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2

호주 시드니우리교회에서 32년 6개월 동안의 이민 목회를 마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님의 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목회 이야기> 가운데 제 3장에 있는 “나의 이민 목회 이야기” 두번 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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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셋 – “선생님, 한대 피우시지요”

아주머니는 벌써 몇 달 째 교회에 나오는데 아저씨는 아직 교회에 출석 하지 않는 가정을 방문 하게 되었다. 집에 가 보니 마침 그 자리에는 주인 아저씨를 비롯하여 두어 분의 친구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한 다음 자리를 잡고 앉자 그 댁 주인 아저씨가 선듯 앞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더니 그 중 한 개비를 빼내어 내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 했다. “선생님, 한 대 피우시지요” 나는 순간적으로 잠시 당황 했고 “저는 담배를 피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약간 썰렁해 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보통 한국 목사들은 천주교회의 신부들이나 서구 목사들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담배를 피지 않는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 생각 해 보니 나 역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시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 에서는 우선 담배부터 권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요, 또 인간 관계에서 친밀도를 높이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를 모르고 목사들은 교인들을 모른다. 교회는 세상을 모르고 세상은 교회를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이 피차 간에 오해를 줄이고 가까워지는 방법은 서로서로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 하려고 하는 마음 가짐이라고 본다. 목회나 선교란 세상과 교회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교회나 목사는 이 세상을 다 알고 이 세상은 늘 교화 되어야 만 할 대상이라고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목회나 선교는 끊임없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 지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나는 처음 호주에 왔을 때 같이 한 교회당을 사용하는 호주 목사님에게 실수했던 경험이 있다. 그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 입구에 서서 성도들과 악수를 할 때 마다 우선 담뱃불 부터 붙여 입에 물고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어느 주일 예배 후 나는 차를 마시면서 그 목사님께 한국교회에서는 보통 목사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그 이는 아주 정색을 하면서 담배는 자기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기호라고 하며 몹씨 언짢아 했다.

세상이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든 세상이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삶의 모습 때문에 모든 것은 아름답고 풍성해 진다. 모든 목회나 선교는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도 하는 상부상조요, 상호교류 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넷 – “목사님이 요즈엔 날 사랑하지 안챦아요 !”

교우 가운데 늦게 아들을 낳은 댁에서 토요일 오후에 돌잔치를 할려고 했다.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목사에게 구역식구들 모두를 초청하고 싶은데 좀 연락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즉시 담당 구역장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꼭 구역식구들 모두에게 연락을 해서 많이 오셔서 축하해 드리도록 부탁을 드렸다. 그 여자 집사 구역장은 그리하겠다고 대답을 했고 주일예배 후 다시 확인도 했다.

그 주말 오후 우리부부와 다른 부교역자 부부가 함께 시간을 맞추어 그 댁에 도착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장로님 부부 두 가정과 그 여자 구역장 만 와 있었다. 구역식구들은 한 분도 오질 않았다. 한 2-30분이나 기다렸다. 당황도 되었고 좀 이상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예배를 드린 후 구역장 되는 그 여자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님, 왜 구역식구들이 한 분도 못 오셨나요? 혹시 연락을 못하셨나요?”

그러자 그이는 갑자기 눈가를 적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목사님과 사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안챦아요!”

이민자들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거의가 다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니고 인생길을 걸어 간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동서남북, 남녀노소, 빈부, 유무식을 막론하고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관심, 배려, 이해, 동정, 나눔, 대화, 베품과 같은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 되는 사랑이 바로 목회요, 선교다. 목회와 선교는 사랑 이상도, 사랑 이하도 아니다. 특히 나라 떠나 이역에 와서 사는 사람들은 더욱 더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이다. 목회와 선교는 영원한 사랑의 연습이다. 사랑으로 했는데도 안되는 일은 정말로 안되는 일이다.

목회와 선교를 포함한 일체의 인간역사는 사랑으로 하면 반듯이 이루어 지게 되어있다. 만약 우리에게 아직도 그 무엇인가 이루어 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충분히 사랑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죽고 싶도록 억울한 일도 넘어서고, 일체의 분노와 슬픔과 쓰라림도 지나서 그냥 말 없이 희생하고 죽는 일 이기 때문이다. 죽었는데도 안되는 일은 정말 안되는 일이다. 그러데 나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지 않는가!

모든 살아 있는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선교사와 목사가 된 사람들이다.

“목사님이 요즘은 나를 사랑하지 안챦아요!” 자주 생각나는 말이다.

이야기 다섯 – “목사님, 명예박사 학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호주에서의 이민목회가 한 15년쯤 되었고 내 나이 막 50 이 넘었을 무렵 한국에서 한 후배 목사가 찿아왔다.  이름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가 번역한 책도 한 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미국의 어느 신학대학에서 나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줄려고 한다면서 그 학교에 장학금 조로 약간의 도네이션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선듯 기분 좋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하면서 사양을 했다. 그는 나를 추켜세우면서 목사님은 넉넉히 명예박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도 남는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 신학교에 대해서도 믿음을 줄려고 여러가지 좋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생각 해보고 기도 해 본 다음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그가 돌아 간 다음 나는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평소 나를 많이 후원해 주는 내 멘토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정말 잘 했다고 나를 칭찬하고 그 목사나 그 신학대학은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학위를 남발하는 엉터리라고 하면서 그런 학교에서의 학위는 훗날 오히려 나에게 큰 불명예가 될 것 이라고 했다.

