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축도

연 사흘 비가 쏟아졌다. 지난 밤에는 홍수와 강풍과 회오리 등에 대한 주의 메세지들이 경고음과 함께 이어졌다. 오늘 동네 신문 온라인판엔 엊저녁과 오늘 사이 비바람의 피해를 입은 사진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허리케인에서 열대성 폭풍으로 바뀐 Debby가 올라오면서 그 기세가 많이 꺾인 채로 우리 동네를 지나갔는데 크고 작은 피해들이 잇달았단다. 아직도 비는 오락가락 이어지고 간간히 부는 강풍으로 나뭇잎들과 잔가지들이 뒹군다.

한 사흘 내 일터가 한가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 마침 주문 일정에 맞추어 내 손에 이른 카를로 레비의 소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에 빠져 보냈다.

때마침 멀리 호주에 계신 홍길복 목사님께서 이번 주일에 행하실 설교문을 보내 주셨는데, 기후변화에 대한 인사로 시작되는 설교문이 소설과 함께 내 머리 속에 교차되어 깊게 남게 되었다. 소설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오늘은 홍목사님의 설교문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My Final Message)> 를 여기에 올린다.

너나없이,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기뻐하고 위로 받고 서로 격려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My Final Message)

본문 : 고린도후서 13장 11-13절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과 기쁨이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기후변화Climate Change로 인한 지구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이 추운 겨울 모두들 몸은 강건하시고 마음엔 평강이 더해 지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저희 시드니에서 은퇴한 목사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또한 시드니교회는 금년도 저희 은퇴목사들의 예배와 친교를 위하여 적지 않은 예산을 세워서 지원해 주셨는데 이런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다 보낸 몇 차례의 편지들을 모두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형제들아,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할 때는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죽음을 앞에 두고 남기는 유언의 말씀이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공통된 마지막 말이 될 것입니다. 혹은 형사재판에서 판사가 판결을 하기 전 피고에게 자신을 변론하도록 기회를 주는 <최후진술>도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란 어떤 글이나 연설을 마무리하는 일종의 Epilogue로써, 이는 대부분의 편지나 논문, 작품이나 연설의 맺는 말이요, 결론이요,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의 요약이며 강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 중 아테네 다음으로 고린도에 가서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후 그곳을 떠난 바울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고린도교회 교우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지금은 많은 편지들이 소실되고 오직 고린도 전서와 후서만 남아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린도전서 5장 9절 이하에서 <내가 전에 너희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이라는 귀절만 보아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이전에 벌써 또 다른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 확실합니다. <고린도 전서 이전에 이미 다른 고린도 전서가 있었다. 지금의 고린도 전서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고린도 중서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신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를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구를 중심하여 추론해 보건데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편지들이 서로 교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썼던 모든 편지, 즉 고린도전서나 중서나 후서를 막론하고 자신이 공개적, 혹은 개별적으로 썼던 편지나 아니면 직접 대면하여 전했던 모든 설교 말씀들의 총 결론이요, 요약이요, 맺는 말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어라, 위로를 받으라, 마음을 같이 하라, 평안할지어다>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끝으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고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공동번역도 비슷합니다. <형제 여러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 권고를 귀담아 들어주십시오. 뜻을 같이하며 평화롭게 사십시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도 읽어드립니다. <친구 여러분, 이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기쁘게 사십시오. 조화롭게 생각하십시오. 모두에게 상냥하게 대하십시오> 이렇듯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끝으로 말합니다. 이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등등 여러가지 형태로 번역된 우리말을 King James version이나 RSV나 NIV나 Good News Bible 등에서는 거의가 다 Finally라고 쓰고 있습니다.

지위의 고하나, 인물의 유명, 무명을 떠나서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나 글> <Final writing이나 Final speech>는 그의 생각이나 말이나 일생을 요약하고 매듭 짓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저는 1980년 호주에 와서 이민목회를 시작한 후 2012년 은퇴하기까지 주일 낮 예배에서만 공개적으로 설교한 것이 약 1500번쯤 됩니다. A4 용지로 약 7500장 정도가 되는데 그 설교문들은 지금도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은퇴 후 시드니교회의 초청을 받고 이 강단에서 말씀 전한 것은 제직수련회를 포함하여 모두 6번이었습니다. 저는 1974년 5월, 서른 살 되던 해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서울 서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금년에 꼭 50년이 되었습니다. 또 올해 저는 7학년을 졸업하고 마침내 8학년에 입학했습니다. 많이 살았고 이젠 남은 날도 그리 길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읽으며 저 또한 생각해 봅니다. <그 동안 시드니 제일교회, 시드니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이민교회들과 호주와 한국 등 이곳 저곳 여러 곳에서 참 많은 설교와 강의, 강연, 그리고 글쓰기를 해 왔는데 나도 이제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제는 점점 끝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한데 <마지막으로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나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닥쳐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렇게 때문에 더더군다나 모든 일은 마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이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 하나쯤은 미리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언제나 오늘 내가 하는 이 설교가 나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생각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다음 주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설교하십시오> 저도 그리하지는 못하면서도 저는 자주 이곳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할 때마다 이 <설교학의 교과서적 이야기>를 힘주어 가며 말했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 최후로 남기는 글, 나의 final word, final writing, final speech, final conversations는 사실 미리 준비하기도 쉽지 않고 정말 무슨 말로 나의 인생과 신앙과 생각을 요약해서 말해야 할지 결코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옛말에 <鳥之葬事에 基鳴也悲하고 人之葬事에 基言也善이라 했습니다. 새는 죽을 때가 되면 그 소리가 구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선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명인사들이 남긴 마지막 말들은 참 아름답습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하신 가상 7언 중 제일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말은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였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주님, 사랑해요. Lord, I Love You!>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이태석신부는 <모든 게 다 좋았어요. Everything is Good>이라고 말한 후 운명했다고 합니다. 철학자 칸트의 마지막 말도 비슷합니다. <Es ist Gut, 참 좋다> 스티브 잡스는 <당신의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Please love your family>라고 말한 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시드니교회 초대목사이신 최정복목사님은 최근 그분의 책 <한 낯선 자의 노래>에서 호주 원주민 가수 Roger Knox의 노래 한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은 일평생을 거쳐 한국이든, 동남아이든, 호주이든 그 어느 곳에서 살아왔던 간에, 이 땅에서의 모든 인생살이란 <하나의 낯선 자, 하나의 stranger>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면서, 결국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우리를 가르쳐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런 나그네와 행인 같은 낯선 인간이요, stranger인 우리를 향하여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최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하고 싶었던 말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든지 마지막 말은 쉽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람이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자신의 마지막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한 것처럼>, 마지막을 준비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마지막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내 신앙과 내 인생을 가다듬는 의미에서 숙제 겸 부탁의 말씀을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주무시기 전에 <내 인생의 마지막 말>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직접 내놓고 이게 내 마지막 말이라고 말씀하시지는 못해도, 어딘가에 써서 기록으로 남겨 놓으시길 바랍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도 꼭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마지막으로 해야만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경우, 거의 끝에 와서는 사회자가 꼭 묻습니다. <이제 끝으로, 마지막으로 꼭 하실 말씀 있으시면 짧게 한마디 하시고 마무리를 지으시지요>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첫째, 짧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는 분명하게, clear하게, 해석의 여지가 별로 없이 해야 합니다. 셋째는, 마음을 담아 진솔하게 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짧게, 분명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 이 세가지를 잊지 마시고 오늘 저녁 <내 인생의 마지막 말들>을 꼭 남겨 보시길 신신 당부합니다.

