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 그 날 4

(당신의 천국 – 일흔 여덟 번 째 이야기)

그 때에 (천사)미가엘이 네 겨레를 지켜 주려고 나설 것이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찌기 없었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때라도 네 겨레 중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람만은 난을 면할 것이다.  티끌로 돌아 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너 다니엘아, 이 말씀을 비밀에 붙여 마지막 그 때가 오기까지 이 책을 봉해 두어라.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깨쳐 잘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다니엘 12 : 1 – 4 

어릴 때 즐겨 부르던 찬송 가운데 “어머니의 성경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즐겨 불렀던 것은 아니었고, 당시 유년주일학교에서 수시로 부르게 했던 찬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찬송 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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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임금 다윗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때 일은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님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 

후렴>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말 이책중에 있으니 이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사자굴 속에서도 살아난 다니엘의 이야기도 어릴 적에 많이 듣던 성경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요즈음 어린아이들이 교회에서 배우고 듣는 찬송과 성경이야기들은 어떤 것들이 주된 것인지는 제가 잘 모릅니다. 종종 손녀 딸의 교회학교 뒤바라지를 하는 제 누이는 이즈음 아이들이 노는 테를 제법 아는 것 같습니다만 아직 손주를 보지 못한 저는 어린 아이들 문화에 대해서는 젬병인 셈입니다. 

제가 주일학교를 다니던 때인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의 어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동란을 체험한 세대들이었고, 이즈음처럼 문화의 변화가 빠른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자신들이 어릴 적 배우고 들었던 것들을 그대로 전수하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구약 이야기와 다니엘 이야기가 그 당시만 해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단골 레파토리가 되었던 까닭은 일제시대 식민지를 경험한 선조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성경, 특히 구약시대 후반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성경이야기에 투영시킨 까닭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다니엘은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에 아주 좋은 성경 이야기 자료였답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제 가슴에 쌓였던 생각 하나가 떠오른답니다. 어머니의 성경책이라는 제목과 어머니가 읽고 들려 주시던 성경책 이야기는 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제 어머니는 교회는 다니셨으나 문맹이셨답니다. 한글을 읽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고개만 끄덕 끄덕하시는 신자이셨지요. 

어머니는 저희 남매들을 다 키우신 다음에 한글을 깨우치셨고,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되셨답니다. 

이쯤 다니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다니엘서 1장 1절을 시작하는 시점은 기원전 600여년 경입니다. 남왕국 유다왕 여호야킴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떄 그 무리에 끼였던 “흠없이 잘 생기고, 교육을 받아서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무슨 일에나 능숙하고 사리에 밝은” 젊은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니엘이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서가 쓰여진 것은 그로부터 약 400여 년이 세월이 흐른 후인 기원전 165년 경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기원전 167년은 안티쿠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신이 모셔지고, 유대인들의 전통과 야훼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식이 전면 금지된 해입니다. 이 왕의 명령을 어겼을 때 쫓아오는 것은 가차없는 죽음 뿐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대다수 유다인들은 숨죽인 채 살고 있었고, 잽싸게 이런 이방왕의 명령에 쫓아 줄을 서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카베오 일가 처럼 반항하고 항거하는 투쟁을 벌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한편의 사람들이 다니엘서 같은 문학서를 쓰고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과 신앙을 쉽게 저버린 동족들 뿐만 아니라, 목숨걸고 항쟁하는 사람들, 특히 이젠 유대족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동족들을 위해 희망을 선포하고, 야훼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들이 모르는 원대하고 큰 곳에 있다는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는 일에 매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쓰고 있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오늘을 위해 준비하고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당시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율법서나 역사서들 곧 모세오경을 비롯한 그들만의 성서를 지니고 다니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이야기로 전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는 가명으로 숨기도 하고, 환상과 꿈같은 이야기로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되기도 하고, 숫자와 상징속으로 하고 싶은 뜻을 숨기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에서 6장까지는 사자굴 이야기로 잘 알려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7장부터 12장 까지는 세상 왕국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이야기입니다. 

다니엘서가 쓰여진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은 마치 세상 끝날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그런 동족들을 향하여 야훼 하나님의 말이 곧 도래할 것이고, 하늘이 보내신 ‘인자(人子) 같은 이’가 나타나 민족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소망과 기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에 대한 본격적인 신앙적 기록이 남아있는 책이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이 전하는 이런 미래에 대한 꿈들이 약 160년 후 예수가 태어나는 세상이 될 때까지 유대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에는 구약의 다니엘, 신약의 요한계시록 두 권이 묵시록으로 남아있습니다만, 비록 성서의 정경으로 채택되지는 못한 것들이지만 많은 묵시록들이 그 무렵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당시 쓰여진 주요 묵시문학서들과 그 기록 연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니엘서 (165 BC),  *  에녹 1서 (대략 164 BC 이후), *  희년의 서 (대략 150 BC)  *  시빌라인 신탁서 3권 (대략 150 BC 이후) *  열두 족장의 유언서 (BC 2 세기 초)  * 솔로몬의 시편 (대략 48 BC)  * 모세의 승천기 (AD 6-30) * 이사야의 순교 ( ? )   * 아담과 이브의 생애, 모세의 묵시록 (AD 70 바로 직전)  * 아브라함의 묵시록 9-32 (대략 AD 70-100)11) * 아브라함의 유언 (AD 1 세기)   * 에녹 2서, 에녹의 비밀서 (AD 1 세기) * 시빌라인 신탁서 4권 (대략 AD 80  * 에스드라 2서( = 에스라 4서) 3-14 (대략 AD 90)   * 바룩 3서 (AD 2 세기) * 시빌라인 신탁서 5권(AD 2 세기) 

묵시문학의 초기 기록인 다니엘서는 다가올 메시아왕국은 지상에 건설되는 왕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죽음 이후의 문제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하지만,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한 예언자적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묵시문학서인 셈입니다. 

본격적인 묵시록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시대에서 이으려고 합니다. 

이제 마카베오 일가의 혁명 이후 세워진 유다왕국 하스몬왕조 때의 이야기와 헤롯대왕의 시대까지의 시대 변화와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두 차례에 걸쳐 이야기 하는 것으로 구약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진정 만나야만 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신약시대로 넘어갑니다.

