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몸짓으로 박수를 치자.

나는 체구가 작고 몹시 마른편이다. 내 또래들은 나이살이니 뱃살이니 하며 고민들을 하더라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종종 듣는 “아니 왜 그렇게 못 먹었어?”라는 말은 철든 이후 줄곧 나를 쫓아 다닌 것이어서 이젠 웃음으로 대신한다.

그런 나는 배에 기름기가 없어서인지 끼니를 거르는 상황을 상상조차 아니한다. 하루 삼시 세끼 매일 얼추 같은 시간에 거의 같은 양의 식사를 하는 내게 한끼를 거른 때의 기억은 거의 없다. 한끼라도 제 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한다고 할 정도로 그 점에 대해서는 예민하다. 그렇다고 먹는 양이 많은 것은 아니다. 지나친 포만감은 매우 불편해 하는 편이라 늘 조금 덜찬듯하게 먹는다.

이런 내게 금식이나 단식이니 하는 말들은 애초 아무 연관이 없다. 내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떠들고는 다니지만 ‘금식기도’니 ‘단식기도’니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안식일에 밀이삭을 훑어 먹는 제자를 넉넉한 눈으로 바라보는 예수의 모습이 내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들이나 단식을 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못하는 나는 그들이 대단하다고 여길 때가 많다.

물론 아주 어릴 적엔 금식도 해 보고 단식도 해 본 경험이 있다만 모두 스물살 즈음의 일들이었고, 생활인이 되고난 후엔 단연코 단 한번도 없다.

그런 내가 오늘, 한끼도 아니고 만하루 세끼 식사를 거르려고 결심을 한 까닭은 모두 사람들을 잘못 만난 탓이다. 지금 내가 먹고 사는 일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일로 맺어진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세월호 사건과 유가족들을 잊지말자고 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가운데 미시건에 사는 사람들이 먼저 릴레이 단식을 제안했다는 것이고, 뉴욕 뉴저지를 돌아 인근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연이어 동조했다는 것이다.

지난 16일부터 한국 광화문광장에서  ‘사생결단을 내기 위한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힘을 보태자고 그리 하였다고 한다.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유경근씨는 17일 단식에 임하는 글을 그의 페북에 올렸다. 다음은 그 중 일부이다.

<저는 어제(17일)부터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사생결단식”을 시작했습니다. ‘사생결단을 내기 위한 단식’이라는 뜻입니다. – 중략 – 호기있게 “사생결단식”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사실 많이 두렵습니다. 2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건강 때문이기도 하고, 장기간 단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이미 경험해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도 저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 결국 두 야당이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침몰시키는 데 정부여당 못지않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20대 국회의 야당에게 바라는 것은 ‘개돼지’ 취급당하는 대다수 국민들이 정치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 동안 수많은 유무명 인사들의 단식행위에 대한 소식들을 들어왔지만 거기에 동조를 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이번 일이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비록 주위에 아는 이들이 하루씩 릴레이 단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이고, 어려운 일들 하네, 수고가 많네.” 정도의 치사를 던지는 것으로 내 몫은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늦은 저녁 한 사내의 이름이 떠올랐고, 그 사내가 죽던 세상보다는 그래도 지금이 많이 나아진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내가 하루 세끼 거르는 일도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해 박수정도 쳐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더해졌던 것이다.

내 또래 사내의 이름은 광주사람 박관현(朴寬賢)이다. 그는 만 29살이던 지난 1982년에 50일 동안 이어진 옥중단식 끝에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당시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시인 김남주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읊고 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박관현 동지에게
– 김남주

혼자서 당신이 단식을 시작하자  / 물 한모금 소금 몇 알로 / 사흘을 굶고 열흘을 버티자 /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 배고픈 저만 서럽제 그러며

밤으로 끌려가 어딘가로 끌려가 / 만신창이 상처로 당신이 돌아오자 / 돌아와 앓는 소리 끙끙으로 사동을 채우자 /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 맞은 저만 아프제 그러며

