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0

제 4강: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1.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지난 3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학의 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1) 인문학을 하는 이유와 목표 설정 (2)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적 흐름 (3) 인문학은 어떻게 하는가? 인문학의 방법론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인문학 각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출발점입니다.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생각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1) 먼저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직 사람만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왔으며 동시에 이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여겨왔습니다. 인간은 진정 이성적 동물이라고 확신 하십니까?

(2) 두번째 질문 입니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곧은 낚시줄을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리는 강태공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둘을 비교해 볼 떼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게 됩니까?

(3) 세번째 질문입니다. ‘이 문제, 혹은 이 사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나 사건에 대하여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 견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면 판단(생각)을 보류하시겠습니까? (예컨데 지난 주일 당신네 교회 목사의 설교나 신부의 강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트럼프가 주장하는 America First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나도 문신을 하겠다’, ‘그 남자 친구와 함께 몇 년 정도 살아보고 나서 결혼 할지 안할지를 생각해 보겠다’, ‘나는 그 흑인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당신 자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난 후에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주로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까? 소위 ‘생각하는 것’은 언제 일어나는 일일까요?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갑작스런 일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낯섦’과 부딪치게 되었을 경우에만 생각을 하시는 편 입니까?)

‘생각’에 대하여 서양과 동양은 제 각기 달리 이해해 왔습니다. 서양은 긍정적, 적극적이고 동양은 소극적, 부정적입니다. 서양은 인문학적이고 기능적인데 반하여 동양은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라’ – ‘생각하지 말라’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다른 입장을 정리해 봅시다.

  • 생각하라 – 서양 인문학의 기본 틀 – ‘생각하기’

파스칼(Pascal)은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 마다 생각하고, 생각을 통하여 판단하고, 판단을 통하여 결정하고, 결정을 통하여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는 존재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861, 프랑스 철학자)의 말도 비슷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동안은 생각하고 생각하는 동안은 존재한다. 존재가 멈추어지면 생각도 멈추고 생각이 멈추면 존재도 멈춘다’

서양의 인문학은 생각 Thinking, 사색 Speculation, 사유 Meditation를 인간 만이 지닌 독특한 기능이요, 인간을 인간되게하는 특징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하게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 Reason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생긴 것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성이 없는 존재로써 간주 되거나 동물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 생각하지말라 – 동양사상의 최종적 목표 – ‘생각하지 않기’

채근담에는 ‘무년무상無念無想’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이 많으면 번민이 많고 염려가 많으면 고통도 많다’고 합니다.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유대교의 지혜문학에도 이런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동양이나 서양의 종교인들이나 성현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슷합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무상無想을 무상無相’과 동일시 했습니다. 무상無相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상我相, 곧 자신의 생각과 생각의 뿌리인 고집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인상人相,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어떤 다름과 차이를 구별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셋째는 중상衆相, 곧 인간성 속에 있는 자연스런 본능, 식욕, 성욕을 포함한 일체의 욕구를 모두 버리는 것이요, 넷째는 수상壽相, 즉 살고 싶어하는 생존의 요구를 포함하여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는 것 입니다. 자기도 생각지 말고 남도 의식하지 말고 욕망에 매이지 말고 오래 살고자하는 마음 까지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무념무상無想無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는 생각이라는 것이 근대 이성주의에 앞선 고대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유욕과 연결되는 범죄 행위와 속결된다. 잊어버려라. 잊어버렸다는 사실 까지 잊어버려야 그게 진정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무심無心이라 했습니다. 무심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 모든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상태, 곧 집착執着을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고의 이상적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속좁은 고집을 버려야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7

제 3강 – 1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1

인문학도 여러가지 학문 중에 하나 입니다. 인문학은 종교적 수행이나 명상이 아닙니다.

우선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 학문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이해는 Aristoteles가 그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학문’(academy), 혹은 ‘학문연구’(academic study)란 “자연, 인간, 인간사회에서 나타나거나(현상) 감지되거나(느낌) 경험(관찰)되거나 생각(사유와 판단)되는 그 어떤 현상, 운동, 행위, 경험, 사유, 판단, 주장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연구, 설명, 증명, 토론, 정리, 정돈, 응용하는 인간의 일체 이성적 행동”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이론적이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이 필요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감정적 설교나 설득, 종교적 명상이나 기도, 혹은 주관적 자기체험을 일반화하거나 객관화 할수 없습니다.)

