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교 교사는 제 아내가 25년 째 계속해 오고 있는 일입니다. 아내는 이 일을 즐기는 동시에 일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답니다. 봉사를 전제한 일이므로 재미와 자부심 없이 즐기기만 하기는 힘들겝니다.
그런 아내를 따라 어제는 필라델피아, 남부 뉴저지, 델라웨어 지역에 있는 한국학교 연합체인 동중부협의회가 주최한 2014년 교사 송년의 밤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아내를 따라 이런 한국학교 연합체 행사에 가본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시는 분들의 애씀과 참석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느낄 수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밤 그 모임에서 제게 특별히 새롭게 다가 온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평시엔 쉽게 듣거나 부를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거나 듣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애국가와 아리랑입니다.
애국가를 부르면서는 참으로 뜬금없이도 울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마 세월호 이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모국(母國)과 한인사회에 대한 생각들이 겹쳤기 때문일 겝니다. 새삼스럽게 한물 간 민족주의 감상에 젖었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그래도 쉽게 연결해 주는 도구로써 애국가라는 노래에 잠시 빠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날, 홀로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몇 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리랑이야말로 애국가를 넘어서는 한국어 사용자들을 이어주는 끈일 것입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을 비롯하여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를 연결해 주는 노래인 동시에 한반도 남과 북을 이어주는 노래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홀로 아리랑은 홀로 외롭게 부르는 아리랑이 아니였습니다. 홀로일 수 밖에 없는 개개인들 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념과 신앙이 서로 다른 공동체는 물론이고 빈부의 차이, 지식의 차이, 권력이나 권위를 누리거나 못 누림의 차이로 벽을 쌓고 홀로 섬이 되어 사는 모든 세력들이 적어도 손을 서로 맞잡을 수도 있다는 믿음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무릇 노래란 느낌이고 감성입니다.
하나되는 일은 이론이나 이성으로는 힘들지만 느낌과 감성으로는 쉬운 일입니다.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란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감성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이성(理性)이나 이론(理論)이라는 허울을 쓰고 사람들을 편가르고 서로를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일이 넘치는 세상에서 홀로 아리랑이 제게 새롭게 다가온 저녁이었습니다.
아리랑을 이민의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 갈 우리 후대들을 위해 가르치는 제 아내를 비롯한 한국학교 교사들에게 제 느낌과 감성으로 치는 박수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