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먹고 사는 일과 좋아서 하는 일을 차이는 사뭇 크다. 먹고 사는 일에서 오는 피로는 쉽게 오는 법이지만, 좋아서 하는 일일 땐 그 느낌이 더디거니와 때론 그 피로 조차 좋을 때도 있다.

날 좋은 휴일, 땀 흘리며 뜰 일을 하는 날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한 주 내내 가게 일에 치어 ‘아이고 좀 쉬자!’ 했다가도, 쉬는 날 잔디와 잡풀 깍고 꽃나무 가꾸며 땀 흘리리다 보면 이 나이에 내가 누리는 행복에 그저 감사가 넘쳐나곤 한다.

수선화는 이미 지고 튜립도 끝물이다. 글라디올러스 등 여름 화초들이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어느새 봄이 기울고 여름으로 들어서고 있다.

꽃망울을 한참 들여다보다 떠 오른 말,  ‘기다림’ 이었다.

그리고 보니 ‘미세스 킴 라이락’이라는 이름에 홀려 심었던 라이락 꽃이 올해 활짝 피었다. 아내는 자기 이름에 자신의 성씨인 ‘이(Lee)’을 미들 네임으로 쓴다만, 통상 ‘미세스 킴’으로 불리운다. 삼년 만에 핀 꽃인데 따져보면 큰 기다림도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 온 세월에 비한다면.

산다는 것은 무릇 기다림의 연속 아닐까?

저녁 나절 텔방 친구들의 소식, <친일파 매국노 윤석열 탄핵 촉구>모임 안내였다.  화초나 꽃나무나 텃밭 채마 가꾸는 일은 늘 잡초와의 싸움이 가장 큰 일이다. 그 싸움을 잘 이겨내며 기다리는 일이 사람사는 일이고 역사 아닐까?

‘어쩌다 거의 광기(狂氣)에 사로잡힌 윤석열 무리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까?’하는 물음에 내가 스스로 내려보는 답, “쯔쯔,,, 제 때 잡풀 뽑아내 버리지 못한 까닭…”

허나 사람살이 이어 온 이야기들, 곧 역사를 되돌아 볼 양이면 이내 깨닫게 되는 사실인 동시에 진실 하나, 기다림으로 꽃망울 품고 사는 이들이 꾸는 꿈으로 시간은 이어진다는…

이 나이에 함께 꿈을 꾸는 벗들과 연을 맺고 살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며 <친일파 매국노 윤석열 탄핵 촉구>모임에 함께 할 일이다.

먹고사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므로.

사랑 그리고 예수쟁이에

성실한 교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만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여기며 사는 내게 매우 강력한 매혹적 언어로 다가온 책,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받아 들고 책장을 넘기는 저녁이다. 사실 원제보다는 부제가 내 맘을 끌었었다. <세월호, 그 곁에 남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34년째 안산 화정교회 목사로 살아오며 4.16목공소에서 세월호 엄마 아빠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박인환 목사는 ‘하나님이 물으신다면’이라는 글에 이런 경험담을 남기고 있다.

<”목사가 왜 이런 정치적인 일을 하느냐?”며 눈을 부라리는 장로도 만났고, “박목사, 아직도 세월호야? 이거 언제까지 하려고 그래 목사가 목회 해야지”라고 책망하는 선배 목사도 만났다. 서명을 받아 달라는 나의 부탁에 “세월호 가족들이 정치세력과 야합해서 돈을 더 많이 받으려고 그런다는데…”라며 곤란해 하는 후배 목사들도 여럿  보았다.”>

아직도 세월호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몇 번 쯤은 엇비슷한 질문을 받아보지 않았을까?

성서한국 사회선교사인 박득훈이 소개해 주는 윤후명의 시 <사랑의 길>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읊조려 본다.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

그리고 동혁이 엄마 김성실의 기도다.

<그렇게 살기로 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닌 일에 자책하며 분노하던 것에서 돌아서/ 그동안 멈췄던 사랑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악쓰고 우느라 돌보지 않았던 남은 가족들을 돌보기로 했다./ 여전히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현실은 답답하지만/ 잃었던 웃음을 되찾기로 했다>

그래! 사랑이다.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믿으며 손 맞잡고 때론 어깨 걸고 울고 웃으며 늘 아득한 먼 길 걸어가는 그게 사랑이다. 가다가 비록 스러지는 별똥별 하나 되더라도.

사랑 그리고 예수쟁이에.