Aristoteles는 학문의 영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지는 현상계(現象界)입니다. 즉 우리의 오관(五觀)으로 경험되는 세계가 첫 연구의 대상 입니다. 이것을 그는 형이하학(形而下學)이라고 했습니다.

Physics, 즉 눈 앞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다루는 물리학, 수학, 화학, 천문학, 기하학, 지리학, 의학, 농학을 비롯하여 이를 응용한 제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법학, 등 제반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현상과 사회 현상을 다루는 학문 일체를 형이하학 이라는 이름으로 묶었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히 물리학과 천문학, 수학과 기하학에서 출발했던 형이하학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분화 되었습니다. (의학, 농학, 정치학, 법학 등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서 같은 학문들 사이에서도 서로 소통이 않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최근엔 융합학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감촉되지 않는 세계, 즉 현실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분야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뒤에 있는 이면의 세계’를 Metaphysics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물리학, 즉 physics 뒤에 meta 놓여 있는 학문 philosophy이 모든 학문의 본질을 다루는 근본학이라고 보았고 이를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혹은 ‘제일 철학’ Proto Philosophia 이라고 이름했습니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그 접근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를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1)  2004년 Mexico만에서는 Hurricane Charlie가 Florida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Orlando시에서는 엄청난 폭리가 있었습니다. 2불 짜리 ice bag 하나가 10불로, 40불 짜리 모텔 방 하나가 200불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 미 의회와 행정부를 포함한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취 할 수 있는 조치는 ‘재난 발생 지역에서의 가격 폭리 처벌 특별법’의 제정 입니다. 이것이 형이하학의 세계에서 다룰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은 선한가 악한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과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인간성 속에 있는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M.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2) 이명박 정부는 막대한 세금을 들여서 거대한 토목공사 사업인 4대강을 개발했습니다.형이하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력의 증가, 실업자의 감소, 산업의 활력, 국토의 개발과 같은 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한번 파괴하면 다시 복원이 가능한 것인가?’ ‘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은 우리 후손 들에게도 물려주어서 고루 함께 써야 할 인류 모두의 유산이 아닌가?’

(3) 최근 박근혜 정부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력을 비선 실세와 함께 부당하게 남용하였다는 혐의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당하여 헌법재판소의 심리에 의해 파면되었습니다.

이 대통렬 파면 과정 속에서 많은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여러가지 개인적 이해관계나 친소 관계를 따라 촛불이니, 태극기니 하면서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면서도 또 법을 지키자, 법질서대로 하면 된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형이하학적 접근법입니다.

인문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의 목표는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람은 정직할 수 없는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4)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대통령 후보에 나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자리 창출, 실업자 구제, 복지 수당 증액, 경제 안정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모두 정치에 대한 형이하학적 접근법입니다.

인문학자들은 ‘사람은 과연 밥만 먹고 사는가?’ ‘돼지의 행복도 행복인가?’ ‘진정한 행복과 참된 평등을 이루는 벙법은 무엇일까?’ ‘물질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가?’ 같은 것을 화두로 제시 합니다.

– 기타 우리는 Boat people 이나 asylum seeker 문제, 혹은 FTA 문제, America First, Brexit 같은 정치-사회적 잇슈들을 가지고서도 인문학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를 살펴 볼 수 있겠습니다.

모든 학문은 저마다의 방법론이 있고 그 방법론에 따라서 세운 가설과 목표를 향하여 연구, 추진 하게 됩니다.

방법론은 학문 마다 다르게 마련이고 또 같은 학문 사이에서도 여러가지 차이가 있읍니다. 원리는 하나라고 하더라도 방법은 다양 합니다.(One Principle, Many Methods) 방법론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는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인문학 공부의 첫 출발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이나 동양적 가부장적 사고를 지닌 이들은 여기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혁명과 질문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6

제 2강 – 3 : 무엇을 ? (What ?) – 다시 사람을 묻는다

8. 둘째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휴매니즘(Enlightenment Humanism)인데 이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인본주의 인문학(人本主義 人文學)’ 혹은 과학주의 인문학, 실증주의 인문학 등으로 부를수 있습니다. 이는 르네쌍스 이후 꾸준히 상승되어 온 인간 이성의 절정기에서 태동된 인문학입니다.