자, 그건 그렇고 이제는 처음 시작했던 성경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의고린도교회 교우들과, 오늘 2천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어라. 위로를 받으라. 마음을 같이 하여라. 그리고 평안할지어다> 몇가지 다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는 바울 사도의 이 <마지막 말>는 언어학적으로는 동어반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바라는 것,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인데 각기 다른 표현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자신의 생각과 부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약간은 길게, 또 약간은 동어반복적으로 한 이 마지막 말씀을 저는 한마디로, 짧게, 이렇게 요약해 봅니다. <여러분, 제가 제일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이것입니다.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사십시오>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교리논쟁과 윤리 도덕적 설전이 있었습니까? 교회내에서의 파벌문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갈등 문제, 교우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송과 재판문제, 결혼, 이혼, 독신생활, 음행 문제를 비롯하여 우상과 우상의 제물문제, 사도권의 문제,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성찬식을 비롯하여 예배의식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 등등 참 많은 문제들을 놓고, 어떤 때는 설전을 벌리고, 어떤 때는 화를 내고, 심지어는 다시 보지도 않을 것처럼 무섭고 매정하게 말해왔던 바울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지난날의 대립과 다툼, 타이름과 설명설득을 모두 끝내면서 의외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 한 분 한 분,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오> 이런 마무리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약간 당황했습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라면 <예수 잘 믿으십시오> <예수 똑바로 믿으십시오> <끝까지 신앙생활 잘 하십시오> <끝까지 예수님만 붙들고 가십시오> 같은 말씀이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아니한 것입니다.

물론 AD 1세기, 키케로를 비롯한 고대 로마의 서신들과 공문서들의 기본적 틀은 Prologue에서는 문안과 감사인사로 시작하여 본론을 거친 후, 마지막 Epilogue 에서는 주로 축복으로 끝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서신들 역시도 대부분 그런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사도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들과 비슷하게 문제도 많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여러 개 의 편지를 모두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하루 하루를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오>라고 말씀한 것에 대해서는, 단순한 충격의 정도를 넘어서서 여기에 스며 있는 또 다른 깊은 의미와 뜻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마지막 말씀, –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사십시오 – 라는 이 최후의 권면에는 인간과 신앙공동체, 믿음과 도덕의 핵심과 본질이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만이 참되고 영원한 기쁨이며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략된 말씀, 아니면 숨겨진 말씀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기쁨의 삶, 행복하게 사는 인생 – 그 밑바탕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본질은 <구원 얻은 자들의기쁨이요, 영생을 확신하는 자들의 행복>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이나 오늘 여기 시드니교회 성도들이나, 우리가 주어진 인생길, 비록 힘들고, 지치고, 고단하고, 절망스런 일들이 이어지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하루 하루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또 행복하게 살수 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그 이유, 그 뿌리, 그 근본 바탕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우리는 오늘 저녁 죽더라도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생과 복락을 누린다>는 그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웃을 수 있고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 두십시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것은 절대로, 정말 절대로 돈이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성공과 성취가 아닙니다! 건강, 건강 하는데, 건강이 아닙니다!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변치 아니하는 믿음입니다!

<기쁘게 사십시오. 행복하게 사십시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요, 소망이요, 생명입니다> 모든 환경과 일체의 조건을 초월하여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다른 모든 신앙생활의 준칙처럼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 중에서 어떤 것은 선택적으로 프로그래밍하여 새벽기도, 특별기도, 금식기도를 하고, 또 감사주일을 만들과 감사헌금을 드리면서도 <기쁨의 주일> <행복한 주일>은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요? 기도와 감사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가요?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이 명령 역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장 4-7절>

우리가 70여년전 주일학교에서 배우고 불렀던 노래입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항상 기쁘다. / I’m so Happy. I’m so Happy. I’m so Happy. Happy all the day! / 와다시와 우레시. 와다시와 우레시. 와다시와 우레시. 이찌모 우레시! / 워창 꽈일라. 워창 꽈일라. 워창 꽈일라. 창창 꽈일라!>

6.25 후, 가난한 시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월사금을 내지 못해서 학교도 다니기 힘들었던 시절 – 그래도 그 때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기뻐해라. 즐거워해라> 하면서 해맑은 얼굴로 노래를 부르게 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주일 마다 교회에 나와 기도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며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지 아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이것은 구원받고 은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합시다. 주일 제대로 지키지 않고, 기도 생활, 신앙생활에 게으르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한 것 만이 죄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기쁘고 행복하게 살지 않는 것 역시 큰 죄입니다. 종교적 의식 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생활 속에서의 실천입니다. 모든 성화된 삶의 최고 모습은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영원한 낙관주의자들입니다. We are ultimate optimist!  펼치어지는 정치–경제적 환경이나, 가정적 고난이나, 개인적 건강이나 성공-성취와는 전혀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래서 오늘 바울사도가 전한 마지막 말씀이나, 저의 마지막 부탁은 모두 다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그저 하루 하루를 꼭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Dear Friends! This is my final Message. Rejoice Always! Be Happy in Christ! This is the Word of God. Amen>

  • 호주 시드니교회 주일예배설교(2024.8.11)

아쉬움과 고마움

홍길복목사님 – 기억컨대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고작 두 해 남짓이 모두다. 그것도 내 스물도 저물던 시절이었으니 사십 수 년 전 일이다. 그 후 오랜 시간 그는 호주에서 나는 미국 시골에서 살며 딱 두 번을 만났었다. 십 수년 전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지난 해 서울에서였는데, 두 번 다 그저 밥 한끼 나누는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홍길복목사님 – 그는 내 신앙의 인도자요, 인생의 선생인 동시에 늙막에 신 앞에 다가서는 날들을 준비하는 정신적 길 벗이다.

홍길복목사님 – 내 어리고 젊었던 시절, 성서와 예수에 대한 숙제를 던져 주셨던 그는, 지난 세월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할지 언정 끊임없이 나를 깨우게 해 주셨다. 그의 설교문을 보내주거나 생각의 단편들을 전해오거나 지난 십여 년 동안은 그가 이끌어 온 <시드니 인문학교실> 강의안을 보내주어 나를 깨웠다. 그 강의안으로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하는 친구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하셨다.

홍길복목사님 – 그가 엊그제 설교문을 보내어 또 나를 깨웠다. <삶의 후회조차 감사할 때>라며.

그가 설교문을 보내주시면서 덧붙인 말씀이다. < 첨부한 설교문은 오는 주일 시드니우리교회 목사님이 출타를 하면서 설교를 부탁하시길래 준비한 것인데, 돌이켜보니 마침 이즈음이 제가 목사안수 받은지 50년이 되어서 그에 따른 소회를 써 본 것입니다. 인생이란, 목회란, 관계란 모두가 다 아쉬움과 고마움으로 남는 것이군요.>

그저 홍목사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선 그의 고뇌와 감사를 나눌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의 허락도 없이 여기에….


<홍길복의 목사안수 50년 감사예배 설교>

  • 2024년 5월 19일 , 시드니 우리교회

오늘의 말씀 : 시편 116편 12절 -14절

오늘의 제목 :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 아쉬움과 고마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넘쳐나시길 기원합니다.

앞에서 예배순서에 따라 맡으신 분이 읽어주신 성경말씀 이지만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새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 시편 116편은 누가 지은 것인지 그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민족적으로든 <죽다가 살아난 사람의 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후에 고백한 시>로써, 죽음으로 부터 다시 생명을 얻은 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편 116편을 주석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스트랄리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시가 이 땅 호주에서 어떻게 처음 읽혀졌던지를 말씀드린 후 저 개인적 간증의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먼저 역사 이야기입니다.

1783년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식민지 북미 대륙을 잃어버린 영국은 마침 몇해전인 1770년에 James Cook이 발견하여 영국의 식민지라고 선포해 두었던 남태평양의 거대한 섬 나라 호주를 미국을 대신 할 만한 새로운 식민지로 여겼습니다. 산업혁명 후 넘처나는 사회문제로 범죄는 증가하였고 죄수들을 수용할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영국정부는 새로운 땅, 미지의 남쪽 나라인 호주를 그들 나라에 있던 Wales주를 대신할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남쪽에 있는 새로운 Wales주>라는 뜻으로 New South Wales주라 이름 붙여서 이곳으로 죄수들을 실어 보내기로 했습니다.