망집(妄執)에

망상으로 일어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일 곧 망령된 고집을 일컬어 망집(妄執)이라 한다.

누군가의 망집은 반드시 이웃들에게 파문을 일으키게 하기 십상 이거니와. 자기 스스로가 무너지는 가장 큰 까닭이 되는 법이다.

뿐이랴! 그 망집으로 하여 남들에게 자신을 꼴 사납게 내보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 이웃들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제 분수를 모르는 이들, 또는 아둔함과 과욕이 그 망집을 부르곤 하는 법인데, 문제는 그 공동체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이런 망집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게 지난 사람살이 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깊이 성숙하지 못한 놈들이 권력이나 돈에 환장하여 망집에 빠지면 그 사회는 아수라(阿修羅) 세상으로 변하는 법.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생각할수록 기괴한 윤석열, 김건희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내세워 제 뱃속 챙기기 바쁜 오랜된 망집에 사로잡힌 욕심에 사로잡힌 때론 선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마침내 사는 세상을 아수라판으로 만드는…

그 망집에 빠져서는 안될 일이기도 하고, 사는 날까진 그 망집과 싸울 수 있어야.

사는 것처럼 살다 가는 일.

믿음 아닌 물음에

연말연시라 고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저 하루하루의 연속일 뿐이다. 허나 단지 그렇게 치부하기엔 삶은 때론 지나치리 만큼 역동적이기도 하고 지루하게 늘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하여 순간순간 단락 지어 되뇌이며 사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이 만든 결과물 또는 그 지혜를 허락한 신의 은총으로 낳은 게  월력이 아닐런지?

아무튼 이런저런 연말 어수선한 일들이 많은 어제, 한 주간의 일을 마치고 ‘필라델피아 민주시민모임’이 주최한 <10.26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윤석열 퇴진 촉구를 위한  모임>에 다녀 왔다.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는 비록 처음 본 얼굴 일지라도 그저 즐겁다

오랜 벗들도 있고, 어제 처음 얼굴 마주 한 이들도 많았다. 어제 함께 자리하게 된 까닭들도 여러가지였다.

나는 그저 반갑고 만난 얼굴들이 고마웠다.

세상사 믿음이라는 엉뚱한 잣대로 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 내가 사는 시간, 나와 더불어 사는 우리를 묻는 물음으로 사는 얼굴들이 참 고마왔다.

엊저녁 멀리서 전해 드리는 위로가 참사 유가족들에게 전해지기를…. 하루가 다르게 뒷걸음질 하며 퇴행하는 내 모국(母國)을 위해 추운 날 거리에 나선 이들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원컨데 넋 잃은 믿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 바로 사람에 대한 물음으로.

계절 그리고 관점(觀點)에

호들갑스런 일기예보가 지나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제만 해도 늦가을이거니 했는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일기예보처럼 오늘 밤엔 얼음이 얼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첫 눈도 내릴게란다. 이렇게 계절이 또 바뀐다.

오후에 좀 걸을 요량으로 찾은 Longwood Garden 풍경은 이미 겨울이었다.

곳곳마다 사람 손 닿아 가꾸지 않은 데 없는 정원일지라도 그 역시 계절을 따라가는 법, 자연을 담은 바깥 풍경은 흔히 하곤 하는 말 그대로 춥고 스산하고 을씨년스럽기 까지 하였다.

허나 사람의 욕심이 어디 끝이 있겠나? 실내 정원은 사람들의 손길이 만들어 놓은 꽃들의 세상이었다. 더하여 시간이 아무리 한겨울로 치달아도 그 계절이 주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또 한번 이렇게 바뀌는 계절의 길목을 아내와 함께 손잡고 걷는 시간에 대한 감사의 크기라니!


그리고 관점에 대하여.

해마다 이 맘 때면 한번씩 읊조려보는 시 한편,

Shel Silverstein이 고백하는 ‘관점(Point Of View)’이다.

<관점>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 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아주 오랜만에 주일예배를 드렸다. 목사님께서 던져 주신 물음 하나, ‘관점’이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며 감사를 놓치지 않는 하루 하루를 살 수 있기를 비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관점’을 곱씹어 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난 아직 멀었나 보다. 내가 칠면조의 관점으로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듯,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잣대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이번 생에서는 내게 허락치 않은 일일 것 같다.