물 한모금 소금 몇 알로 / 끼니를 때우고 스무 날 마흔 날을 참다가 / 심근경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자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 죽은 저만 불쌍하제 그러며

그러나 나는 보았습니다 / 그들이 냉수 한 사발로 타는 목 축이고 /남은 물 그 물 손가락으로 찍어 세수하고 / 세수한 물 그 물로 양치질하고

여름이면 철창 밖으로 고무신을 내밀어 빗물을 받아 / 갈증을 풀던 그들이 / 당신의 죽음 그 덕으로 철철 넘치는 대야물에 세수하고 / 따뜻한 물로 십 년 묵은 때까지 벗기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 낮이고 밤이고 일 년 삼백예순 날 / 햇살 한 줄기 제대로 못 구경하던 그들이 / 푸르고 푸른 오월의 하늘 아래서 / 입이 째지도록 하품을 하고 /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 듯 기지개를 켜는 것을

나는 또한 보았습니다 /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게 제 분수라 여기고 / 때리면 때린 대로 맞는 게 제 분수라 여기고 /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었던 그들이 / 간수한테 대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 반말을 한다고 항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식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 야단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아침에 / 썩은 배추가 싱싱한 상추로 둔갑하여 / 그들의 식단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박관현 동지여 / 우스운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 만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싸우는 인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2016년 이 문명의 세월에 중년의 한 사내가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곡기를 끊고 싸우는 까닭은 허망하게 죽어 간 자식의 한(恨)과 그 한으로 응어리진 살아있는 애비의 원(怨)을 풀고자 함이 아니다. 다시는 그런 한과 원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 시절 박관현에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할만큼 외로웠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유경근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를 위해 비록 하루 세끼지만 끼니를 거르며 힘을 모으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어찌 손뼉박수만으로  족하랴.

하여 나도 몸짓으로 박수를 보내려 한다. 더는 단식 같은 일이 반복되는 세상이 끝났으면 하는 바램으로.

필라 세사모 소식지 – 4

연일 100도 가까이에 이르는 찜통더위가 이어진다.

이 무더운 날, 세월호를  기억하자며 필라델피아 인근 마켓에서 전단지를 돌리거나, 워싱톤 백악관 앞에 서 있거나 하는 벗들이 있다. 누군가는 모처럼 한국 나들이한 시간들을 광화문과 안산에서 보내고 왔다.

그들이 네번째 만든 ‘필라 세사모 소식지’이다.

[gview file=”http://www.for1950s.com/wp-content/uploads/2016/08/philasewol-vol.4.pdf”]

어느 주일 일기(日記)

오늘 아침에 루이지애나(Louisiana)에서 세명의 경찰관이 피살되었다는 보도이다. 잇단 미국내 총기 사건 소식들 뿐만 아니라 며칠전 프랑스의 대혁명 기념일에 일어났던 프랑스 니스테러 사건을 비롯한 지구촌 사건 사고들은 끊이지를 않는다.

보고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보이고 들리는 한국내 뉴스들에 이르면 이즈음 찜통 열기에 이는 짜증이 더해진다. 개 돼지에서부터 종놈, 상놈에 이르게까지, 2016년 이 문명의 세월을 조선시대가 아닌 고대로 되돌려 살아가려가는 무뢰배들을 향해 치미는 화 때문이다.

오늘은 모처럼 필라델피아 나들이에 나서 다민족, 다문화 일치를 내세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한국마켓 장을 보고 돌와왔다.

다민족, 다문화를 내세운 교회에서도 한인교회 또는 전통적인 미국인들 교회들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라는 이는 사람들의 신앙 깊이를 여섯 단계로 나누어 신앙발달 단계를 설명한바 있지만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수준도 그곳에 맞출 수 있을 듯하다.

파울러가 말한 겨우 두번 째 단계인 신화적이고 문자적인 단계(mythic-literal faith)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교회들의 모습에 이젠 조금 지치기도 한다.

