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목- 광야 8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6 

헤롯 안티파스는 새로운 도시 티베리아를 묘지 위에 지음으로써 정결법을 어겼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운동은 바로 이러한 정황과, 상류층의 헬라적 삶에 의해 고유의 문화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부정한 것에 의해 위협 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세례에 대한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의 역사적 예수에서 

세례요한이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체포되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요세푸스의 기록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롯대왕과  그의 후궁 출신 어머니인  사마리아 여인 말다케(Malthake) 사이에서 태어난 헤롯왕의 다섯번 째 아들입니다.헤롯대왕은 첫 부인 도리스와 왕후인 미르얌이 나은 두 아들은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아들에게 그의 왕국을 나누어 주고 죽습니다. 

그렇게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물려받은 안티파스는 어린 시절을 로마에서 보냈습니다. 아버지 헤롯대왕이 그를 인질로 로마에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반쪽 유대인(에돔출신)이었고 자신은 사마리아의 피도 섞였고 게다가 로마식으로 자란 안티파스는 집권을 하자 곧 실행한 것이 도시를 정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까지 유명한 티베리아스입니다. 당시 갈릴리의 수도였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안티파스가 당시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명명한 것입니다. 

안티파스의 첫 부인은 나바테아국의 공주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방 에돔 출신, 어머니는 사마리아 출신, 아내는 이방 여자였던 헤롯 안타파스가 느꼈을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에 대해 조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곳은 유대 갈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정통 유대 하스몬 왕가 출신인 헤로디아와 재혼이었습니다. 헤로디아 역시 제 나름의 욕심이 있었던 여자였습니다. 헤로디아의 첫 남편은 바로 안티파스의 이복동생  빌립이었는데 같은 왕자 출신이지만 안티파스처럼 다스리는 땅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디아의 욕심이란 왕비가 되는 것이였을 겝니다. 

헤로디아

그렇게 두 남녀의 배포가 맞아결합한 일이었지만 두 가지 이들의 장애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의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자기의 형제의 처와 결혼하지 못한다(레위기 18 : 16, 20 : 21 )는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두번 째는  첫부인의  아버지 나바테아국의 왕 아레다였습니다. 딸을 버린 장인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롯 안티파스의 파멸은 이 장인의 노함에서 비롯된답니다. 

아무튼 이 무렵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방했기 때문에 체포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성서가 몇 군데 있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으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민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 마태복음 14 : 5”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이 무서워서 ‘모르겠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마가복음 11 : 32 – 33” 

“모든 백성들은 물론 세리들까지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 들였으나… – 누가복음 7 : 29” 

물론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율법에 어긋난 결혼에 대해 잘못된 일이라는 예언자적 사명을 행한 일은 사실일 것입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지적을 하면 국가를 비방한 일로 치부하여 그 당사자를 죽이거나 벌하는 왈 다스리는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이 괘심죄로 죽게 되었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성서의 기록들이 전하는 그 당시의 상황을 보다 진실에 가깝게  잘 정리한 것은 요세푸스가 아닐까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감동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요한에게 몰려들자, 요한의 영향력이 커진 것을 본 분봉왕 헤롯은 혹시 요한이 기고 만장하여 반역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요한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8권” 

이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반란 예비 음모죄 정도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죽었다는 말이지요. 

자, 이렇게 죽어 간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우선 복음서의 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마가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닦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마가복음  1 : 1 – 8) 마태는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마가보다 더 깊고 긴밀한 관계로 설정해서 이야기합니다. 곧 예수를 예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선포의 내용도 엇비슷하고(마태복음  3 : 2), 세례요한을 이미 예수가 선포하는 새 시대의 인물로 간주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복음 11 : 12) 

그러나 누가는 이와 다른 입장으로 요한의 자리를 설정합니다. 세례요한은 옛시대의 막내일 뿐이라고 못박는 것입니다.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 가려고 애쓰고 있다. – 누가복음 16 : 16)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의 위치를 더욱 아래로 떨어뜨려 놓습니다. 단지 예수가 구세주임을 증언하는 역할(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 요한복음 1 :36)을 할 뿐이고, 예수가 일할 수 있는 디딤돌에 불과하다(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요한복음 3 : 30)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록 연대와 저자들의 입장에 따라 세레요한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을 예수가 세례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한때 세례요한 집단에서 함께 생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답니다. 아, 물론 학문적 연구의 내용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이제 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예수는 세례요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열심당(熱心黨) – 전야(前夜) 3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5 

