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함에

오늘 낮에 내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탁 재료 판매상인 Mr. 강이 내게 뜬금없는 인사를 건넸다. ‘형님은 유튜브 안보시나 봐요?’내가 스스럼없이 말 놓는 한인 몇 사람 가운데 하나인 그는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 세탁소들을 두로 돌아다닌다. 나와의 거래는 거의 삼십 년이 되어 간다.

내 대답 – ‘그건 왜?’  이어진 그의 말. =  ‘장사가 안되는지 가는 곳마다 사장님들이 유뷰트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나는 다시 물었다. ‘유튜브로 주로 뭐를 보던?’ 막 바로 받은 그의 응답이었다. ‘요즘 핫한 거 있잖아요! 조국 뉴스… 거기에 빠져들 계시더라고.’

‘쯔쯔쯔… 일터에서 뭐라고 한국 뉴스에 뺘져 있노…’ 혼잣 말 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그거 보는 사람들 의견들은 대충 어떻디?’ 그의 의견이었다. ‘한 8대 2쯤이요. 조국 No! 에 8, 청문회 보고 나서 판단하자는 쪽 2정도요.’

그가 내게 물었다. ‘형님 의견은 어때요?’ 그리고 이어진 내 대답이었다. ‘나는 8대 2 속에 들지 않는구나.’

솔직히 나는 일터에서 유튜브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social networking 을 보거나 하지 않는다. 한국뉴스를 보거나 검색하는 일도 거의 없다. 내 일 곧 세탁업과 관련된 일이거나 내 손님들과 소통하는 일 이외에는 인터넷이나 cell phone 사용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일들은 거의 대부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한다. 하여 한국뉴스들을 섭렵하는 시간은 저녁 시간이거나 휴일이다. 그래 이따금 바뀐 세상을 뒤늦게 접하곤 한다. 그러나 관심있는 뉴스에 이르면 여러 매체들(뭐 다 엇비슷하지만)을 두루 돌아 다니거나 뉴스를 소비하는 커뮤니티들을 순례하기도 한다.

내가 이즈음 핫하다는 법무장관 후보자 조국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든 생각은 ‘비겁함’이다. 조국 후보자가 비겁하다는 뜻이 아니다. 조국 후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 전반의 비겁함이다. 그런데 그 비겁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좀 답답한 이즈음이었다.

그러다 엊그제 받은 호주에서 보내온 홍길복목사님의 인문학 강의록을 찬찬히 읽다가 그 비겁함의 본질을 만났다. 그의 강의록 일부이다.

<니체는 지난 날 유럽을 지배해 온 온갖 전통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철학과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예술, 관습 등 모든 ‘전통적인 것들’에 대하여  그는 ‘아니다!(Nein)’이라고 부르짖으면서 그것들을 뒤집어 엎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부정과 파괴가 가장 강한 긍정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무너뜨리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을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유럽의 정신사에서 가장 강력한 이단자였고 반항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도덕이란 근본적으로 약자들이 강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규정 하면서 이를 ‘비겁한 도덕’이라고 불렀습니다.

“비겁한 자들의 비겁한 도덕율은 인간을 결코 더 좋은 방향으로 전진 시키지 못하게 한다. 거기에는 선하려는 의지, 나아지는 의지, 즉 권력에의 의지가 없다. 인간은 그 누구든지 본질적으로 자아를 실현해내고 환경과 사회를 변혁 시키고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가려는 힘의 의지를 지닌 존재인데 노예의 도덕, 기독교의 도덕은 그런 의지를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런 의지를 꺽어버린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욕망을 자유, 평등, 정의, 민주의 이름으로 누군가 하나를 제물 삼아 해소하려는 집단 의식을 전하는 뉴스 속엔 분명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한 사회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일은 바로 그 비겁함을 떨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의 대상은 어느 한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 곧 여론 또는 국민 정서라는 정체 불명의 권력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의 물음

이제 겨울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맞아 인문학교실을 다시 여신다는 홍목사님께서 새 학기 첫 시간 강의 내용을 보내 주셨다.

‘우린 일주일에 이틀은 손녀를 봐주고 다른 날은 책 읽고 산책하고 사람들 만나서 수다 떨면서 늙어가면서도 아직은 그런대로 잘 지냅니다.’ – 아직도 추위가 머물고 있다는 호주에서 지내시는 목사님 내외분 일상의 안부만으로도 나는 푸근해진다.

목사님의 인문학 강좌는 아직 늙어 간다기 보다는 나이 들어 간다는 말이 좋은 내게 나이 들어 가기에 느낄 수 있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이번 강의에서 목사님은 인간의 본성과 우리들이 환경인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하시곤 이렇게 묻는다.

