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이 곧 힘

이곳에 정착한 이래 올 겨울 같은 날씨는 처음인 듯 합니다.  손님들 중   24년 전 겨울이  꼭 이랬었다고 하는 분도 계셨지만, 제 기억으로는 그땐 눈은 많이 내렸었지만  이렇게 춥지는 않았던 것 같답니다. 무릇 기억이란 자기 중심적이만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올들어 빤작한 날들이 하루도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랍니다. 눈과 진눈깨비,  추위가 번갈아  가며 되돌이표에 맞추어 계속되는 기분이랍니다. 어제는 온종일 눈이 내리더니 오늘 밤에는 진눈깨비와  얼음비가 내린다는 예보랍니다. 

제가 사는 곳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북부와 중북부를 비롯한 전역이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는 겨울인 듯 합니다. 

이상 기후로 인해 전체적인 국가 경제가 침체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대부분 한인 이민 일세들의 주종목들인 구멍가게들(mom & pop store)의 고충이 만만치 않은 시절이랍니다. 여기 저기서 ‘힘들다’는 소리가 넘쳐난답니다. 

저라고 별 수 있겠어요. 가게 문 늦게 열고 일찍 닫고, 아니면 아예 문을 열지 못한 날들도 있는 것을요. 

이러 땐 쉬어 가는 게 최고라고 생각입니다.  닦고 쓸고, 요리도 해보고… 무엇보다 글 한 줄 읽는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이지요. 

<숲은 가장 혹독한 추위 속에서 거칠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부드러워진다. 나무가 벌거벗는 것은 실은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의 몸짓이다.  그 자연의 모든 소리와 모습이야말로 내 정신에는 만병통치약. 신도 이보다는 건강하지 않으리라.> – 신이 만든 작품이 신보다 건강하다는 이 자연주의자의 목소리는 바로 헨리 데이빗 쏘로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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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즐겨 읽는 글들 가운데 하나지요. 일상의 복잡한 것들이 엉긴 실타래 같을 때 뽑아 읽는 책이지요. 마음이 아주 편해 지거든요. 

그의 또 다른 글 하나1850년 저널지에 실렸던 글이랍니다. 

<당신이 언젠가 좋다고 고백했던 일을 좀 더 해보라. 이 사회와 가장 올바른 판관이 당신에게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당신 자신을 개혁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던 그 일을 하라. 

아무 이유없이 자신에 대한 만족과 불만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아두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내게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그 나무를 키우라. 당신의 토양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그 나무를.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집착하지 말라. 지나간 모든 것은 실패이며 또한 성공이다. 만약 과거가 현재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다. 

아무리 희귀한 금시계라해도 당신보다 더 값지고 휼륭한 사고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당신이 어떤 시험인들 통과하지 못하겠는가? 생각의 원천이 다시 솟아흐르지 않겠는가? 

한번쯤 처벌도 받아보라. 자신감을 가져라. 경건해지려고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그런다고 고마워할 사람도 없으니. 

만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해보라. 실험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저질러보라. 지금이 당신의 기회이다. 

의심을 품지말라. 그런 것은 여인숙으로나 보내버려라.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말라. 그럴 필요가 없다. 

신문을 읽지말라. 생각에 잠길 기회를 많이 만들라. 할 수 있는대로 우울해 보고 그 결과를 기록하라. 운명을 즐겁게 껴안으라. 

건강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은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일에만 전력투구하라. 속으로 이미 죽었다는 것을당신 자신말고 또 누가 알겠는가? 

쓸데없이 겁내서 멈추지 말라. 보다 무서운 일들이 계속해서 닥칠 것이다. 일찍이 오지 않았던 그런 일들이. 인간은 두려움으로 죽고 자신감에 차면 산다. 

야채들처럼 그저 유순해지기만 하지 말라.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라. ‘인간의 불복종과 그 열매의 달콤함이여!’ 