헤롯이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하였다.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복음 2 : 19- 23, 표준 새번역에서 

헤롯 1세가 죽고 그의 세 아들이 아비가 다스리던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게 됩니다. 첫째인 아켈라오스(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에돔) 지역을, 둘째인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세째인 필립포스(빌립보)는 북요르단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헤롯 1세처럼 왕으로 불리우거나 대접 받지는 못합니다. 로마가 승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아켈라오스를 민족지도자로 나머지 안티파스와 필립보스는 그 보다 한 단계 아래인 분봉(分封)지도자로 대우했습니다. 

첫째 아들 아켈라오스는 약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메 지방을 다스리다가 로마에 의해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심한 악정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에 삼천 명 넘는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되어 약 8천명의 사절단이 로마황제를 찾아가서 아켈라오스를 탄핵합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탄원을 받아드려 아켈라오스를 추방하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유대주”로 하고 로마 총독이 직접 관할하여 다스리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내막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실력자들 곧 사회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층들이 자기 땅과 재산을 유지 증식시키려는 속셈과  직접통치로 더 많은 것을 거두어 갈 수 있는 로마의 잇속이 서로 맞아 떨어진 속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원후 6년부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및 이두메는 로마 총독 관할령이 되었고 갈릴리의 안티파스와 가이사랴 지역의 필립보스는 이 총독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에 대한 성서의 기록으로 누가복음 2장을 보기로 하지요.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동네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레뇨(Quirinius)가 시리아(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인구조사가 있었고, 바로 그 무렵 예수가 탄생했다는 누가의 기록입니다. 이 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아주 분분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무렵 유대의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인구조사 곧 호적조사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두세(人頭稅, 주민세)와 토지세 등의 직접세와 이동세와 시장세 등의 간접세를 잘 거두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문제는 민심을 자극하는 직접적이고도 자극적 요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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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구조사에 항거하는 민중 반란이 일어난답니다. 더더군다나 자기 나라 정부도 아닌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실시되는 호구조사에 반대하는 운동은 민족주의 열망이 더하여져서 아주 탄력을 받는답니다. 이 때 생긴 집단으로 젤롯당(the Zealous)이라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열심당(熱心黨)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들 가운데 아주 극렬한 사람들로 “단검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린 시카리파(Sicarians)도 있습니다. 

이 반란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갈릴리 지역을 다스렸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도 그를 “여우”로 불렀듯이 헤롯 안티파스는 아주 교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관할지 백성이 아니라 식민지 주인인 로마의 환심을 사는 것이 늘 우선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고, 예루살렘과 달리 사회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이 많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예루살렘 못지않게 유대적인 것을 고수하는 지방이었습니다. 로마의 인구조사에 반발하여 일어난 젤롯당의 반란의 진원지는 바로 갈릴리의 세포리스였습니다. 

이 반란의 결과로 세포리스시는 폐허가 되고  세포리스시 입구에는 반란 유대인들을 매달은 십자가가 2000여개가 세워졌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포리스시는 예수가 자란  나사렛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였고(약 8km 거리), 이 사건은 바로 예수 탄생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요새화합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반란을 대비한 요새화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을 갈릴리의 수도로 삼았다가 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디베리아) 시를 건설하고 그 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시절의 갈릴리, 그리고 그의 동생  필립보스가 다스리던 지역 가이샤라를 중심으로 같은 시대에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던 이가 바로 예수입니다. 

