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종일 추적이는 겨울비로 손님 발길 뚝 그친 하루도 저문다. 그 하루 쫓아 한 해도 따라 저물 즈음 가로등불 번쩍, 으스스하던 스산함 몰아낸다.
등불 아래 금가루 되어 내리는 빗방울들. 아무렴, 저 작은 빛조차 세상을 바꾸거늘.
새해 아침 기다리는… 아직은 좋은 나이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
온 종일 추적이는 겨울비로 손님 발길 뚝 그친 하루도 저문다. 그 하루 쫓아 한 해도 따라 저물 즈음 가로등불 번쩍, 으스스하던 스산함 몰아낸다.
등불 아래 금가루 되어 내리는 빗방울들. 아무렴, 저 작은 빛조차 세상을 바꾸거늘.
새해 아침 기다리는… 아직은 좋은 나이다.



성탄 연휴 책 한 권 읽으며 보냈다.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이 쓴 장편소설 ‘동조자(The Sympathizer)’다.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고, 베트남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도 없다. 다만 베트남 통일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어서 지난 세기 베트남이 겪은 세월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법 읽었다 할 수도 있다. 특히 월남이라고 부르던 남베트남이 망한 1975년 4월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 무렵 아직 열혈청년이었던 나는 베트남식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 있었다. 보통 징집된 병력들은 그곳에서 사나흘쯤 대기하다가 피복과 장비들을 수령한 후 훈련소로 가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그 곳에서 꽉찬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입대할 때 입었던 옷을 한 달 동안 입고 있었으니 그 옷이 오죽했으랴!. 나중에 그 옷을 받아든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단다. 나는 그곳에서 몇 차례 보안사의 심문을 받았었다. 하여 그 사월과 오월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즈음 내 가게와 인접한 네일 샵의 주인인 리와 종업원 피터와는 가깝게 인사하며 지낸다. 모두 사십 대 베트남계 미국인들이다. 내가 나이들었다고 ‘썰, 썰(Sir)’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그냥 ‘영’이라고 하라고 했더니 요사이는 ‘미스터 김’으로 고정 되었다.
여기까지가 베트남 하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전부다.
소설 ‘동조자’는 분명 베트남과 베트남인들의 이야기인데, 소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은 내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 나아가 내 아이들 세대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인 신부(神父)를 아버지로 십대 초반 어린 나이 베트남 여인(?)을 엄마로 하여 태어난 주인공 ‘나’는 이야기 내내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 두 얼굴의 남자, 두 마음의 남자로.
이야기의 무대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또는 베트남 통일 시점부터 1979년 사이 베트남과 미국, 필리핀, 태국 등이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 않게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다만 시점은 뒤죽박죽인 채로. 마치 1920년 이후 오늘까지 어쩌면 우리들의 미래까지 겹쳐지는 한반도를 무대로 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 기억하고픈 대목들 중 몇 개.
<비극은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었고, 이것은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 중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였습니다.>
<나는 흰색이 단순히 순수나 순결과 관련된 색상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도와 죽음의 표시이기고 했습니다.>
<심문은 정신적인 것이 맨 먼저이고, 육체적인 것은 그 다음이야. 여러분은 신체의 멍이나 어떤 흔적을 남길 필요조차 없어. 언뜻 납득이 잘 안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안 그래? 하지만 사실이야. 우리는 실험실에서 그걸 입증하느라 지금껏 수백만 달러를 썼어.> – CIA 미국 고문관의 말
<그들은 나한테는 예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예뻤습니다.>
<내가 그의 아픈 곳을, 양심이라는 명치를 쳤고, 그곳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상처 입기 쉬운 부분이었으니까요. 이상주의자를 무력하게 만들기는 쉽습니다. 이상주의자에게 자신이 선택한 특별한 전투의 최전방에 가 있지 않은 이유를 묻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대개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방식이 똑같지 않은데도, 우리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진짜로 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걸고, 이 한가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몇 해 전 먼저 세상 뜨신 장광선선생을 떠올리게 한 대목.