‘이성적 동물로써의 인간’이 우주와 만물의 주체이고 이 인간을 인간되게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보았던 시대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그 시대의 사상을 알 수 없습니다. 18세기는 한 마디로 ‘혁명의 시대’입니다.

크게는 두 가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영국을 중심한 산업혁명 입니다(The Industrial Revolution). 18세기 중반 부터 19세기 초반 까지 이어진 과학, 기술의 혁신과 이에 따른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대 변혁 운동입니다.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Arnold Toynbee 입니다. 산업혁명은 역사 이후 인류가 오랫동안 생존의 방식으로 여겨왔던 수렵과 농업 경제와 수공업 체제를 공장, 공업, 기계산업 체제로 전환 시치고 거기에 따른 ‘전문화’와 ‘분업화’를 촉진 시킨 혁명적 전환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산업혁명이 가능하게 된 데는 그 이전에 괄목 할 만한 몇 가지 과학기술의 발명과 발견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첫째는 신소재의 발견 입니다. 종래에는 나무나 숯을 통해서 얻어드렸던 에너지를 석탄과 구리 등 광물 자원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이 새로운 에너지를 통하여 증기기관과 방적기계를 발명해 내고 석유 재품과 전기 에너지가 발전 되었습니다. 셋째는 교통과 통신의 발전이 가속화 되었습니다. 증기 기관차, 증기 기선, 자동차, 전신, 라디오 등이 연이어 발명 되었습니다. 넷째는 생산 체계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적은 인력을 가지고 높은 생산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는 노동력의 전문화와 분업체계가 형성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Richard Arkwright, James Hargreaves, 킹덤 브루넬(Brunel),새무엘 크롬튼 등이 각종 형태의 방적기계와 James Watt가 증기기관을 발명해 냄으로 각종 제철, 제강 산업과 석탄을 통한 제련 기술 등으로 산업혁명의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산업혁명은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과 함께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떠러진 것이 아닙니다.

한편 산업혁명의 영향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부분이 있습니다.

긍정적  부분은 그 이전의 정치-경제적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적 산업사회를 이루게 된 것 입니다. 종래의 지주계급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신흥 산업 브르조아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농노사회는 사라지고 새로운 도시 임금 근로자 계층이 나타났습니다. 더 나아가 이와같은 경제구도의 변화는 귀족들과 지주들의 지배 계급을 무너뜨리고 신흥 브르조아지인 중산층 노동자 계급을 통하여 민주사회를 향한 교두보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는 보편적 선거제도를 통한 시민 혁명의 불을 지피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시민의식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산업혁명은 어두운 측면도 만들어 냈습니다. 기술의 혁신과 공업화는 인간과 사회를 비인간화시켰 습니다. 도시화와 거기에 따른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나타났 습니다. 환경 오염, 인권의 탄압, 장시간의 노동(산업혁명 초기에는 최저 노농 시간을 하루 12 시간으로 했다), 임금의 착취, 여성과 아동의 노예화(어린이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시킬수 없다는 법), 성적 착취, 전염병 등 세상을 참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 영국은 이런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실업자의 급증과 사회 범죄의 증가를 새로운 식민지 개척으로 연계시켰으나 결국은 칼 마르크스를 중심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두번째 혁명은 시민혁명입니다. 이는 초기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Bloodless Revolution)과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은 물론이고 이후 미국의 식민지 독립운동에 이르는 일체의 절대왕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적 시민사회를 세워나간 정치적 민주-인권운동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 입니다.

