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를 일- 세월호 그리고 슬픔

칼 맑스 또는 카르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라고 불리는 옛날 사람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IE001702167_PHT오늘 낮에 제 가게 손님 한 분께서 하신 말씀때문이랍니다. 

폴란드계 미국인 여성으로 종신교수(Tenured Professor)로 아직 대학에 남아있지만 썩 나이 드신 할머님이시랍니다. 이 양반이 오늘 제게 물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오? 지금 몇 시간이나 지났소? 더 많은 이들이 살아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소?” 

한국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였답니다. 

자동차 사고는 어디에서건 매일 일어나는 일이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고, 물에 배가 가라앉고… 있어서는 안되고, 있지 말아야 되는 일들이지만 사람사는 세상인고로 일어날 수는 있는 일들이겠지요. 

이런 일들을 미리 방지하노라고 여러 안전 대책들과 사전 점검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사고나 사건에 대해서는 준비된 대비책에 따라 신속 정확하게  대응해야 마땅한 것이겠지요. 

사고나 재난이 개인의 영역을 떠나 국가적 차원의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는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하여 자국민의 안전과 구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정상적인 국가일 터이지요. 

그런데 지난 이틀동안 세월호에 연관된 기사들을 보면서 저는 칼 맑스를 떠올리게 되었답니다. 정말 한물 갔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예견한 국가를 본 듯했기 때문이랍니다. 

“국가는 부르주아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위원회이고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에 불과하다.” 

칼 맑스의 이야기인데, 왜 나는 자꾸 그의 말이 어제 오늘 대한민국과 겹쳐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 순간에도 가슴 쥐어뜯을 가족들을 위로하며.

봄을 기다리며

사순절기독교력으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앞으로 한달 남짓 남은 올 부활주일 이전에 여섯 번의 주일를 뺀 사십일 동안의 기간을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사순절 풍습이 남아 있지도 않고, 그게 그리 중요한 세상도 아니고…

제 이런 말에 “몰라서 하는 소리”라거나, “신앙이 없어서…”라는 대꾸가 있다면, 뭐 그대로 받는답니다. 

다만, 사순절에 의미를 ‘예수의 죽음”을 떠나 오직 “부활”에만 촛점을 맞추는 오늘날 교회의 사순절 고백은 참 허망한 것이랍니다. 

그런 뜻으로 이해인님의 시 하나 읊으며 봄을 기다리는 밤입니다. 

사랑과 침묵과 기도의 사순절에

–       이해인 

주님,

제가 좀더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사랑을 새롭히는 사순절이 되면

닦아야 할 유리창이 많은 듯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제 삶의 일과표엔 언제나

당신을 첫자리에 두고서도

실제로는 당신을 첫 자리에

모시지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올해에도 우선 작은 일부터 사랑으로”

이렇게 적혀 있는 마음의 수첩에

당신의 승인을 받고 싶습니다, 주님.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거나

문을 열고 닫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저의 조그만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은 끊임없이 찬미 받으소서

 

식사하거나 이야기하거나

그릇을 닦거나 걸레를 빠는 것과 같은

일상의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좀더 침묵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침묵을 배우는 사순절이 되면

많은 말로 저지른 저의 잘못이

산처럼 큰 부끄러움으로 앞을 가립니다

 

매일 잠깐씩이라도 성체 앞에 꿇어앉아

말이 있기 전의 침묵을 묵상하게 하소서

제가 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의 고통과 수난

죽음보다 강한 그 극진한 사랑법을

침묵하는 성체 앞에서

침묵으로 알아듣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익히는 사순절이 되면

잔뜩 숙제가 밀려 있는 어린이처럼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성서와 성인전을 머리맡에 두고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새롭히는 계절

 

제가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던

가까운 이웃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세상 곳곳에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이웃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번도 제대로 기도를 못한 것 같은

절망적인 느낌 속에서도 주님,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주소서

제 안에 사제로 살아 계신 당신이

저와 함께 기도해 주심을 믿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제가 먼 광야로 떠나지 않고서도

