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1

사는 게 바빠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나 이름만으로도 푸근해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그런 이들의 반가운 소식을 접하다보면 “아하, 내가 잊고 지낸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시절들이 있었지…”하는 생각에 오늘 바로 이 순간이  참 귀하다는 것을 느끼곤 하는 것이지요.

호주에서 은퇴 소식을 전해 오신 홍길복목사님께서는 저희 부부가 결코 잊지 못하는 참 좋은 신앙의 길잡이자 선생이요, 형님이요 오빠요, 삶의 벗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저희 부부가 열심히 연애에 빠져 있었을 때, 저희 부부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계셨던 분이랍니다.

그런데 참 33년을 뵙지 못했답니다. 참 송구한 일이지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또 다시 쓰기로 하고요. 오늘은 홍목사님께서 은퇴 소식을 전하시면서 주신 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목회 이야기( My Ministerial Stories of Korean Diaspora Church in Australia)>를 몇 번이나 읽다가 단 한 분이라도 함께 나누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소개 드리려합니다.

꽤 긴 글 가운데 홍목사님의 호주 목회 이야기 부분을 발췌하여 앞으로 서너차례 연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          나의 이민 목회 이야기           –  홍길복 (시드니 우리교회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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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나와 우리가족이 호주에 도착 했을 당시 우리가 가지고 온 짐 속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있었다. 우리는 이 곳에 와서도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는 호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 땅은 그져 모든 면에서 미지의 세계였을 뿐이다. 120년 전 죠셉 헨리 데이비스가 미지의 땅, 조선에 왔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도 미지의 땅 호주에 왔다. 정말 우리는 선교사처럼 이 곳에 도착했다. 생각도 준비도 마음의 태세도 여느 선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이 우리는 이 땅으로 던져졌다.

우리 가족은 호주에 오자마자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약 4천 킬로미터도 더 되는 퍼스(Perth)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한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편 공부를 준비하면서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그 곳에는 주로 광산 지역을 중심 하여 일하며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약 3-40세대쯤 살고 있었다. 그 교회가 지금의 “서부호주한인교회” 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참 좋은 학습 기간을 보냈고 또 적지 않은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그 해 말 우리는 다시 시드니로 왔다. 평신도들 몇몇이 이전에 자신들이 다니던 “시드니 한인 연합 교회”를 떠나 새로이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찿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을 호주로 초청한 죤 브라운 목사께서 우리를 그 교회에 소개 하였다. 그 교회가 지금은 32년의 역사를 지닌 “시드니 제일 교회”이다. 나는 이 교회에서 1998년 12월 까지 만 18년을 목회했다.

1973년 월남 전쟁이 끝나기 이전 까지는 시드니에 사는 우리 교민이 모두 3-40 세대 정도라고 알려졌고 1974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한인교회가 시작 되었는데, 내가 시드니제일교회에 부임 할 당시 벌써 시드니에는 약 2천 여명의 한인들과  5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999년 1월부터 나는 시드니 제일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시드니 우리교회”로 부터 부름을 받고 지금 까지 만 14년 동안 이 교회를 섬겨 왔으며 오는 12월 은퇴를 앞에 두고 있다. 정말 커다란 격세지감을 갖게 된다. 그 동안 우리 한인 사회는 약 7만 명 정도의 영주하는 교민들과 4-5만 명을 넘나드는 각종 단기 체류자들을 포함하여 10-12만 정도의 커다란 공동체로 변화 되었다. 한인교회도 250개 를 넘어 300개에 이르게 되었고 각종 선교단체를 비롯하여 기독교 언론과 유관 단체들이 수 없이 많이 생기고 또 살아지기도 한다.

지난 날 들을 돌이켜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출신의 목사로써는 처음 시드니에 와서 지난 30 여 년을 이 땅에서 살아오며 목회 해 온 나로써는 결코 적지 않은 종류의 다양한 인생살이와 목회 현장들을 경험해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 날의 그런 경험들이 만들어 준 더 깊은 생각과 사고, 교훈과 철학, 그리고 인생의 지혜와 통찰이 지금은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나를 둘러 싼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 이라고 생각 하며 오직 감사 할 뿐이다.