잉글랜드에서 ‘왕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다스리지는 못한다’라는 선언은 의회의 승인이 없이는 절대 왕권이라 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불란서 혁명은 세금과 착취와 물가와 높은 신분제도 속에서 드디어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하면서 ‘앙시 앵 레짐’(Ancien Regime), 즉 왕권신수설에 기초했던 절대 왕정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고 루이 14세와 16세 및 마리 앙뚜안넷을 단두대 위에서 처형했습니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과 베르사유 궁전을 무너뜨리고 1789년 8월 26일 마침내 ‘프랑스 인권선언’을 만들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초로 한 이 선언은  생존권, 저항권, 소유권, 평등권, 투표권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임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피지배자들이 유혈 혁명을 통하여 독립과 자유를 쟁취해 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는 흔히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신본주의에 대한 대칭 개념으로써 이성주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천부적 권리를 회복하자는 운동에서 시작된 것 입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문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천부적 인권과 자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인간 평등의 신념을 이성적으로 깨우쳐 준 근대 인문학이 세운  쾌거 입니다.

9. 세번째는 20세기 이후의 인문학입니다. 여기에서는 두번에 걸친 세계 대전을 거쳐오면서 집단과 전체에 함몰되어온 ‘신뢰 할 수 없는’ 인간 이성에 대한 반동이 나타납니다.

18세기 이후 최고조에 이르렀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모두 무너졌습니다.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 존재라고 말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인간화(Dehumanization)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야말로 이제는 사람다운 사람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질문하게 되었 습니다.

‘처음에는 신이 인간을 속였다. 그 다음은 물질이 인간을 속였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이 인간을 속였다’는 슬픈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 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거쳐 키엘케골, 하이덱거, 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자들과 수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그래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개인과 주체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 이 시대의 인문학은 ‘인간주의 인문학’으로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를 우리는 Humanistic Humanism이라고 부릅니다. 싸르트르, 까뮤, 하버마스, 글리크, 리프킨, 릿쩌, 푸코, 촘스키, 싱어 등등 많은 현대의 지성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입니다.

‘인간은 노예다. 인간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물질의 종이고 권력의 노예다.’ 이것이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할 숙제 입니다.

  1. 맺는 말 입니다.

서구 인문학의 세 가지 큰 흐름을 살펴보았습니다.

  • 르네쌍스 인문주의에서 출발하여 (2) 계몽주의 인본주의를 거쳐서 (3) 마침내는 20세기 인간주의로 이행, 발전, 변화되어 온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핵심을 거듭 강조 합니다.

서구에서의 인문학은 그 앞에 어떤 형용사나 접두사를 붙인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주제 입니다. <사람공부>가 서구인문학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공부가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Sophocles(B.C.497-406)는 그의 비극적 희곡 안티고네(Antigone)에서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상한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사람이다’

인간 스스로 인간을 알려는 탐구는 수천년 전 부터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 ‘이상한’에는 풀어야 할 많은 의문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상한’은 낮선, 일반적이지 않은, 종잡기 어려운,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한, 등 여러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공부>! 정말 어려운 작업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인간을 알기 위해서 인간들이 남겨놓은 인간의 생각, 말, 글, 그림, 노래, 동작 등 모든 흔적과 자취를 공부하는 각론에 들어서게 됩니다. 어서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도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제자들이 준비되기를 기대 합니다.

             Comments & Question

             Sharing Time : –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사들 중에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대립개념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인본주의의 반대개념은 물질주의이고 신본주의의 반대개념 역시 물질주의입니다.

신본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들은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힘을 합하여 물질주의, 세속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주의자들과 대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적을 잘못 선택하고나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와 – 그 핵심은 물질 지상주의에 의한 인간성의 상실 혹은 비인간화와 이에 따른 인간 사회의 극단적 양극화 현상 입니다 – 우리 인간성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적이고 탐욕적인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해 내고 진정 자유와 평등,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인간은 인간답게, 신은 신답게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5

제 2강 – 2 : 무엇을 ? (What ?) – 전환의 시대

6. 서구 인문주의의 역사적 흐름은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철학의 시대를 넘어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시대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가지 인문주의 사조들이 있어왔지만 , 이제 우리는 르네쌍스 시대의 인문학, 계몽주의 시대의 인문학, 그리고 20세기의 인문학의 내용과 성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7. 첫째는 15, 16세기에 시작된 인문학으로 르네쌍스 휴매니즘(Renaissance Humanism)입니다. 우리는 이를 ‘인문주의 인문학(人文主義 人文學)’이라고 부릅니다.