<우리에게는 이 개인주의적이며 탐욕적 인간의 본성을 극복해 내고 진정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상적 세계는 불가능 할까요? 개인의 소유와 자유를 넘어서서 공동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진정 인간은 인간의 본성을 이겨 낼 수가 없을까요?>

나는 ‘인간’이나 ‘세계’가 버거워 ‘나’와 ‘오늘의 나의 삶’으로 그 말들을 대체해 그 질문을 받는다.

이어지는 목사님의 질문.

<아니 그 정도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탐욕적이며 야수적 인간성과 천박한 자본주의를 넘어서 우리 모두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 쳐온 사람들은 정말 없을까요?>

그리고 목사님 스스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 쳐온 사람들’로 꼽으신 네 사람, 신영복과 막스 베버, 헨리 조지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그들이다.

그 중 눈에 새롭게 확 뜨인 막스 베버의 말이다.

<막스 베버는 인간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인 개인주의와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기 위한 처방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직업은 돈이 목표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진 일에 부지런 하십시오. 많이 버십시요 그러나 검소하게 사십시오.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많이 버는 것과 나누는 것은 아직도 내 삶과 멀지만 내 직업이 하느님이 주신 소명으로 느끼고 부지런 하는 일과 검소하게 사는 일은 이 나이에 열심히 쫓는 일들이다.

이어진 그이의 물음들, 일테면  ‘함께’ ‘더불어’ ‘손잡고’ ‘소명’ ‘근검’ ‘절약’ ‘나눔’ ‘베품’ ‘필요한 만큼만’ ‘자연’ ‘자족’ 등은 끊임없이 흉내 짓이로라도 응답해야 하는데…

까닭없이 하늘 쳐다보던 날에.

DSC06638 DSC06640 DSC06643

귀한 선물

엊그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우체통을 여니 귀하고 고맙고 반가운 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출판사 여울목에서 펴낸 <홍목사의 잡기장>이라는 책인데, 멀리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 목사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매우 독특한 책입니다.

일테면 ‘목사의 이중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은 남들에게 힘과 용기도 많이 주지만, 남들에게 상처도 많이 입히는 직업이다.”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제목이 붙은 글들이 아주 많답니다.

‘관점’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려 한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독특하다’는 생각은 점점 제 나이에 마땅히 느껴야만 할 어떤 울림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테면 이런 제법 긴 문장의 글들 때문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모든 것은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다.>

<나에게는 당신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인격과 모순이 있다. 진실과 거짓, 사랑과 증오, 믿음과 불신, 희망과 좌절, 아름다움과 추함, 왜 나에게는 이런 조화될 수 없고, 조화되어서도 안 되는 상극된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것일까? 우선 나는 정직하게 인정한다. 나에게는 분명히 이런 이중 인격적 요소가 뒤섞여 있어 나를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다음 나는 이에 대하여 변명한다. 그래도 뒤죽박죽 내 인격은 끊임없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려고, 그 어느 한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속에 있는 모순은 내 속에 있는 선한 노력이다. 이는 내가 나와 싸우는 전투이며 그 전쟁을 숨기지 않고 표출시킨 나의 고뇌에 찬 눈물이다.

나는 단지 회의주의자나 허무주의자로 전락되지만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신앙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 모든 할렐루야 승리의 합창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거친 후 허무와 회의 갈등을 통과한 다음에만 불러야 한다.>

책 표지 다음 면에 홍목사님께서 손수 저희 내외에게 써 주신 글에는 “가끔 한 두줄 읽고 커피 한 잔 드시고 또 가끔 다시 한 두줄 읽으시고 하늘 한번 쳐다 보시”라고 했지만, 280쪽 책장을 그예 다 넘기고 말았답니다.

이제, 제가 이따금 하늘 쳐다보며 꺼내 읽는 책들인 성서와 Walden 노장자 곁에 꽂아두고 한 두줄씩 새기며 호주와 제가 사는 여기의 거리를 좁히려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8

제 6강 – 2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2)

 ♦ 오늘의 담론은 ‘동양적 사람 이해’ 혹은 ‘동양적 사람 이해의 방식’입니다.

1. 최근의 경향은 많이 변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사람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형태로 출생하여 ‘여기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존재’하면 그것으로써 일단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람 같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해도 일단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있으면 그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의 모양을 지니고 있기만 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동등하고 동일한 인권을 갖습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일찍부터 사람을 실존론적으로 이해하여 왔습니다. 우리 말의 ‘사람’이란 ‘삶’과 ‘앎’의 결합이며 ‘삶을 알므로’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삶이란 무엇인지,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양인들이 자주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나타냅니다. 서양에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사람답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해도 그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구적 인간이해를 그 바탕에 깔고서 하는 말입니다. 개인주의와 평등주의적 사상은 이런 서구의 인간이해에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에 동양과 서양 사이에 생기는 인간, 인간의 권리, 인간의 자유, 인간의 조건에 대한 여러가지 차이점들이 발견됩니다.

2. 먼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사람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거나 규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내면적으로 이해합니다.