영국은 1787년 5월 13일 런던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Portsmouth에서 군함 2척, 화물선 3척, 그리고 수인선 6척, 총 11척의 선단을 꾸려 군인들, 죄수들, 자유 이주자들을 섞어 호주로 보냈습니다. 이를 가르쳐 역사는 <The First Fleet, 제 1차 선단>이라고 부릅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1차 선단에는 죄수들 789명을 포함하여 군인들과 자유 이주자들을 합해서 모두 1420명이 승선하였는데 그만 그 긴 항해 중, 배에서 사망한 사람이 48명이나 생겨서 시드니에 도착한 인원은 모두 1372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가 바뀌어, 이듬해, 1788년 1월 26일이 되었습니다. The First Fleet는 2만 5천 km, 250일에 걸친 긴 항해 끝에 마침내 Sydney Cove, 시드니 내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들은 이날, 1월 26일을 Australia Day, 호주 건국기념일로 지키고 있는데, 과연 이날이  호주의 <건국 기념일, Australia Day>가 맞는냐? 하는 데는 적지 않은 반론도 있습니다. 본래 호주는 주인 없는 빈 땅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50여만명이나 터를 잡고 수 만년을 살아왔던 주인이 분명한 땅이니, 이날 1월 26일은 Australia Day가 아니라 <오스트랄리아 침략의 날, Australia Invasion Day>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더 나누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싶이 The First Fleet를 이끌고 온 선장 겸, 초대 New South Wales 주총독은 Arthur Phillip이었고, 그 때 그들과 함께 온 군목은 영국 성공회 신부, Anglican Chaplin, Richard Johnson 목사였습니다. 그들이 시드니 항구에 닺을 내린 1월 26일은 토요일이었고 그 다음 날인 1월 27일은 주일이었지만 그들은 예배를 드릴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배를 접안하고, 짐을 내리는 등 그들이 이 미지의 땅 시드니에 상륙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 The First Fleet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이 땅 오스트랄리아에서 맞이한 첫번째 주일은 한 주일 후인 2월 3일이었습니다. 1788년 2월 3일 주일 아침, Richard Johnson 목사님은 Circular Quay에서 한 불록 떨어진 지금의 Bridge Street 앞 Macquarie Park 에서 10시가 되자 예배 시간을 알리는 북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습니다. 항해사들과 군인들, 남녀 수인들과 아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Aborigine들의 땅, 기독교와 그 예배의식이라고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고, 접해 본 일도 없는 신비의 땅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식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참 안탑갑게도 1788년 2월 3일 아침 10시 – 호주 땅에서 하나님께 드린 첫 예배때 불렀던 찬송이나 드린 기도문이나 전하신 설교 말씀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는 바로 그날 봉독했던 성경말씀입니다. – 시편 116편 12절로 14절 –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는 오스트랄리아 땅에서 처음으로 읽혀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50일에 걸쳐 25000Km나 되는 죽음의 항해길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시어 육지에 발을 딪게 해주시고 새로운 꿈과 가능성과 희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이 진솔한 고백과 노래가, 저는 이 땅, 이 호주의 모든 오고 오는 세대와 다민족들의 주제가가 된다고 믿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이제 이후 이땅에서 다 지켜 이행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이제 부터는 부족한 저의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저 합니다. 지난 5월 8일은 제가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 직분을 받은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68년 일반대학을 거쳐, 1972년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저는, 1973년 서울 신촌에 있는 대현교회에 전도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감사하게도 그 교회가 저를 서울 서노회에 부목사로 청원해 주셔서 1974년 5월 8일, 수색교회에서 열린 제 10회 서울 서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후 저는 대현교회에서 만 6년을 부목사로 일하다가 1980년 6월 호주 Uniting Church 세계선교부 총무 변조은목사님의 초청을 받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처음 저희는 Uniting Church, West Australia Synod에서 사택과 자동차 등을 마련해 주셔서 서부 호주 퍼스에서 한 6개월을 머물면서 간단한 영어도 익히고 자동차 운전면허도 따는 등 호주 정착을 준비하면서 퍼스에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때 퍼스에서 함께 <서부호주 한인교회>를 일구어 온 사람 중에는 지난 44년을 함께 해온 남정율집사님이 지금까지도 저희 곁에 계십니다. 6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을 퍼스에서 지낸 후 저희는 1980년 12월 시드니에서 막 시작된 <시드니 제일교회>의 초청을 받아 목회와 삶의 자리를 이곳 시드니로 옮겨 1998년 말까지 18년을 그 교회에서 사역한 후, 1999년 1월 부터는 <시드니 우리교회>로 옮겨 14년을 목회하다가 2012년 말 모든 일선목회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이제 부터는 염치도 없이 뻔뻔하게 부끄러운 이야기는 쏙 빼버리고 제 자랑을 좀 늘어놓겠습니다. 호주에서의 세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저는 호주 Uniting Church와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총회나 노회를 비롯하여 한인교회교역자회 등 여러 섬김의 자리에서 일하기도했고, SCD 한국어 학부와 모스크바 장신대, 인도네시아 신학교 등 국내외 몇몇 신학교육기관에서 가르키기도 했습니다. 저의 목회 기록에 의하면 저는 지난 이민목회 33년 동안 91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70번의 결혼식, 67번의 장례식, 1500번 이상의 주일 예배 인도와 설교, 약 9000번의 심방, 1600회 이상의 상담, 그리고 1200회 이상의 각종회의를 주제하기도 했고 또 참석했습니다. 수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인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선교 음악제를 비롯한 많은 행사와 이벤트들, 일일히 세기도 힘든 부흥회, 초청설교, 신학 특강, 세미나, 선교지 방문, 초기 2년 동안 진행한 SBS 방송, 300개가 넘는 각종 칼럼과 기고문들, 그리고 7권의 책을 출판을 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저는 이민목회 33년을 통하여 줄기차게 예수를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민자로 풀어 왔습니다. <이민자 예수>라는 책도 쓰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그야말로 기를 써왔습니다. 장신대 최윤배교수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입문>에서 홍길복을 남태평양을 중심한 디아스포라 신학과 실천의 한 모델로 길게 서술하기도하고 이를 장신대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자화자찬하며 잘 차려 놓은 진열장 처럼 길게 늘어놓은 허풍과 허세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인간 홍길복, 목사 홍길복의 정직한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젠 목사가 된지 반세기, 50년이나 되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설 날도 점점 가까와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좀 솔직해질 만한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많이 부끄럽기는해도, 그래도 이젠 좀더 자신에 대해서는 정직해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며 무릎 꿇고 항복하는 인간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 지난 날을 돌아보며, 홍길복이 살아온 인생과 목회자의 길을 회상해 보니, 하나는 <후회>요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아쉬움>과 <고마움>이 교차 됩니다.

먼저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드립니다.

50년전, 1974년 5월 8일, 목사 안수를 받던 자리에서 저는 참 많이, 정말,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뜨거운 감격과 함께 제 가슴 속에는 처절한 다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 저도 잘 따라 가겠습니다> 눈물로 약속하고, 가슴으로 다짐하고, 기도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저는 그 때의 약속과 다짐과 기도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실패한 인간이요,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세워준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세운 것이든, 출발 할 때, 처음 시작할 때 세웠던 목표와 꿈과 이상을 이루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돈 많이 벌겠다>고 목표를 세웠는데 돈을 많이 벌었으면 성공한 것이고, 돈을 많이 못 벌었으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권력을 잡아서 출세하겠다>라고 목표를 세웠는데 그렇게 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 인생의 꿈>이라고 목표를 세웠었는데 그걸 이루었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고 이루지 못했으면 그건 실패한 인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 The Man for Others! 꼭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리라!> 목사로 안수 받을 때, 저는 그렇게 인생과 목회의 목표를 세웠던 사람이었는데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50년 전, <예수님께서 가신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을 따라 가리라> 결심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끝까지 그 길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 출발할 때 세웠던 목표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어영구영 헛된 것들만 바라보면서 50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고 말았습니다. 세속적이며 직업적 종교인으로써 기능적인 능력은 어느 정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부르신 소명에는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고, 다짐했던 목표에는 이르지 못한 실패한 목사입니다.