한국마켓 장을 보러 갔다가 찜통 더위 속에서 세월호 소식지를 배포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반가움도 잠시 이내 답답함으로 변했다. 무지하고 뻔뻔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내 나이 또래 사내의 목청 높은 소리 때문이었다.

그 자리를 급히 떠난 까닭은 내게 일행이 있었다기 보다는 “이 나이에 내가 뭘…”하는 주눅이 앞섰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돌아와 습관으로 성서에게 묻는다.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신을 향해.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를 주문하다.

주일아침, 세월호 그리고 시

사람들이 내세웠던 일반적인 예상과는 사뭇 다른 한국 총선 결과를 두고 입달린 이들의 말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 며칠 사이에 전해오는 뉴스들의 논조도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이대로 사그러질 것만 같았던 세월호 이야기가 마침 2주기에 맞물려 상당 지면을 차지하고 있음도 그 바뀐 정황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남쪽의 조선을 자임하는 조선일보 등의 철저한 외면은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뉴스를 훑던 눈으로 성서를 들고 성서에게 묻습니다. 마침 주일 아침인 까닭입니다.

성서 구약에 있는 시편 22편입니다.(알기쉽게 번역한 공동번역 개정판으로 읽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 22편 1-2절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 “야훼를 믿었으니 구해 주겠지. 마음에 들었으니, 건져주시겠지.”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주신 분, 날 때부터 이 몸은 당신께 맡겨진 몸, 당신은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멀리하지 마옵소서.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줄 자 없사옵니다.> -6-11절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 가련한 이 몸을 사자 입에서 살려주시고, 들소 뿔에 받히지 않게 보호하소서. > – 20-21절

시편 22편은 까닭도 모른채 덮쳐온 고통과 고난속에서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이들이,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 시달리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을 부르짖는 소리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 가운데서 지난 두해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하려고 애썻던 이들이 부르짖던 소리를 듣습니다. 또한 그 세월 동안 부르짖는 소리들을 의도적으로 묵살하고 외면했던 이들의 모습들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아무런 상관없이 무심히 자신들의 일상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거의 제 모습입니다.

시편 22편은 울부짖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끝내 이루어질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확신에 찬 믿음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는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는 소리를 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옥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이 찬양하는 분, 우리 선조들은 당신을 믿었고 믿었기에 그들은 구하심을 받았습니다. 당신께 부르짖어 죽음을 면하고 당신을 믿고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 3-4절

<내가 괴로워 울부짖을 때 ‘귀찮다, 성가시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탄원하는 소리 들어주셨다.> – 24절

울부짖음과 구원 사이에 어떤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주고 받는 값이 없습니다. 울부짖음이 있는 현장에 야훼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무상성(無償性)이요, 조건없음입니다.

그러나 시편 22편은 때론 공허하기만 합니다.

현실은 여전히 울부짖는 소리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광화문 광장에 일만이 아닌 백만이 넘쳐나도 여전히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그들을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거리는 세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고한 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이 여전히 이어지는 세상을 향해 시편 22편이 던지는 맺음말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겨레에게 알리고 예배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리니,  “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아, 찬미하여라. 야곱의 후손들아, 주께 영광 돌려라.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모두 다 조아려라.> 22-23절

<온 세상이 야훼를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니, 만방을 다스리시는 이 왕권이 야훼께 있으리라. 땅 속의 기름진 자들도 그 앞에 엎드리고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오고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그 이름을 세세대대로 전하리라. 주께서 건져주신 이 모든 일들을 오고오는 세대에 일러주리라.>

바로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지금 울부짖는 소리(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확신에 찬 구원의 기쁨을 외치라는 맺음구입니다.

다시한번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여전히 진실을 향한 애타는 소리들과 고통을 벗어나고자하는 애달픈 소리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낱 어리석은 소리로 들릴수도 있는 맺음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앙이요, 믿음이라고 성서는 다시 다잡아 일러줍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 고린도전서 1장 18절>라고 말입니다.

