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오늘도 일터의 아침 해는 떠오르면서 이글거렸다. 가게 건너편 공사판 일꾼들은 나보다 먼저 더위를 맞고 있다.  이젠 게으름이 아니라 느긋함으로 치장된 일상을 시작하며 보일러를 켠다. 그 느긋함으로 눈치챈 사실 하나, 해는 어느새 분명 짧아졌다.

DSC02547

DSC02512

나는 내 일터의 아침이 참 좋다. 한땐 이 아침을 피해보려고 많이 질척이던 때도 있었다만, 이젠 그저 감사다.

그렇게 하루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이즈음 친한 벗이 된 호미와 함께 놀며 저녁 한 때를 보낸다. 새소리, 매미소리, 풀벌레소리에  더위는 이미 겁을 먹은 듯하다.

자리에 눕기 전, 장자(莊子)를 손에 들다.

<대지인 자연은 나를 실어주기 위해 그 몸을 주었고, 나를 일 시키기 위해 삶을 주고, 자연을 즐기도록 늙음을 주고, 나를 쉬게 하려고 죽음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힘써 일하는 내 삶이 좋다고 한다면, 당연히 휴식인 내 죽음도 좋다고 하게 되리라.>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편 제 7장에서

자연으로 읽든 신이라 읽든 아님 내 스스로라고 읽든, 아직 죽음도 좋다고 할 만한 지경엔 이르지 못했다만, 그저 하루 일과 쉼에 감사할 나이엔 이른 듯 하다.

DSC02554DSC02553DSC02529DSC02508

어느새.

봄날 하루

봄날 하루는 짧다.

손님들의 발길이 조금씩 잦아져 아침 영업시간을 팬데믹 이전으로 돌려 놓았다. 일년 넘게 느긋한 이른 아침 시간을 즐기다보니 어느 사이 게을러졌었는데, 이즘엔 거의 다 자란 모종들에게 아침 인사를 나누곤 일터로 나가기 바쁘다.

그렇다고 가게가 이전처럼 쌩쌩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하는 시간만큼은 할 일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손님들과 아크릴 판넬을 사이에 두고 서로간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목청이 높아지기 일수지만 어느새 그것도 그저 그런 일상이 되었다.

백신 접종율이 높아가는 만큼 확진자 수가 늘어간다는 어제 아침 동네 뉴스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너나없이 바이러스에 대한 긴장이 느슨해 지는 탓일게다.

내 집안의 최고령이신 아흔 다섯 아버지는 일찌감치 접종을 모두 끝내셨고, 우리 부부와 아들 내외 그리고 내 형제들 모두 접종을 마쳤다. 제일 어린 딸아이가 이번 주에 예약이 되어있으니 일단은 가족 모두 접종은 마치게 되는 모양새다.

올 한 해 넘기기 전에 또 한번의 접종이 있게 될 것이고, 어쩌면 독감주사처럼 해마다 한 두차례 맞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기사 독감주사를 맞기 위해 긴 줄을 이어서 기다리던 시절이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면 이즈음의 북새통도 그저 사람들 살아가는 과정이란 생각도 든다.

바이러스 치료제 소식들도 종종 만날 수 있는 것 보면, 멀지 않은 어느 시간에 오늘을 옛 일처럼 이야기할 시간을 맞게 되리라.

하여 늘 조심할 일이다. 무언가 기다리는 시간에 드리는 기도는 늘 간절한 법이다.

오후에 텃밭과 뜰에 찾아오는 봄에게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눈에 들어 온 콩 새싹에 고목처럼 굳어진 내 가슴이 콩딱콩딱 뛰다. 몇 주전에 서리 내린 땅에 뿌렸던 씨앗들이 생명이 되어 내게 건네는 인사라니!

이른 봄꽃들과 인사도 나누고, 내 텃밭과 뜰에 오시는 새 손님들 맞을 준비에 봄날 하루는 참 짧다.

DSC01981 DSC01983 DSC01985 DSC01988

흉내

아무런 계획없이 하루를 보내고자 했다. 공연히 내 감정에 기복을 일으키는 뉴스들도 보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아무 일도 않고 일요일 하루를 보내자 했다.