<여러분께 제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죽기 전에 내가 태어난 땅을 보는 것, 다시 한번 떠이닌(서울 아님 내 장모의 고향 정주, 그도 아님 장선생의 고향 장흥)에 있는 우리 집안 정원의 나무에서 잘 익은 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조부모님의 무덤에서 향을 피울 수 있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토록 아름다운 우리 나라가 마침내 평온해지고 총성이 환호성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될 때 온 나라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전쟁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책장을 덮고 바라 본 하늘은 2023년 성탄을 안고 저물고 있었다.
자그마치 2023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더 가야할까?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이쯤 왈 예수쟁이로서 자답(自答).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이어가는 우리들을’ 믿기에.
또 다시 희망찬 새해를!

동지(冬至)란다. 팥죽 생각나서 찾아보니 아이 낳은 산모에게 좋은 음식이란다. 내친 김에 팥죽을 끓인다. 얼굴 까만 내 며늘아이가 가장 확실하고 또렷하게 하는 한국말 – ‘아버님’. 그 이쁜 며늘아이 생각하며 팥죽을 끓인다.
새알심 만들다 연탄 아궁이에서 팥죽 끓이시며 새알심 만드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고 돌기도 한다.
지난 일요일에 변해가는 세상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사는 동지(同志)들인 희망재단 벗들과 함께 조촐한 시간을 함께 했었다.
헤어질 무렵 이사장을 맡고 있는 벗이 밭에서 산채로(?) 뽑아 온 무 한 꾸러미 씩을 선사했다. 무가 어찌 그리 이쁘던지!
어제 소금에 절여 두었던 무로 동치미도 담구었다.
밤이 긴 동지(冬至 )에는 봄을 꿈꾸고, 뜨거운 여름을 알리는 하지(夏至)에는 넉넉한 가을 바라며 함께 살아가는 동지(同志)들이 있어 내게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
비록 팥죽 한 그릇이지만 며늘아이에게 영양식이 되었으면, 아직도 얼떨떨한 모습인 아들녀석에겐 정신 버쩍 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 이즈음 소식 주고 받으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고 있는 멀리 사는 옛 벗들에게 팥죽 한 그릇, 동치미 한 사발 보다 더 큰 사랑을 보내며.
2023. 동지에


겨울비 내리면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얘야, 얼마나 감사하냐! 이게 눈이 아닌게. 눈 오면 그저 걱정 아니냐? 너희들 장사 걱정, 미끄러운 길 운전 걱정. 그저 이 비가 감사다.”
연 이틀 비가 제법 내렸다. 쏟아지는 빗길에 필라 오가는 길, 아직 나는 괜찮다. 걱정은 어제 갓난 아이 안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갈 아들 며느리 걱정이었다. 참 운도 좋아라. 퇴원 한 시간 전쯤 비가 뚝 그쳤다. 그래 해본 어머니 흉내. “얘들아, 얼마나 감사하냐?”
오늘 이른 아침, 서울 사는 어릴 적 친구가 안부를 물었다. “너 사는 곳 인근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괜찮냐?”. 고마운 마음 우스개로 답했다. “비는 제법 왔지만, 숨 잘 쉬고 있다.”고.
오후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병원 침대에 한 시간 반 여 누워 있었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MRI 테스트를 해 보는 게 좋겠다’하여 예약해 둔 검사였다.
‘숨 들이 쉬고, 멈추고…내쉬고…’ 반복되는 명령에 따르며 누워 있던 긴 시간 동안 간만에 숨쉬기 명상을 하며 스쳐 지나간 생각 하나.
한 동안 집에서 가까운 퀘이커 모임에 함께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땐 내게 딱 안성맞춤인 종교모임 이었다. 번잡스럽지 않은 예배의식과 친교, 명상을 통해 내 숨소리 들으며 신을 찾는 시간들,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 그런 것들이 참 좋았었다.
삶에 단순함을 추구하며 가족을 중시하고 비폭력과 평화를 갈구하되 그 모든 행위를 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나가자는 그 모임에 한껏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하며 따르던 명령. ‘숨 들이 쉬고, 멈추고…내쉬고…’
그래 그저 감사다. 아직은 누구의 명령 받지 않고 내가 느낄 틈도 없이 스스로 쉬어지는 숨을 누리고 산다는 감사다. 숨을 쉬는 감사다.
게다가 가족들이 있고, 아직은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고. 숨쉼의 기쁨을 누리고 있고.