주일 아침, 신경림 시인의 시를 성서의 눈으로 다시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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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

  • 신경림

아무도 우리는 너희 맑고 밝은 영혼들이
춥고 어두운 물속에 갇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밤마다 별들이 우릴 찾아와 속삭이지 않느냐
몰랐더냐고 진실로 몰랐더냐고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이토록 허술했다는 걸
우리가 만들어온 세상이 이렇게 바르지 못했다는 걸
우리가 꿈꾸어온 세상이 이토록 거짓으로 차 있었다는 걸
밤마다 바람이 창문을 찾아와 말하지 않더냐
슬퍼만 하지 말라고
눈물과 통곡도 힘이 되게 하라고
올해도 사월은 다시 오고
아름다운 너희 눈물로 꽃이 핀다
너희 재잘거림을 흉내내어 새들도 지저귄다
아무도 우리는 너희가 우리 곁을 떠나
아주 먼 나라로 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바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뜨거운 열망으로 비는 것을 어찌 모르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보다 알차게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을 보다 바르게
우리가 꿈꾸어갈 세상을 보다 참되게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아름다운 영혼들아
별처럼 우리를 이끌어 줄 참된 친구들아
추위와 통곡을 이겨내고 다시 꽃이 피게 한
진정으로 이 땅의 큰 사랑아

4월을 준비하는 사람들

부활주일 아침입니다.

먼동이 트기전 동네 한바퀴를 돌며 들었던 새들의 노래가 아직도 귀에 남아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소리들은 늘 그렇게 지저귀고 있겠지만, 제 듣는 귀는 오늘처럼 아주 특별한 날에만 열리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영영 듣지 못하고 한해를 보내기도 했겠지요.

뒤뜰 개나리 흐드러진 이 아침에  부지런히 4월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소식 하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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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예수 이야기

교회력으로 고난주간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걸어온 3년 동안의 공생애를 마무리 지었던 마지막 한 주간입니다.

마가가 남긴 예수 이야기를 또 다시 곱씹어봅니다.

16장으로 이루어진 마가복음은  거의 1/3이 넘는 장수를 예수의  마지막 한 주간에 대한 이야기로 채우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하고 싶었던 예수의 모습은 바로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 예수 생애 마지막 한주간 동안 보여준 예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하는 까닭입니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마태, 누가, 요한)이 전하는 예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작이 틀립니다. 마태는 족보 이야기로, 누가는 예수 탄생 이야기로, 요한은 태초의 말씀 이야기로 시작을 하지만,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라며 그의 이야기를 “복음 이야기”로 규정 짓고 시작합니다.

마가는 예수가 3년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행하였던 사역과 말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보여주었던 행태를 통해 “복음(福音, Gospel)” 곧 기쁜소식을 전하려 했습니다.

마가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고난주간을 전하는 부분이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모습으로 드렸던 기도하는 장면이 아닐까합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 마가복음 14 : 34 -41

그러나 그의 기도는 얼핏 헛되 보였습니다. 그 밤부터 시작하여 예수는 절대 고독을 맛보다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그가 겪었던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뭇 신자들, 환호하던 군중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던 하나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예수는죽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래도 예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여인들조차 부활하신 예수를 무서워하며 도망하는 모습을 그리며 그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 마가복음 16장 1절 – 8절

*** 마가복음은 본래 16장 8절에서 끝났고 9절부터 20절 까지는 후대에 첨가했다는 널리 인정되는 설에 따라

고난주간마가 이야기는 이렇게 끝내도 예수를 통한 복음이야기는 오늘도 여전히 이어지거니와, 예수 이야기는 틀림없는 복음이야기라는 믿음의 고백이 유효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오늘도 그를 버리고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그를 철저히 외면하는 갈릴리현장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먼저 오셔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그렇게 모두가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거니와, 이어져 갈 것입니다.

민중의 적

하늘이 내린 이틀 연휴였습니다. 비록 눈치우노라고 다섯시간 가까이 운동 아닌 노동을 하였지만 넉넉한 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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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동네 한바퀴를 돌고나서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민중의 적( An Enemy of the People)”을 읽었습니다.