헤롯 1세의 셋째인 필립보스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기의 영지를 다스리다가 기원 후 37년에 죽고, 그  영지를 물려받는 이가 조카인 아그리빠입니다. 이 아그리빠에 의해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는 유배를 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그리빠 대왕, 카이자르의 친구, 로마의 믿을만한 친구”로 불리우기를 즐겼던 아그리빠왕 시절에 기독교 첫 순교자 스테반이 죽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처형되고, 베드로가 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그리빠는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상류층으로부터는 진실한 야훼 하나님의 신앙인이자 유대 전통의 수호자로 대접받은 인물입니다. 이는 곧, 당시 유대 상류층들이 이미 썩을대로 썩은 “부(富)”에 정신을 팔렸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탄생했던 무렵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관할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총독의 권한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군사, 경제, 사형권 들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화폐 발행권에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시대를 전후한 로마 총독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 당시 시대상을 간략히 훑어 본 후 세례요한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시대 – 전야(前夜)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 

박사들이 물러 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 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 2 : 13 – 16, 공동번역에서 

이제 이천 여년 전 유대 광야에서 젊음을 태우다 간 사내 세례요한과 갈릴리 해변 마을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온 몸과 맘을 던졌던 사람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광야, 갈릴리, 세례요한, 예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려면 먼저 몇가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광야에 나갔던 사람들, 갈릴리 해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광야, 갈릴리, 세례요한과 예수와는 아무 연관없이 그저 그들을 바라 본 사람들 등등의 모습들을 먼저 알아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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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사회상을 좀 알 필요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에서입니다. 이즈음은 너나없이 다 제 뿌리가 양반인양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따지고 보면 양반의 후손들 별로 안된답니다. 오늘날에야 돈과 권력이 곧 양반인 세상이지만 그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뿌리를 따지곤 하는 것이지요. 

조선시대말사회가 아주 문란해서 양반을 돈으로 사고 파는 세상이 되었어도 그 숫자는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답니다. 

“서기 1910년의 호구조사에서도 확인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충청남도가 충남 전체 가구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고 충북(4.5%) 경북(3.8%) 서울인 한성(2.1%) 그리고 전북(1%) 순 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 충남 공주군 순 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보지요. 조선시대 양반, 상놈 따지기 이상으로 신분을 따져 묻던 시대였답니다. 혈통이 어떤 혈통이냐가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기준은 뭘로 밥먹고 사냐? 곧 직업의 귀천을 매우 중요시하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당시의 시대상도 좀 알아야 세례요한이 왜 그 때 그 말을 했고, 예수는 왜 그 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이해가 좀 정확하고 빠르게 다가오겠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하나 들지요. 누가복음을 쓴 누가의 직업은 의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일반적으로 말하면 ’똑똑한 사람’들이 ‘공부 잘해서’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  ‘돈 잘 벌고’,  ‘안정적인’,  ‘때론 사회적으로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이 크게 엇나간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유대사회에서의 의사란 ‘가정 휼륭한 의사라도 지옥으로”갈 뿐이고, ‘의사란 도둑과 같은 직업일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천대받는 직종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돈은그 당시도 좀 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천대받는 직종으로 낙인 찍혔는가 하면 첫째는 의사를 믿게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고, 두번 째는 부자들에게는 잘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멸시하고 잘 봐주지 않는다는 것,  세 번 째는 의사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 지은 자들 뿐이라는 것이랍니다(당시에는 병은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게 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앞으로  제가 예수와 바울 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인용하게 될 요하임 예레미아스(Joaehim Jeremias)라는 사람이 쓴 책  “신약성서시대의 사회경제사 연구 –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라는 책과  잔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책 “역사적 예수”에 나오는 당시 시대상이랍니다. 

이런 저런 뜻으로 예수 이야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명의 헤롯 이야기 –  곧 성서에 나오는 동방박사를 만나고 난 뒤 두 살 미만 갓난 아이를 다 죽인 헤롯대왕과 세례요한과 예수를 죽인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 – 와 당시 로마 총독들의 이야기를 먼저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상황들을 대충 짚어 본 후에야 광야로 나가 세례 요한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권력을 움켜 쥘 때는 여우처럼, 권력을 행사할 때는 호랑이 처럼, 그러나 죽을 때는 개처럼…” 살다 간 독재자들의 이야기는 동과 서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넘쳐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흉내를 못내 안달하는 권력자들이 숱하고요. 