인문주의 인문학은 중세 스콜라철학에 대한 반동입니다. Thomas Aquinas에 이르러 절정에 오른 Scholar 철학은 모든 학문을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신(形而上學的 神)에다 집중 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이상학적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성적, 논리적으로 그 존재와 활동이 증명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여기에는 현재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여튼 중세 천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알수도 없는 신을 중심 삼아 왔는데 르네쌍스 인문주의는 모든 학문의 촛점을 이 형이상학적 신으로 부터 눈에 보이는 현실적 인간 세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눈 앞에서 변하는 이 세상, 과학,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실제적 인간 삶의 현실에 관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르네쌍스 인문주의에서는 고전어, 문학, 역사를 비롯하여 법과 정치, 수학과 물리학, 천문학과 지구과학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제는 ‘수학이 학문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르네쌍스 휴매니즘에서는‘인간은 인간답게 생각하고 그저 인간답게 말하고 인간답게 행동해야한다’는 원칙이 강조되었습니다. 꾸미거나 숨기거나 위선적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답게 그리고 신은 신답게’(Francesco Petrarch 1307-1374나 Lorenzo Villa 1407-1457는 인문학의 이상으로 인간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제대로 말하고 떳떳하게 행동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 데카메론이나 나체화 등이 출현하게 됩니다.)가 이 때의 구호였습니다.

르네쌍스 인문주의는 이후  ‘18세기 啓蒙主義 人本主義’의 기초가 됩니다. 이는 새로운 전환입니다. ‘신으로 부터 인간으로’, ‘맹신적 신앙에서 합리적 이성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코페루니쿠스 Copernicus 적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중세 천년을 지내는 동안 잃어버렸던 그리스의 고전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라틴어와 헬라어를 중심한 고전어를 다시 배우고 공부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6세기 유럽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250개를 넘었습니다. 데카르트 자신도 Jesuit에서 세운 ‘라 폴레쉬’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문법,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 이 전통이 이어져서 오늘날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호주 등에서는 고등학교 과목에 Greek과 Latin어 같은 고전어를 개설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고전어 하나를 더 배운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개혁정신의 기본을 이어가자는데 있습니다.)

이리하여 르네쌍스 인문주의자들은 헤로도토스와 호메로스, 헤시오도스와 호라티우스, 아이소포스와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을 재발견해 내고 이를 다시 읽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에 이어 논리학과 수사학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논리학과 수사학은 이론과 합리성과 상식의 터전 위에서 표현하고 설득하는 기술입니다. 사람을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깊게 감동 시키는 것은 감정을 움직이는 설교나 기도가 아니라 이성을 통한 설득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음을 흥분시키지마라 머리로 이해하게 하여라!’ 사실 언어와 논리는 단순한 지식의 확대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과 품성을 넓히는 일을 합니다.

언어란 단순히 의사 소통의 도구 만이 아니라 사물의 실체와 본질을 탐구하는 인식의 수단이고 보다 더 넓은 세상을 알게해 주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다른 세상을 보게 됩니다.

다른 글과 말을 통하여 다른 나라와 다른 사람과 다른 문화, 역사, 전통, 풍습을 알고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동시에 르네쌍스 인문주의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이때부터 드디어 모든 학문하는 방법론이 철저하게 과학적 터전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는 점 입니다. 이는 15세기 중반 인쇄술의 발명과 그 후 이어진 물리학에서의 천체이론에 대한 새로운 학설들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 만유인력의 법칙 등과 신대륙의 발견, 새로운 화학무기의 발명 등이 일체의 인문-사회과학에 대해서도 귀납적 방법론을 요구하게 된 것 입니다. 우리가 이 시기의 정신 사조를 통칭하여 ‘르네쌍스 인문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때부터 드디어 인간이 우주와 역사의 중심에 놓여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공부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4

제 2강 -1 : 무엇을 ? (What ?) /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적 흐름에 대해