바야흐로 가히 은총의 계절이다.
MRI 검사 통에 누워 잠시 도튼 흉내 내던 날.
숨쉼의 감사를 일깨워 준 내 오랜 친구에게.
아내는 미역국을, 나는 곰국을 끓인다.
아내는 장모님께 배운 솜씨로, 나는 어머니 흉내로. 어머니와 장모가 우리 내외에게 쏟았던 정성과 기도 위에 우리들의 정성과 기도를 더해 끓인다.
새 생명 품어 낳는 수고에 지친 며늘 아이와, 반쯤 얼이 빠져 있는 내 아들과 우리 내외가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새로움으로 다가 온 새 아기를 위하여.
아프리칸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신비하게 우리 곁에 손녀딸이 온 날.
*** 선물 받은 모자와 머리띠를 아기가 쓰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어머니와 딸. 한국전쟁 통에 가족의 반을 잃은 어머니는 기지촌의 아픈 기억을 안고 백인 남편의 고향 미국 서부 아주 보수적인 시골 마을로 이민을 온다. 아버지가 다른 오빠와 함께 한국에서 ‘튀기’로 놀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딸은 어머니를 따라 온 미국 땅에서 ‘노랑이 혼혈’ 이민자 취급을 받고 자란다. 오빠는 그래도 ‘한국에서 받은 차별 보다 여기(미국)가 낫다’는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꿋꿋하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던 어머니에게 정신병(조현병 調絃病, Schizophrenia)이 찾아온다. 어머니가 정신줄을 놓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을 돌아보는 딸의 기록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나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이 순간을 내 한(恨)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된다. 한이란 “불의에 대한 풀리지 않는 억울함”이자 “맺혀서 풀리지 않는(…) 멍울”, “응어리진 비통함을 가리키는 번역 불가능한 한국어다. 한은 지속되는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 그것이 풀리지 않는 상태를 지칭할 뿐 아니라, 그 풀이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딸은 어머니의 죽음을 세 번 맞는다. 어머니가 정신병이 들었을 때,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마지막 어머니가 육체적 죽음을 맞았을 때이다.
딸은 어머니의 첫번 째와 두번 째 죽음을 사회적 죽음이라고 이르면서 그 죽음의 원인를 쫓아간다. 그 이야기를 담은 책 <전쟁 같은 맛>은 한(恨)을 곱씹듯 아리고 쓰리다.
딸이 그 죽음의 원인을 쫓다가 토로하는 단말마(斷末魔)이다. “진실은 너무나도 복잡했다.”고.
어머니와 딸의 교감 통로는 음식 만들기와 식탁이다. 4부 1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새로운 부가 시작될 때마다 그 부에서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대신하는 인용문을 소개한다.
제4부를 여는 인용문 중 일부이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아이를 낳았고, 부모를 묻을 준비를 했다. 이 식탁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노래하고 슬픔으로 노래한다. 고통과 후회의 기도를 올린다. 감사를 드린다. 어쩌면 세상은 식탁에서 끝날는지도, 우리가 울고 웃으며 마지막 달콤한 한 조각을 베어 무는 사이에.>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내 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 여러 번 찔금 흘렸다. 삼팔선을 넘은 것은 달랑 오누이 뿐이었다. 전쟁이 나자 오빠는 고향을 찾아 간다며 어린 누이를 지인에게 맡기고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감감무소식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린 누이를 맡겨 놓은 곳은 접경지역이었던 기지촌 인근. 천만다행으로 어린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이웃 청년 어머니 눈에 들어 신랑 만나 해로하셨던 내 장인 장모.
아직 다 지우진 못한 우리 내외와 아이들의 이민생활 응어리, 음식 대접하고 나눠 주시길 즐겨하셨던 어머니 역시 당신이 살아계심을 증명코자하는 몸짓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이즈음의 아버지 식탁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이 겹쳐.
딸이자 책의 저자인 그레이스 조가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묻는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개념인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게 무슨 뜻인지 기억나는 사람?’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설명.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란 무력으로가 아니라 문화적 신념이나 실천으로 규범을 규제하도록 설계된 제도를 말해요. 경찰이나 군대 같은 ‘국가기구’는 무력으로 사회를 규제하죠. 반면 언론이나 학교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는 생각을 통해 규제해요.”