목회란 일생을 통하여 쉬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목회란 사실 사랑 이상도 아니고 사랑 이하도 아닙니다. 목화란 사랑의 연습이고,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확대 재생산입니다. 목사라는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예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자신의 삶으로 그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사랑을 주어야 할 의무만 있지, 사랑을 받을 권리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 다른 사람의 비극과 슬픔을 덜어주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목회자가 될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않됩니다. 억울하게 죽으리라 각오한 사람만이 가는 길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목회자의 모델인 예수님이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조 속에서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켜 성공한 목사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공동묘지에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그걸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는데, 저는 교회 크게 하고, 세례 많이 주고, 행사 많이 하고, 설교 잘 하고, 책쓰고, 방송하고, 부흥회 인도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만들면 그게 성공이요, 성장이요, 잘난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후배 목사들이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리 말하는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권위주의적 생각에 사로잡혀 대접을 받는데만 익숙했고 남에게 시키는데만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커녕, 일년에 몇번 장로님들과 주일하교 어린이들 몇몇을 강대상 앞으로 불러내어 발을 씻어주며 <세족식>을 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인 양 착각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발을 씻어주라는 실천적 교훈을 종교적 의식, 종교적 Liturgy로 바꾸어 놓고 세족식을 하는 것이 진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양 저 자신을 속여 온 위선자입니다. 지난날 저의 목회는 고객관리라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고 의무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이름 할 수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가난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 까지도 목사의 책임입니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진 사람을 부르는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영접토록 이끄는 것이 바른 목회인데 <세속적 방법으로 거룩한 일을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나 또한 주님 가신 길 따르리라 눈물로 다짐하고 50년 전에 목사가 되어 사랑과 섬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아 ! 글쎄 말입니다. 지금 와서 지나 온 길을 되돌아 보니 저는 그져 그 예수님을 이용하여 월급 받아 잘먹고 잘살면서, 칭찬받고, 이름 내면서 <목사님, 목사님> 소리 들으면서 살아온 그렇고 그런 인간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기 전에 저에게는 꼭 드려야만 할 마지막 한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말씀입니다.

가깝게는 하늘나라에 가 계신 저의 양가의 부모님들부터 제 아내와 아이들과 동생들과 일가와 친척들에게 빚진 것은 말로 다 할수가 없습니다. 수 많은 동역자들과 친구들과 선후배 신학도들, 더불어 이 인생길과 신앙의 길을 함께 동행해 주신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무엇이라고, 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과 호주에서 지난 80여년을 함께 동고동락 해주신 분들, 50년 전 목사로 안수 받도록 이끌어 주셨던 대현교회의 옛 어른들과 오래된 친구들로 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허물 많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저를 감싸 주시고 손잡아주신 서부호주 한인교회, 시드니 제일교회, 그리고 시드니 우리교회의 여러 교우들과 은목회 식구들과 인문학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호주 디아스포라 이민자들과 동역자들에게 저는 죽어도 결코 다 갚을수 없는 은혜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온 몸이 다 입이 되어도 말 가지고서는 다 감사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감사와 함께, 아니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가장 크고 뜨겁고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제는 사실 성공이나 성취만이 아니라 실패와 부끄러움 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목회이든, 학문이든, 사업이든, 정치이든, 봉사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사람의 계획과 의지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생이란 살고 싶다고 해서 살수있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달려있습니다. 뒤늦긴 하지만 이제라도 이것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 최대의 깨우침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서 주어진 삶의 일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살다가, 감사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죽음의 때, 마침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감사가 인생 최대의 의무요, 동시에 승리인줄을 모른다면 그는 참 슬픈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이를 깨우쳐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말씀을 마칠려고 합니다. 마치 25000Km, 250일, 길고 긴 항해 끝에 시드니에 도착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구원의 잔을   높이 들어 감사의 노래를 불렀던 Richard Johnson목사님 처럼, 저도 지난 50년 목회 길과, 80년  인생길을 한결같이 옆에 계셔 주시고, 인내로 참아주시고 붙잡아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의 실패와 갈등 까지도 진솔하게 고백하게 해 주신 주님, 지난 날 목회의 아쉬움을 넘어, 그 때는 그렇게 잘못했지만 이제라도, 죽기 전에, 그걸 깨달아 알게 해 주시어 그것 까지도 감사로 승화 할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께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236년 전 Johnson 목사님이 이 땅 호주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읽으셨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서, 저는 저 자신의 영혼의 고백으로 주님께 올립니다

<주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제가 무엇으로 다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길에서나마 지난날 주님께 다짐했던 서원을 갚아드리도록 힘을 다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과정(過程)

생각해보니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아이들을 키우며 좋은 학군, 좋은 대학, 좋은 직업 등에 대해 우리 부부는 거의 무지, 무관심, 무대화로 일관했었다. 아이들은 그저 제 힘으로 컸고 우리 부부는 두 아이들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 등록금 한 푼 도와 준 적이 없다. 생각할수록 참 미안하다. 더 큰 미안함은 아이들 덕에 이 땅의 교육정책과 교육기관에 대해 조금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 땅의 노인의료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우리 부모님들 덕이다. 나도 이젠 법적 노인이므로 알아 두어야 할 지식인데 구태여 배울 것도 없이 몸소 체험으로 깨닫게 해 준 이들이 바로 부모님과 처부모이다.

어머님이 어제 오후 병원에서 퇴원해 단기 재활원으로 옮기시면서 우리 동네 노인 재활원과 양로 시설에 대해서는 거의 꿰차게 되었다. 어머니가 퇴원을 기다리던 오전 시간, 양로 시설에 계시던 장인이 응급환자로 병원에 실려가며 우리 부부는 동네 병원 구조를 훤히 그릴만큼 확실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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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과정이다. 그저 때 되면 다 터득하는 삶의 과정이다.

며칠 전 어머니 병상을 지키며 날밤을 지새며 읽었던 호주 홍길복 목사님의 인문학 강의록 스물 두 번 째 들어가는 말이다.

1963년, 제가 대학에 들어간 첫 해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문화사 개론’ 첫 시간이었습니다. 대형 계단식 교실에 들어선 30대 초반의 젊은 김동길 선생님은 첫 말문을 이렇게 열었습니다.

‘제 과목에 수강신청을 하고 함께 자리한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입니다. 이는 철학자 헤겔이 한 말입니다. 역사는 지난 날 오직 한 사람만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몇몇 사람들의 자유를 거쳐 마침내는 온 인류의 자유를 향하여 확대 전진되어 왔습니다. 나는 이번 학기 강의를 통하여 인류의 역사란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또 역사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반짝이는 눈빛에는 이슬이 서려 있었고 강의는 피를 토해 내는 열변처럼 들렸습니다. 55년 전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들었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선생님의 선언은 당시 군부독재가 대학을 비롯하여 온 나라를 얽어 매던 마당에 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고 고민하게 했습니다. 그 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자유’라는 단어는 저의 사유의 틀을 형성시켜 온 중심개념 중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이제는 90이 넘으셔서 선생님도 예전 같지는 않으시지만 사실 ‘젊은 날에는 진취적이고 혁명적이지 않는 지성인이 어디 있겠으며 늙어서는 보수적이고 사려 깊지 아니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하는 말을 상기하면서 지금도 가끔은 그 때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의 글은 온전히 내 경험이었다. 1972년 봄 문화사(미국사였던 것 같기도 하고?) 개론. 그 강의실 첫 시간 김동길 선생님에게 똑같은 내용의 헤겔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즈음에도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한다. 다만 나는 그날 지각한 학생 하나를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공개 비난하는 김동길 선생님에 대해 그리 마뜩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김동길 선생님과의 연은 좀 남다른 데도 있다. 민청련사건과 긴급조치 7호 사이 잠시 세월 좋았던 1975년 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김선생님댁에서 Henry David Thoreau의 Civil Disobedience의 특강을 받았던 기억과, 1980년 봄 5.18 직전 선생님 차로 학교를 빠져나와 도피했던 기억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제 노추(老醜)의 대명사가 되었거니와 나 또한 그와의 인연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다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그제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제나 지금이나 그가 이해한 자유의 대상은 매우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변 확대’의 범위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는 말이다. 그 것에 매어 있는 한 나이 들어 노추(老醜)다.

