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2020

내 기억에 대한 정당함을 주장하는 떳떳함이 차츰 줄어들고 있기는 하다만, 단언컨데 최근 십 수년 이래 일반 가정들의 크리스마스 치장(治粧)은 올해가 단연 으뜸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일반 가정들의 크리스마스 치장은 분명 줄어드는 추세였고, ‘Merry Christmas!’ 보다는 ‘Happy Holidays!’라는 인사가 보편화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글쎄, 내가 사는 동네에 국한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올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집들도 많고 그 치장이 예년에 비해 사뭇 화려하다. 그 또한 다만 내 기분 탓 인지도 모를 일이다만.

너나없이 그야말로 지난(至難)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종교적 의지가 강해진 탓도 있을 터이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많아지며 쌓인 이런저런 욕구들이 치장으로 분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흘을 쉬며 한 해를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들을 누리게 해 준 성탄절에 치장 대신 감사를 드린다. 한 해를 무사 무탈하게 지낸 감사가 이리 컷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조심조심하면서도 ‘설마…’하는 낙관이 늘 앞서 있었지만, 바이러스 확진 소식들을 가게 손님들과 먼 이웃들에게서 듣기 시작하고, 이즈음에 들어서는 가까운 이웃들과 내 가족들과 이어진 사람들에게서 듣다 보니 아직 무사 무탈함이 그야말로 큰 감사로 다가온다.

돌아보니 신기할 정도로 감사한 것은 가게 매상이 지난 해에 비해 반토막 이상이 줄었음에도 이럭저럭 한 해를 큰 걱정없이 보낸 일이다. 지난 주 내린 폭설과 강풍 탓에 뒷뜰 소나무 몇 그루가 부러져 넘어졌다. ‘돈 들일 일 또 생겼군’하는 걱정이 들 무렵인 지난 월요일, 바이러스 재난지원금 지급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쓰러진 나무들을 제거하는 데 드는 경비와 우리 부부가 받게 될 재난지원금이 얼추 맞아 떨어져 걱정을 금새 덜었다.

그래 또 성탄에 이는 감사다.

이즈음에 매일 페이스북에서 기다리며 읽는 글이 하나 있다. 한국의 진혜원검사가 올리는 페북 글이다. 그의 글은 우선 재밌다. 마치 골리앗 앞에서 물매를 돌리고 있는 다윗을 보는 스릴이 넘친다. 현실은 그저 스릴만 넘치는 연속 동작이어서 그에 대한 안타까움만 이어가며 읽기는 한다만.

아무튼 어제 그가 올린 <훗, 이게 인생이지>이라는 글에서 그가 단언한 말이다.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권력은 종교와 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떠올라 손에 든 것은 리차드 호슬리의 책 <크리스마스의 해방>이다.

크리스마스와 해방이라는 어찌보면 서로 맞붙어 싸우는 말이 하나가 된 이 책에서 호슬리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 참 예수의 모습을 찾는다.

바로 종교와 돈으로 신비스럽게 포장되고 치장된 크리스마스를 벗겨내어 해방시키고, 예수의 참모습인 ‘오늘 여기에서 고통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자는 주장이다.

리차드 호슬리의 주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인물 및 사건에 관련된 그들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토론 가운데서 나타난다.>

어찌보면 갇힌 듯 모든 것들이 답답한 오늘이지만,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사와 다시 시작하는 새날들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은 바로 엇비슷한 고백들로 이어진 사람들이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돈을 쫓고 누리되 권력이 되고자 하는 일에는 물매 들고 싸우는 이들.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무는 성탄에.

 

결혼 기념일

‘이젠 해방되는 해인가?” 식사 주문을 마친 아내가 던진 말이다.

36년이라! 내가 겪지 않았던 세월을 대변하는 시간을 명시하는 세월. 그저 긴 시간을 표현하는 말. 아내와 함께 한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

만나 눈 번쩍했던 시간까지 따져보니 마흔 한해다.

