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 금요일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던 날을 기리는 성(聖) 금요일( Good Friday) 밤이다. 지난 일요일인 종려주일 이후 몇 번을 되새겨 다시 읽어 보는 마가의 기록이다.

마가는 예수에 대한 16장의 기록 가운데 1/3이 넘는 분량에 예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삶을 담았다.

마가복음 11장은 예수가 자신의 마지막 삶의 여정 한 주간을 시작하는 종려주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갈릴리 출신 시골사람 예수가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인 도시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그에게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호산나!’ 곧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외침이었다. 예수가 곧 군중에 의해 신이 되는 시간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예수의 행적과 말씀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가던 마가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이르는 첫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마가복음 14장 한글 공동번역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를 죽일 음모—–과월절 이틀 전 곧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하였다.>

예수 죽음의 시작은 곧 누군가의 음모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다.

‘그 누군가’는 곧 당시 체제의 기득권자들이었다. 이어지는 마가의 기록에는 예수를 배신한 제자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를 부인한 제자, 예수를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나아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를 신의 자리에 올렸던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며 악을 써 외치는 모습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한 예수를 기리는 성 금요일 밤이다.

죽음을 맞기 전 예수는 이런 기도를 했다고 마가는 전한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Good Friday라는 반전(反轉)의 용어는 예수가 구했던 그 뜻을 헤아려 깨닫기 전에 쓰기엔 많이 가볍다.

그렇게 예수는 군중이 아닌 스스로의 뜻으로 신이 되었다.

2022년 다시 마주 한 성 금요일 밤. 오늘도 누군가는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권유하고, 누군가는 또 배신을 일삼거나, 부인하거나 외면하고….

누군가는 그들이 누리는 오늘의 이익을 위해 꾸준히 음모를 꾸미고.

마침내 예수가 마지막 숨을  내쉬던 그 밤에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는 마가의 기록.

당시 예수 부근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 그들을 통해 그 어둡고 처참했던 밤에서 빛을 그려낸 마가.

성금요일에 다시 마가를 읽으며.

성(聖)금요일 그리고 기억

성(聖)금요일, Good Friday 밤입니다.

예루살렘과 로마 권력, 그리고 당시 평범한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수난을 받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일을 기억하는 날, 밤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은 바로 이 날 밤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그의 죽음은 나와 인류의 속죄 제물이었다는 신앙고백이 시작된 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밤입니다.

예수의 부활 곧 믿음 가운데서 일어날 나와 인류의 부활은 바로 오늘밤이라는 예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聖)금요일인 동시에 Good Friday입니다.

그리고 이천여년 전 이 날 밤 일어났던 일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해 우리들에게 남겼습니다.

<유다인의 대사제는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 가서 속죄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나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 히브리서 13 : 11-13, 공동번역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죽음이 그가 수난과 고난을 겪었던 예루살렘 성안이 아닌 성밖에서 이루어진 것에 촛점을 맞추어 우리에게 그 죽음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이 성문밖에서 이루어졌다는 히브리서 기사의 해석은 오늘을 예수쟁이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명쾌한 삶의 해답을 줍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고자하는 삶을 살아가고저 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예수를 삶의 구세주로 믿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성문 밖에서 그리고 성문 밖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와같은 삶을 추구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39940_29753_918오늘자 기독교타임즈는 <교회협 세월호 침몰현장에서 눈물로 성금요일 예배>라는 제목으로 팽목항을 찾아 예배를 드린 교회협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 말미에 이덕주 감신대 교수가 한 말들이랍니다.

“역사왜곡과 같은 역사적 실수가 반복되는 이유는 ‘기억’하지 않는데 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과 전망은 항상 같이 가야하며, 미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도 정확한 기억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비전을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현장에 참여한 이유 역시 아이들의 꿈과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고, 살아남은 우리는 이들의 비전을 이뤄야할 의무가 있다.”

“이제는 잊으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기억을 방해하는 것이고 이는 역사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2015년 성(聖)금요일밤, 제가 무교회주의를 주창하지 않는 희망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