다만, 내가 신을 고백할 수 있는 ‘관점’ 하나. 사람의 눈으로 사람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일, 그것 하나는 이루며 사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그리 보면 칠면조의 관점도 하나님의 관점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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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낱말 사전은 “야비 (野卑/ 野鄙) 하다”라는 말을 이렇게 풀고 있다. <사람의 성질이나 하는 짓이 곱지 못하고 천하고 야하며, 도리에 어긋나다.>라고.

‘비겁하다’, ‘치사하다’, ‘교활하다’, ‘얍삽하다’ 등등 비도덕적인 일들을 일삼는 사람들의 행위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글쎄? 사람마다 다 세상 바라보는 눈높이와 그를 재는 잣대의 길이가 달라 옳고 그름을 정확히 재고 판단할 유일한 저울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저 내 상식과 작고 좁은 내 머리 속 생각만으로 따져보자면 최근 십 수년 이래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과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들’에게 팔매질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일컫는 말로는 이게 가장 적합할 듯 하다. – <야비 (野卑/ 野鄙)>

필라의 좋은 친구들이 모처럼 기지개 켜고 사람 깨우는 자리를 마련했단다.

주말에 아내와 함께 가보려 한다.

세월호 6주기

부활 이후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교회 토요 모임이 끝난 후 몇몇이 모여 제법 진지하게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었다. 이야기의 수준이 뭐 대단했을리 없었겠지만 사뭇 진지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K가 있었다. 그는 부활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고, 당시 또래들과는 다르게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렸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일요일 늦은 밤에 그의 형이 나와 친구들 집을 찾아 다니면서 그의 행방을 물었었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간 K가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난 후, K는 한강 샛강에서 주검으로 떠올랐었다.

오십 수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때 토요 모임과 K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생각할수록 순수하고 순진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아프고 아리고 쓰린 기억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 뜨자 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 내 줄 사람이 있을까요?” 하고 말을 주고 받았다. 가서 보니 그렇게도 커다란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 갔더니 웬 젊은이가 흰 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보고 질겁을 하자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하였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 마가복음 16장 1-8>

예수 부활에 대한 마가의 기록이다.

마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한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들(마가복음 16장 9- 22절) 곧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과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들은 후대에 사람들이 만들어 첨가한 것이라는 의견에 대체로 공감한다고 한다.

아직 얼굴 모습이 선한 어린 K와 헤어진 지도  반 백년이 넘었고,  그새 나는 고집스런 노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젠 누구의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어 버린 내 부활신앙이다.

다시 일어나 자신이 일하며 살았던 갈릴리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함께 일어나자고 외쳤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남긴 마가에게 공감하며.

오늘 여기에서 다시 일어나는 삶, 그것이 부활이후라는 믿음.

공연히 죽음 넘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일일랑은 접고.

부활주일이었던 어제, 내 뜰은 온통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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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異端)

며칠 전 아들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이 눔이 갑자기 웬 일?’하는 맘으로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웬 일이셔? 엊그제 봤는데…”하는 내 인사에 녀석은 평소와 달리 가래 잔뜩 낀 목소리로 응답했다. “몸이 좀 이상해서… 테스트했더니 파지티브라고…” 그렇게 아들놈은 바이러스 확진 소식을 전했다.

며칠 동안 가보지도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아들과 며느리 안부를 묻는 전화만 하며 보냈다. 행여? 하는 마음으로 돌아본 우리 내외는 무사하다.

나흘 째. 녀석이 입 맛이 돌아왔단다. 그래 안심이다. 먹는 즐거움을 찾았다니!

며칠 동안 이래저래 복잡한 머리 속 달래려고 꺼내 들었던 책 <성서 밖의 예수>이다.

벌써 이십 수년 전 일이 되었다만, 한 때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펴낸 글들에 푹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 참고 서적 중 하나로 대충 읽어 보았던 <성서 밖의 예수>였다.

종교사회학자인 일레인 페이젤(Elaine Pagels)이 쓴 이 책의 원제는 ‘영지주의 복음서(Gnostic Gospels)’이다.

예수가 죽은 이후 기독교가 형성된 이래 최초의 이단(異端)이 되어 역사의 패배자가 된 영지주의에 대해 개설해 놓은 책이다.

저자 일레인 페이젤(Elaine Pagels)은 만일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서가 기독교의 경전(이른바 성서)에 정경의 일부가되었다면(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처럼) 오늘날의 기독교보다는 훨씬 나은 종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테면 영지주의자들의 찬양했던 하나님이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던 점, 인간적인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 부활에 대한 상징적인 이해, 무조건적임 믿음에 앞선 하나님과 나와의 지식적 만남 등등… 나름 충분히 이해할 수 그들의 신앙과 주장이 이단으로 치부되어 역사 속에 묻혀버린 것을 아쉬어 하는 지은이가 남긴 말이다.