매일의 삶 속에 당신과 하나 되는

즐거운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그림 하나

어제 오늘 블로그를 새로 꾸민다고 시간을 좀 썻답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 온 그림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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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1951, 109.5 x 209.5 cm)이라는 그림입니다.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을 그린  게르니카(Gernica, 1937, 349 cm × 776 cm)외 함께 전쟁의 아픔과 참혹함을 그린 유명한 작품입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1950년 10월17일부터 12월7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신천대학살’ 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피카소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쪽 아시아의 끝에서 전해진 참상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려낸 것이지요. 

신천대학살이란 당시 신천군 인구의 약 4분의1인 3만5383명이 희생된 끔찍한 사건으로, 미군의 소행으로 알려져 전세계 좌익이나 진보 운동 진영의 공분을 샀던 사건이랍니다. 

피카소는 1944년부터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공산당의 평화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으로 1950년엔 스탈린 평화훈장까지 받은 사람이고 보면 이즈음 한국적 분위기로 보아서는 종북정도가 아니라 빨개도 아주 새빨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 또한 한반도에서의 학살에 미군이 개입되어있다고 믿고 있던 프랑스 공산당이 제안한 것이었으니 이 그림에서 총칼을 겨누는 군인은 당연히 미군을 암시하는 것이었을 겝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탱크로 밀고 들어왔을 때,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거리에 이 그림을 들고 나가 소련제 탱크에 숨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는 것이지요. 

전쟁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라는 피카소의 생각이 담긴 그림이라고 합니다. 실제 그림을 보면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갈리는 것입니다. 

무릇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없는 세상이겠지요. 

1951년부터 따져도 지금 몇 년째 인가요? 

지난 일을 잊지않되 어떻게 간직하느냐가 내일을 설정해 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증오의 편가름을 이어가는 일들은 지난 전쟁보다 더욱 나쁘다는 생각입니다.

안녕을 묻는 당신에게

오늘은 유다인들이 세운 마지막 왕국 하스몬왕조 이야기와 그 당시에 생긴 유다의 각 종파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산헤드린과 예수 시대의 젤롯당에 대한 연원과 그들의 특징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중간사를 마무리하려고 하였답니다. 

글을 쓰려 컴퓨터 앞에 앉아 먼저 열어 본 제  이메일함 에 쌓여 있는 메일 하나가 오늘 저녁 제 시간 계획을 엉크러 놓았답니다.  한동안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오늘 연재 글은 좀 쉬고, 예수 시대 이야기를 짧게 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제 저녁 시간 계획을 흩으려 놓은 이메일은 이제 쉰 중반으로  들어서는 후배가 이즈음 심경을 털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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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한국사회의 화두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이 이 친구의 맘을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묻는 의도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후배  아버님의 갑작스런 병원 출입과 2013년 한 해를 돌아보며 힘들었던 시간들을 되뇌어보니 안녕치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모양입니다. 

쉰 중반, 자신이 그려왔던 그 나이의 모습과는 다른 지금의 모습에 대한 회한이 묻어 있는 편지였답니다. 

이쯤, 제가 이즈음 거의 매일 이어가고 있는 “당신의 천국”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바로 그런 회한에 대한 위로의 작업입니다. 물론 그 후배가 아닌 제 자신에 대한 위안으로 시작한 일이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그가 온 때에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헤롯대왕, 빌라도 총독,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사두개파, 바리새인, 에세네파, 젤롯당, 예수의 제자들 등등 말입니다. 