늦잠을 즐기는 맛도 보자고 간밤에 늦은 시간까지 앉아 있었다만 눈 뜨는 시간은 매양 같은 시간이었다. 뜰로 나가니 나보다 훨씬 부지런한 새들의 아침 수다가 한창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평생 처음 뿌려 본 씨앗들이 꽃이 되어 아침인사를 건넨다. 괜히 겸연쩍어 카메라를 찾아 들고서 꽃들의 인사를 받는다.

DSC00628 DSC00631 DSC00634

하늘은 맑고 아침이라지만 여름바람 치곤 기분 좋게 마르다. 모처럼 근처 공원이라도 찾아 걸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내를 재촉하다.

공원길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들이 서로 간 십여 걸음 가까워지면 마스크를 쓰곤 하는 모습들을 보면 뉴스들은 사뭇 딴 세상이다.

DSC00653DSC00656DSC00659DSC00678DSC00681DSC00687

DSC00688

DSC00691DSC00699DSC00705KakaoTalk_20200712_121731706

느긋하고 여유로운 공원에서의 아침 시간들을 즐기고 돌아와 아내가 준비한 냉면 한 그릇으로 더운 몸 식히고 달고 단 낮잠의 여유까지 누리다.

일요일 오후 뒷뜰엔 여름의 열기가 가득하다. 부지런히 고추와 깻잎을 따다가 두부와 간돼지고기, 당면, 양파, 당근 등속을 다져 넣은 고추튀김과 깻잎 튀김을 만들다.

어머니 떠나신 후 감정 기복이 심하시다가 이즈음 조금 평정심을 찾으신 아버지가 몇 번이나 ‘맛있다’를 이으셨다. 누나와 막내동생도 ‘덕분에’라는 인사를 건넸다.  별다른 재주 없는 내가 늙막에 이런 어머니 흉내라도 낼 수 있어 참 좋다.

늦은 저녁, 임어당(林語堂) 선생이 전해주는 장자(莊子)의 글을 읽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근심하거나 탄식하고, 때로는 변덕을 부리거나 고집을 부리고, 때로는 경망스럽거나 방종하고, 때로는 터놓거나 꾸며댄다. 이런 것들은 마치 텅 빈 악기의 구멍에서 나오는 음율처럼, 또는 습기처럼 돋아나는 버섯처럼 밤낮 교대로 눈 앞에 나타나지만 어디서 싹트는 지는 모른다.

아! 어디서 생기는지는 모르지만, 아침 저녁으로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연유한 바가 있으리라. 감정의 변화가 없다면 ‘나’도 없는 것이며, ‘나’가 없다면 이러한 감정을 취할 수 없다.>

아무 계획 없던 하루해가 저문다. 계획을 세우고 보내는 하루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게 마련인데, 어쩌다 계획없이 보낸 하루는 알찬 듯하다.

오늘 내가 만든 허상(虛像) 하나일 수도. 비록 그렇다 하여도 오늘 하루에 감사.

뉴스에

뉴스들은 언제나 흉흉하다.

매일매일 호들갑스럽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하루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짧게는 내가 살아 온 세월이 그러하고, 길게 보면 사람들이 사람살이를 시작한 이래 변함 없었다.

다만 오늘만 사는 우리들에겐 오늘도 호들갑스럽게 흉흉하다.

내 가게가 있는 도시에는 인종 혐오 특히 동양인 혐오 전단지가 뿌려져 범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있고, 나같이 동네 구멍가게를 하는 이들은 점점 힘든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뉴스들도 제법 그럴싸한 자료들을 내밀며 다가서고, 총기사고 등의 사고사건 기사들은 어제만큼 여전히 이어진다.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재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노인들이 얼굴로 나선 선거판도 그렇고, 한반도 뉴스들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허나 따지고보면 이게 어제 오늘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늘 그렇게 이어져 온 일이다.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유일한 사실 하나는  사람 또는 시민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더디고 느린 걸음으로 사람다워 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내 믿음일수도 있다.

하늘에는 여느 해 유월과 다름없는 초여름 구름들이 나른하게 흐르고, 뜰에는 여름 꽃 봉우리가 트이고, 새들이 노닌다. 뒷뜰 언덕배미에서 풀 뜯던 노루 한 마리 나와 함께 눈싸움하다 슬며시 피해 달아나다.

뉴스들이 여전히 흉흉한 하루가 진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또 하루를 맞는다.

