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 7

7.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마치며

    모두 아버지 덕이었다. 내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몹시 우울했다. 가난, 못 배움, 징용, 상이군인- 스물 푸르러야 마땅할 나이에 내 아버지를 짓누르던 말들이었다. 그러다 만난 예수였다. 피난지 부산에서 예수를 찾아 헤매던 시절 그 때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는 몹시 절실했었다고 했다. 피난지에는 각종 종교집회들이 곳곳에서 무시로 이어졌단다.

    어머니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와 신촌에 삶에 터를 잡게 된 것은 내 외할아버지 덕이었다. 아버지는 도장파는 기술을 배우러 다니는 길에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며 나를 업거나 걸리며 데리고 다니셨다. 아버지의 이동식 도장포가 굴레방다리 아현시장 입구에 세워진 때는 내가 아직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바람산 언덕배미에 있는 신촌 대현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일을 지난 해 여름 백수(白壽)를 누리고 떠나시는 날까지 오래도록 감사하셨다. 그리고 그 감사는 오늘 내게로 이어진다.

    아버지를 따라 아무 생각없이 다니던 그 대현교회에서 내 머리가 굵어지고, 자라며 때론 질척이며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아주 멀쩡하게 제법 얼추 바른 정신 세운 양 흉내 내 보기도 하는 사이에 코흘리개였던 내가 이제 노인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초, 중, 고, 대학을 거쳐 나이 서른 즈음에 그 교회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 후 대현교회를 떠났었다. 그렇게 사십 년 넘은 시간이 흐른 후, 지난 해 성탄 무렵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어찌어찌 두 해 연속으로 한국여행을 하게 되어 더러는 일년만에 다시 보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거의 오십 년 또는 사십 년 만에 만난 친구들도 많았다.

    지금 대현교회 목사님과 당회 그리고 아직도 그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 그 모임을 열심히 준비한 선후배들, 내 신앙의 선생 홍길복목사님 등 여러 사람들 덕에 누린 참 좋은  여행이었다만, 우리들의 신앙고백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누린 참 귀하고 감사가 이어져야 마땅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종종 우스개 소리로 하는 성경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른바 ‘간음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잘 알려진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성서 요한복음 8장 1-11절은 공동번역 개정판에서 옮겨 적은 것이다.

    신학적으로 학자들 간에 다툼도 많고, 설교자라면 몇 번 쯤은 되뇌였을  성서본문이기도 하였을 터이고, 교회 근처에 발 한번 디뎌 본적 없는 이들도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법하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기도 하고, 패러디가 유행하는 세태에서 별별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이 낳게 한 성서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떄마다 ‘그 때 사람들은 정말 착했구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나를 또는 너를 또는 그들 누군가를 내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었던 1950년대부터 오늘 2025년에 이르기 까지 그 어떤 시점이던 그 이야기의 주인공 또는 주변 인물들로 대입시켜 보면 언제나 잃지 않고 들었던 내 생각이다.

    일테면 내가 이 이야기 속 간음한 여인이어도, 예수 곁에 모인 군중속 한 사람이어도, 율법학자이어도, 바리새인이어도, 아니 내가 예수라도, 내가 살아왔던 1950년대와 2020년대 시점이라면 똑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 때 사람들은 정말 착했구나!”

    그러나 때때로 그 때 똑 같은 상황이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일어나는 경험을 맛 볼 때가 있다.

    2024년 성탄 즈음, 서울 신촌 대현교회에서 사, 오십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을 향해 사십 수년 만에 겨울 성탄절을 맞는 호주 이민 목회자 홍길복 목사가 사십 수 년 전과 똑같이 성탄은 “사랑, 사랑, 사랑이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외치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돌이킬수록 신 앞에서 부끄러운 B급 아니 C급 사람살이 걸음걸이 이어왔을지라도, 오늘의 삶을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신촌 바람산 언덕배미에 사철 푸른 담쟁이 넝쿨로 덮힌 대현교회에서 만난 예수와 선생님들과 친구들 덕이었다.