그래! 이젠 모든 것에서 서로 해방된 관계를 시작할 나이다.

36주년 되는 날, 우리 가게 손님에게 받은 최고의 찬사.

<God continues to bless us through you. Yours is a great work offering such beauty and goodness.>

조촐하게. 해방을 위하여!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해방이 된 다음, 일본어가 그 땅에서 물러가고 대신 영어가 그 자리에 들어와서 미군정이 펼쳐지고 있는 동안 한국의 공용어(公用語)로 쓰였다.

말하자면, 일본이 강제로 한국에 퍼뜨려 놓은 일본어는 썰물처럼 그 땅에서 빠져나가고, 속된 말로 꼬부랑 말과 꼬부랑 글씨라고 하는 영어가 밀물처럼 밀려온 것인데, 코쟁이라고도 불리는 미군들이 말하는 것을 한두마디 알아듣고 그대로 비슷하게 흉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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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1

지금은 신문이나 잡지에도, 뉴스 방송에도, 텔레비젼 연속방송극에도, 거리에 즐비한 상가(商街)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

<상가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라고 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한다.

미군정 시대가 지나가고 대한민국이 탄생되어 회갑(回甲)을 지냈건만 아직도 그 땅엔 외래어(外來語)의 어문일치(語文一致) 또는 언문일치 (言文一致)에 관하여 정리할 것이 꽤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래어(外來語)란 말하자면 외국어가 국어 속에 들어와서 국어처럼 쓰이는 것인데, 특히, 한자어(漢字語)를 제외한 여러 외국의 말이 국어화(國語化)한 것으로서 <들온말>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들온말>에 관하여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디지털카메라시대인 요즘엔 볼 수 없지만, 필름카메라시대에는 유원지 나 관광지 등에 있는 매점들 중엔 필름을 파는 곳도 있었다.

영어로 film인 그것을 위에 적은 것차럼‘필름’이라고도 하고,‘필림’ 이라고도 하며, 또는‘휠름’이라고도 한다.

이런 것도 있다.   Center에 관한 이야기다. Center는 축구나 농구 등의 경기(競技)에서 center line, centering 등으로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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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2

한편, center는 무슨 상호(商號) 뒤에 흔히 붙이는 말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xx분식 센터, xx치킨 센터, xx스포츠 센터, xx심부름 센터 등이다.  그러한 center에서 온 말이 센타, 쎈타, 센터, 쎈터 등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한데, 그러한 외래어도 한국에 토착되어 쓰이고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국어다.

그러한만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을 위에 적은 센타, 쎈타, 센터, 쎈터 처럼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여간, 오늘날엔 그 예를 낱낱이 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영어가 판을 치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해방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군정시대 때 영어통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당시 그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 대지주 등 부유하게 살던 집안 출신으로서 해방 전엔 친일을 했고, 해방이 된 다음엔 친미 행위를 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모두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고,“해방 당시나 또는 해방 후 얼마 동안은 오늘날처럼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많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다.

어찌 되었건, 군정 당국은 점령지를 통치하는데 언어장벽(言語障壁) 이라는 걸림돌이 생겨서 영어를 아는 한국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통역정치(通譯政治)>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은 영어가 한국의 공용어는 아니지만, “그 땅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 영어다.”라고 할 수 있는데, 크게는 국가기관에서부터 작게는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 영어가 즐비하다.

물론 콩글리쉬(Konglish)를 포함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콩글리쉬(Konglish)라는 말이 나온 김에 ‘가라오케’이야기를 적는다.

1970년대 이후부터 쓰이고 있는 <가라오케>라는 말은 일본어와 영어의 합성어(合成語)이다.   <비어 있다>는 뜻의 일본어인 ‘가라 (空)’와 오케스트라(orchestra) 의 ‘오케 (orche)’를 합쳐서 만든 일종의 조어(造語)다.