얼굴은 사람의 탈을 쓰고 있어도 마음과 인격은 마치 짐승과 같은 인면수심형人面獸心形의 인간이 있다고 봅니다. 동양에서는 아무리 사람으로 태어났고 또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릇 그의 생각과 삶의 행태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사람으로 등급이 먹여지고 심한 경우에는 아예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규정하고 설명하며 동시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는 책들입니다. 사서四書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이르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주역周易)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서삼경 중에서 인간에 대한 동양적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을 간추려 보려고 합니다. 사서삼경을 통한 사람공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동양에서의 인간이해는 모든 인간을 상호 ‘관계’ 속에서 봅니다. 서양 철학은 인간을 독립적, 주체적으로 봅니다만 동양은 인간을 상호 관계적으로 이해 합니다. 서양에서의 인간은 개인입니다. 개인주의적 인간이해 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집단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사람을 이해 하려고 합니다.

동양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독립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자연, 생물과 무생물, 심지어는 존재와 비존재 까지도 포괄하는 일체 모든 것들 속에서 더불어 함께 존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 문명이 주도하는 사회 구도 속에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관계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황폐화 현상’은 개인과 가정, 사회와 각종 공동체, 국가와 지구를 넘어서 전 우주적 현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만 살려고 하고, 자기 가정만 지키려고 하고, 자기 회사, 자기 사업, 자기 학교, 자기 교회, 자기 나라만 번성시키려고 안달을 하는 사이에 모두가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지구적, 전 우주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정신 중 하나인 동양의 ‘고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2천 5백여년 전 동양의 성현들이 가르처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서 오늘은 사서四書에서 몇몇 예문들을 살펴봄으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4. 먼저 핵심개념부터 한마디씩 정리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대학大學의 중심 개념은 덕德입니다. 대학大學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이란 덕스러운 사람이요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란 후덕한 삶의 태도입니다.

논어論語의 핵심은 인仁입니다. 인은 긍휼과 자비를 포함하는 개인과 개인 사이를 이어주는 인간관계의 핵심개념 입니다. 인생을 어질게 사는 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끄럽게해 주는 윤활유라고 봅니다.

맹자孟子의 중심은 의義입니다. 의란 정치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가는 공동체 개념입니다. 의롭지 못한 어짐, 어질지 못한 정의는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중용中庸의 핵심은 정도正道와 적중的中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술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균형을 마추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진리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상태를 이릅니다.

바로 이 덕德과 인仁과 의義와 균형均衡과 조화調和, 이 네 가지가 사서四書의 중심개념입니다.

5. ‘대학大學’은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증자曾子(기원전 506-436)가 쓴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증자가 스승인 공자의 말씀을 편찬하고 해설을 덧붙인 것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대학은 유교의 경전 중 하나입니다. 대학은 그 시작에서부터 대학의 목적, 유교의 목표, 사람됨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대학지도大學之道 재명명덕在明明德 재친민在親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라고 했습니다. (주희는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쳤습니다) 이것을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이라고 합니다.

대학의 목표는 밝은 덕을 더욱 더 밝게 하는 것이며,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 사이에 사랑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최고의 선에 도달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 3가지는 결국 ‘평화로운 세상’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만들려는데 있습니다.

대학은 우리가 이 세가지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팔조목八條目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8가지가 포함됩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입니다.

격물格物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찬찬히 살펴보고 사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자세를 이릅니다.

치지致知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지혜의 극치에 이르는 단계를 말 합니다.

성의誠意란 마음과 생각을 바르게 하고 의지를 굳게하는 단계입니다.

정심正心이란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다스리는 단계입니다.

수신修身은 글자 그대로 몸가짐 까지도 늘 단정히 함으로 수양을 쌓는 것을 말 합니다.

제가齊家란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여 식솔들에게 평안과 화목을 주는 것입니다.

치국治國이란 그런 후에 한 지역이나 공동체나 나라 전체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평천하平天下는 드디어 그가 사는 시대와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 결론 : 이것이 동양에서 보는 이상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불어 평화를 만들어가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 – 그 사랑과 아픔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7

제 6강 – 1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2)

♦ 人文學의 핵심이며 제 1 주제인 ‘사람’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 입니다.

종교나 하느님 문제 까지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결국 사람 문제로 귀결이 됩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기쁨도 주고 사람이 우리를 슬프게도 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탄핵된 박근혜 보다는 마약으로 교도소에 있는 우리 아들이 나를 더 불행하게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이상한 것이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50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의 배우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식은 우리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니까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 곁에 앉아있는 <인문학의 친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지난 시간엔 주로 서구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추천 도서는 신영복선생이 성공회 신학대학 인문학 교실에서 한 강의를 책으로 출판한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개 2015)와 그 분의 다른 책인 ‘강의 – 나의 고전 독법’(돌베개 2004)과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돌베개 1998)입니다.