그에 대해 감사한 것 하나는 Henry David Thoreau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즈음도 틈나면 내 가게 손님들에게 미국의 정신인 Henry David Thoreau를 소개하곤 한다.

홍목사님의 글은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긴 설명 끝에 그는 내게 이렇게 묻는다.

<자유를 넘어서> – ‘자유’(정치, 사상, 종교, 양심 등)와 ‘평등’(경제, 성, 인종, 문화 등)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일까요?

또 다시 미안하게 나는 건방을 떤다. 십년 선배이자 은퇴 목사이자 내 선생이자 큰 형님이신 홍목사님의 물음에 대한 답이다.

‘아니, 그게 다 과정인 걸 아직도 모르셔요?’

출애굽과 신명기 고백으로 시작된 일찍 깬 인류의 어른들이 바라 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아주 더딘 걸음의 과정이다. 비단 성서적 가르침만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 어른들의 깨우침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날, 바로 하나님의 나라,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더불어 함께 하는 세상은 참으로 더디게 더디게 다가 온다.

우리네 삶이란 그 과정의 아주 작은 계단 하나.

그 것 하나 알고 그 과정에 순응하는 흉내라도 내고 가면 족할 일.  내 건방스럼에 꿀밤 하나  날리실 홍목사님 생각하며, 봄 내린 공원 길을 걷다.DSC04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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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뒷 뜰에 내린 봄은 늦저녁에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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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과정이란….

그저 우린 과정이라는 것을 아는 것?

생각의 시작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1

제 4강- 2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1)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

(2) 지난 날 어떤 사람이 한 말이나 일 혹은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기억해보는 것

(3) 어떤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거나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

(4) 어떤 일이 앞으로 일어 날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

(5)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느낌이나 의견을 가지는 것

(6)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머리를 써서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

(7) 어떤 일에 대하여 사리를 분별하는 것

(참고 : 생각과 마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생각이나 마음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생각이나 마음은 똑같이 인간의 느낌과 의지를 표현하는 본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말이나 글, 그림이나 춤 같은 동작으로 그 느낌이나 주장, 의지나 결심을 일정 부분 표현 할 수 있는데 마음은 언어나 문장, 예술이나 동작으로는 그의 의견이나 결단을 충분히 표현 하기가 어렵습니다.)

 ♦ 서양에서는 인간들이 언제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을까요?

(1) 언제부터였나요? –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4세기 후반기에 일군의 사람들은 날마다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전 까지는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두려움과 공포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변화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지?’ ‘이상한데?’ ‘아무래도 뭔가 다른 게 있어!’ 이것이 바로 자연 현상에 대해 ‘신화적 응답’만 해 왔던 사람들이 ‘합리적 대답’을 시도한 인류 최초의 변화였습니다. 소박하지만 미신에서 이성으로 서서히 바뀌어가는 첫 발자국은 이렇게 출발이 되었습니다.

(2) 그들은 어디에 살던 사람들이였나요? – 지중해를 생각해 봅시다. 동쪽에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북 아프리카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면 멀리 스페인을 지나 대서양으로 이어집니다. 북쪽에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와 그 아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부터 동편에 있는 에게 바다를 건너 드넓은 소아시아와 특히 이오니아 땅이 펼쳐저 있고 그 북쪽으로는 흑해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 지금의 터키 땅 서쪽에는 밀레토스(Miletus)라고 하는 도시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밀레토스를 중심하여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이오니아 학파’ 혹은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3) 그런데 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이렇듯 ‘생각하기’를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경제적으로 ‘먹고 살 만 했기 때문’입니다. 기원 전부터 이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따뜻한 날씨와 거기에 따른 풍족한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심는대로 열매를 맺었고 밀을 비롯한 각종 곡식들과 과일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부유하게 했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앞마당 같은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곳으로 각종 해상 무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여튼 기원전 6 세기 이후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부와 여유가 주어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 까요? (1) 각종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 지게 되거나 (2) 각종 예술 – 음악과 미술, 문학 – 시와 연극을 비롯하여 스포츠가 발전 되거나 (3) 여러 가지 지적 호기심이 일어나서 학문이 발전하게 됩니다.

(4) 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 그런데 그들이 이렇듯 자연의 변화 앞에서 무엇인가 의혹을 갖고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몇 가지 동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경이로워하는 마음wonder’ 혹은 ‘호기심curiosity’ 입니다. 사람은 자연이든 사물이든 인간이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지 놀라워하고 경이로워하고 호기심의 발동되어야만 생각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을 흔히 ‘관심 concern’ 혹은 ‘흥미interesting’ 라고 합니다.

둘째는 ‘의심doubt’ 하고 ‘질문question’ 하는 단계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물어 볼 것이 없고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 같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라도 물어보는 사람이 말 되는 것을 가지고서도 물어보지 않는 사람 보다는 훨씬 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나 인문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비슷합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상반된 방법으로 접근 합니다. 종교는 말없이 믿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인문학은 끝까지 의심함으로 진리에 가까이 간다고 말합니다. 목표가 동일하다면 싸우지 말고 서로 ‘당신은 그 길로 가고 나는 이 길로 갈 테니까 우리 훗날 진리의 바다에서 만납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5)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Thales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이전까지의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주로 우주와 만물의 ‘본질Arche’ 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이 주어지면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람살이란 한 판 놀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9

제 3강 – 3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3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구체적 방법론이 아무리 잘 훈련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반듯이 갖추어야 할 5 가지 기본적 틀 (Five Basic Frameworks)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생각하는 기본 방식이며 접근하는 원칙들 입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근성이라고 보겠습니다.

(1) ‘이것은 논리적이냐? 즉 Logical 하냐? 말이 되는 소리냐?’를 반듯이 물어야 합니다.

(2) ‘이것은 합리적이고 이유가 타당한가? 즉 Reasonable한가?’를 반듯이 따져보는 소질이 있어야 합니다.

(3) ‘이것은 과학적 근거와 타당성이 있는가? 즉 Scientific하냐?’를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4) ‘이것은 분석 가능한 것인가? 즉 Analytical한가?’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쪼개고 가르고 분석해 보는 태도는 인문학도가 지녀야 할 학문적 기본 자세 입니다.

(5) ‘통합 가능한 길이 있는가? Synthetic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즉 아무리 쪼개고 갈라치고 분리시켜 놓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이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냐?’를 질문하고 이를 추구해 가려는 자세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 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개인적이며 인격적 자세 입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 소양, 혹은 기초적 품성(Characte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질문해 보는 자세 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받아드린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회의(懷疑)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한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도 그런 모습을 반영합니다. 가능한한 많이 의심하고 자주 의심하는 사람이 진리에 가까이 갑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둘째는 비판정신입니다(Criticism). 학문은 변합니다. 철저하게 따지고 묻고 저항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인문주의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입니다. 인문학에서 비판정신은 생명과 같습니다. 비판하지 않는 인문학자는 이미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 입니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릅니다. PH.D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지성인은 아닙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과학자나 불의한 정부에 동조하는 학자나 물질을 추구하며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행동하는 교수는 지식은 있어도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개인적 사리와 사욕을 챙기고 입신양명 하려는 지식인은 지성인이랄 수 없습니다.

신학적 반성 없이 교회를 크게만 만들려고하는 목사나 승려는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자유정신입니다. 인문학의 최종적 목표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자는 그 자신이 우선 일체의 모든 것들로 부터 – 물질, 권력, 명예, 종교, 신, 타인,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까지 – 자유해야하고, 그 자유를 위하여 사유하고 연구하고 말해야 합니다.

르네쌍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실존주의와 현대철학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모든 정신사는 자유의 저변 확대사입니다(헤겔).