DSC00470 DSC00478 DSC00480 DSC00482 DSC00493

하루 – 21

교회 담임목사님이 장례식순을 보내 주셨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찬송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와 아버지의 뜻인 ‘이 세상 살 때에’를 모두 식순에 넣어 주셔서 감사했다. 다만 ‘고인 약력’ 순서가 내 맘에 걸렸다. 하여 목사님께 전화 부탁을 드렸다. ‘고인 약력’이라는 순서를 따로 넣지 마시고 제가 가족 인사 드릴 때 짧게 함께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 하겠노라는 부탁이었다.

솔직히 내 어머니의 약력이란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단촐하다. ‘무학(無學)으로 평생 가족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다 가셨다.’ 이게 모두다.

어머니가 한글 성경을 읽으시고 오랜 미국생활에서 눈치코치 의사 소통을 하실 수 있던 것은 모두 아버지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한글도 깨치시고 아파트 이웃 노인들과 인사치레는 하시고 사셨다.

그런 내 어머니의 삶이 ‘고인 약력’ 소개하는 말로 덧칠해지는 게 싫었다. 신앙으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증손들은 어머니를 ‘왕할머니’로 불렀다. 아이들에겐 많은 할머니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였으니 ‘왕할머니’일 수도 있지만, 진짜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왕이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사셨다.

소농(小農) 가정의 삼남 삼녀 중 둘째 맏딸로 태어나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오빠 동생들을 챙기며 섬기는 왕 노릇 하셨었다. 73년 함께 사신 내 아버지 삼시 세끼 어머니 손 거른 일, 손가락으로 꼽아도 좋을 만큼 섬기셨다. 당신 슬하 일남 삼녀 새끼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뱃속에서 낳은 손주 증손들까지 당신 생각에 최선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러 섬기셨다.

그렇게 고집 세셨다.

그런 내 어머니 말년에 자주 입에 달고 사시던 말 ‘그저 감사’다.

어머니의 마지막 일년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시간이 오락가락 하실 때, 이따금 돌아가 사시던 시간은 6.25 전쟁통과 70년대와 80년 대 초 내가 젊었던 시절이었다.

전쟁통 피난길의 고난과 첫딸을 잃어 버린 아픔 그리고 남편의 부상 등이 평생 어머니의 고통으로 남아 있게 된 시절은 나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종 순사들이 당신의 아들인 나를 잡으러 온다는 말엔 ‘그 일이 그렇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 스물 나이 어간에 경찰서, 중정, 계엄사 합수부 등에 몇차례 끌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지만 당시 내 또래들이 겪은 일에 비하면 지극히 경미한 일이었거니와 딱히 내가 특별히 한 일도 없어 나는 이젠 다 묻은 일이다만 어머니에겐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시절이었었나 보다.

그리고보니 오늘이 한국 날짜로 5월 18일이다.

내 부모가 겪어낸 한국전쟁으로부터 광주항쟁 최근의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들의 가슴을 후려 파내어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사건들에 내가 이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까닭은 따지고 보면 다 내 어머니 덕이다.

거하게 무슨 신앙의 문제도 아니고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내 어머니보다 더 뼈저린 아픔을 이고 살아간 그리고 또 살아갈 어머니들을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어야 사람이라는 그 맘 하나, 내 어머니가 주셨다.

***오늘 하루 제일 기분 좋은 소식 하나. 지난 며칠 일기 예보의 변화다. 장례일에 비 예보가 80%에서 70%로 다시 60%로 줄더니 오늘은 0% 이따금 흐림으로 바뀌었다. 모두 내 어머니 복이다.

하루 – 18

곡기 끊으신 지 딱 한 달 째이다. 과일즙을 끊으신 지도 한 열흘. 엊그제부터는 물까지 끊으셨다. 어머니와 헤어질 시간이 점점 다가오나 보다.

어머니는 여전히 곱다. 모두 세심히 곁에서 보살피는 내 누나 덕이다. 이따금 육이오 전쟁통으로 어머니를 데리고 가곤 하는 알츠하이머 증세조차 어머니에겐 마지막 좋은 벗일 수도 있다. 다섯 살 첫 딸을 피난 길에서 잃고, 전쟁터에 나갔던 아버지는 상이 군인으로 돌아왔던 그 시절이 어머니는 평생 아팟었나 보다. 종종 그 시절로 돌아가 우리들을 만나는 것을 보면.

