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연가 7

<그리운 얼굴들>

도상_1~1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지금도 변화의 연속인 곳이 대한민국입니다만 그 변화무쌍한 것들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정책과 입시제도일 것입니다.

나이가 한 삼년 차이만 나면 아마 다른 교육정책과 입시제도 아래서 성장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입학을 할 때부터 달라진 것은 이른바 동일계 진학이라고 해서 인문학교의 경우 고등학교를 무시험으로 그대로 그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일테면 A중학교를 나왔으면 한 울타리에 있는 A고등학교로 무시험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업계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중학교만 있는 경우였지요. 한 울타리에 고등학교가 없으니 갈 데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 각 인문학교의 학급 수를 조금 늘린 것이지요. 그렇게 늘린 숫자만 입학전형을 통해 학생을 선택하였던 것이지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도대체 어떤 짱구가 그런 입시제도를 생각해 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평등, 형평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어쨋거나 제가 다니던 중학교 한 울타리에 같은 모표를 쓰는 고등학교는 경기상업고등학교였답니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 거의 많은 아이들이 별 선택없이 한 울타리 안에 학교를 선택했지요.

물론 제 짝궁 상태처럼 비좁은 경쟁을 뚫고 당시 일류학교라는 인문계 K학교에 입학을 한 경우도 있으니까 다 제 탓이겠지만, 공정한 게임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지요.

한국의 돌아가신 두 분 대통령님께서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셨지요. 두 분 다 정말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이시지만 두 분들께 따라다니는 수식어 “똑똑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상업학교를 나왔다는 말에는 불만이 좀 있답니다.

똑똑한 아이들도, 가난한 아이들도, 잘 사는 아이들도, 덜 똑똑한 아이들도 갈 수 있는 곳이 실업계 학교이고, 실업계학교가 대우받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상고를 나와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실업계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올 초에 받은 “도상(道商) 45회” 수첩을 꺼내 보았습니다.  이젠 다들 중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참 좋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제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십니다.

“고난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늘 영어로만 하셨지요. Suffering Jesus라고요.

그리고 또 한 분. 박대위교수님입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 넣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입니다.

제가 공부를 지지리 못했습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수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지요.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고요.

영어선생님이시던 김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저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지요.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제 길을 선택해 주셨지요.

그 김선생님 훗날 제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제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답니다. 그래 제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지요.

아! 제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교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아내는 중학교 또뽑기 학번이라 세검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지요.

백년대계라는 교육정책만이라도 일관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신촌 곳곳에 내 걸리기 시작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