문화를 알리는 꿈에 젖어 있다.

 

꿈을 꾸는 한 삶은 아름다운 법 아닐까?

 

한과 꿈

얼추 이십년 전에 아버님께서 책을 한 권 펴내신 적이 있다.

일흔 해 이 땅을 살아오시면서 당신께서 겪고 느끼셨던 일들을 담담히 적어 내신 것이었다. 아주 평범하지만 영육간에 건강하게 살아오신 모습대로 책의 내용 역시 지극히 평범하였지만 건강하고 바른 삶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었다. 책 제목이 <한울림>이었는데 나는 내용보다 제목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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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부제로 붙여 논 <하나뿐인 인생을 위하여>가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나뿐인 인생,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세월 – 동서고금의 철인(哲人)이나 현인들의 말씀에서부터 유행가 가사까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지만 그게 제 삶에 무르녹아 드러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하나 뿐인 인생을 외길로 걸어 온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 나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뜻을 세우고 그 길을 서두르지 않고 오직 한걸음으로 또박또박 걸어 온 이웃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천방지축으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엄벙덤벙 살아 온 내 삶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뭐 대단한 것을 이루어 낸 이들을 말함이 아니다. 이민와서 이삼십 년 때로는 사오십 년 가까이 다운 타운 코너 스토아나 세탁소를 꾸리며 웃음 잃지 않고 자식들 훤출하게 키워 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작은 손길 선뜻 내어 밀지만 결코 내세우지 않는 모습들이 부럽다는 말이다.

 

꿈많던 어린시절이 어찌 나에게만 있었을까 보냐!

품었던 꿈에 소원과 기도와 비나리를 아니 실었던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한참을 걸어오다 보면 꿈은 그냥 꿈이 되고 꿈조차 꾸지 않았던 모습의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는 일이 나만 겪었던 일은 아니리라. 그랬다. 꿈이 많았다.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꿈도 꾸었다. 어쩌랴! 모두 개꿈이었던 것을.

 

이제 환갑줄이지만 철이 아니 든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스무 살 그 언저리쯤이었다. 나는 <한>이라는 말에 깊이 빠져 들었다. 한,  ,   깊이 천착(穿鑿)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마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동무처럼 내 삶의 그림자가 되어 쫓아 다녔다.  

 

신분이 미국시민으로 변신하며 <한>은 더욱 나를 따라 다녔다.

내 자식놈들 특별히 아들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놈의 <한> 때문이다. 딸아이의 이름 “한나”는 그런대로 넘어 가겠는데 아들 녀석의 이름 “한울”은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들녀석의 이름은 이제 <한 Han>이 되어 제 친구들이 다 그렇게 부른다. 감사한 일은 녀석의 맘 씀씀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가 크다.

 

이 나이에 다시 꿈을 꾼다 하였거니와 그 꿈은 다시 <한>에서 시작한다.

더러는 나더러 장사꾼이라고 말하지만 애시당초 장사와는 연()이 먼 사람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민을 가꾸는 우리 한인 동포들을 위하여”라는 내 말은 순수하다. 내 거울에 비추어 그렇다는 말이다. 그 맘으로 새롭게 꾸어 보는 꿈.

 

늘 그 꿈으로 산다.

원컨대 기도해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