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뉴스들 가운데 구글 서비스를 통해 제가 받아보는 특정 항목에 해당하는 뉴스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직업상 세탁업(dry cleaning business)에 대한 뉴스가 있고, 미국내 한인 이민자들의 주업종인 micro business에 대한 뉴스와 미국경제에 대한 뉴스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이 한반도관련 뉴스입니다.

이런 항목들에 대한 영문뉴스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제 이메일함에 들어옵니다.

세월호-이호진거기에 엊그제부터 하나 추가한 항목이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3보1배”라는 한국어 검색을 추가한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 이승현군을 잃은 아버지 이호진씨와 그의 딸 이아름씨에 대한 기사를 받아보기 위함입니다. 바라기는 한국내 언론 가운데 이들과 함께 3보1배하며 이들의 고행에 대한 기사를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랍니다.

좀 사사롭고 사치스럽기까지한 이야기지만 이호진씨의 나이가 제 아내와 같거니와 제가 제 아내의 본 이름대신 즐겨 부르던 이름이 이아름이었다는 사실이 뉴스를 쫓는 정말 하찮은 이유도 되었다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그 나이에 30만번의 큰절을 해가면서 520km를 길을 걷는 부녀의 모습을 잊지 않기위해 부녀에 대한 뉴스를 쫓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교회력으로 사순절기랍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부활주일 이전에 주일(일요일)을 뺀 사십일 동안을 말합니다. 예수가 겪었던 고난을 되새김하면서 오늘 살아있는 자로서 그를 따르고자하는 신앙고백으로 보내는 40일이랍니다.

“예수를 믿는다” 또는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바로 내 자신이 예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나됨” 곧 내 정체성과 “예수의 예수됨” 곧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로 일치한다는 말이지요.

이천년 전 예수가 명령한 “나를 따르라”는 말에 따라 2015년 오늘을 사는 내가 그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상황속에서 했던 것처럼 오늘 내가 사는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물음과 결단으로 살라는 말일겝니다.

이천년 전 예수의 모습 가운데, 그 때의 상황과 예수의 삶을 표본처럼 축약해 주는 성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말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가복음 2:27-28, 개역개정본)

예수시대에 안식일은 바로 법이었습니다. 하여 이 성서 본문은 이렇게 읽어도 무방합니다.

“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사람이 법의 주인이니라.”

그 당시의 법 곧 안식일법에 대해 전해지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 가운데 이런 것들도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이란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그 다음날인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금요일 해질 무렵에 나귀가 끄는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막 집에 도착한 순간 해가 서산으로 꼴깍 넘어갔습니다. 이제 안식일이 시작됐으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물건을 나르거나 옮기는 일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 하루동안 나귀는 무거운 짐수레 굴레를 지고 지내야만 하는 것이지요. 안되었다 싶었던지 예외조항이라는 것이 하나 있었답니다. 한번만 딱 쳐서 나귀에게 매인 수레의 끈을 풀 수는 있다는 조항입니다. 딱 한번만 쳐서 말입니다.

당시 안식일법이란 아주 엄격한 법률이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법은 있는 사람들만 지킬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만 하루를 아무 일도 하지않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란 이미 어느 정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먹고 살기위해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 몸이 성치 않거나 아파서 안식일에 회당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냥 바로 죄인이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사람 특히 없고, 누리지 못하고, 억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일법이란 곧 죄인이라는 족쇄를 채우는 도구였습니다.

본래 성서적 의미의 안식일이란 없는 자, 부려 지는 자, 노예, 비정규직 노동자, 품팔이 등등을 위해 하루 쉼을 주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식일에는 이것도 하지말라 저것도 하지말라는 금지조항들이 하나 하나 추가되면서 (있고 누리는) 사람들이 (없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법으로 바뀐 것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안식일법 만능시대에 예수가 내렸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가히 혁명이었습니다. 이즘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는 가히 좌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를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제임스 콘(James Hal Cone)이라는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교회의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에 정면으로 “No”를 선언하며 백인들이 이야기하는 해방신학과는 완전히 다른 흑인해방신학을 주창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그가 쓴 책 <눌린 자의 하느님( God of the Oppresse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어서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이겨냄으로써 인간에게 아픔의 실체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이다.”

제임스 콘은 “아픔의 실체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오늘날 살아있는 예수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안고 아픔의 실체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3배 1보의 길을 걷고 있는 이호진씨 부녀에게서 제가 느끼는 성서적 예수의 모습입니다.

이들 부녀를 향해 “가만히 있어라”거나 “이젠 그만하라” 나아가 “종북 좌빨”을 뇌까리는 교회나 기독교인이 있다면, 적어도 제가 믿는 신앙의 잣대로 그들은 종교적 사기꾼들일 뿐입니다.