♦ 들어가는 말 –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는 어떤 ‘인식의 틀’, ‘인식의 도구’(The Frame of Knowledge, The Structure of Understanding, The Tool of Cognition)가 있게 마련 입니다.

그런데 서양, 혹은 서양 사람들은 이 인식의 틀과 도구를 주로 ‘문사철文史哲’ –문학과 역사와 철학- 로 여겨왔습니다. 사람들이 남겨놓은 문학작품들, 역사적 흔적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담은 철학을 추적해 보면 그들의 사상과 인식의 틀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흔히 ‘이성적 인식 방법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양, 혹은 동양인들은 이 인식의 방법을 시서화‘詩書畵’ –시와 글씨와 그림- 이라고 여겼습니다. 시와 글씨와 그림이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시와 그림과 소리를 뜻하는 겁니다.

즉 동양인들은 시를 짖고 그림을 그리고 (대부분의 동양화를 보면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깃들입니다) ‘소리’를 하는 곳에 인간의 온갖 흔적들이 묻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감성적 인식 구조’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동양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를 머리라고 보지않고 가슴이라고 본 것입니다. 동양인들은 말 잘하고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 보다는 마음씨 곱고 인정이 깊고 생각이 바른 사람을 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사철文史哲에서 시서화詩書畵로 가야한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동양인들이 지닌 사고의 틀이요, 인식의 구조입니다.

*** 다음 글은 ‘동양적 사람 이해’ 혹은 ‘동양적 사람 이해의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사람일까?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6

제 5강 – 3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다음은 오늘의 주교재인 ‘사람, 장소, 환대’를 중심으로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사람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김현경에 의하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아니한 순수한 몸은 사람이 아닙니다. ‘몸’이 사람으로 인식 되려면 의복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적 기호들을 입어야만 합니다. 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소품과 도구로 몸을 변형하여 전시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사람이 됩니다. 공공 장소에서 나체를 금지하는 것은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은 태어난 후 일정한 ‘사회적 성원권’ (Social Membership)을 얻음으로 드디어 ‘사람’이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적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인정을 받지 않아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란 일종의 ‘자격’이고 ‘인정’이고 ‘승인’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성원권’을 통해서만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그는 ‘사회적 환대’(Social Hospitality)로 보았습니다. 사회적 환대를 받지못한 인간은 아직 사람으로써 인정이 안되었다고 봅니다.

(3) 김현경은 전통적으로 ‘인간’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는 쳐주지 않았던 group, 즉 사회적 환대를 받지 못해온 집단을 5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아, 둘째는 노예, 셋째는 여성, 넷째는 군인, 다섯째는 사형수 입니다.

(4) 애기는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긴 하지만 아직 ‘사람’은 아닙니다. 태아가 ‘사람’이 되는 데는 그의 부모와 가정이 기뻐하고 축하하고 법적, 행정적 절차를 통하여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으로 들어와야 ‘사람’이 됩니다. ‘유산’이 된 애기나 강간에 의해서 태어난 애기를 낙태 시키고 일정한 애도의 의례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 입니다.

태어난 애기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사회가 그를 인정하고 환대함으로 ‘사람’이 됩니다. 신생아는 태어나서 사회적 환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침으로 사회 속으로 들어옵니다. 식구들과 친구들의 방문과 축하, 감사의 기도, 세례식, 백일잔치 같은 공동체의 의식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만약 그 이전에 죽으면 태아는 사산을 한 것 과 같이 여겼습니다. 아기에게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여전히 배내옷을 입히는 동안은 아기가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문지방 단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즉시 국가가 개입합니다. 출생 자체를 통과의례로 보고 사람으로 승인하고 사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5) 전통 사회에서는 노예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일체 아무런 통과의례를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노예에게는 얼굴(체면 Face), 명예(Honor), 이름(Family Name은 물론이고 개인의 이름도), 권리,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기 때문 입니다. 물론 사고 팔 수 있었고 같은 노예 사이에서 애기를 낳아도 그 애기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노예는 잘못해도 피고가 되지 않았고 주인이 모든 민사상 책임을 집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잘못했다고해서 개를 재판에 걸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Orlando Patterson, Slavery and Social Death, Harvard Uni. Press, 1982)

(6)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는 여자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인을 집단 사회에서 제명 처분했다는 뜻 입니다. 여자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다시 친정으로 돌아 갈 수 없었고 일체의 종교의식(제사)에 참석 할 수 없었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친정이나 시집, 그 어는 쪽으로 부터도 가정의  성원권(Family Membership)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름도 족보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시집살이는 종 살이’였고 여자는 애 낳는 기계로 여겼습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도 여자는 남자가 마음대로 처치 할 수 있는 물건 중 하나였고(아브라함과 사라 등) 로마 시대 이후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건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7) 과거는 두 말할 것도 없고 현대전에서도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입니다. 적군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나 범죄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써의 군인이 한 행동이 아니라 ‘국가라는 기관’이 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전투 중의 살인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법적인 추궁을 당하지 않습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파괴하는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때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자발적 휴전은 그 후 어떻게 처리 되었나요?)