    그저 감사함으로.

    * 아내의 동기들, 아내를 늘 각별히 챙겨주는 영숙, 경희 아내의 언니들, 경자, 병덕 그리고 함께 못해 아쉬웠던 경애 내 동기들…. 특별히 누이를 극진히 챙겨준 큰 처남에게 인사하며.

    ** 예수님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사랑하며 함께 사는 이야기들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을 믿으며… 이 생각 하나 제대로 가르쳐 주신 선생 홍목사님께.

    *** 아름다운 나라에서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과 나누었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시간들을 간직하며.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6

    6. 세대(世代)에

      유년시절에 주로 듣던 사투리는 강원, 충청이나 전라, 경상도 말이 아니었다. 평안, 함경도 바로 이북 사투리였다. 이번 한국여행 마지막 이틀 저녁 시간을 각기 함께 했던 박성규와 김종석은 모두 이북 사투리를 쓰던 친구들이다.

      박성규는 제법 나이 들어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그래서리, 저래서리’하는 함경도 말투를 지니고 살았다. 내가 이번 한국여행 계획을 처음 상의했던 친구는 바로 박성규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참 착함을 너머 선한 친구이다.

      아직 열심히 일에 열중하는 건실한 기업인이다. ‘가기 전에 밥 한끼는 함께 해야하지 않느냐’며 그의 바쁜 시간을 쪼개 우리 내외에게 내어 주었다.

      어린 시절 추억에서부터 같은 대학을 다녔던 터라 그 시절의 이야기, 그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겪어낸 어려움들과 이젠 잘 가꾸어 온 사업에서 어떻게 멋지게 떠나야 할까 하는 그의 기도까지 이젠 여유롭고 조곤조곤한 서울 말투로 이어진 그이 이야기를 듣던 그날 저녁은 마치 우리 세대의 활동사진들을 보는 듯 했다.

      헤어지며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우리 또 언제 보겠수…. 건강합시다.’ 한 해 아래라고 아직도 내게 형 소리를 놓치지 않는 참 좋은 친구에게 깊은 감사를.

      바람산 언덕배미 초입 종석이네 집에는 온통 피양도 사투리 뿐이었다. 꼬부랑 할머니부터 손가락 휜 아버지, 늘 부지런하신 어머니 정순덕권사님 모두 모두 이북 사투리였다. 우리들의 유년과 소년과 청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기억들을 내가 품고 있는 친구 김종석이 시건방지게 지니고 있던 호(號)가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고향 이름인 신촌(新村)이다.

      여행 마지막 저녁시간을 그와 단둘이 보냈다. ‘뭘 먹고 싶수? 내가 세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 하나 골라보슈!’ 그렇게해서 내가 고른 곳이 연탄구이 돼지갈비집이었다. 그렇게 그 저녁 우리들은 우리들의 스물 언저리 비록 가진 것 없이 꿈만 있었던 B급 청춘시절부터 칠십줄에 놓인 우리들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곤고했던 그의 마포, 인천 시절의 청춘 이야기에서부터 발 딛게 된 대학 사무처 일,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는 결코 한눈 파는 법 없이 오르고 오르던 그의 지난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그의 첫 시집 ‘고물시계’를 자꾸 떠올렸었다.

      그 역시 성실했고 착했고 선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월을 지나왔을지라도, 어쩜 지금도 그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지하철 역에서 헤어지며 우린 한참을 꼭 껴안으며 서로에게 말했다. ‘건강하자!’, ‘건강합시다!’ 그 역시 내게 ‘형’ 소리를 놓지 않는 신촌, 그래 신촌친구다.