날짜를 꼽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두루 어수선하다. 허기사 늘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딱히 분주할 일은 없다.

‘하필 이 때….’라는 원망 섞인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만 아흔 세 해를 넘기신 어머니와 함께 하신 신에게 드릴 일은 아니다.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 내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지금의 서울시 한남동이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내 손 꼭 쥐고 친정행을 하시곤 했다. 신촌 버스 종점에서 한남동 버스 종점까지 서울역에서 버스 한 번 갈아타고 가는 길, 나는 버스만 타면 졸았었다. ‘넌 버스만 타면 졸았지!’ 내가 서른이 넘을 때까지 들었던 어머니의 푸념이었다.

오늘 낮에 어머니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게 건넨 말, ‘얘야! 가지 마라.’ 나는 웃으며 답했다. ‘내가 가길 어딜 가요. 항상 여기 있지.’어머니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곧 자리를 떳다.

지난 해 어느날엔가 아버지는 당신들께서 세상 떠나는 예배를 드릴 때 읽어야 할 성서구절과 찬송을 적어 내게 건내셨다. 오늘 집에 돌아와 한참을 그 기록을 찾느랴 시간을 보냈다. 잘 간직한다고 놓아두면 그 놓아둔 장소를 잊곤 한다. 딱히 나이 탓은 아니다. 예전부터 있어 온 습관이므로,

아버지가 지정해 둔 찬송은 새찬송 609장 ‘이 세상 살 때에’다. 그 1절 가사다.

<이 세상 살 때에 수고와 슬픔/  나그네 인생길 빨리 지나네/ 돌아갈 고향은 주님의 나라/ 주께서 예비한 주님의 나라>

어머니의 하루가 지고 있다.

하루 – 17

내 생각보다 빠르게 주지사의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그 동안 영업이 정지되었던 일부 업종들이 문을 열 수 있단다. 일부 업종이라고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업종들이 거리두기 등의 준수사항들을 지킨다면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부터는 내 세탁소도 정상영업을 해야겠다. 느낌이 왔었나보다. 아침 일찍부터 텃밭 만들기를 오늘로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을 떨었다. 그리고 오후에 들은 주지사의 결정이었다.

열무, 배추, 고추, 파, 양파, 상추, 쑥갓, 들깨, 토마토, 오이, 가지, 시금치, 아욱 등의 채소와  백일홍, 금잔화, 데이지, 물망초, 칸나, 라벤다, 야생화 등의 화초 씨와 모종을 뿌리고 심는 일을 마치고 난 후 들은 소식이다.

이젠 평범한 일상 맞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재밌는 기사 하나 눈에 뜨여 읽다가 문득 옛 생각으로 웃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기사의 제목이었다. ‘듀퐁가(家)의 저택 돌담장 위엔 왜 둘쭉날쪽한 유리조각이  박혀 있을까? Why does a duPont mansion have a stone wall topped with jagged glass shards?’

내가 사는 델라웨어주는 한때 듀퐁주로 일컬어 질 만큼 듀퐁 가문의 위세가 한세기를 넘게 떨친 곳이다. 듀퐁가문의 시조격인 Alfred I. duPont이 유리조각들이 박힌 돌담장으로 둘러 쌓인 저택을 지은 때는 1901년, 당시 건축비가 2백만 달러. 오늘로 환산하자면 약 오천 삼백만 달러였단다.

제법 긴 기사를 소개할 필요는 없고, 10피트(약 3미터)나 되는 높은 담장에 유리조각들을 박은 까닭은 외부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내부의 가족들 간의 분쟁 탓이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들의 감옥을 만들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듀퐁가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가족 분쟁기사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내가 기사를 읽으며 웃은 까닭은 내 어릴 적 기억에 남아 있는 담장 위에 박힌 유리조각들 때문이었다.

내가 살던 신촌엔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서교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받이에는 루핑집들 이른바 하꼬방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제2한강교가 들어 설 무렵 그 하꼬방들은 이층 양옥집들로 바뀌면서 동네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옥집을 둘러싼 시멘트 담장 위엔 어김없이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거나 둥그런 가시철망들이 얹혀 있곤 했다.

내가 이리도 그 시절을 정확히 기억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내 첫사랑이 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에 흰 얼굴이 잘 어울렸던 그 아이가 사는 집 담장에도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십 수년 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에서 다시 만났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교회를 갔다 온 아내가  뜬금없이 건넨 말이었다. ‘자기 첫사랑이 여기 온대! 곧 만나겠네.’