물음 – 그 날 3

(당신의 천국 – 일흔 일곱 번 째 이야기) 

나 다니엘이 이 환상을 보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에 사람 모양 같은 것이 내 앞에 섰고 내가 들은즉 을래 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환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하더니 그가 내가 선 곳으로 나왔는데 그가 나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그가 내게 말할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매 그가 나를 어루만져서 일으켜 세우며 이르되 진노하시는 때가 마친 후에 될 일을 내가 네게 알게 하리니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임이라 – 다니엘 8 : 15 – 19, 공동번역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던 해는 1969년이었습니다. 한국 학교교육에 있어 1968년과 1969년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하나있답니다. 우리 세대들이라면  쉽게 기억에 떠올릴 수 있는 문장 하나가 그 차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바로 국민교육헌장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 헌장은 달달 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문제에 나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외우지 못하면 체벌을 받기도 했답니다. 

이 헌장이 발표된 것은 1968년 12월 5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외어야했던 헌장 전문은 첫 문단인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에서 발표날짜인 1968년 12월 5일과 마지막을 장식한 말, 대통령 박정희까지 틀리지 않게 외어야 100점이었답니다. 

이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했다고 대학교수들이 학교에서 내쫓기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 일도 있었답니다. 1978년에 있었던 ‘우리의 교육지표’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국민교육헌장의 가치에 대해 목청 높이는 축들도 있었지요. “국회를 통과한 국민의 뜻을 수렴한, 민족주체성 확립의 핵심”이라며 찬사를 보냈던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세력이었답니다. 

이 국민교육헌장은 1890년 일본 천황이 만든 교육칙어(敎育勅語)와  1937년 일제가 조선민들에게 외우기를 강요했던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본딴 것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신민서사

황국신민서사란 일본제국을 위한 맹세로써 성인용과 아동용이 따로 있었고, 내용은  엇비슷한데 아동용이 ”첫째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둘째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세째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라고 되어있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황국신민서사를 작성하고 완성한 이들은 모두 조선인들이었답니다. 당시 일본총독 미나미 지로는 단지 재가를 하고 집행만 했다는 것이고요. 

일제 말기 이야기 좀 더 해 볼까요.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던 무렵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두가지 변화가 더 있지요. 바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입니다. 

우리 속담에 “만일 내가 어떤 일을 하면 성(姓)을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인들에게 자신의 성씨란 목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제 1940년 창씨개명이 본격화되자 전남 곡성에 사는  류건영(柳健永)은 반대 항의문과 함께 58세의 나이로 자결을 했고,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측의 통보를 받고 결국 자녀를 창씨시킨 다음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며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때는 이 때다’며 먼저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조선인들도 많았지요. ‘향산광랑(香山光郞)’이 된 소설가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있지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된 박정희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요. 물론 김대중도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김영삼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라는 일본 이름을 지니고 있답니다. 다만 이들이 창씨 개명을 한 나이를 보면 김대중은(1925년생)은 만15세, 김영삼 (1927년생)은 만13세 떄의 일이었고  박정희(1917년생)는 만23세 때의 일이었다는 것이 누가 선택한 것이냐는 다름의 차이가 있는 것이겠지요.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인들에게 새로 부과된 변화는 신사참배였습니다. 특히 이 신사참배란 여호와 하나님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 숭배를 하느냐 신앙의 정조를 지키느냐하는 목숨을 건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주기철, 최상림목사 등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옥중에서 죽은 이들도 있었지만 천주교, 개신교 가릴 것 없이 결국엔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한 역사를 만들었답니다. 

이런 일들 곧 신사참배,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 등의 일이 일어난 것은 단지 십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조선인들이 마치 완전한 일본시대가 도래한 것 같이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비슷한 경험을 우리 민족보다 수 십배 긴 세월동안 겪어 온 유태인들의 상황을 돌아 보기로 하지요. 

바벨론 포로 이후로 부터 유태인들은 대제국의 식민지 백성이거나 타국으로 피난가서 사는 신세로 약 사 백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식민지였기는 하지만 민족의 전통과 야훼 하나님 신앙만은 지키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175년경 셀류커스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왕 시대에 이르러 유태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전통과 야훼 하나님 신앙을 지켜낼 수가 없는 시대를 맞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우스 신이 모셔지고, 유대인들의 전통 일테면 할례를 받는다던가 야훼 하나님을 예배한다던가 하면 목숨을 잃게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 변화에 잽싸게 영합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나 팔레스타인이나 가지고 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빠르게 헬라문명에 적응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한 세력들이 생겨났고, 반면에 이에 대항하는 세력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이야기했던 마카베오 일가는 바로 그 반대 세력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그 시대를 이름없이 살아갔던 평범한 유대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아 다니던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을 향한 물음으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우리들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전하는 야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믿어왔다. 그것은 야훼 하나님과 우리들의 조상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야훼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우리 조상들을 해방시켜 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다. 이 땅에서 복을 누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음에도 우리 조상들은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깨우치시려 이방의 침략 같은  고난을 내리셨다. 한 때는 야훼 하나님 눈에 드는 지도자들이 있어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틈만 나면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렸다. 마침내 나라까지 없애 버리셨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회개하고 야훼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가나안을 열어 주신다. ‘그렇다! 바로 오늘 여기서 우리들의 선택이 중요하다.’라고 믿고 살았는데 이젠 그 근거조차 없어졌다.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져 온 시대에는 오늘의 우리들이 회개하고 야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들이 또는 우리 후손들이 사는 역사 안에서 새 시대가 열린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제 그 믿음조차 없어진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경우 이럴 때 사람들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을 합니다. 창씨개명을 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신민서사를 외우듯 말입니다. 

그러나 더 먼 내일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럴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이 일어나게 된 까닭입니다. 

묵시문학, 묵시사상, 묵시적 믿음은 마지막 때라고 믿는 사람들이 내일을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은 이런 국면에서  어떻게 일하느냐를 믿는 것이 바로 묵시 신앙입니다. 

구약성서의 묵시서로는 다니엘을 꼽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꼽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신약성서 전체가 묵시사상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게 제 믿음입니다. 묵시신앙을 빼고는 예수신앙을 말할 수 없거니와,  제가 이야기하려는 하나님 나라도 공허할 뿐입니다. 

자! 이쯤 구약성서 마지막 이야기 다니엘서로 넘어갑니다.

상생(相生) – 그 날 2

(당신의 천국 – 일흔 여섯 번 째 이야기)

2013년 성탄절 아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가 그 때(2013년 전 12월 25일) 거기(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 여부, 또는 그가 구세주로 오신 신의 아들임을 믿는 신앙의 여부를 묻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이 된 일은 예수로 인해 신기원(新紀元)이 열린 사실입니다. 