이렇게 무리를 지어 사람들을 나누다보면 그 그룹안에 속한 이들은 저마다의 특징들이 있거니와 나름 뜻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일테면 왕과 왕족, 총독, 사두개파는 있는 사람들입니다. 돈과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바리새파나 에세네파 하면 종교적 자부심으로 사는 사람들 이라는 특징이 있는 것이지요. 젤롯당하면 자신들의 사명에 목숨조차 아깝지 않은 자부심이 있는 것이고요. 예수의 제자들은 한 때 헛 꿈들을 꾸었지만 그 꿈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다 간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실제 예수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갈릴리 주변에 살던 쉰 중반, 예순 아니 마흔, 서른, 스무살 나이에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사람들, 자신들이 꿈꾸었던 그 나이의 자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 그러나 무언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기다림을 안고 살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렇다고 예수가 헤롯대왕, 빌라도 총독,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사두개파, 바리새인, 에세네파, 젤롯당, 예수의 제자들 등등 그룹을 이룬 이들을 외면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떤 모습을 누리고 살던 그가 놓인 처지나 환경이나, 높고 낮음이나, 갖고 못가짐이나, 생각이 좌이거나 우이거나 그런 잣대들을 몽창 허무러뜨린 맨 사람 하나 하나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다만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가치가 있는 삶을 누릴 권한이 있고, 그 길은 늘 열려 있다는 선포를 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불공정하고, 불완전하고,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끝내 내가 꿈꾸었던 내 모습이 아닌 세상에서 살더라도 “가라, 거기서 살라”고 명하시는 이가 예수였습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그 끝에 기쁨과 희망, 마침내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까닭입니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 곳에서 “사람임을 아는”일이 우선입니다. 

사람끼리 견줄 일이 아니라 사람임을 깨달았느냐를 견줄 일입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이 우리 모두에게 사람임을 깨닫게 하는 물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후배를 위하여! 또한 나를 위하여!

결국엔….

거의 한 달 넘게 휴가 중이었습니다.

나선

뭐 가치관의 혼동이라는 말로 어렵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요? 

이제껏 믿고 살아왔던 지난 세월들이 다 헛 것이었다는 생각과 더불어 앞으로 내가 해 나가고 싶은 일들이 끝내 헛짓이고야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들이 저를 한 쪽으로 막 밀어 붙였답니다. 

그래 정신없이 마구 남의 생각들을 파헤쳐 보았답니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역사를 다시 돌아 보는 것이었고, 앞날에 대해서는 유사한 경험들을 곱씹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유심사관唯心史觀, 유물사관唯物史觀, 민중사관民衆史觀, 기독교사관 등으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사관으로 해석한 한국사 책들을 죽 훑어 보았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 곧 한인 이민자로서 미국의 자영업자들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성공한 사례들을 훑어 스크랩했습니다. 

올 여름 휴가였던 셈입니다. 

결론입니다. 

무릇 사람의 역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두어 주 전에 딸아이가 Haiti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아이의 Haiti행을 반대했었습니다. 

“너와 네가 속한 그룹의 만족을 위한 여행이 될 것이므로”라는 제 반대 의견은 아이에게 묵살 당했고 아이는 잘 다녀왔습니다. 아이는 많이 느꼈다고 했고, 나는 허상만 보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이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딸아이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네가 아이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 역사를 보아라” 라고… 

모를 일입니다. 아마 딸아이는 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딸아이의 아이티 선교로 인해 달라진 것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한달 간 책으로 얻으려 했던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을 길게 늘려보니 역사의 시계는 어느 곳에서건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천국이던, 헤겔이 말하는 자유확대사건,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이던,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이던… 무어라 말하던 어제보다는 나은 내일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이 엄청나게 큰 나선형 그림으로 나아가기에 때론 바닥이라고 느낄 뿐! 

올 여름 휴가 끝.

살아있는 하루의 기쁨

모처럼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바쁘기도 하였거니와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를 담을 형편이 아니었답니다.

 

오늘은 제 세탁소의 오래된 단골 손님인 Jim McKelvey 의 글을 소개 드립니다.

 

이제는 은퇴한 치과의사랍니다.

 

jim mckelvey

 제 가게에 들어설 때 마다 “오늘 하루를기쁘게 살고, 웃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바로 세상을 밝게 하는 일이다”라는 주제로 그가 매주 만드는 명함 하나를 건넨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진들이 그의 명함이랍니다.