그런 인물 가운데 전형적인 사람이 바로 헤롯대왕이었습니다. 헤롯이 임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희생된 이스라엘 사람 숫자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답니다. 

그 헤롯 이야기 이어집니다.

로마 – 그 날 7

(당신의 천국 –여든 한번 째 이야기)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웨일즈, 헝가리 남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지중해의 섬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이란 등 이 모든 나라들의 공통점은 옛날 로마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영토가 가장 컷을 때 그 넓이는 약  약 7백20만km2  였다고 합니다.  이 면적은 국제 연합 통계국에서발표한 미국 면적  9,629,091km²보다는 작습니다만,  도로(길)망을 따져보면 놀랄만한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로마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인 약 3세기 말 자료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국영도로는 372개가 있었는데 그 길이의 총합계는 약 8만 5천 k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통팔방(四通八方)으로 길하면 한 수 한다는 미국의 도로망 총연장 길이가 약 8만 8천 km라는 사실을 놓고 보자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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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로마의 도로(길)은 기독교의 세계화에 큰 몫을 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런 로마 시대가 온 것입니다. 유대 땅에도, 유대인들에게도 말입니다.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와 2대황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Tiberius Julius Caesar ) 의 시절 유다 갈릴리 땅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그 시절 유대의 상황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제 이야기 당신의 천국 1부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황제에 오르기까지에는 피비릿내 나는 숱한 권력 투쟁이 있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이끌던 삼두정은 카이사르에 의해 일인 독재체제가 되었다가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죽고,  카이사르의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사람이 권력을 공유하는  제2의 삼두정치 체제가 됩니다.  그러다 레피두스는 추방되고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여왕의 연합군을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됩니다. 초대황제에 오른 것입니다. 

이 무렵 유대 이두메(에돔) 땅에 살던 안티파트로스(Antipatros – 이 이름은 단축형으로  Antipas  곧 안티파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이 헤롯대왕의 아버지이고, 헤롯 안티파스로 알려져 있는 갈릴리 분봉왕, 곧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명령한 헤롯 안티파스의 할아버지입니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집안의 이두메(에돔) 지방의 유력 가문이었는데 아버지는 하스몬왕조 시절 이 지방의 총독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이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와 그의 둘째 아들인 헤롯은 권력을 향한 촉이 매우 발달된 부자(父子)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꽤 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만 단 한가지로 요약해서 이들의 성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레피두스 등 로마의 권력을 두고 싸움을 벌였던 모든 사람들이 인정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권력의 이동에 따라 뛰어나게 순종을 하면서 유대지방의 권력을 인정받는 그들의 처세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뛰어난 수완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닌 에돔(이두메)사람으로 로마의 인정을 받고 헤롯이 유대지방의 왕이 된 것은 기원전 37년이었습니다. 식민지의 통치자로서  로마에게 대항하지않는 범위내에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왕이 된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 시대가 열리면서 Pax Romana의  세상을 주창하게 됩니다. 로마를 통해 평화를 누리는 세상이 곧 팍스 로마나의 세계입니다. 로마의 정복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로마제국에 의해 이루어지는 평화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식민지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첨병인 헤롯왕의 임무는 Pax Romana의 세계를유대 땅에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초대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들에 의해 신으로 추대되고 추앙받았습니다. 신이된 것입니다. 유일신 야훼 하나님만을 모시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악의 근원인 셈입니다. 

로마의 신에 의해 유대의 왕이 된 헤롯은 스스로 유대의 메시아가 되고자 했고, 유대인들은 그런 그를 반쪽 유대인이라며 경멸해 마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일한 신 야훼 하나님만을 믿는 유대 땅, 유대 민족들에게 황제가 곧 신인 로마가 식민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식민지배의 앞잡이인 헤롯은 이방인 출신 주제에 온 유대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인양 처신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후에 갈릴리 해변가를 떠돌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자기가 그 나라의 주인이라고  떠들던 한 사내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내는 신이됩니다. 

하나님나라에 얽힌 1부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새해 2014년에 이어질 당신의 천국 2부는 그야말로 신앙,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 말이지요. 

이제껏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