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뒤집으며 보내는 하루 해는 참 짧다. 솔직히 내가 하는 삽질로 무엇이 바뀔지는 아직은 전혀 모르겠다. 그저 흙을 손에 묻히고 땀을 흘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즈음 내가 누리고 사는 축복이라는 생각 뿐이다.
내가 엄청 부자라는 것도 이즈음 처음 깨달은 사실이다. 이웃들 눈치 보아야 하는 잔디 밭 빼고도 내 맘대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땅이 족히 삼백 평이 넘으니 이미 족함을 넘어 사는 삶이다.
유튜브와 구글 신(神)의 도움을 받아 흉내 될 수 있는 일들을 다해 본다만, 모를 일이다. 내가 꽃을 피우게 하고 채소를 거두어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런지는.
아무튼 구근들을 심고 모종을 만드는 시늉도 해 보고 씨앗도 뿌려 본다. 언덕받이엔 야생화 씨앗들도 넉넉히 뿌려 두었다.
첫번 째 채마밭은 아직 땅을 고르기도 전에 손님이 먼저 다녀 가셨다. 다람쥐나 토끼는 아닌 듯하고 여우나 사슴일지도 모르겠다. 미처 자주보는 손님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또한 내가 누리는 부요다.
허나 이 낯선 내 부유한 형편보다는 하루 열 두시간 씩 세탁소에서 일하는 날들이 아직 내겐 편한다.
모처럼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다.
<‘이제’는 사는 때, 곧 지금을 말합니다. ‘그제, ‘어제’는 내가 사는 때가 아닙니다. ‘이제’가 내가 사는 때입니다. 사는 때가 이제입니다. 사는 곳이 여기입니다. 이어이어 내려와서 여기가 됩니다. 하느님이 얼 줄로 나를 이어주고, 나는 하느님과 얼 줄로 이어지고 다시 이어져 여기에 온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때나, 곧 언제나 이제입니다. 다 이제(영원한 현재)가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이제 나왔습니다.’하고, 운명할 때도 ‘이제 숨을 거두었습니다.’합니다. 여기와 이제를 혼돈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루(오늘)만이 영원히 있는 것이다. 오늘의 ‘오’는 감탄사이고 ‘늘’은 언제나 항상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