 

그리고 제가 주일 아침이면 보내는 이메일 편지의열렬 독자이기도 하고, 그가 똑같이 그의 “일상에서의 기쁨을 나누는 이야기들”을 보내는 멤버의 한 사람으로 저를 선택해 준 덕분에 그의 이야기들에 늘 귀를 기울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답니다.

 

다음은 엊그제 그가 칠순 생일을 보내며 느낀일들을 잔잔히 기록한 편지랍니다.

 

그 이의 허락을 얻어 제 블로그에 번역해올려봅니다.

 

“살아있는 하루의 기쁨” – 함께 나눕니다.

 

Jim McKelvey의 글입니다,

 

< 일흔을 맞으며…

 

지난달 일흔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노래하고, 소원을 빌며, 촛불을 불어끄는 그러한 성대한 생일잔치가 아니었다.

 

하루 저녁에는 저녁식사 후 촛불 하나를 얹은 컵케익이 전부였고, 그리고서는 먼 친지를 방문하여 또 다시 촛불 얹은 컵케익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또 다른 날에는 누이와 함께 점심을 들면서 조용히 생일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나서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촛불과 컵케익 없이 뉴욕에서 이틀을 보냈다. 이렇게 생일 축하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다면, 생일은 그 날에 대해 감사하는 단지 또 다른 하루, 또 다른 멋지고 경이로운 하루일 뿐이다. 1997년, 나는 과연 55회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생의 일흔 한 번째 해에 들어서고 있다.

 

이전에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때 부터 나는 “매일매일이 신의 선물이다”라는 말의 진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15년 동안을 통하여, 나는 하루하루의 가치와 삶의 소중함을 되풀이해서 배워 오고 있다. 내 병이 위대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 뿐이 아니다. 내 병만이 유일한 스승이 아니었다. 지난 11월 이러한 글을 쓰면서, 매일매일 내 삶을 스쳐가는 스승들에게 알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학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그것이 이 메세지를 받는 사람들, 이 “공유 모임”으로 이끌었다.

 

당신 모두가 이 수많은 해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나의 스승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어렸을 때 “Please”와 “Thank you”라는 말을 하도록 나에게 가르쳐준 나의 누이일 지도 모른다. 혹은 캐롤과 내가 처음 결혼하고 보살펴주었을 때 10대 소녀로서 내게 인내를 가르쳐 준 사랑하는 내 처제일 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중 일부는 내가 수강을 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들은 세상에 나가는 새롭고 더 나은 방법을 내가 알도록 도와주신 카운슬러요, 강사요, 치료사 (therapist) 이었다. 더러는 치과의사로서 내 평생직업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 동료 전문가였다. 또한 내게 힘을 주는 그리고 너그럽게 보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저술가였다.

 

아마도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용기와 불굴의 인내를 배웠을 것이다. 당신의 예를 보면서 관용을 배웠을 지도 모른다. 당신들 중 어떤 이들은 “자, 해봐, 힘내!”라는 말 혹은 행동으로 나를 격려했다. 당신에게서 봄으로써 나는 용서의 힘을 배웠다. 당신 신앙의 힘을 보면서 무언가를 얻게 되었다. 나는 당신의 연민을 경험하고 나 자신의 연민을 강화했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직면하고서도 당신이 의연하고 심지어 영웅적인 것을 보았다.

 

당신 중 상당 수는 내가 치과 의사로 일하면서 내 환자였거나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다. 당신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당신의 삶의 이야기, 힘, 고결함, 이기심없는 심정, 창조력, 좋은 유모어를 배웠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 웃었고, 또한 그것으로 부터 배웠다.

 

이 메세지를 받는다면, 당신은 이 경이로운 여정 중 어느 순간, 어떤 식으로든 나의 스승이 되었다. 감사한다. 나의 인생여정은 당신이 있으므로 해서 풍요로워졌다.

