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이 사방을 덮은 날, 장자를 읽다. 장자(莊子) 외편(外編) – 추수편(秋水篇)에 있는 이른바 호량지변(濠梁之辯) 이야기.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차례대로 알아보세. 자네가 방금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라고 물었네. 지금 그 물음에 대답하지. 자네는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알고서 나에게 물었던 것일세. 그렇다면 물고기가 아닌 내가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나는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세”
이 이야기에 대한 자오스린의 해석이다.(자오수린저 허유영번역,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서)
논리상으로 보면 이 변론의 승자는 혜시다. 장자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라는 혜시의 논리적인 질문을 회피했다. 불교에서는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마셔 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물고기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미학적으로보면 장자가 이겼다. 장자는 자신이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투사시켜 물고기가 즐거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시인 신기질(辛棄疾; 1140년- 1207년, 중국 남송의 시인)은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라고 했다. 장자는 큰 덕을 가슴에 품고 세상 만물에게 봄처럼 따뜻한 정을 느꼈다. 그에게는 천지간이 모두 따뜻한 우주였다.
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느끼던 날에.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장자여혜자유어호량지상) 莊子曰(장자왈) 儵魚出遊從容(숙어출유종용) 是魚之樂也(시어지락야) 惠子曰(혜자왈) 子非魚(자비어) 安知魚之樂(안지어지락) 莊子曰(장자왈) 子非我(자비아) 安知我不知魚之樂(안지아부지어지락) 惠子曰(혜자왈) 我非子(아비자) 固不知子矣(고부지자의) 子固非魚也(자고비어야) 子之不知魚之樂(자지부지어지락) 全矣(전의) 莊子曰(장자왈) 請循其本(청순기본) 子曰(자왈) 汝安知魚樂(여안지어락) 云者(운자) 旣已知吾知之而問我(기이지오지지이문아) 我知之濠上也(아지지호상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