이즈음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하나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의 고난은 세상 도처에서 “여기 지금 나와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노랫말을 “여기 지금 내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곱씹는 일이야말로 이 사순절에 예수쟁이들이 해야만 하는 일일겝니다.

태(胎) – 3보 1배

<황사가 잔뜩 낀 23일 오전 10시, 세월호 참사로 숨진 고 이승현(단원고)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씨가 진도 팽목항 부둣가에 섰다. 참사 314일째 되는 이날, 부녀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도 팽목항~서울 광화문 3보 1배’를 시작했다(유튜브에서 동영상 보기).- 중략 –

100 여일 동안의 약 500km 여정에 나선 부녀는 “참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실종자 가족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호진씨는 “(참사) 1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며 “(우리 부녀가) 30만 번 절을 하는 동안 적어도 세월호를 다시 한 번 떠올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사 전문보기)

오늘자 오마이뉴스가 전하는 기사 <팽목항→광화문 3보1배 “하늘 위 아들 위해 멈추지 않아”>의 도입부입니다.

일년 전 이호진씨와 그의 딸 아름씨는 승현군의 이름 앞에 “고(故)자가 붙고, 2015년 이 추운날 부녀가 함께 세걸음 걷고 큰절 한번하며 500km를 걷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일겝니다.

어느 인생이나 어느 가족에게나 아픔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 누구에게라도 말입니다. 소소한 일상적 삶속에서 누구라도 겪게되는 아픔, 슬픔, 기쁨,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상상치 못했던 재난이 개인이나 가족에게 다가오는 일은 뉴스로는 흔한 일이지만 실제 그런 일들을 당하는 사람들은 뉴스가 될만큼 흔치않은 일입니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꾸리고 사는 까닭은 바로 그런 상상치 못한 재난이 국가 구성원인 개인이나 최소 공동체인 가족에게 닥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고, 재난이 닥쳤을 경우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다해 그 재난으로부터 개인이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국가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1.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2.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3.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4.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5.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6.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호진씨와 그의 딸 아름씨는 지금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500km의 길을 (누구엔가 드리는 것인지도) 모를 30만 번 정도 큰절을 하며 백여일 동안 걷는다는 일은 <인간다운 생활> 을 “포기”’하는 사건입니다.

태

이들 부녀의 행동을 얼핏 이렇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행위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녀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인간다운 생활”을 스스로 포기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긴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국가가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고, 여전히 “노력하지 않고”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는 험하고 먼길을 떠나는 부녀와 나눈 대화를 이렇게 전합니다.

부녀는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가”라는 질문에는 이구동성으로 비관적인 답을 내놨다.

이호진씨는 “실종자 9명 수습하고, 진상 밝히고, 책임자 처벌하고, 법질서 올바르게 확립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우리가 3보 1배로) 광화문까지 간다고 해서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며 “개인적으로 쌓인 한을 조금이라도 길에 내려놓고 싶다”고 한탄했다.

이아름씨는 “정부에 바라는 게 있나”라고 묻자,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될 거 같다”고 싸늘하게 답했다. “별로 기대하는 게 없는 건가”라고 다시 물으니,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 기사를 일으며 오래전 대만 신학자 송천성(宋泉盛, Choan Seng Song)이 말한 “태(胎)의 신학”이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송천성은 ‘태(胎)’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창조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말한 태의 신학은 인간의 자궁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투신의 신학입니다. 이는 어머니가 자신의 몸속에 깃든 생명이 결실을 맺기까지 혼신을 다 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태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희망의 신학입니다. 생명의 궁극적 의미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호준씨와 딸 이아름씨는 죽은 아들과 동생인 이승현군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고통속에 투신하는 여정에 나선 것입니다. 이호준씨 부녀의 투신은 죽은 고 이승현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결실을 맺기 위해 혼신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투신이 “태(胎)”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희망으로 이어지려면 그들의 긴 여정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필수조건인 동시에 충분조건이 될 것입니다.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의 삶은 수난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의 수난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신(神)이 스스로 몸소 겪었다는 고백 위에 있는 것입니다. 신과 사람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 위에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호진씨 부녀가 한 말처럼 그들이 걷는 고난의 삼보일배의 끝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이미 희망을 품은 태(胎)입니다.

눈길 그리고 시편 23편

어제 오후, 눈발이 날리는가 싶었는데 이내 쌓이기 시작했답니다. 일기예보에는 분명 오후 6시 이후에 폭설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시간이 앞당겨진 듯 하였습니다. 그래 부랴부랴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한 시간이 오후 2시였답니다.