목회나 선교나 그 무엇이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어찌 모르랴!

물질과 명예를 탐하고 잘난 척 하다가 결국은 잘못 되어지는 경우가 어디 정치계 뿐이겠는가? 목사 안수식은 죽을 때 까지 종으로 살겠다고 하는 “평생 노예 서약식”과 마찬가지 이다. 목사직이 무슨 대단히 높은 자리인줄 알고 가문의 영광 운운 하는 이들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서글프게도 가짜 박사 중에는 신학박사가 제일 많다고 한다. 목사들 만큼 명예를 탐하고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어디 있겠나 싶을 정도이다. 예수는 목사도 아니었고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었고 학위 같은 것은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의 교회와 목사들은 명예와 권력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오래 전에 평양에 가서 조선 그리스도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봉수교회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곳에서 만난 이들은 말 할 때 마다 나를 “홍박사님, 홍 박사님!” 하고 불렀다.  참 민망 했다. 그래서 내가 “아, 저는 박사가 못 된 목사입니다” 하고 말하자 그 때 지금은 돌아가신 강영섭 목사님이 말했다. “남조선 목사님중에도 박사 아닌 목사가 다 있습니까? 참 이상한 목사님 이군요”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이럴 땐 나도 박사학위를 딸걸 하는 생각이 한 순간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리 생각질 않는다. 돈과 여자 그리고 명예와 권력은 한국이나 호주, 목회자나 선교사,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자리도 구별 하질 않고 찿아 오는 유혹자요 함정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1

사는 게 바빠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나 이름만으로도 푸근해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그런 이들의 반가운 소식을 접하다보면 “아하, 내가 잊고 지낸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시절들이 있었지…”하는 생각에 오늘 바로 이 순간이  참 귀하다는 것을 느끼곤 하는 것이지요.

호주에서 은퇴 소식을 전해 오신 홍길복목사님께서는 저희 부부가 결코 잊지 못하는 참 좋은 신앙의 길잡이자 선생이요, 형님이요 오빠요, 삶의 벗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저희 부부가 열심히 연애에 빠져 있었을 때, 저희 부부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계셨던 분이랍니다.

그런데 참 33년을 뵙지 못했답니다. 참 송구한 일이지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또 다시 쓰기로 하고요. 오늘은 홍목사님께서 은퇴 소식을 전하시면서 주신 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목회 이야기( My Ministerial Stories of Korean Diaspora Church in Australia)>를 몇 번이나 읽다가 단 한 분이라도 함께 나누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소개 드리려합니다.

꽤 긴 글 가운데 홍목사님의 호주 목회 이야기 부분을 발췌하여 앞으로 서너차례 연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          나의 이민 목회 이야기           –  홍길복 (시드니 우리교회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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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나와 우리가족이 호주에 도착 했을 당시 우리가 가지고 온 짐 속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있었다. 우리는 이 곳에 와서도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는 호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 땅은 그져 모든 면에서 미지의 세계였을 뿐이다. 120년 전 죠셉 헨리 데이비스가 미지의 땅, 조선에 왔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도 미지의 땅 호주에 왔다. 정말 우리는 선교사처럼 이 곳에 도착했다. 생각도 준비도 마음의 태세도 여느 선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이 우리는 이 땅으로 던져졌다.

우리 가족은 호주에 오자마자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약 4천 킬로미터도 더 되는 퍼스(Perth)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한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편 공부를 준비하면서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그 곳에는 주로 광산 지역을 중심 하여 일하며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약 3-40세대쯤 살고 있었다. 그 교회가 지금의 “서부호주한인교회” 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참 좋은 학습 기간을 보냈고 또 적지 않은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그 해 말 우리는 다시 시드니로 왔다. 평신도들 몇몇이 이전에 자신들이 다니던 “시드니 한인 연합 교회”를 떠나 새로이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찿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을 호주로 초청한 죤 브라운 목사께서 우리를 그 교회에 소개 하였다. 그 교회가 지금은 32년의 역사를 지닌 “시드니 제일 교회”이다. 나는 이 교회에서 1998년 12월 까지 만 18년을 목회했다.