말하자면, 사람이 연주하는 대신 기계가 합성하는 반주음에 맞춰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계나, 그 기계를 설치한 술집 등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가라오케>라는 말이 오늘날엔 영어사전에도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여간 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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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3

지금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은 가라오케의 뜻이나 콩글리쉬 에 관한 긴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고, 태평양전쟁 이후 조수 (潮水)처럼 한국에 밀려들어온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꺼내본 것이다.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던 땅에서 조선총독부 자리에 걸려 있던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지고, 성조기(星條旗)가 올라갔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이 그 땅에 뿌려놓은 일본어 대신 영어가 들어 온 것인데, 그 당시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내 자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적는다. 앞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나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난 30년 세월을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

한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고 했는데, 가령  내가 한국 어느 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하려면, 나는 국적법(國籍法) 때문에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하거나 출국하게 된다.  내가 태어났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 병역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이 나에게 외국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런 것 뿐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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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서울

지난 30년 동안 모국방문을 한 것이 모두 네 번인데(네 번째는 2004년) 다녀올 때마다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난 30년 동안에 내가 한국에서 먹고 자고 한 날 수를 합하면 100 일쯤 된다는 이야기다.

10년 전에 다녀온 것이 나의 마지막 모국방문이 될 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지난 날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 간다.

하여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속도가 전보다 더 빠르지 않은가?  그러하니, 2004년에 내가 직접 보았던 한국은 오늘날의 한국이 아니라 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미합중국 시민이기 때문에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요즈음 고국(故國)에서 들려오는 각가지 소식들 중엔 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8.15 당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일제 강점기 때,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엔 일제의 억압을 당할대로 당했고 굶주릴대로 굶주리면서 살아온 조선사람들이 8,15와 함께 그러한 굴욕(屈辱)의 멍에를 벗어나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웠고, 쇠사슬에 묶겨있던 것과 같은 상태였었는데,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한데, 그 ‘자유’라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눈앞에 닥쳐온 천지개벽(天地開闢)과도 같은 큰 변화의 앞뒤를 살펴볼만한 겨를도 없이 사회는 무질서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혼란과 무질서는 전쟁 때문에 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한국 사람들의 의식(衣食)생활에 바로 나타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전쟁이 끝난 다음 그 땅 곳곳에는 새로운 풍조(風潮)가 생긴 것인데, <우선 닥치는 대로 먹고 마시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라는 사실이다.

일본이 그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생활 필수품은 배급제로 되어 있었다. 식생활에 관한 것만 아니고, 몸에 걸치는 옷도 마음대로 사서 입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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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자유, 생각하는 자유, 눈으로 보는 자유도 제한되었고, 심한 구속을 당하면서 지냈다. 그러한 생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방심(放心) 상태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8.15 해방이 된 다음, 그렇게도 보기 힘들고 귀하던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고무신, 양은그릇, 광목, 쌀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많은 물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하여간 굶주렸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혼란과 무질서 중에 쏟어져 나온 물자는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할 때에 한동안 식량을 배급한 적도 있었다.

한편, 해방이 된 다음 그 땅엔 애국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던 때에 그렇게 많은 애국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일제가 시키는대로 일본을 위해 살아온 것을 <애국한 것이다.>라는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나, 하여간 애국자 홍수(洪水)가 났다. 일본에 아첨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며, 별로 배곱프지 않게 지냈던  사람들도 “내가 바로 애국자였노라.”라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반대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에 대항 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면서 목숨을 잃는 등, 몸 바쳐 애쓰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시의 국내외(國內外)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의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가지만 적는다. 그러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 중엔 ‘광복군(光復軍)’도 있었다.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고, 공식 명칭은 한국광복군이다.

1940년에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광복군의 초대 총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이고, 참모장은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이다.

다음에 적는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광복군에 관한 것을 설명한 내용 중에서 한 부분을 뽑은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 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을 천명하였다.

태평양전쟁 때엔 위에 적은 것과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도 있었다.

광복군엔 일본군 학도병(學徒兵)으로 중국에 파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장준하(張俊河)도 그러한 사람 이다.

