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이 눔아! 정신차려! 먼 산은 왜 그리 바라봐?’ 어릴 적 어머니께 종종 듣곤 했던 꾸지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볼수록 넋 놓고 먼 산 바라보다가 여기까지 온 듯하답니다.

먼 산 위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겨우 십 여년 전 일이랍니다. 말하기 낯부끄러운 환갑 즈음이었지요.

그즈음 하늘이 가르쳐 준 세상이었지요.

<세상에는 매일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아름다움이, 그 모양은 물론 색깔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지!>

하늘! 도화지랍니다.

일과 쉼, 그 사이 사이를 엮여내는 기쁨과 슬픔 때론 절절한 아픔까지.

그 모두를 담아내는 도화지.

하늘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 그저 문득 문득이라도 눈에 담을 수 있는 오늘.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이 눔아! 먼 산 말고 하늘!’

  • 10. 3. 2024

하늘

늦가을 비 내리어

마른 나무잎 다 떨구난 저녁

하늘도 미안했는지

제 얼굴에 단풍 물 드리다.

  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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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하늘은 하루에도 숱하게 얼굴을 바꾼다. 오늘도 마찬가지.

일터에서 틈틈이 하늘을 바라보다 떠오른 옛 생각 하나.

정동 세실극장이었다.  이강백의 연극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를 보고 나선 극장 밖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1978년, 암울했지만 꿈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제나 지금이나 하늘은 변화무쌍이다.

변덕에 이르면 나 역시 하늘 못지 않다.

그래도 이 나이에 문득 하늘 보며 던져보는 질문.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감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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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

모처럼 느긋한 주일 아침이다. 내 맘을 아는지 시간조차 느리게 흐른다.  간만에 넉넉한 마음으로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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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달 여 긴장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모처럼 아주 느긋하게 여유 있는 일요일 아침을 맞는답니다.

Long term care 시설에 계시는 장인이 병원 응급 환자로 옮기셨다 딱 일주일 만인 엊그제 상태가 좋아져 다시 시설로 돌아 오셨답니다. 어제는 딱 석 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셨던 어머니가 일주일 간 의 재활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셨답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가게 이전과 마무리를 하느랴고 한 달여 매우 바빳었답니다.

이제 두 노인들도 제 자리를 찾았고, 가게 이전으로 어수선했던 제 일상도 이젠 거의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맞는 일요일 아침에 누리는 여유에 정말 감사한답니다.

한 열흘 전 아침, 어머니 병실에서 밤을 지내고 가게 문을 열 때, 문득 눈에 들어 온 하늘을 보며 떠오른 생각들이 있답니다. 삶의 아름다움과 일상에 대해 늘 감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답니다.

누구나 살며 아프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가족들과 이웃들 모두 겪는 일입니다.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을 아름답다고 새기고 곱씹어 보는 것은 바로 제 자신이라는 생각을 아침 하늘이 제게 가르쳐 주었답니다.

또 다른 생각 하나는 매일 똑같은 생활, 때론 지겹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그 똑같은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생각해 본 것이랍니다.

그날 아침 하늘 풍경에 감사하답니다.

온 천지가 봄입니다.

좋은 계절, 아름답고 감사가 넘쳐나는 하루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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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I was busy and nervous for about a month, today I’m leisurely greeting Sunday morning with ease.

My father-in-law, who had been staying at a long-term care facility, was taken to the emergency center, was recovered in a week and moved back to the facility the other day. Yesterday, my mother, who had been hospitalized for three weeks, moved back home after a week-long rehab treatment.

Furthermore, I was busy completing moving the store, as you might know.

Now, my mother and my father-in-law are recovered and my everyday life, which was disordered, has almost fallen into place. So, I’m really grateful for the relaxed feeling which I’m enjoying in this Sunday morning.

About ten days ago, when I opened the store and looked at the sky after I had spent the previous night in my mother’s hospital room, a couple of thoughts came across my mind. It was that I should always be grateful for the beauty of life and everyday life.