남들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데 몰두하지 말라. 당신말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그밖의 것은 과감히 생략해 버려라.> 

-도서출판 이레. <소로우의 노래> 헨리 데이빗 쏘로우. 강은교 옮기고 엮은 글에서- 

이즈음 힘들다고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이지요. 살아있음은 늘 힘이고 고귀한 것이니까요.

1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미스터 허그

그의 풀 네임은”Vance A. Funk, III “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Mayor Funk”라고 불리운답니다. 누구냐고요? 제 가게 단골 손님이랍니다. 

본래 직업은 변호사인데 제 가게가 위치한 Newark시의 시장으로 2004년부터 지난 해 10월까지 일했던 양반이랍니다. 

올해 만 일흔 넷인 펑크씨는 몇 해 전 스트록이 와서 입이 돌아가고 반신을 제대로 못쓰는 병마 속에서도 끈질기게 투병하며 시정을 이끌어 온 의지의 미국인이랍니다. 

이젠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지난 해 시정살림을 꾸려 가기가 너무 벅찬 나머지  시장직을 스스로 내 놓았답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Mr. Hug랍니다. 만나는 이들마다 꼭 껴안아 주는 그의 모습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제 가게에 오면 저와 제 아내를 품어주는 일이 우선입니다. 다른 손님들이 아는 눈길만 보내도 먼저 안아주는 일부터 한답니다. 

그런 Funk씨가 오늘 제 가게에 들어 오셔서 푸른색 주단 상자를 내미셨답니다. “시장 일을 그만 둔 이후 이런 저런 짐들을 정리하다가 이걸 보면서 너희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들고 왔다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면서 잇는 말이 “너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설명해 주렴”하는 것이었습니다. 

푸른색 주단상자를 여니 상패처럼 만든 패였는데,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에서 만든 국보 제285호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본떠 만든 패였습니다. 

그 패를 Funk씨에게 보낸 당시 울산시장의 편지도 상자 안에 있었답니다. 

상자 안에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설명서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거기 붙은 제목이 “한민족 대표 유산”이라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오늘 처음 들어 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였답니다. 

부끄러움과 함께 한국 전통과 역사가 담긴 물건을 보며 제 가게를 생각해 주신 Mr. Hug, 언제나 제게 시장인 Funk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도 오늘 찾아 읽어 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기사 하나 소개 드립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99859.html

새 방주(方舟 New Ark)

눈이 내리고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탓도 있거니와 오늘은 각급학교와 관공서들이 쉬는 Martin Luther King Day인지라 가게 드나드는 손님이 뜸합니다. 

몇 분 손님들이 제 아버님과 한국 역사에 대해 묻고, 자신들의 부모 이야기를 꺼내고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하루랍니다. 손님들과의 화제가 그리로 흐른 까닭은 어제 제 가게 손님들께 보낸 이메일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아래는 어제 제가 손님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한글 번역과 영문 편지입니다. 이곳을 방문해 주시는 당신과도 함께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오늘은 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제 아버님은 1926년생이고 어머님은 1927년생이십니다. 1946년에 결혼하신 두 분은 올해 67주년 결혼기념을 맞이합니다. 두 분은 Pike Creek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계시답니다. 

제 아버님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적부터 가난과 함께 고생을 많이 하셨답니다. 

그러다 17살 때 일본의 탄광노동자로 끌려갔다가 그 곳을 탈출하여 일본에서 떠돌던 중인 1945년 이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갔답니다. 

독학으로 영어를 깨우치신 후 서울에 주둔하던 미군부대에서 잠시 일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이 되어 참전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다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는 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으로 제대를 하게 되었답니다. 

이후 아주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며 저의 형제들 1남 3녀를 다 교육시킨 후인 1984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당시 Newark에 있는 인쇄소(후에 Glasgow로 이전) 공원으로 취직이 되어 일하시다가 은퇴를 하셨답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찌보면 크게 감사할 것도 없는 당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정말 감사하고 기뻣던 삶”이었다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셨답니다. 