평소에는 평지였던 길들이 눈이 오거나 얼음비가 내리면 모두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 언덕길로 바뀐답니다. 평소에 20분이 채 안되는 거리인데 집에 도착하니 3시 30분이 지나있었답니다. 1시간 30분여가 걸린 것이지요. 차가 엉금엉금 기어온 탓이랍니다. 비록 집앞 언덕길을 오르지 못하고 드라이브웨이 끝에 차를 박아놓고 들어왔지만 그나마 무사히 집에 도착한 것이 감사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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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드라이브웨이에 쌓인 밤새 내린 눈과 얼음비를 치우느랴고 또 한시간 반이 걸렸답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머리속에 떠올린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비단 교인이 아니더라도, 처음 이 시를 접하는 사람이라도 읽으면 그저 편안함이 밀려오는 시입니다.

성서에 다윗임금이 쓴 시라고 적시하고 있지만 언제 누가 이 시를 지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답니다.

숱한 주해와 주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편을 주제로 한 설교들은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겝니다.

우선 시편 23편을 읽거나 떠올릴 때에 처했던 나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어제 오후에 눈길에 이리저리 미끌어지는 차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미끌어지거나 쳐박히는 일없이 안전하게 집에 가야지’하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집으로 향할 때는 “뭔 놈의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나?”, “행여 앞이나 옆이나 뒤에 있는 차가 미끌어져 나를 박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들이 이어졌었답니다. 그러다 집에 도착해 바라본 내리는 눈과 눈에 쌓인 동네 풍경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답니다.

위험한 눈길 운전 후에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눈내리는 아늑한 풍경을 보며 떠올린 시편 23편은 그야말로 “신이 함께 하시는 편안함”일겝니다.

그런데 만일 어제 그 눈길에서 미끌어져 어딘가에 쳐박혔거나, 심하게는 내 차가 누군가를 들이박거나 누군가가 나를 들이받아 병원에 누워서 시편 23편을 떠올렸다면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물론 “불행중 다행이다. 죽지않고 이만한 것도 다 신이 함께 하신 은총이다.”라는 고백이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큰 사고가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어 저는 떠나고 남아있는 이들이 읽게 될 시편 23편은 어떤 느낌일까요?

읽은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 곧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듯이, 시편 23편을 쓴 사람(또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편에 대한 숱한 주석 가운데 독일학자 Willy Schottroff의 이해는 아주 독특하답니다.

그는 시편 23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가 쓰여졌던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견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표현에 실제로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해석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 즉 성전안에서의 거주와 대접, 보호에 대한 진술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이 시편을 실제로(예루살렘의) 거룩한 곳에서 피난처를 발견한 사람의 확신의 노래로 해석하는 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Willy Schottroff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사회에 있었던 “도피처로써의 거룩한 곳(예루살렘 성전을 위시한 각지에 있었던 피난도시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Willy Schottroff는 당시 이런 도피처를 찾아 평안함과 편안함을 누렸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회적 또는 경제적 이유에서 – 예를 들어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내지 못하거나 혹은 개인적인 빚을 갚을 수 없어서 많은 빚을 걸머지고 노예로 팔려갈 위협에 처해 있는 경우- 도피처를 찾다가 성전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 굶주림으로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사람들. 임시고용인, 용병 등으로 고분고분 일만 해야했던 사람들. 채무자로부터 긴박하게 추격당하는 사람들. 도망한 노예들. 고향에서 박해를 받아 고향을 등진 정치적 망명자들. – 바로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인도와 보호, 보살핌”에 따르는 평안함과 편안함을 노래한 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시편 23편 머리에 있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첫 선언을 다시 읽는다면 그 의미는 아주 명백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자됨은 더 이상 법적으로 정당한 사람들의 편에 있지 않다. : 즉 여호와는 피의 복수자나 채권자, 또는 노예주인의 편에서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거나 아니면 추상적인 법이 구현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반대로 여호와의 목자됨은 추격당하는 도망자, 쫓김을 당하고 위험에 처해 있는 짐승을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神)적인 목자의 보살핌은 이미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해주고 사회적인 지배자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의 권리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걱정을 해야만 하는 약자, 박해받는 자들을 향하고 있다.>

눈속에서 떠올린 시편 23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나의 평안함과 편암함 넘어선 곳에서 일하시는 목자로서의 신의 모습과 그 신께서 오늘 여기에서 돌보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 인용문구들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펴낸 <성서해석 – 무엇이 새로운가>에 실린 Willy Schottroff의 <시편 23편의 사회사적 성서주석>에 나오는 말들입니다.