뒷골목의 깡패들에게는 싸워도 명예나 규칙이나 위신이 있습니다만 군인에게는 인격, 명예, 위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으로 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초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대표자의 맞대결도 없이 무조건 대포를 쏘고 무차별적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보았습니다.)

(8) 죤 로크 이후 사형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폐기처분 한다고 여겼습니다. 사형수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먼저 ‘너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이미 사람의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점을 확인 시키고 난 후 국가는 국가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한 때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쓸모없고 유해한 물건이 되어버린 물건을 폐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국가가 살인을 하면 안되지!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물건을 폐기처분 할 뿐이다’ –이것이 사형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처형할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9)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회적 성원권을 갖고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을 때 마침내 ‘사람’이 됩니다. 그 이 전에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존재이기는 하지만 아직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음으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라고 보는 겁니다.

(10)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사람’으로 인정 받으려고 노력하고 투쟁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존재이고 먼저 자신이 사람으로 받아드려진 집단 속에 다른 인간을 받아드려 자신과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은 인간을 배제 시키고 거부하고 자기와 다른 존재를 구별하고 빗금을 긋고 차별화 하려고 합니다.

먼저 어떤 club의 member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member로 가입하려고 하면 여러가지 규정과 제도를 만들어서 제한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Orlando Patterson은 이런 인간의 심리와 역사를 ‘타이모크라시’(Timocracy)라고 했습니다. 이는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를 말 합니다. 여기에는 남보다 우월해 지려는 욕망, 권위를 앞세우고 그 권위를 행사하려는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군인다움을 높이고 군인정신을 높이 사는 태도, 물질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이 포함 됩니다.

패터슨에 의하면 행복이란 성원권이고 존재란 곧 소속이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란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즉 사람으로써의 성원권을 갖고 사람들 속에 끼기 위해서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나도 끼워주십시오. 나도 당신들과 같이 먹고 자고 놀고 살고 싶습니다. 우리도 당신들 집단의 member로 받아주십시오. 나도 제발 사람으로 쳐 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성원권 투쟁이 바로 인권운동이요,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겁니다.

(11)  한편 법률적으로 ‘사회적 성원권’(Social Membership)을 갖고 그 사회로부터 외형적 환대를 받는다고 해서 진정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그 사회 속에 소속이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컨데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호주에 이민을 왔습니다. 호주에 도착한 후 당당하게 일도하고 세금도 내고 이 나라의 법규도 지킵니다. 공공의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환대를 받습니다. 식당에 갔을 때는 영주권이 있느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국적은 어디냐 하는 것을 묻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의 환대는 사회적 성원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우리의 주장과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고 어디에서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사람으로써의 기본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간성 속에는 진정 지구의 종말이 와도 극복해 낼 수 없는 편견과 편당심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입니다.

트럼프나 폴린 핸슨은 도처에 있고 은근히 그들을 편들어주고 지지하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흑인들이나 아시아 이민자들이나 히스패니아 계통의 이민자들의 경우,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21세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종교적으로 ‘불가촉 천민’의 문제를 지닌 인도의 인종 차별이나 일본이 계속하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나 홈랜드를 잃어버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원주민 문제나 세계도처에서 진행되는 여성의 차별 문제등은 실로 사람이란 무엇이고 ‘사람이 된다’ 거나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여실히 증언합니다.

         Comments & Questions

         Sharing Time

(1) 인간으로 태어났고 또 인간의 몸과 얼굴을 지니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람’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세계적으로든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든 각자가 돌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와 내가 할 수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토론해 봅시다.

(2) 나(우리)는 호주라고하는 다문화 사회(이민자의 땅)에서 사람으로 환대받지 못한 경험있는지? 어떤 경우, 왜 그랬는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로써 이를 개선해 나갈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아니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5

제 5강 – 2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사람’이라는 개념의 의미 – 사람을 부르는 말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우리 말의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로도 Saram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사람’은 ‘삶’과 ‘앎’의 합성어라는 것이 지금 까지의 지배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그 삶의 의미를 ‘아는’ 혹은 ‘알아가는’ 존재라고 봅니다.

사람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자신의 목표와 죽음을 알고 자신은 그런 과정을 통과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데 그의 사람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흔하게 쓰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人間’(닝겐)이란 개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일찍부터 그들의 집단의식, 혹은 집단적 이해가 깔려있다고 보겠습니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그런가하면 중국인들은 사람을 ‘인류人類’라는 개념으로 씁니다. 이는 대륙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사람을 하나나 둘 혹은 몇몇 사이의 관계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땅위에 존재하는 온갖 유인원類人猿 모두를 사람의 범주에 포함시킵니다.