A Veteran’s Living Stories라는 제목인데 한국에서 한국말로 출판된 것입니다. 한국말 제목은 “바람에 날려 멀리퍼지는 민들레처럼”이라고 지었답니다. 

출판사에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대답이었답니다.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입니다.” 

1991년 제가 K&L Cleaners를 시작할 때 제 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너의 새 방주(方舟 New Ark)이다. 평안한 마음으로 네 일을 즐기며 살아라.” 그 때에 태어난 제 딸아이가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되었습니다.(***제 가게가 있는 동네 이름이 Newark이랍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넘치는 감사들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한주간 당신이 보내는 시간들이 늘 New Ark이 되시길 빕니다.

parents

Today I would like tell you about my father. My father was born in 1926 and my mother in 1927. This year they will have their sixty-seventh anniversary as they got married in 1946. They are living in an apartment in Pike Creek now. 

My father was born as the son of a poor peasant, when Korea wa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Four years in an elementary school was all the education which he ever got. As his mother passed away when he was very young, he grew up suffering from all kinds of hardships and abject pov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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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he was seventeen years old, he was forced to be taken to Japan as a coal miner. After he escaped from a mine, he drifted from place to place in Japan. Then, as Japan surrendered in 1945, he could come back to Korea which had become independent from Japan. 

After he learned English by teaching himself, he worked for the American military which was stationed in Seoul at that time.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he joined the Korean army. During the war, he was wounded by shrapnel from a hand grenade and was discharged honorably as a wounded soldier. 

Then, he ran a small print shop and reared his children, three daughters and one son, me. In 1984, after my sisters and I finished school, he moved to America. 

In America, he worked at a print shop which was located in Newark at that time (it has since moved to Glasgow) and retired later. 

My father, whose life can hardly be happy and grateful to my eyes, looked back over the past years of his life and published a book in which he declares his life as “a really grateful and joyful life.” 

Its title is “A Veteran’s Living Stories” and is published in Korea. Its Korean title is named “Bah-rahm-e Nahlyu Muhli Pu-ji-neun Min-deul-e Churuhm (Like a Dandelion Spreading its Seeds Widely with the Wind).” 

The publisher asked my father: “What made you write this book?” My father answered, “I want to express joy and gratitude for my life.” 

I still remember what my father told me when I started K&L Cleaners in 1991. He said, “From now on, this is your New Ark. Enjoy your work and live your life with a peaceful mind.” And my daughter, who was born around that time, is a senior in college now. 

I feel overflowing gratitude which I’m blessed to enjoy. 

I wish that every moment you spend will always become a New Ark this week and beyond.

된 사내

나흘 전

미처 구순(九旬)을 못 채우고 떠난

어머니가

못내 아팟던

이제 곧 칠순(七旬)이 될 사내가 남긴 말.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제 육순(六旬)이 된  내가 들으며  하는 말.

“참 된 사내구먼!”

시골영감

딸아이 서울 보내놓고 걱정 끊이지 않는 시골영감이 되었답니다. 영락없이 그짝이 되었답니다. 한때는 저도 참 모던(modern)?한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역시 제 생각일 뿐이겠지만 말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인턴쉽을 하노라고 뉴욕 맨하턴에 가있는 딸아이를 보고 돌아온 주일 밤입니다. 이젠 어쩔수 없는 촌로(村老)가 되었습니다. 

저는 가로등 하나없는 이 시골이 좋은데, 딸아이는 뉴욕이 좋답니다. 아이에 대한 제 걱정이 정말 쓸데없는 것이었음에 대해 감사하는 밤이랍니다. 

타임 스퀘어 건널목에서 만난 느닷없는 퍼레이드는 무슬림들의 종교행사였는데, 이만하면 미국이 아직은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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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벌어진 비보이 춤꾼들의 놀이를 보면서는 대도시의 애환과 잔재미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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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바켓이라는 빵집에는 제 딸아이 또래 아이들이 연신 쉬지 않고 드나들었는데 촌로인 제가 앉아있기가 참 부담스러웠답니다. 