잊지 않는 일

어제(18일)부터 이번 토요일(21일)까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있는 힐튼 뉴올리언스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국제학 학회(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주최로 열리는 56차 연례 학술대회(ISA’s 56th Annual Convention)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 학술대회에서 내일(20일) 우리들에게 아주 귀에 익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오후 4시부터 열리는 이 행사에서 한국인 학자들 몇 분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결과를 발표한다고 합니다. 보도는 그들의 연구결과를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발표자 네명은 모두 한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활동하는 분들로서 남태현(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서재정(일본 국제 기독교대학 정치학과), 유종성(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이윤경(미국 빙햄튼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랍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한국의 민주화, 국가론, 신자유주의 정책, 부패 등 각기 다른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이 참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한국 사회 및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임을 드러낼 것이라고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물”<이윤경 (미국 빙햄튼 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참사는 부패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유종성 (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교수)>, 박근혜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의 비민주성이 낳은 결과”<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교수)> 등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하는 연구들인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제 관심을 끌어들인 것은 서재정 (일본 국제 기독교 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신자유주의’라는 말과 ‘한국적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구별하는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장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과정을 신자유주의라고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분단체제’가 파생시키는 국가안보의 필요성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국가가 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적 신자유주의’란 모순구조라는 것입니다.

이 모순구조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라는 말 속에 숨어있던 국가의 폭력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화의 비용과 국가 폭력행사의 결과는 시민사회의 희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답니다.

세월호와 조국분단을 한 평면에 올려놓고 분석하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가 많이 끄덕여졌답니다.

이와같이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분석과 연구는 물론이거니와 실제적으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과 재발방지를 위한 모든 노력들은 “한인”이라는 공동체에 묶인 모든 사람들의 몫일 것입니다.

지난 해 7월, 서울에서 열렸던 ‘2014 서울국제학술대회’에서 울리히 벡(Ulrich Beck) 독일 뮌헨대 교수가 했다는 말은 우리들의 몫을 다하기 위해 꼭 붙들고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고, 정치인들은 과거 관행을 답습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정당성 약화가 거세지면서 정치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민들이 이러한 사태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잊지 않는 일” 말입니다.

여기 날짜로 치자면 오늘이 설날입니다.

ash wed어제는 기독교력으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자신과 인류를 위해 대신 죽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잊지 않기 위해 지키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이었습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의 전통을 잊지 말자는 날이요, 사순절은 구원에 대한 신앙을 잊지 말자는 기간입니다.

“잊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알리는 날들이 연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땅끝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 되리라” – 성서 사도행전(사도행전1:8)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성서 말씀을 되뇌이며 “땅끝까지, 땅끝까지” 이른바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이 한인교회의 유행이 된 일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조금 지나친 비유라고 나무라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이즈음 지구촌 골치거리인 이슬람 국가(IS)의 망상과 한인교회들이 땅끝까지 선교라며 불교, 이슬람 지역을 비롯한 전세계를 향한 자기식 믿음을 내세우는 일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있답니다.

내가 가서 닿을 수 있는 땅끝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언제 어떻게 어느 땅끝에 가 닿더라도 내 코 앞에 언제나 놓여 있는 것은 바로 내 발끝입니다.

바로 내 발끝이 지금 나에겐 땅끝인 셈입니다.

그렇게 지금 내 발끝이 놓인 땅끝에서 오늘 공동체의 문제를 가지고 증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이야기 두개를 전해 드립니다.

<세월호 이야기>

오늘자 한국신문 인터넷판 첫머리를 복사한 사진입니다. 조중동이야 애초 기대조차 없으니 예외로 치더라도 한번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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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있어왔던 노란 리본과 “잊지 않겠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싹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나마 한겨레만 오른쪽 아래 작은 사각형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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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잊혀져 가는 세월호를 여기 땅끝에서 붙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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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8일 일요일 오후 5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김동혁군과 임경빈군의 어머니 김성실님과 전인숙님이 필라에 오십니다.

참사 직후부터 지난 300여일 동안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유가족들과 국민, 그리고 해외 동포들의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 그리고 주류 언론의 외면 속에서도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지난 해 11월 세월호 특별법(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진상규명을 위한 어떠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조사위 설립 준비를 지원하는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는 조사위원에 대한 대통령 임명장 수여 실무를 손놓고 있고 파견 공무원을 철수 시키는 등, 오히려 조사위 설립과 활동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으며,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은 조사위를 ‘세금도둑’이라 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진상규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체 인양조차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 속에서, 언론의 외면과 왜곡이라는 현실 속에서, 엄마들이 다시 한 번 길 위에 나섰습니다. 세월호 참사 피해 당사자로서, 현재까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피해 가족이 처한 입장과 앞으로의 방향을, 동포들에게 정확히 전달코자 먼 길을 찾아 오십니다.