We all get sick in life and have to face death someday. We also must look at our loved ones’ situations of those kinds. What the morning sky taught me was that it would be me who imprints all the courses of life as beautiful and thinks about them over again.

The other thought was that I should realize how grateful I should be for everyday life, though so often I feel that it seems to be a tedious repetition of the same things over and over again every day.

I’m thankful for the sky tha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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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around is shouting that it’s spring.

I wish that you’ll have over-flowing gratitude every day in this pleasant and beautiful season.

From your clea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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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세상인데

저녁상 물리고 느긋하게 세상 뉴스들을 훑다가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나이  헛먹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처음부터 터져 나온 이금희의 눈물 “이럴 것 같았다. 노회찬은 진짜였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눈물을 훔치며 기사를 읽고 있는데 셀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놀라 확인해 보니 밤 12시 30분 경부터 홍수주위보를 발령한다는 메세지와 함께 홍수 피해 예상 지역 주민들은 대비하라는 경보였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내 기억 속에 1980대 후반 부터  2000년 초,중반 까지 한국에 대한 것은 빠져 있다. 그만큼 한국은 내게서 멀었다. 딱히 이렇다할 정보를 얻을 방법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여기서 오늘을 사는 내 관심의 우선순위에 있어 앞자리에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홍수주위보를 알려주는 셀폰의 기능은 지금 여기서 사는 내가 겪고 있는 세상의 변화이다. 이 땅에 적응하기도 바쁜 내게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의 변화는 쫓아가기엔 좀 벅차다. 나름 세상 변화에 적응하노라고 애쓰며 살지만 아무래도 늦되다.

이른바 social media를 사용하는데는 더욱 그렇다. 말 그대로 상호 오가는 media 사용이라야 먹고 살기 위해 내 가게 손님들과 오고가는 이메일과 텍스트 메세지가 거의 전부이다.

그저 일기처럼 사용하는 블로그질은 오래 되었지만 그저 골방 샌님 놀이일 뿐이고, 트위터, 페북, 인스타그램, 링크드인 등등은 사용법에 대해 익히 알고는 있지만 그리 즐겨 하지는 않는다. 더더군다나 빤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댓글을 다는 일도 거의 없고 좋아요를 누르는 일도 남사스런 생각에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social media의 social 하고는 거리가 멀다.

카카오톡이나 텔레그램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카카오톡은 가족들 끼리만 사용할 뿐이고, 텔레그램은 한군데 모임과 연관되어 있어 사용하지만 그 역시 특별한 일 아니고서는 하루 한 두차례 pc로 사용할 뿐이다. 사실 내가 셀폰을 사용한지는 아직 이년이 채 되지 않았다.

내 아내의 표현대로 한다면 나는 그저 골동품이다.

카카오톡을 즐겨 사용하는 아내가 오늘 오후 짜증스런 목소리로 혼자 쭝얼거렸다. ‘아니, 이 아줌마는 자꾸 이런 걸 보내고 그러지, 딱하기도 하고….’

왜 그러냐고 묻는 내게 던지 아내의 답이다. ‘아이구  그 지긋지긋한 가짜 뉴스지 뭐, 박근혜 이명박 찬양하고 문재인 빨갱이 노래하는 거…. 오늘은 김정은이 한테 트럼프 문재인이 놀아나고 있다나 뭐나…’

참 좋은 아주머니신데  뉴스 선택에 있어서는 아내와는 상극인 셈이다.

아마 그 아주머니는 내가 오마이뉴스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 가짜뉴스에 홀렸다고 혀 차지 않을까 싶다.

참 좋은 세상인데…. 참 좋아진 세상인데….

이즈음 나는 하늘을 보면 하늘을 사진에 담고 싶다. 오늘 오후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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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뉴스들 보다 셀폰 보다 더 많은 세상을 품는다.