물론 유태력(猶太曆Hebrew calendar)이나 한국의 단기력(檀紀曆), 일본의 천황력( 天皇曆) 등 자기 민족만이 사용하는 기원력들이 있거니와 불기력(佛紀曆), 회교력 (回敎曆Islamic calendar) 등의 종교력도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저희 새대가 어릴 적만 하여도 달력에 단기표시가 있었답니다. 서기 2014년과 단기 4347년이 달력에 함께 박혀 있거나 단기만 박혀 있기도 했답니다. 

현재 전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서기력(西紀曆)은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뉘어져 있지요. 기원전은 B.C. 곧Before Christ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시대를 말하고, 기원후는A.D. 곧Anno Domini라는 라틴어를 사용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의 시작을 말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로 인해 기원(紀元)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즈음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호칭이 특별한 종교(기독교)에 치우쳐 있음으로 새로운 용어를 써야한다는 운동이 있습니다. 바로BCE(기원전)과 CE(기원후)라는 말입니다. BCE는 Before Common Era (공동 시대 이전)의 약자이며, CE는 Common Era (공동 시대)를 줄인 말인데 점점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랍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어도 기원이 바뀌는 것엔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AD 2014와 CE2014는 같은 것이니까요. 

신기원이 열린다는 말은 옛 세상이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반도에서 이런 새로운 세상을 고대하는 종교, 사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1592 – 1598)과 병자호란(1636 – 1637)이라는 두 개의 큰 난리를 겪고난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은 실로 팍팍한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가고, 전통적으로 사회 근간을 이루어 오던 유학의 세력도 약해지면서 그야말로 나라 꼴이 꼴이 아닌 세월이 이어져 가고 있었답니다. 

그 무렵부터 민간에 소리없이 퍼져나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과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리우는 남사고(南師古)의 예언들입니다.  이씨조선은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되는데 새시대에 살만한 곳들은 남쪽에 있다는 남조선사상(南朝鮮思想)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간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설왕설래하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침내 종교운동으로 변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서의 일입니다. 

최제우(崔濟愚)의 천도교(天道敎, 동학), 강일순(姜一淳)의 증산교(甑山敎), 김일부(金一夫)의 정역사상( 正易思想),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의 원불교(圓佛敎) 등이 일어난 때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새로운 세상입니다.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이라고도 합니다. 수 백년 동안 불안과 고통, 차별, 빈곤 등으로 이 세상이 아닌 어떤 구원을 이루어주는 세상을 갈망하는 백성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새 세상을 선포한 것입니다. 

상생

후천개벽사상 또는 종교란  지난 시대 곧 선천시대(선천시대)는 지났고 이젠 모든 재난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 곧 후천시대가 열렸으며,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해원상생(解冤 相生) 곧 맺힌 원한들이 모두 풀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더불어 사는 일이 일어나며, 사람들모두가 무자기(無自欺)의 마음 곧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을 안고 사는 세상이 열린 것을 믿는 것이랍니다. 

천도교의 지상선경(地上仙境), 증산교의 후천선경(後天仙境),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 원불교 의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 등이 모두 후천개벽에 대한믿음과 이제 올 후천낙원에 대한 가르침이랍니다. 

이런 새로운 신앙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동학운동이나 삼일운동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역할도 하게된 것입니다. 나중에 감리교인이 된 백범 김구선생도 젊은 시절엔 천도교인으로 동학혁명운동에 참여하였었답니다. 

한반도에 후천개벽 세상을 염원하는 민족종교들이 일어난 후 이미 백 오십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고대가 이어지고  있지요. 

자!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보고 지나가기로 하지요. 어느날 갑자기 최제우가, 강증산, 김일부가 원불교의 박중빈이 한반도 역사속에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들이 큰 깨달음을 얻기까지 이미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삶을 이어오고 있었고, 백성들 가운데 정감록과 남사고의 이야기들이 떠돌아 다녔었다는 것입니다. 

이천 여년 전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앞 뒤 자르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예수의 선포 역시 그 선포를 듣는 당시 팔레스타인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이어온 삶과 그들 가운데 떠돌던 이야기들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비행접시를 타고 다니다가 어느날(2014년 전) 어떤 곳(베들레헴)에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퍼져 살았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 곧 사상과 종교적 운동은 바로 묵시문학사상이요, 묵시종교였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묵시문학운동, 묵시종교가 널리 성행했던 시절은 예수가 오기 약 200여년 전 곧 기원전 200여년 경부터, 예수 나신 뒤 약 200여년 곧 기원후 200여년 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 묵시운동이 사라져 버리고, 그것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어져 오게 된답니다. 

묵시 운동은 마지막 때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시작됩나다.  그 마지막 때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는 천사와 마귀이야기가 나오고, 그들이 알려주는 메시아 왕국의 모습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그 이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 바로 묵시문학운동입니다. 

그러면 묵시문학운동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묵시(默示) – 그 날 1

(당신의 천국 – 일흔 다섯 번 째 이야기)

그가 대답했다. “다니엘아, 물러가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가 오기까지 봉한 채 비밀에 붙여질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단련을 받아 깨끗해져서 빛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끝내 눈이 열리지 않아 악한 짓을 계속하겠지만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눈이 열려 환하게 알 것이다. 정기제사가 폐지되고 파괴자의 우상이 선 다음 일천 이백 구십 일이 지나야 끝이 온다. 일천 삼백 삼십 오 일을 기다리며 버티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러니 그만 가서 쉬어라. 세상 끝날에 너는 일어나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니엘 12 : 9 – 13, 공동번역 

지난 해 초에 세상을 뜨신 후배의 아버님께서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셨습니다.  그 이는 “가르치고 지도할 능력과 역량과 신심을 갖춘 도인”에게 내리는 명예직이지만 본인의 결단에 따라 교역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기독교의 목사직에 준하는 천도교 선도사였답니다. 

후배의 아버님께서는 자신이 가셔야할 길을 예비하시며 평생 살아 오신 일들을 간략히 메모해 남겨 놓으셨답니다. 그 메모를 통해 저는 그 분께서 스스로 걸어오신 평생의 길을 되돌아보며 크게 뜻과 의미를 부여하신 세가지를 짚어낼 수 있었답니다. 

용담

첫째는 동학(천도교)에 귀의하여 접주가 된 일, 두번 째는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만난 일, 세번 째는 경주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 천도교 성지 복원 및 준공 역사의 한 몫을 담당하셨던 일이었습니다. 