역시 제게 딱 맞는 자리는 부글부글 찌게전골에 모처럼 참이슬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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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의 대화도 빠리 바켓보다는 찌게전골 자리에서 훨씬 부드러웠던 생각을 해보면 “아, 저는 이제 정말 시골 노인이랍니다.” 

아 참, 타임스퀘어 지하에서 돈통을 앞에놓고 마임으로 동상노릇을 하고 있던 이가 정말 작은 적선에 모델을 마다치 않아 딸아이와 아내가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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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딸아이를 보내고 맨하턴에 뜬 달을 보며 시골로 다시 돌아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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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저는 이 시골이 좋답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교회에 속한 작은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송년회를 겸한 모임이었습니다. 제 엉덩이가 좀 가벼운 탓에 어느 모임에 가던 진득히 앉아있는 편이 못됩니다. 제 아내의 한결같은 불만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오늘은 거의 다섯시간 넘는 시간을, 그것도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도 않고 쏟아내며 앉아있었답니다. 편하고 즐거웠다는 말씀입지요. 

집으로 돌아와 이즈음 일상 가운데 하나인 “당신의 천국” 이야기를 쓰려다 접고,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대자보

이즈음 한국 대학가에 나붙은 대자보 하나가 뉴스의 촛점이 된 소식을 듣고 보고 있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대자보입니다. 늦게 본 제 딸 아이가 대학 졸업반이랍니다. 아이들 말에 귀 솔깃할 나이는 이미 지났답니다. 제가 그 뉴스를 보고 대자보의 내용을 찾아 읽으며 든 생각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사실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은 우리 세대에겐 아주 낯익고 입에 배인 인사말이랍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자란 세대랍니다. 저도 어느새 육십줄에 걸친 세대가 되었습니다만,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땐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는 6.25 전쟁 때 생긴 인사법입니다. 남쪽 군대, 북쪽 군대가 오르락 내리락 밀고 밀리던 일들이 계속 되는 전쟁을 치루면서 밤새 목숨을 잃는 일들이 다반사였던 일상 속에서 사람들 입에 배이게 된 인사말이랍니다. 

50년대 말, 60대 초까지 제가 어릴 때 입에 붙어있던 한국인들의 인사말이었답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또 다른 입에 달고 살던 이삿말이 “진지 잡수셨어요?”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세월에 생긴 인삿말입니다. 끼니를 때우는 일이 모든 일에 최우선이던 시절에 생긴 말이었겠지요. 

적어도 우리 아이들 입에서는 이런 인삿말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살아왔겠지요. 너나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젠 그런 인삿말들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살고 있지 않으니 잘은 모릅니다만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든지, “진지 잡수셨어요?”라는 인사는 거의 하지 않거니와 설혹 하더라도 옛날과는 그 뜻이 다르게 사용되는 세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던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는 물음이 공감을 얻는 사회를 바라보며, 그 물음에 답을 할 사람들은 젊은이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인사법을 없애려고 애써온 우리 세대들 곧  1950년대생들이 대답을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제 블로그의 이름이 “1950대생들을 위하여”랍니다. 

2013년 겨울, 성탄절 즈음에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던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의 핵심은 “당신은 이웃의 아픔에 저려오는 맘 하나 가지고 계십니까?”라는 물음이랍니다. 

그걸 아이들, 바로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 우리 세대들을 향한 물음이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들어 줄 수 있었던 제가 속한 교회의 작은 모임에게도 감사하며…

길 – 쉬어가는 길

오늘 하루는 “하나님 나라 가는 길” 이야기 잠시 쉬어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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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가을 구경을 갔었답니다,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주립공원이었답니다.

사진 몇 장을 찍었는데,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시 하나 읊을 분량도 안되었답니다.