사연인즉, 그 얼굴 하얀 아이의 동생 부부가 교환교수로 이 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동생 부부를 방문하러 온다는 것이었고, 그 동생과 아내가 언니와 나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맞추다 보니 딱 맞아 떨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 하얗던 아이와 그렇게 만나 저녁을 함께 했었다. 그 아이의 가족들과 내 아내는 놀리기에 급급했지만, 그 아이와 수 십년 전 유리조각 박힌 돌담장 집에 살던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 웃었다.

다시 돌아가는 일상의 어느 날, 내 채마밭에서 밥상이 차려지고 화단의 꽃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웃는 모습을 그리며….. 또 웃다.

5-5-20

하루 – 16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중략 –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 echo chamber, 메아리방)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제15장 ‘무지’에서

오월이다. 여전이 비일상적인 생활이 계속되고 있지만 오월은 오월이다. 화사하다.

총을 차고 미국기를 흔들며 모든 가게들은 정상영업을 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해야 한다는 시위대 소식과 연일 늘어나는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소식들이 동네신문 온라인판 헤드를 함께 꾸미고 있다. 주지사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조금은 강경한 편이다.

내 가계경제(家計經濟)와 어머니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르면 나 역시 빨리 모든 것들이 정상화 되기를 바라지만, 공동체 사람살이로 보자면 조금은 진득해 질 때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즈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빠르면 앞으로 두어 주, 길어야 한달 안짝으로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 이전처럼 다시 세탁소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내게 될 듯하다.

마음이 급해지는 까닭은 마구 뒤집고 파 놓은 채마밭과 화단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뿌린 씨앗들과 심은 구근 들에서 파란 싹이 올라오고, 옮겨 심은 모종들의 하루가 궁금한 이즈음 생활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는 내 삶에 찾아 온  새로운 걱정이다.

생각컨대 아마도 내 일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 이전으로 완벽히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달포 전 신문에 게재된 유발 하라리의 글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을 처음 읽었을 때 떠올랐던 말은 ‘변곡점’이었다. 그것이 역사의 변곡점이든 내 개인적 삶의 변곡점이든 이즈음 내가 살아가고 있는 COVID -19  상황은 분명 하나의 큰 전환점임에 분명하다. 그 무렵 책장을 덮었던 하라리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느꼈던 그에 대한 생각의 연장이었을 수도 있다.

이즈음 COVID 이후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들이 넘쳐나지만, 유발 하라리의 지적은 사람살이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운 좋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벗들이 있다. 이건 분명 내가 누리는 더할 수 없는 축복이다.

벗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요 며칠 동안 하라리의 글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을 꼼꼼히 곱씹어 읽다.

혹시 관심있는 이들을 위하여 원문 링크와 번역한 글을 드린다.

무릇 이전(以前)과 이후(以後), 모든 시간들은 그 하루를 사는 이들의 몫이다.

https://amp.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영문)

https://docs.google.com/document/d/1lIU7c1JRVQ1D4W5n7vBY8CGCOQPJtSMlu6hfSvkmG-o/edit?usp=sharing (한글)

DSC00096 DSC00100 DSC00116 DSC00119 DSC00121 DSC00123

하루 -15

바람과 꽃비와 새소리에 홀려 아침 한 때를 보내다.

이젠 곡기 끊으신 어머니는 내내 주무시다가도 내가 찾아 가면 가는 눈 뜨시고 똑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시곤 다시 눈을 감으신다. ‘아이고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왜 이리 오랜만에…’

덩달아 급속히 오락가락이 심해지시는 아버지는 며칠 전 당신이 꼭 움켜쥐고 계셨던 몇 가지 기록들과 물건들을 내게 건네시며 말씀 하셨다. ‘나도 이젠 다 놓아야겠다.’

오후 들어 비바람이 거세다.

딱히 손에 잡히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꺼내 들었다. 문득 생각난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소제목 탓이었다. 언제 읽었더라? 가물하다. 옛날식 번역은 이제 내게도 낯설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야외 음악당 주위 아랍인들의 단단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 베이야르의 웃음과 고집 센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고 또 폭발의 소리가 들리자 파랗게 질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정다움과 슬픔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순간들,….>

<자기 자신 삶의 관객으로 살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가 그 삶을 완성해 주는 꿈을 보태기 위하여.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꿈으로 꾼다.  – 최초의 인간 ‘노트와 구상’에서>

누구에게나 하루는 최초의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간들 역시.