      나는 이번 한국여행에서 철원과 제2 땅굴과 평화전망대를 두루 돌아볼 수 있었다.  선배 차용철형과 친구 안병덕과 후배 김종민과 김환조목사 등의 배려 덕이었다. 내가 두루 돌아 걸어 본 그 길들은 거의 이십 여년 전 내 아버지가 여든 무렵에 마지막으로 한국여행을 가셨을 때 걸으셨던 길이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로 알려진 그 고지 한군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이 되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찾았었던 곳에 내가 서서 아버지와 내 세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그 부상으로 인해 대구 육군병원에 후송되었다가 그곳에서 욕과 원망과 아픔을 호소하는 다른 병사와 달리 부상 중에도 밝고 매사 긍정적인 이웃 병상 동료에 매료되어 예수쟁이가 되었었다.

      그런 아버지 덕에 아직 기역 니은도 모르던 나이에 다니던 곳이 신촌 대현교회였다. 그 추억을 찾아 떠났던 이번 한국여행이었다. 우리들의 세대도 저무는 즈음에.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5

      5. 동기동창 그리고 목포

        어린시절 중,고등, 대학에서 함께 지낸 동기동창 두 명이 있었다. ‘있다’가 아닌 ‘있었다’가 된 까닭은 한 친구가 아주 일찍 세상 떴기 때문이다. 참 독특한 친구였다. 용산 철도고등학교 앞에 살았던 박해용은 중학교 때부터 사진찍기와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중학교 때 이미 사진인화를 위한 자기만의 암실을 갖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을 담은 꽤 많은 양의 릴테이프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진과 음악을 좋아했던 상고 출신 박해용이 선택한 학과는 물리학과였다. 대학 교정에서 그의 얼굴을 보긴 참 힘들었다. 당시 연극 배경음악 작곡에 빠져 있던 그는 거의 학교에 나오지를 않았었다. 그 도가 지나쳐 유급 판정을 받고 급기야 제적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위기를 벗어나기에는 그는 너무 멀리 나가 있었다.

        그는 학교 교문에다 시원하게 오줌 큰 줄기 쏟아내곤 다른 대학교 물리학과로 옮겼다. 그 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학위를 다 끝내고 그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갓 마흔 언저리에서 세상을 놓았다.

        그리고 이제 하나 남은 박상열은 몇 십년을 떨어져 있다가도 목소리 들으면 “얌마! 새꺄!’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거의 유일한 친구다. 목소리는 이따금 들었다만 얼굴 본지는 거의 스무해가 지났을게다. 서울 숙소에 짐을 풀고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나 왔다!”, “그래 너 지금 어디야?”, “강서구 쪽 숙소에…”, “얌마, 그냥 우리 집으로 와! 그냥 짐 싸 갖고 와!”

        며칠 후 만난 그는 “너 뭐 먹고 싶냐? 먹고 싶은 거 있을 거 아냐?”, “야! 너 가고 싶은덴 없냐? 말해 봐! 가고 싶은데….” 연신 다그쳐 물었었다.

        그렇게 상열이 내외 덕에 우리 내외는 눈과 입의 호사를 많이도 누렸다. 서울에 있는 동안 거의 지하철만 타고 다녀 바깥 구경은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옛 서울 사대문안 토박이인 그의 아내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내 기억 속 거리와 사뭇 다른 풍경들을 즐길 수 있었다. 특별히 마포와 신촌, 굴레방다리, 아현, 서소문, 서대문, 독립문, 사직동, 통인동, 효자동, 익선동 등 우리 내외의 어린 시절 추억들이 남아 있는 거리들을 두루 돌아보아 참 좋았다.

        통인시장 삼계탕집에서 만난 톱밥난로는 아주 어린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가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어렸던 시절 다니던 신촌 대현교회에는 겨울이면 톱밥난로가 달아오르곤 했다. 톱밥난로 곁에 앉아 이따금 날아올라 반딧불처럼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재를 바라보며 목사님이나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나른하게 졸음에 빠져들던 내 유년을 만났던 것이다.  