한국어 – 사람  / 라틴어 – Homo  / 영어 – Human, Human race 혹은 Mankind  / 독일어 – Mensch  / 중국어 – 人類  / 일본어 – 人間  / 히브리어 – Adam / 그리스어 – androphos  / 학명은 라틴어로 표기합니다. – homo sapiens

♦ 라틴어 homo를 머리로 하는 여러가지 인간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homo sapiens – 생각하는 인간 , 혹은 지혜로운 인간 / homo habilis – 도구를 쓰는 인간 / 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 homo sexual – 동성애자 / homo ludens – 놀이의 인간 / homo movens – 이동하는 인간 / homo demens –광기의 인간 / homo academicus –학문하는 인간 / homo aestheticus – 심미적 인간 / homo artex – 예술적 인간 / homo biblos – 기록하는 인간 / homo consumes – 소비하는 인간 / 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 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 homo duplex – 이중적 인간 / homo ecologicus –생태적 인간 / homo viator –떠도는 인간 / homo technicus –기술적 인간 / 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 homo symbious – 더불어 사는 인간  / homo solus – 외로운 인간 / 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 homo sexcus  – 섹스하는 인간, 몸으로 교감하는 인간 / homo sacer – 성스런 인간, 혹은 벌거벗은 인간 / homo religious –종교적 인간 / 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 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 homo nomad – 유목민, 떠돌아 다니는 인간 / 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 homo hundred – 백세까지 사는 인간 등등이 있습니다.

♦ 과거에는 사람과 다른 동물들 사이를 구별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례들도 퍽 많습니다.

(1) 사람만이 사회적 동물이다. – 아니다. 개미나 꿀벌들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질서와 상하계층과 역할분담을 통하여 그들 사회를 조직화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이들도 경우에 따라 집단 속에서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2) 사람만이 문화를 형성하고 정치적 행동을 한다. – 아니다. 돌고래나 침팬지나 까마귀들이나 다른 포유류들도 그들 세계에서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다른 집단들과 전쟁을 한다.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리더를 형성하여 다수의 개체를 다스리며 통치하는 국가나 정부체제를 가지고있다. 오히려 이들은 인간들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다.

(3) 사람만이 약육강식의 이론에 사로잡혀있다. – 아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동물계에도 존재한다. 특정 국가나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들을 억누루고 지배하듯이 동물들도 개체 사이나 혹은 다른 개체에 대해서 똑같이 침략하고 정복하며 지배하고 억압하는 형태와 체제를 가지고 있다.

(4) 자유, 평화, 사랑, 신뢰 같은 가치는 사람만이 추구하는 것이다. – 아니다. 다른 동물들도 포위, 체포, 죽음 앞에서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자유로운 삶을 갈구한다. 평화를 사랑하고 종족을 보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본능과 의도적 노력을 기울인다. 이를 위하여 집단 사이의 단결을 유지하고 외부의 적을 막아내기도 한다. 이 안에는 자손을 번식 시키고 후손을 남기려는 본능도 포함된다. 우리는 이들 동물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 세계보다 훨씬 더 규율적이고 도덕적인 면들을 보여 줌으로 ‘짐승 보다도 못한 인간과 인간 세계’를 목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5) 동물들에게는 종교가 없다. – 아니다. 심리학자 스키너의 연구에 의하면 비둘기를 포함한 몇몇 동물들도 인간들과 유사한 종교적 제의행위를 한다.

(6) 자살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아니다.  돌고래도 자살하는 것이 종종 보고된다. 자식을 잃은 곰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벽에다 머리를 찧어 자살을 한 사건도 보고 되었다.

사람 만나기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4 

제 5강 – 1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이제 인문학의 핵심 주제인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topic을 가지고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첫째는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문제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두번째로는 동양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 마지막 세번째에는 종합적으로 ‘인간의 품격’( The Road to Character, David Brooks)을 읽으면서 ‘균형잡힌 인간형’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추가로 추천해 드리는 책은 김현경지음, ‘사람 장소 환대’ 입니다.(문학과 지성, 2015년) 먼저 서론적인 이야기를 드린 후, 주로 이 책을 중심으로 현대 서구 인문학이 관심하는 ‘사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 서양의 정신사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하나는 유대적 전통과 사고를 대변하는 ‘헤브라이즘’(Hebraism)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적 전통과 사고를 반영하는 ‘헬레니즘’(Hellenism)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종교적, 심미적, 신앙적이고 헬레니즘은 이론적, 합리적, 이성적입니다. 신과 인간, 신앙과 이성을 제각기 앞세우려고 하는 이 두 가지 사상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두 사상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갖습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생명은 창조된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 합니다.