하루 -14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늉을 해 본다. 물론 결과는 모른다. 어떤 끝이든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내 나이 값은 해야 하므로. 그저 오늘 하루 흙을 만지며 보낸 하루에 감사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 고작 일 센트에 수십 개를 손에 넣은 씨앗들을 이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고 다루는 새로운 경험에 그저 놀라며 땀을 흘리는 참 이상한 기쁨을 맛본다.

DSC00057 DSC00063 DSC00065 DSC00073

삽질을 하다가 생각난 옛일 하나.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매를 맞기는 많이 맞았으되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거의 없다. 거의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는 까닭은 딱 한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으되 부끄러운 적이나 때린 이들에게 져 본 적은 없다는 우김질을 해본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딱 한차례 남을 때려 본 일이 있다. 사십 수 년 전 군대에서 겪은 일이다. 삼십 수 개월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지만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없었다. 제대를 거의 앞두고 일어났던 그 일 말고는.

전방 교육사단 말단부대 소총수였던 내 군생활은 그저 밥 먹고 훈련 받고 봄 가을로 땅 파는 일의 연속이었다.  땅 파는 일이란 고지에 교통호를 파고 떼를 옮겨다 심고 벙커를 짓고 하는 일들이었다.

말단 소총수였다고 하지만 나름 열외병으로 다른 병사들과 달리 여러 편익들을 누렸었다. 이른바 문제 학생으로 끌려갔던 군대생활은 초기 한 반년 동안은 몹시 힘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되다 보니 견딜만하게 되었다. 중대 인원 120여명 가운데 대학 재학중 이상의 학력자가 나 혼자이다 보니 비록 비밀취급인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여러 열외 조건들을 참 많이 누렸었다. 일테면 각종 위탁 교육들은 도맡아서 다녔고 툭하면 대대급 이상의 부대에 임시 차출되어 가곤 했기에 그리 혹독한 훈련이나 심한 노동에서 제외되곤 했었다. 동료 부대원들에게 미안함도 있었고 그런 까닭으로 많이 맞기도 했었다.

그렇게 제대 한 두어 달 남겨두고 나갔던 벙커 작업이었다. 산 아래 쌓아 둔 자갈과 모래 등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은 우리 소대원들은 등짐을 지고 오전에 서너 차례, 오후에 서너 차례 산 정산을 등짐을 지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말년이라 텐트지기를 했었을 수도 있었는데 때론 아둔했던 나는 등짐을 지고 그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러다 보게 된 일이다.  체격 좋은 울릉도 출신 원일병이 갓 전출 온 이등병 두 명을 마구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두 명의 이등병이 요령을 피우며 남들이 두 번 산을 오르고 내릴 때 한 번 밖에 하지 않아 군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웬지 모르게 화가 나서 원일병을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주변에 있던 나무 몽둥이로 그를 몇 대 때렸다.

내가 유일하게 남을 때렸던 일이다.

원일병이 제대하던 날, 그와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국밥집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었다. 그가 꼭 보자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김상병님(나는 만기 제대 상병이었고 그는 예비역 병장이었다.) 내가요, 이젠 울릉도 가면 언제 육지 올지 몰라요. 김상병님 올 여름에 울릉도 꼭 한 번 오셔! 내가 멋지게 모실게요. 김상병님이 나 때릴 때 웃음 나와서 혼났어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간지럽더라고요. 암튼 김상병님한테 맞은 건 내게 참 좋은 추억이예요.’

그해 여름 나는 포항에서 거의 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울릉도를 찾았었다. 도동에서 그의 집까지는 통통배를 타고 반시간여, 고작 이십 여 호 가구들이 이룬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보낸 열흘 간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다.

원일병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원색의 바다 속에 들어가 작살로 잡은 각종 해물 회와 막걸리와 소주로 나를 대접했고, 열합(홍합)밥에 고추장을 썩썩 비벼 내 배를 채워 주었었다.

아! 원일병 그도 이젠 더는 작살질은 못하리라.

삽질에 떠오른 옛 생각에 하루를 웃다.

저녁나절에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을 읽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