그 동안 호주 이민목회를 통하여 애기세례를 포함하여 세례와 입교 예식을 베푼 사람은 모두 819명이다. 156번의 결혼예식, 52번의 장례식, 1300여 번의 주일 낯 예배 설교, 8천 번을 넘어서는 심방,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1650여 회에 이르는 상담과 1200번이나 되는 각종 회의 참석과 인도가 나의 목회일지에 남겨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통계 자료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나는 여기에서 내가 지난날에 경험 했던 목회 이야기들을 써 봄으로 좀 더 다듬어진 선교행위로써의 이민목회의 의미를 생각 해 보려고 한다.

 

이야기 하나 – “목사님,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할머니 신도 한 분에게 오늘 낯에 심방을 가겠노라고 전화를 드렸다. “ 목사님, 미안 하지만 심방 오시는 길에 한국 식품점에 좀 들려서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예, 그렇게 하지요. 콩나물 말고 또 다른 필요한 것은 더 없으세요?” 요즘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들도 버스나 기차를 타시고 이곳 저곳 잘 다니시지만 초창기 한인 사회는 그렇질 못했다.

한인 공동체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민교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기능 이외에도 여러가지 사회 봉사적인 일들을 감당 해야 만 했다. 처음 오신 이민자나 방문자들을 맞아주고 바래다 드리기 위하여 수시로 공항에 드나드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민성을 찿아가 비자문제를 안내해 주고 아이들 학교에 입학시키느라 선생님을 찿아 가는 것도 목사의 일 이었다.

운전 면허증 시험을 치루도록 공부를 시키고 시험장으로 데려가고 통역을 해주는 일은 요즘 같아서는 운전학원이 하는 일이지만 30년 전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목회활동 이었다. 집을 얻는 일이나 차를 사는 일을 포함하여 할머니 혼자 사시는 분들을 위하여 쌀과 라면, 콩나물과 두부를 사다 드리는 심부름은 매우 중요하고 즐거운 사역 중 하나 였다.

1981년 5월 어버이날, 시드니에서는 처음으로 교민 사회 전체를 수소문하고 연락해서 38명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시내 쎈테니얼 팤으로 모시고 가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교회에 다니시든 성당에 다니시든 절에 다니시든 아무 상관없이 그 때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민자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선교 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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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둘 – “아저씨 되게 말 잘 하네요”

처음 퍼스에 가서 막 교회를 개척 할 때 였다. 하루는 주일 예배 후 모두들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데 한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쩜 그렇게도 말을 잘 하세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하던 이들은 모두들 그 아가씨를 쳐다 보았다. 좀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나이 어린 사람 이라 하더라도 목사를 아저씨 라 하고 설교를 말 잘한다고 하는 것이 어딘가 좀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아가씨는 그 날 난생 처음으로 교회라는 데를 와 보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참석 한 젊은이 였다.

그것도 나라 떠나 이역만리 호주에 유학 와 학교에서 만난 사람의 안내를 통하여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해서 찿아 온 것이 교회였다. 보통 교회 다니는 이들은 세상에 아직도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도 모르는 사람이 다 있을까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질 않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이외에도 참으로 많은 종교들이 있고 또 그 어떤 종교에 대해서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부지기수 이다.

인간이란 주로 끼리끼리 모여서 살아서 그렇지 기독교인들이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울타리 밖을 내다 본다면, 바다에는 물 반, 고기 반 이라고 하듯이, 한국과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살아온 이들 중에는 죽을 때 까지 교회라고는 한번도 안가 보고, 목사라고 하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이 있다.

목사는 그냥 아저씨가 되고 목사 부인은 사모가 아니라 그냥 아줌마가 되는 것이 하늘 보좌를 떠나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의 모습을 비슷하게 나마 재현 해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본래 예수께서는 평범하게 하셨던 말씀을 교회는 꼭 설교라고 하는 종교적 언어로 바꾸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가? 선교행위로 써의 이민목회가 주는 반성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