        종로 3가 익선동은 내겐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동네가 이렇게 변하다니 그저 놀라움 뿐이었다. 나는 아내와 상열이 내외에게 이젠 돌아가신 정석기목사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스물 어간에 신촌 대현교회서 만나고, 거의 삼십년 만에 뉴욕에서 만났었던 정석기목사님의 종로 삼가에 얽힌 아주 슬프고 아린 이야기들을.

        우린 익선동 거리거리들을 둘러 보았고, 어느 찻집에 들어가 정말 오랜만에 방석을 깔고 앉아 느긋하게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들과 세상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대학 졸업 무렵이었던가? 상열이는 몸이 안좋아서 병원출입이 잦았었다. 그는 유학의 꿈을 접고 모교에서 학위를 다 끝낸 후 평생 학교에서 연구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은퇴하고 이젠 명예교수인데, 뭐 그런 거 보다 이런 표현이 맞나 모르겠다만, 두 내외가 참 예쁘게 살아 보기 참 좋았다.

        평생 법학자로 살아온 그에게서 들은 한국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은 내게 많은 깨침을 주었다.

        그리고 목포. 이번 한국 여행에서 우리 내외 단 둘이 일박 이일 먼 여행을 다녀 온 곳이 목포인데, 이게 다 상열이 덕이었다. 그가 물었었다 “야! 어디가고 싶으냐?”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목포였다. 뭐 큰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북 봉화도 가보고, 충남 대전도 가 보았으니 호남 쪽으로 가 볼 만한 데가 없을가 생각하다가 떠오른 목포였다. 아내나 나나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열이는 마침 잘 되었다며 목포가 좋아 내려간 지인이 있는데 잘 안내해 줄 것이라며 바로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함께 목포를 가려고 했었다만 문제가 생겼다. 올해 백 그리고 넷이 되시는 상열이 어머님 간병시설과 간병인의 스케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짧은 여행시간 역시 문제였다.

        그렇게 우리 내외는 단 둘이 목포 일박 이일 여행을 다녀왔다. 숱하게 들었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던 여행이었다. 나이들어도 결코 흥이 멈추지 않는 아내는 목포의 눈물 녹음 테이프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유달산 이난영의 노래비 앞에 서자, ‘여기서 목포의 눈물은 함께 불러 주어야지!”하며 한 자락을 뽑았었다. 등산객을 관중으로 두고서.  그리고 참 모를 일이었다. 정말 평화로운 모습의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앉아 까닭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훌쩍거리던 내 모습이. 일박 이일 목포 이야기는 조금 더 되새겨야 마땅하다.

        헤어지던 날, 상열이가 말했다. “언제 또 오냐?”, “글쎄…. 모르지 뭐…. 니가 함 오던가….”. “애들은…”, “글쎄 아들 며느리는 모르겠고, 딸 사위는 자주 오가는 편이지..”, “야! 그럼 애들 나올 때 우리 집에 있으라고 해, 편하게 해줄게.”

        그저 감사하고 고마웠다. 내 유일한 중, 고, 대학 동기동창 박상열에게.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3

        <편안 또는 평안함에>

          2025라는 숫자가 아직 낯설건만 어느새 일월이 저물고 있다. 설날이라지만 내 삶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별 감흥은 없다. 이젠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제법 넉넉한 흉내를 내보곤 한다.

          2024년과 2025년 사이에 걸쳐 있는 이번 겨울은 앞으로 내 기억이 제대로 일하는 한, 제법 오래 그리고 깊게 간직하고 싶은 계절이다.

          농사 짓는 친구들 셋이 있다. 지금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정무훈의 농장은 내 집에서 20분 거리 펜실베니아에 있다. 그의 집은 그 농장 한 가운데 있다. 한국에서 제법 길게 선생 생활을 하다가 이민 와서 누구나 그렇듯 열심히 살다가 늙막 초입에 농장을 일군 그였다. 벌써 십 수년 전일이다. 그의 부친은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다. 그는 교인은 아니지만 그에게선 도인의 품을 느끼곤 한다. 가까이 살아도 이젠 일년에 한 두차례 얼굴 보고 지낸다.