1. 어떤 개념 (Concept, Name, Title, Term)을 정의(Definition)하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모든 개념에 대한 정의 속에는 그것의 본질과 지향점들이 이미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 정치란? 경제란? 설교란? 정의란? 시와 시인이란? 교수란? 집사람이란? 결혼이란? 이런 개념에 대한 개인적 정의는 그의 생각과 사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2. 한자로 인문학(人文學)이란 ‘사람 人’자에‘글 文’자에 ‘배울 學’자를 씁니다. 사람 혹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과 말, 소리와 그림, 춤과 행위(말, 글, 그림, 낙서, 음악, 시, 춤, 몸짓 등)를 포함한 일체의 인간적 발자취와 흔적, 무늬와 자국들을 추적하고 살펴보고 되새기며 그 의미를 추적하고 그것들을 체계화하여 개인과 인류 공동체에 적용해서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켜 보려는 시도와 노력과 연구를 총칭하여‘인문학’이라합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출발점은‘사람’이고 인문학 연구의 내용도 ‘사람’이며 그 최종적 지향점도‘사람’입니다. 인문학은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사람을 위한’ 학문입니다.(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3. 인문학은 ‘신학(神學)’이나 ‘천문학(天文學)’과는 구별됩니다. 신학은 ‘귀신 神’자에다 ‘배울 學’을 씁니다. 귀신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 입니다. 그러나 신(神)은 배워서 알수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 크기에 神과 學을 연결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신학은 나타나 있지 않고 숨겨진 비밀스런 것들과 감히 접근 할 수 없는 신비스런 것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천문학은 ‘하늘 天’자에다 ‘글 文’자를 씁니다. 하늘,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천둥, 번개, 안개 등 모든 자연계를 관찰하여 그것들의 이치와 원인, 배후와 원리, 현상과 법칙을 찿아내어 체계화하고 거기에서 어떤 보편적인 원칙을 발견하여 지금과 내일, 개인과 인류 공동체를 보다 더 나은 상태 – 안심, 평안, 행복, 만족 –로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요, 연구요, 노력입니다.

인문학은 ‘지리학(地理學)’과도 구별됩니다. ‘따 地’자에다 ‘다스릴 理’자를 쓰는 지리학은 일차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 땅 – 산과 바다, 나무와 숲, 강과 평야, 지하와 지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인문학은 땅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인류와 공동체 등 각종 조직이 남겨놓았거나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을 살펴보고 분석하고 체계화하여 그 속에 있는 어떤 보편성있는 원리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여 개인과 인간 사회를 보다 더 의미있고 행복한 상태로 발전시켜 보려고합니다.

구체적으로 인문학은 인간을 중심하여 인간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만들고 남겨둔 것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취급하는 주요 대상들은 다음과 같은 6개 분야 입니다.

(1) 언어학 –초기에는라틴어와 헬라어를 포함하는 고전어가 중심이었고 요즘은 현대의 언어철학도 포함된다.

(2) 미학 – 음악, 미술, 춤, 연극, 영화, 드라마 등 공연예술을 포함한 일체의 예술 분야.

(3) 문학 – 시, 소설, 수필, 희극, 비극 등 모든 문학작품.

(4) 역사학.  (5) 종교학(신학 포함).  (6) 철학.

4. 그러므로 인문학에서는‘人’ 곧 사람이 ‘文’이요 ‘글’이라고 봅니다.

人이 文이고 文이 곧 人입니다. 여기에서는 목적과 방법, 대상과 주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연구하는 사람과, 동시에 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동일화 합니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을 만물의 척도 –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로 보고 이어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중심 과제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설정하여 ‘너 자신을 알라’고 하면서 하늘을 향했던 손가락을 인간에게로 방향을 돌린 것이 바로 인문학의 출발점이 됩니다.

5.서양 철학에서 ‘인문학’이란 라틴어의 Studia Humanitatis 를 직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Study of Humanities 입니다. 어색한 말이긴 하지만 ‘휴매니즘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 철학사에서는 이 휴매니즘학, Humanitatis의 개념을 아주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해 왔습니다. 세분화하면 르네쌍스 휴매니즘, 계몽주의 휴매니즘, 인간주의 휴매니즘을 비롯하여 마르크스주의 휴매니즘, 실존주의 휴매니즘, 기독교 휴매니즘, 세속주의 휴매니즘 등등이 있습니다.