기차여행 – 7

하늘 그리고 한울

열차는 어둠이 덮힌 네브라스카 대평원을 달린다. 스쳐 지나가는 역마다 안내를 해주던 안내방송도 끊겼다. 어둠속을 달리는 기차안에서 승객들이 편안한 잠을 잘수 있도록하기 위한 배려이다.

나는 Omaha시를 지난 후에야 잠을 청했다. Omaha는 내 아들녀석이 4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모두가 내 욕심 탓이었다. 욕심은 아이 이름을 너무 버겁게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한울이라는 이름이 너무 무거웠는지 아이는 좀 늦되게 컷다. 제 자식 착하다하지 않을 애비가 어디 있겠느냐만 아이는 정말 착했다. 아니 지금도 착하다.

다만 아이는 느렸다. 게다가 덩치는 애비의 두배나 되는 녀석이 마음이 너무 여렸다. 중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나무랄 수 없을 정도로 성적표를 받아오더니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여러 차례 아내와 나는 학교의 부름을 받곤 했다. 그렇다고 무슨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니었고 느려서 다른 아이들을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나마 대입학력고사인 SAT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아 맘먹고 찾아나서면 갈만한 대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또 다시 내 욕심이 발동하였다. 아이에게 군대를 권한 것이었다. “지금 네 상태로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를 다녀 오는게 어떠냐?” 내 권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내 핑계이지만, 아이가 좀 단단해 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착한 아들은 내 말에 순종했다. 아들녀석은 텍사스에서 훈련을 받고 네브라스카 오마하로 배속받아 4년을 근무하였다. 당시는 이라크 파병 숫자가 가장 많을 때여서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몇주 만에 훈련생활을 끝낸 아이를 텍사스에서 만났을 때 내 느낌은 “아이고, 내 욕심이었구나” 였다.

다행히도 아이는 4년 동안 오마하 군생활을 마치고 돌와왔다. 아이의 군 제대를 앞두고 내 욕심은 또 다시 발동했었다. “얘야! 그냥 군생활을 계속하는게 너에게 좋을 것 같은데….” 녀석은 그 때 처음으로 내 말을 끊었다. “아빠! 아빠는 군대가 얼마나 나쁜덴 줄 몰라! 난 제대할거야!”

그렇게 아들녀석이 자신의 황금시간을 보낸 곳 오마하를 지나며 난 잠이 들수가 없었다.

제대후 녀석은 대학을 마치고 일자리를 얻었다. 박봉이지만 자기처럼 늦된 아이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로 일을 재밌어 한다. 그런데 좀처럼 집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여섯 살 아래 제 동생이 하는 “오빤 나이 스물 넘은지가 언젠데…”하는 비웃음을 못들은체 하면서까지 좀체 나가서 살려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어느날 부터인가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 내외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기 시작하더니 대답과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녀석에게 여자가 생겼다. 어느날인가 얼굴 까만 여자 아이와 아들 녀석이 함께 있었고, 얼마 지나지않아 두 아이는 “우리 결혼해요!”라며 우리 부부에게 다가왔다.

나는 많이 아파했다. 처음엔 아이가 내게 만들어준 아픔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픔은 내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픔의 크기는 커져갔다.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아이들의 배우자를 얼굴 색깔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왈 진보연하며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아픔이었다.

얼굴 까만 여자아이는 내 아들녀석을 더 이상 한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Han 이다.

그렇게 오마하를 지나 기차는 달렸다.

나는 새벽녘에 지평선 넘어 떠오르는 해와 하늘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오마하를 지나 자정이 넘어서도 잠을 이루지를 못했다.

여행이 끝난 후 하나엄마는 하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 주었다. “여행중에 제가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요, 하늘을 그렇게 많이 찍었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 하늘을 많이 찍었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니까요, 평소에 바쁘다고 하늘 쳐다보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들이 매일 매일 내 앞에 있었을텐데요….”

언제가 나는 얼굴 까만아이에게 말할 것이다. Han이 아니라 한울이라고 부르라고. 비록 또 다시 내 욕심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