과거 한 사람의 자유로 부터 만인의 자유에 이르도록 인류의 역사는 흘러왔고 또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라는 신념과 철학이 인문학의 기조입니다. 여기에는 기초적 인권으로 부터 시작하여 정치-경제적 자유와 종교-사상적 자유에 이르기 까지 일체의 모든 인간적 자유가 다 포함됩니다.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태초에 자유가 있었느니라’를 실현 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네째는 그러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종교적 덕목만이 아니라 종교와 학문과 인류 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이 요구되는 기본 덕목 중 하나입니다. 벼는 익을 수록 머리를 숙이고 사람은 배울 수록 겸손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학문의 목표나 이상도 변하고 그 방법론도 당연히 변합니다. 이성적 방법론이라고해서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대학교육의 목표도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모든 학문과 학문의 연구는 특정한 시대,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객관성을 지니지만 그 어떠한 학문도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닙니다. 학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만일 학문을 어떤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고 규정하여 학문의 성격을 획일적으로 정의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학문이란 그 내용, 목적, 방법에 있어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포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진리를 향한 순례는 끝없이 변하는 지적 여행입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연구를 마치 종교적 신념 처럼 여기고 자신의 주장이나 학설에 대하여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지니게된다면 이는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를 상실하게 됩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인간 지식의 어쩔수 없는 한계 때문 입니다. ‘배움이란 자신의 무지를 확인해 가는 과정 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즐기는 태도 입니다. Johan Hoizinga는 homo ludens를  주장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놀이입니다. 인생살이란 한판의 놀이 입니다. 다행이 태초부터 인간은 놀이를 추구했고 또 놀이를 창조할 줄 알았습니다.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 일 만이 보람과 성취를 거져옵니다. 억지로하는 일은 결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놀이의 최종적 목표는 모두의 행복 입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서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라 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인문학의 가장 좋은 방법론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요, 놀면서 하는 것입니다. 시와 노래, 춤과 그림이 곁들여지는 ‘한 바탕의 놀이’와 여유가 바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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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3

교실문을 여는 글 3 – 왜 인문학인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지향하는 제 1차적 목표는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삶의 현장은 물질과 권력(정치권력, 자본권력, 종교권력)을 사람 보다 위에 두고 이것들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며 이를 추구하고 더 많이 획득하는 것에다 사람이 사는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는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한 마디로 이 시대의 인간은 비인간화되고 동물화 되어가고 도구화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탐욕과 교만의 노예로 전락된지 오래되었습니다.

나에 대한 최대의 원수는 나 자신이고 인간에 대한 최대의 적은 인간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 개인들과 우리 공동체가 보다 더 인간이 인간답게 되고 인간의 품격을 회복, 유지, 확장해 나갈수 있을까 고민하고 생각하고 토론하여 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개인과 사회를 꿈꾸어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종교적 신앙에 의존하거나 반대로 사회 변혁적 방법들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읽고 듣고 쓰고 말하고 나눔으로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하고 공동체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어 보자는 하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선비가 학문을 하는 이유, 즉 지식인이 글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목표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또 사람답게 살기 위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자연히 사람다운 삶도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문학의 일차적 목표는‘사람됨’에다 둡니다.

동양에서의 인문교육이란 곧 인성교육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전인’(全人 Whole man)교육으로 이해했습니다. 서양은 기술, 과학, 테크닉을 중심하여 합리성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지만 동양은 사람됨, 즉 인간의 품성을 중시해 왔습니다.

중국을 중심한 동북 아시아에서는 그의 신분과 직책이 무엇이든, 이를테면 왕이든 사대부이든, 상민이든 천민이든, 농부이든 상인이든 그의 하는 일과 직책이 어떠하든 간에 ‘적어도 사람이 사람답게 될려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외우고, 거기에 따라서 일체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서(四書)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이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역경(書經, 易經<周易>)입니다.

대학의 핵심 개념은 ‘덕(徳)’입니다. 이‘덕’을 기초와 기본으로 삼아 논어는 그 위에다 ‘인(仁)’을 더하고 맹자는 ‘의(義)’를 가르치고 중용은 ‘예지(禮智)’를 보탭니다. 우리는 논어, 맹자, 중용이 가르치는 4가지 핵심 개념인 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사덕(四德)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것들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하나가 추가 됩니다. 곧 ‘중용(中庸)입니다.

아무리 인의예지가 중요한 사덕이요, 모든 것의 기초요, 또 이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 어느 경우에도 자기만 옳고 자기만 바르고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는 아직도 덜된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동양의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 워드(key word)는 중용입니다. ‘극단적으로 나가지 마라. 극단은 절대로 않된다. 극단을 피하라!’  중용이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정도(正道)를 걷는 것 입니다. 이 경우 정도(正道)란 ‘옳바른 길’이지 ‘가운데 길’이 아닙니다. 중용(中道)나 중립(中立)이 정도(正道)는 아닙니다.

중용은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이 아니라 검은 검은 검다고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그 둘을 아우르는 포용성을 말 합니다.

동양 인문학의 핵심인 ‘중용’을 영어로는 Harmony and Balance로 번역 합니다. 포용성이란 관용, 너그러움, 똘레랑스(Tolerance)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극단, 오직, Only, 영어에서 ‘나’ ‘I’는 아무리 문장의 중간에 와도 늘 대문자로 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그릇된 태도라고 봅니다.

나와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달리 말하거나 다른 스타일로 산다고해서 나만 옳고 그는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호주와 같이 180여 개나 되는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야하는 ‘다문화 사회(Multi-cultural society)’ 에서는 특정한 민족이나 그들의 문화, 언어, 종교, 전통만 주장하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Living Together 우리의 삶과 평화를 위태롭게 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십자군 전쟁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믿었던 중세 기독교, 근대 이후 서구 강대국의 식민지 정책을 등에 업고 선교라는 이름 아래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살인, 폭력, 수탈을 감행해 온 기독교 선교의 죄악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수 백만명이나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의식을 비롯하여 지금도 이어지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교회만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민족적 배타주의, 비관용적 인생 태도, 비타협적 인간 관계 등은 인문주의 정신을 그 밑바탕에서 부터 흔들어놓는 것들 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원리에 따라서 사람이 현실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실천적 덕목을 네 가지로 요약해 줍니다.

첫째는 측은지심 (惻隱之心 Sympathy)입니다. 사람은 신분과 직업, 성별과 나이, 사상과 언어를 초월하여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자연계와 동식물계 등 세상 삼라만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일러 줍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심, 사랑, 희생,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수오지심 (羞惡之心 Goodness)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이웃, 사회와 국가체제에 대해서 까지 잘못된 것이 드러나고 알게되었으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 위하여 싸워야한다는 교훈 입니다.

셋째는 겸양지심 (謙讓之心 Tolerance)입니다. 한 마디로 겸손과 양보 입니다. 겸손이란 그냥 공손하게 처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어떠한 모습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입니다. 양보란 말이나 행동이나 일이나 물건에 있어서 일체 타인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나를 제일 뒤에 세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시비지심 (是非之心 Justice)입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가릴줄 아는 지혜입니다. 특히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그 악에 동조하는 것 입니다.

예수도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강론이나 설교나 설법을 해야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한 시대의 지식인들과 지성인들, 교수들과 언론인들은 300여명도 더 되는 어린 학생들이 차거운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하고서도 2년 반이 넘도록 그 원인은 무엇이고 누가 책임자이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찌 말하지 않고 분노 할 줄을 모른다면 인문학적으로 볼 때 그는 인간이랄 수가 없습니다.

맺는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위하여 듣고 읽고 말하고 나눌려고 하는가? 한 마디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서로 서로 좀 돕고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 책, 영화, 음악, 그림, 연극, 드라마, 기타 무엇이든지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소개해 주십시요.

그 다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답게 ‘살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인줄 뻔히 압니다. 알기는 해도 실천하는 것은 아마 숨을 거두기 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고민하고 괴로와하고 슬퍼라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희망의 빛이 비치리라고 기대하며 ‘행복했지만 괴로웠던 사나이’를 조금은 이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생각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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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동몽(異床同夢)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 수강 신청을 하며….