인문학이란 대단히 넓은 외연을 가진 개념입니다. 시대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고 여러가지 형용사를 붙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문학에는 분명한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중심한 인간의 발자취, 인간의 흔적, 인간의 모습을 추적해 가는 인간학이라는 점입니다.

인문학은 인간학입니다. 신학은‘신’을 공부하고 자연과학은 자연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사회학은 사회를 탐구하고 인문학은‘인간’을 연구합니다. 인문학은 그 지향점이 인간 입니다. 예컨데 신학은 인간을 연구하면서도 신을 위해서 인간을 연구하는데 인문학은 신을 공부하면서도 인간을 위해서 신을 공부합니다.

당신 탓

내 나이 스물 다섯에 헤어져

서른 다섯해 만에 만난

열살 위 선생님께서

던지신 첫 말씀.

 

“어째 키도 안 크고…”

 

그 말씀을 함께 들은

내 아내와 아들과 딸이

모두

선생님께 자랑스러웠던 까닭은

 

“어째 키도 안 크게…”

 

내 나이 환갑, 진갑이 되도록

뵙지 못했던

서른 다섯 해 동안

정신으로만

 

그렇게

“키보다는 정신이라고”

가르쳐 준

 

바로

당신 탓이라고.

유치해서 아름다운 어느 목사의 청원

어느 사이에 서른 다섯해가 지났습니다. 간간히 소식은 주고 받았지만 얼굴 뵌지가 그리 되었답니다. 홍길복목사님이십니다.

조만간 뵈올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변함없이 여전하신 목사님의 올곧게 고집센 모습을  뵈었답니다. 홍목사님의 고집센 모습을  이곳을 방문해 주신 분들과 함께 합니다. 다음은 홍목사님께서 교회에 청원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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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목우리 주님의 크신 은총을 빕니다.

항상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베풀어 주시는 크신 사랑과 기도에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교회의 신구목사 이 취임식을 앞에 두고, 몇 일 전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의 ‘원로목사 추대 사양’의 글월을 드렸습니다. 하오나 지난 주일 1부 예배 후, 배 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는 저를 따로 만나 아주 간곡한 마음으로 저의 사양하는 그 뜻을 거두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제는 배목사님 내외분께서 제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 심방을 오셨다가 제가 꼭 원로목사로 그냥 남아 있어서 원로와 후임 사이에 후배들과 시드니 교민 교회에 좋은 모델을 보여 주십사 하면서 아주 간곡히 부탁 하셨습니다. 정말 그 사랑과 진지함과 겸손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월을 다시 드리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귀 교회의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더 확고하게 전해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혹시라도 배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간곡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니까 홍목사가 마음을 돌이켰으리라고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는 뜻은 이미 지난 번 글월에서 다 말씀 드렸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좋은 의도를 갖고 드린 말씀이 다시 반복되어서 오히려 말 만 많아지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 원로목사추대를 사양합니다.

아울러 한가지 더 간절히 부탁 드리옵기는 오는 4월 신구목사 이 취임식은 시드니 우리교회 제 2대 담임목사 취임에 촛점이 마추어지기를  바랍니다. 은퇴하는 사람은 조용히 떠나가는 것이 아름답고 보기에 좋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제 무대의 중앙에 서서 조명을 받아서는 않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제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부터 정말로 존경 받을 수 있는 한가지 길이기도 합니다. 좀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제가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존경의 기회를 막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백방으로 원로목사 추대를 간청하였고 본인은 진심으로 사양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제 이후 촛점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비젼, 새로운 목사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저는 이제 무대의 뒷 편에서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제발 부탁 드립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예배와 예식 역시 취임식에다 초점을 마추어서 준비 해 주십시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람을 위하여 지난 날 온갖 섬김과 헌신, 사랑과 기도로 지원 해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더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제는 이 원로목사추대 건을 가지고는 다시 말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일도 자꾸 말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마음에 상처를 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우리 배진태 목사님의 깊은 마음과 사랑을 다 받았습니다. 장로님들께서는 지난 날 저에게 해 주셨던 것 처럼 배목사님을 대해 주시고 목사님을 중심 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시어서 끝까지 주님과 우리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겨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홍길복드림

홍목사님 참조기사 : 시드니 예수마을 강연회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마지막 글

네가 믿는다는 말을 하려거든

 

이 제목 연재글의 마지막입니다.