신경림시인의 길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래의 고민들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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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보내기 아주 좋은 날이었지요. 

햇살은 조금 따갑게 느껴졌지만 이따금 장미 향기를 품고 건듯 부는 바람이 그 따가움을 실어가는 오후였답니다. 

야외결혼식에 안성맞춤인 주일 오후를 택한 신랑, 신부 애들의 안목이 대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랜 이 동네 벗이 아들을 장가 보내는 날이었답니다. 

모처럼 만난 얼굴들과 함께 새 가정을 꾸미는 아이들과 두 아이들을 키운 가정을 축복하는 마음들을 나누며 즐거운 주일 오후 한 때를 보냈답니다. 

모든 모임이 그렇듯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지요. 

이제 곧 맞이 하게 될 자기 아이들의 결혼 이야기, 부모 또는부 나 모의 건강 이야기, 그리고 곧 맞이 할 은퇴 이야기 등등. 

무릇 사는 맛이 사람마다 다를 일이지만 또래의 고민들을 또래에 맞게 하고 사는 삶도 축복 받은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주일 밤이랍니다.

1과 99 사이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간에 100% 딱 맞아 떨어질 수 있을까요?  아마 100% 없을겝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건 어느 한쪽의 힘이 100%일 경우이겠지요. 그러니까 생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쪽의 힘이 0여서 100%의 힘을 갖고 있는 쪽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경우일 뿐이겠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무릇 사람사이의 의견이라는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걸 어느만큼 인정하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성장도를 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SkyEarthMan

0과 100으로 나누이는 사회란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씀입지요. 

그런데 이런 사회를 흔히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뉴스”같답니다. 

특히 종교, 정치, 남북 뉴스 에서 말입니다. 

무릇 0과 100으로 나누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답니다. 

다 썩은듯한 우리나라(미국)도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랍니다. 

우리나라(미국) 그러니 “뭐, 이런 놈이 있나?”하는 분들도 계실겝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광선선생(대단한 양반 아니고요. 그냥 저처럼 세탁소하신답니다.)께서 가르쳐 주신 거랍니다. 

“내가 사는 곳은 ‘우리 집’입니다. 내가 밤이면 늘 편히 잠을 자는 곳입니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 동네’입니다. 내 이웃들이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지요. 바로 미국입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계 이민들이 여기서 헷갈립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자! 이쯤.

열린 맘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무릇 열린 맘의 첫 걸음은 0과 100이 아니라 1과 99 사이에서 서로가 맘껏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아닐까요?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round table모처럼 반가운 선후배들과 저녁을 함께 했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이해의 폭이 엇비슷한 이들이랍니다.

필라델피아, 남부 뉴저지, 델라웨어 등에 사는 지리상으로는 가까운 이웃들입니다만 일년에 한 두어차례 만나면 자주 보는 폭이랍니다. 

만나면 나누는 이야기의 단골메뉴들은 건강이야기, 음식이야기, 우리나라 이야기(미국), 조국 이야기(남, 북), 평화, 민족, 통일 등등 자잘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거대 담론까지로 이어진답니다. 

그리고 모여 작은 계를 함께 한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계의 형태랍니다.

일반적으로 계란 먼저 돈을 탄 이들이 이자를 내고 나중에 타는 이들은 이자를 받고하는 구조이지만 우리들의 계는 이자는 내지만 이자돈은 받지 않는 계랍니다. 

1번 계돈을 받는 사람도 마지막 계돈을 받는 사람도 받는 돈은 똑같답니다. 다만 먼저 타면 이자를 순서에 맞추어 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자를 모아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쓰는 것이지요. 

제법 새 일을 할 만한 돈이 모여 비영리 단체로 등록도 마치었고, 오늘 모임을 통해 한걸음 썩 나아갔답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가 한마디랍니다.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우리들을 이해해 준다면… 우리들의 일이 헛되지 않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