유가족 만남3월 8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글렌사이드에 위치한 필-몬트 크리스천 아카데미(Phil-Mont Christian Academy, PMCA)에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참사 사흘부터 20여일 동안 실종자 구조 과정을 취재한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의 현장기록 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다이빙벨>도 함께 관람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번 자리에서는 한국말을 모르는 분들께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릴 수 있도록, 영문 자막이 들어간 <다이빙벨>을 상영하며, 유가족 간담회도 원활한 소통을 위해 사전번역과 현장 통역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또한 간단한 다과가 준비하고, 아이들과 함께 오실 분들을 위해 탁아실도 운영합니다. 널리 알려주시고, 함께 참여해 주십시오.

덧붙여, 이번 주 수요일(2월 18일) 저녁을 시작해 25일, 3월 4일까지 매주 수요일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 행사경비 마련을 위한 ‘일일식당’ 행사가 있습니다. 간담회 준비팀의 회의장소이기도 한 <토담골>(블루벨 위치)에 오셔서 저녁 식사를 하시면, 식사비용의 25%가 간담회 행사경비를 위한 후원금으로 사용됩니다. 오셔서 맛있는 저녁식사도 드시고, 간담회 준비현황도 살펴보세요. 장소와 일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일시 : 2015년 2월 18일 저녁 6시 이후

장소 : 토담골 (1341 Township Line Rd. Blue Bell, PA 19422 (610) 239- 9260)

관심과 참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필라 세사모 드림

<강정마을 이야기>

또 하나는 강정마을 이야기입니다. 땅끝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땅끝에서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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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소식: 남한내 해군기지 반대 운동  –

미국 전역 영어 순회 강연회: 2015년 3월 17일 – 4월 16

운동가 박희은과 Paco Michelson 특별 강연

포기하지 않으면, 패할 없다”

2007년 이래, 강정 마을 주민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한내 유일한 특별 자치도인 제주도에 대한민국 해군 기지의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 분투해왔다.

해군 기지는 미국과 남한의 이지스  전투 시스템(Aegis Combat Systems)의 본거지가 될 것이며, 이 전투 시스템은 록히드 마틴이 무기를 추적, 유도하기 위하여 생산하였다. 남한 해군 관리에 따르면  이 기지는 20척의 전함과 15만 톤급 크루즈 선박 두 척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한국민들은 남한과 미국 정부의 이해를 위해 문화적 명소와 자신의 땅을 도둑맞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도록 폭력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이 충돌은 미국 신식민주의의 명백한 실례이다.

미국 전역 영어 순회 강연회: 2015년 3월 17일 – 4월 16

운동가 박희은과 Paco Michelson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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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은
: 30년 동안, 박희은은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소규모 공동체 네트웍, “개척자들”과 함께 아시아 전역에 있는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건설해왔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녀는 대한민국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며 때론 울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면서 투쟁했습니다.

Paco Michelson: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소규모 공동체 네트웍, “개척자들”과 함께, Paco Michelson은 아시아 전역 많은 분쟁 지역에서, 가장 최근에는 주민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전쟁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거주하며 일해왔다. 그는 군사중심정책과 억압에 직면하고 있는 제주도의 주민들과 함께 강한 저항을 구축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순회 강연회 스케쥴 (상세 행사 내용은 조만간 발표될 것임!):

Boston: March 16 (Mon) – March 19 (Thursday)

Maine: March 19 (Thursday) – March 21 (Saturday)

NYC: March 21 (Saturday) – March 26 (Thursday)

Phila: March 26 (Thursday) pm – March 28 (Saturday)

DC: March 28 (Saturday) – March 30 (Monday)

LA: March 30 (Monday) – April 4 (Saturday)

SF & Santa Cruz: April 4 (Saturday) – April 9 (Thursday)

Seattle: April 9 (Thursday) – April 12 (Sunday)

Portland: April 12 (Sunday) – April 16 (Thursday)

순회 강연회에 대한 정보 문의 연락처:

Juyeon JC Rhee <[email protected]>

www.SaveJejuNow.org

@SaveJejuNow

Facebook.com/Groups/NoNavalBase

호소문

2007년 이래, 강정 마을 주민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국가 폭력, 기업 세력, 전쟁을 통한 부당 이득 취득, 환경 파괴와 맞서서 매일매일 분투하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열정적이고  비폭력적이었다.