해마다 이월은 내 생각을 좀 넓히는 때이다. 뭐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좀 한가하다는 말이다. 이맘 때면 춥고 눈도 많이 오곤 해서 내 가게가 좀 한가하다. 일요일 말고도 하루 이틀은 눈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쉬기도 하거니와 가게 영업시간을 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들어온다. 허나 시간은 좀 풍부해진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생각지 아니했거나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지는 나름 내가 좋아하는 이월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삼월 초이면 언제나 내 지갑은 가난하다. 삼월 초 내 생일을 해마다 늘 그렇게 맞는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르다. 눈도 전혀 오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 본 적이 없다. 가게는 내가 많은 짬낼 틈없이 바빳다.

이 달초에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목사님께서 이메일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를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생각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생각과 돈 모두 풍족하게 삼월 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이달 초에 홍목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내용이다.

참 오랜만 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벌써 해가 바뀐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한가닥 작은 희망에 대한 희망 조차도 사라져 가는 땅 입니다. – 중략 – 시드니에서 작은 ‘인문학 교실’을 열었습니다. 한 달에 두번 모입니다. 첫번 모임에 그래도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들 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 중략 –  옷은 새 것이 좋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좋네요.

그랬다. 홍목사님과 헤어져 그는 호주로 나는 미국으로,  함께 했던 한국이라는 삶의 자리를 바꾸었던 시절에 그는 30대였고 나는 20대였다.

이제 그이는 70대 중반의 은퇴목사이고, 나는 은퇴를 바라보는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래, 우린 서로 옛사람이었다. 다만  거기에 수식어 하나를 얹는다. <변하지 않은…>이라고.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가 첨부파일로 덧붙인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나는 홍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그 이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을 이 곳에 올린다. 더하여 내가 참 사랑하고 존경하는 필라 인근의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두번씩 이 강의록을 참조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쫓아가려 한다.

자!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로  ‘들어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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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살며 딱 두 교회에 적을 올렸다. 한국의 신촌 대현교회 – 그 곳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은 내 삶을 지배했다. 홍목사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내 아내 역시. 수 년전에 아내와 딸과 함께 그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이민와서 한 곳…. 나 역시 옛이 그립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

 교실문을 여는 글 1 – 왜 인문학인가? 

일찌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계(契)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라 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세상을 걱정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선비들이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종의 풍류계(風流係)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시드니 인문학 계’를 통하여 인생의 시름과 아픔은 서로 위로하고 시대와 인간을 피차 보듬어 주면서 이 절망의 땅에서도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같이 먹고 자면서도 꿈과 생각은 서로 다른 동상이몽(同床異夢)가들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 합니다.

지난 12월 이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과 기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듬어서 표현했습니다.

(1) 동양과 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함께 공부해보자. – 클라스의 진행은 주로 준비된 강연, 토의, 책읽기와 나눔 등이 될 것이다.

(2) 이를 통하여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 시키고 또 그 틀을 좀 더 넓혀 나가자. – 우리는 종교단체들 처럼 무엇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진솔하게 마주침으로’ 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해 나가려고 한다.

(3) 이런 사유의 깊이는 인문학 교실에 참여하는 친구들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약간은 논리적으로 서술된 이런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을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좀 유연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어떤 감사 – 홍길복목사님께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 임금이 한번은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너희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하나 구해 오거라.”

솔로몬의 신하들은 온 천하를 다니면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가지를 구해서 왕에게로 가져왔다. 그것은 왕의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였다. 솔로몬왕은 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자세히 그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거기, 그 반지 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까지도 다 지나가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나면 모든 것이 다 그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다. 이제는 실패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다.> – 홍길복목사가 쓴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에서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내 나이 젊어 한 때 많은 선배와 선생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예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처럼 사노라”고 확언하기도 했고, “예수처럼 살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나도 이제 환갑, 진갑을 지나니 그이들은 칠순 팔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래 전에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쳤던” 그이들이 오늘도 여전히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거나 아는 이들의 전언을 통해서 또는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여전한 그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들은 마치 전혀 변함없이 한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그들이 오래 전에 말했던 “예수”와 지금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젊어서 그들에게 들었던 예수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지만, 이제 나이들어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체제(體制)안에 안주하며 그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허수아비”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예수”를 여전히 외치는 것은 변함 없으되 외치는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다.

홍길복-2그러나 35년만에 만난 선생님 홍길복목사는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그는 여전히 “떠남과 움직임은 아브라함 이후 성경의 전통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원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움직이시는 하나님(The Moving God, The Mobile God)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고 외치고 있었다.

홍목사님은 많이 변해 있었다. 35년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남기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 역시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자인하는 까닭으로 두가지를 든다. ‘신학적 실패’와 ‘인간적 실패’가 바로 그것들이다.

두가지 모두, 그가 청년 시절에 외쳤던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과 달리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었던 일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패’란 잘못된 목회 목표 설정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삶의 자리인 “호주 이민의 삶”에 두발을 딛지 않고 “한국적 상황 – 일테면 한국의 민주화, 인권 문제, 조국 통일과 평화문제 등”을 그대로 안고 고민하는 일에 빠져서 실제 빵과 기쁨을 함께 나누워야 했던 이민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이민 초기에 대한 반성이다.

둘째는 자신도 한때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던 일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그 역시 “교회 성장이라는 권력욕과 물질욕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탐욕”에 빠졌었던 일을 고백하며,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 버린 지난 날 나의 목회에 대한 슬프고 아픈 참회”라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가 두번 째로 꼽는 ‘인간적 실패’란 사랑의 실패를 고백함이다. 그는 성서와 예수를 ‘사랑’으로 요약한다. 그에게 사랑의 실패란 곧 성서이해의 실패이며 예수신앙의 실패였다. 그의 고백이다.

<지난날 나의 목회는 ‘고객관리’라고 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불릴 수는 없다.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의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까지도 목사의 책임이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진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공동묘지에 무덤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머릿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성장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머릿수가 그득한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자니 찜찜하고 안 다니자니 딱히 다른 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랑으로만 얻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한 홍목사는 그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감사”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때 그렇게 실패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아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넘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그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사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그리보여도 “움직이는 신”의 세상에서는 “사람이 한평생 예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한결같으신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었던 일은 내게 축복이요, 감사일 뿐이다.

유치해서 아름다운 어느 목사의 청원

어느 사이에 서른 다섯해가 지났습니다. 간간히 소식은 주고 받았지만 얼굴 뵌지가 그리 되었답니다. 홍길복목사님이십니다.

조만간 뵈올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변함없이 여전하신 목사님의 올곧게 고집센 모습을  뵈었답니다. 홍목사님의 고집센 모습을  이곳을 방문해 주신 분들과 함께 합니다. 다음은 홍목사님께서 교회에 청원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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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목우리 주님의 크신 은총을 빕니다.

항상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베풀어 주시는 크신 사랑과 기도에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교회의 신구목사 이 취임식을 앞에 두고, 몇 일 전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의 ‘원로목사 추대 사양’의 글월을 드렸습니다. 하오나 지난 주일 1부 예배 후, 배 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는 저를 따로 만나 아주 간곡한 마음으로 저의 사양하는 그 뜻을 거두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제는 배목사님 내외분께서 제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 심방을 오셨다가 제가 꼭 원로목사로 그냥 남아 있어서 원로와 후임 사이에 후배들과 시드니 교민 교회에 좋은 모델을 보여 주십사 하면서 아주 간곡히 부탁 하셨습니다. 정말 그 사랑과 진지함과 겸손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월을 다시 드리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귀 교회의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더 확고하게 전해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혹시라도 배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간곡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니까 홍목사가 마음을 돌이켰으리라고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는 뜻은 이미 지난 번 글월에서 다 말씀 드렸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좋은 의도를 갖고 드린 말씀이 다시 반복되어서 오히려 말 만 많아지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 원로목사추대를 사양합니다.