예상되는 눈폭풍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강설량을 비롯한 하늘의 변화를 거의 분단위로 미리 알아 맞추어 사람들에게 대비케하는 21세기에, 19세기말 작가의 작품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답니다.

읽고난 후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람 사는 일 또는 사람이란 참 변하지 않는 구석과 변하더라도 더디게 정말 더디게, 수천 수만년을 겪어야 변하는 것들이 있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19세기말 노르웨이에서 그 당시 세계, 곧 유럽이 중심이었던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불었던  예술 운동의 하나였던 리얼리즘(realism)을 내세운 입센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민중의 적’은 바로 변하지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리얼리즘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현실주의(現實主義) 또는 사실주의(寫實主義)라고 번역되어지지만 그저 사람사는 일들을 사진 찍듯 표현한 사실(寫實)적인 희곡입니다.

정말 간단히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주인공인 스토크먼은 자기가 사는 동네 발전에 유익하다고 선전하며 강행되고 있는 사업인  온천개발 사업이 사실상 오염된 온천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건 아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먼 지역 이기주의들<권력(시장을 비롯한 행정, 정치권력), 언론권력, 일반인들(민중들)>에 의해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민중을 위해 나선 주인공이 민중의 적이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지요.

작품속에선 민중을 향한 두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스토크만: 내겐 진실이 있고 민중이 함께합니다. 온천은 오염됐으며 정치도 썩었다고 외치겠습니다.

시장(mayor): “이 나라는 지금 파산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모두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정의를 외쳐대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행정 당국이 파괴되면 남는 게 뭡니까? 혁명과 혼란을 원하십니까?”…. “난 5년 안에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을 세계 최고의 부자 시민으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온천의 작은 문제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민주적 권리’를 주장해도 되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선은 분명하게 그어져야 하고, 누군가 그 선을 넘을 때는 우리 민중은 그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안 돼!’라고 단호하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스토크만: “‘다수’가 깨닫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의 ‘소수’가 알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진리는 언제나 같습니다. ‘소수의 권리’는 ‘다수’에게 공격을 받더라도 신성한 것입니다. (시장이 ‘저자의 입을 막으라’고 소리친다) 모두 알아두셔야 합니다. 온천물은 오염되었습니다.

주민들(민중): “오염이란 말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 “이 동네에서 살기 싫으면 짐 싸가지고 조용히 떠나라!”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

그리고 이제 민중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제가 “민중”이라는 말을 배운 것은 서남동, 안병무 목사님들에게서 입니다.

특별히 안병무선생님께서는 “민중이란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분입니다. 그는 예수란 어떤 개인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신 어른입니다. 민중과 예수는 더불어 함께라고 하셨습니다. 민중이 곧 예수라고 말한 이였습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건’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쯤 흥미로운 것은 예수는 바로 입센의 ‘민중의 적’에 나오는 ‘민중’들의 외침 곧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라는 소리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事實)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寫實)적으로 믿는 것은 신앙입니다.

내가 눈이 내리는 이곳에 사는한 겨울이면 눈은 내릴 것이고, 눈을 치울 힘이 있는한 눈을 치우며 살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한 누구나 때론 민중이 되기도 하고 민중의 적이 되기도 하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무릇 신앙이란 결단이어야 합니다. 민중이라는 말 없이도.

세월 – 그래도 감사함에

어제 손님 가운데 올해 일흔 네살인 유태계 Rose할머니와 나눈 이야기랍니다. 은퇴 의사인 남편과 늘 함께 오시곤하는데 어제는 혼자였답니다. 성탄 인사로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였지요.

“나이따라 세월의 속도가 달라진다더니, 60 넘고서부터는 시간이 거의 100마일로 달려가는 것 같아. 그 속도 보다는 좀 느리지만 자꾸 몸도 줄어들고 말이야. 삼년전에 왼쪽 다리 수술하고는 한쪽이 짧아졌는데… 우스운 소리같지만, 오른쪽 다리로 서서 보는 세상과 왼쪽 다리로 서서 보는 세상이 그게 몇인치 차이뿐이지만 달라보여. 그래도 확실한 것은 하나 있지. 내가 지금 걸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야.”