그들의 평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 아주 작은 강정 마을은 이제 남한 전역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의 하나가 되었다. (2012년 현재) 22만 명 이상의 경찰병력이 강정 마을에 상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700명 이상이 체포되어서, 650명 이상을 대상으로 약 200번에 이르는 법정 소송이 행해져서, 대략 27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고, 46명이 구속되었다.

외국인 30명 이상이 입국이 거부되거나, 추방, 입국이 불허되었다. 이 모두가 마을주민의 생계, 지역 생태계, 북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해군 기지 건설을 평화적으로 저항한다는 “범죄”를 이유로 행해진 일들이다.

강정마을 주민 다수는 농부이며, 정의를 위한 그들의 투쟁은 작물 생산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강정마을 지지자들 다수는 풀타임으로 투쟁에 임하고 있으며, 생계수단으로 임시 고용 잡일과 임시 농업 근로에 의존한다. 벌금은 더 높아져 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은 납부할 여유가 없는 수천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정의를 위한 이 투쟁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이들 용감한 평화건설자들(peacemakers)을 생각하시고, 법률 비용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기부를 해주십시요. 기부하려면, 다음 주소에 접속하고  “http://savejejunow.org/donate/”그리고  “Donate Now” 링크에 클릭하십시요. 당신의 기부가 “Jeju legal”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명시해 주십시요.

종교 – 그 모를 일에 대하여

“2030세대의 종교 이탈 등에 따라 10년 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종교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54%에서 50%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 오늘자(2월 12일) 한겨레 온라인판에 실린 “젊은층 이탈로 ‘종교 인구’ 비율 줄어”라는 제목의 기사 첫 문장입니다.

갤럽 면접조사 보고서를 인용한 이 기사에서 특히 20대 젊은이들의 종교 이탈율이 크게 늘어 지난 10년 사이 45%에서 31%로 급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쟁이를 자처하는 제가 “참 잘된 일이다.”라고 한다면 모순일 수 있겠습니다만,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있는 “참 좋은 현상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답니다.

비단 교회 뿐만 아니더라도 널려 있을 문창극이나 황교안류 등의 인간들이 신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나불거리는 말들을 젊은이들이 듣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친일논설선집“하나님의 뜻” 또는 “신의 뜻”이나 성불(成佛) 등을 팔아 제 뱃속과 잇속 챙기는 일에 이골난 곳에 젊은이들이 서성거리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어찌 보면 좀 슬프고 아픈 생각이랍니다.

돌아가신 임종국(林鍾國)선생이 남기신 <친일논설선집(親日論說選集)>에 나오는 일제하 종교인들의 발언들이 2015년 오늘에도 여전한 종교라면 차라리 일탈하는 편이 나을 것도 같답니다.

약 70 – 80년 전 한국의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이 한 말들이랍니다.

안용백(유교, 조선 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 “일본과 우리가 혈연적으로 가깝고 글과 말과 관습이 비슷함이 유교의 진흥에 큰 힘이 되므로 내선일체에 총력을 기하자.”

이돈화(천도교 신파) – “성전(聖戰) 완수를 위한 고행이야말로 진정 내세의 행복을 얻는 것”

권상로(불교, 혜화전문 교수) – “신(新)체제에 협력하여 총본산의 강력한 지휘 아래 총진군하는 것이 바로 모든 중생이 성불하는 길”

이석규(시천교) – “’황도(皇道)’기 바로 동학에서 말하는 세계 개조이니 이 천기를 잃지 말고 동학 대중을 황민화 하자”

신흥우(기독교, 배제 중학교 교장) – “예수님은 ‘그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으니 우리는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인데, 조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만 가능한 일”

정인과(기독교, 조선장로회 교육총무) – “기독교가 국책에 순응하여 구미의존성을 극복하고, 외국선교기관을 철수시켜 ‘일본적’ 기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

심명섭(기독교,조선감리교단 본부 주사) – “전시에 가장 필요한 사상의 통일과 신념의 강화를 위해 국책에 순응하는 진정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자.”

최태용(기독교, 복음교회 감독) –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

임종국선생이 이 책에서 하신 말씀은 오늘날 종교라는 이름으로 제 잇속과 뱃속 불리우는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듯 합니다.