          경기도 벽제에서 농사를 짓는 병덕이는 내 불알친구다. 대기업에서 오를 때까지 다 올라갔다가 그만 둔 후 농사 짓기 시작한 지 거의 스무 몇 해가 지났을게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그의 농사 일도 다 그 운동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헤어져 근 반 백 년 사이에 서너 차례 얼굴 보았으니 십년에 한 번도 채 안 되는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모습으로 성실하고 크게 나서지도 그렇다고 결코 숨지도 않는 예수쟁이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농사짓고 사는 서암 오시환은 조금 독특한 만남을 이어온 친구다. 대학 같은 과 후배인 그와는 1975년 봄에 담쟁이 넝쿨 덮힌 대학건물 앞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십 수년이 지난 2002년 어느 날, 책 몇 권 산다고 기차 타고 나들이에 나섰던 뉴욕 맨하턴의 어느 한식당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기차를 타고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나 하루 밤을 묶었다. 그리곤 또 끝이었다. 그후 잘 나가던 대기업 홍보 카피라이터였던 그가 경상북도 봉화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잘 아는 기독교계 중, 고등, 대학교를 나온 그는 독실한 불교도이다. 내가 교인이라는 말보다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좋아하 듯, 그 역시 불교도보다는 불자가 더 어울릴 듯하다.

          지지난해인 2023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 했을 때 그를 꼭 다시 보고 싶었었다. ‘가마!’하고 약속을 했었건만 짧은 일정에 쫓기다 보니 미처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미안하다’는 내 말에 그가 보냈던 답글이었다. ‘우리 살 날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하여 이번 여행,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바로 몸 실은 기차가 영주행 KTX였다. 내 또래 서울내기들은 기억할 것이다. 옛날 옛날에….그러니까  1960년도 어간에…..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가려면 청량리에서 떠나는 중앙선을 타고 경북 영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강원도 쪽으로 올라가는 자그마치 열 몇 시간을 야간열차에서 지냈던 시절말이다. 헌데 2024년 12월, KTX는 영주까지  고작 두 시간 조금 넘는 시간에 나와 아내를 데려다 주었다.

          친구는 역 앞에서 반갑게 우리 내외를 맞아 주었다. 그리곤 일박 이일, 그는 정성을 다해 영주와 봉화 일대의 관광지들을 안내해 주었다. 무섬마을, 소수서원, 죽령 등등 내 장인의 본래 고향인 경북이지만 아내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인 소백산 줄기줄기들을 두루 돌아보는 호사를 누렸었다.

          그리고 봉화 외딴 마을 그의 농장과 집은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농부인 동시에 예술가였고 봉사자였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꿈꾸며 실천하는 활동가였다.

          그의 목공예와 아내의 도공예, 가죽공예와 캄보디아 오지에 마을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예술을 심고, 경상북도 봉화 그 외진 마을에 봉잼(봉화에서 잼나게 사는 사람들)마을을 세우는 그 끝없는 열정이 솟아나는 곳, 바로 우주의 중심 서암 오시환이 사는 그 농장이었다. 그 곳에서 하루 밤을 묶은 우리 내외는 참 복 받은 삶이다.

          그의 삶, 한 단 편인 캄보디아 열정을 담은 책이 나왔다해서 예매를 해두었다.

          이쯤 농사를 짓고 사는 내 세 친구들의 공통점이다. 비록 모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 나이에 그들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참 편안하고 평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참 좋다 정말 좋다.

          친구 시환이가 안내했던 2024년 12월 마지막 즈음  황혼이 내리던 영주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 줄기의 그 아름다움에 잠시 내 지난 삶속에서 누렸던 신의 은총을 되새겼던 그 순간을 선사한….