 

이렇게 나의 스승목록을 만들면서, “지금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고 있나?” “당신은 여전히 천부의 재능을 세상에서 발휘하고 있는가?” “가족들은 어떤가?” “당신은 내게 어떻게 스승이 되었는지 아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기원하며,

 

Jim,

Dr. Jim,

Jimbo,

Poppy

……….우리 서로의 관계에 의존하는

 

한 수 위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 온종일 당신을 부르는 소리 가운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무엇인지요?

 

뭐 일테면, ‘김군아!’라든지 ‘어이’. ‘헤이’ 또는 ‘김사장’, ‘김선생’, 등등 말입니다. 아마 직업과 나이에 따라 저마다 다 제일 많이 듣는 소리들이 다를겝니다.

 

제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한울아빠”랍니다. 제 아내가 저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세어 보거나 통계를 내보지 않아서 모를 일이지만 그냥 느낌만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루 평균 백번은 족히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랍니다. 물론  아내가 이 소리를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말입니다.

 

부부가 함께 24시간을 사는 이들은 아마 제 느낌에 동의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글을 쓰기 조금 전의 일입니다. 예의 그 아내의 옥타브 높은 “한울아빠!”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이게 뭔뜻이야?”하며 책을 내밉니다.  “뭔데?”하며 받아든 책은 혜민 스님이 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담낭암 수술을 받으시고 지난 주에 chemotherapy를 마치신 장모님께 투병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몇 권 드린 적이 있었는데, 장모님께서 일독하신 후 아내에게 건너 온 모양이었습니다.

 

아내가 손가락으로 짚은 혜민스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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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자의 최고의 표현은 유머입니다. 평화롭고 거룩하고 아주 선해 보이는 상태는 한 수 아래입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왈 경건이 최상인 신자들에겐 낯설 법도 한 표현이지만은 “텍스트text”(교과서)와 “컨텍스트context”(현실)의 차이를 잘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 아내에게 한 한마디랍니다. “무릇 깨달음에는 나이가 없나니…”

 

매사 넉넉히 웃으며 살 일입니다.

 

이미 할머니 반열에 오른 아내는 아직도 유치원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유머가 있답니다.

 

하여 말로써는  제가 한 수 위인데, 깨달음은 아내가 한 수 위랍니다.

 

가라(Go)!

참 제 앞가림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이 넓어서 이것 저것 생각만 많은 사람입니다만, 이 땅을 이민으로 살면서 고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이지요.

참으로 많은 긍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인 이민들 앞날에 장애물 아니면 애물단지가 바로 이 교회라는 생각에 허풍 조금 보태면 잠 못 이루는 그런 날이 제법 있었다고 말씀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뭐 긴 말씀 드릴 요량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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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 이야기는 예수의 이런 말씀으로 끝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표준 새번역 개정판)

“Neither do I condemned you; go and sin no more”(New King James Version)

이 구절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자면 꽤 긴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우선 Go 다음에 나오는 “sin no more”라는 말,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말은 후대 첨가구라는 것이 것이고 예수가 한 원형적 말은 “go” 곧 “가라”라는 말씀으로 끝났다는 것이지요.

근데 어디로 갑니까? 집으로 가는 것이지요. 간음한 여자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 당시에 병든 사람도 다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셨지요. 죄인의 죄를 씻겼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가라(go)”입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요? 

가족에게로, 일상으로, 평범한 생활 가운데로, 이웃에게로 돌아감입니다. 아니 그 곳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성서에 다음 구절들이 다 그런 말씀들입니다.(마가복음 1장 44절, 2장 11절, 5장 19절,34절, 8장 26절, 10장 52절 누가복음 7장 15절, 17장 19절 요한복음 5장 9절, 9장 7절, 11장 44절등등)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 당시에 죄인들(병든 자를 비롯한 사회 하부계층 –쯧쯧, 이렇게 표현하면 좌파가 되겠고- 일테면 소외받은 자들 이라고 할까요- 그것도 좌파?)은 일상사에 있어서 “남들처럼 대접받지 못하는”부류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가라”는 이른바 귀환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맹점이랄까 아님 이민교회의 부정적 측면이랄까 그런 것이 드러나는 까닭은 바로 이 “귀환명령”, “돌아가라”, “가라”하는 명령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기 얽매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이웃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떳떳하게(신앞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하는 원천이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얽매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찰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청정도량(淸淨道場)이란 바로 삶, 곧 일상을 위한 곳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십시요. 이즈음 교회나 사찰(사찰에 대한 부분은 깊이 천착한 바 없습니다만. 이민의 땅에서 말입니다.) 들이  얼마나 이민들을 얽매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펴낸 조선통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행여 오해가 있을까보아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대한민국 오월출판사에서 펴낸 책으로 뉴욕의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거기 옛날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더군요.