“친일은 90% 이상이 침략 논리의 복창(復唱)이었다. 하지만 태반 이상의 친일자들이 그것을 복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진심으로 동양평화를 믿었고, 황도조선을 예찬하였다. 태반 이상의 친일이 강제적 피동이 아니라 능동이었고, 가식(假飾)이 아니라 진정이었다는 것, 친일의 민족사적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교가 제 정신 차리지 못하면 떠나는 것이 신께 가까이 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神)의 뜻

is점점 그 잔인함이 도를 더해갑니다. 수니파 원리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행태가 그렇습니다. 그동안 연이어온 참수(斬首)라는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살인행위를 거듭해 오더니만 이번엔 산채로 사람을 불태우고 그대로 매장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답니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요르단 조종사 마즈 알카사스베(Mouath al-Kasaesbeh)중위의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답니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물음이 적합한 것이라는 데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뉴스가 있습니다. 지난해 이래 툭하면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이 한국내에서 또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번엔 이명박장로의 좌장이라고 일컫는 이재오의 입에서 나온 소리랍니다.

개신교계 보수단체인 한국미래포럼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예배와 국가안보 특강, 자유평화통일 결의대회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었답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국가발전 방안으로 종북 척결과 게임, 폭력, 동성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이날 축사에 나선 이재오는 대한민국 수립과 6.25 전쟁 정전, 남북통일 등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발언들이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전쟁은 사람이 일으켰습니만 결국 이것을 종전시키고 휴전을 맺고 대한민국을 복원시킨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습니다. 통일에 대한 노력은 사람들이 합니다. 인간들이 통일에 대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만, 결국 통일을 어느날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금방 경제가 파탄될 거 같고 그래도 오늘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내외의 경제를 유지하고 나라가 유지돼 온 것은 결국 한국 기독교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참석자들 – 아멘~) 우리나라에 만약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주일마다 성도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또 교회를 이끌어 주시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나라가 온전했겠느냐.”

하나님의 뜻, 곧 신의 뜻은 과연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 곧 신은 어떤 하나님이고 어떤 신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은 과연 신은 있는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예수쟁이라는 확신으로 사는 사람이지만 이 물음은 여전히 제게도 유효합니다.

“자살 폭파범도, ‘9·11’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보스니아 대량 학살도, 명예 살인도,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 입고 TV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는 세상”은 바로 “종교없는 세상”이라고 선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입니다.

그는 그의 책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 또는 현혹)”을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고 다만 종교란 인류 진화에 따른 부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신이 없어도 인간은 행복하고 도덕적일 수 있으며, 종교는 이 세상에 불행을 가져올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언론인이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신의 존재 여부는 가설이고 논증의 대상일 뿐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는 ‘이야기’>라고 단정합니다.

그는 그의 책 <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신 없는 인간의 삶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대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편이 훨씬 낫다. 인류가 누려야 할 평화와 행복을 위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고 강변합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가 목청을 높였던 때는 9.11사건 이후인 2005년 전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오늘, IS의 무자비한 행태를 보면서, 그리고 엿가락처럼 제 맘대로 늘였다 줄였다 제 입 맛에 맞게 내세우는 신의 뜻에 대한 주장들을 들으면서 이른바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져본다면 IS의 잔혹함보다 수십, 수백배 더한 집단들과 국가들이 존재했던 역사가 있고, 신의 뜻을 내세운 사기꾼들은 언제나 넘쳐났던 것이 사람 살아온 모습입니다.

약 2800여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의 호머가 던진 “모든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All men need the gods.)”는 명제는 바로 숱한 무신론자들의 믿음을 넘어선 곳에 신에 대한 신앙이 존재한다는 선언일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평과 기쁨과 감사”를 실천하고 나누는 일이 바로 신을 증거하고 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일겝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

학생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개의 금요일에 관한 기록이다.>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 이하 작가기록단)이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12월까지 단원고 희생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열세명을 인터뷰하여 펴낸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대한 출판사 서평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라는 말이 절규로 들리기도 하고, 사명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딱히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뉴스를 훑은 것이 아니건만 생각은 자꾸 그리로 몰려갑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박종철 사건’ 은폐 검사… 당시 고문치사 수사 축소·은폐> – 오늘자(2/2) 온라인 경향신문 머릿기사 제목입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사건이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인 셈입니다. 그 사건의 한가운데서 진실을 은폐하여 자신의 직무를 유기했던 자가 세월이 흘러 대법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뉴스를 보며 도대체 우리들에게 30여년의 세월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자 오마이뉴스에는 <10월 10일 10시에 태어난 아이가 ‘종북’의 증거라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머리기사들 가운데 하나로 올라와 있습니다.

“‘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이 기사를 싣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편집자의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편, 피의자는 2005. 10. 10.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해 임신 중인 자식을 북한에서 출산할 목적으로 ‘아리랑 축전’ 관람을 빙자, 방북하여 북한 평양산원에서 자녀를 출산 후 소위 통일둥이 ‘윤겨레’라 이름 짓고, 같은 해 10. 25.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종북인사들로부터 ‘통일전사’란 칭송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으로 황선씨를 구속기소한 검찰측 기록입니다. 사실 제가 이 기사를 클릭했던 까닭은 10월 10일 10시라는 숫자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제 딸아이가 태어난 월 일 시(月日時)이기 때문입니다.