천도교 구미산 용담정은 동학(천도교) 교주인 최제우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상태로 상제(上帝)를 만나는 종교 체험을 하고 포교를 시작한 곳입니다. 그 때가 1860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조선사회를 이끌어오던 유교, 불교, 선교는 이미 때를 다했고 새로운 종교가 세상 사람들을 구언하리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34년 뒤인 1894년 갑오년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혁명이 일어납니다. 내년이 또 다시 갑오년이니 딱 120여년 전의 일입니다. 

유, 불, 선은 다 되었고 이젠 동학의 세상이라는 선포가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한 세대만에 혁명의 불씨를 짚힐 수 있었던 것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어떤 절실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동학 혁명은 실패했고, 동학(천도교)도 그 이후 크게 그 세를 확장하지 못했으며 그리 된  까닭들을 제가 이야기할 바는 아닌 듯하여 이쯤 접고요. 

이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 길목에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되었답니다. 

바로 묵시론, 묵시문학, 묵시사상, 묵시적 종말 등등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삼년 동안 그가 말한 설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제대로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한민족이 가장 최근에 겪어낸  종교, 사회, 정치적 역사 경험이자 종말사상 운동인 동학을 돌아보는 일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묵시(默示)란 ‘잠잠할 묵’자와 ‘보일 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없이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영어의 apocalypse란 말의 뜻은 드러내다, 폭로하다, 계시하다라는 의미가 있고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드러내며, 무엇을 폭로하고, 무엇을 계시하는 것일까요? 

바로 고통과 비애로 가득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대망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에한 소망와 희망과 꿈을 보여주고, 드러내고, 그 계획을 폭로하고 계시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 묵시론, 묵시신앙이란 말은 바로 지금 위기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문학이요, 사상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묵시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제 우리들이 새롭게 펼쳐나갈  신약시대 이야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바로 묵시적 종말과 예언적 종말을 완성한 세상입니다. 

또한 묵시, 종말이라는 말은 지난 이천년 이래 숱한 이단과 종교적 사기꾼들이 제 뱃속 채우기 위해 막다른 절벽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등쳐먹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구약성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묵시에 대한 이야기 몇차례 이어갑니다. 

(연말이라 자꾸 일이 생겨… 오늘은 짧게.)

감사 – 지혜 2

(당신의 천국 – 일흔 네번 째 이야기)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는 넋을 잃었다. 그대 눈짓 한번에 그대 목걸이 하나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나의 신부여!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괴었구나. 옷에서 풍기는 향내는 정녕 레바논의 향기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 둔 샘이로다. – 아가 4 : 9 – 12, 공동번역 

이런 말들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겝니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어야 한다.”라거나 “썩은 새끼줄도 잡아 당겨야 끊어진다.”같은 말들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 준 지혜 곧 속담입니다. 이런 속담이나 격언들이 우리 민족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니지요. 

일테면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도 있는 것이고,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에는 세상이 울고 네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거라.”라는 인디언 속담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펄벅이 남긴 말 “힘은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고 용기는 속에 있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것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남겨놓은 명언들고 많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말들은 대대를 걸쳐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파송되어 가며 제일 먼저 현지민들에게 전했던 성경책은 잠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세상 어느 민족에게나 인생 살아가는 지혜의 책은 낯설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질감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 책이었다는 말입니다. 

잠언이란 책 이름은 중국어 성서이름 箴言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지요. 영어성경의 이름 Proverbs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원인 라틴어 역시 격언, 속담, 금언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어 번역 잠언이 더 뜻이 깊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잠(箴)은 바늘 또는 침(鍼)이라는 뜻이거든요. 바늘이나 침으로 꼭 찌르듯 정신을 일깨워주는 말씀의 책이라는 이름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잠을 부르는 책”이라고 부른다고도 하더군요. 

wisdom

구약성서에 있는 이른바 지혜서들은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등입니다. 이 지혜서들과 율법서와 역사서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을 내세우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율법과 역사서의 기본은 계약정신에 입각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행위들과 계약백성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인데 비하여 지혜서는 이런 계약사상 또는 계약정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지혜라는 말이나, 속담과 격언 또는 금언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사람들이 남긴 것임으로 야훼 하나님이 끼일 자리가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서고금 어느 민족에게나 전해오는 속담들과 격언들이 야훼 하나님 없이도 이어져 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지혜서들은 자칫 이렇게 사람 중심으로 빠질 수도 있는 지혜 이야기들을 비록 들어나게 강조하지는 않지만 야훼 하나님의 계약정신과 계약법과 연결시켜 놓았답니다. 지혜의 근원이 사람이 아닌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으로 알려져 있는 잠언은 솔로몬을 비롯한 가나안 정착 초기의 사사시대로 부터 입으로 전해져 오던 이야기들과 포로기, 포로기 이후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모아 포로기 이후인 기원전 450년에서 3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가르침을 들어 학식이 더해지고 슬기로운 사람은 남을 이끌 힘을 얻어 잠언의 깊은 뜻을 풀이해 주고 현자의 말이 품은 뜻을 깨우쳐 준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와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 1 : 5 – 7)는 말처럼 모든 지혜의 근본은 야훼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다는 잠언의 교훈들은 자칫 지혜 만능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의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부유함과 가난함에 대한 금언들은 그런 수렁으로 안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답니다. 잠언의 말들을 만들고 전해준 계층들이 초기의 사사(또는 씨족 부족의 족장)들로 부터 왕, 나중에는 궁중이나 성전의 서기관 등 부를 누리는 쪽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혜의 결과물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짧고 간명하게 표현된 지혜의 말들 속에 자칫 당시의 부조리 또는 부정직한 현실들을 쉽게 감출 수도 있는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잠언의 부족한 부분들을 매워주는 책들은 바로 욥기와 전도서입니다. 

욥기는 지혜서인 잠언이 야훼를 믿고 착하고 부지런하면 복받고 잘 살고, 믿지 않고 악하고 게으르면 벌 받고 못산다는 일률적인 잣대의 도덕과 지혜 만능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는 모습이나 삶의 자세로 볼 때 도대체가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고난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을 엮고 믿었던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고통이나 고난 또는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습관적인 믿음이나 단정적 결론에 대한 도전입니다. 