양공주, 국제결혼자, 이민자, 정신병자 등등 규제되어 버린 생각의 틀에서 정형화되어 따돌림 당하는 예들일 것이다.
이쯤 다시 쓸모있음에 대한 생각들.
그저 내가 사는 곳에서 오늘 부딪치는 일들에서, 어떤 분야에서 건 간에 내 생각의 틀을 옥죄어 나를 통제하려는 힘에 대항하고 항거하고 싸워 이겨 나가는 일, 바로 쓸모 있는 일 아닐까?
내 세탁소에서
몇 해 전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 나오지 않아 이젠 눈물샘 말랐구나 했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주말 사흘 눈물 질금질금 흘리며 보냈다.
영화 두 편과 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다. 기자다운 기자(記者) 이상호가 만든 영화 전투왕, 이즈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과 그레이스 조가 쓰고 주혜연이 번역한 책 <전쟁 같은 맛>들이다.

영화 전투왕은 기자 이상호가 반란 수괴 전두환을 서른 해 넘게 쫓아다닌 기록과 함께 ‘왜?’ 그가 그리 행동했는가를 그린 영화이다. 이상호가 쫓은 것은 전두환 개인이 아니었다. 전두환이라고 일컬어지는 하나의 큰 세력의 본색을 드러내고자 하는 쫓음이었다. 영화 속 이상호나 현실의 이상호나 오늘도 여전히 큰 벽에 가로막혀 마치 그의 기자 노릇이 허망한 듯 여길 수도 있겠다.
영화 속에서 이상호는 연세대 정문 앞에 놓인 이한열 표석을 설명한 뒤,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몇 발작 뒤 당시 그가 도망치듯 서 있던 자리를 지적하며 ‘여기엔 도망자의 표석을 세워야…’라며 아픈 마음을 표한다.
평생 기자다운 기자로 살아가는 정말 쓸모 있는 기자 이상호의 시작은 이한열 죽음의 뜻을 품기 시작한 때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자칫 허망할 듯이 이어져 온 그의 몸짓들이 정말 쓸모 있는, 기록될만한 기자 정신이었음을 기릴 날이 곧 올 수 있기를…
다른 시간, 같은 장소에 서 있었던 추억이 겹쳐 몇 차례 눈물 찔금.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

왜 필라 나들이만 하면 날이 이리 궂은 지! 영화를 보고 내려오는 길,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져 자꾸 나이 탓을 하며 내려왔다.
영화는 영화일 뿐.
지나치게 전두광과 이태신이라는 인물 중심으로 흐른 영화적 상상은 자칫 당시 쿠데타 세력과 동조세력, 그리고 눈치 빠르게 권력에 기생하는 집단을 묘사하는 데는 조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신의 마지막 대사. “넌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이 영화를 만든 이가 뱉고 싶은 말 아니었을까?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규정!
눈물 흘릴 구석 없는 영화인데 두 차례 찔금 찔금.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그리고 소설 <전쟁 같은 맛>

이 이야기는 길게 써야 마땅하겠다만 단지 “쓸모”에 대하여.
저자 그레이스 조의 어머니가 삶이 무너져 가는 순간에 던진 “이젠 쓸모없다.”라는 한 마디를 되새기는 대목이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무엇이 엄마를 쓸모 없다고 느끼게 했는지. 그 원인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줄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사람이 아닌 사물 취급을 받으며, 엄마는 당신 삶이 쓸모 없다는 메시지에 둘러싸여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건 주변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심지어 당신의 가족이 보낸 메시지였다. 엄마는 한국을 탈출했지만 미국 사회에서도 당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쓸모없다’던 엄마를 통해 ‘쓸모 있는 삶’에 대한 학구적 노력을 하게 된 주인공 이야기에 시간과 공간을 많이 겹쳐 살아온 내 생각으로 여러 번 찔금 거렸다.
눈 내리면 덜컥 앞서는 걱정들, 눈치우는 일과 미끄러운 거리 운전. 지난 해 보다 걱정의 크기가 좀 더 커진 듯.
눈 내리는 날에 약속한 사람도 없고, 만나야 할 사람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고, 그리운 사람도 없고
문득 바람 들어 먼 길 나설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 하여도 첫 눈인 것을.
