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신촌노타리
제 유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을 보낸 신촌은 제 부모님들께는 네 남매를 키워 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지요.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제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지요. 안양유원지였습니다. 그 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습니다. 그 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셨답니다.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지요.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 받았지요.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가 들어 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지요. 도장포는 이동식 간이 점포였습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아버지는 도장 파는 도구들과 함께 온 종일을 사셨습니다. 저녁이면 이동점포는 시장안 안면있는 분의 가게에 맡겼지요.
아버지의 도장포는 일취월장이었습니다.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의 간판이 올라간 것은 제가 국민학교 들어 갈 무렵이었지요.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지요.
아버지는 엄청 부지런 하셨지요.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답니다. 일제시대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이셨지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지요.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지요.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까닭을 말씀하셨지요.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답니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면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지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십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형제갈비집과 맞은 편에 조선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조선옥 뒷 골목에 있던 집들이었지요.
그리고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지요.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답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지요.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지요.
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지요. 한 반이었던 태균이보다 제 성적표가 조금 낫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눅들어 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지요.
우리 어머니.
그 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지요.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 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지요.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랍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답니다. 우선 제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답니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제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저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 문(門)안 출입은 제 차지였지요.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답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 하나를 그려주시고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지요. 제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지요. 그 문안 나들이는 제게 큰 즐거움이었지요. 사춘기로 접어 들기 전까지 말이지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집을 갖게 되었지요.
아직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라고 하지만 자꾸 입에 붙어 놓질 못합니다. 이따금 제 아버님께서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는 것처럼) 졸업하기 전 일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