그렇지만, 8.15와 함께 광복군이 환국(還國)하여 그 땅에 있던 일본군을 몰아서 밖으로 쫓아버린 것이 아니고,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8.15 광복>이 이뤄진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삼팔선 이남 땅에 미군들이 들어왔고 세상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한 것 중에서 몇가지를 골라 요약해보기로 한다. – 다음 이야기로 계속

악몽 – 약속-1

(당신의 천국 – 여섯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출애굽기 3:7-8. 공동번역) 

아직도 징병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군복무를 마치게 마련입니다. 군복무에 적응할 수 없을 정도의 심신허약자이거나 사회부적응 경험이나 판단으로 징역형을 받았거나  국가가 면제하는 조치에 해당되는 자가 아닌 정상적인 젊은이라면 누구나 일정기간의 군복무를 해야만 하지요. 물론 군복무를 직업으로 선택할 수도 있지요. 

근데 내노라하고 이름이 알려진 이들 가운데  제법 많은 이들이 군복무 경험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는답니다. 왈 특권층이지요. 아마 그런 사람들은 이런 꿈을 꾸어 본 경험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꿈이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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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도 아래서 군대를 다녀 온 이들이 꾸는 아주 전형적인 나쁜 꿈 바로 악몽은 군대 다시 끌려가는 꿈이랍다. 분명히 제대를 했는데 어떤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하여 다시 새롭게 군복무를 해야만하는 꿈을 꾸는 것이지요. 이런 꿈을 꾸다가 깨고나면 정말 기분 더럽답니다. 

이런 기분을 꾸어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입니다. 

뭐 요즘에야 군 복무 기간이 짧으니, 우리 때와 비하면 두 번 갔다와도 된다고 한다면 아마 지금 군대 복무하는 젊은이들에게 매맞기 십상일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의 만기는 약 34개월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대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은 당시 제대를 손꼽아 기다리며 군생활을 하는 말딴 졸병들이 즐겨 쓰던 말 가운데 “뭣으로 뭉개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라는 말이 있답니다.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살아서 분명히 그 끝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란 제대라고하는 군복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게 종말의 역사관에 대한 아주 쉬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제대를 했는데 또 다시 군에 끌려가는 꿈을 꾸다니!  개뿔! 무슨 종말! 

악몽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3500여년전 이집트로 돌아가 봅니다. 

출애굽기 3장 첫 부분을 보면 야훼신이 모세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야훼신을 찾은 것이 아니고 야훼신이 모세를 먼저 부른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바로 출애굽기 3장 7, 8절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너희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 슬픔, 두려움 등등 사람으로서 피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겪고 있는 모습을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 내가 너희들을 구원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내주마라는 말이지요. 

약속입니다. 

다시 군대이야기. 

징병제도 아래서 징집기간이 정해지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일테면 일단 징집이 되면 죽기 전엔 나올 수 없다면 말입니다.  아마 징병제가  제대로 실시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징병제는 끝이 보이는 약속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500여년 전 모세에게 야훼가 한 약속은 분명 징집기간을 정해 놓은 약속이었답니다.  바로 가나안이라고 하는 확정된 땅을 약속했다는 말입니다. 넉넉잡아 한 달이나 달 포 반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약속이었다는 말씀이지요. 

그 약속을 믿고 애굽의 노예상태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보장될 것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모세와 히브리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나섰지요. 

그리고 배가 고팠고, 맛난 것도 먹고 싶었고, 목도 말랐었던 가운데  약속의 신이 이런 아픔과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비록 달 포를 넘어 삼개월이 되었을 무렵 “이제부터 시작하는 계약서를 쓰자”라는 야훼신의 요구(십계명 사건)를 무리(민족)들이 이것만이  오직 살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이제 바로 도달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 포를 넘어 일년이 지나 사십년이 흐른 후 다달은 땅, 가나안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답니다. 

다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고대하며 걸어 온 사십년의 세월과 그 시간 속에서 맺었던 약속들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지요. 

이번 한 주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