욥기는 왜 비교적 죄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욥기는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사람은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러나 스스로 기꺼이 야훼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말로 시작되는 전도서는 자칫 회의주의자의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답니다. 우리 말로 “헛되다”로 번역된 말의 원뜻은 무의미하다, 무익하다, 공허하다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자연이 시간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지루한 반복을 이어가듯이 사람들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지혜, 쾌락, 수고, 부귀, 여자(남자) 등등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추구하는 것 모두 부질없으며, 불의, 억압, 위험, 죄악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렇게 분명한 한계 속에서 사는 하루하루의 삶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일부터 모든 일상에 감사하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인과응보의 법칙에 매달리지 말고, 삶의 불확실한 상대적 가치들을 즐겁게 추구하며 살 것을 권유합니다. 

마지막으로 아가서에 대한 해석이나 주석들 역시 많습니다. 또한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말들도 합니다. 신랑은 하나님, 신부는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유대의 전통도 있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교회라는 바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신부는 신부, 신랑은 신랑으로 읽고 이해함으로 우리들 각자의 가정생활에서 사랑하는 부부관계를 일상화 시킬 것을 강조한 책으로 이해한다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지혜서 이야기 이렇게 맺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 이야기들의 마지막입니다. 종말론, 종말문학, 묵시문학, 묵시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참 노래 – 지혜 1

(당신의 천국 – 일흔 세 번 째 이야기) 

곤경에 빠져서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내 소리를 들어 주셨사옵니다. 야훼여, 나를 건져 주소서. 거짓된 입술과 사악한 혀로부터 건져 주소서. 너, 사악한 혀야, 너 무엇을 얻으려 하느냐? 너 무엇을 더 받으려 하느냐? 네가 받을 것은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노가주나무 숯불뿐이라. 오! 메섹인들에게 얹혀 사는 나의 신세, 케달인들 천막에서의 더부살이, 이 괴로움이여. 평화를 지겨워하는 자들, 그들 틈에 너무나도 오래 끼어 살았구나. 내 소망은 화평이다, 한 마디만 하여도, 그들에겐 싸움거리가 되는구나. – 시편 120장, 공동번역 

쎄시봉 열풍이 불었던 것이 지난 해 일이었나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등의 이야기와 노래가 제법 방송 시청율을 올렸던 때가 있었지요. 저 역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영시의 다이알’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출연자였던 그들이 전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과 노래를 들으며 공부했던 세대이므로, 늙으막에 들어선 그들의 이야기를 흥미있게본 기억이 있답니다. 

노래

그런데 시간을 돌려서 그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네들 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던 가수들의 있었답니다. 남자로써는 배호, 남진, 나훈아요, 여자가수로는 단연 이미자였답니다. 쎄시봉으로 표현되는 통기타그룹들의 쑈는 기껏해야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시민회관이나 대학교 강당에서 있었을 뿐이지만, 남진 나훈아 이미자쑈 등은 동네 곧곧 삼류영화관에 이르기까지 휩쓸고 다녔답니다. 물론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만당사례(滿堂謝禮)” 깃발이 나부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답니다. 

나훈아의 고향역과 남진의 님과 함께에 자지러지던 시대였답니다. 유행은 변하게 마련이고, 기억도 자기 좋을대로 생각해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이지요. 

이즈음 오십대 후반에서 칠십대에 이르는 세대를 제대로 알려면 지나간 세월을 자기식으로 기억할 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로 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유행가로는 그렇고요, 교회 찬송가도 마찬가지랍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기타 반주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는 일은 매우 불경한 일로 치부되곤 하였답니다. 하물며 전자악기를 교회에서 본다는 일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답니다. 

이 점은 최근세사 한국교회에만 가진 경험이 아니랍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에서 피아노가 허락된 것이 고작 200여년이 지났을 뿐이랍니다. 피아노는 경망스럽다고 올갠만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찬송 역시 유행은 세월따라 변한다는 것입니다. 

나훈아를 좋아하든 남진을 좋아하든 쎄시봉 가수들을 좋아하든 그 모두를 좋아하든 다 개인의 취향에 따른 일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다름과 취향의 차이에 대고 시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들를 종종 볼 수가 있답니다. 

교회 찬송도 마찬가지랍니다. 전자악기 반주에 손뼉치고 목청높여 할렐루야를 외쳐야 좋은 사람들도 있거니와 그저 조용히 흥얼거리는 것 만으로도 맘 한구석이 아려오거나 평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인 것이지요. 강요하며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은 이천 여년 전에 이미 바울이 결론을 낸 일이기도 하답니다. 다음은 바울이 한 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읍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읍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읍니다.”(고린도 전서 14:15),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에베소서 5:19) 

모든 장르 다 좋고, 악을 써도 좋고 조용히 음미해도 좋고 어떻게든 찬양하는 것은 다 좋은데 “진정한 마음’으로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유행가는 진정한 마음조차 변한답니다. 세월따라 진정함을 느끼는 대상과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나훈아의 고향역, 남진의 님과 함께, 트윈폴리오의 하얀손수건을 들었던 제 이십대와 지금의 느낌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앙 고백으로써 올리는 찬양의 진정성은 변함없이 한결같다, 아니 한결 같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책이 바로 성서의 시편입니다. 

우리말로는 중국어 번역을 따라 시모음집이라는 내용으로 시편이 되었지만, 영어 Psalms와 원래적 의미는 찬양 모음집이라는 게 더욱 가까울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찾아 가면서 읽고 생각해 본 성서들은 주로 율법, 역사, 예언서들이었던 것에 반해 시편은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는 개인 또는 공동체가 겪는 삶을 통해 느낀 감정들을 찬양으로 만든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복되게 잘 사는 일, 공동체적으로는 더불어 함께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분명한 목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현실적인 삶에서 개인적으로는 고통, 아픔, 실패, 좌절 등이 끊이지 않고 공동체적으로는 불의와 불공평과 불안이 결코 그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 연속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나은 삶,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매진해 나가는 모습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찬양들입니다. 

시편에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노래, 예배 의식을 위한 노래, 축복의 노래, 교훈과 명상의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탄식과 탄원을 올리는 노래들이 제일 많은 까닭은 바로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올리는 찬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이 질병, 마음의 아픔, 정치 사회적으로 받는 각종 차별과 억압 등의 고통들이 결코 그치지 않는 “오늘”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드리는 찬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읽는 개인이나 묵상하는 공동체나 어떤 정형을 찾기보다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나 공동체를 대입시켜 읽고 묵상하는 방법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다만 시편의 편집 과정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편집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시편 역시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다윗과 그의 시대에 살았던 성전 예배 집례자들(성가대)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믿었답니다. 19세기 들어 시편은 포로기 이후부터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서야 완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옵니다. 20세기 들어서 많은 학문적 업적들이 이루어졌는데 이즈음의 학문적 대세는 다윗시대의 노래를 포함하여 주로 포로기 전후시대에 이루어진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형태의 시편이 만들어진 것은 마케베오 시대 이전인 기원전 약 200여년 경으로 추정을 하고 있고요. 