아울러 한가지 더 간절히 부탁 드리옵기는 오는 4월 신구목사 이 취임식은 시드니 우리교회 제 2대 담임목사 취임에 촛점이 마추어지기를  바랍니다. 은퇴하는 사람은 조용히 떠나가는 것이 아름답고 보기에 좋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제 무대의 중앙에 서서 조명을 받아서는 않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제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부터 정말로 존경 받을 수 있는 한가지 길이기도 합니다. 좀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제가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존경의 기회를 막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백방으로 원로목사 추대를 간청하였고 본인은 진심으로 사양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제 이후 촛점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비젼, 새로운 목사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저는 이제 무대의 뒷 편에서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제발 부탁 드립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예배와 예식 역시 취임식에다 초점을 마추어서 준비 해 주십시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람을 위하여 지난 날 온갖 섬김과 헌신, 사랑과 기도로 지원 해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더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제는 이 원로목사추대 건을 가지고는 다시 말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일도 자꾸 말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마음에 상처를 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우리 배진태 목사님의 깊은 마음과 사랑을 다 받았습니다. 장로님들께서는 지난 날 저에게 해 주셨던 것 처럼 배목사님을 대해 주시고 목사님을 중심 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시어서 끝까지 주님과 우리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겨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홍길복드림

홍목사님 참조기사 : 시드니 예수마을 강연회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3

이야기 여섯 – “목사동무란 우리 당서기 동무하고 비슷한 사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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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호주에도 탈북 동포들을 위시하여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꾀 많이 있는 편이지만 20년 전에는 그렇질 않았다. 그런데 마침 북한의 국가 대표 운동선수를 지낸 분이 어찌어찌 해서 호주에 와 우리 교회 근처에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 그이는 스스로 자유를 찿아 망명을 해 오긴 했지만 자본주의, 자유의 땅에서 홀로서기가 그리 쉽게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국가란 뭘 하는 뎁니까? 집도 자기가 구해야 하고 직장도 스스로 찿아야 하니 참 답답 합니다” 그는 호주에서 사는 것에 불만이 싸이기 시작했다.

배급도 없고 배치나 조직도 없이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한 훈련이 없이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자유를 주어도 그것을 누릴 수가 없다.

그는 교회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교회란 북녘에서는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한 곳 이라고 했다. 그래도 교인들이 여러모로 친절하게 대해 주니 사람들을 따라서 몇 달 동안 꾸준히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데 그는 이렇게 말 했다. “목사님, 그 동안 목사가 뭐 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젠 알겠습니다. 목사 동무는 우리네 당 서기 동무 하고 똑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군요”

호주에서의 이민목회는 일일이 찿아가지 않고서도 한 자리에서 거의 모든 세계인들을 다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호주는 그야말로 인종과 국경, 언어와 문화, 사상과 종교의 전시장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가지 않고서도 많은 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눌 수 있다. 지난날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기독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용이하게 접근하여 가장 평이하게 복음과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교회사적 역사와 경험을 지니고 있다. 비슷한 목적에 다른 방법론을 적용해 보도록 그들을 설득 할 수 있는 장점 또한 우리 교회는 지니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목사 동무는 우리네 당 서가 동무 하고 비슷한 사람이군요” 이 한마디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말이다.

뿐만 아니라 호주 이민교회는 미국 이민교회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 이는 흔히 말하는 북한선교나 북한의 복음화 차원이 아니라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이념과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적 사상을 결합 하거나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지향(Aufheben)을 주도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네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에게는 주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호주는 미국식 자본주의 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동시에 호주는 사회주의적 경제구조를 퍽 많이 채용하고 있다. 호주에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는 직접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장차 통일된 조국의 정치와 경제체제에 있어서 제 3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는 결국 개개인의 구원 뿐 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다.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왜 우리 한인들을 디아스포라로 부르시고 또 목사들을 당서기 동무 비슷하게 만드셨을까, 생각 해 보면 멀고 깊은 하나님의 신비와 계획이 보이는 듯 하다.

이야기 일곱 – “당신은 독재자야!”  “당신은 바람 난 목사야 !”

벌써 15년도 더 된 이야기 이지만 당시 나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회오리 바람에 휩싸였다. 나는 이미 그 교회에서 18년이나 목회하던 중 이었다. 지난 날 한국에서 정치적 장기집권과 유신체제를 비난하고 싸우다가 감옥에 갔던 내가 그 대통령과 비슷한 기간을 한 교회에서 보냈다. 초창기 교민사회는 교회를 돌보는 일 이외에도 할 일이 참 많았고 또 교민들의 수는 날로 증가 하던 때 였으니까 나열식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도 그 대통령 처럼 여러가지 퍽 많은 일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런 행사나 프로그램은 하나도 중요한 일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권위주의적 교단이나 신비적이고 은사중심적 교회 출신이 아니라 비교적 개방적인 신학과 민주적 교회 행정 체제 속에서 훈련 받아온 사람으로써 이미 한 교회에 너무 오래 있었다.

갈등과 고민 중에 있던 나에게 드디어 한 사람이 전면에 나타났다. 그는 제직회원이 아니면서도 수시로 제직회에 참석하여 소란을 피웠다. 긴 과정을 다 쓸 수는 없으나 나는 여러가지 신앙적이면서 또 합법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하여 그 사람을 교회에서 출교 조처 했다. 그러자 그이는 더 거칠게 나왔다. “홍목사, 당신은 독재자야! 이제 우리교회를 떠나!” 그는 나를 불러내어 싸우자고 했다. 경찰에 고발도 하고 교단의 주 총회에 진정도 했다.

나와 그리 관계가 좋지 못했던 교민 신문에서는 나에게 여자문제가 있다고 소설 같은 기사를 만들어 길게 글을 썻다. 터무니 없는 일이지만 때때로 소문은 진실 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나와 교회가 소속된 호주연합교회의 시드니 노회가 나서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를 했다. 나를 포함하여 신문에 보도된 사람들을 불러 두 달이나 조사를 한 후 “홍목사에게는 아무런 성적인 비행이 없었다”고 확인하고 공문을 보내어서 그 사실을 교회에 공고 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나와 우리 가정은 이미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나는 계속하여 그 교회에서 목회 할 힘을 잃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나를 이해하고 지지 한다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사람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교인을 이길 수 있는 목사는 하나도 없다. 나는 노회에 사임서를 보내고 환송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한 교회에서의 18년 목회를 마무리 했다.독재자가 따로 이겠나? 18년이나 한 교회에 있었으면 그 자체가 이미 독재인 것을!

그 일을 경험 하면서 나는 두가지 교훈을 받았다.

하나는 교만하면 망한다는 성서적 진리를 확인한 것이다. 나 자신이 평생을 가르치고 배워 온 진리를 그제서야 몸으로 깨달았다. 사실 나는 겉으로는 늘 웃으며 상냥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시드니에는 교회도 많고 목사도 참 많이 있지만 속으로는 우리 교회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해서 그리 된 것 이라는 마음이 자라를 잡고 있었다. 시드니에는 이미 수 백 명의 목사들이 있지만 나 만큼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배경을 지니고 또 좋은 대학과 신학교에서 정상적으로 공부한 후 목사가 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은근히 속으로는 허세를 떨었다. 늘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고 그럴싸하게 말은 하면서도 진짜 속으로는 참 교만했다. 하나님은 나의 교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나에 아주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는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보다 못한 목사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그 사건을 통하여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 만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인생과 신앙의 가장 기본적 진리를 목사 된지 25년이 넘어서야 다시 배웠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바보 중에 진짜 바보다. 교인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목회에 있어서 교인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갈등이 있다. 목회란 하나님을 믿음과 동시에 끊임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신뢰를 쌓아가는 훈련인데 교인을 믿어서는 안된다니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목회의 갈등이고 목회의 예술이다. 믿어서는 안되는 인간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되고 또 상처와 생채기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래도 믿어 볼려고 하는 기나긴 여정이 목회자가 가야 할 길이다.

“믿을까? 말까?” 나는 지금도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오늘도 그 인간을 믿음으로, 이미 예정된 실패의 길을 걷고 있다. 행복과 불행은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질 않는다. 행복 속에도 불행이 있고 불행 속에도 행복이 있다. 믿음과 불신 역시도 꼭 두 가지로 갈라지지는 않는다. 신뢰 속에도 회의가 있고 의심 가운데도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목회와 선교, 인생과 역사는 이런 갈등 속에서 이어지는 모순이요, 갈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