새참으로 라면 끓여 아내와 뜨거운 국물 후루룩
‘아휴! 시원타!’





필라델피아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상영된단다. 이 소식을 들은 필라민주동포 모임 벗들이 단체 관람을 하자고 이른바 번개모임을 제안했다. 그 소리 듣고 더듬어 보는 그 시절 옛 이야기다.
내 기억에는 박정희 죽음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보다, 이른바 국장이라고 불렀던 그의 장례식 이 있던 날 그해 11월 3일 신문로 사거리 모습이 깊게 각인되어 남아있다.
당시 나는 영세하다는 말조차 호사스러울 만한 아주 작은 출판사를 하면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만, 나는 그저 백수였던 시절이라고 말하곤 한다.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진 후 나는 제적을 당해 쉬고 있었던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11월 3일,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웃기는 당시 모습이지만 그만큼 유신독재가 얼마나 허약한 지경에 이르렀었냐는 것을 알려주는 한 장면이 되지 않을까? 아직 이십 대 중반 나이였던 내게 툭하면 달라붙어 다니던 담당형사가 있었다. 나이 스물 대여섯인 내가 알면 뭘 알았겠으며 하면 또 무슨 일을 꾸몄겠나? 모두 독재의 허약함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날 이른 아침부터 집을 찾아 온 형사가 ‘오늘 하루는 집에 있어야만 한다’며 내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그를 설득했었다. ‘대통령이 떠나시는 역사적 날인데 함께 구경 한번 갑시다. 내가 뭐 형님 따돌리고 도망을 가겠소. 누굴 만나기나 하겠소. 그냥 조용히 함께 장례 구경이나 하고 옵시다. 같이 집에 있었다고 보고하면 끝 아니오? 언제 이런 구경 한번 하겠소.’
그렇게 나섰던 신문로 사거리 풍경에 나는 절망했었다. 내 마음 속은 축제의 날이었건만 거리를 가득 메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양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로만 들었던 고종황제 국장을 보는 듯했다.
내게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삼월, 복교가 된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 학교 영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선생은 선생으로서 모두 제 자리에서 제 할 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마지막 남은 일년 대학생활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돌아간 학교였다.
3월 하순부터 학교는 들끓고 있었다. 4월 사북 탄광 노동항쟁 소식으로 그 열기는 더해갔다. 5월 들어 이런저런 흉흉한 소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5월 13일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광장 회군으로 알려진 그 날부터 나는 도망자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온통 사기질이었다.
돌이켜 볼수록 내가 한 일이라곤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성명서 몇 번 쓴 일, 후배들 앞에서 몇 차례 내 의견 표현을 한 일이 고작이었다. 무슨 투철한 이념으로 무장한 혁명투사 또는 새빨갛게 물든 빨갱이는 커녕 그저 좋은 세상,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꿈꾸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이십 대 청춘이었다. 나이 들어 이제 그 세상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 이젠 ‘내가 만나는 사람들 만’이라도 하는 지경이 되었다만…..
그리고 6월 어느 날, 아주 건장한 몸집의 사내 예닐곱명이 내 작은 몸을 까만 세단차에 꾸겨 넣었다. 그렇게 끌려 간 곳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백열등이 환한 밀폐된 조사실이었다. 건장한 사내 셋에게 완전히 발가 벗겨진 내게 한 사내가 권총으로 내 왼쪽 가슴을 툭툭 겨누며 말했다. ‘너 같은 놈 하나 죽여 파묻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 세상이야!’ 그렇게 치도곤이 시작됐었다.
내 기억 속 그해 서울의 봄이다.
아직도 나는 무지개가 뜨면 홀리곤 한다. 좋은 세상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생각으로.
전두환과 그 무리들 보다 못한 윤석열 패거리들이 발호하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내가 희망을 놓지 않는 까닭이다. 비록 아직도 답답하긴 하다만, 1979년 11월 3일 그 신문로 사거리의 국민들이 자각한 민중 또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놀랄만한 변화를 이룬 것을 보면 희망은 서서히 이루어져 왔고 또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이다.
다만 그 때 보다 더욱 추해지는 언론 환경은 가히 혁명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만.