“<삼국지> 위지 마한전에는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하고는 도망쳐 ‘소도’라고 부르는 종교행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에서는 그들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도망쳐 온 인민들에게 종교를 초계급적인 것으로 미화함으로써 그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한편 저들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 돌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계급의식”이라는 말이 좀 걸리기는 합니다만 어쩌면 예수의 “가라”라는 말은 소도라는 종교적, 사회적 제약을 깨고 어느 곳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는 명령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민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명령 ”가라”하는 말씀을 전혀 귀 담아 듣지 않는 까닭에서 오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라는 말씀이지요.

믿음이란 무릇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소도”에 머물 일이 아닙니다. “가야”합니다. 몸만이 나니라 생각과 정신과 맘이 “오늘, 내 삶의 현장에 있어야”겠지요.

아 참! 예수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를 주창하기도 하셨지요. 그건 또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애국(愛國)에

재작년 아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뜬 Russell W. Peterson은 DuPont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70대초 공화당원으로 내가 살고있는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며 환경론자이다. 오랜 공화당원 생활을 접고 민주당원으로 그가 당적을 바꾼 것은 199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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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여든 셋에 백 쪽도 채 안 되는 작은 책자를 출간하며 제목을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Patriots, Stand Up!)”>라고 하였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책의 내용이 직정(直情)적이다. 당시 부시행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과 독설, 그리고 애국민임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에 보내는 그의 충언을 읽으면 그가 팔순 노인은 커녕 스무 살 팔팔한 젊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는 9.11참사 이후 불어닥친 미국내의 애국주의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뚤어진 애국심과 애국주의의 선동으로 미국은 처음 국가를 건설하며 꿈꾸었던 참되고 큰 미국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부시행정부로 대변되는 극우 보수 공화당원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내걸었던 전쟁의 당위성 일곱 가지들 일테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계, 우라늄생산을 위한 시설 보유, 독가스로 수천 명의 인명 살상, 우라늄의 대량 유입, 생화학 무기 생산을 위한 연구 시설 보유, 미국의 안전 위협 등의 모든 전쟁 이유들은 단지 구실이었을 뿐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주의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며, 생각있는 미국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 설 것을 주문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미국의 첫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창한다.

 

들어라!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곧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생활 양식을 버리라고 주문하는 오늘날 극단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미국이 울고 있는 통곡의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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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러쎌은 주창한다.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 수 세대 동안 싸워 이룩한 이 위대한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법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이 땅의 삶을 위하여! 전 세계 민중들의 꿈을 집중시켰던 식민주의, 노예제도,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이룩해온 이 땅을 위해! U.N.헌장과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우리들의 기본적 권리들을 위해! 궐기하라!”

 

팔순 노인이 치켜든 열정적 반 부시의 깃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민의 거의 반수는 부시행정부의 지지층들이었다.

 

애국의 길은 생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다.

다만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 곧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아래 상식적인 보편의 가치의 기반 위에 서서 부르짖는 애국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기반을 상실한 채 애국을 호도하는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며 실로 애국자들이 궐기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어찌 미국 뿐이랴!

보편 상식적인 가치를 따져 애국을 논해야만 한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마지막 글

네가 믿는다는 말을 하려거든

 

이 제목 연재글의 마지막입니다.