유대교와 그 뒤를 이어받은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교의 코란은 물론이고 히브리적 세계관에 기초한 고대인들 역시 대부분 모든 생명은 조물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을 관찰 하면서 먼지나 흙 같은 데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작은 미생물들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생명의 창조설이 아니라 ‘자연 발생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이론화하였고 그 후 뷔퐁(Buffon 1707-1788 확율과 통계 이론)과 라마르크(Jean Lamarck 1744-1829 용불용설)를 거쳐 다윈(C. Darwin 1809-1882 진화론)에 이르러 이 생명의 자연 발생설은 진화론으로 발전, 확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이론의 우열을 비교 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주로 인문학적 입장에서 헬레니즘의 주장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 다음 10개의 예문을 읽으면서 ‘사람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 나는 정치하는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 그는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는 안동 ‘사람’입니다. 그는 충청도 ‘사람’입니다.

– 일을 시키려고해도 어디 ‘사람’이 있어야지요?

– 돈 좀 있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요.

– 야 이 ‘사람’아 우리가 어디 남이가?

– ‘사람’ 팔자 시간 문제다

–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같아야 사람이지

– ‘사람’과 산은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고 좋게 보입니다.

–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났나?

♦ 이제 인류의 진화 모델 중 몇가지만 살펴보시겠습니다.

(1) 지금의 인간과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의 유인원(類人猿)의 출현은 기원 전 약 500-700만년전 아프리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봅니다.

(2) 그 다음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의 출현인데 지금부터 약 300-400만년 전 이라고 봅니다.

(3) 이어서 발견된 화석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lis,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하는데 이는 약 100-200만년 전입니다.

(4) 이를 전후하여 출현한 것이 ‘호모 이렉투스’(Homo erectus)인데, 두 발로 서서 걷는 인간, 즉 직립원인(直立猿人)입니다. 이때는 약 100만년 전입니다.

(5) 현재의 인간과 가장 유사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명명된 화석은 인간의 출현을 약 20만년 전이라고 추측 합니다. 화석 연구에서는 이들을 ‘네안데르탈인’ 이라고 부릅니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돌이나 나무를 가지고 사냥을 위한 도구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6) ‘크로마농인’이라고 이름하는 ‘신인간’의 출현은 지금 부터 약 3-4만 년 전이라고 봅니다. 이들이 현재의 인간과 비슷한 두개골과 골격 구조를 지녔다고 봅니다.

♦ 사람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포유류과에 소속된 영장류입니다. 포유류(哺乳類)란 Mammalia에 속하는 동물로써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을 말합니다. 암컷에게는 젖이 나오는 유선이 있고 대부분 몸에는 털이나 가시나 비늘이 있습니다. 영장류(靈長類, Primates)란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뜻으로 주로 인간을 가르킵니다.

영장류의 특징은 가슴에는 보통 한쌍의 유방이 있고 사지는 물건을 잡기에 알맞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5개씩 있으며 손톱과 발톱이 있습니다. 눈은 앞을 바라보고 후각은 발달되지 않았고 뇌와 이빨이 발달되어있으며 종류에 따라서는 꼬리가 있고, 비교적 많지 않은 새끼를 낳고, 새끼를 키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동물입니다.

(2) 두 발로 일어서서 움직이며 일하는 직립원인(直立猿人) 혹은 척추동물(脊椎動物)입니다. 따라서 손이 발달되었고 손으로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3)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할 줄 아는 공작인(工作人)입니다.

(4)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를 소통하는 동물 입니다.

(5)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하는 ‘생각하는 존재’요 ‘이성적 동물’입니다.-

(6)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거나 집단을 형성하여 삶을 유지하는 공동체적 존재요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3

제 4강- 4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나가는 말 –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의 말을 새겨두어야 합니다. ‘부탁입니다. 꼭 기억해 두십시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당신은 사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 입니다.’

인문학의 출발점은 생각하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L. Adorno 1903 -1969 독일의 사화학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위르게 하버마스와 함께 비판이론을 주도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 중 하나)는 이 세계에서 제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사회’를 미국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꼭 미국 만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형태의 사회 구조를 지닌 나라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추종하는 나라들은 거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주어졌거나 정치가 조작해낸 대중문화를 따라기도록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스포츠와 영화, 각종 게임과 향락을 따라 갑니다.

‘생각은 당신들이나 하시오. 우리는 그냥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소’가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행태입니다.

트럼프는 선거유세 때 내놓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런 ‘사유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대중의 무지’가 우리 시대의 사회와 문화의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 서적 –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김기춘이나 조윤선만 잘못된 사람들인가? 물론 그들은 잘못된 정책을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과 함께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으면서 일한 과장, 국장, 실장, 차관보들은 ‘영혼 없는 기계들 입니까?