옛 생각하며 영화 ‘서울의 봄’을 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옛날 처럼 조용히 윤석열 패거리들을 몰아내자는 피켓 하나 들어야겠다.
농사 짓는 친구 안병덕이 짧게 짧게 가르쳐 주는 식물과 사람살이 강의 재미가 쏠쏠한 이즈음이다. 산업공학과 전산 쪽을 공부하고 이른바 대기업에 입사해 그 계열사 중 한 곳에서 최고위직까지 지낸 그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게 족히 25년은 되지 않을까?
매사 성실했던 어릴 적 모습 그대로 그는 오늘도 농사 짓는 일에 충실하다. 이제 그는 식물과 사람살이 역사, 나아가 사람과 식물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가르친다.

어제 그에게서 배운 것 하나.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벼나 밀, 옥수수 등과 같은 벼과에 속하는 식물 곧 풀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 읽고 ‘아하! 그랬구나.’하며 몇 년 간 했던 내 고생을 떠올리며 웃었다.
나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과 전나무 그리고 대나무를 키웠었다. 개나리, 진달래와 함께 그들은 내가 마치 서울에 사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곤 했다. 문제를 일으킨 건 대나무였다. 대나무의 번식과 생장 속도는 생각보다 엄청 빨랐다. 급기야 이 놈들이 경계를 넘어 이웃 집을 침범하고 말았다. 그게 주법(州法)을 위반한 일이었음을 그제야 알았었다. 대나무는 땅 속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부랴부랴 대나무를 다 자르고 그 뿌리조차 없애는데 무려 4년이 걸렸다.
내 친구 안병덕이 대나무의 번식력과 생장속도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을 다시 생각 하게 했다. “아하 그게 풀이였구나!”
농사 짓는 친구가 또 하나 있다. 경북 봉화에서 각종 농사를 다 짓고 있는 오시환이다. 대기업 홍보파트에서 잘 나간다고 알고 있었던 그를 뉴욕 한인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마도 거의 이십 년 넘는 일일게다. 그 때 나는 ‘설마?’했었다. 그가 식당 주방을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밤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헤어졌다.

그가 봉화에서 농사 짓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페북을 통해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삶을 즐기는 참 농사꾼이다. 그는 작가이자 화가, 사진가이자 한글 운동가, 제법 도튼 불자이자 사회 운동가이다. 달 포 전 한국여행 중 봉화를 들리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다.
그는 종종 풀과 놀고 풀과 싸우는 모습을 페북에 올리곤 한다. 문득 그가 풀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대나무 같은.
땅이 아니라 사람 마음 밭 갈아 좋은 세상 만들어 보자고 밭갈이 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대전 대화동에서 목회하는 목사 김규복이다.
‘왜 그럴까? 왜 그 젊은 시절 지녔던 생각들 다 버리고 바뀌었을까?’ 그가 세태를 한탄하며 굵은 눈물 한 방울 뚝 떨구었다. 그는 그냥 앓고 있는 병 탓에 떨군 눈물일 뿐이라고 했다만, 가슴에 차마 터트리지 못한 눈물 보따리 하나 안고 사는 듯 했다.
허나 그는 결코 그 보따리 터트리지는 않을 듯. 그 보따리는 그 밭을 일구는 거름인 것을. 이쯤 그는 대나무 농사꾼.

아직은 아닌 듯 싶은데 밤운전으로 이웃 도시 필라델피아를 오가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 어제였다. 아마 빗길과 짙게 깔린 밤안개 때문일 뿐, 나이 탓이라고 생각하기엔 이르다.
살며 뜻 맞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처럼 즐거운 일이 무에 있으랴! 민주, 평화, 통일 나아가 사람사랑 운동으로 반 백년 이민 생활을 일관하고 있는 김경지선생, 이민자들 권익과 다음세대 바르게 터 닦는 일에 전심하는 참 좋은 벗 이종국, 김성규를 비롯하여 세월호,이태원 참사의 아픔을 공유하며 정말 좋은 세상이 되는 우리들의 모국을 꿈꾸는 필라 민주동포 모임의 벗들과 함께 한 좋은 시간을 다시 새기며.
암만, 우리 모두 울타리 필요없이 뿌리 얽히고 설켜 빠르게 세를 키워 좋은 세상 영역을 넓히는 대나무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