구속된 황선이라는 이는 10월 10일 10시에(시간은 오전인지 오후인지를 명확히 기록치 않아 모르지만 글의 흐름상 저녁시간인 듯) 한반도 북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했던 10여년 전 바로 그 시간쯤 바로 그곳 평양에서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엔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정부가 여행허가를 내주어 약 4천여명 가량이 그 가을에 북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황선씨는 그 중 한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제 아내는 그보다 십오여년 전 10월 10일 오전 10시쯤 이곳 미국 델라웨어에서 딸아이를 낳았답니다.

제 아내가 그 때나 지금이나 10월 10일은 제 딸아이의 생일일 뿐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줄은 모르듯이, 아마 황선씨도 10월 10일은 그녀의 딸 생일일 뿐일 것입니다.

저나 제 아내가 그해 10월 10일에 제 딸아이가 이곳 델라웨어에서 세상에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니듯이, 황선씨 역시 그 때 그 시간 평양에서 자신의 딸을 낳으려고 계획하고 그렇게 실행했다는 말 자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1987년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를 진실로 만들려는 검사가 2015년 대한민국의 대법관이 되려는 현실로 본다면, 아마 황선씨도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그 때 거기에서 출산할 수 있는 능력보유자가 될 수있다는 것이 그리 낯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검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사실을 명확히 정리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 유명한(?) <김대중컬럼>입니다. 제목이 <‘對北’에 올인하는 ‘박근혜 외교’>라는 글입니다.

그는 이글을 통해 미, 중 일 등 강대국들과의 적절한 외교가 우선인데 그를 도외시하고 박근혜정부가 통일에 매달려 대북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속내는 바로 <종북장사>를 하는 조선일보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랍니다.

바로 이 대목들입니다.

<대통령이 철도·도로·특구(特區) 개발 등 대북 사업을 계속 언급하고 남북 대화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면 내각과 장관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것이 최근 박 대통령의 외교 현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명제에 이끌려 자신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혀 보이려는 감상(感想)이 작용한 ‘통일’이라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가는 경험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광장(廣場)과 밀실(密室)

최인훈 광장오늘자(2월 1일) 연합뉴스는 다시 태어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는 ‘광장’ 출간 55주년을 맞아 소설이 처음 발표됐을 때의 삽화 6점을 다시 추가한 개정판을 1일 내놨다는 것입니다.

작가 최인훈에 따르면 1960년 잡지 ‘새벽’ 11월호에 <광장>을 발표한 이후 오늘날까지 모두 열차례 정도 고치고 수정해 왔다고 합니다.

6ㆍ25 전쟁포로인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북, 좌우를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을 택해 가던 수송선 위에서 바다로 자신의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합니다.

작가 최인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소설 광장이 발표되었던 때로 부터 55년이 흐른 2015년 현재 <광장>이 계속해 다시 쓰여졌다는 소식은 서글픔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상황이 전혀 변한 것이 아니라 더욱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1960년 소설 발표 당시 작가 최인훈이 썻던 서문(序文)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공산주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2015년 오늘은 저 빛나던 1960년 4월에 비하면 ‘광장(廣場)과 밀실(密室)’ 모두 한반도 남북에서는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등 무엇이라 부르던간에)의 소유가 아닌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최인훈이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대중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고 썻던 바로 그 ‘광장과 밀실’ 말입니다.

다만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했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바다에 투신하는 죽음을 택했지만, 2015년 오늘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하는 현실의 주인공들은 황선처럼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신은미처럼 강제추방을 당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도피보다는 살아 감옥에 가고 추방당하더라도 ‘광장과 밀실’을 누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야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반도 남북 그 어디서건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모두가 ‘광장과 밀실’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황선이 되고 신은미가 되어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노력할 일입니다.

당신 탓

내 나이 스물 다섯에 헤어져

서른 다섯해 만에 만난

열살 위 선생님께서

던지신 첫 말씀.

 

“어째 키도 안 크고…”

 

그 말씀을 함께 들은

내 아내와 아들과 딸이

모두

선생님께 자랑스러웠던 까닭은

 

“어째 키도 안 크게…”

 

내 나이 환갑, 진갑이 되도록

뵙지 못했던

서른 다섯 해 동안

정신으로만

 

그렇게

“키보다는 정신이라고”

가르쳐 준

 

바로

당신 탓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