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2
교실문을 여는 글 2 – 왜 인문학인가?
1.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일화 입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앞으로 질주하다가도 가끔은 멈추어 서서 그 동안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곤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빨리 달리면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육신을 말 위에 싣고 빨리 달리다보면 정신은 저 만치 뒤쳐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몸만 너무 바쁘게 살아왔던 우리가 생각과 마음을 추수려 보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 중 하나 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은 자아를 둘러보는 ‘자기 성찰’입니다.
명나라 문인 진유계(陳繼儒)의 글 입니다.
‘고요히 앉으니 평상시 내 마음이 얼마나 경박했는지 알겠구나.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니 지난 날 내 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드러나는구나’
2. 혜능대사(慧能大師)가 법성사에서 한 말 입니다.
어느날 법당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면서 두 스님이 논쟁을 벌렸습니다. 한 스님은 바람이 분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한참 자기 주장이 옳다고 서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혜능이 끼어들었습니다. ‘그건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려는 것은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자기 주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고집 내려 놓기’ ‘집착 내려 놓기’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아닌 동질성 찾기’ 같은 것들에 있습니다.
3.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당 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여행 중 해가 져서 어두운 산중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 밤 중에 너무 목이 말라 더둠거리다가 웬 바가지에 손이 닿아 그 안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아주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 둘러보니 간 밤에 시원하게 마셨던 그 물이 어떤 사람의 해골 속에 담겨진 해골수 임을 알게 되어 토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원효가 말했습니다. ‘물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로구나! 물은 그 물이 그 물인데 어찌하여 나는 꽥꽥거리는가?’
모든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일체의 진리와 비진리는 모두 다 이해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관점, 상황,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칸트식으로 말 하면 ‘물 자체’ (Ding an sich /Thing itself)는 변하지 않습니다.
4. 황희 정승 이야기 입니다.
한번은 종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종이 나아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은 틀렸고 자기가 옳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난 황희는 ‘네 말이 맞다’ 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얼마 후에 상대방 종이 또 정승을 찾아와서 오전에 나리를 찾아왔던 종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난 황희는 ‘듣고보니 네 말도 옳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종일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 본 조카가 못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흐리멍텅합니다. 제가 들으니 아침에 와서 말한 종 아이 말이 맞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렇구나 네 말을 듣고 보니 네 말도 맞구나’ 세상은 모두 다 일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습니다.
5. 1920년 대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는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빛에 대한 연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학 연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실험실에서, 동일한 시간,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같은 연구자가 실험을 하는데도 빛이 어떤 경우에는 작은 알갱이, 즉 입자(cubic)로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waves)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빛은 입자다 ! 아니다 빛은 파동이다!’하는 두 가지 가설이 서로 충돌하고 큰 이론적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만들어진 이론이 그 유명한 ‘불확정설’(The Theory of Uncertainty /The Uncertainty Principle) 입니다. ‘빛은 입자이기도 하지만 또 파동일수도 있다. 꼭 한가지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이론 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세운 이 이론은 이후 자연과학 뿐만이 아니라 철학, 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일체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전반에 걸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도 정답이 하나로 나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신학과 철학, 인문학과 사회학, 문화와 예술 같은 인문학이 한 가지 질문이나 하나의 개념에 대하여 오직 한개의 대답이나 결론만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의 질문에는 하나의 답만 있는게 아니다’ 이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생각 입니다.
6. 점묘법 (點描法) – 점 하나 하나씩을 찍어서 커다란 형태를 이루는 미술 기법을 생각해 봅니다.
호주 원주민들의 그림입니다. 작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다 보니까 어느새 큰 그림이 됩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 하루 점을 찍어가다보니 일생이 되는 겁니다. 또 우리 여럿이서 제각기 점을 하나씩 찍다보니 그것이 우리 사회가 되고 역사가 됩니다.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 입니다.
7. 모자이크(Mosaic)도 마찬가지 입니다.
조각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룹니다. 제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이 갖고 많이 누리는 것 처럼 보여도 인간과 인간이 하는 일이란 모두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서로 협력하여 전체를 이루고 함께 모여서 보다 넓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작은 사람들이라 하여 기죽을 필요 없고 큰 사람들이라 하여 잘난 척 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인문학의 목표 입니다.
8. 실학의 거두, 다산은 정조가 죽은 다음 해, 1801년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강진 읍내의 한 허름한 주막집 뒤간방에서 처음 4년을 보냈습니다. 그 후 그 곳을 떠나 지금의 ‘다산초당’ (茶山草堂)으로 옮겼는데 그 때 다산은 4년 동안이나 이 폐족당한 선비를 돌보아 주었던 주모와 그의 딸을 위해 그 오두막에 당호(堂號)를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사의제’ (四宜齊) 입니다. ‘이 집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가지를 익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늘 생각은 맑고 바르게 하거라. 둘째, 말은 반드시 생각한 다음에 하고 또한 적게하여라. 셋째, 모든 행동은 무겁고 신중하게 해야한다. 넷째, 용모와 의관은 항상 누가 보던 않보던 단정하게 해야한다>
이는 물론 유배 중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추수리려던 자아성찰의 인문학적 자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의 한 주막집 주모에게 조차도 당호를 지어줌으로 사람을 결코 가벼이 대하지 아니하는 ‘牧民心書’의 태도요, 사람을 낮추어보지 아니하고 대등하게 대하는 인격입니다.
인문학의 목표는 너와 나, 사람과 자연, 하느님과 사람, 어린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having group 과 have nothing group, 정상인과 비정상인, 내국인과 외국인, 원주민과 이민자, 먼저 온 이민자와 후발 이민자, 일체의 모든 甲과 乙 사이에 그려진 빗금(슬레쉬 /)을 철폐하려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섭니다.
결국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