몇 해전 까지만 하여도 하누카 인사를 내세운 고집스런 할머니와 성탄인사를 나누며 든 생각은 바로 세월이랍니다.

2015년을 뒤돌아보는 성탄 아침입니다.

이맘 때면 늘 그렇듯 아쉬움들이 먼저 다가옵니다. 올해 마무리 짓지 못하고 해를 넘기는 일들, 끝내 포기하고 만 일들을 따라 떠오르는 아쉬움들입니다.

그 아쉬움들을 감사함으로 덮을 수 있는 생각은 누가 무어라해도 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때론 아슬아슬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네 분 노인들이 모두 올 한해를 무탈하게 지내신 것이 큰 감사입니다.

90대로 진입하신 두분(제 부모님), 90대를 코 앞에 두신 장인, 80대를 손에 잡으려는 장모 – 이렇게 네 분이랍니다.

Tom's beer1-12-24-15제일 막내격인 장모가 이즈음 재발한 암과 씨름 중이신데, 아주 밝게 잘 견디어 내시는 모습에 감사하답니다. Chemoembolization(색전술) 치료중이신데 함께하는 아내나 장모나 늘 밝은 모습이어서 감사의 크기가 큽니다.

모처럼 집에서 함께하는 아이들과 맛난 것 사먹으라고 쌈지돈 내미시는 제 부모님들에게 느끼는 감사의 크기 역시 그 못지 않답니다.

5주 동안 숙성시켜 어제 아침에 받아낸 맥주에 그야말로 한정판 레이블을 붙여서 성탄선물을 건네 준  Kennedy씨의 맥주는 오늘 저녁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할 만찬에서 나눌 요량이랍니다.

저 역시 100마일의 속도를 느끼는 세월이지만 오직 감사함으로.

2015년 성탄 아침에.

이론과 실천을 함께 고민하며 살아온 벗의 이야기 – 1

Thanksgiving day 아침입니다.

모처럼 아이들도 집으로 오고, 온가족이 모이는 날입니다.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부터 수선을 피웁니다. 칠면조구이는 이제 완전히 제 몫이 된 일입니다. 올해는조금 색다른 레서피를 사용해 봅니다. 야채를 잘 안먹는 아들녀석을 위해 어제밤에vegetable stock을 끓여 푹 담구어 놓았지요.

음식준비를 하면서 올 한해 감사함들을 꼽아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나게 된 일입니다. 필라세사모는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약칭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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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만난 이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느껴본 한해랍니다.

무릇 신앙의 궁극적 목표라면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한두해 전부터 제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의 같은 소그룹에 속해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후 구원 문제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돕기위해 한동안 열심히 성서 이야기를 썻던 기억이 납니다. 그 그룹에 속한 멤버들이 대충 저보다 연상들이었으므로 죽음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오늘 현재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에 문제로 국한지어 생각하는 것은 좀 따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차에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난 것이지요. 구원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은 매우 중요하고 함께 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이들과의 만남은 올 한해 제게 가장 큰 감사가 되어야할 것 같답니다.

그 모임에서 엊그제 대전에서 목회하는 김규복목사를 온라인으로 초빙해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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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쌍전(文武雙全) 또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문(文)과 무(武)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김목사를 향해 ‘이론’과 ‘실천’을 쌍전(雙全)했다거나 겸전(兼全)했다고 칭송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구원에 있어 궁극의 목표라고 할만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 곧 “인간성의 총체적인 회복”을 위해 평생을 ‘이론’과 ‘실천’을 함께해 온 사람라고는 말씀 드리고 싶답니다.

그날 밤 김목사의 이야기를 들었던 우리 필라세사모 식구들 뿐만 아니라, 단 한사람만이라도 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차례에 걸쳐 그의 이야기를 올리려 합니다.

아내의 원성 소리가 들리기 전에 부엌으로 가야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짧게 첫번 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