시편 전체는 5권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는 토라 곧 모세오경의 다섯이라는 숫자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제1권(1-41편)은 인간의 행복, 타락, 및 회복에 대한 내용이고, 제2권(42-72편)은 이스라엘의 파멸과 구속(救贖)에 대한 내용이고, 제3권(73-89편)은 성전 중심의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4권(90-106편)은 광야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5권(107-150편)은 말씀 중심의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주제와 내용에 맞추어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로는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 1862 – 1932)과 그의 제자인 모빙켈 (S. Mowinckel, 1884 -1965)을 꼽는답니다. 

궁켈은 시편을 찬송시, 대관식의 시, 민족 탄식시, 제왕의 시, 개인의 탄식시, 개인의 감사시 이렇게 여섯가지 주제로 나눈답니다. 

그는 개인적인 성격의 탄식과 애원이 들어있는 유형의 시가 시편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속하는 시들을 다음과 같이 꼽고 있습니다. 

제1권 3,5, 6, 7, ,13, 17, 22, 25, 26, 27:1-14, 28, 31, 35,38,39

제2권 42, 43, 51, 54, 55, 57, 59. 61, 63, 64, 69, 70, 71

제3권 86, 88

제4권 102

제5권 109, 120, 130, 140, 141 

모두 40편에 달하는 이 시들은 모두 어떤 절박한 상황 아래 놓인 자신의 처지와 아픔들을 토로하며 구원을 기다리는데, 그 기다림은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으며 반드시 감사가 뒤따르는 것들입니다. 

시편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접고, 지혜운동의 결과물들인 지혜문학서들(잠언, 전도서, 욥기, 아가 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전야(前夜) – 중간사 7

(당신의 천국 – 일흔 두번 째 이야기) 

그 주변 이방인들은 유다인들이 제단을 다시 쌓고 성소를 복구하여 전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자기네들과 함께 살고 있던 야곱의 후손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유다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유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혀 오던 에사오의 자손들을 에돔의 아크라바테네에서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고 굴복시킨 다음 많은 전리품을 빼앗았다. – 마카베오상 5 : 1 – 3, 공동번역에서 

유다 마카베오와 그를 따르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난 뒤 이들이 벌여 온 전투의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껏 벌인 전투들은  광야로 도망가서 살기 위해 벌인 게릴라전이었는데, 이제는 유다의 전통과 신앙을 되찾고 원래 옛날 누리던 영토를 되찾는 정복전쟁으로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들이 탄탄대로를 걷듯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세력이 커갈즈음 셀류커스왕조의 대군이 밀려와 예루살렘성에 가두고 포위하여 전멸의 위기에 놓입니다. 

마사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왈 풍전등화격이었던 마카베오군대를 살린 것은 셀류커스왕조의 왕위 다툼이었습니다. 마카베오 혁명을 유발시켰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자 셀류커스왕조은 극심한 후계 쟁탈전에 휩싸입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셀류커스왕조의 군대들은 평화협상을 제의합니다. 

협상안은 “앞으로 내정 간섭 않겠다. 유대교의식을 억압하는 법령들은 철폐하겠다.대 제사장은 온건한 헬라주의자인  엘리아킴(헬라어로는 알키무스)으로 세운다. 유다 마카비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마카베오는 이 협상안을 거절하지만 종교적 전통을 지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었던 하시딤 일파의 주장에 따라 이 협상안을 받아드리게 됩니다. 

양쪽 모두 위기를 넘긴듯 했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셀류커스왕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였던 엘리아킴(알키무스)대제사장은 마카베오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하시딤일파를 처형해 버립니다. 

그제서야 마카베오가 옳았다는 생각으로 다시 뭉친 유다 독립군들의 재항거 운동이 벌여지는데,  재진압에 나선 셀류커스왕조의 의해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를 이어 동생인 요나단이 독립군 대장이 됩니다. 

요나단 역시 형과 아버지의 용맹을 이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새롭게 독립군의 세를 불리고 있을 즈음 , 셀류커스 왕조는 내분에 다시 휩싸이게 됩니다. 더더구나나 신흥 제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로마가 셀류커스왕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제국들이 다투고 내분에 쌓인 틈을 타서 요나단은 유다의 정치와 종교의 모든 권한을 쥐고자 유다의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는데, 이 일이 유다의 종파 분열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전통적 율법으로 보자면 레위지파의 아론계론이 대제사장직을 이어가야 하는데(비록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혁명의 주체였던 유다 마케베오나 그의 동생 요나단은 유다지파였답니다. 

게다가 왕권 다툼에 빠진 셀류커스 왕조는 여러 세력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각기 다른 세력 어디에 선을 대고  완장을 차느냐에 따라 유대 종파가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우선 “이꼴 저꼴 다 보기싫다, 우린 야훼 하나님 신앙만으로 뭉쳐서 우리끼리 살겠다.”며 동굴을 파고 들어가 자신들만의 규율대로 살게되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들이 사해문서 또는 쿰란문서를 남긴 에세네파입니다.  약 250여년 동안 이 집단의 전통이 유지되며 이어진답니다. 

두번 째는 비록 대제사장의 승계권은 잃었을지라도 전통인 종교 귀족 계급들이 뭉쳐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됩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부터 내려온, 또한 바벨론 포로 후기부터 세를 불려온 사독계열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로 사두개파입니다. 

세번 째는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의 후예인 바리새파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그들 나름대로의 노선과 신앙을 중심으로 뭉친 이런 종파들이 생기고  뭉쳐서 후대까지 기록과 이야기들을 남기게 되지만,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답니다. 예수시대에 바리새파의 인원이 대략 6,000여명, 에세네파는 약 4,000여명 정도로 추정되는 바, 귀족계급인 사두개파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수많은 유대인들과 모계나 부계로 유대의 혈통을 이어온 사람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거나  외국에 나가 살던 이들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에 매어 살던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무리가 크게 존재하고 있었겠지요. 새로운 시대는 바로 이들과 함께 열리게 된다는 점 기억하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이렇게 유다 마카베오의 형제들이 권위를 이어가며 독립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정치 종교적 독립을 이루며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하스몬왕조라고 부른답니다. 