총회장이니 담임목사들, 혹은 총무원장이나 주지 스님만이 오늘의 종교계를 혼란하게 만들어 놓는 사람들인가? 다른 평신도들과 불자들, 장로들과 보살들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말없이 순종만 하면 우리 모두 죽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절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기성 세대의 정치인, 교수, 언론인, 목사, 신부, 스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다 죽습니다. 그들이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떠들고 소리 지르고 반항하고 소란을 피워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세월호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자 만이 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Comments & questions.
  • Sharing – 무엇이 우리를 의심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일까요? 그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극복해 내고 끝까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2

제 4강- 3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생각의 탄생’

미시간 주립대학 교수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역사학자이며 시인인 그의 부인 미셀 루트번스타인이 함께 쓴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2001)’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로 촛점이 바뀌어졌다고 봅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창조적 생각하기’이며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입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이 책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 아인슈타인, 피카소, 마르셀 뒤샹, 버지니아 울프, 제인 구달, 스트라빈스키, 마사 그레이엄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하기’를 살펴봅니다. 그들은 도대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은 어떻게 배웠는지를 기술합니다.

동시에 저자는 이들 역사상 소위 뛰어난 인물들만이 ‘창조적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기만 하면’ 창조적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 합니다.

untitled예컨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1929)을 생각해 봅시다. – 실제로 그 그림은 파이프입니까, 아니면 파이프의 개념이라고 보십니까? ‘이것은 사과가 아닙니다’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실재’(Reality)와 ‘이름-개념’(Name, Concept)을 어떻게 구분 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루트번스타인은 ‘생각과 대상’ ‘사고와 도구’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13 가지 단계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이 탄생된다’고 봅니다. 모든 ‘생각하기’는 반듯이 어떤 대상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주체자의 관찰로 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창조적 생각’의 단계입니다.

(1) 관철하기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모든 감각적 접근과 경험하기가 첫 단계입니다.

(2) 형상화하기 – 관찰에서 얻은 것들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형상화는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예컨데 장미 꽃을 관찰한 후, 그 아름다움을 시각적인 그림이나 글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향기를 따서 향수를 만들어 후각적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습니다.

(3) 추상화의 단계입니다. 관찰한 대상에서 일체의 껍데기들은 다 벗겨버리고 최종적인 본질만 보는 단계입니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본질만 그렸기 때문 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형상은 다 걷어버리고 사물의 핵심만을 추상화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간단히 제목만 열거하겠습니다.

(4) 패턴 알기 단계 (5) 패턴 만들기의 단계 (6) 유추 단계 (7) 몸으로 생각하는 단계 (8) 감정 불어넣기 단계 (9) 차원을 바꾸어 보는 단계 (10) 모형을 만들어 보는 단계 (11) 놀이와 즐기는 단계 (12) 변형의 단계 (13) 통합의 단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유대인으로서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1963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내용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 섰던 아이히만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1961년부터 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재판에 직접 참관한 재판 기록 입니다.

원래 이 책의 처음 제목은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이었습니다. Banality라는 단어의 뜻은 ‘너무나 흔하고 흔하여 아주 쉽게 예측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흔히 ‘악의 평범성’이라고 번역해 왔습니다. 악의 일상성, 악의 진부함, 악의 흔함이라고도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본 아이히만은 그렇게 수 많은 사람을 죽일 만한 악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요, 그 개인적 성품을 놓고 보면 참으로 착하고 선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 합니다.

아이히만은 주장합니다. ‘나는 운이 없어서 나쁜 정부의 공무원이 되었을 뿐이지 사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두가지를 지적 합니다. 첫째는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입니다. 사실 ‘악’이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요, 평범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관찰입니다. 아렌트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별 ‘생각없이’ 평범하게 행하는 일들이 악이 된다’는 점을 지적 합니다. 악이란 특별한 사람이 특별히 악한 생각이나 악한 의도를 갖는 데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든지 그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히만은 독일 국민들에 의해서 정당하게 투표로 선출된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공무원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책무에 성실하게 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무원 수칙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히만은 말합니다. ‘그 일은 사실 내가 아니라 누가 그 위치에 있었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만 했을 일 입니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했고 반항을 하거나 뇌물을 주거나 그 어떠한 불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렌트는 여기서 악과 불의는 착하고 선한 사람도 넉넉히 저지를 수 있는 ‘평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합니다.

두번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악을 행한다’는 지적 입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행하는 것은 개인적 악일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비극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적시 합니다.

아이히만은 착한 사람이었지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던집니다. 1962년 5월 31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아이히만은 ‘자신의 악과 죄를 인정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는 성실했고 진실했지만 ‘생각하는 것’은 거부한 사람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고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렌트는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투철한 준법정신과 성실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유죄인 이유는 오직 생각하지 않은 것이요, 생각하지 않고 복종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 그것이 미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악이고 죄입니다’ ‘나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했을 뿐입니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습니다.

결국 아이히만의 죄는 첫째,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고 일 한 것이며 둘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종한 것이며 셋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물론 모든 전쟁과 오늘날도 계속되는 공무원들의 ‘영혼 없는 공직 수행’과 개별적 항거를 무시하고 자행되는 집단적 행동들은 인간에게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앗아가는 무서운 범죄 행위입니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 자 이제부터는 생각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임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