          이런 친구들을 내 살며 친구로 삼을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 참 큰 복이다. 그래 감사다!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 1

          1. 걸으며…

          기억의 오류 탓일까? 아님 이제 나이 든 때문일까? 기억컨대 길든 짧든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일을 앞에 두고 주춤거렸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만, 이번엔 영 아니었다. 자그마치 꼬박 나흘을 헤매였다. 밤이면 잠이 달아나고 낮엔 눈이 게슴츠레 감긴 채 지냈다. 그러다 간밤에 내 잠시간을 온전히 되찾았다.

          아직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만 정말 아니가보다. 이젠.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들린 교보문고에서 뽑아 들고 온 책 <나이듦에 대하여> 78쪽엔 이런 말이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러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상당수가 노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난 인류의 총수를 1천 82억명이라고 한다. 대략 수백억 명이 노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1천 82억명 가운데 하나이자, 영광스럽게도 노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수백억 명중 하나가 되었다. 이젠.

          사실 이번에 서울 지하철에서 난생 처음으로 자리 양보를 받았을 때엔 그야말로 난감했었다. 주춤거리며 제법 큰소리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말했었다. “아니요! 아니요!” 끝내 나는 자리를 양보 받았고 그날 이후 나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자신있게 앉아 다녔다. 그리고 생각난 내 고모님이었다. 햇수로는 벌써 삼년이 지났다만 시간으로 따지자면  만 일 년 조금 전에 아흔 두해 사시고 세상 떠나신 하나 밖에 없는 내 고모님께서 얼추 내 나이 적에 크게 웃으시며 했던 말씀이었다. “얘야! 버스를 탔더니 젊은 아이가 자리를 양보하지 뭐냐? 넌 아직 모를거야, 그 때 내 심정 말이지. 화가 나더라니까….” 어느새 나도 그 때 그 시절 고모님 나이에 이르렀고, 그 고모님은 이젠 한국 가서도 뵐 수 없었다.

          본전을 뽑고 싶었다. 한국에서 낳고 살았던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오년이 더 길어졌다. 여기도 평생 외국이고, 한국도 이제 내갠 외국이다. 가는 비행시간 쉬지 않고 15시간 반이고, 집에서부터 서울 숙소까지 이르는데 꼬박 22시간이 걸린 여행길이었다.

          글쎄, 언제 또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여 본전을 뽑고 또 뽑고 싶어 걸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때론 아내를 앞세우거나 아내보다 한 걸음 앞서거나 또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 내외 고향인 신촌과 소년, 소녀기와 청춘을 보낸 신문로 광화문 효자동 안국동 인사동 종로 을지로 남대문 명동 마포 공덕 등지의 서울 거리와 강남 강동을 비롯한 경기도 일산, 철원, 전곡, 양평등지의 경기도와 경상도 영주 부석사를 비롯하여 충북과 경북이 만나는 죽령고개, 그리고 잊지 못할 봉화에서의 하루 밤, 오랜 벗 내외가 평생 일구어 온 이야기를 만난 대전 대화동을 거쳐 이제야 이난영의 소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전남 목포거리와 유달산, 그리고 새해맞이 해돋이를 보며 아내손을 잡고 걸은 강원도 속초 해변 모랫길.

          그렇게 걷고 또 걸었었다.

          그렇게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 우리들의 삶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끈, 바로 사랑이었다.

          이 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이제  거의 노인이 되었다.

          책 <나이듦에 대해서>를 펼쳐 들면 첫 쪽에서 만나는 말이다. <우리는 투쟁하도록 승리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슬픔과 멜랑콜리여 안녕. 우리에게 끝이란 없어요. 끝은 바로 이 순간이고, 매 순간 끝은 확장되니까요. 우리를 지배하는 강렬한 정신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예요.  – 피에르 고베티>

          이제 노인이다. 그래서 축복이다. 하여 감사다. 매 순간 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나이임으로.

          동해 바닷가에 떠오른 해처럼. 해를 향해 달려 날아가는 새떼들처럼.

          2024-25년 겨울에, 걸으며 만난 모든 이들과 눈과 맘에 담은 숱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져 이어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