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그리고 믿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40일 동안 낮과 밤을 연속해 비를 내렸다. – 노아의 홍수

하나님은 히브리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케 했다. – 출애굽 이야기

모세는 야훼 하나님에게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지냈다.  – 십계명 이야기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천사가 주는 음식(아마도 물과 소금이었을 듯)만 먹고 40일을 보냈다. – 엘리야 이야기

에스겔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을 벌을 상징하는 뜻으로 40일 동안 옆으로 누워 지냈다. – 에스겔 이야기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하였다. – 예수 이야기

예수는 부활 후 40일 만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 예수 승천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하고  일년 교회력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순절(四旬節) – 바로 40일입니다.

유대교, 유대인들의 전통과 오늘날 천주교와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그 뜻이 깊습니다.

성서를 중심으로한 사고 체게에 있어 상징적인 숫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를테면 유일신의 1이라는 숫자, 삼위 일체의 3이라는 숫자, 십계명의 10, 이스라엘 부족과 신약의 예수 제자들의 숫자인 12,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숫자 40, 하나 더 첨부하자면 예수의 나이 33  등등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숫자들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개념과 똑같이 이해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영역입니다.

일테면 40일 동안 누가 무엇을 했고, 40년 동안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하는 이야기들에서 실제로 오늘날 우리들이  지내는 시간과 동일한 기간을 뜻한다고 믿는 것, 바로 믿음입니다.

뭐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이기에 말입니다. 그래 “믿음”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징입니다. 숫자가 어떤 상징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징을 엉뚱하게 해석하다 보면 이른바 삼천포로 빠져 사교(邪敎)에 귀의(歸依)하기 십상이지만>

그런데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나 민족 고유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숫자들이란 대부분 어떤 상징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고대의 시간관념이라는 것이 오늘날 처럼 정교한 것이 아니어서 실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느낌이라는 관념의 숫자일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이야기한다고 하여도 믿음에 크게 방해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일테면 성서에서 말하는 숫자와 시간의 개념들 가운데  40이라는 숫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개념 안에서 아주 긴 시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기 힘든 정도로 오랜 시간의 개념으로 40이라는 숫자가 쓰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상징하는  이전과 이후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쓰여진 숫자가 바로 40이라는 숫자입니다. 옛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온다, 아니 왔다라는 뜻을 지닌 숫자가 40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세월호 집단 생수장사건의 한 피해자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40일을 견디어 내다 끝내 쓰러졌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원컨데 무엇보다 김영오라는 한 생명이 꺼져가서는 안된다는 소망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믿음은 곧 “고백”입니다.

일천번 아니 일만번의 기적을 보여 준다한들 고백이 이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 한순간 찰라적인 현상을 단 한 사람이 느꼇다 하더라도 그 고백을 세월따라 자자손손 이어지는 것을 통해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의 전통, 유대교의 전통 그리고 기독교의 경전에 나오는 40의 의미도 그렇게 형성된 것입니다.

40이제 김영오의 40일은 믿음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김영오의 40일이 한국인들의 역사를 가름하는 일대 상징이 되느냐 마느냐는 오늘을 사는 한인들의 선택입니다.

그의 안녕을 빌며.

준비 – 갈릴리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1 

비록 기독교의 기원이 갈릴리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운동의 중심은 곧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보다 후대에 속한 신약 성서 책들은 실제적으로 갈릴리에서의 기독교의 존재와 그 운명을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무시는 초기 기독교 안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실로 최근까지도 계속되었다. – 엘리옷 빈즈(Elliott- Binns)의 갈릴리 기독교(Galilean Christianity)에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후(세례요한과 결별한 후)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나가시기 전에 예수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행보를 마태, 마가, 누가는 한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비교적 짧게 이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그 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가복음 1 : 12 – 13 

반면 마태와 누가는 광야에서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마귀의 세가지 유혹 곧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의 예수