하스몬왕조는 시리아 헬레니즘 왕국인 셀류커스왕조가 저물고 로마왕조가 새롭게 들어서는 때에 복잡한 정세와 맞물려 위태위태한 독립왕국을 이어갑니다. 그 끝무렵에 헤롯대왕의 이름이 나오게 된답니다. 

이제 예수를 맞이하는 신약시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중간사 옛날 이야기는 마치고, 그 무렵 바벨론포로 해방기에서 마카베오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사이에 이루어진 성경책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먼저 시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축제 – 중간사 6

(당신의 천국 – 일흔 한 번 째 이야기) 

셀류코스가 죽고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가 그 왕위를 계승했을 때에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부정한 수단으로 대사제직을 손에 넣었다.   야손은 왕을 알현하고 은 삼백 육십 달란트와 또 다른 수입원에서 팔십 달란트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왕이 자기에게 경기장을 건축할 권한과 청년훈련소를 세울 권한과 예루살렘에 안티오쿠스 청년단을 결성할 권한을 준다면 백 오십 달란트를 더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왕은 이것을 승낙하였다. 야손은 왕의 승낙을 받아 직권을 쥐자마자 자기 동족들의 생활을 그리이스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 마케베오 하 4 : 7 – 11, 공동번역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식민지배가 이어오는 동안 유대인들이 식민지배를 참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정통치권을 인정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예배 의식과 전통을 인정한 식민지배 제국과 적절한 타협을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셀류커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의 신앙과 전통이 깡그리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제사장 자리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자리로 변하였고, 야훼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은 그리스 제우스 신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조차 그리스 이름인 안티오키아라고 바꾸려하는 움직임까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의 전통들과 신앙은 모두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철저히 헬라문화를 받아드리는 것만이 팔레스타인과 유다가 선진화 되는 길이라는 강요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헬라문명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고 유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자에게는 죽음이 대가로 따르는 강요였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이하면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시대의 물결을 맞이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결치는대로, 세월이 흐르는대로 그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 또는 평생 노예가 되는 길이라도 하더라도 생각없이 묻혀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지요. 

또한 그 변화에 대해 목숨 걸고 항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을 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보았지만 그 세가지도 강도의 세기와 그 길을 선택한 까닭에 따라 수많은 작은 종파들로 또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뭐 멀리 갈 것 없지요. 다가오는 새해는 갑오년(甲午年)입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갑오 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딱 120년되는 해입니다. 그 무렵부터 일기 시작한 한반도의 수많은 종파들이 있답니다. 친로, 친청, 친일, 친미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적극적 친일파, 소극적 친일파 등을 비롯하여 민족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공산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등 다양하게 시대에 대응하는 무리들이 일어났듯이 말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세류커스왕조의 헬라화 정책의 전면에 나서서 유다의 전통인 야훼 신앙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완장을 찬 앞잡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항하여 유대의 전통과 야훼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건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이였고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아들 다섯을 둔 마따디아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 양반이 바로 새롭게 세워지는 유다왕국의 시조가 되는 셈입니다. 

헬라신전에 머리를 조아린 동족을 때려 죽이고, 헬라 신전에 예배를 강요한 왕의 사신까지 때려 죽인 마따디아는 다섯 아들들과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함께 광야로 피신을 합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에서 게릴라전으로 항쟁을 합니다. 셀류커스의 군대를 피해 다니면서 틈을 보아가며 적군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게릴라 전술로  이름을 떨치게 되고, 그의 휘하에는 날이 갈수록  항거하는 유대인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그러데 이 무렵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이 지켜내려 했던 신앙과 전통에 대한 신념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 때의 일이 마카베오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이 광야로 피해 가서 숨어 살고 있다는 보고가 다윗의 성 예루살렘에 있던 (셀류커스)왕의 부하들과 군사들에게 들어 왔다.  그래서 큰 군대가 그들을 쫓아 나섰다. 그들이 있는 곳에 다다라 맞은편에 진을 치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 이젠 그만두고 나와서 왕명에 복종하여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왕명에 굴복해서 안식일을 더럽힐 수는 없다.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돌을 던지거나 자기들의 피신처에 방벽을 쌓거나 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없는 우리를 죽였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적군이 안식일을 택해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처자와 가축과 함께 고스란히 죽어 갔고, 죽은 사람은 천 명이나 되었다.” – 마카베오상 2 : 31 – 38 

적군의 공격 앞에서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전혀 대항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따디아는 비록 안식일일지라도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는 맞아 싸운다는 계율을 내린답니다. 그리고 이 무렵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의 전통을 경건히 받들어 지키는 무리들이 마따디아 무리와 합세를 하게 됩니다.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무리가 바로 바리새파의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Hanukkah-Dinner-1

마따디아가 죽고 그의 아들 가운데 유다 마카베오(마카비)가 그를 계승하여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마카베오 역시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셀류커스의 왕 에피파네스는 처음에는 이들 세력을 우습게 보고 소수의 병력들을 보냈지만 연전연패하자 자신이 제일 신임한  최강의 군대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야간기습 전략으로 이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맙니다. 그 기세를 몰아 마침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때는 기원전 165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이 날로 부터 여드레동안 유대인들의 축제가 연이어 벌여지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바로 하누카(Hanukkah) 축제입니다.

임계점(臨界點) – 중간사 5

(당신의 천국 – 일흔 번 째 이야기) 

몹씨 추운 겨울날입니다. “춥다”의 반대말은 “덥다”입니다.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일에는 반대되는 말이나 개념들이 있습니다. 크다와 작다, 잘한다와 못한다, 참이다와 거짓이다 등등 말입니다. 

그럼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요? 전제주의나 독재주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종종 그 반대 개념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고  말하거나 글을 쓰는 분들을 만날 수가 있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반대 개념은 자본주의겠지요. 

오늘날 한반도 남북이 겪고 있는 가장 큰 혼란과 슬픔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일겝니다. 전혀 엉뚱하게 제 멋대로 자신과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이런 개념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북쪽은 아무리 자신들의 이름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넣고 외쳐 불러보아도 그들이 민주주의 공화국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거의 드물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한, 남쪽 사람들 99.99999…%는 북은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북은 그저 전제주의 독재국가일 뿐입니다.(남쪽 법으로는 국가라고 인정을 안하지만 국제법으로는 분명 국가임으로) 

남쪽 역시 아무리 민주주의 체제라고 말하여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랍니다. 도대체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른 생각과 사상들을 서로 인정하고 토론하고, 그 과정을 통해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도 하고, 잘못되면 다시 그 잘못을 인정하고 토론하고 다시 묻고 하는 과정을 용인하는 것 아닐까요? 나와 다르면 무조건 종북인 나라는 결코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아이고 제 이야기가 왜 이쪽으로 흘렀을까요? 