<내가 영지주의에 열중했던 것은 정통파 기독교에 대항하고 영지주의를 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역사학자의 임무는 어느 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그렇게 닿은 이단에 대한 내 생각 하나.

무릇 모든 종교의 교단(敎團)이란 그들이 내세운 최초 선각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이단 아닐런지?

예수, 석가, 무함마드 어쩌면 공자까지도.

아들 녀석 덕에 우연히 꺼내들어 잠시 빠져 들었던 <성서 밖의 예수>. 이십 수 년에 밑줄 그었던 곳엔 별 감흥 없이 새롭게 밑줄을 다시 그으며 읽었다.

내 뜰엔 봄 꽃이 다시 피고 두어 주 전에 파종한 텃밭엔 새 싹이 오르고…

무엇보다 내 아들 녀석 입 맛이 돌아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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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일요일 하루 쉼이 큰 축복으로 여겨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참 좋다. 주중 일터에서 마주하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속마음에서 감사가 일곤 할 때는 부끄럼이 따라오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흔적에 비해 누리는 기쁨이 너무 큰 까닭이다.

어제 오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났던 무지개 뜬 하늘은 그야말로 경외(敬畏)였다.

무지개 – 성서 속 옛사람들의 고백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 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When I send clouds over the earth, and a rainbow appears in the sky, I will remember my promise to you and to all other living creatures. Never again will I let floodwaters destroy all life. – 창세 9:14-15>

노아의 홍수 이후 성서 속 옛사람들이 고백한 신의 음성이다. 기억은 사람이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잊지 않고 간직해 가는 것이라는 신앙고백, 바로 믿음이다. “내 계약을 기억하고…I will remember my promise…”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신이라는 바로 그 믿음.

모든 축복, 감사, 기쁨은 신의 기억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저 경외다.

무릇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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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딸아이 혼인 덕에 이박 삼일 도시 여행을 즐겼다.

도시의 해는 건물 사이를 비집으며 떠오르고, 달도 건물  뒤로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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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뉴욕은 아름답다. 하늘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물이 도시를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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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서른 여덟 해 전 일이 되었다. 아내와 내가 부부의 연을 맺을 즈음, 내 선배이자 우리 부부의 선생 그리고 이젠 삶의 동행자이며 길동무 더하여 신앙의 스승인 홍목사님이 던져 주셨던 말씀. “누군가의 말이라네. 결혼이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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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 년 전 아들과 며늘 아이에게 그 말을 전했고,  어제 밤엔 딸아이과 사위에게 우리 부부가 서른 여덟 해 전에 들은 이야기라는 말을 덧붙여 전했다.

모처럼 일상을 벗어났던 이박 삼일. 아들과 며느리와는 가족 사랑을 깊이 새기는 참 뜻깊은 경험을 함께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딸과 사위, 그들을 위한 내 기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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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으로 쌓인 인연으로 하여 서로 간 노년의 초입에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만난 캘리포니아 사돈 내외와 함께 바라본 허드슨 강의 아름다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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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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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Thanks to my daughter’s wedding, I enjoyed a city trip of two nights and three days.

The sun in the city rises pushing aside buildings, and the moon hides behind them. Nevertheless, New York City is still beautiful. That’s because the sky enwraps the city and the water curves around it.

Before I knew it, it was something that happened thirty-eight years ago. Around the time when my wife and I were about to tie the knot, Rev. Hong, who was my senior and a teacher of my wife and me at that time, and now a fellow traveler of my life journey and my teacher of faith, spoke the words: “Someone said this. People should marry not just because they love each other, but because they want to love each other.”

Four years ago, I passed it to my son and daughter-in-law. And again, I did so to my daughter and son-in-law last night, adding that it was what my wife and I were told thirty-eight years ago.

Two nights and three days out of my daily repetitive life after a long time! It was very meaningful, as I could think over about family love with my son and daughter-in-law. At the same time, it was a precious time of my prayers for my daughter and son-in-law.

The Hudson River was so beautiful, when I looked at it with my son-in-law’s parents with whom I made a relationship at the beginning of old age through mysterious fate.

Just gratitude, gratitude, gratitu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