1973년 월남 전쟁이 끝나기 이전 까지는 시드니에 사는 우리 교민이 모두 3-40 세대 정도라고 알려졌고 1974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한인교회가 시작 되었는데, 내가 시드니제일교회에 부임 할 당시 벌써 시드니에는 약 2천 여명의 한인들과  5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999년 1월부터 나는 시드니 제일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시드니 우리교회”로 부터 부름을 받고 지금 까지 만 14년 동안 이 교회를 섬겨 왔으며 오는 12월 은퇴를 앞에 두고 있다. 정말 커다란 격세지감을 갖게 된다. 그 동안 우리 한인 사회는 약 7만 명 정도의 영주하는 교민들과 4-5만 명을 넘나드는 각종 단기 체류자들을 포함하여 10-12만 정도의 커다란 공동체로 변화 되었다. 한인교회도 250개 를 넘어 300개에 이르게 되었고 각종 선교단체를 비롯하여 기독교 언론과 유관 단체들이 수 없이 많이 생기고 또 살아지기도 한다.

지난 날 들을 돌이켜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출신의 목사로써는 처음 시드니에 와서 지난 30 여 년을 이 땅에서 살아오며 목회 해 온 나로써는 결코 적지 않은 종류의 다양한 인생살이와 목회 현장들을 경험해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 날의 그런 경험들이 만들어 준 더 깊은 생각과 사고, 교훈과 철학, 그리고 인생의 지혜와 통찰이 지금은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나를 둘러 싼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 이라고 생각 하며 오직 감사 할 뿐이다.

그 동안 호주 이민목회를 통하여 애기세례를 포함하여 세례와 입교 예식을 베푼 사람은 모두 819명이다. 156번의 결혼예식, 52번의 장례식, 1300여 번의 주일 낯 예배 설교, 8천 번을 넘어서는 심방,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1650여 회에 이르는 상담과 1200번이나 되는 각종 회의 참석과 인도가 나의 목회일지에 남겨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통계 자료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나는 여기에서 내가 지난날에 경험 했던 목회 이야기들을 써 봄으로 좀 더 다듬어진 선교행위로써의 이민목회의 의미를 생각 해 보려고 한다.

 

이야기 하나 – “목사님,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할머니 신도 한 분에게 오늘 낯에 심방을 가겠노라고 전화를 드렸다. “ 목사님, 미안 하지만 심방 오시는 길에 한국 식품점에 좀 들려서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예, 그렇게 하지요. 콩나물 말고 또 다른 필요한 것은 더 없으세요?” 요즘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들도 버스나 기차를 타시고 이곳 저곳 잘 다니시지만 초창기 한인 사회는 그렇질 못했다.

한인 공동체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민교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기능 이외에도 여러가지 사회 봉사적인 일들을 감당 해야 만 했다. 처음 오신 이민자나 방문자들을 맞아주고 바래다 드리기 위하여 수시로 공항에 드나드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민성을 찿아가 비자문제를 안내해 주고 아이들 학교에 입학시키느라 선생님을 찿아 가는 것도 목사의 일 이었다.

운전 면허증 시험을 치루도록 공부를 시키고 시험장으로 데려가고 통역을 해주는 일은 요즘 같아서는 운전학원이 하는 일이지만 30년 전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목회활동 이었다. 집을 얻는 일이나 차를 사는 일을 포함하여 할머니 혼자 사시는 분들을 위하여 쌀과 라면, 콩나물과 두부를 사다 드리는 심부름은 매우 중요하고 즐거운 사역 중 하나 였다.

1981년 5월 어버이날, 시드니에서는 처음으로 교민 사회 전체를 수소문하고 연락해서 38명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시내 쎈테니얼 팤으로 모시고 가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교회에 다니시든 성당에 다니시든 절에 다니시든 아무 상관없이 그 때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민자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선교 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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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둘 – “아저씨 되게 말 잘 하네요”

처음 퍼스에 가서 막 교회를 개척 할 때 였다. 하루는 주일 예배 후 모두들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데 한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쩜 그렇게도 말을 잘 하세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하던 이들은 모두들 그 아가씨를 쳐다 보았다. 좀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나이 어린 사람 이라 하더라도 목사를 아저씨 라 하고 설교를 말 잘한다고 하는 것이 어딘가 좀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아가씨는 그 날 난생 처음으로 교회라는 데를 와 보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참석 한 젊은이 였다.

그것도 나라 떠나 이역만리 호주에 유학 와 학교에서 만난 사람의 안내를 통하여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해서 찿아 온 것이 교회였다. 보통 교회 다니는 이들은 세상에 아직도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도 모르는 사람이 다 있을까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질 않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이외에도 참으로 많은 종교들이 있고 또 그 어떤 종교에 대해서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부지기수 이다.

인간이란 주로 끼리끼리 모여서 살아서 그렇지 기독교인들이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울타리 밖을 내다 본다면, 바다에는 물 반, 고기 반 이라고 하듯이, 한국과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살아온 이들 중에는 죽을 때 까지 교회라고는 한번도 안가 보고, 목사라고 하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이 있다.

목사는 그냥 아저씨가 되고 목사 부인은 사모가 아니라 그냥 아줌마가 되는 것이 하늘 보좌를 떠나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의 모습을 비슷하게 나마 재현 해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본래 예수께서는 평범하게 하셨던 말씀을 교회는 꼭 설교라고 하는 종교적 언어로 바꾸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가? 선교행위로 써의 이민목회가 주는 반성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