세 복음서가 똑같이 전하는 사실은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40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군데 등장합니다. 인생을 40년 단위로 살았던(왕자 40년, 유목생활 40년, 히브리 지도자 40년) 모세가 히브리백성들과 애굽을 탈출한 후 광야에서 지낸 세월이 40년입니다. 또한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으로 지내기도 하였습니다.(출애굽기 34 : 28) 

엘리야 역시 광야에서 40일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열왕기상 19 : 1 – 8) 그리고 교회사시대에 이르러 지키게 되는 사순절기의 40일이 있고,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광야 생활 40일이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40일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전(前)과 후(後)의 상황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40년 단위 인생은 그 때마다 매번 그의 삶의 방향과 목적, 의미 등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이었습니다. 특히 모세의 40일 금식 사건의 전과 후 사이에는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 간에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십계명을 부여받는 시기였습니다. 히브리백성의 40년 전후 상황은 노예상태로 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누리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상태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엘리야의 40일은 도망자 신세에서 야훼 하나님의 명을 받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전진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바뀌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고난과 수난, 처절한 패배인 듯한 상황에서 부활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예수의 광야 40일 준비기간은 옛 세상이 새 세상으로 바뀌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40이라는 상징적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과 후가 완전히 뒤바뀌는, 노예에서 누구나 신 앞에서 홀로 서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독립된 인격으로, 절망적인 도망자 신세에서 삶의 충만한 의미와 의욕으로 넘쳐나는 활기찬 삶으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아픔과 한계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는 삶에서 죽음까지도 이기고 부활하는 기적을 맛보는 그 뒤바뀜 현장의 의미를 되새김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굶주린 가운데 마귀에게 받은 세가지 시험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 요세푸스가 전하는 1세기 곧 예수 전후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사건들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파두스(Fadus)가 유대총독으로 있을 때(기원 후 45-46년 경) 튜다스(Theudas)라는 한 마법사가 수많은 군중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튜타스는 자신이 선지자라고 무리들을 속이면서 명령 한 마디로 요단강을 갈라 걸어서 강을 건너게 해줕테니까 모두 요단강으로 모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에 많은 무리들이 그의 말에 현혹되어 요단강으로 모여 들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5장 1” 

“한편 유대인이 처한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유대 전체가 강도와 사기가 들끓는 범죄의 소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벨릭스 총독은 매일 수많은 강도들과 사기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8장 3” 

“이 강도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온갖 악과 불의로 가득차게  되었다. 게다가 사기꾼들과 협잡꾼들은 자기들이 직접 이적과 표적을 행할 터이니 광야로 나가자고 백성들을 현혹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8장 6” 

요세푸스가 예루살렘과 유대 전역에 강도떼들과 사기꾼들이 들끓고, 각종 기적과 이적들을 행한다는 가짜 예언자난 거짓 메시야들이 넘쳐 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시대는 바로 신약성서들 곧 바울서신들을 필두로 하여 복음서들이 막 쓰여지던 때였습니다. 

요세푸스가 강도나 도둑이라고 적시한 사람들은 거의 열심당(젤롯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요세푸스는 로마로 귀화한 유대인입니다.) 특별히 주시해야 할 것은 가짜 예언자들, 거짓 메시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종 기적과 이적들을 미끼로 하여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의 독립을 갈망하던 백성들을 광야로 모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참혹한 죽음 뿐이었습니다. 

로마군들은 위에 튜다스의 말에 속아 요단강가로 모여든 유대백성들을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여 몰살을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튜다스를 전후해서 등장했던 여러 가짜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를 중심으로 모였던 유대인들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짜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들은 당시 백성들의 절실한 요구와 바램을 자신들이 들어주고 해결해 줄 수 있다며 기적과 이적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번번히 속았고, 그들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들은 바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절실했던 문제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바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언이었으며, 그 예언의 성취자가 자신이라고 하는 자기확신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그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