 

둘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작업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고 기독교 신학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 이라고 하는 이 연속적 사건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져야 할 몫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교회와 목사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말 없이 묵묵히 지고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살리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를 포함한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적 위기 중 하나는 십자가 없는 부활 만을 연속적으로 선포하는 어리석음에 있다. 부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기를 지고 죽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은총이다. 그러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부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책임인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치열하게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해야 한다.

 

위에서 예화로 제시한 몇 가지 이민목회의 경험담들이 가르쳐주는 교훈의 두번째 핵심은 바로 이 십자가 목회와 십자가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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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개척한 이 모든 사람들, 이 모든 노련한 믿음의 대가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려가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군살이 붙어도 안되고, 몸에 기생하는 죄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참여한 이 경주를 시작하고 또 완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그분은 앞에 있는 것, 곧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결승점을 지나는 기쁨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기에, 달려가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든, 심지어 십자가와 수치 까지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 지거든, 그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솟구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유지 피터슨의 번역 메시지)

 

이 텍스트 가운데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핵심적 개념들 다             음과 같은 단어들로 설명 되고 있다.

 

길, 개척, 경주, 달려감, 결승점, 예수, 십자가, 수치, 참음, 적대행위, 영광, 새로운 힘 – 히브리서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날 내가 호주에서 이민목회자로 살아온 33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참고 살아온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목회란 인내의 경주요, 인생이란 누가 더 잘 참나, “참기 내기”의 시합 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설혹 내가 아무리 잘 참는다 하더라도 예수님 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참았다. 예수의 인내가 내 인내의 사표이다. 나는 한 때 너무나 억울해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으로 나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오직 목회란 배신에 대한 신뢰요, 미움에 대한 용서요, 억울함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그냥 묵묵히 참아왔다. 젊은 날, 철 없었던 학생 시절, 부모님의 가숨에 못을 박고, 잘난 척하고 의로운 척 하면서 선생님들과 선배들에게 함부로 막 말을 하며 대들었던 벌들을 지금 그냥 그대로 다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이민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나의 인내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적어도 배 부르고 등 따습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아플 때 병원 가고, 먹고 입고 사는 데 있어서는 큰 고난 없이 지내온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고생이니, 억울함이니 하면서 인내 운운 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일차적 삶의 문제 조차도 해결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목사들과 가정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영주권 없이 불안한 신분 상태로 살아가는 목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하는 목사, 막 노동하는 목사, 택시 운전하는 목사, 타일을 붙이는 목사, 김씨, 이씨, 박씨 라고 불리 우며 험한 일을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 되면 또 다시 몇 명 되지도 않는 교인들을 앞에 놓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말이다.

 

목사 부인들의 삶은 어떤가? 공장에 다니는 사모님, 남의 가게에서 일 하는 사모님, 하숙을 치는 사모님, 시도 없고 때도 없이 밥상 차리고,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택시 운전사 보다도 더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모들이 얼마인가?  그러다가 몸은 병들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집을 나갔다가 변사체가 되어 돌아오고, 그러면서도 허구한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 없이, 심방하고, 상담하고, 전도하며,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는 목사 부인들 ! 이들이야말로 가정부나 식모나 아줌마 측에도 들지 못하는 빗 좋은 사모들이 아닌가? 출발과 과정은 어찌 되었든 오늘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바라보며 참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디아스포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정에 진실로 은혜와 축복이 가득 하기를 기도한다. 

 

원래 목사의 길이란 죽음으로서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행로 이긴 하지만 이민목회자의 길은 더더욱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 만이 가는 길이다. 이 땅에서는 아예 죽기로 작정을 하고 저 세상에서나 잘 살아보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 떠난 선교 여행이 이민목회자의 길이다.

 

여기서도 대접받고 저기서도 대접 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 이 땅에서 존경 받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또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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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인내를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요, 그의 제자로써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그의 스승 예수를 따라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로써 이미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예수의 길이다. 설혹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급이 없다 하더라도 고난은 고난 그 자체 만으로도 이미 값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요, 우리가 참고 인내 해야 할 진정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