 

둘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작업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고 기독교 신학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 이라고 하는 이 연속적 사건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져야 할 몫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교회와 목사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말 없이 묵묵히 지고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살리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를 포함한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적 위기 중 하나는 십자가 없는 부활 만을 연속적으로 선포하는 어리석음에 있다. 부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기를 지고 죽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은총이다. 그러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부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책임인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치열하게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해야 한다.

 

위에서 예화로 제시한 몇 가지 이민목회의 경험담들이 가르쳐주는 교훈의 두번째 핵심은 바로 이 십자가 목회와 십자가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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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개척한 이 모든 사람들, 이 모든 노련한 믿음의 대가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려가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군살이 붙어도 안되고, 몸에 기생하는 죄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참여한 이 경주를 시작하고 또 완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그분은 앞에 있는 것, 곧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결승점을 지나는 기쁨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기에, 달려가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든, 심지어 십자가와 수치 까지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 지거든, 그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솟구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유지 피터슨의 번역 메시지)

 

이 텍스트 가운데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핵심적 개념들 다             음과 같은 단어들로 설명 되고 있다.

 

길, 개척, 경주, 달려감, 결승점, 예수, 십자가, 수치, 참음, 적대행위, 영광, 새로운 힘 – 히브리서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날 내가 호주에서 이민목회자로 살아온 33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참고 살아온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목회란 인내의 경주요, 인생이란 누가 더 잘 참나, “참기 내기”의 시합 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설혹 내가 아무리 잘 참는다 하더라도 예수님 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참았다. 예수의 인내가 내 인내의 사표이다. 나는 한 때 너무나 억울해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으로 나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오직 목회란 배신에 대한 신뢰요, 미움에 대한 용서요, 억울함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그냥 묵묵히 참아왔다. 젊은 날, 철 없었던 학생 시절, 부모님의 가숨에 못을 박고, 잘난 척하고 의로운 척 하면서 선생님들과 선배들에게 함부로 막 말을 하며 대들었던 벌들을 지금 그냥 그대로 다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이민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나의 인내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적어도 배 부르고 등 따습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아플 때 병원 가고, 먹고 입고 사는 데 있어서는 큰 고난 없이 지내온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고생이니, 억울함이니 하면서 인내 운운 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일차적 삶의 문제 조차도 해결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목사들과 가정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영주권 없이 불안한 신분 상태로 살아가는 목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하는 목사, 막 노동하는 목사, 택시 운전하는 목사, 타일을 붙이는 목사, 김씨, 이씨, 박씨 라고 불리 우며 험한 일을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 되면 또 다시 몇 명 되지도 않는 교인들을 앞에 놓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말이다.

 

목사 부인들의 삶은 어떤가? 공장에 다니는 사모님, 남의 가게에서 일 하는 사모님, 하숙을 치는 사모님, 시도 없고 때도 없이 밥상 차리고,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택시 운전사 보다도 더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모들이 얼마인가?  그러다가 몸은 병들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집을 나갔다가 변사체가 되어 돌아오고, 그러면서도 허구한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 없이, 심방하고, 상담하고, 전도하며,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는 목사 부인들 ! 이들이야말로 가정부나 식모나 아줌마 측에도 들지 못하는 빗 좋은 사모들이 아닌가? 출발과 과정은 어찌 되었든 오늘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바라보며 참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디아스포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정에 진실로 은혜와 축복이 가득 하기를 기도한다. 

 

원래 목사의 길이란 죽음으로서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행로 이긴 하지만 이민목회자의 길은 더더욱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 만이 가는 길이다. 이 땅에서는 아예 죽기로 작정을 하고 저 세상에서나 잘 살아보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 떠난 선교 여행이 이민목회자의 길이다.

 

여기서도 대접받고 저기서도 대접 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 이 땅에서 존경 받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또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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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인내를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요, 그의 제자로써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그의 스승 예수를 따라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로써 이미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예수의 길이다. 설혹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급이 없다 하더라도 고난은 고난 그 자체 만으로도 이미 값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요, 우리가 참고 인내 해야 할 진정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