복지 이야기 하려다 이렇게 되었답니다. 구약성서 전체를 일관하는 야훼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평등한 복지”라는 신앙이 있답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빈부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부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반드시 돌보아야만 한다는 “복지”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신앙고백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일에 반드시 오고 가는 것은 “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 문제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갈리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국가권력이 이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하는 잣대에 따라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로 갈리면서 그 성패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경험해 온 결과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한 것이고요, 자본주의 역시 아직은 시험중이고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합된 형태의 국가들이 새로운 문제 해결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인 것 같지요. 

성서의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길에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으시는지요? 

바로 성서가 던지는 이 질문 앞에 우리들이 서 있기 때문이랍니다. 

팔레스타인과 유다의 새 주인이 된 셀류커스왕조는 이전 왕조였던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부정하는 뜻으로 조세 감면 정책을 폈답니다. 

세금을 거두어 드리지 않는 정책으로 과연 식민지를 지배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저 식민지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거짓이었을 뿐이었답니다. 일시적으로 시행했던 이 정책으로 셀류커스왕조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더더군다나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세력이었던 로마의 도전 앞에 봉착한 셀류커스왕조는 급격한 정책의 변화를 꾀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식민지의 재산을 강탈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에피파네스라고 불리우는 안티쿠오스 4세가 등극하면서 이러한 정책이 강력하게 진행됩니다. 

이 지점에서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셀류큐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 세력이 배포가 맞는 일이 벌어집니다. “돈이 최고다.”, “우리끼리 잘 살아 보자”라는 정신에서 서로 배포가 맞은 것입니다. 

이들이 첫번째로 벌인 일이 그리스 올림푸스산의 제우스신과 예루살렘의 야훼 하나님은 하나라는 신앙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었습니다. 기원전 174년에 야손이라는 사람이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산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세력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대인들의 신앙과 제사의식을 무너뜨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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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일을 성서 외경인 마카베오(마카비)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안티오쿠스왕은 온 왕국에 영을 내려 모든 사람은 자기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방인들은 모두 왕의 명령에 순종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왕의 종교를 받아 들여 안식일을 더럽히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쳤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본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왕은 그의 온 왕국에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고 국민을 감시할 감독관들을 임명하고 유다의 여러 도시에 명령을 내려서 각 도시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게 했다.   많은 유다인들이 율법을 버리고 그들에게 가담하여 방방곡곡에서 나쁜 짓이 마구 저질러졌다.  그 밖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아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 마카베오상 1 : 41 – 53, 공동번역에서 

철저한 자기부정의 길을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견디어낼 수 있는 인내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사백년 가까운 식민지배를 벗어나 종교적 신앙 전통을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독립을 부르짖고 싸우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일의 계기였답니다. 

이제 새로운 유대왕국이 그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라는 예수시대의 파당들이 만들어진 때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권력 – 중간사 4

(당신의 천국 – 예순 아홉 번 째 이야기)

권력 특히 정치권력의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로 먼저 있었던 권력에 대한 거부나  완전 부정이라는 면을 들 수 있습니다.  일테면 미국의 부시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Clinton이라는 말은 그런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Roh,  곧 모든 일은 노무현 전대통령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일이 있었지요. 비단 이명박 전대통령만의 일은 아니였지요.  그의 도가 넘는 반노(反盧)정책을 전적으로 이명박이라는 개인 탓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랍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랍니다. 

아무튼 정권이 바뀌면 일단 전임 정권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습니다. 전임 정권에서 쌓여 온 악화된 민심(民心)들을 푸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새 정권의 힘(동력動力)을 얻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지요. 박정희는 제껴놓고, 이후 권력승계가 선거에 따라 이어져 온 역사만 본다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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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고요, 김영삼은 전과 노 두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고요, 김대중은 워낙 다들 적이였거니와 전임이었던 김영삼은 이미 정리하지 않아도, 아니면 그걸 다 밟으면 제 목 날아갈까보아 두리뭉실, 노무현도 김대중을 정리했지요. 남북관계의 돈문제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신기한 게 박근혜랍니다. 통상 오년 임기 중 첫 일년 안에 이런 전임에 대한 거부 또는 부정의 정책들이 쏟아지는 게 정상인데, 제가 보기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권 변화사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그녀의 인물 됨됨이가 아주 크거나 아니면 이제껏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민족들이 보아 온 정권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는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이해 못하는…그게 되어야 민주주의인데…)

다만 제 생각을 덧붙인다면 지금 권력의 중추인 김기춘이라는 이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 말이었다지요. “그럼 우리는?” – 이 질문을 던진 이가 권력에 중추에 있다는 말은 자기 식으로 정리해 보겠다는 뜻? 그 정도는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북의 장성택과 김정은 뉴스는 이번 주 미국 뉴스 가운데도 손꼽히는 메뉴 가운데 하나였지요. 마치 미개 문명 세상 소식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남이나 북이나 아직 멀었지만,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자면 여기까지 온 것도 예사로운 일만은 아니랍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하나님 나라를 한 곳에서 만남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나라를 먼저 찾아갈 일이기에 이만 접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팔레스타인 유다 땅의 모습도 똑 같았답니다.  Anything But Ptolemaios 였답니다. 왕조가 바꾸자 전임 왕조의 반대로만 하면 다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시아 일대의 권력을 장악한 시리아계 헬레니즘 왕국인 세류커스왕조는 전임 권력이었던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부정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당근을 던집니다. 전임 왕조는 세금을 많이 매겼지만 우리는 아니다라는 정책을 폅니다. 셀류커스 왕조의 주인인 안티쿠오스 3세는 예루살렘의 전 주민의 세금을 3년간 면제하고 성전과 성전관리를 하는 사제들의 세금은 영구 면제한다는 칙령을 발표한답니다. 

유다 및 예루살렘이 쌍수를 들어 새로운 식민 지배자인 안티오쿠스 3세의 셀리큐스왕조를 반겼답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 돈 더 안내도 된다는데 말입니다. 

이게 사단의 빌미가 된답니다. 당연히 얻게 되리라는 당근 대신 채찍을 유대인들이 맞게 되는 것이지요. 

뭐 그 때나 지금이나…. 

또 쌓인 눈을 치우고나니… 내일 잇지요.